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인신(現人神)의 초상, 어진영이 탄생하게 된 과정 세계사








사진 촬영의 결정적인 새로움은 천황을 살다가 죽어가는 인간의 일생을 보내는 존재로 보게끔 만든다는 것이었다. 니시키에(錦絵)의 경우엔 모노가타리(物語)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천황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인 천황의 명백한 일면이다. 때문에 사진은 자연스럽게 찍힌 시기를 보여주게 된다. 천황은 시간에 따라 성숙되고, 늙어가며 변화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메이지 천황의 초상 사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미 언급한 1872년 사진[소쿠타이(束帯) 등을 착용한 전통 의상] ・1873년 사진[군복 양장]과 흔히 '메이지 천황'이라고 하면 금방 그 이미지가 떠올려지는 1888년의 초상 등 세 종류이다. <메이지 천황기(明治天皇紀)>엔 말을 탄 늠름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 있다고 적혀있으므로, 이외에도 촬영했을 사진이 더 있다는 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승마 사진은 요코야마 마츠사부로(横山松三郎)에 의해 촬영되어 빈(Wien)의 만국 박람회에 출품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자들도 있다. 이외에도 일반인에게 유출되지 않았던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만년의 옆 얼굴을 찍은 사진이 유포되고 있지만, 이것은 [1911년] 군사 대연습 당시 임시 휴게소에서 참모본부 사진부원이 암묵적인 허가를 얻어서 천황 모르게 촬영한 것으로 본래는 고개를 숙인 모습을 트리밍(Trimming)하여 방향만 바꾼 것이다. 어느 것이든 '초상 사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따라서 1872년 ・1873년 ・1888년의 세 종류만을 고려해도 충분할 것이다. 메이지 초기엔 어느 누구든지 빈번하게 사진찍는 관습이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 국가의 상징인 천황의 사진이 이렇듯 오랫동안 촬영되지 않았던 것은 기묘하게 생각된다.

그동안 어렸던 천황도 나이가 들고, '군덕(君德)을 함양'하여 제왕으로서의 공적인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용모 또한 변했다. 실재하는 천황과 사진으로서의 천황이 너무 달라서는 곤란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곤란한 일도 발생했다. 새로운 사진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서둘렀던 인물은 천황이 아니라 궁내대신 히지카타 히사모토(土方久元)였다. <메이지 천황기>는 1888년 조(條)에서 '천황은 촬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진영으로 존재하는 것은 [1873년 촬영된] 구제(舊制) 프랑스식 군복을 비롯하여 모두 10여년 전에 촬영한 것이어서 외국 황족이나 귀빈에게 증여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하는 자가 있을 때마다 대신(大臣, 히지카타를 가리킴) 등은 그 처리 때문에 곤란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메이지 천황이 왜 그토록 사진 찍기를 싫어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 내용에서 명확해지는 중요한 사실은 1873년 이후 천황이 본격적인 초상 사진을 결코 촬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73년엔 서구와 대등한 양장을 입은 사진 쪽이 바람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촬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시 사진을 촬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88년까지 복식 제도는 종종 개정되었지만, 1872년부터 73년에 거쳐 천황의 외양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렇듯 긴급한 필요가 없어서 별로 진전되지 않다가 어느새 십수년이 지나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궁내성에 소속된 [궁중에서 황족의 촬영을 내락받았던] 우치다 쿠이치(田九一)가 그의 사진관이 한참 번창하던 1875년에 불과 31세로 요절한 것도 사진 촬영의 기회를 놓쳐버린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후엔 스즈키 신이치(鈴木真一)와 마루키 리요(丸木利陽)가 궁내성 소속 사진가로 궁중을 출입했다.




             1873년 10월 8일, 전속 기사 우치다 쿠이치가 직접 촬영한 21세의 청년 군주 메이지 천황의 초상 사진
             복장 개혁과 단발(斷髮)을 행한 직후로 서구화된 천황의 자태는 근대적인 시각 효과를 창출하였다.  




외교적으로 사진을 교환할 경우에도 예를 벗어나기 때문에 측근으로선 더 이상 낡은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해에 드디어 새로운 사진이 완성됐다. 이것은 장년이 된 위풍당당한 군복 차림의 초상이었다. 마침 이 시기의 천황제 국가 체제는 제국 헌법 제정을 축으로 그 기초를 확실히 다져가고 있었다. 1888년 6월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추밀원에서 헌법 제정의 방침을 밝히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그는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데 '우리나라의 기축으로 삼아야 할 것은 오직 천황 뿐'이라며, 국체(國體)를 헌법의 전제로서 밝혔다. [중략] 1888년의 '어진영'은 카메라로 직접 촬영한 사진이 아니라 손수 그린 '그림'의 복사였다. 게다가 이것을 그린 사람은 일본인이 아니라 콘테(Conte)화 ・석판화 ・동판화 등의 수법으로 초상의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외국인이었다.

