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도어?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세계사








그동안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국위는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이홍장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1898년 10월 총리아문(總理衙門)의 반(反)러시아파가 산해관-신민둔(新民屯) 철도의 부설을 위해 영국 신디케이트에서 차관[더욱 수정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유사한]을 받아들인다고 허가하였다. 심지어 정치적 방향에서도 청국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1898년 가을부터 청국과 일본 사이의 화해(rapprochement)가 그 증거였다. 이토(伊藤) 후작은 특별한 임무를 지니고 북경에 나타나 총리아문과 황제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청국 군사학교에서의 일본인 교관 채용과 청국 학생들의 일본 유학, 청일전쟁으로 싹튼 대중의 적대감을 해소하는 선전국 창설 등을 위해 수개월간 사전 조율이 이루어졌다. 그같은 상황에서 무라비요프는 제한된 목적의 정책을 추구하면서 1899년 2월 영국과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4월 28일엔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을 성립시킨 각서 교환으로 영국과 타협했다. 이 협정의 조항들은 세 가지 타협을 대변한다. 영국은 양자강 유역의 그들의 철도 세력권을 러시아에게 인정받았으며, 대신 러시아는 만주의 세력권을 영국에게 인정받았다. 같은 날, 추가 각서를 통해 러시아는 영국 신디케이트 차관과 산해관-신민둔 철도를 영국이 운영 ・부설하는 것을 용인했다. [세력권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무라비요프의 지적이 받아들여져 산해관을 그 경계로 하였다. 그리고, 비테를 만족시키기 위해 몽골과 투르키스탄을 포함한 만리장성 이북의 모든 청국 영토를 러시아의 세력 범위에 넣었다. 그러나 비테의 반대로 관세 및 관세율에 관한 조항을 체결하는 협정은 배제되었는데, 이는 곧 러시아의 자본과 산업을 위해 만주를 개발하려는 무라비요프의 계획을 심각하게 방해할 수도 있었다.

결국 러청(露淸)은행은 중국 중부에 관한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러시아의 외교가 영국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개입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영러 타협으로 비테는 북중국에 관한 자신의 최대 계획안의 일부를 여전히 유지시킬 수 있었다.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이 영국과 러시아간의 철도 경쟁이나 그 경쟁에 대한 계획들을 종식시킨 것은 아니었다. 각서를 교환하자마자 러청은행은 산해관 철도에 대한 영국의 차관을 다시 매입하기 위해 기회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만리장성 이북에서 철도 부설을 촉진하는 유일한 중재자가 되었다. 이는 영국의 이익과 철두철미하게 대치되었다. 그러나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이 영국과 러시아의 비밀스러운 중국 분할 계획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 조치에 대한 청국의 반대는 크게 누그러졌다. 

신임 러시아 공사 기르스(M.N.Giers)로부터 압력을 받은 총리아문은 6월 1일과 21일에 북경의 북쪽 및 동북쪽으로 향한 모든 새로운 철도는 러시아나 청국이 부설해야 한다는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한 서면 보증을 해주었다. 이렇게 러시아는 무라비요프가 주장한 영국과 러시아의 철도 이권 경계선을 실제로 획득할 수 있었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자국 의회에서 협정에 명시된 '양자강 유역'을 명확히 하라는 채근을 몇 번이나 당해야 했는데, 이같은 해명 요구는 러시아 외무성에서도 빈번하게 제기했다. 동아시아와 런던의 영국 신문들은 갖가지 루머를 신문의 눈에 띄는 곳에 기사화했는데, 캬흐타(Kiakhta)에서부터 우르가(Urga)와 칼간(Kalgan)을 경유해 북경으로 가는 러시아 철도 계획과 청국 정부가 공사를 중단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서안(西安)까지의 철도 부설에 관한 소문이었다.




           중화제국의 장성(長城)이 허물어지자, 대륙 침투와 분할을 가속화시킨 열강 각국의 행태를 풍자한 삽화
           19세기말 고립주의적 전통으로부터 탈각하기 시작한 미국은 중국 시장의 장래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동아시아 밖의 사건들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심각한 경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독일의 노골적인 적의와 전세계의 일반적인 친(親)보어적인 동정심 때문에 동아시아에선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6월에 영국의 첫 원정대가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고, 수개월 후에 차르와 무라비요프는 헤이그에서의 만국평화회의 계획을 출범시켰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선 비공격적인 정책을 전개하는 편이 바람직했다. 1899년 9월 6일, 미국의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는 중국의 문호 개방(Open Door) 정책을 개괄한 회람장을 런던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고 나중에는 동경로마 ・파리에 각각 발송하였다. 미국 정부는 중국에서 '세력 범위'를 보유한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선언할 수 있을지를 문의하였다.

