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배려하에 대략 마무리된 창경원 복구 국제, 시사








벚꽃이 만개한 창경궁의 야경은 서울 시민에겐 아주 훌륭한 휴식처다. 1986년 제 이름을 다시 찾은 창경궁은 1909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궁(宮)을 원(苑)으로 바꾸고, 일부를 헐어내어 동식물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민족의 핍박과 함계 수난을 겪었던 창경궁은 필자[=윤우경]가 구(舊) 황실재산사무총국장 재임 시절 등 동식물원 복구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바 있으며, 또 그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기에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필자가 1953년 3월, 사무총국장에 취임하여 창경원의 형편을 살펴보었더니, 식물원에 소철이 한 포기 남아있을 뿐 식물 모두가 흔적이 없었다. 맹수는 탈출 위험이 있다 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총독부의 지시로 모두 사살해 버렸고, 나머지 관상용 동식물도 6.25를 겪는 동안 모두 말라죽거나 탈출해 나가버린 것이다.

당시는 서울 시민의 유일한 휴식처였으며, 전쟁 전에는 시골에서도 창경원으로 관광을 오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 학습장 노릇도 톡톡히 하던 곳인데, 전쟁통에 모두 없어져 버렸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나는 하루라도 속히 창경원을 복구할 필요를 느꼈으나, 예산이 한 푼도 없었다. 천상 땅을 팔아야 하는데, 어떤 경우라도 땅을 처분하진 않겠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었다. 내가 육영사업 이외에 구 황실 소유 부동산을 불하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운 것은 개인 살림도 부동산을 처분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대개는 위험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리 끝에 나는 서울시내 유지들로부터 얼마씩 추렴하기로 하고, 김태선 서울시장을 찾아가 계획을 설명한 후 김 시장에게 동물원 재건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주길 부탁, 약속을 받았다. 우선 필요한 동물을 구입하는 예산부터 세워야 했다.

당시 국내엔 그 자료를 뽑을 만한 곳도 없었다. 마침 중립국 휴전 감시 위원단 초청으로 판문점을 시찰하러 갔다가 스미스(Smith) 대표의 사택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스미스씨의 부친이 세계적인 동물 상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미스씨에게 우리가 구입해야 할 동물 명세를 넘겨주며 가격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동물 정가표가 왔기에 창경원 수정(水亭)에서 은행단 ・재계 인사들을 초청, 동물원 재건 위원회를 조직했다. 1954년 5월 경으로 기억된다. 참석자들에게 필요한 동물과 가격표를 적으며 한 장씩 돌렸더니, 그 자리에서 한 쌍씩 신청해주어 거의 해결됐다. 이렇게 해서 동물을 구입하고 나니 왜정 당시보다 훨씬 훌륭한 동물원이 되었으나, 이제 식물원이 문제였다. 아무리 궁리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실마리가 잡혔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꼭 맞아 떨어지는 경우였다. 내가 [일제시대] 해주(海州) 경찰서의 경부(警部)로 있을 때 당시 황해도에는 어느 고을에나 중국인이 많이 와서 야채 농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郡) 단위로 화교회(華僑會)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해주에 황해도 화교 연합회가 있었다. 중일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1941년 당시 화교회장 손학령(孫鶴齡)이란 사람이 나를 찾아와 각 군의 회교회장 10여명이 애매한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구제해달라고 탄원해 왔다. 알아본 결과, 사실 무근한 사건이기에 경찰부장에게 얘기하여 석방시킨 사건이었다. 나중에 손 회장이 서울에 내려와 살면서 중화민국(中華民國) 대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중국 대사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 관계로 중국 대사관과는 절친하게 지내면서 매년 한 두 차례씩 초대되어 식사를 하고는 했었다.

1957년 음력 정초 무렵, 대사관의 초청을 받고 으레 만찬하는 자리에서 나는 왕(王) 대사에게 식물원 복구의 고충을 털어놨다. 얼마 지나서 왕 대사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왔다. 왕 대사는 당시 대만성(臺灣省) 주석인 엄가금(嚴家淦, 후일 총통) 씨에게 한국의 식물원 사정을 보고했더니, 언제던지 내가 대만에 오면 열대 지방의 식물들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회신이 왔으므로 대만에 가서 식물을 받아오란 것이었다. 나는 뛸뜻이 기뻤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반가운 소식을 받고 보니, 고맙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뿐, 가만히 생각하니 운송이 문제였다. 식물을 운반하려면 선박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의 예산으로 선박을 전세낸다는 건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때[1957.4], 마침 해군 본부에서 연예인 위문단을 태우고 동남아 몇개 나라를 방문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귀국하는 길에 대만에 들러 공연도 하는 겸, 식물을 실어오도록 해군 당국과 교섭이 이루어졌다. 나는 해군 함정이 대만에 도착하는 날짜를 맞춰 박응구 창경원장을 대동하고 홍콩을 경유해 대만에 도착했다. 선물로 대만에 꿩이 없다기에 창경원에서 부화시킨 꿩 한 쌍을 가지고 갔다. 우리 대사관의 안내로 엄가금 씨를 방문했더니, 매우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즉시 국립 식물원장 및 대북대(臺北大) 식물학과 교수 황(黃) 모 박사를 불러 '한국 식물원에서 기를 만한 식물을 많이 선택해서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안내로 국립 식물원에 갔더니 2만평 정도 넓은 토지에 아열대 지방의 식물이 밀식되어 있어서 장관이었다. 다음날부터 인부를 고용해 그들이 지정해주는대로 채취하여 뿌리를 묶어 포장을 막 시작했는데, 4일만에 해군 함정이 도착했다.

위문 공연을 마치고 함정에다 식물을 적재해 놓은 후 엄 주석에게 인사차 갔더니, '동물은 다 갖추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다 갖추었으나 꽃사슴이 없다고 했더니, 즉시 비서를 불러 대북시 동물원장에게 꽃사슴 한 쌍을 상자에 넣어 식물과 같이 실어보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 대공원에 있는 꽃사슴은 그때 대북에서 가져온 것이 원종(元種)인데, 식물과 더불어 영구히 번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1957년 5월 14일, 해군의 L.S.T. 함정편으로 인천항에 도착한 이 식물은 총 57종 150 그루로 그중엔 각종 야자류와 흰 겹동백을 포함한 동백류, 종려 ・바나나 ・소철 ・고무나무 등 하나 하나가 다년간 섬세하게 다듬어 가꾼 진품들이었다. 이것들이 창경원 대온실에 제자리를 찾아서 배식 ・진열되자, 식물원에는 당장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

- by 창경원 복구 사업에 있어서 대만 당국의 협조를 받았던 경과를 회상한 윤우경의 기고문에서 발췌




             만찬회에서 서백원(徐柏園) 전(前) 국립은행장과 담소중인 엄가금 중화민국 부총통, 1970년 10월 6일
             양자는 국부천대(國府遷臺) 초기 재정부장을 교대로 역임하며 대만경제 안정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홍화문의 동남쪽 외곽에서 바라본 창경원 입구 전경, 원내 입장에 앞서 관람객들이 줄지어 대기중이다.
           수목이 우거진 옥천교를 넘어 명정문 행각의 우측으로 최대의 철제 사육장인 큰물새장이 설치되었다. 


             명정전 좌측의 열대 동물관 옥상에서 촬영된 원내 유원지 광경, 멀리 장서각과 수정궁 지붕도 보인다. 
             고궁 유적과 테마파크 시설이 혼재되었던 창경원은 학습장으로도 기능하며 수많은 인파를 모았다.


            코끼리사 앞으로 운집한 인파, 수컷 자이언트는 1955년 태국에서 수입된 종으로 최고의 랜드마크였다.
            코끼리 방사장 측면으로 홍학사가 자리잡은 것처럼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각 동물사들이 밀집했다. 


            열대 동물관 외곽에 소재한 낙타사, 분수대 경계 사이로 쌍봉낙타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절멸당한 동물원은 전후 재건을 거쳐 최절정기 9백두의 대가족을 거느리게 되었다.


