이민족 풍속의 일소는 탁발씨처럼 해야 한다 발언록








예부상서(禮部尙書) 호영(胡濙) 등이 상주했다.

"저번에 산동(山東) 좌참정(左參政) 심고(沈固)가 말하기를, 중외(中外) 관사(官舍)의 군민(軍民)들이 모자를 쓰거나 옷을 입는 것이 오랑캐 제도의 풍습이었습니다. 말하고 궤배(跪拜)하는 것도 오랑캐의 풍속에서 배웠으며, 갓끈을 드리우고 깃털로 장식했는데 정수리는 뾰족한데다 소매는 짧습니다. 중국 사람이 견융(犬戎)의 풍속을 본받아 귀한 것을 망각한 채 천한 것을 따른 셈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옛날 북위(北魏)는 근본이 호인(胡人)이었으나,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후엔 오랑캐 풍속을 금지시켰습니다. 하물며 성상(聖上)의 교화(敎化)와 법도는 지난날보다 높은데 어찌 허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산동 우참정(右參政) 유련(劉璉)도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도찰원(都察院)에 방(榜)을 내도록 명하시어 감찰어사(監察御史)로 하여금 순안(巡按)하여 엄금하게 하십시오."

이를 그대로 따랐다.


- by 명 영종실록(明英宗實錄) 권(券)99 정통(正統) 7년(1442) 12월 3일조(條) 항목에서 발췌



명조(明朝)가 개국한 지 70여년, 북경 천도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경사(京師)와 그 인근에선 관민을 불문하고 몽골풍 잔재가 짙게 횡행하고 있으니, 이를 단속하고 교정시켜 한(漢) 문화의 부흥은 물론 예치와 교화의 모범을 보이시라는 대신의 상소문쯤 되시겠다. 혈통은 선비족 오랑캐 출신이지만 철두철미 중국적인 것을 추구하며 동화된 위나라 효문제도 해냈건만, 탁발씨보다 우월한 정통제 폐하느님께서 걔보다 못할 것은 없다능!

이 정도의 뉘앙스라 보면 이해가 빠를 듯 싶은데, 초원으로 쫓겨난 그 천한 생면부지 오랑캐 떨거지들한테 포로로 잡혀가 풍찬노숙하고, 징검다리 재위 기록까지 세우게 될 줄이야 저 시점에서 누가 상상이나 했으련만은.ㅉㅉ



헤이안 조정의 실권자가 오월국왕에게 보내는 국서 세계사








[오월국에서 파견한 상인] 장곤(蔣袞)이 재차 이르러 서찰 하나가 전달되었습니다. 열어서 봉독(捧讀)하니, 마음은 놀랍지만 감사드립니다. 필체와 말이 중첩되어 살펴보는 얼굴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 할 수 있겠습니다. 장곤 등이 [太宰府의] 객사에 머무는 동안 부족하나마 위문해주는 것을 더했습니다만, [京都에서] 변경[邊城, 太宰府]까진 먼 길이라 공경함이 간략할까봐 걱정됩니다. [遣唐使 파견이 중지된 이래] 지금 왕래하는 것은 벌써 끝났고, 돌아오는 배들이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을 기운이 서늘합니다. 삼가 생각컨대 대왕(大王)께서는 나란히 승리하는데 행동하며 다스리셨으니, 이는 조상들이 보낸 것입니다. 또한 토산품을 선사해주셨던데, 기쁘게 받겠습니다만 외국과 통교하는 것은 이미 우려스러운 일이고, 장중(掌中)에 어찌 물건이 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먼 곳의 뜻을 거절하기란 곤란한지라, 인내하고 보내주신대로 받겠습니다. 따로 답신(答信)을 올리겠으니, 도달하면 마땅히 거두어 주십시오. [일본국은] 한 평생 바다에 막힌데다, 구름과 파도가 수 겹으로 둘러싸였습니다. 남쪽에서 노닐며 북쪽으로 향하는데 가을 기러기한테 춥고 따뜻함[寒溫, 소식과 인사를 교환함]을 의탁하는 것은 어렵겠으나,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흐르니 단지 새벽녘 달을 우러러 보며 부치겠습니다. 게다가 지난 4월에 저는 좌상부(左相府)로 승진했습니다. 이제 봉제(封題)하고 보면서 먼저 전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좌우지간 바라건대 의심하거나 지체하지 마시고, 장곤 등에게 칙유(勅諭)하여 돌려보낼 터이니, 삼가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오월왕(吳越王) 전하(殿下), 사금(沙金) 2백냥. 우(右) 비록 매우 보잘 것 없으나, 응당 땅에서 소출된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작은 마음을 표합니다.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천력(天曆) 원년(947) 윤(閏) 7월 27일, 일본국 좌대신(左大臣) 후지와라노(藤原) 아손(朝臣) 사네요리(實賴)