첫째, 열강은 "소위 '세력 범위'내에 귀속된 권익이나 조약항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할 것인가. 둘째, 열강은 '...모든 항구에 하역되거나 선적한 모든 상품들에 대해 국적을 불문하고 중국의 조약 관세를 적용시키도록' 선언할 것인가. 세번째로는 1898~99년 영러 교섭에서 비테가 강력하게 옹호한 바 있었던 동청철도와 남만주 지선(支線)의 번영을 희망한 러시아를 재차 공격했다. 회람장은 앞서 언급한 열강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할 것을 요구하였다. '세력 범위'내의 어떤 항구를 방문한 다른 국적의 선박들에게 자국 국적의 선박에 부과하는 것보다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동일 거리를 운송하는 자국 국적 열차의 상품에 부과하는 것보다 '세력 범위'를 통해 운송된 다른 국적의 상품과 그 '범위'내에서 부설 ・통제되거나 운영되는 철도에 더 높은 요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조항을 만주의 러시아 철도 사업에 적용하는 것은 일종의 차별이며, 러시아에겐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청국은 이미 세력권으로 분할되었고, 러시아만이 실제로 그같은 철도 사업을 대규모로 시작했으며, 다른 철도들은 당시까지도 아직 '계획'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세번째 조항의 적용은 실질적으로 러시아에게만 영향을 줄 것이었다. 러시아는 1896년 9월 8일의 동청철도 협정 제2조에 따라 차별적인 철도 요금을 부과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동청철도, 남만주 철도는 당시에 몇몇 지점에서 동시에 부설되고 있었다. 만주철도가 1899년에 오브(Ob)강에 도달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될 때까지 관동(關東)의 대련만 및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철도들은 원칙적으로 대외무역의 운송 수단으로서 기능할 것이었다.

주요 열강은 해상무역으로 동아시아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보다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경쟁력있는 무역을 용이하게 할 것이 강조된 1899년 7월 12일의 칙령에 따라 대련만은 관세 자유항이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시 관세 자유항이었으며, 1898년 8월의 선언에 따라 1901년 새해 첫날까지 자유항으로 남았다. 헤이의 선언을 수용하는 것은 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재정과 경제적 권익에 치명적이었다. 문호 개방 선언을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이었다. 무라비요프와 당시 주미(駐美) 러시아 대사였던 카시니(Cassini)는 헤이 회람장에 함축된 경제적 의미를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숨겨진 의도까지는 아닐지라도 각서의 중요성을 재빨리 간파한 비테는 무라비요프에게 여타 열강의 반응을 기다리도록 설득했다.




            1898년부터 조차되어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 통상 진출 교두보였던 요동반도 남단의 대련항(大連港)
            군항 여순(旅順)과 더불어 관동주(關東州)의 중추 도시였으며, 남만주로 출입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1899년 11~12월에 영국 ・프랑스 ・일본은 '권익을 보유한 모든 열강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것임을 보장한다'는 유보 조항을 달아 문호 개방 선언에 동조하였다. '세력 범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1900년 1월에 유보 조항 없이 동의를 표했으나, 2월엔 위의 세 열강과 같은 유보 조항을 달아 동의하였다. 1899년 12월 30일, 무라비요프는 주러(駐露) 미국 대사 타우어(Tower)에게 헤이의 공문에 대한 러시아측 답신을 송부하면서 다르니(Dalny)로 개명된 대련만의 관세 자유항 선언이 러시아가 '문호 개방 정책을 따르려는 확고한 의도'의 증거라며 어설프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조약항에서의 관세 적용 문제를 다룬 헤이의 회람장의 두번째 조항은 수용했으나, 철도 요금을 다룬 세번째 조항은 완전히 무시했는데 이는 문호 개방 정책을 일축한 것이나 다름없어 다른 열강의 거부를 유도하였다.

열강의 수락은 곧 '다른 열강과 함께 행동한다'는 유보 조항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3월 20일의 헤이의 회람장에서는 다른 열강이 표현해왔던 유보 조건에 부응하여 미국 정부가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원안(原案)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새로운 조치(démarche)에 대한 '체면치레의' 마무리용 언급에 불과했다. 문호 개방 선언은 대부분의 국가들에게 수용되지 못하고, 러시아에게는 단호하게 거부된 그저 하나의 독트린이자 정책이었을 뿐이었다.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에 따라 제한당하고, 문호 개방 선언으로 위협을 받게 된 러시아의 동아시아 팽창은 러시아 국내 정세와 만주철도 사업의 예기치 않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더욱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1899~1901년에 유럽령 러시아는 재정과 산업 방면에서 위기[=공황]을 경험했다.

