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對中) 문호개방의 환상과 좌절 세계사








미서전쟁으로 카리브해 지역에서 자국의 지배력을 수립하고, 극동에서 전략적 거점을 획득한 후 미국은 강대국의 역할을 맡기 시작해야만 했다. 이 당시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세력 균형의 활동 분야를 낯설은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어느 국가도 그곳의 규칙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그곳에서 그들이 다른 곳에서 누리지 못하는 어떠한 자연적 어드밴티지를 누렸다. 무너져가는 중국의 만주족 왕조가 자국이 서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통제권을 위한 각축 대상임을 알았을 때, 미국은 팽창 일로인 자국의 산업을 위해서 중국 시장에서의 공정한 몫을 분배받고, 확보하고자 하였다. 중국 시장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거의 100년 동안 헛된 꿈을 가졌고, 그 당시에 아마도 중국 대외무역 비중의 불과 3%에 해당되었던 '제한 없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든 국가들에게 동등한 상업적 기회를 보장할 것을 의미하는 미국의 '문호개방정책(Open Door)'을 야기시켰다. 중국 대외무역의 상당 부분의 통제자이며, 독일 ・러시아 ・일본 그리고 프랑스에 의해서 종속적 상태로 되어가고 있는 중국의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를 반대해 온 영국은 존 헤이(John Hay)가 제기함에 따라 적어도 처음엔 문호개방 사상을 지지했다. 국무장관 헤이는 싹트고 있는 앵글로-아메리칸의 우정을 성숙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고립주의의 잔재와 투쟁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강한 해군과 제국주의적 모험에 부속되는 권력과 위신에 대한 좋은 감정을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물며 세계의 강대국으로 따라오게 될 자신들의 새로운 지위에 수반되는 전체 범위의 책임감을 맡는 것은 고사하고, 고립주의를 단념하고 싶어하진 않았다.

헤이는 상업적 동등성에 대한 약속 뿐만 아니라, 이익권마저 폐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영국조차도 자국의 방책을 강구하면서 다른 국가들과의 유사한 승인을 조건으로 하는 보장만을 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답변으로 응하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죽음과 북경 주재 외국 공사관에 대한 공격을 수반한 서구에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으로 알려진 일부의 국수주의적 광란이 중국에서 발생한 후 미국은 2만명으로 구성된 국제적 원정 구조군에 2500명을 지원하였다. 한편, 헤이는 동등한 무역 원칙을 반복하는 통첩을 열강들에게 유포시키고, 그것이 중국의 영토적 ・행정적 보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의 정책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국은 문호개방정책을 강력히 시행하기 위한 그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취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극동에서 활동중인 세력들을 이해하지 못한 미국인들은 그러한 권력 투쟁의 결과를 스스로의 미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먼로 독트린의 경우처럼 문호개방 원칙을 거의 확고하게 믿었던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대외 공약과 모순되는 과거의 도덕주의덕 이상을 재천명함으로써 자국의 외교정책 전통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외교적 수단으로 문호개방을 계속 지지했지만, 미국은 무력 사용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 아시아 정치에 활동적인 관여를 약속하진 않았다.  러일전쟁에서 자신의 도덕주의덕 선언이 암시하는 것보다 세력 균형이 더 났다고 이해한 루스벨트는 러시아가 극동에서 일본 세력의 성장에 대한 평형추 지위를 보유하는 결과를 선호하였다. 그는 조정자를 자임하면서 두 교전국을 뉴햄프셔의 포츠머스로 초청해 강화조약을 체결시켰다.

비록 강화조약의 조건이 전반적으로 일본측에 유리했지만, 일본 국민들은 포츠머스 조약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대통령이 극동에서의 가공할 만한 새로운 국가로서 일본의 출현에 대한 현실주의적이고 우호적인 조정을 하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일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양국은 필리핀 ・조선 ・만주 ・태평양에서 상호간의 영토 보유, 그리고 중국의 독립과 보전, 그 제국내의 문호개방 원칙에 대해서 다소 깨지기 쉬운 협정을 체결했으나, 일본은 캘리포니아의 자국민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로 감정이 심히 상했다. 이민 문제와 극동에서의 권익을 맞교환하는 내용의 '신사협정'을 체결한 루스벨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일간의 상호 불신의 먹구름은 전적으로 해소될 수 없었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직접적인 계승자들은 아시아에 대한 그의 감정을 결여하고 있었다.

