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 보도가 아니라 실상을 숨기고 싶은 거겠지 잡소리










하라는 사드 배치는 안하고 이 핑계 저 핑계 돌려가며 시덥잖은 꼼수로 미중 사이에서 박쥐질 좀 간보다가 트황상의 빠따맞게 생겼으니깐 부랴부랴 태세 전환하더니, 전매특허인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과거사 타령 울궈먹는 것도 모자라 북녘 체고조넘에게 입공(入貢)하고 싶어 안달난 트롤짓으로 미일선 3각 공조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치게끔 초래했던 당사자국치고 너무 염치가 없는 것 아닌가?ㅉㅉ 섬나라 극우 미디어의 악질적 혐한(?) 보도가 전파타자 자칫 조선 패싱론이 공론화될 걱정도 작용했겠으나, ㅈㅂ혁명의 수장이신 우리 이니 사마의 조넘이 더럽혀졌다는 열폭을 보노라면, 피는 못속인다고 남북 조선이 본래는 동복 형제이자 한 민조쿠였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각설하고 요근래 일본쪽에서 흘러나온 소스로 BH 집구석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모양인데, 이니 사마가 동작 그만 외쳐대면 세계가 주시할 것처럼 허파에 바람넣을 땐 언제고, 대북 봉쇄에 초를 친데 대한 자기 반성 따윈 까먹은 채 형편이 다급해지니깐 천조국 명의를 빌리려는 작태는 한심스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당당히 운전대 잡으며 Uri 민조쿠끼리 주도권을 행사해보자는 로망에 사로잡혔던 동북아 구녕자의 소신과 원칙이 대쪽같은 양반들께서 호기는 어디다 내버리고 뜬금없이 3각 공조 운운하게 되셨수들? 그런 와중에도 왜곡 보도를 빙자해 방중 스케줄을 기정사실화해버렸으니, 동방예의지국으로서 원조 어버이께 바친 사대의식 만큼은 과연 지극정성인 셈이군.ㅋ

익명의 BH 고위 관계자(ㅋ)가 익명의 백악관 고위 관계자(ㅋ)랑 협의해서 간사한 쩍바리들의 이간 책동에 함의된 심각성을 공유하고 일침 넣도록 협조를 구했다는 것이 기사의 골자인데, 그리 민감하고도 꿀릴게 없는 사안이라면 기왕 공신력을 더하도록 백악관쪽에서 직접 모종의 성명을 발표한다던가, 최소한 관계자의 실명 혹은 직급 정도는 언급해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헌데, 이 보도를 처음 송고한 연합뉴스를 위시로 국내 어느 언론도 더이상 상세한 내막에 관해 부연이 없을 뿐더러 특히나 백악관에 이니의 팬클럽이 결성되었다는 5공 시절 보도지침 당국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코미디성 발언이 기재되면서 해당 보도들은 그 신빙성을 상실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진실은 유엔 총회 연설 직후 이니와 수행 참모진들이 미일선 3국 정상회담에 임석하게 된 찰나에 트황상께서 깜짝 주재한 아베 총리의 63회 탄신제 축하에 들러리역 서야만 했다는 대형(?) 이벤트를 은폐시키는 과정에서 맛보았던 낭패감을 메꾸려는 소재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지. 남조선 대통령과 참모들이 천황도 아닌 총리대신의 생일파티에 테이블을 마주앉아 축복의 송가를 부르는데 보조를 맞췄다는 사실이 반도에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무슨 사단이 일어날지 누가 장담하겠어? 그것도 이토공보다 둘째가라면 서러울만치 역사상 반도인들한테 가장 많은 미움을 산 총리 아베상을 위해 박수 들러리 역할을 떠맡았다니, 반일 모태신도들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감도 안 잡히지?

필시 그 순간의 비참한 광경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게끔 해달라며 미일쪽 실무 관료들한테 애걸복걸 통사정하고, 아베의 생일파티 관련 얘기는 일절 삭제시키라며 기자들 닦달했을 광경이 눈으로 안 봐도 훤하디 훤하구만. 정황상 이 사태는 트황상이 사전 설명없이 즉흥적으로 마련한 이벤트였을 가능성이 농후하거니와, 일선관계의 민감성을 모를리 없는 미국에서 왜 굳이 저런식으로 이니에게 모멸감을 안겨줄 만한 환경을 조성했을까? 까놓고 대북정책에 있어서 가타부타 남조선의 부화뇌동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노골적 겁박을 조선인들이 경계해마지 않는 자국 패싱의 반증인 미일동맹 과시를 통해 경고한거라 해석하는 도리밖에 더 있겠음?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려야만 산다.