1899~1900년의 산업화 열풍 속에서 중공업의 급속한 팽창은 과잉 자본과 투기성 투자를 초래했는데, 결과적으로 민영철도 및 벤처사업의 빈번한 파산을 가져왔다. 재무성은 엄청난 경비의 지출로 빚에 허덕였다. 1898년의 계획, 대형함대 건조와 육군 포병대의 재무장 완비,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만주철도의 동시적인 공사 진행을 위한 경비 증액 등에 따른 지출이 추가로 초과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은 만주에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했다. 6천명 이상의 러시아 군인과 노동자, 6만명 이상의 중국과 만주 노동자들이 철도 공사에 종사했으나 이루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사고가 기한을 늦추고, 새로운 경비를 추가시켰다. 청국 당국자와 중국인들은 공사를 맡은 러시아 당국자들에게 협조하고자 했지만, 1898~1900년 동안 남만주에선 산발적인 반대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 장교 ・엔지니어 ・노동자와 중국인 인부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었다. 1899년엔 지방 행정 당국의 선동을 받은 중국인 공격자들이 심지어 대포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군사 시설과 역사(驛舍)에 필요한 도로와 토지를 러시아인이 사들이는 데엔 철저한 반대가 뒤따랐고, 관동주의 중국인들은 납세를 거부하도록 은밀하게 고무받았다. 반러적인 목단(牧丹) 총독은 스콧-무라비요프 협정의 정신을 무시하면서 우장(牛莊)의 영국계 회사들에게 목단 북쪽의 연태(烟台) 석탄지대의 조차를 허용했다. 길림(吉林)과 치치하얼(齊齊合爾)에선 러시아 당국자들과 우호관계에 있었던 총독들이 소환되고, 총리아문의 반러파들이 선택한 새 인물이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동청철도는 주어진 권한내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같은 반대와 싸워나갔다. 추가 수비대와 자금, 각종 설비가 무제한으로 만주로 향했다.

- By 앤드류 말로제모프(Andrew Malozemoff) 著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 (1881~1904)>에서 발췌




            1897년 8월 28일, 길림성 동녕현 소수분하(小綏芬河)에서 거행된 동청철도 기공식전의 관계 당국자들
            청일전쟁 이후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팽창 정책은 이 지역에서 영미일(英美日)과의 대립을 초래했다. 




주도권이고 운전석이고 나발이고 다 행복회로 놀음일 뿐 잡소리








현실은 미중이 적당히 딜을 쳐서 윗동네 핵 처리를 동결시키는 시늉이라도 내보이거나, 아님 작심하고 외과수술적 북폭으로 나서던가 둘중에 어느 옵션이 선택되더라도 남조선이 독자적으로 끼어들 여지 따윈 없거니와 제 몸 하나 건사해도 모자를 판국이거늘 무슨 떡고물 좀 얻어먹겠다는 마냥 저리 나대는지 모르겠다. 이니가 트황상과 통화를 하느니 마느니 가지고 일각에서 잡음이 일어난 모양인데, 솔직히 1주일도 더 지나간 시점에 와서 뒷북은 둘째치고 상호간에 신뢰마저 없는 정상들끼리 수화기 붙잡으며 입씨름해봤자 특별한 얘기가 오갈리 있나? 되려 감정의 골만 깊어질 듯한 우려부터 앞서는데 말이지. 이러려고 40조원 비빔밥 시식하면서 언플했나 자괴감이 들지 않음?ㅋ

하기사 이니와 그 주변에 포진한 운동권들은 80년대 반제(反帝) 민족자주 공상론의 세례를 받아온 이래 줄곧 저런 마인드였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보단 시중에서 서희 ・광해뽕에다 비스마르크식 현실주의까지 어줍잖게 짜집은 중개자 드립이 유행한 데 편승해 반도가 스스로 동북아 질서 변환에 중심축 역할을 할 수 있으리란 근자감 설레발이 난무중인 현상이야말로 작금과 같은 외교 참사를 빚어내게끔 기저 토양이 생성되는데 크게 일조했다는 점이 진짜 문제라고 생각함. 이는 진영 여부를 떠나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 혐일 내셔널리즘과 비례하여 더욱 부추겨졌고, 거스름돈에 불과했던 왕년의 설움을 보상받고 싶은 욕구와도 맞물려 분출된 포퓰리즘 외교라 정의할 수 있겠지.