즉, 1875년 대장성 지폐료(紙幣寮)의 초청으로 일본에 온 이후 장기간 고용 외국인으로서 지폐 원판의 도안과 제작 및 인쇄에 관여하다가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이탈리아인 키오소네(Chiossone)가 1888년 1월에 그린 것이다. 완성된 원본을 당시 동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가 중 하나인 마루키 리요가 키오소네의 지도 하에 '몇 차례의 시사(試写)를 거쳐 수십일 동안' 복사한 끝에 '사진'으로 완성했다. 키오소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천황이 식사 초대를 한 것이 동년 8월이므로 제작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일반적으로 '사진'이라 통용되고 있는 '어진영'이 왜 이러한 제작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일까? 상술한대로 '천황이 촬영을 좋아하지 않아' 남은 사진은 모두 10여년 전 촬영한 것들 뿐이어서 외국 황족과의 사진 교환이 불편했기 때문에 궁내성 측근들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었다.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리대신을 겸한] 궁내대신이었을 때에도 종종 천황에게 새로운 초상 사진의 촬영을 권했지만, 천황은 왠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대신이 되지마자 궁여지책을 내놓았다.

그 경위를 <메이지 천황기>는 1888년 1월 14일자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히지카타 히사모토는 대신이 되자마자 천황 모르게 촬영을 하고, 그 책임을 자신이 지기로 마음먹고서 이를 식부관(式部官) 나가사키 쇼고(長崎省吾) ・시종(侍從) 자작 호리카와 야스타카(堀河康隆) 등과 협의하고, 시종장(侍從長) 후작 도쿠다이지 사네노리(徳大寺実則)에게 자문을 구했다. 마침 1월 14일에 야요이사(弥生社)로 행차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키오소네에게 천황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키오소네는 천황이 신하들과 식사하는 옆방에서 문틈으로 천황의 얼굴과 자세 및 담소를 나누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자세히 그렸다. 이를 바탕으로 원화(原画)를 완성한 후 촬영했는데, 그 모습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제(聖帝)의 위용을 당당하게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히사모토 등은 천황에게 보여드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서 <메이지 천황기>에는 히지카타가 천황의 허가를 얻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한 후 '후일 천황의 어진영으로 널리 하사된 것은 이 원화를 토대로 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궁내성 측근들은 키오소네에게 스케치를 하도록 주문하고, 이를 바탕으로 천황의 좌상(座像)을 콘테로 그린 후 다시 그 원화 중의 하나를 복사해 사진으로 만들어서 '어진영'으로 통용시킨 사실이 의외로 담담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담담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시각적 표현 속에서 전개된 정치적 기술에 대한 실로 흥미로운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궁내성 측근들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제(聖帝)의 위용을 당당하게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감탄할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사실적(写実的) 회화와 사진을 구별하는 감성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니면 어느 쪽이든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지금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을 보면 '사진처럼' 잘 그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같은 회화와 사진의 혼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내성 측근들의 인식은 언어나 시각을 통해 현실을 탐색했던 메이지 초기의 리얼리스트들이 지녔던 지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진실의 탐구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정치적 차원에서의 효과 판단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과 회화의 무차별적인 혼동이 아니라, 매우 강한 정치적 전략에 바탕을 둔 이미지의 인식일지도 모른다. 사진과 회화의 구별에 관련한 메이지 정치가들의 감성을 의심하면서 그들의 무지를 비방하는 것은 너무도 단순한 방법이다. 어떤 의미에선 기호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 모든 것을 인지한 후 그림을 사진으로 배포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완성품이 '사진'이어야 할 필요성만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909년 11월, 도치기현 나스(那須)에서 거행된 육군 대연습을 참관하며 보고를 받는 중인 메이지 천황
            참모본부 산하 측량부의 사진반원이 포착한 장면으로 천황 말년의 용모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아무튼, 이날 키오소네는 경찰관 무도 연무장에서 몰래 문틈 사이로 천황의 얼굴과 모습을 스케치하면서 천황의 순간적인 표정과 몸짓들을 생생하게 관찰하였다. '빠짐없이 자세히 그렸다'는 <메이지 천황기>의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스케치가 그려졌을 것이다. 스케치와 그림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듯이 초안(草案)과 작품이라는 단순한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림이 인간에게서 지니는 시야의 의미를, 넓게는 다양한 지각적(知覺的) 경험과 세계의 관계를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의 스케치에 의해서였다. 당시에 대형 그림을 위해 시도된 유채(油彩) 스케치가 다양한 시야들에 대응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취합하고 자립시켰는데, 이것이 마침내 화면 구성의 해체를 초래하여 새로운 회화로의 길, 또는 지각(知覺)에 관한 이론 전체의 변혁을 일으키게 될 먼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키오소네의 방법은 거꾸로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인간의 다양한 인상을 종합하고, 이러한 인상을 초월한 유형으로서의 인간을 이미지화하여 그려내는 것을 지향했다. 더욱이 키오소네는 천황을 어떤 의자에 어떻게 앉히고, 어떤 포즈를 취하게 할지도 자신이 모두 결정했다. 물론 정부나 천황의 측근들로부터 바라는 바가 어느 정도 제시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착용하는 복장이나 훈장, 사용할 소품 정도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구도나 천황의 포즈는 전적으로 키오소네가 그때까지 축적해 온 인물 초상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스타일로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당시 그는 매우 비슷한 천황의 초상화를 적어도 2장은 그린 듯하다. 훗날 천황의 어진영으로 하사된 사진과 현존하는 키오소네의 그림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서로 약간 차이가 보인다.

