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우리가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해 자학해야 하냐? 국제, 시사








푸틴은 자신의 정권 출범 초기부터 소련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러시아를 열강으로 재건하는 것이 그의 의제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그의 계획은 특히 소련에 대한 향수(Nostalgia)와 호응했을 때에 인기를 누렸다. 소련의 붕괴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는 굴욕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들에게 안전과 사회적 보장을 제공했던 경제 시스템, 초강대국의 지위를 갖춘 제국,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소비에트 역사에 의해 형성된 민족 정체성. 러시아인들은 글라스노스트(Glasnost) 시기에 조국의 역사가 더럽혀졌던 것에 분개했다. 그들은 스탈린 시기에 수백만이 희생된 자신의 혈육에 대한 질문을 강요당하는 사실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얼마나 '나쁜가'에 대한 강의를 듣기를 원하지 않았다.

푸틴은 1917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자랑할 만한 업적을 가진 '강대국'이라고 재천명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이 다시 한 번 러시아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도록 도왔다. 푸틴의 계획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련 시기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표현했다고 판단된 교과서들은 교육부의 승인이 거부되었고, 결과적으로 교실에서 퇴출당했다.

2007년 푸틴은 역사학 교사 모임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역사 속의 어떤 '문제적인 면'에 관해서 살펴보면 그렇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나라가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몇몇 다른 나라보다는 그런 면이 적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역사는 몇몇 다른 나라의 역사 만큼이나 끔찍하지 않다. 그렇다. 러시아 역사엔 몇몇 끔찍한 면들이 있었다. 1937년에 시작된 사건들을 기억해보자. 그것에 대해 잊지 말자. 그러나 다른 나라들 또한 러시아 못지 않게 그런 끔찍한 사건들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어찌됐든 러시아는 미국이 베트남을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화학 약품을 수천 km의 지상에 쏟아붓거나 2차대전을 통틀어 쓴 포탄보다 7배나 많은 폭탄을 손바닥만한 나라에 떨어뜨린 짓은 하지 않았잖는가? 우리는 이를테면 나치즘과 같은 그밖에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국가들의 역사 속에서는 온갖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짊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푸틴은 스탈린의 범죄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깊이 골몰하지 말아야 하며, 러시아가 가진 '영광스러운 소련의 과거'의 건설자로서 스탈린이 이룩했던 업적과 균형을 맞추어야 할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통령이 의뢰하고, 일선 학교에서 강력히 추진되었던 역사 교사들을 위한 지도서에서 스탈린은 '조국의 현대화를 보장하기 위해 테러 작전을 합리적으로 수행했던' '유능한 경영자'로 묘사되어 있다. 여론 조사는 러시아 국민들이 혁명의 폭력에 대한 이런 골치아픈 태도에 공감하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2007년 3개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울리야노프스크]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시민들의 71%가 체카의 설립자 제르진스키(Dzierżyński)가 '공공 질서와 시민 생활을 수호했다'고 믿었다. 불과 7%만이 그를 '범죄자이자 사형 집행인'이라고 생각했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탈린 치하의 집단 탄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그들 중 대다수는 약 '1천만명에서 3천만명 사이의 희생자'들이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들 응답자 가운데 2/3는 스탈린이 조국에 긍정적이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는 여론 조사 결과였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 치하에서 국민들이 '더 친절하고, 연민의 정(情)이 깊었다'라고 생각했다. 수백만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러시아인들은 혁명의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국가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볼셰비키의 이념을 계속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또다른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인구의 42%는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의 귀환을 반길 것이라는 결과도 나와 있다. 2011년 가을, 수백만명의 러시아인들이 TV 쇼 프로그램인 <시간의 법정(Sud vremeni)>을 시청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러시아 역사에 등장한 여러 인물과 사건이 시청자들로 구성된 변호사 ・증인 ・배심원이 참여한 모의 재판에서 심판을 받았다. 시청자들은 전화 투표를 통해 판결을 이끌어 낸다. 그들이 도출한 판결은 러시아인의 태도 변화에 큰 희망을 품게 하지 않는다. 시청자들의 78%는 스탈린의 '반(反) 농민 전쟁'과 집단화의 재난적 결과에 대한 증거를 접하고 나서 소련의 산업화를 위해 농촌 집단화는 정당하다고['필요악'이라고] 여전히 믿었으며, 불과 22%만이 그것을 범죄로 간주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1939년] 비밀 협약에 대해 91%의 시청자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9%만이 그것을 2차대전을 발발하게 만든 원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 대해서도 동일한 투표수가 기록되었는데, 시청자 91%가 그 시절을 '가능성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 by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著 <혁명의 러시아(1891~1991)>에서 발췌



컬러로 보는 구(舊) 경동철도(京東鐵道) 협궤열차 사진집




              인천 방면으로부터 소금을 적재한 후 수원역에 도착해 하적(下積) 대기중인 '혀기' 11형 증기기관차
              일본차량(日本車輛)과 히다치(日立)에서 발주받았던 협궤선 증기차들은 1977년까지 운행되었다. 