윌리엄 태프트와 국무장관 필랜더 녹스(Philander Knox)는 법인 변호사들로 그들은 외교에 대해서 주로 법률주의적 접근 방식과 재정적 수단에 의존하려 했다. 그들은 해외에서 미국의 시장과 투자를 증진시키고, 동시에 외교 정책의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선 정부와 기업이 함께 일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협력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달러로 총탄을 대신하는 것[태프트 자신의 표현]'은 '달러 외교(Dollar Diplomacy)'라 알려질 정책의 본질이었다. 태프트와 녹스는 만주 철도의 재정과 관리를 위해 다소 비현실적인 제안을 내놓았으나, 오직 독일의 지지만 받았을 뿐이었다. 명백히 유럽과 아시아 간의 점진적 관계는 고사하고, 유럽이나 극동에서의 세력 균형도 이해하지 못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적대 관계를 청산시켜 보조를 맞추어 미국의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갱신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미 1907년 페르시아에 관한 협정을 맺은 상황이었고, 러시아와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맞선 기존의 동맹을 강화시켰으며, 프랑스 역시 극동에서의 세력권 분할에 관한 별도의 협상을 일본과 타결지었다. 영국과 프랑스 어느 국가도 태프트와 녹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극동의 자신들의 '파트너'를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프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전까지 많은 중국인들은 미국을 열강들 가운데 자신들의 나라에 이해관계가 없는 유일한 우방국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국이 스스로 국제적 사업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마치 약탈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였다. 워싱턴의 정책은 그 상황을 악화시켜 외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중국의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이내 청조를 무너뜨린 1911년의 신해혁명을 초래한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동경의 제국 호텔에서 청나라 시찰단장 재도(載濤)와 회동한 오야마(大山) 원수 및 고토(後藤) 체신상   
            만몽(滿蒙)에서의 권익을 독점하려던 일본의 문호 폐쇄는 본격 대륙 병탄의 서막이자 전주곡이었다.     




여왕폐하의 대관식을 맞이한 자카르타 시가의 광경 사진집




            빌헬미나(Wilhelmina) 공원의 아체(Aceh) 기념비, 수마트라의 정복과 평정을 기원하며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는 독립 후인 1957년 철거되어 모스크가 들어섰으며, 주위로 축하식전을 맞아 장대가 꽃혔다.   


            워털루 광장의 미키엘스(Michiels) 기념비를 전후로 장대와 네덜란드 삼색 국기가 장식 ・게양된 광경  
            1849년 발리 탐험 및 원정대를 인솔하다 전사한 식민군 장성에게 봉헌되었던 추도용 조형물이었다.  


           워털루 광장에 가설된 조립식 문루, 미키엘스 기념비까지 이어진 도상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도심을 관통하는 칠리웅(Ciliwung) 강의 교각에 세워진 간판과 현수막, 백인 경관들이 보초를 서고 있다.
           입구 간판엔 '빌헬미나 여왕 만세'라는 구호가 부착되었으며, 여왕 명칭의 이니셜 W자도 표시되었다. 


             광장 방면의 도로, 마차 행렬이 오가는 가운데 우측의 강변으로 토착민 용병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리셉션에 초청된 왕립해군 수병들,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당국은 식민지에서 승무원을 대거 모집했다.
           나폴레옹 전쟁 후부터 동인도 제도의 경영이 정부로 이관되어 극동 파견대의 중요성 역시 높아졌다.           
           