굳이 말하자면 복사한 원래 그림은 인물 주위를 조금 넓게 잡고, 배경을 더 구체화하여 사진처럼 그렸다. 또한 당시 그는 콘테화 초상 외에도 군인 복장을 입고 서있는 모습을 하나 더 그려서 커다란 동판에 새길 예정이었다. 이것은 그 제작에 어려움이 있어서 겨우 인쇄가 완성된 것은 키오소네가 지폐료를 퇴직한 후인 1893년이었다. 키오소네가 그린 천황 초상은 의뢰자를 매우 만족시켰다. 이 정도면 천황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측근들이 보더라도 천황과 매우 닮았으며, 천황을 이상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측근의 지각엔 이미 천황에 대한 감정적 이입이 있다. 초상과 모델이 닮았다는 건 매우 애매하긴 하지만, 우선 세부적으로 모델과 같은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최저한도의 조건이다.

키오소네의 이미지는 완전히 그 조건을 충족시켰고, 나아가 가장 바람직한 수정, 즉 천황 측근들의 기대와 일치하는 수정을 가하여 완성된 것이다. 그 수정이란 대상으로서의 현실을 관념과 이상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시각적인 특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의미와 결부시켜 가는 것이다. 의뢰자를 만족시켰던 것은 이러한 조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키오소네는 이미 이러한 방법으로 메이지 초기의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하였던 초상화를 다수 그려낸 실적이 있었다. 키오소네가 화가로 선택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서양인 그 이외에 이러한 초상화를 능숙하게 그려낼 사람이 [당시 일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상화는 19세기의 부르주아 고객들이 선호하고 소유하고 싶었던 모사이지만, 아무리 봐도 진짜처럼 보인 보수적 초상화 중 하나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매우 뛰어났다.

- By 타키 코지(多木浩二) 著 <천황의 초상(天皇の肖像)>에서 발췌  

 


              메이지 천황의 7녀로 선제(先帝)와 매우 유사한 돌악형(突顎形) 외모를 가졌던 후사코(房子) 내친왕
              천황의 자녀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로 후년엔 이세 신궁의 제주(祭主)로도 재직했다. 1927년 2월




누에바 에스파냐 체류 당시 훔볼트의 행적 세계사








훔볼트 일행 3명과 20 상자의 화물을 실은 오르에 호가 과야킬(Guayaquil) 항구를 출범한 것은 1803년 2월 17일 오후 3시의 일이었다. 배는 해안에서 1000km 정도 떨어진 먼 바다 쪽으로 곧장 아카풀코(Acapulco)를 향해서 나아갔다. 앞절에서 인용한 훔볼트의 편지에 나오는 해상의 강풍은 3월 10일부터 21일의 사흘간 있었던 것이다. 오르에 호는 도중의 어디에도 기항하지 않고 3월 22일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오르헤 호가 더듬어 찾은 루트 가까이에는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나 <종(種)의 기원>으로 일약 유명해지게 될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 과학적으로 매우 흥미있는 이 섬들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훔볼트는 전용 조사선이 아닌 상선(商船)의 불편함을 탄식하고 있다. 그것은 또 정부가 파견한 탐험대에 비해서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사적인 탐험가의 탄식이기도 했다.

아카풀코에 도착한 후 훔볼트는 즉시 멕시코 시티에 있는 부왕(副王) 호세 데 이투리가라이(José de Iturrigaray)에게 편지로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na) 왕국의 여행 허가를 요청했다. 이에 대한 이투리가라이의 회답은 '당신에게 유용한 모든 지원을 하려고 생각합니다. 나의 지배에 속한 지방에선 어디서든 나의 명령이 당신을 호위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바라는 통행 허가증과 그외의 필요한 서류를 보냅니다.[1803년 4월 15일자]'라는 호의가 넘치는 것이었다. 스페인 국왕의 여행 허가증을 휴대한 훔볼트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지만, 멕시코 만큼 관용으로 그의 조사 여행을 승낙한 데는 없었다. 아카풀코를 3월 29일에 출발한 훔볼트 일행은 측기류와 그때까지 수집해왔던 자료[동식물과 암석 표본 등]를 운반하기 위하여 21마리의 노새를 이끌고 멕시코 시티로 향했다.

멕시코 시티에 도착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훔볼트는 이동 루트를 기록하고, 많은 지점에서 해발 고도를 측정했다. 똑같은 일이 멕시코 시티로부터 베라크루스(Veracruz)까지의 이동에서도 반복되었다. 이리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멕시코 만(灣)까지 측량에 기초한 멕시코의 지형 단면도가 비로소 그려졌다. 아카풀코에서 멕시코 시티에 이르는 여정 도중에 훔볼트 일행은 광산 도시인 탁스코(Taxco)를 방문했다. 탁스코는 18세기의 멕시코를 대표하는 은(銀) 광산이 있었던 곳이다. 독일에서 광산 감독관 경험이 있는 훔볼트는 여행 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탁스코 광산은 이 20~25년 사이에 과거의 성황을 잃고 말았다. 이전에는 대규모 광맥이 존재하여 수개월 사이에 약 8~15만 페소(Peso)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 탁스코 광구에서 산출되는 은의 양은 주위의 광산을 합해도 연간 약 10~12톤 정도이다. 탁스코 광산의 최고 전성기는 1752년부터 1761년 경이었는데, 한 푼도 없이 탁스코에 온 프랑스인 호세 데 라 보르다(José de La Borda)가 풍부한 광맥을 발견한 덕에 대단히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당시의 탁스코 은 광산은 그곳에서만 연간 약 37톤 이상의 생산량을 자랑했다고 한다. 라 보르다는 놀라울 정도로 도량이 컸던 인물로 산타 프리스카(Santa Prisca) 성당의 건설에 40만 페소라는 거액의 자금을 쏟아 넣었다."




