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야망과 현실적 평화라는 딜레마에 방황한 카우디요 세계사








프랑코 체제가 대중의 동의나 합의를 도출해내기 위해 추진한 정책을 우선 프랑코 총통의 신화, 민족 가톨릭주의, 교육, 문화 정책, 이렇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프랑코 총통의 신화화(神話化) 작업이다. 프랑코 체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탈리아의 파시즘 및 독일의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신화와 상징과 의식을 사용했다. 신화와 상징, 의식이 대중의 정서와 감정, 상상력을 사로잡아 그들의 적극적 지지를 확보하는 수순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은 최근 파시즘과 나치즘 연구자들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프랑코 체제의 신화는 대다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가(Nuevo Estado)' 내에서 가장 파시스트적인 분야로 언론을 꼽을 수 있는데, 프랑코 정권은 이를 통해 독재에 매우 유용한 신화를 만들어내어 확산시켰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코를 '평화의 총통'으로 신화화한 것을 들 수 있다. 1940년대초 스페인 사람들을 사로잡은 테마는 억압과 질병, 기아 ・암시장 ・전쟁이었다. 이 가운데 2차대전은 스페인이 내전의 참상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전쟁에 휘말렸다간 나머지 요소들이 더 악화될 소지가 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따라서 스페인 국민 다수가 참전에 반대했다. 하지만 프랑코의 시각과 이해는 이와 정반대였다. 그는 내전에서 승리한 지 1년 반도 미처 경과하지 않은 상태라 물자와 사기가 여전히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평화와 복지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앞세워 참전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것은 프랑스를 물리친 후 북아프리카에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코는 이러한 야심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0년 10월 23일, 엔다예(Hendaye)에서 히틀러와 회동했다.

당시 프랑코는 평화주의적 감정이나 친(親)영국적 감정이 '빨갱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엔다예 회동에서 프랑코에게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스페인은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사실 프랑코가 참전을 모면하려 했다기보단 스페인의 역할을 과소 평가한 히틀러가 스페인의 즉각적인 참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재 체제를 사회적으로 수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정치 신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것은 곧 프랑코가 평화의 수호자라는 신화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신화는 체제의 공식 선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페인 국민들 다수의 갈망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들은 국내의 사회 ・경제적 재난과 유럽 정세가 점차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독재 체제가 평화를 유지해 줄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대중은 독재자의 진정한 의도를 당시는 물론이고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몰랐다. 마드리드 주재 독일 대사의 정통한 소식에 따르면 프랑코는 '국내의 대중적인 정서나 영국의 선전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었다. 전황의 주도권이 연합국에 넘어간 1943년 4월, 미국 대사 칼턴 헤이즈(Carlton Hayes)는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거의 모든 계층의 스페인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고, 스페인을 국제 분쟁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희망하면서 프랑코를 지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국 대리대사 제임스 바우커(James Bowker) 역시 1944년 11월, '적어도 현(現) 체제는 전적인 부패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법과 질서, 생명과 사유재산의 존중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다. 그래서 공화국 말기의 상황보다 훨씬 나은 조건이라고들 한다'며 본국에 보고했다.