             낙타사 동쪽의 바다사자사, 일본에서 수입된 한 쌍이 출산하던 경사도 있었으나, 엿새만에 사망했다.
             맞은편으로 세워진 열대 동물관은 개원 60주년에 개관, '아파트'라 불리며 본관 사무실도 입주했다. 


           봄철의 벚꽃을 머금은 장서각, 개원 초기부터 이식된 수목은 원내 도처마다 일본적 경관을 연출시켰다.
           도서관이 1981년 창경원을 떠나간 후, 이 건물은 소실된 옛 고궁 전각들의 현판 수장소로 활용되었다.  


            장서각 건축의 롤모델로 알려진 교토(京都) 우지(宇治)의 평등원(平等院) 봉황당(鳳凰堂), 1973년 12월
            헤이안 후기인 1053년 관백 후지와라노 요리미치(藤原頼通)가 건립한 사찰의 부속 불당(佛堂)이었다.  
 

             식물원 온실의 동관, 동물사 본관과 마찬가지로 개원 60주년 기념차 신축되어 야자류 등을 전시했다.
             재건 과정에서의 식물 확보가 난제였으나, 대만으로부터 무상 공여받은 품종으로 이내 해결되었다.


           춘당지(春塘池)의 수정궁(水亭宮), 벚꽃놀이 야간 타임이 가까워지자 전등을 밝히며 흥을 돋구고 있다.
           연못 위로는 1962년 국내 최초로 개통된 케이블카가 횡단했고, 뱃놀이와 더불어 명물로 자리잡았다.


            춘당지 외곽의 놀이공원과 휴게소, 당시로선 최첨단 기구였던 곤돌라와 회전 그네까지 구비되어 있다.
            원내 시설의 현대화가 진행된 1974년부터 기구를 고궁 동남쪽으로 이전시키고, 공작사를 신설했다.  




전화(戰禍) 속에서 절멸당한 창경원의 동물가족 발언록








일찍이 19세에 고향인 강원도 회양(淮陽)의 이왕직 난곡(蘭谷) 목장에서 목동 생활을 시작으로 서울 경마장 기수와 왕실 마부직을 거쳐 창경원 사육사[苑丁]로 발탁된 박영달(朴永達)은 15년 사이 조류에서부터 맹수, 대동물까지를 두루 다뤄본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경력자였다. 일제시대의 사육사는 다른 직업보다 대우도 좋은 편이었으므로 그동안 다소의 여축도 있었던지라 굳이 동물원을 떠나지 않아도 당장 곤란한 것은 없었다. 그보다도 그는 자신만을 바라고 있는 동물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8.15부터 2년간은 새로운 동물의 증가는 없었고, 더러 한 마리씩 줄어도 보충하지는 못했다. 그 후 6.25가 일어나기까지 3년 동안은 시골 사람들이 우연히 입수해 기증하는 동물을 받아들였는데, 삵 ・너구리 ・수달 ・오소리 ・백로 ・ ・수리부엉이 등의 육식 동물과 고라니 ・꿩 등이었다.

적게나마 예산도 서서 이들의 사료를 사먹이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박영달은 틈을 내서 비원과 종묘 숲에 나가 그물을 쳐서 밀화부리 ・찌르레기 ・방울새 따위 산새들을 잡아다 빈 새장을 하나하나 채우기도 했다. 1947년부터는 사회 질서도 어지간히 잡히고, 원내(苑內)의 시설과 정원도 차츰 정비 단계에 들어갔다. 전문 직원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으나, 바로 이웃한 성균관 대학과 서울대학교 수의학부 교수들의 지도와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동물과 식물이 부족했던 대신 각종 전람회, 연예 단체들을 유치해 행사도 치뤘다. 당시 구(舊) 황실의 유지는 거의 창경원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었는데, 특히 매점 임대료는 세입원으로 큰 몫을 감당하고 있었다.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예산이란 명목 뿐이었고, 관리 운영과 직원들의 부족한 생계 보조비도 이 잡수입으로 상당 부분 보충하는 실정이었다.

1950년 6월 25일. 38선이 무너지고, 28일 새벽에는 인민군이 물밀듯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창경원 앞을 지나 서울로 들어왔다. 이 의외의 사태에 대다수 서울 시민들처럼 창경원 직원들도 대부분 피란할 겨를 없이 인민군을 맞았다.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서울이 함락되었지만, 창경원은 요행히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다만, 창경원은 1926년 순종 승하 이래 두번째로 홍화문(弘化門)을 닫아야 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박영달 기사의 이야기로는 이러했다.




인민 위원회의 붉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들어와 일과를 지휘 ・감독하고, 군인들이 드나들었다. 밤에는 당직자만 남았고, 모두 폭격으로 파괴된 철도 ・도로 및 교량 등의 복구를 위한 노력 동원에 나아갔다. 시일이 지나가 직원들 가운데 젊은이는 의용군으로, 나이 많은 이는 노무자로 징발되어 가기도 했다. 요원으로 남은 나는 몇몇 인원들과 동물 관리만을 맡아 일했다. 특수한 업무라 간섭은 비교적 안 받았지만, 하루 50kg씩 두 지게의 풀을 베어다 먹이고 말리는 일은 어김없이 이행하고, 조석으로 사상 교육도 받았다. 더러 동물이 죽어 꼬치꼬치 경위를 추궁받을 때는 아주 질색이었다. 불합리한 지시나 문책에 대해선 타고난 기질대로 항변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9.28 때까지 원내는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큰일은 없었으나, 하루는 우연히 장서각에서 서적 꾸러미를 내어가는 것을 보았다.

호되게 꾸중을 듣고, 조사한다며 자서전[반성문]을 쓰라는 바람에 곤욕을 치뤄야 했다. 그들은 출신 성분이 좋아서 용서해준다며 풀어줬는데, 나는 순전히 무식한 덕분으로 큰 곤욕을 모면한 것이다. 가지고 간 책들은 아마도 귀중한 보물급이었을 것이다. 9.28 때 그들은 소리도 없이 떠나버렸다. 서울 탈환에 안도의 숨을 돌이킬 틈도 없이 전황은 역전되어 1.4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직원들은 다투어 피란 짐을 싸고, 나도 이때만은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우리 안에 갇힌 동물 가족들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기란 차마 어려웠지만, 백번 궁리 끝에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앵무새 한 마리만 장에 넣어 가지고 떠났다. 정들었던 앵무새를 마지막으로 보고 문을 나서려는데, 'こら, こら! ばか, ばか!'하며 욕소리를 외쳐대는 이 오랜 친구만은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화성군 어느 지경에선가 얼어 죽은 앵무새를 눈속에 장사지내고, 피란 생활을 전전했다. 3월에 서울이 재탈환되자, 나는 잠입하다시피 단신으로 서울에 들어와 우선 창경원에 와보았다. 원내는 적막한 가운데 전각이며, 동물사 등도 예전과 다름없는 듯 했으나, 차례로 살펴보니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새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누가 그랬는지 동물사는 모조리 문이 열려 있었다. 아마도 다시 내려왔던 인민군들이 잡아 먹었거나, 아니면 미쳐 돌볼 길이 없자 차라리 문을 열어 능력껏 살라며 방면해준 듯도 싶었다. 먹이지 못하고 가둔 채 굶겨 얼려서 죽일 바에야 백번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야생에 익숙하지 못한 동물들이 나아간들 제대로 살아 남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조금 더 살펴보니 우선 에뮤 한 마리가 우리 가운데 엎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어루만져보니, 푸시시 거친 터럭 속에서 먼지만 일었다. 앙상한 뼈대를 간신히 가죽과 터럭이 덮고 있을 뿐이었다. 견디다 못해 혹한에 굶어서 얼어 죽은 것이다. 이밖에 큰물새 우리의 재두루미 한 마리, 맹금사의 부엉이 한 마리도 그렇게 죽어 있었고, 유일하게 문이 열리지 않았던 소(小)동물사의 여우 ・너구리 ・오소리 ・삵 등은 혹은 굴 속에서, 혹은 돌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낙타 ・사슴 ・얼룩말들은 발목이며, 머리통만이 우리 안의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공 ・인민군이나 굶주린 시민들이] 먹기 위해 제자리에서 도살을 당했음이 분명했다. 박물 표본실과 장서각은 문이 열린 채 소장품들이 흩어지고, 온실 내부의 식물들도 대부분 얼어서 말라 죽어버려 남은 것이라고는 묵은 소철이 한 그루만 있을 뿐이었다[여담으로 해방 직전에 처분된 동물들은 21종 38마리였다고 전해진다].