           아카풀코 전경, 독립 이전까지 멕시코와 필리핀 사이를 왕래한 태평양 횡단 갈레온 선단의 출항지였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서쪽 관문이었던 이곳은 1940년대부터 관광업 육성에 따라 휴양지로 각광받았다.   


             프랑스인 기사 라 보르다의 스폰을 받아 1758년에 준공된 탁스코의 산타 프리스카(Santa Prisca) 성당
             바로크 양식의 전형을 대변한 이 성당의 종탑(鐘塔)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최고층 건축물이었다.




1803년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몇 차례 국내 여행을 제외하면 훔볼트 일행은 9개월 이상을 주로 멕시코 시티에서 체재했다.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 왕국의 수도 보고타나, 페루 왕국의 수도 리마에서의 체재에 비하면 4배 이상의 장기 체재다. 아카풀코 도착에서부터 베라크루스 출발까지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서의 12개월은 훔볼트의 열대 아메리카 여행에서 정온함과 두드러진 광경이 가장 부족한 기간이다. 탐험 여행이란 견지에서 보면 훔볼트가 도착한 멕시코 국내에서의 여행 루트는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도 가장 개발이 진전된 풍요한 지역이었고, 인적이 드문 탐험 대상으로는 부족한 곳일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수도 멕시코 시티는 약 13만의 인구를 보유한 19세기 초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최대의 도시였다. 훔볼트는 그 도시 경관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체로서 보자면 유럽의 어느 도시도 멕시코 시티 만큼은 아름답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멕시코 시티에는 토리노나 밀라노에서 볼 수 있는 건물의 규칙과 통일감이 존재하고, 파리나 베를린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가지 규획이 조성되어 있다. 모든 도로는 직선상에서 규칙적으로 뻗어 있으며, 도로의 폭은 매우 넓다... 길 양쪽엔 납작한 돌로 깐 근사한 보도가 정비되어 있다... 대(大)광장[소칼로]은 그곳에 석조 상점이 병렬로 건축된 정방형의 시장이 없다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광장 중 하나일 것이다... 대성당과 부왕의 궁전이 그곳에 면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훔볼트는 멕시코의 지식인들과 교류를 심화하고, 이투리가라이 부왕과 자주 회견하는 등 꽤나 사교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멕시코 체재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열대 아메리카 여행의 학술 성과 중에서 동식물의 새로운 속과종의 발견을 별개로 하면, 그외의 지리학적인 저작에선 멕시코 체재 성과가 큰 부분을 점하고 있다. 일례로 열대 아메리카 여행의 성과로 2권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가 간행되어 있는데, 그 제1권째로 1811년에 출판된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는 동년에 간행된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의 부록으로 멕시코 각지의 지형도나 지형 단면도 등을 모은 것이었다. 또한 3년 후에 간행된 <신대륙 열대 아메리카 지역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에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과 더불어 멕시코 지도가 큰 비율을 점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멕시코에서의 최대의 여행 성과는 앞서 들었던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일 것이다. 거기엔 독립 전야의 멕시코가 자연 ・인구 ・농업 ・광산업 ・제조업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상세히 묘사되어 있고, 근대 지리학의 고전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인구든, 농업이나 광산업 ・제조업 등의 경제 활동이든, 그곳에서의 고찰은 세밀한 통계 자료에 근거하여 전개되었다. 이런 기술을 가능하게끔 한 것이 멕시코 시티에 체재할 때 훔볼트가 정력적으로 덤벼든 자료 수집 활동이었던 것이다. 멕시코 시티 체재 중에 훔볼트는 이투리가라이 부왕의 특별한 호의로 궁전에 있는 왕국 문서 자료실의 자유로운 출입과 보관 자료들을 필사할 수 있었다. 흥미있는 자료들을 대출하여 숙소에서 베껴 쓰는 것까지 허락되었는데, 실제로 과학, 특히 지리학에 가치있는 자료를 다량으로 빌려왔던 것 같다.

부왕청 문서 자료실에서의 문헌 조사를 훔볼트는 7월 8일부터 시작했다. '보관 문서는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에 많은 문서류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보관 문서는 꽤 좁은 3개의 방을 점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여행 일지>]' 여기서 얻은 정보가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를 집필할 때 귀중한 기초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훔볼트는 서문에서 자신이 멕시코에서 사회 ・경제 상황의 연구를 뜻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카라카스(Caracas) 주변 지역과 오리노코(Orinoco) 강 연안, 나아가 네그로(Negro) 강 연안과 누에바 그라나다 왕국, 키토(Quito), 페루의 해안 지대 등에서 조사해 온 이들 남아메리카 지역이 미개발 상태인 데 비해 나는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서 문명의 발전이라는 현저한 차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멕시코에 관한 통계학적인 분석과 사람들의 진보나 산업의 발전을 초래한 주요 원인을 추구하려 한 것은 두 지역간의 이러한 대조가 동기였다."



