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일치로 K.O됐구만? 잡소리








전가보도인 '사심 없는 순수한 선의'나 '엄청난 의혹 엮이기' 드립을 곁들이며 수사에 성실히 응하겠다는 호언장담이 아몰랑~ 정권다운 식언으로 희석되버렸고, 변호인단 역시 덩달아 재판관들 심기까지 긁어놓은 괘씸죄가 가장 크게 적용된거라 본다만.ㅉㅉ 그래도 소수 의견조차 없이 전원 인용에 손을 들어준 건 솔직히 조금 깨기는 했다.

어차피 판결이 확정된 이상 진영 불문하고 결과에 승복하며, 무주공산의 X판 5분전 나라 꼴 추스리는데 진력해도 모자를 형국이건만, 야권은 이 기세를 몰아 대권 탈환욕에 정신이 팔려있는데다, 박정희 신드롬의 총체적인 붕괴를 맞아 보수 방면은 그로기 상태이니 당분간 혼돈은 지속될 듯 싶고. 게다가 유력 대선 주자란 것들의 군상을 보자니 또 한편으론 달러나 엔화를 미리 사재기해두는 대비책 또한 진지하게 고민하고픈 우려가 앞선 것도 사실이다.

혹부리 3세의 도발과 중공의 남조선 길들이기가 교차하고, 천조의 대북 타격썰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등 조선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의 격랑이 격화되는 가운데 나같은 소시민 따위야 각자도생의 각오로 임전하는 수밖에.    




반도식 홧병 작렬의 배설극 잡소리






하여간 감정 과잉이 행동으로 드러나면 저렇게 유치찬란한 놀이로 흑화되기 십상이라니깐.ㄲㄲ

어차피 두상까지 정성스레 제작해가며 분풀이해봤자, 막상 당사자들은 무지몽매한 아랫것 개 돼지들의 열폭인 냥 코웃음치고 말 듯 싶은데? 아, 법정 투쟁이 임박한 가운데 콩밥으로 때우고 있을 순시리는 좀 다를지 모르겠다.

금쪽 같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부은 결과의 목적 의식이 고작 보여주기식 관종에 불과하다는 점도 웃기지만, 거기다 내면의 심경을 빙의해가면서 산적한 욕구 불만을 해소시키려는 작자들 역시 가소롭긴 마찬가지 아닐까?ㅉㅉ

하기사 엄한 찰흙 두상에 열폭하는 짓거리가 민망할 줄 아는 정도의 체신머리가 있었더라면, 외교 공관 앞마당에서 혼이 빠져버린 청동 조형물 갖다 놓고 하염없이 광시곡을 합창하는 작태 따위 엄두조차 못냈겠지. 별 수 있음?
  



대중(對中) 문호개방의 환상과 좌절 세계사








미서전쟁으로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국의 지배력을 수립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거점을 획득한 후 미국은 강대국의 역할을 맡기 시작해야만 했다. 이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세력 균형의 활동 분야를 낯설은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어느 국가도 그곳의 규칙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그곳에서 그들이 다른 곳에서 누리지 못하는 어떠한 자연적 어드밴티지를 누렸다. 무너져가는 중국의 만주족 왕조가 자국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통제권을 위한 각축 대상임을 알았을 때, 미국은 팽창 일로인 자국의 산업을 위해서 중국 시장에서의 공정한 몫을 분배받고, 확보하고자 하였다. 중국 시장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거의 100년 동안 헛된 꿈을 가졌고, 그 당시에 아마도 중국 대외무역 비중의 불과 3%에 해당되었던 '제한 없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국가들에게 동등한 상업적 기회를 보장할 것을 의미하는 미국의 '문호개방정책(Open Door)'을 야기시켰다. 중국 대외무역의 상당 부분의 통제자이며, 독일 ・러시아 ・일본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서 종속적 상태로 되어가고 있는 중국의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를 반대해 온 영국은 존 헤이(John Hay)가 제기함에 따라 적어도 처음엔 문호개방 사상을 지지했다. 국무장관 헤이는 싹트고 있는 앵글로-아메리칸의 우정을 성숙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고립주의의 잔재와 투쟁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강한 해군과 제국주의적 모험에 부속되는 권력과 위신에 대한 좋은 감정을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물며 세계의 강대국으로 따라오게 될 자신들의 새로운 지위에 수반되는 전체 범위의 책임감을 도맡는 것은 고사하고, 고립주의를 단념하고 싶어하진 않았다.