창경원은 일제 36년의 영욕의 넋두리를 8.15 전야의 맹수 및 대동물 학살이란 제1차 수난으로 끝내고, 바로 이어서 혼란스러웠던 5년을 가까스로 유지해 오다가 민족 상잔의 6.25로 절멸되는 제2차 수난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일제시대 이왕직 박물관이 입주했었던 창경원 장서각 전경, 천수각의 형태를 취한 왜색풍 도서관이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은 이곳에 소장중인 <조선왕조실록>의 적상산본을 노획해 북으로 반출시켰다. 




프린스 리 박사, 창경원 유원지의 폐쇄를 시도하다 세계사








해방 이후 창경원은 미군정(美軍政) 산하의 구(舊) 왕궁사무청에서 운영하였다. 그러나 서울시 운영이 논의되는 등 그 관리의 주체는 분명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구 황실재산관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운영했으나, 창경원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관리는 체계적이지 못했다. 창경원을 일제의 유산과 결부시켜 인식한 대표적인 것은 창경원에 심겨진 벚꽃과 벚꽃놀이에 관한 것이었다. 1946년 4월, 창경원에서 밤 벚꽃놀이가 재개되면서 벚꽃을 일본의 꽃으로, 일제의 한국혼(魂) 말살과 결부시켜 인식하면서 식민 유산의 문제가 제기됐다. 즉, 인식의 시작은 해방 후에도 벚꽃놀이에 인산인해를 이루는 현상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당시 일간지에선 벚꽃은 일본이 '조선의 조선혼을 꺾어 누르고자 무궁화를 응징한' 것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동시에 벚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무궁화를 심자는 '벌앵(伐櫻) 운동'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1947년, 수도경찰청과 공보처는 '신성시되어야 하는 고궁(故宮)의 문화가 흥행만을 주로 하는 오락 문화의 장소로 변질되었으며, 이로 인해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사를 금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 발표는 경복궁 ・덕수궁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창경원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원내(苑內)의 일체의 오락과 상업적 이익을 위한 행사 등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조치는 구체적으로 창경원에서 실시되었던 건국 박람회 ・권투대회, 각종 흥행을 목적으로 한 행사로 인해 서울 시민의 비난과 부정적 여론에서 나온 것으로 창경원이 이윤 획득 목적의 오락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서울시 직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의견 등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즉, 창경원이 '모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을 방법을 강구한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개선을 위해 서울시 참사회에선 미군정청과 교섭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창경원이 오락장으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허가제에 의거하여 실시되고 있던 일반 흥행 공연을 포함하여 어떠한 공연도 절대로 불허한다'며 창경원내 공연 허가제마저 폐지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강력히 실시하고자 서울시 또한 창경원의 경비 부족과 관리의 소홀함으로 인한 훼손을 막으려면 구 왕궁사무청이 운영한 것을 직영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정부 수립 이후로 미루어졌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4월엔 공보처도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고대 문화인 궁궐과 사찰 등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한 상업적이며, 오락적인 어떠한 행위도 일체 금지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왜정시대에는 일인(日人)들이 대소를 막론하고 우리의 사정과 유물은 다 파괴 ・소멸하기로 작정하여 온 것인데, 다행히 지금 얼마 유지된 것이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겨 절대로 보유해야 할 것이다. 과거 3년간은 우리가 정신을 차릴 여가가 없어서 그동안 궁궐이나 사찰 등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관민이 합심해서 우리의 고적을 보호해야 하겠다. 일동이 절대 책임을 지고 조금이라도 손해될 것을 엄금하여 발전시킬 일에 합심 ・노력해야 될 것이다. 더욱이 궁궐 기지에서 난잡한 유흥이나  운동 ・연회 ・흥행 등을 일체 금지할 것이며..."




공보처 조치의 핵심은 일부 '모리배'들이 역사적 고적(古跡)인 궁궐을 이용해 모리 흥행을 감행하고, 일반 시민에게 불편을 가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치는 시민들의 요구가 지속적으로 속출하고 있는데 기반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창경원내 행사는 서울시 학무국 문화과(文化課)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했으며, 일체의 유흥이나 흥행 성격의 운동회 ・연회 등을 금지시켰다. 이처럼 창경원에 대한 여론의 환기는 '탈(脫)식민의 문제'라기보단 단순히 상업적 목적에 의해 무분별하게 운영되고 있는 부정적 여론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12월 2일, 이승만 대통령 역시 고적 ・사찰을 소중히 할 것과 일제의 조선 왕궁에 대한 훼손 및 침탈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는 내용과 한국 문화의 정체성 회복을 강조하는 고적 보존 관련 담화를 발표하였다.




"누대(累代)의 궁실(宮室) ・사찰 등은 가장 우리의 특색을 이어서 고대 문명(古代文明)의 발전을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으나, 일본이 우리를 속박한 이후로 우리의 기왕 건물은 다 쇄락 ・파손하도록 만들어 놓고, 고대의 우리 문명을 다 잊어버리게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 우리가 가장 통한히 여기는 것은 지금 중앙청(中央廳)이라는 것을 하필 경복궁의 신성한 기지를 쓰고, 광화문(光化門)을 옮기고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세워 경복궁 설계를 다 파손시켜 놓았으니, 우리가 그 악독한 심정을 볼수록 가통(可痛)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외적의 압박하에서 원체 견고하게 된 연고(緣故)요, 또 어떤 것은 애국 정신을 가진 남녀(男女)들이 모험 정신으로 부지했던 공들인 보람이다..."




이같은 대통령의 담화는 국보 ・고적 명승지 지정 작업과 천연기념물 애호 주간 실시 등으로 연결되었다. 왜곡되고 황폐화되는 문화재 보존이 시급하다는 인식은 정부가 수립된 이후 1949년 말부터 문화재 보호 운동의 차원으로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정부 방침하에 1950년 5월, 창경원 임시 폐문 조치가 취해졌다. 그러자, 창경원 임시 폐문에 서울 시민들은 '반발'했고,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이 대통령은 아래와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어느 나라고 국민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지경(地境)이나 고적이 있는 것으로써 미국 같은 나라도 로버트 리 장군의 저택을, 혹은 무슨 저명 인사의 서재까지도 보존하여 신성한 것으로 만들고 있으며, 패전국 일본에서도 궁성(宮城) 만큼은 그대로 개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놈들의 신사만을 거룩하게 여기었으니 한심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신성한 장소라면 창경원이요, 덕수궁이요, 그리고 경복궁 등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들어가 놀면 말려라 할 터인데도 그들을 오히려 끌어들임에 만족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관습을 교정하고, 우리의 우수한 고적을 보존하기 위해 관할 경찰서장에게 [명령을] 행하여 폐쇄시킨 것이다. ...도대체 창경원에다 동물원을 들여 넣고, 경복궁에다 중앙청 건물을 건축한 것은 일인들의 우리의 신성 침해인 것이니 각성이 필요하다."