훔볼트의 폭넓은 관심은 열대 아메리카 어디를 방문해도 자연과 인간 사회의 양 분야에 걸쳐 있었는데, 멕시코에선 특히 인문과학 혹은 사회과학 영역에 훔볼트의 흥미가 집중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의 한 결과가 역사학이나 고고학에 대한 훔볼트의 강한 관심이다. 궁전의 자료실에서도 통계 자료 및 지지(地誌) 자료와 더불어 훔볼트는 아즈텍(Aztec)의 상형 문자 자료나 아즈텍 왕국을 멸망시킨 정복자 코르테스(Cortés)의 관련 자료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멕시코 원주민의 언어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1810년 간행된 <산악 지역의 조망 및 아메리카 민족의 문화유산>에선 아즈텍이나 잉카의 도상(圖像) 등 아메리카 각지의 고대 문명 유산이 수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훔볼트의 멕시코 체재는 말하자면, 문헌 연구에 의해 특징지을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멕시코 시티의 소칼로(Zocalo), 일명 '헌법광장'과 마주한 옛 스페인 부왕의 관저인 국립궁(國立宮) 전경
           훔볼트 남작이 방문했던 식민시대 말기부터 당국은 근대적인 인프라를 깔아 도심의 미관을 개선했다.


           국립궁 중앙의 정문을 출입중인 방문객 및 공무원들, 보초병이 양 옆으로 경계를 서며 지키는 모습이다.  
           부왕청 시대부터 멕시코 정치의 주요 무대로 국경절이나 외빈의 방문 때마다 의전 장소로 활용되었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멕시코 시티의 가장 저명하고도 오래된 랜드마크로 3세기간에 걸쳐 축조되었다. 
           1790년 말 대성당 정면의 소칼로 일대를 개수하던 과정에서 아즈텍의 석조(石彫) 달력이 발굴되었다.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만년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진 국립궁의 프레스코 벽화  
           스페인의 정복으로부터 반(反) 디아스(Diaz) 혁명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사를 인물화 위주로 묘사했다.


             1789~94년 부왕으로 재직하면서 계몽적 행정 수완을 발휘했던 레비야히헤도(Revillagigedo) 2세 백작
             독립 전야의 멕시코에서 가장 유능한 통치자로 알려진 그는 수도의 미화 ・정비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런데 멕시코 시티에 체재한 9개월을 훔볼트가 줄곧 시내에서만 소일했던 것은 아니다. 멕시코에 건너가면서부터 소식이 없었던 훔볼트의 동정에 대해 월간지 <신(新) 베를린>은 1804년 5월호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로마 주재 공사(公使)인 형 빌헬름(Wilhelm)에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미초아칸(Michoacan) 지방에서 1803년 9월 23일자로 보낸 편지를 핑계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그는 이전의 편지에서 예고했던 아메리카 출발 일정을 다시 연기하고 있다. 그 이유로 베라크루스에 황열병이 만연해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것과 형편이 좋은 배를 잡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편지에서 지적하고 있다. 유럽 귀환 여행을 하는 데 있어서 훔볼트는 이상의 두 가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대기할 의향이다. 그와 동행자인 봉플랑(Bonpland)은 모두 건강하다고 한다. 조금 지연되더라도, 병에 걸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행운과 건강하게 재회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별세계로부터 방대한 식견과 귀중품을 가지고 귀환할 그들에게 무엇보다 순풍이 불기를.