으니의 진짜 방중 배경은 이런거겠지 국제, 시사








판문점 포토쇼를 앞둔 이 시점에서 평양의 체고조넘 돼지가 전격 방중한 것 가지고 북중관계 개선으로 자기 몸값을 올리기 위한 전략적 수라던지 '패싱' 단어가 입에 달라붙은 기레기들이 차이나 패싱 국면을 전환시키려는 시진핑의 대미 맞대응이라며 뇌피셜 보도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애초에 으니가 이니의 어줍잖은 운전대 중재자론에 보조를 맞춰준 배경부터 복기하자면 저런 말은 꺼내지도 못하지.ㅋ 지네들 스스로 실토하듯이 미제의 주도로 반(反)공화국 압살 책동의 제재 연발타가 터지면서 숨이 넘어갈 판국인데, 어벙하지만 일편단심 체고조넘에 대한 연심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던 남녘의 주사파 정권이 그나마 유일하다시피 돌파구 구멍이 되어줄 낌새가 보이니깐 이를 활용하려 했던거임. 과거 DJ-노무현의 선례도 있겠다, 주특기가 화전양면 전술이라고 그쪽 방면엔 도가 큰 애들이잖아?

그래서 이니와 정의용을 전령으로 삼아 셔틀 외교부터 전개해 놓고, 남북대화는 물론 미북대화 및 한국전쟁 종전과 평화협정까지 염두에 둔 가교라는 거창한 기만적 이미지를 두르면 한반도 평화 공세전의 명분론을 선점하거니와, 국제 여론을 움직임으로써 트럼프도 견제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던거고. 비핵화는 '선대의 유지'였다며 박제된 지 애비 팔아먹는 립서비스까지 곁들이면 효과 또한 금상첨화일 것 같잖아.ㅋ 대화 모드로 들어갈 경우 남북회담을 넘어 미북회담 성사까지 실무 접촉이네, 의전 조율이네 따위의 절차 밟느라 수개월은 족히 소요될 터인데, 그 사이 이니랑 판문점에서 회동해 사진 찍고, 문화 교류나 이산가복 상봉,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재개 같은 이벤트들을 쇼부치면서 남한한테서 최대한 빨아먹는 한편 ICBM 기술 완성에 박차를 가할 시간도 벌자는 속셈이었을거다.

결국 저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 미국 중간선거가 예정된 11월까지 잘만 버텨낸다면, 국내 정치의 리스크를 짊어진 트럼프조차 예전 부시처럼 한 발 양보하고 나올거라 기대한 것이 으니의 전략이었는데, 왠걸 스텝이 꼬이기 시작함. 평양의 너스레가 상투적으로 써먹은 위장평화 기만술이란 사실을 간파한 트럼프가 여기에 맞불을 놓아버린거지. 즉, 정의용이 전달한 '비핵화' 용의 전언을 트럼프가 편의적으로 해석하고선 으니랑 이니의 장단에 구색 맞춰주는 척 하면서 5월내 시일로 미북 정상회담 개최하고, CVID를 의제삼아 논의할거라 언명하는 바람에 사단이 나버렸음. 기왕 회담할 바에야 시간 끌지말고, 허심탄회하게 본론부터 들어가 해치우겠다고 트럼프가 바람을 넣는데, 동시에 핵시설 개방-사찰이 수반된 CVID 전제가 충족되지 않을시엔 제재 완화도 대화도 없을거라 못을 박아버렸다.

으니 입장에선 굉장히 난처해진거임. 앞서도 말했지만 본래 남한 특사단을 전령으로 앞세워 백악관에 회담 의향을 타진한 건 여론전을 의식한 시간벌기용 립서비스에 불과했으나, 이걸 받아친 트럼프의 장계취계(將計就計)에 걸려 공은 다시 평양으로 넘어와버렸고, 데드라인까지 뒤집어쓰게 된 형국이라는 것. 거기다 타이밍 맞춰서 국무장관과 NSC 보좌관을 말 걸기조차 무서운 초강경파로 물갈이해 미국의 외교-안보 라인이 2차대전 이후 전례없는 매파들 일색으로 채색되었다는 건 으니더러 사실상 신체 포기 각서에 사인하지 않는 한 어떠한 꼼수도 받아주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계산에 두지 않았던 사태에 직면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간 제약마저 더욱 촉박해진 으니로서는 이제 와서 성질 난다고 로켓 불장난 재개할 수도 없는 노릇임.