           플랫폼에 정차중인 기관차, 1944년 수원역 운전 사무소에서 조립된 이래 30여년간 협궤 선로를 달렸다.   
           사진이 촬영된 68년도 기준으로 한국 국내의 현역 혀기형 증기기관차는 총 7대만이 잔류하고 있었다. 


             협궤선 화물차에 실려진 소금을 경부본선(京富本線) 방면으로 운반하기 위한 작업을 준비중인 광경
             경기만에서 산출된 천일염을 수송하려는 개통 당초의 기능은 증기차가 퇴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협궤 디젤동차. 1965년 인천 공착장에서 제조되었으며, 수인 ・수려선 전용으로 운행했던 여객차이다. 
             수인선이 폐선될 순간까지 경기도 중남부 일대의 오지를 누비며 서민의 발이 되어 준 꼬마열차였다.    
 

           경기 내륙의 산간지 일대를 횡단한 수려선 철길, 1일 5~6회 편성으로 여객차가 수원과 여주를 왕래했다.
           지역 물류와 여객 운송의 동맥이었던 협궤철도는 60년대부터 도로 교통과의 경쟁에 밀려 쇠락해진다.


             메주고개 길목에 자리잡은 멱조현 터널 전경, 이 굴다리만 지나면 용인군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된다.
             남한의 협궤선 구간을 통틀어 증기차 견인 열차가 통과하는데 난이도가 가장 까다로왔던 코스였다. 


            우측에 금학천(金鶴川)을 끼면서 한남정맥(漢南正脈)을 배경삼아 용인역 방향으로 펼쳐진 협궤 선로
            군청 소재지인 용인은 이천 ・여주와 더불어 수려선 철도의 주요 기착지이자, 상권 요지이기도 했다.  


            용인역에 도착해 승객을 하차시키는 여주행 열차, 동차와 객차가 하나씩 연결된 2량 편성의 여객차다.
            운송 실적이 급감하기 이전의 수려선은 수원과 지역 군 단위의 중핵 상권들을 묶어주는 촉매제였다.  


             여주를 향해 떠나는 열차, 당시 수려선 전 구간을 동차로 일주하는 데엔 2시간 반 가량이 소요되었다.
             

             용인역사 전경, 급수 시설이 구비된 보통역으로 전성기엔 이 정거장에서 발착한 열차 편성도 있었다.       
             협궤철도가 운행을 중지한 후 국도가 뚫리고, 도시화의 진전에 따라 현재는 그 흔적조차 사라졌다. 


            수원역 인입선상의 혀기 1형 기관차, 1952년 미(美) 육군이 미쓰비시에 발주 ・제작해 들여온 차량이다.
            국내의 협궤 증기기관차 가운데 유일한 푸러형이었으며, 퇴역 후 현재는 서울 화랑대에 전시중이다. 


            협궤선 화물차, 휴전 직후엔 동차 및 객차가 다수 소실되버려 화차로 여객까지 수송한 전력도 있었다.


           화성군 반월면(半月面)에 소재한 일리역(一里驛) 정거장, 수원으로 가는 상행선 열차가 진입하고 있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던 이곳은 20년 후 안산선 전철이 들어오면서 '한대앞역'으로 개축했다.  


            시흥군의 군자(君子) 염전지대를 횡단하며 인천 방면으로 이어진 수인선 철길, 좌측은 일반 논밭이다.
            1920년대 경기만 간척에 수반해 조성된 이들 염전은 남선(南鮮) 굴지의 소금 산지로 각광을 받았다.


           소래(蘇萊) 철교의 선상에서 바라본 포구 전경, 시흥군과 인천시 남구(南區)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이와 갯벌로 말미암아 난공사를 감수했다지만, 일약 명물로 남게 된 교각이다. 


            남동역 입구에서 송도(松島) 방향으로 촬영한 장면, 바다와 염전 사이의 제방 위로 철로가 놓여져 있다.
            80여만 평의 규모를 자랑하며 천일염을 끝없이 제공했던 남동 염전엔 5공 시대 산업 공단이 들어섰다. 


             염전과 갯마을을 뒤로한 채, 쾌속으로 달리는 열차 차창에서 시야에 들어온 송도 근방의 전원적 풍경
       

           송도역에서 소금을 싣고 대기중인 무개화차, 화물 운송이 중지될 때까지 수인선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전방에 보이는 구릉은 '조개 고개'인데, 열차가 왕래하게끔 절개시킨 협곡 사이로 선로를 부설해놨다. 


           종착지 남인천역에 도착한 협궤열차, 수원으로부터 52km 거리를 주파하는데 1시간 50분이 소요되었다.
           '수인역(水仁驛)'이란 별칭으로도 알려졌던 이 역사는 인천항 도크의 확장 공사로 1973년 폐쇄당했다.   