훔볼트는 지칠 줄 모르는 연구자로서 이 편지를 쓴 전년의 9월 하순 경 누에바 에스파냐 북부를 여행중이었고, 이미 2개월에 가까운 기간을 주로 화산 조사 등으로 보냈다. 화산은 장기간의 여행을 통해서 항상 그의 관심을 끌어왔다. 이번 여행에서도 역시 그는 동행자와 함께 호루요(Jolluo) 산 정상에서 지금도 역시 분연(憤燃)을 내뿜는 화구(火口) 아래로 136m 정도 내려가 화구 밑바닥에서부터 거의 29m쯤 되는 지점까지 접근하고 있다. 호루요 산은 1759년 9월 29일 돌연히 형성된 것이다. 훔볼트는 이 새로 생긴 산을 조사함으로써 불을 뿜어낸 산들의 성질에 대해 만족스런 몇 가지 설명을 얻어냈다. 그외의 내용은 태반이 이미 소개한 사실의 반복이다. 훔볼트가 똑같은 일을 몇 번씩이나 편지로 쓰는 것은 너무 많은 편지가 분실되기 때문에 어느 것이 목적지까지 도착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호루요 산은 훔볼트가 방문하기 44년 전에 사탕수수나 쪽을 재배하는 광대한 농원[아시엔다] 한 가운데에 돌연한 폭발로 형성된 새로운 화산이다. 그 높이는 517m에 달하고, 이런 종류의 지질 현상으로는 유럽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인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 시티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였는데도, 호루요 신산(新山)의 형성은 유럽 지질학계에 거의 소개된 바가 없었고, 또 지질학적인 조사 대상이 된 적도 없었다. 그곳에서 훔볼트와 봉플랑은 이 호루요 산을 조사하기 위해 멕시코 시티로 돌아오면서 길가의 풀을 뜯어먹으며 분연이 자욱하고, 작렬하는 화구를 탐험하는 위험도 무릅쓴 것이다. 게다가 호루요 산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서도 만 하루간에 걸쳐 톨루카(Toluca) 산[4577m] 등정을 시도하고 있다[1803년 9월 28일]. 두 사람 모두 건강했던 사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톨루카 산의 등정으로 결말지은 2개월에 걸친 멕시코 국내 여행을 <신 베를린>의 기사처럼 '주로 화산 조사' 때문이었다고 요약한 것은 조금 부정확하다. 여행의 주요 목적지는 오히려 광산 도시 과나후아토(Guanajuato)였다. 훔볼트는 그곳에서 8월 7일부터 9월 6일까지 정확히 1개월을 부근에 산재하는 수많은 광산을 조사하는 일로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의 과나후아토는 아메리카 대륙 유수의 광산 도시였으며, 이곳에서 채굴되었던 양질의 은은 스페인 본국과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에 거대한 부(富)를 가져다주었다. 16세기에 발견된 과나후아토의 광맥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은 광맥이었는데, 훔볼트가 이곳을 방문한 19세기 초까지 230년간을 통해서 총액 1억 8천만 페소의 부를 산출했다고 한다. 특히, 18세기 말부터는 전성기를 맞아 매년 약 5~6백만 페소의 생산액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카테카스 및 포토시와 더불어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3대 은광 도시로 명성을 날린 과나후아토 전경
             열악한 환경과 봉건적 사회의 모순이 집약되었던 이 도시는 훔볼트에게 고통스런 인상만을 남겼다.


           과나후아토 시가의 중심부에 소재한 후아레스(Juárez) 기념 극장, 축제나 행사의 집전 장소이기도 하다.  
           독립 이후 내란과 재해로 점차 쇠락해왔으나, 1903년 준공시킨 극장은 문예 부흥의 상징처럼 되었다.




이러한 성황을 반영해서 큰 채굴장 주위엔 광부들의 주택이 나란히 축조되는 한편, 거의 도시 계획의 흔적을 볼 수 없는 중심 시가지에서는 호화스런 건물과 초라한 가옥이 현저한 대조를 나타냈다. 당시의 과나후아토엔 5만 이상의 인구가 집중해 있었다고 한다. 여행 일지에는 이 과나후아토에서의 체재와 조사가 그때까지의 그의 생애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간 중 하나'였다고 쓰여졌다. 훔볼트는 이 2개월간의 여행 외에도 앞서 5월 13일부터 27일에 걸쳐 2주간 정도의 소(小)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주요 방문지는 광산 도시인 파추카(Pachuca)였고, 멕시코의 가장 오랜 은 광산으로 알려진 파추카 갱이나 당시 활발한 상황을 드러내던 레알 델 몬테(Real del Monte) 갱, 모란(Moran) 갱을 견학했다. 이들 조사 결과는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 제4부 농업 ・광산업 부분에서 충분히 활용되었다.

해안 저지에서의 황열병 유행은 12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누그러지는 듯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훔볼트 일행은 마침내 열대 아메리카 여행에 종지부를 찍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최후 여정에 오르게 된다. 훔볼트가 멕시코 시티를 출발한 것은 1804년 1월 20일의 일이다. 당초엔 베라크루스 항구를 2월 1일에 출발하는 배에 승선할 생각이었는데, 예정된 배가 나타나지 않아 출항이 대폭 지연되버렸다는 소리가 들렸다. 황열병을 계속 두려워하던 훔볼트는 천천히 걸음마를 옮기며 해안 저지 쪽으로 내려가 할라파(Jalapa)에서 2월 10일부터 15일까지 체재했다.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것이 2월 18일이었으니까 멕시코 시티에서 베라크루스까지 약 1개월에 걸쳐 여행한 셈이다. 이 기간에 대해선 유감스럽게도 여행 일지가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대략적인 일정 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훔볼트 일행은 배의 출발이 카리브해의 강한 폭풍으로 연기되자, 결국 출항하는 3월 7일까지 3주 정도를 이 항만 도시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그 기간을 이용하여 그는 베라크루스와 그 주변의 지역을 조사했다.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의 지리 ・자연 아틀라스>에 게재된 베라크루스 주변의 지도는 이때의 조사 결과에 기초하고 있었다. 훔볼트 일행을 태운 스페인 군함 오(O) 호는 2주 가까이 걸려서 카리브해를 횡단, 3월 19일 쿠바의 아바나에 입항했다. 아바나에선 일전에 체재할 때 맡겨두었던 35개 상자의 자료들[식물 표본 등]을 회수했다. 아바나에서의 체재는 1개월 반에 달한다. 그러나, 이 기간에 대해서도 안타깝지만 여행 일지가 남아 있지 않다. <여행기> 제3권엔 <누에바 에스파냐 왕국지>와 구성이 같은 <쿠바 지지(地誌)>가 삽입되었는데, 보조 조사가 있었을 것이다.