            차이나 타운의 입장문, 수세기 전부터 정착해왔던 화교들은 토착 사회와는 별개의 공동체를 구성했다. 
            특유의 상술과 중개업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점차 자바 경제계의 큰손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차이나 타운 거리, 전방의 문루 편액엔 여왕에게 바치는 '만수무강(萬壽無疆)'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퍼레이드에 동원된 동인도 식민지군 장병들, 네덜란드 본국의 육군과는 별개의 계통으로 운용되었다.  
            19세기 들어와 영내의 각 도서에 대한 중앙집권화 팽창이 추구되면서 아체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실내 연회장, 열대의 이국적 정취를 간직한 가운데 홀의 정면 맞은편으로 여왕의 흉상이 안치되었다. 
             세기 후반까지 자바에서 시행된 강제 경작제의 인센티브는 유럽 본국에 풍성한 세입을 안겨주었다.  


            빌럼(Willem) 공원의 정원에 세워진 여왕의 조각상, 꽃이 부착된 비단 천조각이 기둥을 두른 모습이다.
           
             
           박물관 근처의 대로에 세워진 기념문, 오라녜(Oranje) 왕가에 경의를 표하는 문구가 간판에 적시되었다.
           야자수 잎사귀 등의 트리 장식과 삼색기 및 왕관 모형도 조화를 이루며 치장된 형태로 설계한 것이다.  


           지형국 사무소 앞에 배치된 출입문,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지도가 그려진 지구본 모형이 올려졌다.


           외국인 상점가 일대의 번화가, 도심의 다른 장소처럼 행사에 임하여 각종 단장으로 채색해놓은 상태다. 
           금융 조직과 대외 무역망이 네덜란드계나 화상 위주로 독점되어 기타 외국인의 상거래를 제약시켰다.    


            탄중 프리오크(Tanjung Priok) 항만 해역에 정박한 관영 선단, 식전을 기해 깃발과 리본으로 치장했다.


            암스테르담 신교회(Nieuwe Kerk)에서 거행된 대관식전의 여왕과 엠마(Emma) 왕대비, 1898년 9월 6일
            이날의 주인공이었던 18세 소녀에겐 다사다난할 향후 반세기 동안의 재위기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뷔르템베르크 공주 파울리네(Pauline)의 결혼식 당시 슈투트가르트 궁전에서 회동한 친척 왕공족들
              공주와 사촌지간인 빌헬미나 여왕도 모후를 대동해가며 해당 식전에 참석했다. 1898년 10월 27일  




제국의 임종을 앞두고 있었던 그해 초여름의 마닐라 사진집




            마닐라 시가 중심부를 관통하는 파시그(Pasig) 강의 스페인 다리(Puente de España), 1632년 가설되었다.
            1863년의 지진 이후 보수 ・확장된 이 아치형 석축교는 성곽과 번화가 사이를 오가는 요로에 있었다.


             파시그 강의 우측 해안가에 근접한 공원의 시몬 데 안다 이 살라자르(Simón de Anda y Salazar) 기념비
             7년전쟁 당시 저항대를 조직해 영국의 침공과 점령에 맞섰던 옛 총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도심 제1의 번화가인 비논도(Binondo)의 에스코르타(Escolta) 거리, 근세 이래 상업 지구로 번성해 왔다.
           식민시대 초기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중국계 이주민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차이나 타운도 형성되었다.


            에스코르타 거리의 남쪽 모라가(Moraga) 광장에 입주한 일본인 상점, 수입산 잡화류 따위를 취급했다.


              필리핀 군도 발견의 주인공 마젤란 기념비, 1848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단은 대리석 재질로 제작했다.
              기념비 주위엔 공원이 조성되어 마닐라 유수의 산책지로 각광받았으나, 2차대전 말기 완파당했다.


             도미니크 수도회가 설립한 비논도 성당, 1596년 준공되어 화교들을 대상으로 포교 사업을 전개했다.


              비논도 성당 우측에 소재한 라 인술라르(La Insular) 담배 제조회사, 건물은 1880년대 준공된 것이다.
              식민 당국이 연초 산업의 독점을 폐기한 직후에 설립된 회사로 사무실과 공장이 나란히 입주했다.