프랑코 체제는 40년대 중반 이전에 '프랑코의 평화' 중심의 정치적 신화 제작을 마무리했다. 이 신화가 성공을 거둔 이유는 다양하며, 이들은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일상 생활의 파괴와 폭력, 분열의 과거 이미지에 맞서 안정과 정상화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필요성에 신화가 쉽게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체제의 외적 어려움과 상징적 판결[내전 승리]이 친(親)프랑코파가 아닌 계층마저 포함하는 광범한 사회 계층 속에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불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정권이 언론 조작과 공식 선전 활동을 통해 이같은 정서와 사상을 자극시켰고, 더 나아가 이를 체제의 존립에 대한 필요성과 사회적 정당화에 활용했다. 이처럼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한 '승리의 총통'에서 '평화의 총통'으로 재발견되었다. 이러한 신화화 작업에 관영 언론과 선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프랑스 남서부의 국경도시 엔다예 기차역 정거장에서 국방군 의장병을 사열하는 퓌러와 카우디요
               유럽 전쟁의 향방과 참전 보상의 조건을 놓고 두 독재자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며 대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코의 정치력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에 직면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들에게 엄격한 중립'을 요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2개월 후인 10월 31일, 그는 국방 위원회를 소집해 군대를 재무장하고, 징병으로 스페인 군대를 150개 사단 규모로 증강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상시 2백만명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모로코에 주둔 중인 스페인군의 규모를 증강시켜 그곳에서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한 프랑스령 통치 지역을 공격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했다. 해군에겐 북아프리카 항구들을 포함해 지중해에서 프랑스의 해상 교통 봉쇄를, 그리고 필요하다면 포르투갈 해안도 봉쇄함으로써 지브롤터를 왕래하는 영국 선박의 통행까지도 저지할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동시에 독일 해군은 스페인의 해안선과 영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카디스(Cadiz)에 소재한 기지 외에도 비고(Vigo)로부터 21척의 잠수함을 공급받았다. 유조선과 보급선이 오가며 U-보트(U-boat)들에 보급품을 전달했다. 이탈리아의 선박과 잠수함들도 지브롤터 해협을 바라보면서 지중해 방면과 대서양 방면 모두에서 스페인 수역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1940년 4월, 무솔리니는 독일 편에 가담해서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6월 12일, 프랑스가 함락되는 와중에 프랑코는 중립에서 '비교전(非交戰)'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고 48시간 후에 탕헤르(Tangier)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그는 마드리드 주재 독일 대사 폰 슈토러(von Stohrer)를 접견한 자리에서 만일 히틀러가 원할 경우엔 기꺼이 추축국 진영으로 참전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총통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7월 중순에도 비곤(Vigon) 장군을 시켜서 당시 벨기에의 다코스(d'Acoz) 성(城)에 체류 중이던 히틀러와 리벤트로프(Ribbentrop)를 만나 참전하고 싶다는 바램을 전하게 했다. 프랑코는 참전에 따른 조건을 협상하고 싶어했다. 무기 ・연료 ・탄약 ・식량을 보급받는 것 외에도 별도로 보상을 원했는데, '모로코 ・오랑(Oran) ・위도 20도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니제르(Niger)강 삼각주에 이르는 기니(Guinea) 해안 지역'을 참전 댓가로 요구했다. 나치는 프랑코가 제시한 참전의 조건을 보고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며칠 후 히틀러는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을 통해 프랑코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조만간 실행될 지브롤터 공격 작전에 협력할 준비를 해달라고 주문했는데, 이는 영국 본토를 공략하는 '바다사자 작전(Unternehmen Seelöwe)'과 동시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공격 작전을 조율하기 위해 리히트호펜과 비곤이 회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7월 31일에 에리히 레더(Erich Raeder) 제독이 히틀러에게 해군이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고 조언하면서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되었다. 히틀러의 관심은 곧 자신의 궁극적 야심인 소련 침공 쪽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프랑코는 스페인을 추축국들이 대서양에서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거점으로 제공할 뜻이 있음을 내비치면서 8월 15일, 무솔리니에게 스페인이 '유리한 시점'에 참전할 수 있도록 자신이 제시한 조건에 히틀러가 응하도록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코가 지중해 서부에서 세력을 떨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지역이 이탈리아의 지배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히틀러는 10월 23일, 프랑스-스페인 국경 지역의 엔다예에서 프랑코와 직접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프랑코는 [시설 상태와 서비스가 엉망이었던] 스페인 철도를 이용해 여행을 했고, 그 바람에 예정 시간보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치 지도자의 분노를 샀다. 히틀러는 프랑코가 요구한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재차 거절했다. 그는 그 다음날 페탱(Petain) 원수를 만날 예정이었고, 비시(Vichy) 정부와 협력을 강화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히틀러가 요청할 때 프랑코가 참전한다는 것, 지브롤터를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것, 분명히 명시하지는 않은 채 나중에 아프리카 영토의 일부를 스페인에 제공한다는 모호한 답변이 담긴 의정서를 작성했다. 12월에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카나리스(Canaris) 제독을 보내 독일군이 15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지브롤터를 장악하는 '펠릭스(Felix) 작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협력을 당부했다.