헤이는 상업적 동등성에 대한 약속 뿐만 아니라, 이익권마저 폐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조차도 자국의 방책을 강구하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유사한 승인을 조건으로 하는 보장만을 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답변으로 응하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죽음과 북경 주재 외국 공사관에 대한 공격을 수반한 서구에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으로 알려진 일부의 국수주의적 광란이 중국에서 발생한 후 미국은 2만명으로 구성된 국제적 원정 구조군에 2500명을 지원하였다. 한편, 헤이는 동등한 무역 원칙을 반복하는 통첩을 열강들에게 유포시키고, 그것이 중국의 영토적 ・행정적 보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의 정책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강력히 시행하기 위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취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극동에서 활동중인 세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들은 그러한 권력 투쟁의 결과를 스스로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먼로 독트린의 경우처럼 문호개방 원칙을 거의 확고하게 믿었던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대외 공약과 모순되는 과거의 도덕주의덕 이상을 재천명함으로써 자국의 외교정책 전통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외교적 수단으로 문호개방을 계속 지지했지만, 미국은 무력 사용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아시아 정치에 활동적인 관여를 약속하진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자신의 도덕주의덕 선언이 암시하는 것보다 세력 균형이 더 났다고 이해한 루스벨트는 러시아가 극동에서 일본 세력의 성장에 대한 평형추 지위를 보유하는 결과를 선호하였다. 그는 조정자를 자임하면서 두 교전국을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초청해 강화조약을 체결시켰다.

비록 강화조약의 조건이 전반적으로 일본측에 유리했지만, 일본 국민들은 포츠머스 조약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대통령이 극동에서의 가공할 만한 새로운 국가로서 일본의 출현에 대한 현실주의적이고 우호적인 조정을 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일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양국은 필리핀 ・조선 ・만주 ・태평양에서 상호간의 영토 보유, 그리고 중국의 독립과 보전, 그 제국내의 문호개방 원칙에 대해서 다소 깨지기 쉬운 협정을 체결했으나, 일본은 캘리포니아의 자국민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로 감정이 심히 상했다. 이민 문제와 극동에서의 권익을 맞교환하는 내용의 '신사협정'을 체결한 루스벨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일간의 상호 불신의 먹구름은 전적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직접적인 계승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그의 감정을 결여하고 있었다.

윌리엄 태프트와 국무장관 필랜더 녹스(Philander Knox)는 법인 변호사들로 그들은 외교에 대해서 주로 법률주의적 접근 방식과 재정적 수단에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해외에서 미국의 시장과 투자를 증진시키고, 동시에 외교 정책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선 정부와 기업이 함께 일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달러로 총탄을 대신하는 것[태프트 자신의 표현]'은 '달러 외교(Dollar Diplomacy)'라 알려질 정책의 본질이었다. 태프트와 녹스는 만주 철도의 재정과 관리를 위해 다소 비현실적인 제안을 내놓았으나, 오직 독일의 지지만 받았을 뿐이었다. 명백히 유럽과 아시아 간의 점진적 관계는 고사하고, 유럽이나 극동에서의 세력 균형도 이해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적대 관계를 청산시키고 보조를 맞추어 미국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갱신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미 1907년 페르시아에 관한 협정을 맺은 상황이었고, 러시아와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기존의 동맹을 강화시켰으며, 프랑스 역시 극동에서의 세력권 분할에 관한 별도의 협상을 일본과 타결지었다. 영국과 프랑스 어느 국가도 태프트와 녹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극동의 자신들의 '파트너'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프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전까지 많은 중국인들은 미국을 열강들 가운데 자신들의 나라에 이해관계가 없는 유일한 우방국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스스로 국제적 사업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마치 약탈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의 정책은 그 상황을 악화시켜 외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중국의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이내 청조를 무너뜨린 1911년의 신해혁명을 초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동경의 제국 호텔에서 청나라 시찰단장 재도(載濤)와 회동한 오야마(大山) 원수 및 고토(後藤) 체신상   
            만몽(滿蒙)에서의 권익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문호 폐쇄는 본격 대륙 병탄의 서막이자 전주곡이었다.     