1%의 가능성이나마 부여해 남조선이 동북아 질서의 중개자로 나설 수 있다고 가정한들 남조선에게 그만한 역량과 배경은 커녕 최소 '정직한 중개인'으로서의 정치력 내지 신뢰도가 담보되지 못한 처지에서 저런 주장들은 예외없이 방구석 여포의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할 따름임. 하다못해 저 철혈 재상의 화려했던 외정조차 베를린 회의의 협잡극 이후론 파탄난 3제동맹의 공백을 메꾸고, 공수표들을 남발해가며 러불 및 영불간 접근을 막아내려는 처절하면서도 필사적인 생존(?) 경쟁으로 변질된 끝에 결국 대세가 기울어져버렸다는 것이 진상이었을텐데? 거기다 3제동맹의 대안이랍시고 밀어붙인 독오동맹 덕분에 독일이 점차 화약고 발칸 정세에 휘말리는 혹마저 붙인 건 덤이었고.

뭐,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독일은 으레 선망과 짝사랑의 대상이었으니, 빙의를 좋아하는 부류답게 주변 강국들에게 둘러싸인 지정학적 여건까지 투영시켜 'Uri도 비스마르크처럼 주도권 행사하고 싶습nida'라는 심리에 따라 중개자 운운하는 거라면 참으로 나이브한 마인드라 할 수밖에. 비스마르크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한 '정직한 중개인' 역할을 외세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점철된 조선인들이 능숙히 해내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을 뿐더러 누가 신용을 주기나 할까만은. 자칭 역사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민족의 국가 수장이라면 대러관계 냉각 위기를 임기응변으로 넘기고자 독오동맹 체결을 강행한 재상에 대해 일갈도 마다하지 않은 빌헬름 1세를 귀감으로 삼아야 할 듯 싶은데 말이다.




어느 책사의 양차대전 전간기 미일관계 유감론 발언록




"가령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일본이 자원과 시장을 모색하는 것을 신중히 도와주도록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우리가 그들의 자유주의 세력을 고무해주면서 군국주의자들을 낙담시키게끔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중일관계의 발전을 장려하면서도 우리가 중남미에서 가진 것처럼 중국에서의 일본의 특권적 지위를 지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이러한 대안은 1933년 당시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배한 후 대일(對日) 정책의 반전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도 없었다. 극동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인 견제 수단[=일본 제국]이 파괴된 결과, 우리는 중국에서 우리의 지위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문제까지 떠맡게 되었는데, 당장 결합된 중러의 동맹 세력과 우리 스스로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치력과 달리 일본인들은 이 모든 것을 막아냈을지도 모른다." 

- By 뉴딜시대 농정(農政) 브레인이었던 렉스포드 터그웰(Rexford Tugwell)이 FDR의 극동 외교를 디스하며




            1899년 4월 11일, 대(對) 스페인 전쟁 강화조약의 비준 동의서에 서명중인 존 헤이(John Hay) 국무장관
            필리핀 병합과 문호 개방이 공표되면서 미국 외교는 극동을 무대로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이런 견해에 따라 우리 정부[=미합중국]는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가 확립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8년의 루트-다카히라 조약은 이것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건 간에 일본인들에게는 확실히 자신들이 만주에서 획득한 지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점들만 보더라도 '문호 개방(Open Door)'이나 '중국의 행정과 영토의 통일성' 같은 문구가 중국에서 실제로 진행된 상황에 분명하게 적용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중국에 진출해있던 강국들의 온갖 특별한 입지와 이익[=특수 권익]에 대해 실제적이고 실행 가능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겁니다. 원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곧 원칙에 건전한 요소들이 아예 없었거나, 진리와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확실히 중국에 진출한 외국의 입지들 가운데는 애초에 출발점부터 비난할 만한 점이 있거나, 외국인들이 기를 쓰고 획득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확실히 중국에서는 외국인들이 계속 새로운 사업을 벌일 테고, 미국은 이러한 사업을 우려와 반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또 미국 입장에선 그런 사업과 관련되거나 책임지는 것을 사양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문호 개방 교의(敎義)와 중국의 통일성을 정치적 원칙으로 내세울 경우의 문제는 이 표현들이 대외정책의 유용한 토대로 삼기엔 분명하거나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타국 정부들에게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하도록 요구했을 때에 이 표현들은 대단히 상투적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위험할 정도로 부정확하고 혼란스러운 연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이 '그야 물론,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야 동의하죠'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이 통첩의 문구들에는 지나치게 많은 단호한 함의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 놓고 공공연하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해명하려고 애쓰기보단 동의해주는 편이 더 쉬웠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문구들에는 [청일전쟁과 북청사변 이후 반식민지화가 급속도로 진척되어가던]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만 관련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이 문구들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외국 정부들에 설명해야 했습니다. 이 문구들에 실질적이고도 충분한 일반적 의미가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이 문구들을 말 그대로 도식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면, 모든 외국인이 중국에서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둬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던 간에 서구식 국가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려는 중국의 완강한 태도에 대한 일종의 징벌이나 보상으로서 중국과는 무관한 정책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나쁜 일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찌됐든 최종 결과는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황보다 더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서구 강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기 전환기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든 현실적으로 수용할 만한 제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에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경향 때문에 필연적으로 [중국에 특수 권익을 보유하면서 활동중인] 외국인들의 마음속에 [미국에 대한] 당혹감 ・의심 ・걱정이 생겨났다는 사실입니다. 외국 정치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제안이 특정한 국제 쟁점에 관한 실행 가능한 합의나 이해의 정의로는 부적절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북청사변에 개입했던 8개 연합국의 논공행상을 추수감사절 만찬으로 풍자한 주간지 <Puck>의 삽화
              중국에서의 열강간 권익 쟁탈전에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엉클 샘'과 문호 개방의 본질을 묘사했다.