그랬다간 삐용챙 올림픽 때부터 난리 부르스쳐왔던 평화 공세는 물론 제재 압살을 비껴갈 일말의 구멍도 사라짐을 의미할 뿐이고, 화염과 분노의 폭탄으로 휴전선 이북 좀 샤워시켜 달라며 미국한테 자원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잘난 집무실 책상 위의 단추를 누르고 싶다면야 눌러보시라지?(폭소) 아무튼 상황이 이 지경으로 꼬여버리니깐 요 며칠간 미국이랑 남한 디스한 노동신문 칼럼 따위나 올리면서 방구석 여포마냥 씩씩거리고 자빠졌었잖아? 필시 정의용이 방미한 직후부터 으니는 얼빠진 이니를 메신저로 고용한 바람에 배달 사고를 내버린 실수를 자책하면서 이불킥하고도 남았을테고. 그렇다고 멀뚱히 손을 놓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부랴부랴 북경에다 SOS 쳐서 목전의 난관을 돌파하고자 시진핑한테 읍소하려 했던 것이 이번 방중의 진정한 배경 요인이자 포인트라고 봄.

이번 방중 관련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특별열차에 누가 탑승했던 간에 무언가 쫓기는 듯한 인상을 받았지만, 집권 이래 출국 경험이 전무한 으니가 설마 내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평양을 비워둘거라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음. 북한 권부의 전면에 등장하고서 본인 직함으로 나선 최초의 해외 나들이 길이 저렇게 [북경 체류 기준으로] 당일치기로 그쳤다는 점이나, 당초 지난주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었던 중국의 양제츠 특사가 29일로 방한 시기를 두 차례 연기시킨 사실을 고려할 때 북경에서조차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으니의 방중 의사를 평양으로부터 통보받았고, 시진핑의 초청은 겉치레 형식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함. 문제는 중국도 미국의 전방위적인 통상 압박과 One China 원칙 흔들기를 연계시킨 공세에 제 코가 석자인 실정인 만큼 으니가 원하는 대답을 주었다기엔 글쎄?

어제도 북경까지 가서 결국 한다는 소리가 단계적 비핵화네, 선대의 유훈 팔아먹던데 이걸 시시각각 체크하고 있을 천조국 신임 콧수염 군기대신(軍機大臣) 성님께서 어떤 로드맵을 가다듬고 계실지는 뭐 상상에 맡기겠음.ㅋㅋㅋ



송나라 도성의 명물이었던 전당강 조수 관람 세계사








임안(臨安)의 풍속은 사계절 모두 사치스러웠는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놀고 즐겼다. 서쪽으로는 호수[=西湖]의 풍광이 아름다웠고, 동쪽으로는 전당강(錢塘江)의 조수(潮水)가 볼만하였는데, 이 모두 훌륭한 경관(景觀)이었다. 매년 음력 8월중에 조수가 평상시보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때가 있었는데, 도성(都城, 杭州) 사람들은 11일부터 이를 구경하는 자가 있었다. 16~18일경이 되면 성에서 나와 수레와 말들로 북적거리니 18일이 가장 붐볐고, 20일이 되면 조금 줄어들었다. 18일에는 안무사(按撫使)가 교외로 나가 관할 수군(水軍)을 열병(閱兵)했다. 묘자두(廟子頭)에서 육화탑(六和塔)까지 집집마다 높은 장소는 모두 황실의 인척[貴戚]이나 내시들에게 빌려져 조수를 구경했다.

예전에 백낙천(白樂天)이 <영조(詠潮)>에서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아침 조수 물러갔나 했더니 저녁 조수 밀려오고, [早潮纔落晩潮來]
한 달에 밀려왔다 밀려가길 예순 번이나 하네. [一月周流六十迴]
시간만이 아침 저녁으로 바뀌는 것 아니고, [不濁光陰朝復暮]
항주에서 늙는 나도 조수에 밀려간다네. [杭州老居被潮催]



또 소동파(蘇東坡)는 그의 <영중추관야조(詠中追觀夜潮)>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하늘의 달 동그랗게 되었겠지, [定知玉兔十分圓]
서리 바람 일어 9일 동안 싸늘해지는 것을 보니, [巳作霜風九月寒]
말 전하게나, 두터운 문 잠그지 말라고. [寄語重門休上鑰]
밤에 이는 조수(潮水) 달빛 아래 보려한다네. [夜潮留向月中看]

1만명이 북치고 함성을 질러 오나라 사람들을 떨게 하는 듯하고, [萬人鼓噪懾吳儂]
왕준(王濬)이 장강에 수많은 군선(軍船)을 띄워 놓은 듯하네. [猶似浮江老阿童]
조수의 높이는 얼마나 되려나? [欲識潮頭髙幾許]
월산(越山)이 온통 파도 거품 속에 있다네. [越山渾在浪花中]