프랑코는 그러면 영국이 카나리아(Canaria) 제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할 것이라 우려하면서 대비책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프랑코가 엔다예에서 체결한 합의를 그런 식으로 '배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1941년 2월 6일, 히틀러는 프랑코에게 다시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어조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프랑코가 히틀러에게 보낸 각서와 서로 엇갈려 도착했는데, 프랑코는 히틀러 앞으로 보낸 각서에서 독일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수품, 즉 대포 ・예비 부품 ・신호 장비 ・트럭 ・기관차 ・호송차 등의 장비를 대거 요구했다. 이에 히틀러는 '라틴족 허풍쟁이들'끼리는 서로 말이 통할 것이라 생각해 무솔리니에게 편지로 프랑코와 협상을 잘 좀 해보라고 요구했다. 무솔리니는 2월 12일, 보르디게라(Bordighera)에 있는 빌라 마르게리타(Villa Margherita)에서 프랑코와 회동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북아프리카에서 연달아 군사적 재난을 맞은 참이었다. 프랑코는 전쟁에 너무 늦게 참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운을 떼면서도, 독일이 자신이 요구한 무기를 제공하는데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다고 불평했다. 뿐만 아니라 엔다예에서 제기했던 아프리카 영토 문제와 관련해 스페인 국민의 '세속적 열망'에 대한 독일인들의 오해를 지적하며, 히틀러로부터 제대로 된 보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전은 곤란하다고 귀띔했다. 독일이 원조를 빨리 보낼수록 스페인은 파시스트 세계의 대의를 위해 공헌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무솔리니는 회동 결과를 히틀러에게 말하면서 프랑코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무솔리니도 프랑코가 지중해에서 자신의 경쟁자로 떠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 by 앤서니 비버(Anthony Beevor) 著 <스페인 내전> 제36장 '망명자들'에서 인용 ・발췌




           1941년 2월 12일, 보르디게라의 이탈리아 왕실 별장 정원에서 두체와 담소를 나누며 산보 중인 카우디요  
           스페인 국내의 제반 사정과 불충분한 원조를 핑계삼은 카우디요는 참전 독촉의 요구를 시종 회피했다.



전쟁과 팽창이야말로 민족의 활력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세계사








"당시 우리 관민(官民) 사이에서 한국 병합의 논의가 적지 않았지만, 병합의 사상은 아직 충분히 명확하지 않았다. 혹은 일한(日韓) 양국을 대등하게 합일(合一)한다는 것과 같은 사상도 있었다.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종류의 [동군연합] 국가를 만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자도 있었다. 따라서 합방(合邦) 혹은 합병(合倂) 등의 문자를 사용한다던가 했는데, 나는 한국을 완전히 폐멸(廢滅)로 이끌어 제국 영토의 일부로 삼는다는 의향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고르기를 바라면서 종종 고심하다가 마침내 적당한 문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므로 아직 일반에서 많이 사용하지 않은 문자를 고르는 편이 득책이라고 인정해 병합(倂合)이란 문자를 전기(前記) 문서에 적었다. 그 이후로 공문서에다 병합이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익숙해져서 그대로 부기했다."

- by 1913년 3월, 조선 총독부 외사국장 앞으로 발송한 각서에서 병합 당시의 용어 선별 경위를 해명하며
                                                                                                      구라치 데쓰키치(倉知鉄吉)



더 이상 공식 군사 보고서의 관례에 얽매이지 않은 그는 넓찍한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다. <대일본(Dai Nihon)>의 제1장 첫 문장은 서문에 인용되어 책의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 일본이 중국 및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일으킨 '강철의 폭풍'과 '참된 정치적 결말'로 여겨진 한국 병합이 야기한 일본의 '회춘'을 두고 중부 유럽의 관심을 유도하고자 했다. 가장 구체적으로 이 책은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의 평화주의 저작 <거대한 환상(The Great Illusion)>의 그릇된 교훈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영국계 미국인 언론인은 군사력과 전쟁 자체가 무익하며, 어떠한 국가의 상업적 이익도 가져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가 전쟁을 통해 다른 국가의 부(富)를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우스호퍼는 에인절이 전쟁의 '창의적이고도 재생산적인' 측면을 완전히 놓쳐버렸다고 주장했다.

특히 강대국의 지위를 갈망하는 국가들은 전쟁이 '존재할 권리에 대한 최후 ・최대의 위대한 시험'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만족한 열강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독일은 세계적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치뤘던 산고(産苦)를 팽창을 통한 위대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신호가 아닌 물질적인 안락함과 사치에 탐닉하는데 써버렸다. <대일본>은 군대 보고서에서 하우스호퍼가 현대 일본의 본질로 간주했던 요소들을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2천년간 지속된 왕조의 통합된 군사 지휘권, 강력한 4천여 사무라이 가문들로 구성된 지배 계급의 전사적 윤리, 가족과 국가, 천황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개인의 의향, '삶의 절제'를 강요한 자살 숭배, 그리고 말레이 ・몽골 ・아이누 족속의 상서로운 혼혈. 이 모든 요소들이 융합되어 높은 '인종적 가치'를 창출했고, 그 가치로 국가의 활력을 이끌어냈다.