            모(某) 총독의 유골이 안치된 공동묘지 예배당 입구, 백색의 담장을 마주하며 수목이 울창히 드리웠다.


           마닐라역, 루손섬 북쪽의 다구판(Dagupan)까지 연결된 필리핀 최초의 철도 노선이 1892년에 개통했다.
           스페인 본국의 관심과 역량 부족으로 철도 부설은 제당업이 고도화된 쿠바보다 반세기나 늦어졌다. 


            마닐라만 해역에서 피격받아 좌초된 스페인 태평양 함대의 방호 순양함 이슬라 데 루손(Isla de Luzon)
            1898년 5월 1일의 해전 와중에 침몰했으며, 이후 인양과 수리 작업을 거쳐 미(美) 해군에 편입되었다. 


            이슬라 데 루손의 함상에서 바라본 자매함 이슬라 데 쿠바(Isla de Cuba), 해전 당시에 함께 피격당했다. 
            미 해군으로 인계된 후 필리핀 평정전 투입과 실습선 전용을 거쳐 종국엔 베네수엘라로 매각되었다. 


           카비테(Cavite) 병기창과 사령관저를 배경삼아 드러누운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Don Juan de Austria)


            대파당한 일반 순양함 벨라스코(Velasco), 탑재된 포문은 전투 후 수병들이 해체해 육지로 이송시켰다.
            사진이 촬영될 무렵엔 미군이 인근 해역을 봉쇄중이었으나, 상륙전까지 다소간 시일이 남아 있었다.


            침몰 함선단의 원경, 아우스트리아 및 이슬라 데 쿠바와 포함 헤네랄 레소(General Lezo) 등이 보인다.
            태평양 횡단 갈레온선의 출항지였던 항구는 제국의 몰락을 상징한 스페인 군함의 무덤이 되버렸다.


           카비테 병기창, 소규모로 조성된 어뢰 및 탄약 공장이 소재했으나 실전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년 8월에 미군이 마침내 도심으로 입성하면서 장구했던 스페인의 통치도 그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어느 마초이스트 정치가에 대한 인물상과 평론 세계사








그는 광포한 사나이, 끝이 보이지 않는 야망의 사나이였다. 어떤 것도 완료되지 않았고, 각각의 성취는 더 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는 이 나라에서 다시는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정치가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미국을 연결시킨 사람으로 초창기에는 소박하고 개척자적인 태도로 위장했고, 대통령으로서 그의 마지막 행동은 우리를 달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그는 깜짝 놀랄 힘과 추진력, 지력의 사나이였으며,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불안정한 사나이였다. 그의 엄청난 업적은 처음부터 그를 몰고 갔던 감춰진 불안을 수그러들게 만들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이기는 했다. 린든 존슨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그가 자신의 사마귀를 감출수록 더욱 드러났다. 백악관에 입성할 무렵에 그가 지닌 힘과 권력이 대단한 나머지 정당의 지적인 설계자들은 '미국의 가장 큰 정치적 혜택은 강력한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대통령에게서 나온다'며 확신했을 정도였다.