강가의 이 몸 세상과 떨어져 [江邊身世兩悠悠]
오래도록 창파와 함께 늙어가고 싶네. [久與滄波共白頭]
조물주도 사람이 쉬이 늙어감을 알아. [造物亦知人易老]
일부러 강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네. [故教江水更西流]

오나라 아이들 커가면서 큰 파도 우습게 여겨 [吳兒生長狎濤瀾]
이익을 탐해 자신의 목숨도 가벼이 여긴다네. [冒利輕生不自憐]
동해(東海)가 만약 밝은 군주의 생각을 알고 있다면 [東海若知明主意]
응당 바다를 뽕나무 밭으로 만들었을텐데. [應教斥鹵變桑田]

강신(江神)과 하백(河伯), 둘 다 하잘 것 없는 벌레라도 된다는 듯, [江神河伯兩醯雞]
바닷귀신이 동쪽에서 와 무지개를 토하네. [海若東來氣吐霓]
어찌하면 부차(夫差)의 물소 가죽옷을 입은 궁수를 얻어 [安得夫差水犀手]   
3천대의 강노(強弩)를 쏴 조수를 가라앉힐 수 있으리오? [三千強弩射潮低]



임화정(林和靖)은 <영추강(詠秋江)>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넓고 아득한 모래톱에 해오라기 잠들고, [蒼茫沙嘴鷺鷥眠]
물거품들 흔적없이 푸른 하늘로 스며드네. [片水無痕浸碧天]
가장 아끼는 것은 비를 맞은 후의 갈대꽃. [最愛蘆花經雨後]
한 줄기 연기, 어선에서 밥을 짓는구나. [一篷煙火飯魚船]



치평(治平) 연간(1064~1067)의 군수(郡守)인 채단명(蔡端明)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하늘은 조수를 말아 올려 해동(海東)으로 나가는데, [天卷潮回出海東]
인간 세상에 무슨 대단함을 다툴 만한 것이 있단 말인가? [人間何事可爭雄]
1천년의 낭설, 가죽 부대[鴟夷, 夫差]가 격노하여 [伍子胥를 전당강에 버리고] [千年浪說鴟夷怒]
조수 한 번 밀려드니 발해(渤海)가 다 비었을 것만 같네. [一汐全疑渤澥空]

조용한 파도 소리 밤에 취침할 때 듣기 좋은데, [浪靜最宜聞夜枕]
높이 솟는 파도는 반드시 가을 바람 불어야 시작된다네. [崢嶸須待駕秋風]
세상의 이치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정말로 알 수 없어 [尋思物理真難到]
달 따라 차고 져도 역시 통달할 수 없다네. [隨月虧圓亦未通]



그곳 항주 사람들 가운데 목숨이 귀한줄도 모르는 무뢰배들이 있어서 커다란 채색 깃발[彩旗]이나 조그만 청량산(清涼傘), 붉고 푸른 조그만 산(傘)들을 각각 색깔 있는 수(繡)를 놓은 단자(緞子)에 묶어 장대에 가득 매달고, 조수가 해문(海門)으로부터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10명이나 100명씩 무리를 지어 깃발을 잡고는 물 위에서 헤엄을 쳤다. 이는 오자서(伍子胥)가 조수를 희롱한 것을 영접하는 유희(遊戲)로 어떤 이들은 손발에 다섯 개의 작은 깃발을 잡고 조수가 들어오면 그 위로 떠다니면서 희롱하기도 했다. 앞서 치평 연간에 군수였던 한림학사(翰林學士) 채단명이 그들 중에 왕왕 물에 빠져 죽는 이가 있는 것을 보고 <계약농조문(戒約弄潮文)>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성(斗星)과 우성(牛星)의 밖, 오월(吳越)의 가운데 이곳이 바로 파도가 가장 험한 곳으로 가을 바람을 타면 기세가 더욱 대단하다. 이곳 습속(習俗)엔 조수를 관람하며 노니는 것이 있다. 그들 가운데 수영을 잘하는 무리들이 다투어 조수를 희롱하는 유희를 벌여 부모께서 주신 신체를 물고기들도 그 깊이를 모르는 심연(深淵)으로 던지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때때로 빠지면 영혼이 영원히 물속에 잠기니 처자식이 물가에서 바라보며 울부짖는다. 생명이란 유한한 것이지만, 어찌하여 천명(天命)을 다하려 하지 않는가? 죽음에도 조상(弔喪)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륜을 버리는 것이다. 나의 참을 수 없는 마음을 헤아리고, 너희가 가족을 잃을 수 있음을 경계하길 바란다. 올해의 조수 구경은 평상시처럼 하지만, 그 군인이나 백성 중에 감히 조수를 희롱하는 자들은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이로부터 관부(官府)에서 [조수 위에서 곡예하는 행위를] 금지시켰으나, 여전히 막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간농조시(看弄潮詩)>를 지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전당강 조수를 희롱하고 저녁에 성(城)으로 들어가는데, [弄罷江潮晚入城]
붉은 깃발은 바람에 살랑거리고, 하얀 깃발 또한 가볍게 나부끼네. [紅旗飐飐白旗輕]
파도를 감수하면서도 고꾸라지지 않았기에 [不因會吃翻頭浪]
천가(天街)에서 북소리 연주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네. [爭得天街鼓樂迎]