'그 활력에 대한 가장 어려운 시험은 틀림없이 계속될 전쟁'이다. 일본은 '민족의 활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증대'된 '전쟁의 진정한 결과'를 세상에 과시했으며, 그것은 에인절의 책에서 찾아낸 것이 아니다. 중국 ・러시아와의 전쟁은 일본에게 '강력한 새로운 과제'를 주었고, '새로운 성장과 개발의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새로운 영토'를 제공했고, '민족적 활력의 모든 근원에 새로운 자양분'을 공급했다. 오직 전쟁만이 한 두 세대에 걸친 평화 후에 민족의 활력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경쟁'은 에인절이 설파했듯이 비단 국가 경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동 공간 확보의 투쟁'을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전쟁은 냉엄한 현실이며 '이타심의 교육자'였다. 일본은 '세상의 법칙은 끊임없는 투쟁이지, 지속적인 정체가 아니'라는 것으로 '향후 나아가야 할 길'은 단 하나 뿐임을 입증해 보였다.

일본인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하우스호퍼에게 '인생의 시계'라는 단어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에 비유하자면 프랑스는 오후에, 영국은 정오에, 독일은 오전 11시에, 일본은 동트기 전의 새벽에 서 있었다. 그에게 전쟁은 일본의 '영구적인 한국 병합'을 의미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속령 '조선(朝鮮)'으로 변모한 것은 '모범적이고, 마찰 없는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급진적인 인종주의적 관점에서 그는 한국의 '40만 특권층 놈팽이들의 지배하에 놓여진 1200만명의 쇠약해진 신체'가 '남성적이고, 확신에 찬' 메이지 일본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을 흡족하게 여겼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은 대다수 주민들 뿐만 아니라 학자 ・관료 ・군사 엘리트들조차 둔감하면서도 병합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었다.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으며, 실제로 한국인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요컨대 한국은 '이보다 더 좋은 운명을 맞을 자격이 없었다.' 일본의 점령은 능수능란하고 사려깊게 계획되었으며, 질서와 번영의 축복을 한국에 내려주었다. 약 1만 3천명의 일본 경찰과 훌륭한 정탐 조직들이 혼란으로부터 질서를 회복시켰다. 불만을 품은 관료들과 지식인, 장교들도 새로운 질서에 간단히 끌려들었다. 진정한 '황금의 물줄기'가 한국으로 흘러들어 왔다. 35개의 새로운 비단 농장, 21개의 양잠업 훈련 학교, 13개의 비단 제조 공장, 217개의 직업 훈련 학교와 140개의 사립 및 공업학교, 그리고 8개의 종이 공장이 이러한 아낌없는 선물의 결과였다. 일본인들은 더 나아가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고, 늪지들을 배수하고, 개천의 오물들을 청소하면서 진해 ・인천 ・남포 ・부산 등의 항구를 근대화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운명을 받아들였던 한국인들은 일본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메이지 정부의 과두 지배자들은 약 5백명의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을 추방했는데, 이들이 '우선적으로 그들 종족의 기수이자 신앙의 두 번째 사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합된 한국의 국경지대 후방엔 그것보다 더 거대한 목적이 있었다. 하우스호퍼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백작에게서 귀띔을 받았다. 1910년에 이 전직 수상은 '승천(昇天)하는 일장기 아래 한국과 대만(臺灣)이 조국에 편입'됨으로써 대일본 제국이 열강의 선발 클럽에 진입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오쿠마는 연간 5~60만의 인구 성장률을 감안하여 일본 ・한국 ・대만의 현재 인구는 2세대만에 1억명에 도달해 일본을 세계적인 주요 국가로 만들 것이라 예견했다. 하우스호퍼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평생 한국에서 만주로 이어진 광활한 토지를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지도적 역할의 핵심 수단으로 묘사했다.