성취를 향한 존슨의 욕망은 단 한 번도 누그러진 적이 없었다. 그 자신이 사색적인 사람이 아니었던 존슨은 주변에 사색적인 사람들을 두지 않았다. 그는 '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곁에 두기 좋아했고, 실제로 그들은 그 말대로 행동해서 예산을 삭감하고, 강에 댐을 건설하거나 법안을 통과시키고, 연설문을 작성하였다. 행동가였던 존슨의 부통령 시절의 수집품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재클린 케네디가 린든에게 '이것을 해달라, 저것을 신경 써달라'고 부탁을 하는 편지였다. 재클린은 존슨에게 의지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완수되었다. 그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역동성과 에너지를 원했기 때문에 주변의 행동하는 이들을 좋아했다. 맥나마라는 자신의 열정을 좇는 사람이었다. 국방부에서 맥나마라가 보인 전설적인 탁월함에 주목했던 존슨은 그것이 장관의 대리인 가운데 1명인 조셉 캘리파노의 총명함과 추진력에 기인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존슨은 타인을 자신과 같이 혹독하게 몰아 붙이는 가차없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완벽한 충성, 존 F. 덜레스가 요구했던 전통적 의미의 긍정적인 충성이나 백악관과 정당, 개념에 대한 충성이 아닌 린든 존슨을 최우선으로 하는 충성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린든 존슨은 더 큰 충성의 결정권자가 되었다. 충성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존슨은 충성을 위반하는 사람들, 즉 그에게는 이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냈다. 워싱턴에서 린든 존슨 만큼 훌륭하게 첩보망을 가동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로버트 케네디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도 항상 알고 있었다. 존슨은 관념적인 충성, 곧 이슈와 개념, 대의명분에 대한 충성을 불편하게 여겼다. 그것은 간혹 반대의 시선이나 더 넓은 시선을 갖게 할 수 있고, 이는 시민 평등권에 대한 충성과 린든 존슨에 대한 충성 사이에 다리가 걸리는 것을 의미했다.

충성을 향한 존슨의 절망적이다시피 한 요구는 아주 많은 것을 이루어낸 인물이자, 워싱턴의 거물이 지닌 불안감의 이면이었다. 그러나, 이 도시의 아주 많은 중요한 부분이 그를 이방인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동부 출신의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존슨은 텍사스 출신의 깡패에 불과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생각, 그것은 존슨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이런 편견을 결코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그는 지역적 편견에도 사로잡혀 있었다. 대통령직을 차지하고 나서도,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훗날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존슨은 자신을 백악관에서 몰아낸 것이 전쟁이 아닌 '남부 출신'이라는 태생적 배경 때문이라며 확신했다. 그것이 어떤 문제라도 일으키기를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은 처음부터 그들만의 전쟁이었던 그 전쟁을 앞세워 존슨을 백악관에서 몰아낸 것이었다. 존슨은 늘 불만을 품고 살았으며, 대단한 결정들이 만들어지는 방에서 그 말을 되풀이했다.




              대선 당일, 고향 텍사스의 존슨 시티(Johnson City)에서 투표중인 '대통령 후보' LBJ, 1964년 11월 3일
              흉탄에 쓰러진 전임자에 대한 동정 여론과 핵전쟁의 공포를 자극시킨 전략으로 압승을 거두었다.




저널리스트인 제임스 레스턴의 말마따나 그는 두 번 이상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직책을 맡길 사람이 아니었다. 존슨의 유전자는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컸고, 쉽게 만족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의존했고, 모든 사람의 가치나 한계를 감지했다. 존슨은 열추적 미사일처럼 집중해서 알아낸 각자의 약점을 놀라운 기억력으로 목록을 만들어 저장하고, 필요할 때마다 아첨과 위협을 적절히 섞어가며 써먹을 줄 알았다. 잠재적 친구 또는 잠재적 적수에게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으며, 모든 사람이 그에겐 잠재적인 적이었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FBI 파일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가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제공해주었다. 다른 말이 필요없이 그는 사람을 보는 순간 읽어낼 수 있는 천재였다. 그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을지,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을지, 언제 멈추고 언제 가야 하는지를 순식간에 알 수 있었다.