 

       Shinzo에게 진상된 '촛불'의 위력은 한 입 바람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하고 싶은대로 다 한 이니와 국격 올라가는 소리 잡소리






폭주로 치닫는 또람뿌와 로켓맨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유지한 가운데






대북 압박을 견지[푸웁]하면서도 유엔에서 평화주의를 역설하시고,






세계 시민상 수상에 삐용챙 올림픽 홍보역을 자임했을 뿐만 아니라  








백악관에 팬클럽까지 갖게 된 우리 이니의 고품격 방미 순방 성과~!!!








...는 페이크고, 현실은 퍼주기 꿈깨라는 천조국의 준엄한 경고 크리랑  






 
'해피 버스데이 Shinzo' 깜짝 파티에 들러리로 서야만 했던 웃픈 사정
 




주책바가지 퍼주기 본능 또다시 발동 잡소리











핵폭발이 시전되고, 탄도 미사일도 덩달아 종횡한 현 시국에 동북아 구녕자 시즌3의 포부를 가장하며 대북 조공의 구심력으로 삼고자 했었던 고철 운전대가 완전히 맛이 가버리자 푸짜르 면전에 달려가 나선 개발 따위 운운하더니, 유엔 명의까지 빌려가며 한 푼이나마 보태드리려는 그 일편단심 충정 하나 만큼은 가상스러울 지경이구만? 북녘의 체고조넘에 대한 인도주의적 애정의 발로라 허심탄회하게 밝힐 노릇이지, 원체 사람이 솔직하지 못해서야.ㅉ

원유 공급은 중단시켜야 한다고 립서비스하자 마자 북조선 경유 송유관을 시베리아까지 잇고 싶다느니, 나선에다 개성공단 2를 조성하면 어떻겠냐며 한 입으로 식언과 말 돌리기를 밥먹듯 내지르는 백치의 헛소리에 대명천하 어느 삼척동자가 귀를 귀울여주기나 할까? 핵 일진끼리 자웅을 겨룬 자리에 주제 파악 안되는 찐따가 기어들어와 심판역 자임하겠다 설쳐댄 것만으로도 ㅈㄴ 같잖을텐데, 기어이 세컨더리 보이콧 한 사발 쳐먹어야 정신 좀 차릴련지.

이 와중에 어김없이 양념치느라 바쁜 문슬람 기사단의 활약상ㄳ






키보드로만 양념칠 게 아니라, 엄한 소시민 대신 느그들이 직접 사재털어 퍼주기 종잣돈 마련해주지 그러냐?




오픈 도어?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세계사








그동안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국위는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이홍장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1898년 10월 총리아문(總理衙門)의 반(反)러시아파가 산해관-신민둔(新民屯) 철도의 부설을 위해 영국 신디케이트에서 차관[더욱 수정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유사한]을 받아들인다고 허가하였다. 심지어 정치적 방향에서도 청국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8년 가을부터 청국과 일본 사이의 화해(rapprochement)가 그 증거였다. 이토(伊藤) 후작은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북경에 나타나 총리아문과 황제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청국 군사학교에서의 일본인 교관 채용과 청국 학생들의 일본 유학, 청일전쟁으로 싹튼 대중의 적대감을 해소하는 선전국 창설 등을 위해 수개월간 사전 조율이 이루어졌다. 그같은 상황에서 무라비요프는 제한된 목적의 정책을 추구하면서 1899년 2월 영국과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4월 28일엔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을 성립시킨 각서 교환으로 영국과 타협했다. 이 협정의 조항들은 세 가지 타협을 대변한다. 영국은 양자강 유역의 그들의 철도 세력권을 러시아에게 인정받았으며, 대신 러시아는 만주의 세력권을 영국에게 인정받았다. 같은 날, 추가 각서를 통해 러시아는 영국 신디케이트 차관과 산해관-신민둔 철도를 영국이 운영 ・부설하는 것을 용인했다. [세력권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무라비요프의 지적이 받아들여져 산해관을 그 경계로 하였다. 그리고, 비테를 만족시키기 위해 몽골과 투르키스탄을 포함한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청국 영토를 러시아의 세력 범위에 넣었다. 그러나 비테의 반대로 관세 및 관세율에 관한 조항을 체결하는 협정은 배제되었는데, 이는 곧 러시아의 자본과 산업을 위해 만주를 개발하려는 무라비요프의 계획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도 있었다.