이 담화의 핵심은 창경원 ・경복궁 ・덕수궁은 대한민국의 신성한 장소이지, 공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궁을 공원화한 것은 일제의 '간악한 신성 침해'이니, 이것에 대한 각성이 요구된다는 것이았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우리의 거룩한 곳이 거의 파괴'되었는데도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우리 국민 스스로도 거룩한 곳을 보존하려는 의욕을 가지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 현재 창경원을 운영하여 이왕직(李王職)에서는 돈을 버는 것에만 급급한 나머지 일반에 무질서하게 공개해 창경원을 파손 ・훼손시키고 있다며 비난과 각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창경원에 대한 일방적 폐문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화는 창경원에서의 상업적 행위와 무질서한 운영의 책임을 이왕직에 떠넘긴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창경원은 대통령에 직속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임시 폐문 조치는 '시민의 휴식 공간이 박탈'당했다는 표현이 제기되는 등 즉시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창경원 임시 폐문 조치에 대한 반대 및 저항의 논리는 크게 4가지였다. 첫번째는 창경원이 서울 시민들의 공원으로 내외국인의 유람지이자 서울의 명소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점, 두번째는 창경원은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일반 시민이 유적을 감상할 수 있는 국보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이며, 또한 동식물원이 겸비된 교육 학습장으로 그 역할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창경원내 동식물원은 학생 ・시민들 모두에게 '취미'로나 '교양'으로 중요한 곳이니 폐문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 시설을 완비 ・확충해 시민이나 외국인을 위하여 유용한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번째로 문화 국가로 이런 시설이 없다는 것은 문화국의 수치라는 논리들이었다.

이상 논리들의 핵심은 대통령이 창경원이 서울 시민의 여가 공간으로 자리잡은 '공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서울시 인구에 비해 공원도 부족한 현실에서 서울 시민이 휴일에 갈 수 있는 산책지인 창경원은 단순한 휴식 공원이 아니라 문화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소라는 점 또한 제기하였다. 이처럼 개원 40년만에 서민의 휴식처요, 피서지로 확고히 자리잡은 창경원이 시민의 공간이 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일방적인 폐쇄 조치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임시 폐문 조치에 대한 반대 논리들에서 주목할 점은 '실물 교육기관', '국민들의 취미 ・교양을 위한 곳', '시민의 위안(慰安) 장소', '문화 국가다운 시설' 등으로 창경원을 규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제가 개원 당시 부여했던 창경원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창경원이 이미 한국인의 여가 문화의 중요한 장소로 내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문 조치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대궐이나 사찰 같은 신성한 곳에서 꽹과리를 치고 하는 행태를 그대로 묵과할 수 없으며, 후대에 그리고 외국 손님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고적을 전부 잃을까 염려되어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완화된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창경원의 일방적 폐문과 반대 여론 형성 및 논의들은 곧바로 터진 전쟁으로 진척되지 못했다. 전후에도 창경원의 위상 점검이나 복원 등 '탈식민'에 대한 논의는 적극적으로 개진되지 못했다. 단지, 한국의 훌륭한 국보와 명승 고적으로 널리 인식시킨다는 목적하에 '문화재 애호 기간'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시켜 전통 문화 체험장의 역할을 하면서 '올바로' 보존해야 하는 공간으로 천명되었을 뿐이다.

1950년 이래 창경원에 대한 국가적인 보호책을 요구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한 국가의 문화적 수준을 높여줄 수 있는 국보적 존재인 창경원에 너무 무관심했고, 점차 관리도 이루어지지 않아 황폐화되었으며, 동물원은 일제시기의 모습에 비해 너무 쓸쓸해 자랑할 만한 동물도 하나 없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입장료만 챙기고, 원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구 왕궁관리국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시민들이 가족을 동반하고, 휴식을 위해 찾아간 창경원이 시설 부족과 고장이 나도 수리조차 하지 않은 채로 방치해 놓으며, 황량해진 공원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들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황폐해지고, 관리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봄철이 되면 주말 하루 10만명 인파로 살인적 대혼잡 ・만원 전차로 비유될 정도의 사람들이 찾았다.

전쟁 이후에도 이같은 역할은 지속되었다. 전쟁으로 완전히 폐쇄된 창경원은 1952년 4월, 벚꽃이 한창일 적에 다시 개방되었다. 이듬해엔 대통령의 지시로 잠시 문을 닫고, 죽은 나무도 손질하면서 새로운 나무를 심거나, 최전방에서 기증된 짐승들을 확보하고 시설을 정비하는 등 내부 단장을 하기도 하였다. 동물원은 일제 말기의 맹수 학살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원숭이 ・곰 하나 없이 빈 건물만 남아 있었'고, 식물원에도 오로지 소철 한 그루만 멀쩡했다고 한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가장 먼저 인기가 있었던 동물원부터 정식으로 복구할 계획을 세우고, 복구 공사에 들어가면서 각종 동물들을 확보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54년엔 '동식물원재건위원회'를 결성해 동식물을 해외에서 수집 ・수입해 왔다. 동식물원재건위원회는 자발적이라는 명목하에 정재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었다.  

그 멤버들은 위원장에 서울시장 김태선, 부위원장에 서울 부시장과 전택보 등이었다. 이들은 조직과 예산의 집행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으며, 상임위원으로는 자유당 부총재였던 이기붕 외의 1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정계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또한 재건 위원들은 국내외 각계의 유지 및 명사 80여명으로 이루어졌다. 회의 또한 서울시청 회의실에서 개최되는 등 서울시와 정부가 주도해 움직였다. 50년대 중반에도 전쟁의 휴유증과 복구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창경원을 찾는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창경원의 공원화에 대단히 부정적이었던 이 대통령조차 '국민이 그토록 바라고, 자진해서 복구에 나설 정도라면... 우리나라 유일의 동식물원이니 지금부터라도 확실히 계획하여 일제 때보다 훌륭하게 건설하라'며 구 황실재산사무총국장 윤우경에게 당부할 정도였다고 한다. 




            창경원 문물 보존지역 전경, 중앙의 정전(正殿) 명정전 행각 좌우로 동물원 축사들도 혼재되어 있었다.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의 수난을 거치면서도 국내 제일의 테마파크로 80년대까지 인기를 구가했다.




낭인 검객들이 궁중 후원의 늙은 여우를 처단하다 (2) 발언록








"가장 큰 낙(樂)은 적을 골라내어 모든 것을 준비해 철저히 복수하고 난 다음, 가서 잠자는 것이다."

- by 소비에트 강철의 대원수




이러한 훈련대 장병의 동정이 어찌 궁중의 주의를 끌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겠는가? 홍계훈은 밤중에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곧 군부대신 안경수에게로 달려갔다. 이미 8일 새벽 3시, 안경수는 곤한 잠에 취했으나, 홍계훈의 급보를 받고 청천의 벽력처럼 놀라 허둥지둥 의관을 정제하여 입궐할 채비를 차리면서 홍계훈으로 하여금 훈련대 병사를 데려오도록 했다. 홍계훈은 건춘문 밖으로 달려가 간신히 그중의 1개 중개를 설득해 안경수의 집으로 되돌아가니, 마침 안경수가 가마를 타고 경복궁으로 향하던 참이라 함께 광화문으로 해서 궁중에 들어가려고 나섰다. 군부대신 안경수의 집은 경복궁 동북쪽의 성벽 밖에 있었기 때문에 광화문으로 가려면 왕궁의 담장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지름길이 되지만, 담장의 동남쪽에 있는 망루[동십자각] 부근엔 일본 수비대의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경수와 홍계훈은 할 수 없이 우회하여 시가를 통해 탁지부청(度支部廳) 옆으로부터 광화문 앞으로 통하는 길로 나섰다. 탁지부청은 광화문에서 두어 정(町) 남짓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무렵이 되자, 새벽별은 점차 희미해져 가고, 동녘 하늘에 서서히 먼동이 터오기 시작했으나, 아직 박명(薄明)의 어둠 속에 싸여서 원거리의 것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안경수와 홍계훈은 마침내 광화문 앞에 이르러 그곳에서 한 덩어리의 병사가 가마 하나를 호위하면서 급한 걸음으로 광화문에 접근해가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필시 훈련대가 궁중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라 직감했으리라. 그들은 목청을 크게 돋구며 '군부대신이 여기 있다. 연대장도 여기에 있다. 장병들은 함부로 궁중을 범하지 말라'고 호령했다. 안경수와 홍계훈은 그렇게 스스로 외치면서 병사들에게도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을 호위한 일본 수비대와 훈련대의 장병들이 그렇다고 어찌 '군부대신', '연대장' 운운하는 말에 기가 죽을 수 있는가? 이에 이르러 적과 우리쪽 양편으로 갈라진 서로의 병사들은 일본 장교의 지휘하에 당장에 총구를 열었던 것이다. 탄환은 먼동이 트는 새벽 하늘을 뚫고 불꽃처럼 튀었으며, 총성은 인왕(仁旺) ・삼각산(三角山) 등에 울려서 곤히 잠들고 있었던 경성 시민들의 잠을 깨웠다. 10여분 동안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걷혀가는 어스름 속에서 적편의 장병들이 이쪽에 일본 수비대가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적편은 중과부적인데다, 일본 수비대까지 끼어있는 것을 보고 사기가 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쪽 훈련대 및 일본 수비대의 병사들도 거사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던데다, 갑자기 실전까지 벌이게 되면서 이 역시 꽁무니를 뺄 도리밖에 없었다.