           남인천역 구내의 급수탑 앞으로 견인된 혀기 11형 증기기관차, 우측의 역사 쪽으로 회차 시설이 보인다.


            동(同) 기관차의 후미를 촬영한 모습, 기초적인 점검만 이뤄졌을 뿐 주요 수리는 수원역에서 감독했다.


            남인천역의 가솔린 동차, 개통 초기 경동철도가 도입했지만 성능 저하와 노후화로 66년도에 퇴역했다.
            경성 공장에서 조립된 전전(戰前) 일본식 3등 객차의 디자인을 취한 차량이다. 1963년 1월 31일 촬영    


           수원역 정차장으로 진입중인 혀기 8형 증기차 견인의 화물차, 그 뒤로 급수탑과 정비 사무소가 보인다. 


             대여섯량의 화차를 이끌고 일정을 마무리하려는 혀기 8형 증기차, 통표가 역무원에게 전달되고 있다.
             1934년 히다치 사에서 제조한 기관차로 촬영 이듬해 퇴역했으며, 국립 서울 과학관으로 기증되었다.


           플랫폼 앞에 정차하는 기관차, 유개화차 내부에 쌀가마를 비롯한 각종 화물들이 적재된 것이 눈에 띈다.
           화물 수송이란 경제성 차원에서 수려선의 물류는 1966년에 피크를 찍었으나, 이후 급속히 하락해갔다. 



형을 조롱했다가 조카한테 떼굴멍 당하다 세계사








'인선의 치(仁宣之治)'라고 불린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와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양(兩) 시대(1425~35)는 일반적으로 연속된 시대라 보고, 명 왕조가 창업에서 수성(守成)으로 이행되는 시대로 이해하여 왔다. 중국의 맹삼(孟森)은 일찍이 1930년대에 두 황제의 재위 기간을 일괄하여 하나의 시대로 볼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로 인종의 재위 기간이 1년도 채 되지 않았고, 둘째로 그 즉위가 영락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자(長子, 훗날의 선덕제)의 존재에 의해 가능했으며, 인종의 선정(善政)이 선종에 의해 잘 계승되었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이해는 정치사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사 분야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국가 재정 면에서 '인선의 치' 시대는 명조(明朝) 국가가 그 기반으로 삼아 온 강남의 '납량호(納糧戶) 지배'에 대한 동요를 자각하고, 일련의 개혁이 이뤄졌던 시기이다. 

그렇지만, 수성 시대의 기점에 있는 이 두 황제의 자질은 분명히 차이를 보이면서 서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도 사실이다. 아직 수도가 남경에 있었던 시기, 영락제는 황태자 주고치(朱高熾)와 한왕(漢王) 고후(高煦) ・조왕(趙王) 고수(高燧)의 3형제 및 황태손 첨기(瞻基)에게 태조 주원장의 능묘인 효릉(孝陵)을 참배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원래 황태자는 몸이 비만한데다 발에 병까지 도져 있었는데, 때마침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서 곁에서 내관의 부축을 받았으나 자주 넘어지곤 했다. 이처럼 황태자의 흉측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뒤따라가던 한왕 고후가 '앞에 가는 사람이 넘어지니, 뒤에 가는 사람은 조심해야지[前人蹉跌, 後人知警]'라고 야유했다. 그러자 황태손이 '뒤에 있는 사람은 더 조심해야지[更有後人知警也]'라고 맞장구치자, 고후는 뒤돌아보며 안색을 바꾸었다고 한다.

온후한 황태자와 아버지 영락제를 닮아 무인(武人) 기질이 다분했던 동생 한왕, 그리고 숙부 한왕을 능가할 정도로 예민한 성격의 황태손. 병약한 형을 대신해 황위 계승권을 얻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한왕을 둘러싼 이 일화는 부자(父子)지간임에도 홍희제와 선덕제 두 황제 사이에 개인적 자질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By 아라미야 마나부(新宮学) 著 <홍희에서 선덕으로(洪熙から宣德へ)>에서 발췌