결국 러청(露淸)은행은 중국 중부에 관한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러시아의 외교가 영국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개입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러 타협으로 비테는 북중국에 관한 자신의 최대 계획안의 일부를 여전히 유지시킬 수 있었다.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이 영국과 러시아간의 철도 경쟁이나 그 경쟁에 대한 계획들을 종식시킨 것은 아니었다. 각서를 교환하자마자 러청은행은 산해관 철도에 대한 영국의 차관을 다시 매입하기 위해 기회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만리장성 이북에서 철도 부설을 촉진하는 유일한 중재자가 되었다. 이는 영국의 이익과 철두철미하게 대치되었다. 그러나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이 영국과 러시아의 비밀스러운 중국 분할 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 조치에 대한 청국의 반대는 크게 누그러졌다. 

신임 러시아 공사 기르스(M.N.Giers)로부터 압력을 받은 총리아문은 6월 1일과 21일에 북경의 북쪽 및 동북쪽으로 향한 모든 새로운 철도는 러시아나 청국이 부설해야 한다는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한 서면 보증을 해주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무라비요프가 주장한 영국과 러시아의 철도 이권 경계선을 실제로 획득할 수 있었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자국 의회에서 협정에 명시된 '양자강 유역'을 명확히 하라는 채근을 몇 번이나 당해야 했는데, 이같은 해명 요구는 러시아 외무성에서도 빈번하게 제기했다. 동아시아와 런던의 영국 신문들은 갖가지 루머를 신문의 눈에 띄는 곳에 기사화했는데, 캬흐타(Kiakhta)에서부터 우르가(Urga)와 칼간(Kalgan)을 경유해 북경으로 가는 러시아 철도 계획과 청국 정부가 공사를 중단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안(西安)까지의 철도 부설에 관한 소문이었다.




           중화제국의 장성(長城)이 허물어지자, 대륙 침투와 분할을 가속화시킨 열강 각국의 행태를 풍자한 삽화
           19세기말 고립주의적 전통으로부터 탈각하기 시작한 미국은 중국 시장의 장래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동아시아 밖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심각한 경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독일의 노골적인 적의와 전세계의 일반적인 친(親)보어적인 동정심 때문에 동아시아에선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6월에 영국의 첫 원정대가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고, 수개월 후에 차르와 무라비요프는 헤이그에서의 만국평화회의 계획을 출범시켰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선 비공격적인 정책을 전개하는 편이 바람직했다. 1899년 9월 6일, 미국의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는 중국의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을 개괄한 회람장을 런던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나중에는 동경로마 ・파리에 각각 발송하였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세력 범위'를 보유한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선언할 수 있을지를 문의하였다.

첫째, 열강은 "소위 '세력 범위'내에 귀속된 권익이나 조약항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할 것인가. 둘째, 열강은 '...모든 항구에 하역되거나 선적한 모든 상품들에 대해 국적을 불문하고 중국의 조약 관세를 적용시키도록' 선언할 것인가. 세번째로는 1898~99년 영러 교섭에서 비테가 강력하게 옹호한 바 있었던 동청철도와 남만주 지선(支線)의 번영을 희망한 러시아를 재차 공격했다. 회람장은 앞서 언급한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할 것을 요구하였다. '세력 범위'내의 어떤 항구를 방문한 다른 국적의 선박들에게 자국 국적의 선박에 부과하는 것보다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동일 거리를 운송하는 자국 국적 열차의 상품에 부과하는 것보다 '세력 범위'를 통해 운송된 다른 국적의 상품과 그 '범위'내에서 부설 ・통제되거나 운영되는 철도에 더 높은 요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조항을 만주의 러시아 철도 사업에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차별이며, 러시아에겐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청국은 이미 세력권으로 분할되었고, 러시아만이 실제로 그같은 철도 사업을 대규모로 시작했으며, 다른 철도들은 당시까지도 아직 '계획'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세번째 조항의 적용은 실질적으로 러시아에게만 영향을 줄 것이었다. 러시아는 1896년 9월 8일의 동청철도 협정 제2조에 따라 차별적인 철도 요금을 부과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동청철도, 남만주 철도는 당시에 몇몇 지점에서 동시에 부설되고 있었다. 만주철도가 1899년에 오브(Ob)강에 도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될 때까지 관동(關東)의 대련만 및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철도들은 원칙적으로 대외무역의 운송 수단으로서 기능할 것이었다.