이것을 본 일본 수비대 장교는 사기가 죽은 병사의 행동을 꾸짖어 제각기 칼날을 내두르면서 적중으로 뛰어 들었다. 이 백병전 속에 홍계훈은 칼에 맞아 쓰러졌고, 안경수는 겨우 몸을 빼어 위기를 모면했다. 대원군의 가마를 호위해 궁중으로 들어간 낭인들과 장병들의 일단이 광화문 앞의 충성을 등 뒤에 들으면서도 바로 근정전 앞으로 나서려고 할 무렵, 앞쪽에서 다시 총성이 일어나 궁중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래도 일단은 다만 후궁(後宮)을 향해서 치달았다. 가옥이 사방을 둘러싼 근정전의 큰 건물 뒷편에다 가마를 멈추고, 전방에 진로가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다 1개 소대의 일본 병사에게 가마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목적지를 향해서 돌진했다. 이 일대엔 빈 집이 늘어서고, 지경(地境)이 어지간히 넓어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을 못하는 형편이었다.

왼쪽으로 꺾여서 오른쪽 방향으로 돌아 후궁을 향해 몇 마장쯤 들어가니, 겨우 벽돌의 담벼락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한 가운데에 문루가 마련되어 있으며, 오른쪽으로 소나무가 우거진 조그마한 등성이[鹿山]가 있는 곳으로 나섰다. 이것이야말로 건청궁(乾淸宮)의 외곽이었다. 바로 이때, 총성이 또 한 바탕 돌담의 안쪽에서 일어났다. 광화문에서 국왕의 편전(便殿)인 건청궁으로 들어가는데엔 두 갈래의 통로가 있었다. 낭인 일행이 선택한 길은 샛길로 근정전 뒤에서 오른쪽으로 통하는 길이었으며, 본도(本道)로는 일본 수비대와 한국 훈련대의 장병들이 들어갔는데, 이는 근정전 왼쪽으로 통해 있었다. 그런데 궁중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 장병들은 대개가 본도 길에서 진을 치고 저항했기 때문에 이쪽 길로 갔던 수비대와 훈련대는 수십분이나 총격전을 벌이며 양측에 수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를 조금도 예기치 못했고, 준비도 부족했던 궁중 시위대들은 마침내 도망치기 시작했다. 총검을 버리고, 제복을 벗어 던지고, 혹은 궁중에서 봉사하는 궁인(宮人)으로 변장하는 등 수백의 병사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길에는 제복과 제모(制帽)이며, 총검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고, 어느 한 사람 내습한 적과 싸워 충절에 죽고자하는 자는 없었다. 이씨(李氏)가 나라를 세운지 5백년, 비록 쇠잔했다고는 하지만 군신(君臣)의 은의(恩義)는 보존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위병이 난을 피해 다투어 도망하고, 왕거(王居)를 외인(外人)의 난폭한대로 버려둔다는 것은 충절의 마음이 이미 없어졌다 해야 할 것이다. 낭인 일행이 석벽(石壁) 안쪽에서 총성이 일어났다고 들은 건 결국, 본도에 있어서의 시위대와의 충돌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낭인단의 호위를 받은 대원군이 입궐 직후에 잠시 대기했던 옛 강녕전(康寧殿) 일대의 유지(遺止)
               주위의 전각과 행랑은 일제 초기에 철거되어 경회루로 통하는 도로와 불탑 전시장이 들어섰다.




그러나, 샛길을 택했던 낭인 일행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들보다도 앞질러 건청궁에 도달하였다. 석벽의 중앙에 마련된 중문(中門)으로 들어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2개의 소문(小門)을 넘어서면 국왕의 편전인 건청궁의 앞뜰에 이르게 된다. 구중 궁궐은 깊고도 깊은 곳이라 하지만, 견고한 성문은 군대의 갑작스런 침입으로 깨졌고, 궁전의 내부는 낭인에게 유린되어 쇠퇴하는 왕국의 말로라고는 하지만 그 처량함이 이보다 더함이 있으랴. 건청궁에 봉시(奉侍)중이던 환관은 새벽녘에 총성이 성내(城內)에서 일어난 것을 듣고 깜짝 놀라고 있는데, 뒤이어 낭인의 일단이 침입해 들어오자 어찌할 바 모르고 당황할 따름이었다. 전상(殿上)의 한국인은 대경실색했다. 이때, 국왕은 한 방안의 복판에 섰고, 시신(侍臣) 수명이 주위에서 모시며 국왕폐하임을 손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낭인들은 그분이 국왕임을 알자 경의를 표하고, 감히 전내(殿內)로 올라가는 자가 없었다. 그 오른쪽의 방이 곧 민비(閔妃)의 거실로 수명의 나인[宮女]들이 방안에서 엎치락 뒷치락하고 있었으며, 궁내대신 이경직(李耕稙)도 그 안에 있어서 민비를 옹위하고 있었으나, 민비는 바로 이 방안에서 시퍼런 칼날 아래 붕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경직은 방 밖으로 뛰어나가다 육혈포(六穴砲)에 허벅다리를 맞아 쓰러지면서 다시 오른쪽 어깨에다 칼날을 맞고 마당으로 나동그라져 버렸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양복을 착용하고 칼든 곤봉을 찬 한국 사람이 낭인 가운데 끼어 이 참살을 자행했다고도 한다. 이 참변이 벌어진 전날 밤, 궁중에선 민씨 일족의 준영(俊英) 민영준(閔泳駿)이 궁중에 등용된 것을 축하해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었다[낭인단도 같은 시각 파성관에서 출정식을 겸한 술판을 가졌다].

궁내대신 이경직과 농상공부 협판(協辦) 정병하(鄭秉夏)도 이 연회에 배석했다가 밤이 깊어서 자리를 거둔 후 함께 궁중에서 잤다. 왕비는 연회 풍류에 지쳐 깊이 잠들었기 때문에 난을 피할 겨를이 없었고, 이경직도 궁중에서 자고 있었다가 두 사람 모두 칼날 아래 비명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전상전하(殿上殿下)에 칼날이 번뜩이고, 마당 안팎을 병사와 낭인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마침 백인(白人) 한 사람이 건청궁 전하에 서서 이 소란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궁중에 초빙되어 있던 어용기사인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이라는 사람이었다. 사바틴 외에도 궁중 시위대의 훈련을 맡았던 미국인 다이(Dye) 장군도 종복 1명을 데리고 건청궁 뜰의 통로에서 이 혼란을 목격하면서 일본 낭인들을 만날 때마다 모자를 벗고 경례하여 백발이 성성한 노안에 미소를 띠우며 아첨하고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국왕의 거실에서 불과 3~40간(間)의 거리에 굉장한 양관(洋館, 觀文閣)을 세우고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자, 바로 나와 이 변란(變亂)을 실지로 목격했던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의 증언은 훗날 국제간의 분규에 유력한 자료가 되었다. 건청궁은 사방이 거의 5리(里) 가량이나 되는 경복궁의 가장 후방에 있어서 성벽으로 둘러싸인 앞마당엔 많은 전각이 즐비한데, 한 가운데에 있는 한 채[長安堂]를 국왕과 왕비의 편전으로 쓰고 있었다. 남향으로 세워진 편전은 동서로 길게 뻗어 몇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때, 왕비는 건청궁의 가장 동쪽 끝에 있는 한국식의 미닫이를 동남의 양측에다 달아놓은 방[坤寧閤] 안에 있었다. 낭인의 칼에 맞아 쓰러진 장소도 바로 이 방이었다. 그로부터 서쪽으로 향해서도 많은 방이 있는데, 국왕은 왕비의 [행각을 마주한] 옆방에 있었다.