- by 홀게르 H. 헤르빅(Holger H. Herwig) 著 카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 평전 <지정학의 악마>에서 발췌



43세 천재 물리학자가 바라본 중국인과 그 실상 발언록








11월 9일 아침에 우리는 홍콩에 도착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항해 기간 도중에 내가 보았던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섬에는 바로 옆의 본토와 비슷하게 산들이 길게 뻗어 있으며, 두 곳 사이가 항구로 작고 가파른 섬들이 많다. 모든 것이 알프스 구릉 지대로부터 반쯤은 빠진 것 같았다. 도시는 약 500m 높이의 완만하게 경사진 산기슭에 테라스처럼 놓여 있었고, 공기는 시원하고 상쾌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환영연을 베풀려 하자 정중히 거절했지만, 2명의 유대인 사업가가 우리 일행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오전에 자동차로 홍콩 섬을 일주하러 나갔다. 바다와 피요르드(fjord) 같은 만(灣)들, 무궁무진하게 다채롭고도 장엄한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우리는 미국식 고급 호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안내원 2명이 나랑 이 나라와 과학에 대해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세속적 즐거움에 대해서도 대단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항해용 범선들과 겉보기에 매우 쾌활한 듯한 중국식 장례식, 고통받는 사람들, 하루에 겨우 5센트만 받으면서 돌을 깨거나 운반 중인 남녀(男女)들로 이루어진 중국인 어촌을 목도했다. 이처럼 중국인들은 비정한 경제적 기계에 의해 그들의 생식력을 가혹하게 처벌받는 셈이다. 내 생각에 그들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거의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를 보는 것은 슬펐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 전 놀라울 만큼 훌륭한 조직과 더불어 성공적인 급료 파업을 단행했던 모양이다. 오후에 유대인 클럽 회관을 방문했는데, 상당히 높은 고도의 멋진 정원에 자리잡아 도시와 항구의 경관이 장려했다. 그곳엔 대략 유대인이 120명 뿐이었지만, 대부분 아랍계로 그들의 신앙은 러시아계 유럽인보다 격식이 더 엄격한 것 같았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Tigris) 강에서 온 유대인들이 우리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나는 이제 유대계 민족이 지난 1500년 동안 스스로 완벽한 순수성을 유지해왔다고 확신한다... 10일 아침에 나는 엘자(Elsa)와 함께 본토의 중국인 거주 지역을 방문했다. 근면하지만 더럽고 둔한 사람들이다. 집들은 매우 획일적이고, 벌집의 구멍처럼 늘어졌으며, 모든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거나 단조롭게 지어졌다. 항구 뒷쪽으로는 식당에서 바로 맞은 편의 중국인들이 벤치에 착석하지도 않고, 쭈그린 채 유럽인들이 우거진 숲 속에서 용변을 볼 때처럼 밥을 먹고 있었다. 모든 것이 조용하고 얌전했다. 아이들조차 생기가 없거나 둔해 보였다. 만약 이들 중국인이 [특유의 다산 번식력으로] 다른 모든 인종을 밀어낸다면 유감스러워질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에겐 상상만 하더라도 형언할 수 없이 음울해지는 것이다.

어제 저녁엔 3명의 포르투갈인 중학교 교사들이 나를 찾아와 중국인은 논리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받을 수 없으며, 특히 수학에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남성과 여성간의 차이점이 얼마나 적은지 주목했다. 나는 중국인 여성들이 무슨 매력을 가지고 있길래 상대방 남자를 매혹시키고, 가공스런 출산에 맞서 단호하게 그들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1시, 기타노 마루(北の丸)호는 형체와 색깔은 마음에 들지만, 나무가 자라지 않은 녹색의 섬과 산들 사이로 반짝인 푸른 바다를 가로지르며 떠났다. 현재 홍콩에서 생생한 식물은 영국인이 가꾸었다고 한다. 그들은 뛰어난 통치 방식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치안 활동은 풍채가 당당한 외국 태생의 검은 인도인들이 맡았고, 중국인은 결코 쓰이지 않는다. 나중에 영국인들은 넘쳐나는 중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적합한 대학까지 세웠다.

누가 그것에 필적할 수 있을까? 가엾은 대륙의 유럽인들은 '관용(tolerance)'을 통해 국수주의적 반대를 잠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른다... 13일 오전 10시경, 상해(上海)에 도착했다. 평평하고, 그림처럼 황녹색으로 빛나는 강의 상류 기슭을 따라 이동했다. 나의 파이프를 친절하게 수리해 준 베른에서 왔던 2명의 스위스 장교와 광신적 애국자라는 점만 빼면 선량한 젊은 독일인 전직 장교가 떠났다. 상해에선 우리를 고베까지 데려갈 이나가키(稲垣)와 그의 부인, 독일 총영사인 피스테르(Pfister)씨 부부로부터 배 안에서 환영을 받았다. 먼저 점잖은 일본인과 미국인 기자 일동이 평범한 질문들을 던졌고, 그 다음 이나가키 부부와 중국인 2명이 중국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창문 너머로 시끄럽고 다채로운 중국식 장례식을 지켜봤는데, 야만적인데다 거의 우스꽝스러운 사건이었다.