주요 열강은 해상무역으로 동아시아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보다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경쟁력있는 무역을 용이하게 할 것이 강조된 1899년 7월 12일의 칙령에 따라 대련만은 관세 자유항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관세 자유항이었으며, 1898년 8월의 선언에 따라 1901년 새해 첫날까지 자유항으로 남았다. 헤이의 선언을 수용하는 것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재정과 경제적 권익에 치명적이었다. 문호 개방 선언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이었다. 무라비요프와 당시 주미(駐美) 러시아 대사였던 카시니(Cassini)는 헤이 회람장에 함축된 경제적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숨겨진 의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각서의 중요성을 재빨리 간파한 비테는 무라비요프에게 여타 열강의 반응을 기다리도록 설득했다.




            1898년부터 조차되어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 통상 진출 교두보였던 요동반도 남단의 대련항(大連港)
            군항 여순(旅順)과 더불어 관동주(關東州)의 중추 도시였으며, 남만주로 출입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1899년 11~12월에 영국 ・프랑스 ・일본은 '권익을 보유한 모든 열강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것임을 보장한다'는 유보 조항을 달아 문호 개방 선언에 동조하였다. '세력 범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1900년 1월에 유보 조항 없이 동의를 표했으나, 2월엔 위의 세 열강과 같은 유보 조항을 달아 동의하였다. 1899년 12월 30일, 무라비요프는 주러(駐露) 미국 대사 타우어(Tower)에게 헤이의 공문에 대한 러시아측 답신을 송부하면서 다르니(Dalny)로 개명된 대련만의 관세 자유항 선언이 러시아가 '문호 개방 정책을 따르려는 확고한 의도'의 증거라며 어설프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조약항에서의 관세 적용 문제를 다룬 헤이의 회람장의 두번째 조항은 수용했으나, 철도 요금을 다룬 세번째 조항은 완전히 무시했는데 이는 문호 개방 정책을 일축한 것이나 다름없어 다른 열강의 거부를 유도하였다.

열강의 수락은 곧 '다른 열강과 함께 행동한다'는 유보 조항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3월 20일의 헤이의 회람장에서는 다른 열강이 표현해왔던 유보 조건에 부응하여 미국 정부가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원안(原案)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새로운 조치(démarche)에 대한 '체면치레의' 마무리용 언급에 불과했다. 문호 개방 선언은 대부분의 국가들에게 수용되지 못하고, 러시아에게는 단호하게 거부된 그저 하나의 독트린이자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에 따라 제한당하고, 문호 개방 선언으로 위협을 받게 된 러시아의 동아시아 팽창은 러시아 국내 정세와 만주철도 사업의 예기치 않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더욱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1899~1901년에 유럽령 러시아는 재정과 산업 방면에서 위기[=공황]을 경험했다.

1899~1900년의 산업화 열풍 속에서 중공업의 급속한 팽창은 과잉 자본과 투기성 투자를 초래했는데, 결과적으로 민영철도 및 벤처사업의 빈번한 파산을 가져왔다. 재무성은 엄청난 경비의 지출로 빚에 허덕였다. 1898년의 계획, 대형함대 건조와 육군 포병대의 재무장 완비,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만주철도의 동시적인 공사 진행을 위한 경비 증액 등에 따른 지출이 추가로 초과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만주에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했다. 6천명 이상의 러시아 군인과 노동자, 6만명 이상의 중국과 만주 노동자들이 철도 공사에 종사했으나 이루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사고가 기한을 늦추고, 새로운 경비를 추가시켰다. 청국 당국자와 중국인들은 공사를 맡은 러시아 당국자들에게 협조하고자 했지만, 1898~1900년 동안 남만주에선 산발적인 반대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 장교 ・엔지니어 ・노동자와 중국인 인부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1899년엔 지방 행정 당국의 선동을 받은 중국인 공격자들이 심지어 대포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군사 시설과 역사(驛舍)에 필요한 도로와 토지를 러시아인이 사들이는 데엔 철저한 반대가 뒤따랐고, 관동주의 중국인들은 납세를 거부하도록 은밀하게 고무받았다. 반러적인 목단(牧丹) 총독은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의 정신을 무시하면서 우장(牛莊)의 영국계 회사들에게 목단 북쪽의 연태(烟台) 석탄지대의 조차를 허용했다. 길림(吉林)과 치치하얼(齊齊合爾)에선 러시아 당국자들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총독들이 소환되고, 총리아문의 반러파들이 선택한 새 인물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동청철도는 주어진 권한내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같은 반대와 싸워나갔다. 추가 수비대와 자금, 각종 설비가 무제한으로 만주로 향했다.