존슨은 자신을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서 아주 많은 것을 갈취하였고, 그들이 지치고 고갈된 상태로 내버려둠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잘못 이용당했다는 느낌마저 갖게끔 만들었다. 존슨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평생 그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았다. 그는 동료들 앞에서 그들에게 창피를 주었고, 때로는 보상을 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한 직원을 호되게 질책한 날 밤, 존슨은 그 직원에게 캐딜락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그 장면을 보는 다른 이들에게 윙크를 하며 이런 후한 행동이 우울해하는 직원의 파업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존슨은 약자를 괴롭히거나 사람들을 잘못 해석한 것보다 더한 짓도 했지만,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처음으로 대통령과의 고위급 회의에 참석한 해병대 사령관 월리스 그린 장군은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을 학대하고, 굴욕감을 주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그런 대우를 받아들이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베트남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존슨이 그의 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린은 매우 강경했고, 미국이 무력을 너무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존슨이 말참견하기 시작했다. '더 크게! 더 크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안 들리니 더 크게 말하시오!' 그린은 의도적으로 가만히 있다가 존슨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통령께서는 저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제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그린은 자신이 백악관에 나타날 때마다 존슨이 그를 골목대장으로 표시해두고, 그의 조언과 의견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많은 이가 해병대 사령관과 같은 자신감을 가지고 NSC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존슨은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여도 되는지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지녔고, 덕분에 특히 의회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상원에서 그는 단거리 술책에 대한 자신의 모든 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기민함과 놀라운 지력, 순전한 에너지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과 부패하지 않으며 다른 것을 추구하느라 주의를 잃지 않는 사람들을 제압했다. 그는 상원과 그곳에서의 자신의 술책, 자신의 인생을 숙고했다. 이 일에는 타인을 조종하는 게 정상적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존슨이 백악관에 있었을 때는 달랐다. 그곳에선 자신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사람들만 추려낼 수 있었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에게 찍힌 자신의 도장을 지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대통령은 그들을 버렸다. [그같은 일들은 착취당한 사람들에게 나쁜 경험과 느낌을 남겼다. 그들이 더 큰 선의를 위해 착취당한 것은 사실이었다.] 베트남과 관련된 일들이 틀어지기 전이나, 성취감의 정점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도 존슨은 딘 애치슨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좋은 일들에 대해 느껴왔던 불만을 털어놨다.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진심어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애치슨은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것은 당신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1965년 7월 27일, 백악관 각료회의에 임석한 LBJ, 테이블 최좌측에 착석한 이가 그린(Greene) 장군이다.
           가장 생산적이고도 역사적인 입법 주간이라며 자찬한 이 시기에 베트남 파병군의 증강도 확정되었다.




존슨은 죽을 때까지도 아버지의 격언을 인용했다. '남자가 방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누가 자신에게 찬성하고 반대하는지를 말하지 못하면 그는 정치가라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린든 존슨은 누구보다 그 일에 능숙했다. 그 사실로만 따지자면 그는 훌륭한 정치가였다. 존슨의 비결은 자신의 목표에 따라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고, 그들이 계획해놓은 길에서 스스로 벗어나도록 만드는 능력이었다. 그것이 그가 일을 성취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곧 직접 몸으로 치고 받으며 상대를 처리하는 맨 투 맨 방식으로 심각할 정도로 확신했다. 그는 숙고하거나 책에서 지혜를 얻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변화와 추진력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도자들을 논리적으로 구슬려 자신의 목표에 따라 움직이게끔 조종하면서 마지막에 댓가를 지불하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어느 면에서 이것은 사적으로 치환하는 그의 본능과 함께 베트남이라는 곤란 속에 빠뜨리는데 일조했다.