정치사적 맥락에서 접근한 북경 천도의 연구 세계사




명대(明代)의 북경 천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35년에 발표된 오함(吳晗)의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함은 <명대 정난의 역과 국도 북천(明代靖難之役與國都北遷)>이라는 논문에서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 사후 일어난 제위 계승 문제, 그리고 건문제(建文帝)의 삭번(削藩) 정책이 '정난의 변'의 발단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여기서부터 북경 천도의 문제를 다루었다. 건문제의 삭번 정책을 비판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켰던 영락제(永樂帝)가 즉위 후엔 태도를 바꾸어 다른 번왕(藩王)이 자신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건문제의 삭번 정책을 계승했다. 즉위 직후인 건문 4년(1402)에 선부(宣府)의 곡왕(谷王)을 호광(湖廣) 장사(長沙)로, 영락 원년(1403)에 대녕(大寧)의 영왕(寧王)을 강서(江西) 남창(南昌)으로 이치(移置)시켰는데, 이는 제왕들의 군권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삭번 정책의 결과로 생긴 북변 방위력의 약화 문제를 교정하기 위하여 북경 천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또한 북송(北宋)의 사례를 염두에 두면서 정통(正統) 14년(1449)에 일어난 '토목(土木)의 변', 가정(嘉靖) 29년(1550) '경술(庚戌)의 변' 등의 사례를 들어 대(對) 몽골 방위라는 관점에서 군사의 중심과 정치의 중심을 일치시킨 북경 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이 오함의 선구적인 연구는 중국은 물론 일본의 명대사 연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정난의 변에서 출발한 오함의 경우 천도가 실현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하여 그 분석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의 연구가 [아직 영인본이 출간되지 않았던] <명실록(明實錄)>을 거의 이용할 수 없었던 시기에 이뤄진 점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정난의 변 이후 몽골의 군사적 위협을 다소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천도의 가장 큰 이유로 거론되는 몽골에 대한 방위 문제는 <태종실록(太宗實錄)>을 들추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영락제 즉위 초기에는 그다지 의식되지 않았다. 확실히 영락 원년 9월에 진원후(鎭遠侯) 고성(顧成)이 상주(上奏)했던 것처럼 명조(明朝)로서는 서남의 소수민족이나 동남의 왜구에 비교하여 북방의 몽골 잔존 세력은 가장 경계할 대상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상주를 접한 후 영락제가 신하들에게 말하고 있듯이 황제 자신이 친정할 정도의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북경 천도 실현의 과정과 천도 후에 거듭된 '몽골 친정' 가운데 그 위협이 강조되고, 토목의 변으로 방위상 중요성이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오함의 초기 연구에서는 북변 방위의 문제로부터 대몽 방위상의 의의와 한족에 의한 국가 통일의 유지가 일방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이 증대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산물로 한족 중심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게 깔려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오함이 주원장의 통치 정책을 동남에 수도를 두면서 동북 변경에 제왕들을 분봉했다는 데에서 군현제와 봉건제의 '절충책'으로 포착한 점은 '남경(南京)=경사(京師) 체제'가 지닌 과도기적인 성격을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더불어 오함은 여러 경제적 환경에 따른 제약으로 홍무제가 남경에 정도(定都)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첫째, 남경이 동남 델타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점. 둘째, 남경엔 오왕(吳王) 시대부터 내려온 궁전이 있었다는 점. 셋째, 주원장 정권이 '강회(江淮)의 자제'라 불리는 봉양(鳳陽) 출신의 동향 집단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집단은 향리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경사(京師) 북경의 궁성도(宮城圖), 명대 중기에 자금성을 묘사한 것으로 남경 박물원 소장 작품이다. 
             '영락의 성세(盛世)'를 대변한 이 기념비적인 건축군은 중화제국 최고 권부의 심벌로 자리매김했다.  




북경 천도를 결정하는데 북변 방위의 문제와 더불어 황제 개인의 심리적 요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일찍부터 지적되어 왔다. 이를테면, 데라다 타카노부(寺田隆信)는 개설서의 언급이긴 하지만, 천도 이유로 찬탈자 영락제에 대한 강남의 여론이 비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락제가 남경에 그대로 머무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고, 또한 북평(北平)은 연왕(燕王)의 창업지인데다 대 몽골 작전에 대한 전략상의 요충지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근래에는 대만의 장혁선(張奕善)이 <명 성조(明成祖) 정치 권력 중심의 북으로의 이동 연구>에서 특히 한 절(節)을 설정하여 북경 천도를 논하였다. 그것에 의하면, 다방면의 걸친 천도의 원인 가운데에서도 종래부터 지적되어 왔던 북변 방위 문제는 하나의 견해이지만, 그 전모를 명확히 밝히기가 어렵다 지적하고, 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임오순난(任午殉難)'이라 불리는 즉위 당초 남경에서 건문제 관료들을 참살할 때에 받은 반작용과 찬탈의 오명을 씻어내기 어려운 영락제의 심리적 요인을 상세히 서술하고, '남경에서 제위에 오르는 것은 오히려 바늘 방석에 앉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남경을 떠나려고 했으며, 학살과 찬탈에 대한 양심적 가책이야말로 북경 천도를 서두르게 한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음을 지적했다. 또한 대만의 주홍(朱鴻)은 <명 성조와 영락 정치>에서 이러한 심리적 요인에 덧붙여 새롭게 영락제의 성격에 주목했다. 정난의 변으로 제위를 찬탈한 영락제의 입장에선 자신의 심리적 응어리를 없애고, 오명을 씻는 일이 나머지 재위 기간 그의 정치 행위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여기에 '간질' 증상을 가진 인격적 특징까지 곁들여지면서 그는 정치를 하는 데서 언제나 커다란 업적을 바라게 되었다.