여왕폐하의 대관식을 맞이한 자카르타 시가의 광경 사진집




            빌헬미나(Wilhelmina) 공원의 아체(Aceh) 기념비, 수마트라의 정복과 평정을 기원하며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는 독립 후인 1957년 철거되어 모스크가 들어섰으며, 주위로 축하식전을 맞아 장대가 꽃혔다.   


            워털루 광장의 미키엘스(Michiels) 기념비를 전후로 장대와 네덜란드 삼색 국기가 장식 ・게양된 광경  
            1849년 발리 탐험 및 원정대를 인솔하다 전사한 식민군 장성에게 봉헌되었던 추도용 조형물이었다.  


           워털루 광장에 가설된 조립식 문루, 미키엘스 기념비까지 이어진 도상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도심을 관통하는 칠리웅(Ciliwung) 강의 교각에 세워진 간판과 현수막, 백인 경관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입구 간판엔 '빌헬미나 여왕 만세'라는 구호가 부착되었으며, 여왕 명칭의 이니셜 W자도 표시되었다. 


             광장 방면의 도로, 마차 행렬이 오가는 가운데 우측의 강변으로 토착민 용병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리셉션에 초청된 왕립해군 수병들,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당국은 식민지에서 승무원을 대거 모집했다.
           나폴레옹 전쟁 후부터 동인도 제도의 경영이 정부로 이관되어 극동 파견대의 중요성 역시 높아졌다.           
           

            차이나 타운의 입장문, 수세기 전부터 정착해왔던 화교들은 토착 사회와는 별개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특유의 상술과 중개업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점차 자바 경제계의 큰손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차이나 타운 거리, 전방의 문루 편액엔 여왕에게 바치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퍼레이드에 동원된 동인도 식민지군 장병들, 네덜란드 본국의 육군과는 별개의 계통으로 운용되었다.  
            19세기 들어와 영내의 각 도서에 대한 중앙집권화 팽창이 추구되면서 아체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실내 연회장, 열대의 이국적 정취를 간직한 가운데 홀의 정면 맞은편으로 여왕의 흉상이 안치되었다. 
             세기 후반까지 자바에서 시행된 강제 경작제의 인센티브는 유럽 본국에 풍성한 세입을 안겨주었다.  


            빌럼(Willem) 공원의 정원에 세워진 여왕의 조각상, 꽃이 부착된 비단 천조각이 기둥을 두른 모습이다.
           
             
           박물관 근처의 대로에 세워진 기념문, 오라녜(Oranje) 왕가에 경의를 표하는 문구가 간판에 적시되었다.
           야자수 잎사귀 등의 트리 장식과 삼색기 및 왕관 모형도 조화를 이루며 치장된 형태로 설계한 것이다.  


           지형국 사무소 앞에 배치된 출입문,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지도가 그려진 지구본 모형이 올려졌다.


           외국인 상점가 일대의 번화가, 도심의 다른 장소처럼 행사에 임하여 각종 단장으로 채색해놓은 상태다. 
           금융 조직과 대외 무역망이 네덜란드계나 화상 위주로 독점되어 기타 외국인의 상거래를 제약시켰다.    


            탄중 프리오크(Tanjung Priok) 항만 해역에 정박한 관영 선단, 식전을 기해 깃발과 리본으로 치장했다.