그와 호치민은 외부에서는 혼자였고, 내부에서는 총격전을 벌였다. 존슨은 호치민의 가치와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할 것이라거나, 부대를 출격시키겠다는 위협을 통해서든 총격전이 끝나면 그는 호치민에게 대규모 경제 원조와 지역 개발, 메콩강 삼각주 개발 계획이라는 롤리팝(Lollipop, 막대 사탕)을 선물할 예정이었다. 존슨은 진정한 혁명가이자 청렴한 정치인을 상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호치민은 서유럽의 폭탄과 달러에도 절대 넘어가지 않으며, [조국 통일의 대의를 위해서라면] 진실로 최소한의 그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존슨이 정말 대단한 적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평소 상원의원과 관료, 적수 등을 다루는 방식 그대로 호치민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압박을 하다가 조금만 어루만져주면, 빛을 보게 된 호치민이 자신이 상대하던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감사히 롤리팝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존슨은 폭격이 지상 병력처럼 까다롭진 않더라도,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폭격을 통제하는 요소가 있더라도 곤란한 사정은 여전했다. '내가 폭격에 착수하지 않았는데, 훗날 내가 폭격을 감행했어야 했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의회는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의 공민권 법안이나 교육, 미화에 대해선 입도 뻥긋하지 않고 매번 베트남 사건만 들이댈 것이다. 내 엉덩이에다 대고 베트남, 베트남, 베트남이라고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진퇴양난에 몰린 그는 전임자 케네디가 베트남에서 대신했던 것과 세운 것들을 고려했지만, 그것을 결코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 전문가들이 존슨에게 계속 밀고 나갈 것을 요구했고, 심지어 러스크의 불안도 해결된 터였으므로 앞으로 나갔으며, 아주 당연하게 그 일을 완수했다. 그는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인재들에 둘러싸인 '나는 할 수 있어'형 인재였다. 우리는 무언가 전적으로 의식을 집중하면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이 이 전쟁을 경계한 이유와 프랑스인들이 실패한 이유, 그리고 그들이 미국에 발을 빼라고 경고한 이유는 그들이 역사를 앞서 살았고, 자신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잃었으며,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최고의 팀이었다. 이렇게 주저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린든 존슨에게 모든 것이 맡겨졌다. 린든은 도망치지 않았고, 아무도 린든 존슨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린든 존슨은 고향으로 돌아간 멕시코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 멕시코인들은 괜찮은 사람들이지만, '감시하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의 마당으로 성큼 들어설 것이고, 그대로 둔다면 마당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맨발로 당신의 현관에 나타나 현관 역시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처음부터 잠깐 멈추라고 한다면, 그들은 면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다.' 주변의 그 누구도 텍사스 출신의 린든 존슨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엘 파소와 마주한 국경도시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arez)에서 카퍼레이드 중인 미국 ・멕시코 정상
           리오 그란데의 수계 변동에 따른 양국간 영토 분쟁은 상호 맞교환으로 타결되었다. 1967년 10월 28일




미합중국을 대표하고, 대영제국과 윈스턴 처칠의 전통을 따르겠다고 서약한 린든 존슨이었다. 그는 존 케네디와는 달리 중대한 문제에 냉소적이지 않고, 확신을 갖는 사람이었다. 그는 명예와 권력, 약속, 전능한 미국의 힘, 국경에 대한 개념, 명확한 이해를 확신하기 위한 무력의 사용, 백인(白人), 특히 미국인이 우월하다는 것, 존 웨인이 등장한 영화의 영향력, 이미지를 모방한 실생활의 클리셰(Cliché)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맥조지 번디로 하여금 반란의 주도자였던 프란시스코 카마뇨 데뇨(Francisco Caamaño Deñó)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도록 했다. '너 같은 개자식은 내 엉덩이에 어떻게 써먹더라도 두렵지 않아.' 남성성의 과시는 존슨에게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 남성적인 면모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거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중요한 시점에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남자로 보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스스로가 남성성을 과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 특히 거칠고 진정한 남자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그는 강경파의 행동을 따라하곤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남자'와 '소년'으로 구분했다. 남자는 행동가이자 실천가에 비즈니스 제국을 정복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하는 사람, 타인들의 세상에서 성공하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반면 소년은 수다쟁이이자 작가, 지식인, 행동은 하지 않고 앉아서 생각하거나 비판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었다. 호러스 버스비와 리처드 굿윈은 존슨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좋은 소년들이었지만, 대부분은 국무부나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의 편집실에서 자신의 재능을 존슨을 반대하는데 쓰는 건방진 꼬마들이었다. 남자가 되다 만 소년 빌 모이어스는 작전 활동에 처음 들어선 작가였다. 부통령이면서 아니기도 한 휴버트 험프리는 아직 소년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보다는 나았지만, 행동보다 말이 쉽게 앞섰다.