- by 데즈카 아키라(手塚章) 著 <훔볼트의 세계(フンボルトの世界)>에서 발췌




              훔볼트가 내방할 당시의 부왕으로 연구 조사를 호의적으로 배려해 준 호세 데 이투리가라이의 초상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독립의회 소집을 요구한 크리오요 계층과 결탁한 혐의로 체포 ・송환당했다.


           

한반도? 그런 거스름돈 어떻게 써먹을까요? 세계사








케넌은 선(善)과 악(惡)에 대한 절대적인 구분에 기초하여 국제 정치를 바라보고, 정치적 현실의 한계를 무시하고 추상적인 도덕주의적 원칙을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도덕주의(Moralism)'라고 비판한다. 케넌은 이 도덕주의가 미국 외교의 뿌리깊은 전통의 하나로 이 전통은 미국이 [1898년 이후]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국제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 부정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생존을 위해 폭력의 행사가 정당화될 수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폭력 행사 그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도덕적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강대국들간 권력 균형 및 이해와 저촉되어] 오히려 더 많은 폭력이 행사됨으로써 인류는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도덕주의가 미국인의 뿌리깊은 법리주의적 사고와 결합될 때 더욱 큰 문제점을 낳게 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케넌은 국제 정치를 국내 정치와 동일시하여 국내에서나 가능한 사법적 판단을 국제 정치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법리주의(legalism)'라고 비판했다. 미국은 13개의 주(州)들이 상호간의 법적인 합의를 통하여 유럽 대륙과 같은 무정부적 국제 질서의 형성을 지양하고, 단일의 연방을 건설하여 평화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은 자국의 연방 형성 과정에서의 경험이 국제 정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보고, 국제 정치 현실에서의 문제점들도 국가간 조약이나 법적인 합의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케넌은 1928년의 파리 부전조약[켈로그-브리앙 조약]을 들고 있다. 국가간의 조약 체결과 합의를 통하여 전쟁을 국제 정치의 현실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는 일본의 만주 침략과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히틀러의 등장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법리주의는 법적 합의를 집행할 수 있는 마땅한 중앙 권력체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 정치의 현실에서 국가간에 존재하는 이해관계의 충돌의 상존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형식적이고도 법적인 기준을 통하여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러한 법리주의적 사고는 도덕주의와 결합될 경우 국제 정치에서 한층 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케넌은 주장한다. 국제 정치에서 사법적 판단을 적용시키려는 측은 법을 위반한 국가에 대해서 분노함과 동시에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분노가 군사적 대결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상대국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어 그 국가를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전쟁 수행을 지속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2차대전 당시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대해 내걸었던 무조건 항복 조건을 들 수 있다.

설령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의 목적이 상대국 국민들의 태도와 전통을 바꾸고, 기존 정치 체제의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키기 위한 '도덕적'이고도 '이념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목적들은 결코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 단기간내에 성사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처럼 전쟁을 통하여 성취될 수 없는 도덕적 이상을 추구한 과정에서 인류 문명엔 또다른 파탄이 초래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목적은 '실질적'이고도 '제한적'이어야 하며, 우리는 그 목표에 대한 근사치를 중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케넌은 [태프트의 중재조약이나 윌슨의 국제연맹 구상, 루스벨트의 신탁통치론 같은] 비현실적인 도덕주의와 법리주의의 한계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무정부적 국제 정치 현실이 만들어내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간의 '세력 균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나폴레옹 시대를 맞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에서 소집된 범유럽 국제회의 석상의 각국 전권
            보수 반동과 신성동맹의 외피를 두른 강대국간 유럽 균형 질서의 구축은 협조 체제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특정 시점에서 국가간의 힘의 분포 상태는 불균등성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국제 정치는 주요 강대국들 사이의 힘이 균형을 유지할 때 안정적이라고 본다. 물론, 특정 시점에서의 강대국간 세력 균형의 성립에 의해 국제 정치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균형 상태가 파괴되었을 때 발생하는 힘의 공백 상태는 불안정한 세력 균형보다도 훨씬 더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국제 정치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폭력의 행사를 완화시킬 수 있는 주된 임무는 외교에 있다고 케넌은 주장한다. 외교는 국제 정치 현실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외교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따라서 외교는 '무정부적 국제 정치 질서에 내재적인 한계'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그 범위 내에서 '폭력의 행사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는 것이다.

케넌은 2차대전 이후 현대적인 군사력을 양성할 수 있는 산업 시설 기반과 고도로 훈련된 기술 인력을 갖추고 있는 국가는 전세계적으로 다섯 곳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엔 미국 ・영국 ・일본 ・서유럽 제국 ・소련이 포함된다. 케넌에 의하면 당시 중국은 인구 문제와 취약한 산업 기반 ・원시적 농업 조건 ・1세기간의 정치적 불안정 등 때문에 향후 상당한 기간 동안 군사적 강대국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케넌의 봉쇄정책의 핵심은 소련이 이 국가들 가운데 어느 것도 차지하지 못하도록 서유럽과 일본을 미국의 동맹권으로 흡수시킨 다음, 이러한 전략적 구도 하에서 미국이 인내심을 갖고 봉쇄를 추구하면 정통성이 결여된데다, 체제 생존의 여부마저 검증받지 못한 소련은 미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채 내부 모순이 분출되어 붕괴하리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5대 중심국가론을 통하여 케넌은 중국이 아닌 일본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라는 전후 미국 외교 전략의 전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일본의 부흥을 통하여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케넌의 주장엔 전후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었다. 케넌은 이 불안정의 원인을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외교관 존 V.A. 맥머레이(John V.A. MacMurray, 1925~29년 주중 공사 재임)가 1935년 작성한 예언적 각서를 원용하고 있다. 맥머레이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을 완전히 패배시키더라도, 아시아가 떠안고 있는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배는 오히려 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 증가를 초래해 미국의 극동 정책 수립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경고했다.