당시의 외국 정부들처럼 우리 정부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고 가정하면, 외국 정치인들로서는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합의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우리 정치인들이 [중국에서의 권익을 침해하려는] 배후의 동기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저는 미국이 극동에서 추구하던 정책과 관련해 제기하고자 하는 더욱 중요한 두 번째 단서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은 특히 양차대전 전간기(戰間期) 일본과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 지역에서 우리의 외교적 압력과 비난의 주된 표적이 되었지요. 이 단서는 우리가 대체로 일반적인 원칙 뿐만 아니라, [중국 정세에 대해] 일반적인 조정조차 논의하기를 꺼려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반대하는 행동 방침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책임지기를 꺼려했다는 점과 관련됩니다.

우리 외교 활동의 대부분이 다른 강국들, 특히 일본인들이 [만몽과 중국에서] 우리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특정한 행동 방침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활동이었음을 유념하십시오. 우리의 견해를 따르면 그들과 중국에 실제적으로 심각한 영향이 미치고, 새로운 문제와 불편이 제기되거나 이 지역에서 힘의 요인들이 실질적인 불균형이 발생하며, 또한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고, 이런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일을 하도록 다른 나라들이 우리에게 역으로 요구할 권리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펴본 이런 증거에 입각해 판단할 수 있는 한, 미국의 정치인들은 도덕적 원칙이나 법적인 원칙의 명의로 무엇을 공표하고 촉구하던지 간에 그것을 촉구했던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구체적인 책임이 부여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령 이 원칙을 고수할 때 생기는 실제적인 영향이 급격하고 광범위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권고하고, 요청하고, 방해하고,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유념하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주시하는 가운데 꼴사나운 자세를 드러내도록 만들면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가 촉구하는 내용에 유의하면 그에 따르는 위험은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우리는 결과로 생길 문제들에 관해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었지요. 바로 이같은 정신 아래 우리는 매년, 아니 수십년 동안 다른 강국들,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이 아시아 대륙에서 보유하고 있는 입지를 난도질했습니다. 우리의 원칙이 훌륭하다면 그런 원칙을 적용시킨 결과 또한 흡족하고, 수용할 만한 게 분명하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속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관련된 현실적인 많은 사안들을 [일본과] 논의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팽창하는 인구라든가, 중국 정부의 약점, 다른 강국들[특히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야망을 실제로 맞받아칠 수 있는 방법 등을 논의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에 비해 아시아 대륙에 대해서 훨씬 더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들의 경우에 이런 사실이 특히 민감한 신경을 건드렸다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행동을 바꿀 경우에 자기보다 훨씬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행동을 바꾸라고 한다고 그런 요구를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본인들과 영국인들은 언제나 우리가 중국에 대한 이해관계가 그들에 비해 훨씬 적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중국에서 보유한 '외교 자산'을 [미국의 문호 개방 구상에 부합되도록] 헤프게 쓰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1921년 11월 21일, 워싱턴 D.C.의 메모리얼 컨티넨탈 홀에서 개최된 5대 해군국 군축회의 석상의 광경
            워싱턴 체제에 대한 잠재된 불만은 장차 일본이 극동에서 현상 타파를 추구해가는 유인책이 되었다.  