또한 영락제가 천도를 실시한 것은 그 자신이 자손 만대로 받들어지는 명조의 '백세 불천(百世不遷)의 군주'가 되어 태조 주원장을 능가하는 지위를 획득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북경 천도는 영락제가 자신의 역사적 지위를 긍정하고, 찬탈로 획득한 정권을 합법화시키려 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주홍의 연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락제가 유년 시절부터 간질 증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에도 종종 일어나는 발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만년[영락 13~14년]에 증상이 한층 격화되었다는 점을 처음으로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의 발작 증상은 정난의 변 거병 전야에 기만술로도 활용되었지만] 확실히 영락제에겐 상식을 벗어난 행위라든지 몇몇 기개 넘치고 장대한 사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도 그의 심리적 ・성격적인 면을 이해하고 나면 수긍할 수 있는 측면도 많다.

하지만, 영락시대(永樂時代)의 정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황제의 개인적인 심리나 성격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다소 일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천도는 황제 자신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여러가지 다양한 사회 생산과 경제 활동의 토대를 형성하는 인프라의 정비를 포함한 거대 계획이라는 점에서 그 계획이 우여곡절을 동반하는 가운데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과정과 명초(明初)의 시대 상황에 대한 고찰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북경 천도의 결과 영락제에게서 '안민(安民)의 이상'이 파괴되었다고 하여 대다수 연구자들과 달리 천도의 의의를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한 특징이다. 그 근저엔 지극히 도덕적인 역사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다음으로 일본 연구자에게 많이 보이는 초기 명조 정권의 확립 과정으로부터 접근을 시도해 보려 한다.




           찬탈과 압정(壓政)으로 공포 통치를 답습했지만, 명조의 전성기도 구현시킨 양면적 면모의 천자 영락제 
           내 ・외정을 오가며 장대한 경영이 전개되었던 그의 치세에 북경 천도는 사활을 건 핵심 프로젝트였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초기 명조 정권의 연구를 보면 '태조(太祖)'와 '성조(成祖)' 어느 쪽이나 창업의 의미를 나타내는 묘호를 부여하면서 모두 개성적인 홍무제와 영락제의 치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관심이었다. 먼저 전전(戰前) 일본 명대사 연구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시미즈 타이지(清水泰次)에 의하면 영락제의 정치는 태조 홍무제 정치의 계승이고, 건문제 말살이라는 출발점으로 나쁜 결과가 초래되어 '반동 복구 정책을 취한 결과 뛰어난 영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대될 만큼의 새로운 기축을 창출해내지 못했다'고 하지만, 태조가 미처 완성할 수 없었던 민정(民政)과 그 외의 일에 대해서 '유종의 미'를 거둔 것도 적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 북경 천도와 그 후에 일어난 '조운(漕運)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영락제의 정치를 태조와 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연속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영락 시기의 정치 체제 확립을 중시한 입장으로는 하기와라 준페이(萩原淳平)의 <명조의 정치 체제>가 있다.

하기와라 연구의 내용은 이렇다.


1. 태조 홍무제는 '봉양(鳳陽) 체제'로써 중국 전체를 통일했지만, 통일 후의 내정 면에서 봉양 체제의 한계를 느끼고 '화남(華南) 체제'로 교체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남경에 도읍한 화남 체제에서는 화북의 군사와 거기에 따른 정치 ・경제 체제에 한계가 뒤따랐다. 또 정난의 변의 주요 원인은 홍무제가 구축한 화남 체제에 바탕을 둔 과거 출신의 새로운 관료 집단과 그 브레인이 되었던 학자들과의 협력에 의한 과격한 혁신 정책에 있었다.

2. 이러한 화남 체제를 타파하여 북경 천도를 중심으로 하고, 북방 친정을 지렛대로 삼아 전면적 규모의 정치 체제를 수립한 인물이 영락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명조의 지배 체제를 실제로 구축한 영락기 정권 확립론을 주장했다.

3. 천도의 이유에 대해서도 북경이 연왕(燕王) 시대의 근거지라든지, 북변 방위에 적합한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고, '화남 체제에서 통일 체제로의 대전환'이라는 정책상의 중대 전환이 의도되어 있었다고 하고 있다.


하기와라는 '봉양 체제'를 봉양 출신이 주축이 되는 집단 지도 체제로 보고, 호유용(胡惟庸) 사건을 계기로 이들이 타파되었으며, 그 후에 군주 독재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 '화남 체제'라고 보고 있다. 다만, 이 화남 체제와 이후에 이어지는 천도 후의 통일 체제를 지탱한 각각의 여러 세력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또한 오함이 천도의 이유로 중시했던 북변 방위에 대해 하기와라는 자신이 연구해 온 명조 시기 몽골의 동향에 관한 연구를 발판으로 삼아 대외 문제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영락제 당시엔 국초에 비해서 북방 민족의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다고 언급했다. 몽골 친정의 주요 목적도 오히려 '내치(內治)'에 있고, '영락제의 통솔권이 미치기 힘든 군사 부문까지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체제, 이른바 군사력의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라고 하는 점도 흥미롭다.