- By 앤드류 말로제모프(Andrew Malozemoff) 著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1881~1904)>에서 발췌




            1897년 8월 28일, 길림성 동녕현 소수분하(小綏芬河)에서 거행된 동청철도 기공식전의 관계 당국자들
            청일전쟁 이후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팽창 정책은 이 지역에서 영미일(英美日)과의 대립을 초래했다. 




주도권이고 운전석이고 나발이고 다 행복회로 놀음일 뿐 잡소리








현실은 미중이 적당히 딜을 쳐서 윗동네 핵 처리를 동결시키는 시늉이라도 내보이거나, 아님 작심하고 외과수술적 북폭으로 나서던가 둘중에 어느 옵션이 선택되더라도 남조선이 독자적으로 끼어들 여지 따윈 없거니와 제 몸 하나 건사해도 모자를 판국이거늘 무슨 떡고물 좀 얻어먹겠다는 마냥 저리 나대는지 모르겠다. 이니가 트황상과 통화를 하느니 마느니 가지고 일각에서 잡음이 일어난 모양인데, 솔직히 1주일도 더 지나간 시점에 와서 뒷북은 둘째치고 상호간에 신뢰마저 없는 정상들끼리 수화기 붙잡으며 입씨름해봤자 특별한 얘기가 오갈리 있나? 되려 감정의 골만 깊어질 듯한 우려부터 앞서는데 말이지. 이러려고 40조원 비빔밥 시식하면서 언플했나 자괴감이 들지 않음?ㅋ

하기사 이니와 그 주변에 포진한 운동권들은 80년대 반제(反帝) 민족자주 공상론의 세례를 받아온 이래 줄곧 저런 마인드였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보단 시중에서 서희 ・광해뽕에다 비스마르크식 현실주의까지 어줍잖게 짜집은 중개자 드립이 유행한 데 편승해 반도가 스스로 동북아 질서 변환에 중심축 역할을 할 수 있으리란 근자감 설레발이 난무중인 현상이야말로 작금과 같은 외교 참사를 빚어내게끔 기저 토양이 생성되는데 크게 일조했다는 점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함. 이는 진영 여부를 떠나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혐일 내셔널리즘과 비례하여 더욱 부추겨졌고, 거스름돈에 불과했던 왕년의 설움을 보상받고 싶은 욕구와도 맞물려 분출된 포퓰리즘 외교라 정의할 수 있겠지.

1%의 가능성이나마 부여해 남조선이 동북아 질서의 중개자로 나설 수 있다고 가정한들 남조선에게 그만한 역량과 배경은 커녕 최소 '정직한 중개인'으로서의 정치력 내지 신뢰도가 담보되지 못한 처지에서 저런 주장들은 예외없이 방구석 여포의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할 따름임. 하다못해 저 철혈 재상의 화려했던 외정조차 베를린 회의의 협잡극 이후론 파탄난 3제동맹의 공백을 메꾸고, 공수표들을 남발해가며 러불 및 영불간 접근을 막아내려는 처절하면서도 필사적인 생존(?) 경쟁으로 변질된 끝에 결국 대세가 기울어져버렸다는 것이 진상이었을텐데? 거기다 3제동맹의 대안이랍시고 밀어붙인 독오동맹 덕분에 독일이 점차 화약고 발칸 정세에 휘말리는 혹마저 붙인 건 덤이었고.

뭐,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독일은 으레 선망과 짝사랑의 대상이었으니, 빙의를 좋아하는 부류답게 주변 강국들에게 둘러싸인 지정학적 여건까지 투영시켜 'Uri도 비스마르크처럼 주도권 행사하고 싶습nida'라는 심리에 따라 중개자 운운하는 거라면 참으로 나이브한 마인드라 할 수밖에. 비스마르크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한 '정직한 중개인' 역할을 외세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점철된 조선인들이 능숙히 해내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을 뿐더러 누가 신용을 주기나 할까만은. 자칭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민족의 국가 수장이라면 대러관계 냉각 위기를 임기응변으로 넘기고자 독오동맹 체결을 강행한 재상에 대해 일갈도 마다하지 않은 빌헬름 1세를 귀감으로 삼아야 할 듯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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