거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응접실[集玉齋]이 있고, 잇대어 많은 행랑집이 건청궁을 둘러싸고 있었다. 건청궁의 풍취(風趣)를 살펴보면 내부의 장치가 청미(淸美)한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호화풍려(豪華風麗)한 그림자는 조금도 없었다. 전아(典雅)한 액자가 벽에 걸리고, 웅혼한 필치(筆致)의 글씨가 기둥 머리에 붙혀져 오히려 한적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더구나, 궁전의 초석은 높이 석자 정도이고, 돌층대가 몇단으로 놓여진데다가 가옥이 기는 것 같은 단층들이기 때문에 마치 유서있는 고찰(古刹)에나 들어온 느낌이어서 자연히 사람을 압박해 들어오는 왕실의 위엄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낭인의 일행이 먼저 궁전에 들이닥쳤고, 수비대 ・훈련대의 장병이 이에 뒤따랐다. 우리들은 이미 궁중 시위대를 완전히 물리쳤기 때문에 대원군의 가마는 안심하고, 건청궁으로 들어섰다.

대원군은 이내 가마로부터 나와 전상에 올라 국왕을 알현하고, 사변의 연유를 상주(上奏)하였다. 국왕이 이제부터 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문하니, 대원군은 예정된 계획에 따라 답했다. 즉, 궁중과 내각과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궁중은 결코 국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궁내대신과 협판을 경질해서 국왕의 친형이자 대원군을 따라 궁중에 들어온 이재면(李載冕)을 궁내대신, 김종한(金宗漢)을 협판에 임명할 것, 다시 미우라(三浦) 공사의 참궁(參宮)을 지체없이 실현하도록 할 것 등등 만사를 예정대로 밀고 나갔다. 이렇게하여 급사(給仕)가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갔으며, 한편 [전날 민영준이 내정되었던] 궁내대신의 경질도 깜짝할 사이 실행되었다. 이로부터 대원군은 국왕을 몸소 모시면서 보좌하고, 궁중의 경비는 훈련대의 병대가 맡기로 하여 '비상 수단[여우 사냥]'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다.

낭인 일행은 삼삼오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경복궁을 나왔는데, 이때가 오전 8시경이었다. 광화문을 나서니 다수의 한국인들이 꼭두 새벽의 총성에 놀라 사변의 발생을 알고 문앞의 한 길이 메어지듯 모여 있었다. 종루(鐘樓, 鐘閣)와 동대문통(東大門通), 남대문통(南大門通) 같은 곳에선 경복궁 앞으로 향하는 사람들로 들끓어 광화문 앞의 광장은 수만명의 구경꾼들로 내리 덮여졌다. 이때에 러시아 공사와 미국 공사가 사변의 보고를 듣고 함께 궁중으로 들어갔다. 낭인 일행 가운데 먼저 경복궁을 나온 자는 이들을 종루 부근에서 보았고, 늦게 나온 자는 경복궁 안에서 두 공사를 만났다. 이번 사건이 국제 관계의 문제가 되고 나서 두 공사가 일본인이 관계했다는 것을 주장해 끝까지 우겨댄데엔 이러한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비상 수단'의 목적은 이상과 같이 해서 달성은 되었다.

[중략]




             거사의 배경 무대인 건청궁 터, 을미사변 당시 편전이 자리잡았던 장소엔 총독부 미술관이 입주했다. 
             여우 사냥의 목표를 달성한 낭인단은 시신을 우측의 녹산으로 가져가 소각해버리고, 철수하였다.




그날 아침, 궁중의 혼란스런 정경을 지금 이곳에 소상히 옮기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 어쨌든 우리는 후궁으로 돌진했다. 도중에 시위대의 발포로 약간 뒷걸음질을 쳤고, 다소 겁을 먹기도 했으나, 결국 대단한 장애를 겪음이 없이 국왕이 계시는 건청궁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내가 건청궁 앞마당에 이르렀을 때엔 미닫이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여인의 비단 쪽을 찟어버린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처참하게 들려왔다. 그곳엔 병사며, 낭인들이 종횡으로 뛰어다녔고, 미닫이를 열어젖힌 옆방엔 안색이 새파래진 국왕이 환관 10여명의 옹위를 받고 앉아 계셨다. 얼마 안 있어 백의를 입은 부인 10여명이 산 사람의 몰골이라고는 도무지 없이 부들부들 떨면서 밀려 나왔다. 그중엔 선혈(鮮血)의 핏발을 받아 얼굴에까지 핏방울이 튄 기품있는 연소한 여인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이 귀부인은 왕태자의 비(妃)였다고 한다. 이때에, 누군가가 왕비는 몸을 빼어내 숨어버렸다는 말을 퍼뜨렸다. 왕비를 놓쳐선 안된다고 누구나 손마다 무기를 들고 사방에 즐비한 하고많은 빈 방들을 샅샅이 뒤졌다. 개중엔 시위대가 버리고 간 총을 주워다 그것으로 닫힌 문짝을 때려 부수고 있는 자도 있었으며,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찾고 있는 자도 있었다. 누구나가 혈안이 되어서 우왕좌왕, 이곳 저곳을 찾았으나 아무도 발견을 못했다. 이 살기등등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가지 희극이 벌어졌다. 선혈을 뒤집어쓴 귀부인을 붙잡은 채로 칼날을 그 가슴에 겨누면서 '왕비가 있는 곳을 대어라. 대지 않으면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일본어로 다그쳐대는 자가 있었다. 한국의 궁중 귀부인이 어떻게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아이고!' 하면서 소리만 내지를 뿐이었다.

마침 그때, 시위대의 연대장인 현흥택(玄興澤)이 군복을 입은 채 다만 허리에 찬 칼만을 버리고 겁에 질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어찌 이를 그대로 놓칠쏘냐?! 낭인들의 철권(鐵券)이 그에게 마구 내리 쏟아졌다. 그러나, 현흥택은 겨우 숨을 건져 도망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어버렸다. 재수 좋은 사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 [곤녕합] 방안에 쓰러져 있는 부인이 민비라고 하는 사실이 누군가로부터 퍼뜨려졌다. 나는 직접 방안으로 들어가 그 쓰러져 있는 부인을 보았다. 이 부인은 아직 침소에서 나온 그대로였는지, 상체엔 짧은 속적삼을 입었을 뿐이고, 허리로부터 아래로는 백색 속옷을 입고 있었으나, 무릎으로부터 그 아래는 흰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잘 보니, 가냘픈 몸매에 유순하게 생긴 얼굴과 하얀 살결은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여섯살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죽었다기보단 인형을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아릅답게 영원한 잠이 들어 있었다. 가냘픈 손으로 8도(八道)를 움직여 군호(群豪)를 조종했던 민비, 그 사람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웅혼(雄魂)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방안엔 유해를 지키는 단 한 명의 그림자도 없었다. 실로 처참을 극한 광경이었다. 민왕비(閔王妃)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2개의 칼날 자국에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어떻게 손을 내리쳤을까? 오전 8시경이 되어서 모두들 제각기 들고 있었던 일본도(日本刀)를 담요에다 말아싸고, 나와 식자생(植字生) 두 사람의 것은 쿠마베(隈部)라고 하는 장한(壯漢)한테 지워서 광화문을 나왔다. 문을 나서니, 구경을 나온 한국인들이 문전(門前) 한 길에 구름처럼 모여서 놀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꼬락서니며 몸가짐들이 괴상망측해서 그들의 의혹을 안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무엇인가 수근거리고 있었다. 운집한 한국 사람들의 사이를 지나 종로 근방에 왔을 때, 러시아 공사와 미국 공사가 함께 가마를 잇대어 궁중에 들어가는 것과 마주쳤다. 두 공사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한 웃음을 띠면서 우리들을 쳐다봤는데, 뒤쳐져서 궁중을 나온 자들은 경회루 부근에서 두 공사를 만났다고 한다. 그들이 훗날 강경한 항의를 해온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각기병을 앓고 있었던 나는 궁중에서 일본인 거류지까지의 꽤나 먼 거리를 돌아가는데 다리를 옮기기에도 진땀을 뺄만큼 고통을 받았다. 나는 마쓰무라(松村)와 한 패가 되어 그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겨우 돌아왔고, 도착하자마자 자리에 드러누워 간밤 이래의 피로를 풀었다.