우리는 또한 오랜 시기에 걸쳐 종종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일본 국내 문제의 관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고려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 회의와 9개국 조약, 영일동맹 해체, 스팀슨 독트린 등으로] 일본의 아시아 대륙 정책을 좌절시킨 댓가가 동경에서 군부 극단주의자들의 힘을 결정적으로 굳혀주는 것이었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분명히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미국의 정치인들이 이따금 [테디 루스벨트처럼] 일본의 상황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미국의 정책을 조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몇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전반적인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이었을 뿐, 미국 정책의 전체적인 특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일본의 감정에서 특히 [만몽 권익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면, 그것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의 심중에 1894년 청일전쟁 직후 외부 세력에 의해 승리의 결실을 박탈[=3국 간섭]당했다는 상처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에서 그것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났을 당시 다시 일본의 승리를 좌절시키는 세력[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으로 재등장하는 사태를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차대전 직후에 거리낌없이 다시 돌진해 들어갔습니다. 이번에는 일본이 독일에 맞선 전쟁에 참여해서 얻은 결실이라고 생각한 것, 즉 아시아 대륙에서의 입지 향상이란 성과를 빼앗으려는 단호한 움직임을 이끄는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말입니다. 또한, 이 불행한 긴 이야기 내내 미국의 특정한 지역들에서 이민 정책과 일본계 및 동양계 일반에 대한 처우를 통해 가뜩이나 예민한 일본인들을 거듭 자극시키고, 발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황이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민법 성립 전후로] 연방 정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여러 지방 당국에게 거주와 토지 소유, 일본인 밀집 지역에 대한 처우 등의 공교로운 여러 문제에서 국익의 요소를 인정하도록 기꺼이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에서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라 전체는 여전히 주(州)와 지방 당국의 행동 및 태도가 대외정책을 수립하는데서 중요한 요소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말썽이 생기기 때문에 일본을 상대로 다른 요구를 하는데 있어서 보다 온건해야 한다는 점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자면 이런 것들은 쓰디쓴 성찰이며, 오해의 여지가 없어야 합니다. 2차대전 이전 수십년 동안 극동에서 전개된 상황은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과정이었고, 인간사의 엄청나게 강력한 흐름이 여기에 휘말렸습니다.

미국인들은 이 과정을 거의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행동 원칙에 따라 움직였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장기간에 걸쳐 일본인들에 대한 태도에서 좀 더 신중하고, 그들의 입지 요구에 대해 좀 더 고려하고,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언제든지 그들 방식대로 논의했다면 진주만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미국의 정책 중에서 어느 한 가지 행동을 꼬집어서 바로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미래의 사태를 급변시킨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외정책 분야에서 우리의 행동은 차곡차곡 축적되며,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다른 사건들의 거대한 흐름과 맞물려 합쳐집니다. 그리고 일단 이 행동이 '역사'라는 유동체에 들어간다면, 정확하게 그 영향을 추적할 수 없습니다.




           1932년 5월 5일, 상해사변의 후속 처리를 위해 송호(淞滬) 정전협정 조인식에 출석한 일중(日中) 전권단
           테이블 좌측 중앙이 일본 해군 대표 시마다(嶋田) 소장으로 대미개전 당시 해군대신으로 재직하였다. 
 



태평양에서 2차대전으로 이어진 상황 전개엔 우리의 노력으로 여전히 무언가 희망적 결과를 이룰 수 있었던 국면과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린 국면[이 시점에선 완전한 비극이 우리의 불행의 결정 요소로서 인간의 약함을 압도했습니다]을 가르는 구분선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시점이 존재했음을 단언할 수 없으며, 그 시점이 언제였다고도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다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미국이 장기간에 걸쳐 [유럽 열강과 일본이 균형을 유지하던] 동양의 힘의 현실을 진지하게 존중할 만한 하나의 요인으로 일관되게 인정하고, 법적 ・도덕적 깔끔함 뿐만 아니라 안정과 평온까지 추구하는 정책으로 사태의 추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면, 그런 정책으로 사태의 추이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활용하고, 가능성이 현실이 될 기회를 부여하며, 우리 자신의 이익과 세계 평화라는 이익을 위해 끌어낼 수 있는 이득을 이 가능성으로부터 끌어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현재 우리가 과거 아시아에서 [문호 개방을 빙자해] 추구한 목표들이 표면적으로 대부분 달성된 사실은 역설적입니다. 서구 강국들은 중국에서 특권적 지위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결국 중국 본토에서 쫓겨났으며, 만주와 한국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본인들이 축출되버린 결과는 과거에 현명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이 우리에게 줄곧 경고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이 반세기 가까이 한반도-만주 지역에서 봉착하고, 떠맡아왔던 [소련의 남하 및 팽창을 저지해야 하는] 문제와 책임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얕잡아 본 점으로 우리가 [한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고약한 정의입니다. 무엇보다도 유감스러운 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직시하는 이들이 극소수인 듯 하다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의 실수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요? 지난 반세기 동안에 걸쳐 미국이 극동에서 실천한 외교를 돌아보면, 우리의 정서적 컴플렉스에서 생겨난 것이 분명한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됩니다. 이 지역에 대한 우리의 정책과 유럽에 대한 정책 사이엔 뚜렷한 차이가 보입니다. 동양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에는 유럽 대륙의 문제에 대한 접근법에서 우리에게 장기간 영향을 미친 것 같은 금기가 결여되었다는 점이 확인됩니다. 우리는 동양 문제에 기꺼이 관여할려면서 우리에게 이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넘겨버리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제까지 힘의 현실과 힘에 대한 열망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덕적 판단의 의무조차 느끼지 않은 채 현실과 열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런 현실과 열망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인간사에 존재하는 불변의 요인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개선하거나 억압하기보단 최대의 균형점을 찾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극동의 민족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중국인들에 대한 일정한 감상적 태도에 물들었습니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의 국내의 제도와 요구를 평가하는 판관일 수 없으며, 우리가 국내에서 하는 일과 시행하는 제도에 대해 타국인들에게 해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백인종이 아닌 경우엔 동화하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나라는 타민족과의 관계나 그들과의 친밀한 교류를 기대하는데 특별히 신중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by 1951년 월그린(Walgreen) 재단 강연에서 미국의 전간기 동아시아 정책과 그 오류를 비평하며
                                                                                   조지 F. 케넌(George F. Kennan)