그리고 안무사(按撫司, 帥府)에서는 수군을 지휘 ・통솔해가며 수진(水陣)을 열병하였는데, 통제(統制)가 부하들을 감독하여 조수가 오지 않았을 때 강으로 내려가 진용을 갖추고, 깃발을 펼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또한 수중(水中)에서 [군악대가] 북을 치고 피리도 불면서 선두에서 인도하였고, 뒤에는 사령관을 수면으로부터 높이 올리고 배를 좌우 양쪽으로 나누어 배치했는데, 기치(旗幟)들로 선내가 가득찼다. 상등(上等)의 춤추는 창(槍)과 날아오는 화살이 열을 나누어 교전하였고, 포(炮)가 연기를 뿜고 재빨리 적선[敵舟]을 쫓으며, 불화살이 무리를 지어 쏟아져 내려왔다. 적선을 태워 없애고 공(功)을 세우면 징[鑼]이 울리면서 사열이 끝났고, 차등있게 상품을 내렸다.

대개 거가(車駕, 皇上)는 궁중[禁中]에서 행차하여 조수를 구경했는데, 전각 뜰에서 강을 내려다보면 오로지 군대가 강에서 엄숙하게 대오를 갖추고 정렬해 있는 것만이 보였고, 궁궐을 바라보고 대답하는 소리가 마치 천둥과 우레가 치는 듯했다. 나머지 사람들과 내시들은 그제야 그것이 천자[=尊君]를 받드는 예식임을 알았다. 그날 안무사에서는 생례(牲禮) ・초리(草履) ・사목판(沙木板)을 준비하여 조수가 올 때 모두 강에다 제사를 지냈고, 사인(士人)과 서민(庶民)들은 경문(經文)을 많이 던졌다. 이때는 바야흐로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단계(丹桂)의 향기가 휘날리니, 신체가 거듭 안정되고 건강해졌다. 이와 같았으니, 어찌 경치를 접하고 즐기러 나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by 오자목(吳自牧) 箸 <몽량록(夢梁錄)> 4권 '조수 관람[觀潮]'에서 발췌




             서호(西湖) 호반의 광경, 동남 제일의 천당(天堂)에 비견되는 항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경관이다.
             5대 오월국(吳越國)과 남송 1대에 걸쳐 장강 델타 유역의 중핵으로 번영을 구가한 수향(水鄕)이었다.


             전당강(錢塘江) 전경, 항주만(杭州灣)으로부터 유입된 조수는 도성의 이색적인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조수 범람에 따른 피해를 방지하고자 오월국 시대에 대규모 방조 및 수리 사업이 시행된 바 있었다.
            

             월륜봉(月輪峰) 정상의 육화탑, 송대엔 이곳을 중심으로 전당강 연안까지 민가와 역관이 밀집했었다.
             오월국 충의왕(忠懿王)이 조수의 제압을 기원하며 건립했고, 소흥(紹興) 22년(1152)에 중건되었다.



지존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두 가지 테스트 세계사








이제 우리는 더 나아가 황실 내부 상황을 고찰해야지만 비로소 효종(孝宗)이 결국 황위를 잇게 된 진상을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소흥(紹興) 30년(1160), 고종(高宗)은 효종을 황자로 세우기로 결정할 때 집정 대신들에게 말했다.



"이 일은 짐의 뜻에서 나온 것이지, 신하들의 건의 때문은 아니다.[此事出于朕意, 非因臣下建明.]"



이 말은 진심어린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누구를 황자로 세울지에 관한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실 내부에서 고종의 최후 선택은 그 일과 관계 깊은 주변 인사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핵심 인물 셋이 있다. 첫번째는 장 첩여(張婕妤)로 그녀가 전력을 다해 효종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더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두번째는 헌성황후(憲聖皇后, 吳皇后)로 그녀는 오랜 시간 조백구(趙伯玖)가 황위를 계승하게끔 노력해왔다. 주밀(周密)의 <제동야어(齊東野語)> 11권 '고종이 태자를 세우다[高宗立儲]' 조목(條目) 기록이다.