요리는 극도로 정제되어 끝없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식탁 위에 놓여진 흔해빠진 작은 그릇으로부터 젓가락으로 빈번하게 고기들을 집었다. 나의 내장은 상당히 흥분하기 쉽게 반응했으므로 한창 무르익은 오후 5시 무렵 다정한 피스테르 부부의 말 그대로 안전한 피난처에 도착했다. 식후엔 중국인 지역을 산책하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거리는 점차 비좁아지고, 온갖 오물이 말라붙은 보행자와 인력거들이 바글거렸으며, 공중엔 끊임없이 변화무쌍한 갖가지 악취가 풍겼다. 온순하고도 거의 무감각해 보이며, 거의 방치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암울한 다툼의 인상. 거리 저편엔 탁 트인 작업장과 상점들이 있고, 커다란 소음이 들렸지만 어디서도 다투지 않았다. 우리는 각 층마다 익살꾼들이 개별 공연하는 극장을 방문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일반인들은 언제나 환영하고, 매우 즐거워한다.

정말이지 사방이 더럽기 짝이 없다. 그 엄청난 부산함 속에서 안팎은 몹시 행복한 면상들이었다. 심지어 말 몰이꾼 신세가 된 사람들조차 의식적인 비참함의 인상을 주지 않는다. 짐승 떼 같은 이 괴상한 나라는 존경스런 배짱으로 항상 신경이 온전한 것이 인간보다 자동 제어 기구를 닮았는데, 간혹 실없이 히죽거리며 호기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우리 같은 유럽인 방문객과 더불어 그밖에 특히 시선을 이끈 공격적인 손잡이 안경을 가지고 우스꽝스럽게 서로가 응시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서 앞서 칭찬했던 안식처를 구하러 자동차로 피스테르 부부의 널찍한 시골집에 갔다. 상쾌한 차가 나왔으며, 나중에 덕망있는 랍비(rabbi)와 8명쯤 되는 유대인 고관 대표들이 찾아와 매우 어려운 소통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나가키 부부와 차를 타고 어두운 오솔길을 거쳐 부유한 중국 화가를 위한 만찬장에 갔다.

- by 1922년 11월, 극동 여행차 홍콩과 상해를 방문한 자리에서 목격했던 현지의 감상을 일기에 수록하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레이시즘이 트렌드였다지만, 우리가 일본을 좀 자극시키긴 했었지 발언록








내가 생각하기에 일본의 정책은 미국인이나 유럽인과는 최대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더 강력한 인종이 존재하고 있는 가운데 귀국은 만성적으로 위험스런 처지에 놓여 있으므로 가급적 외국인의 근거지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모든 예방적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일본이 유리한 입장에서 허락할 만한 유일한 교섭 형태는 필수적인 상품 교역과 사상의 교환, 즉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산물의 수출입에 관한 부문입니다. 다른 인종의 사람들, 특히 더 강력한 인종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특권이 허용되는 것은 불가하며, 이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듣자 하니 귀국에선 유럽과 미국을 상대로 '제국(帝國, 日本) 전체를 외국인과 외국 자본에 개방'하겠다며 조약의 개정을 제안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것을 치명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사태가 발생할 지 보고 싶다면 인도의 역사를 공부하길 바랍니다. 일단 더 강력한 인종들 가운데 하나가 특정 근거지를 획득한다면,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일본인과 충돌을 일으키는 공격적인 정책이 유발될 것입니다... 영토 내에서 외국인의 자산 소유를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임차권도 주지 말아야 하고, 연간 계약으로 주거 임대만 허락해야 할 것입니다... 외국인과 일본인의 잡혼은 확실히 금지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회 철학이 아닌 생물학의 문제입니다. 다른 종(種)끼리 일정한 수준을 조금 넘어서 섞이거나 갈라져 나오면, 인류 종족간 결혼과 동물의 상호 교배에서 관찰된 바와 같이 그러한 결과가 필경 고약해진다는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이민이 많아지면 엄청난 사회적 피해가 발생할 것이며, 사회는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 by 1892년 여름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에게 인종간 순혈 보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허버트 스펜서