 


자화자찬 한미 정상회담과 동경 도의회 선거 잡설 국제, 시사








1. 문비어천가가 반도 천지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악수 좀 잘하고, 40조원짜리 특급 비빔밥 대령받은 트황상 알현을 둘러싼 어용 기레기들의 도를 넘은 윤색질과 미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소위 조선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 대화의 주도권을 트황상이 인정했다고들 떠드는데, 대관절 어딜 봐서 인정했다는건지? 이번 회담에서 트황상은 처음부터 무역 불균형 시정과 시장 개방 등의 이슈에 주안점을 착목하며 통상 압력이 가속화될 것임을 언명하는 등 추상적인 말장난만 늘어놓는 우리 이니와 선을 긋는 스탠스를 보였다는 게 진상이잖아?     

핵 미사일의 개발 완성을 목전에 둔 폭주기관차를 상대로 입바른 관념적 몽상인 평화체제나 웜비어 사건을 계기로 대북 협상의 가망성조차 당분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화의 주도권 운운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 X솔이인지는 삼척동자도 눈치깔 만할텐데. 애당초 교섭에서 무슨 주도권을 확보할 정도로 외교 역량이 특출난 것도 아니거니와, 결국 대화를 빙자한 퍼주기 호구짓을 답습하겠다는 신앙 간증밖에 더 되겠음? 뭐 하기사, BH의 그분들과 시다바리 언론이 보기에 삼척동자도 아닌 개 돼지들을 상대하는 만큼 언플 사기극이 먹힐거란 통밥 정도야 쟀겠지만.ㄳ   
  
현실은 사드 논란을 잠정 묵계해주는 댓가로 공동 선언에서 으레 적시되는 수사적 화법에 발을 맞춰주는 척 하면서 FTA 개정이 공식화된 동시에 대중(對中) 제재로의 동참까지 촉구받는 등 철저히 천조국 페이스대로 진행되었다고 봐야지. 역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의 증액 문제와 관련해서도 전작권 환수와 연계시켜 하나의 카드로 삼겠다는 암시마저 나온 건 덤이고. 전략적 인내 노선의 폐기를 못박으면서 북핵 폐기의 공조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을 함께 거명했다는 건 과거사로 딸딸이 치지 말고, 속히 관계 개선을 회복하라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전달한 셈이다.

한 마디로 녹음기가 필요할만치 언행 불일치엔 도가 튼 우리 이니가 무슨 말을 하든 말든 트황상께서도 자기 하고 싶은대로 추후의 북핵 현안과 통상 과제를 둘러싼 가이드 라인을 취임 이래 처음으로 제시해줬으니, 이니가 여기에 얼마나 잘 따르고 협조할 지를 지켜보겠다는 숙제를 내준 것이 천조님의 속셈인거다. 만약에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연말쯤 되어서 세컨더리 보이콧에 남한도 포함시키며, 사드 배치 공론화 재개와 더불어 워싱턴발 환율 조작국 독배 사발이 배달되는 사태가 벌어지는 꼴을 구경할 기회가 올 수도. 마지막 시간을 줄테니 잘해보라는 듯 하네.ㄷㄷ



2. 일본 동경 도의회 선거 자민당 참패. 친정 자민당에서 떨어져나와 딴 살림 차린 고이케의 포퓰리즘적 퍼포먼스가 임기 초반에 그럴싸한 착시 효과와 여성 도지사라는 신선한(?) 감을 어필한 점이 먹혀들면서 이번 선거는 고이케의 승리가 진작부터 예측되어왔던 바이긴 하다. 단지 여당이 역대 최저 의석수로 패배했다는 점과 정국에 미칠 파장에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한 형국이라 크게 보도되는 중인데, 이 와중에 실력도 의지도 없이 해외 리버럴 미디어 기사만 복사해 퍼나르는 조센 언론은 아베가 권력을 잃을 거라느니 또다시 행복회로 가동 중이니 우습기 그지 없군.