효종과 은평군왕(恩平郡王) 거(據, 伯玖가 개명한 이름)는 함께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효종은 영특하고 조숙하여 [당시 재상이었던] 진회(秦檜)가 그를 꺼려했다. 헌성황후 역시 조거를 [황위 계승 후보의] 위주로 삼았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중요하다. 이는 남송대 이래의 전술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신뢰도가 매우 높다. 세번째 인물은 소흥 12년(1142), [정강의 변 당시 끌려갔다가] 북방에서 귀환한 현인태후(顯仁太后, 韋氏), 즉 고종의 생모였다.

고종은 효종을 황자로 세울 때 재상 탕사퇴(湯思退)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이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전적[載籍]에 실린 제반 내용을 깊이 숙고해보니, [후궁을] 왕후와 동렬에 두고 [서자를] 적자에 필적하게 하는 것과 정부와 나라를 둘로 나누는 것이 혼란의 근본임을 알고 있다. 짐이 어찌 그 점을 모르겠는가? 다만, 현인황후께서 아직 그렇게 하고자 하시질 않았기에 지금까지 늦춰왔을 뿐이다."



첫번째 구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항은 소흥 8년(1138)에 나왔던 왕서(王庶)의 발언이 그래도 고종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 구절은 그가 소흥 30년까지 미루다가 비로소 정식으로 태자를 책립했던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고종은 어머니의 소원을 져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죽은 이후[소흥 29년]에야 자신의 결정을 공개할 수 있었다. 현인태후는 어째서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일까? 탕사퇴의 대답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폐하께서는 나이가 한창이시고 하늘이 살펴주실 터이니, 필시 아들을 낳으실 것입니다. 이는 인심(人心)과 관계된 일로서 [아들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陛下春秋鼎盛, 上天鑑臨, 必生聖子. 爲此以系人心, 不可無也.]"



현인태후는 시종일관 고종이 아들을 다시 낳으리라는 희망을 버리려 하지 않은터라, 방계를 들여와 제위를 잇도록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의 세 사람 가운데 효종이 태자로 지명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양어머니인 장 첩여 뿐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소흥 12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나머지 둘은 모두 부정적 요인으로 효종이 소흥 12년 이후 고립무원의 처지로 전락했으리란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현인태후는 고종이 제위를 방계에게 넘겨주는 것에 원칙상 반대했기에 효종과 백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더 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시간을 지연시키는 건 [헌성황후에 의해 양육되고, 지원을 받은] 백구에게 유리했다. 왜냐하면 효종이 연상인데다, 궁중에 들어온 시기도 1~2년 빨라서 본래는 효종이 백구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성황후의 지위는 나중에 높아지는데, 장 첩여 사후 이듬해에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어 그녀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소흥 15년(1145) 백구가 왕으로 봉해지자, 백구는 효종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차지했으므로 헌성황후의 역할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고종이 말한대로 효종에게 제위를 잇게 한 것은 전적으로 '짐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희 역시 이 일을 논하면서 '모두 고종이 스스로 주장'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효종에 대한 고종의 인식 과정이 어떠했는지 추적해야 한다. <계년요록(繫年要錄)> 89권 소흥 5년(1135) 5월 신사일 조목을 보자.



주상은 조정(趙鼎) ・장준(張浚) ・맹유(孟庾) ・심여구(沈與求)에게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아들[孝宗]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궁중에서 마치 신인(神人)처럼 엄숙하다. 짐이 직접 그를 가르쳐보니, 책을 읽음에 아주 잘 외우는 능력을 지녔다.[上嘗以語鼎浚庾與求曰, 此子天資特異, 在宮中儼如神人. 朕親自敎之, 讀書性極强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흥 5년은 백구가 입궁한 지 1~2년이 지나 장 첩여와 헌성이 바야흐로 격렬한 경쟁을 시작한 시기다. 쌍방 모두 전력을 다해 자신의 양자가 고종의 총애를 받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궁중에서 마치 신인처럼 엄숙하다'는 말은 필시 장 첩여 및 주변 인물들이 일부러 퍼뜨린 말로 고종은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짐이 직접 그를 가르쳐보니, 책을 읽음에 아주 잘 외우는 능력을 지녔다'는 발언은 자못 의심스럽다. <주자어류(朱子語類)> 127권 본조(本朝) 1 효종조(孝宗朝)엔 이런 기록이 보인다.