            현대 북경의 전신으로 14세기 이후 도심 권역의 이동과 변형이 가해졌던 원나라 대도성(大都城) 약도
            몽골 황실이 버리고 떠난 대도의 궁성 자리엔 1380년 연왕 주체가 취번하면서 입주한 약력이 있다.




수도의 위치 선택을 중시한 지정학적 연구로는 파머(Edward L. Farmer)의 <명초 양경제도(兩京制度)>가 있다.

이에 의하면,


1. 수도의 위치 선택은 일종의 정치 제도의 확립이다. 수도는 '국경 컨트롤(Control)', '군사 통수권 장악', '재원(財源) 컨트롤'이라는 3대 기능을 가지는 것 이외에 일종의 '이데올로기'나 '문화 형태'를 표현하고 있고, 정권의 합법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거기에 사회 조직에도 유효하게 개입하여 그 지위를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2. 수도를 설치하는 데엔 왕조의 지리적 형세와 균형이 잘 맞아야 하고, 수도와 다른 지역과의 관계는 통치자가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명대의 외환(外患)은 [막북으로 쫓겨간 몽골 잔존 세력을 의식한] 북방에 있고, 그런 대외관계를 고려하여 북변 방위[혹은 초원에 대한 통제력]에 유리하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3. 역대 수도의 변천을 보면 당나라 이전엔 관중(關中) 지구의 장안(長安)을 도성으로 삼았고, 때로는 낙양(洛陽)을 부도(副都)로 삼았으며, 온 나라의 형세를 보면 동서로 이동하는 형태였다. 당조 말기부터 권력의 중심은 관중에서 동쪽 대평원 지대로 이동하였고, 권력의 기축(基軸)은 남북으로 이동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명초에 태조 주원장이 남경에 수도를 정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하면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파머의 연구는 명대 초기 양경제도에서 나타난 수도의 위치 선택의 문제를 왕조의 정치 체제 확립 문제와 관련지어 이론적으로 고찰한 최초의 연구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단조 히로시(檀上寬) 및 주홍에 의해서 상세한 소개와 비판적 검토가 이뤄졌기 때문에 이들 연구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거기에도 지적되어 있듯이 파머의 연구는 수도의 위치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수도 북경의 성립 과정에 대한 생성론적인 고찰은 미진한 상태로 끝나 있다. 특히 연구 대상이 '원말(元末)~홍무 연간부터 홍희(洪熙) 연간[1355~1425]'으로 한정되어 있어 천도 직후에 일어난 삼전(三殿) 소실 후 북경의 위상에 대한 커다란 동요가 충분히 인식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선덕기(宣德期)부터 정통기(正統期)에 걸친 제2차 북경 행재기(行在期)에 대한 문제가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 중국 사회 과학원 역사 연구소의 만명(万明) 교수는 파머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선덕~정통 연간까지를 새롭게 시야에 넣어 고찰하였다. 그는 홍무 개국기부터 정통 초년에 이르는 양경제의 형성과 확립 과정을 창설기, 변화기, 확립기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황제의 권력 강화를 위해 채택되었던 양경제가 정치 ・군사적 중심의 유기적 결합에 의해 효율적인 전국 통치를 가능하게 했음을 밝히고 있다. 홍무~영락 연간에 이르는 초기 명조 정권 확립 과정에서 천도 문제를 중시했던 연구는 단조 히로시의 <명 왕조 성립기의 궤적, 홍무조의 의옥 사건과 경사 문제를 둘러싸고(明王朝成立期の軌迹, 洪武朝の疑獄事件と京師問題をめぐって)>이다. 단조는 홍무기와 영락기 사이를 단절로 보는 종래의 통설과 달리 홍무에서 영락으로 이어지는 추이를 정권 확립 과정의 일관된 움직임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영락제는 즉위 직후 내린 조칙(詔勅)에서 나타난 글자 그대로 '진실로 홍무조의 방침을 계승하고자 했다'고 보았고, 오히려 건문제의 시기를 '일시적인 역행 시대'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단조의 이해에 중요한 근거는 홍무제 만년에 거론된 북방 천도 계획이다. 이에 근거해서 '천도는 홍무 조정 이래의 방침이었고, 마침 영락제가 구체적인 도시로 북경을 선택하였는데... 어디까지나 태조 주원장의 유지를 실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해하고 있다. 단조의 연구는 홍무기부터 영락기에 이르는 초기 명조 정권의 궤적을 '강남 지주층의 이익 대변 기관'이었던 폐쇄적인 '남인(南人) 정권'에서 중화제국(中華帝國)=통일 왕조로 탈피해가는 과정을 내재적으로 파악해 이러한 정권 확립의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거쳤던 홍무기의 '경사 문제'를 잘 위치시키고, 그 연장선상에서 북경 천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중이던 1901년에 종군 기사가 촬영한 모습이다.
           