동경 도의회 선거가 그 상징적 의미로나 지방자치에 대한 영향을 감안할 때 중요한 이벤트이긴 했지만, 이번 패배로 내각이 퇴진할 이유는 하등 없거니와, 그럴 정도로 급박한 정세는 더더욱 아니다. 중의원 임기 만료까지 1년 반 가량 남아 있음은 물론, 오는 가을부터 국회에 상정될 예정인 본격적인 평화헌법 개헌안 논의엔 고이케 역시 원론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인고로 순전히 정치공학적으로만 따질 경우 개헌 스케줄 자체엔 별다른 변동이 없을거라 본다. 단지, 개헌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면서 극렬 반대하는 좌익과 리버럴 진영의 입김을 얼마나 제어하느냐가 관건일 터.

여당의 패인으로 지목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사학 스캔들'이 강조되고 있으나, 이건 앞서의 모리토모처럼 특혜를 줬느냐가 쟁점인데 실체가 모호한 구석이 많음. 기실 가케 학원의 수의학부 신설은 원래 현지 지역구의 타카이라는 야당[민진당] 의원이 로비 차원에서 정부에 건의해 검토되기 시작한 프로젝트였음에도, 이사장이 하필 총리와 오랜 지기라는 인연 때문에 본질은 호도되어 불거진 감이 컸으니깐. 여당으로선 증인 환문 수용 등으로 의혹을 해소했던 모리토모와 달리 '테러 등 준비죄'를 회기 내로 통과시키는데 몰두하느라 적시에 대처하지 못한 감이 있었다.

한편 승리한 도민 퍼스트회, 즉 고이케 진영으로서도 전도가 꼭 밝을거라 보장할 수 없으니, 퍼스트회 자체가 기존 고이케 지지파와 민진-사민당 탈당파 및 그밖의 군소 세력을 삼선 짬뽕식으로 그러모아 급조시킨 반도의 국물당과 유사한 전형적인 선거용 도구라는 사실에 취약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고이케가 과연 배후에서 잘 리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조센 언론에선 일절 전파타지 않고 있지만, 2020 올림픽을 맞아 재개발 착수 예정지인 츠키지 어시장의 이전을 놓고 승인과 연기를 오락가락하다 주변 상권의 반발을 샀거든.

결국 이전 연기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주민 감사 요구가 들어오는 등 장래 고이케 스스로의 정치적 자산을 갉아먹을 환경의 조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덧붙여 과거 자민당에 몸을 담았을 적부터 계파를 이리저리 오가며 붙어먹는 철새 행보로도 모자라 민주당 집권기엔 의도적으로 친정과 거리를 두는 바람에 이미 내버린 자식 취급을 받은 고이케의 이력상 일본 보수정당이 철새나 변절 행위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다는 배경까지 감안할 때 이는 중앙 정계로의 복귀를 시도하는데 발목을 잡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거라 예측하는 바다.

이하는 가케 학원 사건의 본질과 츠키지 어시장 이전과 관련해 고이케의 삽질을 요약한 글이니 참조.ㅇㅇ







우리 이니의 대미 자주적 실리외교 성과 요약 잡소리








1. 40조원의 패키지 투자 교환권으로 영빈관 3일 투숙 겸 비빔밥 제공, 백악관 실내 구경  

만찬 석상에서 비빔밥을 제공했다는 건 농산물, 특히 쌀 시장 개방 압력의 포석일 수도 있다고 사료됨.


2. 사드 관련 언급을 자제한 대신 FTA 재협상과 방위비 증액 공식화, 환율 문제 역시 논의되었을 가능성


3. 250억$의 천연가스 수입, 미국산 제품의 한국 시장 진입의 확대 필요성 강조  


4. 웜비어 사건 후 워싱턴의 초강경 기류를 반영해 전략적 인내 노선의 폐기와 대북 압박 공조에 협력할 것을 표명 

속칭 '달빛 정책'에 대한 견제구이자, 공조 대상의 국가 단위로 일본을 지목함으로써 한일관계 개선까지 주문받음.


5. 중국제 철강의 덤핑 수출 자주 규제가 제기되면서 사실상 대중(對中) 제재 동참 또한 촉구받은 모양새


6. 지난 정권에서 시작된 2+2 장관회의 및 고위급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개최를 정례화

형식은 북핵 대처를 위한 정례 모임이라고는 하지만, 어째 통상 현안이 집중적으로 다뤄질 듯한 예감 시나리오.

 
7. 귀국행 비행기에 6.25 당시 반출되었던 조선왕조 어보(御寶) 2점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이벤트 확보.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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