효종은 어렸을 때 지극히 둔했다. 하루는 고종이 나와 조정 신하들에게 '밤에 잠을 못 이뤘다'고 말했다. 어떤 이가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묻자, '어린아이가 책읽는 것을 보니, 2~3백번 반복해도 외우질 못해서 매우 걱정스럽다'고 했다. 어떤 이가 나와서 '제왕의 배움이란 흥망치란만 알면 될 뿐, 처음부터 암기하고 외우는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帝王之學, 只要知興亡治亂, 初不在記誦.]'라고 말했다. 주상의 마음이 그제서야 조금 풀어졌다.



주희의 기록과 고종이 한 말은 서로 충돌하는 만큼 둘 중의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 앞서 인용한 효종의 유년기 상황을 보건대 효종은 분명 '강직하고 어눌한' 유형에 속하여 '지극히 둔하다'는 평가에 부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잘 외우는 능력을 지녔다'는 설은 어디서 나왔던 것일까? 첫째, '이 아들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다'는 표현은 원래 <시정기(時政紀)>에 나온다. 이 글은 정부 문서로 사후에 수식이 가해지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둘째, 어쩌면 장 첩여가 효종을 충분히 교육해놓고, 효종으로 하여금 고종의 면전에서 뛰어난 연기를 발휘하도록 했을 수도 있다. 주희의 기록은 고종이 진상을 발견한 뒤의 반응인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현재 입증할 방도가 없으므로 다만 참고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여하튼 <주자어류>에 보존된 '어렸을 때 지극히 둔했다'는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우리는 고종이 효종에 대해 실망하고 낙담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효종의 '지극히 둔했다'와 백구의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는 표현은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데, 고종이 장기간 결정을 주저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고종은 어째서 효종을 선택했을까? 효종과 백구의 성격이 달랐다는 점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장단의(張端義)는 증거를 하나 제공해준다. <귀이집(貴耳集)> 상권에 이런 기록이 있다.



효종이 잠저(潛邸)에서 은평군왕과 함께 있었는데, 고종은 <난정서(蘭亭序)> 두 편을 써서 두 왕[효종과 백구]에게 하사하고, 그 글자체대로 5백번을 쓰도록 했다. 효종은 7백번 넘게 썼지만, 은평군왕은 끝내 다하지 못했다. 고종은 두 왕에게 각각 궁녀 10인을 하사했는데, 보안군왕(普安郡王, 孝宗)이 예의상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문했다. 사호(史浩)는 '서모(庶母)의 예로써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두 왕이 궁녀를 어떻게 대우했는지 고종이 묻자, 보안군왕은 예로써 대우했고, 은평군왕은 버릇없이 굴었다고 말했다. 대계(大計)는 이런 일로 결정되었다.



이는 분명 태자 자리를 놓고 시행한 두 차례 시험에 해당된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소흥 2년(1132), 고종이 효종과 백호(伯浩) 중의 한 명을 선택하여 궁에서 기르기로 했을 때 가장 마지막에 '다시 자세히 관찰했고', 그 결과 [고양이의 방해에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던] 효종이 남고 백호가 떠나갔다. 위 인용문의 두 차례 시험도 같은 성격을 띠고, 그 결과 효종은 합격이었고, 백구는 낙제였다. 하지만 위의 두 차례 시험은 동일한 시기에 치러진 것이 아니었다. <난정서>를 5백번 쓰게 했던 것이 먼저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비교적 초급 단계의 서법(書法) 훈련이기 때문이다. 궁녀를 하사한 것은 두 사람이 약관을 넘겼을 무렵에 일어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두번째 일과 관련하여 주밀은 <제동야어> 11권 '고종이 태자를 세우다' 조목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일찍이 각각에게 궁녀 10명을 하사했다. 승상 사호는 당시 보안부 교수로서 곧바로 보안군왕을 위해 말을 해주었다. 주상이 왕을 시험하는 것이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그들을 받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보안군왕 역시 동의했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모두 들어오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은평은 궁녀 10명을 모두 범했지만, 보안은 손끝도 대지 않았다.


 
위의 조목은 사호가 '보안부 교수'였다고 언급하므로, 궁녀가 하사된 시간을 대략 추론할 수 있다.

<송사(宋史)> 396권 사호전(史浩傳)을 보자.



소흥 14년(1144), 진사에 합격하여 소흥 여요현(餘姚縣)의 현위(縣尉)로 발령받았고, 온주(溫州) 교수를 역임했는데 군수 장구성(張九成)이 그를 중히 여겼다. 임기가 끝나자 태학정(太學正)으로 제수되었으며,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승진했다. 정기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 '보안과 은평 두 왕 가운데 한 명을 택하여 천하의 소망에 부합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에 고종이 끄덕였다. [중략]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겸 이왕부(二王府) 교수로 제수되었다.