            암스테르담 신교회(Nieuwe Kerk)에서 거행된 대관식전의 여왕과 엠마(Emma) 왕대비, 1898년 9월 6일
            이날의 주인공이었던 18세 소녀에겐 다사다난할 향후 반세기 동안의 재위기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뷔르템베르크 공주 파울리네(Pauline)의 결혼식 당시 슈투트가르트 궁전에서 회동한 친척 왕공족들
              공주와 사촌지간인 빌헬미나 여왕도 모후를 대동해가며 해당 식전에 참석했다. 1898년 10월 27일  




제국의 임종을 앞두고 있었던 그해 초여름의 마닐라 사진집




            마닐라 시가 중심부를 관통하는 파시그(Pasig) 강의 스페인 다리(Puente de España), 1632년 가설되었다.
            1863년의 지진 이후 보수 ・확장된 이 아치형 석축교는 성곽과 번화가 사이를 오가는 요로에 있었다.


             파시그 강의 우측 해안가에 근접한 공원의 시몬 데 안다 이 살라자르(Simón de Anda y Salazar) 기념비
             7년전쟁 당시 저항대를 조직해 영국의 침공과 점령에 맞섰던 옛 총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도심 제1의 번화가인 비논도(Binondo)의 에스코르타(Escolta) 거리, 근세 이래 상업 지구로 번성해 왔다.
           식민시대 초기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중국계 이주민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차이나 타운도 형성되었다.


            에스코르타 거리의 남쪽 모라가(Moraga) 광장에 입주한 일본인 상점, 수입산 잡화류 따위를 취급했다.


              필리핀 군도 발견의 주인공 마젤란 기념비, 1848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단은 대리석 재질로 제작했다.
              기념비 주위엔 공원이 조성되어 마닐라 유수의 산책지로 각광받았으나, 2차대전 말기 완파당했다.


             도미니크 수도회가 설립한 비논도 성당, 1596년 준공되어 화교들을 대상으로 포교 사업을 전개했다.


              비논도 성당 우측에 소재한 라 인술라르(La Insular) 담배 제조회사, 건물은 1880년대 준공된 것이다.
              식민 당국이 연초 산업의 독점을 폐기한 직후에 설립된 회사로 사무실과 공장이 나란히 입주했다.


            모(某) 총독의 유골이 안치된 공동묘지 예배당 입구, 백색의 담장을 마주하며 수목이 울창히 드리웠다.


           마닐라역, 루손섬 북쪽의 다구판(Dagupan)까지 연결된 필리핀 최초의 철도 노선이 1892년에 개통했다.
           스페인 본국의 관심과 역량 부족으로 철도 부설은 제당업이 고도화된 쿠바보다 반세기나 늦어졌다. 


            마닐라만 해역에서 피격받아 좌초된 스페인 태평양 함대의 방호 순양함 이슬라 데 루손(Isla de Luzon)
            1898년 5월 1일의 해전 와중에 침몰했으며, 이후 인양과 수리 작업을 거쳐 미(美) 해군에 편입되었다. 


            이슬라 데 루손의 함상에서 바라본 자매함 이슬라 데 쿠바(Isla de Cuba), 해전 당시에 함께 피격당했다. 
            미 해군으로 인계된 후 필리핀 평정전 투입과 실습선 전용을 거쳐 종국엔 베네수엘라로 매각되었다. 


           카비테(Cavite) 병기창과 사령관저를 배경삼아 드러누운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대파당한 일반 순양함 벨라스코(Velasco), 탑재된 포문은 전투 후 수병들이 해체해 육지로 이송시켰다.
            사진이 촬영될 무렵엔 미군이 인근 해역을 봉쇄중이었으나, 상륙전까지 다소간 시일이 남아 있었다.


            침몰 함선단의 원경, 아우스트리아 및 이슬라 데 쿠바와 포함 헤네랄 레소(General Lezo) 등이 보인다.
            태평양 횡단 갈레온선의 출항지였던 항구는 제국의 몰락을 상징한 스페인 군함의 무덤이 되버렸다.


           카비테 병기창, 소규모로 조성된 어뢰 및 탄약 공장이 소재했으나 실전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년 8월에 미군이 마침내 도심으로 입성하면서 장구했던 스페인의 통치도 그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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