- by 을미사변 당시 거사 결행에 동참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가 사변의 정황을 회고하며 




             경회루 입구의 전경, 조선시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역대 권력자들의 연회장으로 활용된 명소다.
             사변 직후 낭인단 가운데 뒤늦게 철수중이던 후발대가 이곳에서 외국 공사들과 추가로 조우했다.




낭인 검객들이 궁중 후원의 늙은 여우를 처단하다 (1) 발언록








거의 1시간 가량 쉬고 있는데, 호리구치(堀口) 등이 뛰어와 장병은 모두가 서대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가마를 출발시켜야 한다고 보고해왔다. 이에 일행은 바로 자갈이 많은 길을 서둘러 갔다. 처음의 방략서(方略書)에 따르면, 대원군은 남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들어가 바로 경복궁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남대분 안에선 매일 아침에 시장이 서서 혼잡할 뿐더러 서대문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경성내의 시가를 통과하는 거리가 엄청나게 멀고, 또한 일반의 주의를 끌 우려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예정했던 방략을 바꿔 서대문을 통해 들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덕리에서 경성으로 통하는 길은 두 갈래로 가마가 나간 곳은 남대문 방면으로 통하는 길이었고, 수비대 장병들은 대원군이 서대문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택하리란 예상하에 그 중간 지점인 고개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때문에 그 사이 어긋남이 생겨 일행을 초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호리구치 등이 말을 달려 군대의 소재를 확인해 이를 보고하였기 때문에 일행은 가마를 호위해가며 남대문 밖에 이르러 다시 성밖을 돌아서 서대문 쪽으로 향했다. 이 때문에 오전 4시에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던 예정이 완전히 처져버리게 되었다. 서대문 밖의 한 길이 의주(義州)로 통하는 길과 4거리를 이루고 있는 한성부청(漢城府廳) 앞에 가마가 이르자, 우범선(禹範善)이 인솔한 한국 훈련대 제2대대 장병이 행길의 왼편에 장렬해서 대원군을 맞았다. 일본 수비대의 사관 몇명도 또한 그 속에 끼어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가마를 4거리 복판에다 멈추게 하고, 스스로 가마 밖으로 나와 장병에게 일렀다.



"지금, 간신(奸臣)이 궁중에 있어 국왕을 업신여기니 나라의 안위는 그대로 앉아 볼 수 없는 바가 있다. 나는 단연히 일어나 궁중으로 들어가 간사한 무리들[閔氏一派]을 내쫓고, 사직을 반석 위에 놓으려고 한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받들어 진력(盡力)하라. 만일에 나의 입궐을 방해하려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이를 베어 없애라."



이 말 앞에 장병들은 다만 숙연할 따름이었다. 대원군의 가마가 서대문 밖에 도착하고도 다른 길목에서 대기중이던 일본 수비대가 오지를 않아 거의 1시간 동안이나 지체하였다. 새벽 별들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먼동이 트려는 동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 갔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놀란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모두 초조해져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간 혹시 궁중에 소문이 전해지지 않겠냐며 가슴을 태웠으나, 수비대가 오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이윽고 1명의 전령이 말을 달려 일행에게로 와서 얼마 안있어 수비대가 도착한다고 알렸다. 그럭저럭 새벽달은 빛을 잃어가고, 별빛도 희미해지면서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그제서야 겨우 수비대 장병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곧 한국 훈련대와 합류해 전투 준비를 갖추고, 혁낭의 탄환을 끄집어내어 총에다 재었다.

이리하여 대원군의 가마를 한 가운데로 해서 일본 수비대가 선봉을 서고, 훈련대는 가마 앞뒤를 호위하며, 최후방엔 또한 일본 수비대가 따랐다. 낭인들은 대부분 가마 옆에서 붙어 갔다. 뜀박질로 서대문으로부터 경성 시가로 들어가 정동(貞洞)의 서쪽 길을 달려서 회상전(會祥殿) 앞을 지나 경복궁 정면의 한 길로 나섰다. 너무 달려서 일행은 모두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가마가 경복궁의 정문(正門)인 광화문에 거의 당도할 무렵 삐그덕거리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쯤 되어서 동쪽 하늘에 훤하게 먼동이 트기 시작했으나, 아직 사람의 그림자를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기 때문에 우람스럽고도 훌륭해 웅장한 기운으로 주위를 굽어보고 있었다. 광화문은 가로 20여간(間)에 높이는 7간이 넘게 대리석으로 쌓아 올렸는데, 정면에다 3개의 대문을 만들었다.

중문(中門)은 국왕폐하의 출입문으로 평소엔 열지 않았으며, 좌우의 양문(兩門)을 관인(官人)들의 출입문으로 삼고 있었다. 이 문의 석벽(石壁) 위엔 장대한 고루(高樓)가 세워져 그 장엄함이 비록 쇠퇴해가는 반(半) 망국(亡國)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왕궁의 위엄을 우람스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광화문 양쪽으로부터 뻗어나간 성벽은 높이가 5간 남짓해 멀리 경복궁의 사방을 감싸고, 왕궁 뒤에 있는 삼각산을 두르고 있었다. 야간에 광화문의 철문(鐵門)은 굳게 닫혀져 있었기 때문에 대원군의 가마가 서대문 밖에 머무르고 있을 동안에 먼저 수명의 일본 경관을 파견해서 문을 열도록 하였다. 일본 경관들은 광화문에 당도하자, 밤새 비상용으로 준비해 두었던 긴 사다리를 문 왼쪽의 성벽에다 걸고, 이를 타고 벽 위에 올라 다시 긴 밧줄을 석벽 안으로 드리워 놓았으며, 이를 타고 문 안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해서 정문의 내부로 들어가 보니, 경비하는 총순(總巡)과 순검, 병사들이 깜짝 놀라 한 사람도 저항하지 않고 다투어 도망쳐버렸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왕궁의 철문도 이렇게 아무런 장애없이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가마는 일본 수비대와 한국 훈련대, 그리고 낭인 일당 30여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광화문을 들어섰다. 이를 계기로 의기를 돋구운 일행은 문득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했다. 병사들은 총검을 총대에 꽂고, 낭인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일본도(日本刀)를 빼어들었다. 바야흐로 수라장의 막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가마가 광화문에 들어와 한 30간을 치달려 두번째 소문(小門, 근정문)을 통과하려는 무렵, 뒷편에서 요란한 총성이 일어나면서 전투는 먼저 광화문 밖에서 벌어졌다. 우리 일행은 이 문밖의 전투에 개의치 않고, 그대로 궁중을 향해서 돌진해 들어갔다.