험프리는 심각한 회의장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진짜 남자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중량감이 없었고, 베트남에 대한 반대 의견이 묻힐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존슨이 베트남에 올라타라는 조언에 무게를 실을 때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소년들이었다.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강경하게 행동했던 사람들만 존슨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다. 존슨은 행정부에서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베트남에 대해 온건파가 된다고 말했다. '제기랄, 그 인간은 쪼그리고 앉아서 오줌을 눌거야!' 결국 남자란 평생에 걸쳐 임무를 완수하고, 타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의심이란 여성의 것이므로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여성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다른 문제로 버드(Bird) 여사가 의심을 드러냈을 때, 존슨은 그녀가 다른 여자들처럼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베트남에 대한 결정의 순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존슨은 기질상 양측 모두에게 공정하지 못했다.

그는 의심하는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오로지 행동하는 강경파, 전진하는 진짜 남자들을 지원하고 안심시켰다. 온건파 중엔 조지 볼이 유일하게 그의 존경을 받았다. 볼은 온건파이면서도 온화한 면이 전혀 없었다. 그는 거칠고 사나운 거대 법률회사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엄격하고 냉정했다. 그는 선(善)을 행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도덕을 언급해 존슨을 짜증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력의 사용과 존슨이 이해할 수 있는 진짜 세상에 관심있는 실천가이자, 활동가였다. 존슨은 볼이 아무리 반대 의견을 내도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나는 할 수 있어 부류일세, 친구.' 그렇게 주사위에는 납이 박혀 있었다. 존슨은 천성대로 무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의심하는 사람들은 의심한다는 이유로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밋빛 전망은 정말로 장밋빛이 아니라 거칠고 어두울 것이고, 볼의 의심이 현실적인 근거를 갖고 있음을 직감했으면서도 그는 그대로 밀고 나갔다.

-by 데이비드 핼버스탬 著 <최고의 인재들>에서 부분 발췌




            숙명의 라이벌 LBJ와 호치민, 이들은 각자의 정치 생명 및 조국의 장래를 내걸고 체스 게임을 벌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갈수록 대통령 역시 합중국 사상 최고의 적수와 상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가면 갈수록 가관이구만 잡소리










한쪽에선 하라는 불경은 안 외우고 분신하지를 않나, 이쪽에선 히메를 결사 옹위하겠다며 투신까지 하는 형국이니, 작금의 시대착오적 병림픽 레이스가 도대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결말지어질지 예측조차 안 가는 실정이다.

이런 형세로 탄핵 심판이 진척되어 그네꼬가 최후의 단죄를 받거나, 혹은 정반대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날엔 헌재와 대치동을 타격하겠다는 특공대마저 편성되더라도 놀라진 않을 듯 싶은데 말이지. 대전기 황군의 광기를 욕하지만, 막상 그들의 마인드 및 행동 양식과 비교해 열화되기까지 한 작자들이 2010년대 버젓이 활개치고 있지 않은가.

이들 앞에서 대관절 인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격언도 반인반신 그분의 여식을 위해서라면 소용없는 모양이다.

누구 말마따나 조선반도에서 정치 구도상 보수 진보를 편가르기 하는 도식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했지?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나 사민주의 가치관에 입각해 현대 시민의 스탠스를 견지하며 주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박빠 ・슨상빠 ・노빠처럼 종교화된 특정 아이돌을 숭배한 신도들간의 하위 호환 나와바리 놀음에 다름아닌데 뭘 바라겠어? 

총폭탄 정신으로 혹부리 3부자를 위해 옥쇄 따위 마다않겠다는 자칭 인민 민주 공화국의 희극을 선사해 준 휴전선 이북 동네는 물론이거니와, 3당 합당 이래 저마다 비전도 없이 영수의 변덕에 따라 그때그때 당명과 색깔을 밥먹듯 번갈아왔던 희극을 아시아 체고 민주주의라 윤색시킨 용어 남용도 염치가 있으면 접을 시기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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