1970년대까지의 명초 연구가 주원장 집단에 대한 협의의 정치사 연구와 지주제나 이갑제(里甲制) 연구로 대표되는 사회 경제사적인 접근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단조는 이 양자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새로운 정치 사회사 연구의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남인 정권에서 통일 왕조로'라는 비약의 도식은 앞에서 소개한 하기와라의 '화남 체제에서 통일 체제로의 비약적인 전환'과 거의 같다. 다만 하기와라의 경우엔 영락제에 의해서 명조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것에 반하여 단조의 경우엔 오히려 홍무 13년(1380)의 '호유용 옥사 사건'을 거친 시점을 전제지배 체제의 '제1차 확립기'로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천도의 배경을 논하는데 있어서 오함이나 파머가 북변 방위의 문제에서 고찰하고 있는가 하면, 하기와라와 단조는 모두 정권의 내부적 요인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기와라는 주로 군사력의 중앙집권화의 문제에서 북경 천도를 설명한 데에 반해 단조는 '여론'이라는 강남 지주계급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단조의 실증 연구에선 주원장 정권의 확립 과정에 대한 검토가 주요 목적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천도 문제가 부상해 온 배경을 설명하면서도 영락제의 의한 북경 천도 그 자체의 역사 과정이 구체적으로 고찰되지는 않았다. 첨언하자면, '남인 정권', '진정한 통일 왕조의 확립', '일원적 통일 지배'라는 논점은 나중에 단조 자신도 언급했듯이 한족 사회 내지는 중국 본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영락제의 관심이 이러한 한족 사회 내부에만 그치지 않고, 전대의 몽골 ・원조(元朝) 시대로 확대시킨 '중화 세계'를 계승해 농경 사회 뿐만 아니라 유목 사회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선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70년대까지 일본에서의 중국사 연구가 강한 일국주의적 시점에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가 일찍이 논했던 '동아 공동체(東亞共同體)'라는 관점은 아직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호소노 코오지(細野浩二)도 홍무 연간의 '남경 경사 체제'의 역사적 구조를 논하는 가운데 이 체제하에서 의제(擬制) 원조적 명조의 지배 확립을 도모해야 할 건문제에 대하여 명 태조의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지배 확립의 지향으로부터 나온 '제왕 요청 논리'에 존립 기반을 두고 있었던 연왕 주체(朱棣)가 정난의 변에서 승리하고, 북경 천도를 실시하여 태조의 일시동인적 지배를 확립했다는 것을 간파하여 서술했다. 세번째로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 근세 사회사 ・동아시아 세계의 전개로부터의 접근이다.

앞에서 소개한 초기 명조 정권의 확립 과정으로부터의 접근이 주로 명대사 입장에서 고찰된 데 반하여 '원명혁명(元明革命)의 연속성'이라는 시각에서 고찰한 연구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홍무에서 영락으로-초기 명조 정권의 성격(洪武から永樂へ-初期明朝政權の性格)>이다. 미야자키에 의하면 원 ・명의 교체는 '민족혁명'이란 인상과 달리 원대의 유풍을 답습한 점이 많다고 하고, 구체적인 예로서 문관보다 무관을 중시한 점이라든지, 군무(軍務)의 세습, 제자(諸子)를 분봉시킨 동성(同姓) 봉건제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태조 주원장의 정책에는 몽골이 형성했던 '동아 공동체'라는 통상 블록을 해체하고, 중국 본토를 강역으로 한 단일 민족 국가의 형성을 지향했던 데 반하여 영락제 정권에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 공동체의 부활을 의도하고 있으며, 원조로의 회귀성마저 보인다는 것이다.




          영락제의 막북 원정도, 한인(漢人) 천자로서는 유일하게 만리장성 이북까지 직접 출정한 기록을 세웠다. 
          번왕 시절부터 체득했던 몽골식 유습을 배경삼아 '화이질서'를 재편시키려는 동기와 요인이 작용했다.