캘리포니아에서 금(金)이 발견된 직후 이 나라에 20만명의 중국인이 입국하고 나서 단지 우리의 국내 노동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인들을 배척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할 수 있더라도, 나는 아시아계 주민들의 입국을 대규모로 금지시켰던 후속 입법이 가깝고도 먼 이웃들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위대한 기술에 있어서 우리의 정치적 미숙함을 입증했다고 믿습니다. 일본이 우리 편에서 싸웠던 전쟁[1차대전] 후인 1924년에 제정된 일본인 배척 조항도 그러한 사례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고, 우리의 국제 관계상 관점에서 볼 때 심각한 문제였으며, 미국에서 그 시절에 만연하던 불행한 일반적인 경향과 사고, 이러한 사고 방식, 그리고 행동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고립주의입니다. 1924년 배척법이 의회를 통과했을 무렵 미국에선 고립주의가 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드로 윌슨의 개명된 임무를 모두 부정했고, 국제 연맹으로부터 등을 돌렸습니다. 또한 우리는 금세기 이전부터 우리 편으로 남아 있었던 그 나라를 계속 붙잡아 두기보단, 우리의 잠재적인 적들의 진영으로 몰아넣는데 사실상 일본의 국수주의 광신도들을 돕기로 결정했던 셈입니다. 1924년 동양인 배척법의 통과가 미국과의 우정에 기반을 둔 일본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입장을 약화시켰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2차대전 직전 일본에서 대사로 10년을 보냈으며, 가장 예리한 동양 관계의 관찰자로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조셉 C. 그루씨는 1924년 법안의 통과가 일본에 있는 우리의 친구들을 약화시키고, 그 어떤 행동보다도 극단주의자들을 강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음을 앞서 미일관계 관련 위원회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루 대사는 1924년 2월, 일본 국회 토론에서 우리의 위대한 친구 사카타니(阪谷) 남작이 한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미국에 의해 이 법안이 성립되면, 그것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나는 이 문제로 제국이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만약 일본인들이 미국에 의해 열등 민족으로 분류된다면, 그 행동은 9개국 조약을 지지하는 다른 서명국과 협력하고, 중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약의 형식과 내용을 준수하려는 일본인들의 열망을 심각하게 파괴할 것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사실 시데하라() 남작은 일본을 4년이나 더 지켜냈지만, 다나카(田中) 남작이 수상에 취임한 1928년에 9개국 조약은 문서 보관소로 밀려났고, 1932년까지 호전적인 군국주의 집단이 말 안장 위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던 것입니다.

1년 후인 1933년,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의 리더십이 고립주의라는 낡은 기록을 버리고, 미국을 위해 새롭고도 보다 현실적인 현대사를 쓰기를 갈망한 다수의 사람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우리는 국내 문제를 처리하느라 매우 분주했으며, 그것은 분명 사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임 대통령의 계몽적 리더십 하에서 발전되어 우리의 이민과 국적 정책을 새로운 사고 방식으로 조정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기 시작했을 무렵 일본군은 우리의 오랜 우방국인 중국을 침략하고, 황폐화시키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히틀러 및 무솔리니와 공동의 대의를 이루고자 노력했음이 분명했고... 국제 연맹을 버리기로 한 일본의 결정과 베를린 ・로마 ・동경간의 유대가 강화된 것은 확실히 우리의 이민과 국적법에서 반(反) 동양적 제한을 철폐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 by 1953년 1월 19일, '국적 기원' 이민법이 전간기 미일관계에 미친 악영향을 연방 의회에서 지적 ・성토하며 
                                                                                  루이스 E. 그래험(Louis E. Graham) 하원의원



내가 왜 검둥이들한테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세계사








"아프리카는 산업을 위한 원자재, 주민을 위한 식량, 인구 과잉의 해소를 위한 토지, 실업자를 위한 노동, 생산물을 위한 시장을 유럽에게 제공할 수 있다... 유럽이 단합되지 않으면 아프리카를 얻을 수 없다. 흑인종이 그들에게 속한 지구의 한 부분을 발전시키거나, 문명화하지 못한다면 백인종이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유럽이 아프리카에서 손을 뗀다면 그 대답은 이렇다. 혼돈과 무정부 상태, 비참함, 그리고 모든 부족 사이에서 벌어질 전쟁이 그것이다."