경력을 보면 사호는 진사 합격 후 적게는 7년에서 많게는 10년이 지나 비로소 이왕부 교수가 되었다. 또한 <송사> 신왕전(信王傳)에 의거하면 백구가 소흥 22년(1152) 생부상을 당했을 때 나이가 스물셋이었고, 상기(喪期)가 끝났을 때는 소흥 24년(1154) 11월 정묘일이 된다. 송대의 '삼년상'은 통상 27개월로 계산되므로 그가 복상을 시작한 시기는 필시 소흥 22년 10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종이 궁녀를 하사한 때는 소흥 22년 8월 이전이거나 소흥 24년 11월 이후였겠지만, 지금으로선 결정할 수 없다. 다만 단언할 수 있는 점은 그것이 고종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진 마지막 시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호는 고종을 알현할 때 '보안과 은평 두 왕 가운데 한 명을 택해야 한다'고 특별히 진언했을 것이다. 효종은 <난정서>를 7백번 넘게 베껴 썼고, 게다가 하사된 궁녀를 '예로써 대우했다.'

이런 고도의 자율적 행위는 효종이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게 된 궁극적 원인이었을 것이다. 장단의는 '대계는 이런 일로 결정되었다'고 말했고, 주밀도 '주상의 뜻이 마침내 결정되었다'고 말하는데, 이들의 판단은 실제 정황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고종은 대체 언제 효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결심했을까? 아주 귀중한 사료 하나가 이 문제에 해답을 제시해준다. <계년요록> 200권 소흥 32년(1162) 6월 병자일 조목의 소주(小注)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흥 30년, [효종이] 황자로 세워졌다. 주상은 '짐의 뜻이 평소 결정되었는데, 벌써 9년이 되었다'고 말했다.



소흥 30년에서 9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흥 22년이다. 곧 궁녀를 하사한 시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확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종이 설사 인선(人選)을 이미 결정했었다 하더라도, 소흥 25년이나 혹은 조금 더 늦은 시기에 '다시 자세히 관찰했을' 가능성은 충분이 있다. 다만 '9년'은 정확한 숫자로 그저 대략 말한 숫자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고종의 말은 진지하게 간주되어야 한다. 어쨌든 이처럼 중대한 결정을 어떤 구체적 고려에서 했든지 간에 소흥 22년(1152)이 효종 개인의 생명사와 남송 황권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뒤집어보면 고종의 말은 우리에게 다음 내용을 알려준다. 효종이 입궁 이래 비록 조정 및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이 그가 이미 '준(準)황자' 신분임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직위는 20여년간 시종일관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정세를 놓고 보자면, 고종은 속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현인태후가 서거하기 전까지 그는 감히 자신의 속마음을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효종은 길게는 30여년 동안 줄곧 기대와 좌절감이 교차하는 초조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소흥 12년, 장 첩여가 사망한 뒤에 효종은 궁중에서 고립무원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소흥 25년, 백구가 왕으로 봉해지자 효종의 지위는 아슬아슬해졌고, 한 가닥 희망은 전적으로 고종 1인의 한순간 생각에 달려 있었다.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나가야 고종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 여부가 효종의 중심 과제였다. 효종은 특유의 참을성 있는 성격과 강한 의지, 깊이 침잠하는 정신에 의지하여 비로소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년요록> 184권 소흥 30년(1160) 2월 갑자일 조목이다.



그래서 보안군왕은 궁에서 길러진 이래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미 30년이었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영명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주위 사람 중 그가 기뻐하거나 화난 기색을 본 적이 없었다. 조정에 가서 반열에 들 때, 나아가고 멈춤에 모두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말에 탔을 때에는 오만하게 내려다본 적이 없었고, 평소 수레를 탈 때에도 검약했으며, 매번 경전과 사서로 유유자적했다. 일찍이 부료(府僚)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목소리나 낯빛과 관련된 일에서 경전의 의도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고, 보물과 진귀한 사물에 대해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런 것들을 축적한 일이 없었다.' 말 타고 활 쏘기나 글 짓거나 글씨 쓰는 일이 모두 타인을 뛰어넘었다. 주상이 근신(近臣)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경들도 보안을 보았는가? 근래 골상(骨相)이 일변하여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는 찬양의 언사이긴 하지만, 사실의 핵심을 함축하고 있다. 효종이 30년에 걸친 '마음을 격동시키더라도 본성을 참는다[動心忍性]'는 과정이 여기서 분명한 윤곽을 드러낸다. 인용문 말미에 나오는 고종의 발언, '골상이 일변하여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표현은 자신이 황자로 뽑히게 된 것을 알게 된 효종의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 by 여영시(余英時) 著 <주희의 역사세계> 12장 황권(皇權)과 황극(皇極)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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