그러는데, 앞에서도 또한 총성이 들려왔다. 앞뒤의 총성이 고요 속에서 잠자고 있던 구중 궁궐에 메아리쳐 일시에 살기가 가득찬 광경으로 뒤바뀌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애초에 궁중에 들어서면 우리들의 전방에 있을 시위대와 충돌하게 될 것이고, 이 시위대를 돌파하지 않으면 목적했던 내전(內殿)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미리 짐작한 바이지만, 뒷편에서 일어난 총성은 어떠한 영문에서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행이 서대문 밖에서 수비대가 오기를 기다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이 소식이 궁중에 전해져 궁중에선 우리의 계획을 거꾸로 이용하려고, 우리를 광화문 안으로 끌어들여 전후 양편에서 협공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앞뒤로 적을 맞은 것으로 각오는 했지만, 어차피 목적지로 빨리 당도하는게 상책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광화문의 문루 유지(遺址), 중앙청 청사가 준공된 1927년에 이축시켰으나, 한국전쟁 도중 전소당했다. 
            낭인단 일행이 이 육중한 석축 관문을 돌파해 궐내로 진입하면서 여우 사냥의 살육극도 개시되었다.   




달빛이 교교(皎皎)히 흘러내리는 한밤중에 우거진 수양버들의 그늘에다 가마를 멈추게 하고, 대원군이 우리들에게 궁중으로 들어가는 행동에 대해 여러가지 분부를 내렸을 때처럼 심장이 녹아들 정도로 엄숙하고, 또 장쾌한 기분에 잠겼던 일은 없었다. 그 위에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통역하는 목소리가 낭랑하고도 힘있는 것이었다. 이때,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꼭 소설 가운데의 주인공들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법정에 나아가 예심 판사로부터 심문을 받을 때, 그 당시 오카모토의 명령이 어떠한 것이었냐고 귀찮게 파고 들었으나, 나는 지금 적은 것처럼 진술하였다. 판사는 오카모토가 '여우[狐]는 베어버려라'고 명령하지 않았냐고 몇번이나 캐묻고 했는데, 혹 그런 말이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의 정경(情景)은 말보다도 상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여운이 있어서 나을 것이다.

남대문 밖에서와 또한 공덕리의 고개 위에서 쉬면서 일본 수비대 장병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겪은 추위는 대단했다. 우리들은 부근 민가에서 짚을 징발하여 화톳불을 피우고 있는데, 대원군은 가마 안에서 연성 기침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화톳불을 쬐고 있자니 낭인들이 찬 일본도가 불빛에 비쳐 번쩍거리고, 얼굴엔 살기가 가득차 어떻게 보면 산적(山賊)의 무리들이 어느 토호(土豪)의 집을 털러 들어가는 꼬락서니 같기도 했다. 우리가 서대문 밖에까지 뛰어갔을 때엔 이미 한국의 훈련대가 길가에 늘어서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어떠한 심정으로 이 새벽의 사변(事變)을 맞고 있을까 상상해 보았으나, 그들은 조용히 줄지어 서있을 뿐 서로 말이 안 통하고, 얼굴도 알아볼 도리가 없어 그저 '무지한 한국 병사가 가엾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점점 먼동이 터오고, 사람들은 모여드는데 수비대는 오지 않았다. 한결같이 조바심을 내고 있는중에 이윽고 그들이 다른 길에서 나타났다. 이날 밤에 이렇게 길이 어긋나 거사에 참가 못한 낭인들도 있었다. 고바야시 마고이치로(小林孫一郞)도 그 한 사람으로 니이로(新納)라는 해군 소좌의 집에 몸을 붙이고 있던 그는 외출했다가 이번 일의 연락을 직접 받지 못했다. 밤이 깊은 연후에야 돌아와서 소식을 듣고는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의 통신원 나카지마 시바노스케(中島司馬之助)와 함께 둘이서 성밖으로 나가 공덕리로부터 오는 일행을 기다리고자 새벽녘까지 길옆에 잠복해 있었다. 이들은 근방의 지리에 소상했기 때문에 공덕리에서 오는 길이라면 우리 일행이 택한 남대문으로의 길보다는 수비대가 대기중이던 가까운 길로 나오리라 짐작하고, 그쪽 길에서 기다렸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은 끝내 합류하지 못한 채 추위에 견디다 못해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 안가서 경복궁 쪽에서 총성이 일어나 사태가 벌어진 줄은 알았으나, 결국 참가하진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장교가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의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혁낭에서 탄환을 꺼내어 총에다 재었고, 이렇게 곧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 생각을 하니 용기가 치솟아 일종의 표현하기 어려운 흥분된 감정이 끓어 올랐다. 우리들은 한국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 병사들을 앞뒤로 배치해서 나아가기로 했다. 나는 이 무렵 각기병을 앓고 있었고, 게다가 전날 밤부터 용산으로, 공덕리로 많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광화문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을 때엔 다리가 거의 말을 듣지도 않는 지경이 되버렸다. 이 무거운 다리를 끌고 병사들과 함께 뜀박질로 경복궁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서대문으로부터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까지의 거리가 또한 꽤나 멀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면서 간신히 일행에서 처지지 않고 따라가긴 했으나, 그때의 괴로웠던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을 들어서자 일행의 대부분은 뛰면서도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광화문 밖에서 일어난 총성을 들었던 것과 때를 같이해 '와아!!'하고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 처참한 새벽의 정경 속에서 살기가 온통 경복궁을 에워쌌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광화문 밖에서 일어났던 총성은 궁중 시위대의 계획적인 협공은 아니었고, 민비(閔妃)가 태산처럼 믿었던 한국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임오년 당시 왕비를 구출한 이래 총애를 받아왔다)이 인솔한 훈련대의 일부와 일본 수비대 및 대원군에게 속했던 훈련대의 일부가 서로 총격전을 벌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잠깐 얘기가 되돌아가지만, 일찍이 한국 훈련대는 일본 사관에 의해 교련을 받았으나, 점차로 궁중의 계교에 넘어가 그쪽 편으로 기울어져 간부엔 궁중파의 인물이 배치되었다. 위로는 형세에 따라 처신을 잘한다고 알려졌던 안경수(安駉壽)가 군부대신이 되었고, 민비의 총애를 받아 대단한 신임을 얻고 있었던 홍계훈이 연대장의 직책에 있었다. 홍계훈은 다시 그 부하인 제1대대장에도 민비파의 인물들을 배치시켜 단지 경골파(硬骨派)로 알려진 우범선만이 제2대대장의 지위를 보전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었다. 이날 밤, 우범선이 사면이 모두가 정적(政敵)인 속에서 그의 부하인 제2대대를 빼내어서 대원군이 궁중에 들어오는데 그 선구의 역할을 했다는데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고심이 있었으리라. 우범선은 [전날인] 7일 밤, 야외 연습을 핑계로 실탄을 병사들에게 분배하고, 병영을 나섰다.

실탄을 휴대한 야외 연습이란 실로 기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조희연(趙羲淵)도 또한 일본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杉村)의 방문을 받아 형세가 위급해진 것을 알았고, 7일 밤에는 직접 거사의 통지를 받았다. 그는 일전에 군부대신을 지냈던 관계로 곧 훈련대 제1대대 장교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궁중에서 꾀하는 훈련대의 해산이 날로 박두했으며, 이로 인해 위험이 눈앞에 닥쳐왔음을 토설하고, 대원군의 입궐을 돕는 게 그들에게 얼마나 이로운가를 설득했다. 훈련대 장교들도 위기가 절박한 정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희연의 권유에 따라 병사를 이끌고 건춘문(建春門) 밖에서 대기해 궁중으로부터 민비파가 도주해오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훈련대의 장교들은 원래 확고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의혹이 짙은 태도로 형세가 돌아가는 것을 관망한데 불과했다.

- by 을미사변 당시 거사 결행에 동참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가 사변의 정황을 회고하며 




            석양의 노을을 머금은 근정전 일대 정원, 고려조 후기의 경천사 불탑과 조화를 이룬 기묘한 광경이다.
            사변 당시 낭인들은 근정전 동측 회랑으로부터 진격하면서 샛길을 가로질러 건청궁까지 박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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