영락제의 경우, 대외적인 자세와 더불어 북경 천도에서 보이듯이 홍무제가 취한 정책에서의 전환이 나타나 있기에 오히려 원 세조(元世祖) 쿠빌라이 칸의 후계자로서의 측면이 보인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홍무에서 영락으로의 변화는 영락제 개인적인 성향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 전체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었다. 즉, 세계의 대세가 몽골 ・중국 ・만주를 한 덩어리로 묶고, 유라시아 전반에 걸쳐 통상 블록을 취하고 있던 대원제국(大元帝國)의 부활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명조는 건국 이념에 반하여 스스로 변질하면서 원제국의 후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미야자키의 문제 제기는 역사를 설명하는데 단대사(斷代史)적인 고찰로 수습할 수 없는 탓이라 그랬는지, 발표 당시[1969년]엔 학계에서 그의 이론이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와 단조가 이 학설을 재평가하고, 강남 지방의 존재 형태를 근거로 원 ・명 교체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문제에 대하여 고찰했다. 근년에 몽골 시대를 유라시아 세계사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를 활발히 하고 있는 스기야마 마사아키(衫山正明)도 명조가 여러 측면에서 '대원 울루스'의 패턴을 계승하고, 중국 본토에만 머무르지 않는 중화 통일왕조를 최초로 형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북경 천도에 관해 서술하면서 미야자키처럼 영락제가 '역행(逆行)'의 아버지 홍무제와는 다른 의미에서 명제국의 '건설자'이고, 대원 울루스의 재현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더욱이 왕검영(王劍英) ・왕홍(王紅)이 명대 북경성은 전체적인 규격면에서 대도(大都)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진술했듯이 도성 계획상에 있어서도 원 ・명의 연속성이 새롭게 주목된다고 할 수 있겠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북경은 원래 '경계 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역사적으로 볼 때 화(華) ・이(夷) 양 세계의 중심으로서 화이질서의 총합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단조 히로시도 최근 자신의 저서 <영락제>에서 북경 천도를 새롭게 '화이질서 통합을 향한 마지막 단계'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중국에선 화이질서는 역사적으로 존재하던 이념 문제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세계 최대의 다민족 국가라는 점과 밀접히 관련지으려 하고 있다. 1985년에 간행된 <북경사(北京史)>에서 허대령(許大齡)과 장인충(張仁忠)은 명조와 원조 잔존 세력간에 대립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경의 각 민족과 내지 한족과의 '연계'는 계속 강화되어 갔으며, 몽골과 동북에 근접한 북평(北平, 北京)이 통일된 다민족 국가의 수도로서의 우월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염숭년(閻崇年)의 <명 영락제의 북경 천도를 논술함(明永樂帝遷都北京述議)>도 마찬가지로 천도를 다민족 국가의 형성이란 점에서 설명하려 했다. 북경에 수도를 둔 여러 왕조들 가운데 전연(前燕) ・요(遼) ・금(金) ・원(元) ・청(淸) 등은 새외 민족(塞外民族)인 데 반하여 명조만은 예외로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한 것은 중국 도성사상(都城史上)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영락제의 천도는 선제 홍무제의 유지를 결코 완전히 승계한 것이 아니라 지리와 역사, 군사와 민족, 정치와 사회 등을 고려한 후에 내린 중대한 정책 결정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명조의 북변 지배 및 다민족 국가의 통일을 강화하고, 더욱이 천도가 현대의 도시 북경의 기본 계획을 만들어 놓아 북경은 명청대(明淸代) 양대 5백년이나 계속된 왕조를 이룩함으로써 중화 문명의 상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 By 아라미야 마나부(新宮学) 著 <북경 천도의 연구(北京遷都の硏究)>에서 발췌



이민족 풍속의 일소는 탁발씨처럼 해야 한다 발언록








예부상서(禮部尙書) 호영(胡濙) 등이 상주했다.

"저번에 산동(山東) 좌참정(左參政) 심고(沈固)가 말하기를, 중외(中外) 관사(官舍)의 군민(軍民)들이 모자를 쓰거나 옷을 입는 것이 오랑캐 제도의 풍습이었습니다. 말하고 궤배(跪拜)하는 것도 오랑캐의 풍속에서 배웠으며, 갓끈을 드리우고 깃털로 장식했는데 정수리는 뾰족한데다 소매는 짧습니다. 중국 사람이 견융(犬戎)의 풍속을 본받아 귀한 것을 망각한 채 천한 것을 따른 셈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옛날 북위(北魏)는 근본이 호인(胡人)이었으나,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후엔 오랑캐 풍속을 금지시켰습니다. 하물며 성상(聖上)의 교화(敎化)와 법도는 지난날보다 높은데 어찌 허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산동 우참정(右參政) 유련(劉璉)도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도찰원(都察院)에 방(榜)을 내도록 명하시어 감찰어사(監察御史)로 하여금 순안(巡按)하여 엄금하게 하십시오."

이를 그대로 따랐다.


- by 명 영종실록(明英宗實錄) 권(券)99 정통(正統) 7년(1442) 12월 3일조(條) 항목에서 발췌



명조(明朝)가 개국한 지 70여년, 북경 천도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경사(京師)와 그 인근에선 관민을 불문하고 몽골풍 잔재가 짙게 횡행하고 있으니, 이를 단속하고 교정시켜 한(漢) 문화의 부흥은 물론 예치와 교화의 모범을 보이시라는 대신의 상소문쯤 되시겠다. 혈통은 선비족 오랑캐 출신이지만 철두철미 중국적인 것을 추구하며 동화된 위나라 효문제도 해냈건만, 탁발씨보다 우월한 정통제 폐하느님께서 걔보다 못할 것은 없다능!

이 정도의 뉘앙스라 보면 이해가 빠를 듯 싶은데, 초원으로 쫓겨난 그 천한 생면부지 오랑캐 떨거지들한테 포로로 잡혀가 풍찬노숙하고, 징검다리 재위 기록까지 세우게 될 줄이야 저 시점에서 누가 상상이나 했으련만은.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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