- by 유럽 제국에 있어서 아프리카 대륙이 지닌 잠재적 가치와 문명 개화의 계몽주의 책무를 상기시키며
                               리하르트 폰 쿠덴호베-칼레르기 백작(Graf Richard von Coudenhove-Kalergi)



케네디 시절 미소(美蘇) 대결의 중심 무대는 여전히 유럽이었으나, 제3세계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해졌다. 이 문제는 미소간의 긴장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엔 미국과 서유럽 우방들간에도 긴장이 맴돌게 하였다. 우리는 제3세계, 특히 아프리카에 대해 구두로 표명되진 않았지만, 일종의 업무 분담을 하고 있었다. 몇몇 서방 국가들은 과거 아프리카의 식민 세력이었고, 또한 아프리카에 대해 우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 국가들에 접근하기가 훨씬 쉬운 입장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외국 원조의 대부분을 아프리카에 집중시켰고, 그곳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케네디-존슨 행정부 시절엔 아프리카가 받은 외국 원조의 75%가 서유럽으로부터 왔으며, 그 나머지만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나는 항상 미국을 아프리카의 새로운 동반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이같은 태도는 국무성의 몇몇 동료들, 특히 아프리카 주재 미국 외교관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이 모든 아프리카 국가의 수도에서 '거물' 노릇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자, 국무성의 아프리카국(局) 직원 가운데 몇몇은 내가 아프리카에 무관심하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단지 서구 우방들과 우리가 비공식적으로 정한 업무 분담은 아프리카의 일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이 모든 것은 의식적인 정책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었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전세계의 일을 모두 도맡아 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사항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 G. 메넌 윌리엄스(G. Mennen Williams)는 담당 지역이 낮은 순위로 책정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미국의 아프리카 정책은 내부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G. 메넌 '소피(Soapy)' 윌리엄스는 역대 아프리카 담당 차관보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인물에 속한다. 그는 근면하고 충실했으며, 항상 사려깊었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우리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는 당연히 아프리카에 되도록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했으며, 원조도 더 많이 제공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므로 그의 입장은 우리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소피와 다른 사람들이 지적한 문제로는 국무장관인 내가 아프리카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프리카가 나의 우선 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음은 분명했지만, 사실상 나는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들만 겨우 방문하더라도 그 나머지 국가들의 분노를 사지 않으면서 찾아갈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케네디-존슨 행정부는 아프리카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은 아프리카와 아무런 안보 동맹을 맺고 있지 않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아프리카가 미국의 안보에 예를 들어 유럽이나 중남미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의 세력도 제한시기길 바랬다. 케네디와 존슨은 미국의 아프리카 정책은 식민지의 독립과 신생국의 탄생을 지지하고, 그 신생국들에 대한 원조 제공을 유지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미국이 아프리카에서 직면해야 했던 첫 번째 문제는 앙골라에서의 포르투갈의 식민주의와 관련된 것이었다. 취임 2개월 만에 우리는 유엔 안보리에서 앙골라의 자립을 주장하는 중요한 투표를 던져야 할 상황이 되었다. 국무성 일각에선 포르투갈은 나토 우방이고, 아조레스(Azores)의 해 ・공군 기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으므로 리스본을 성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리가 이 결의안에 반대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케네디에게 이 결의안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 미국은 말 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식민주의에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며, 결의안을 지지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케네디가 나의 건의를 받아들인 덕분에 나는 기뻐했지만,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António Salazar)를 만나 앙골라와 아조레스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나를 리스본으로 파견했을 때는 별로 탐탁지가 않았다. 나는 살라자르를 그의 관저에서 만났는데, 그의 집무실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불빛도 희미했다. 그는 냉담한데다, 거의 현실 세계를 떠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에게 식민주의가 이제 구시대적 발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것에 나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의 국민들에게조차 허용할 수 없는 것을 아프리카 식민지에 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 by 딘 러스크(Dean Rusk) 著 <냉전의 비망록> 제11장 '아프리카와 콩고'에서 발췌




            1960년 8월 9일, 엔리케 왕자의 서거 5백주년을 맞아 발견 기념비 제막식 축전에 참석한 살라자르 수상
            근세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올렸던 영광과 유산이 깃든 제국을 포기할 의사가 그에겐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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