2차대전의 결과,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패퇴한 후 그와 반비례해 만주와 한반도에선 소련의 영향력이 증대됨으로써 미국은 이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일본 제국이 과거에 해왔던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케넌은 주장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대소(對蘇) 봉쇄정책을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선 일본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민주화된 일본을 미국의 확고한 동맹국으로 만드는 것이 긴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당시 미국 내에선 야당인 공화당을 중심으로 중국의 장개석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케넌의 일본 중시 정책 구상에는 중국 문제가 자칫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국내 합의점을 도출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고도의 전략적 판단도 깔려 있었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5대 중심국가에 속하지 않는 한반도에 대해서 케넌은 한반도에 반드시 소련에 적대적인 체제가 들어설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이제 막 해방된 한국이 명목상으로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야 하지만,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1947년 9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전격 무산되고 난 후에 국무성 정책 기획실장이었던 케넌은 미국은 재정적이고 군사적인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 남한에서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이 한국을 버리고 도망쳐 나오는 듯한 인상을 다른 국가들에게 줄 경우 미국의 위신은 많은 손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품위있게 한국에서 철수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보고, 한국 신탁통치 문제의 유엔 이관에 적극 찬성했다.




           포츠머스 강화의 중재자 테디 루스벨트를 묘사한 삽화, 이 공적으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극동의 세력 균형이란 전략적 관점에서 대일 후견인이라 자처하면서도 러일간 상호 견제를 추구했다.   




실제로 국무성이 자신에게 한국 문제에 관해 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케넌은 이상의 주장을 간단한 비망록으로 제출하는데 그쳤으며, 정책 기획실 명의로 된 한국 문제의 보고서조차 쓰기를 거부했다. 결국, 케넌은 미국이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확고하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미국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는 방식을 선택해서 일단 한국에서 철수해야 하며, 그 이후의 한국 정책은 사태의 추이를 봐서 결정할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 후 아시아에서 발생한 권력의 진공 상태를 메우고 들어온 것은 중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는 사실을 케넌은 지적했다. 일본이 패전의 늪에서 당분간 재부상할 가능성은 없고,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한반도 전체는 소련의 잠정적인 영향권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던 것이다.

케넌이 한반도가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면서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의 국력이 회복되었을 때 일본이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다시 행사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케넌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일본이 여전히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면, 한반도에서 미국이 직접 소련에 대항하는 부담을 떠맡지 않아도 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전략적 발상이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이 얼마나 철저하게 '국가 이익'이란 관점에서 입안되는지를 보여준다. 1947년 11월에 작성된 정세 보고서인 PPS/13에서 케넌은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발전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고, 앞으로 한국에서의 정치적 삶은 미성숙 ・편협함과 폭력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인들로부터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어떠한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고 간주했다. 결국, 한반도는 미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중요한 목적은 미국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한반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는 이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미국이 한반도 전역에 대한 소련 영향력의 팽창을 인정하면서 한반도의 배후지인 만주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넌센스(Nonsense)라고 주장하면서 장개석에 대한 계속적인 지원을 요구한 미국 내의 일부 세력[중국 상실론을 주장하게 될 공화당 강경파 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케넌에게 만주와 한반도가 중요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일본의 경제적 부흥을 뒷받침하기 위한 원자재 공급처와 시장으로서였다.

전후 동아시아에선 일본의 몰락과 중국의 국공내전으로 소련의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미국은 이 지역에서 제정 러시아 및 소련에 대항하여 전통적으로 세력 균형을 유지해왔던 일본과 중국을 대신하여 현지의 안정을 도모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 내전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은 미국의 국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한국은 미국에게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케넌은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5대 중심국가론에 기초하여 일본을 경제적으로 재부흥시켜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회복하고, 소련의 팽창에 대응하고자 했다. 이처럼 케넌은 미국이 과거처럼 '문호 개방(Open Door)'이나 '중국의 영토 보존'이라는 애매모호하고도 비현실적인 정책적 입장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군사 ・경제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바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By 김영수 著 <동아시아와 케난(Kennan)의 딜레마>에서 발췌




            쿨리지 행정부에서 '최고의 중국통(通)'이라 지칭되며 공사로 부임한 국무성 차관보 존 V.A. 맥머레이          
            미일전쟁 발발과 볼셰비즘의 확산을 경고했던 그의 선견지명적 각서는 케넌으로부터 절찬받았다.  




만주랑 반도는 그냥 넘겨줘라 세계사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 참가 특사로 영국에 파견한 루스벨트가 미일간 3가지 외교 현안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녹스(Knox) 국무장관의 부탁을 받은 전임 대통령 루스벨트는 일본 사절인 후시미노미야(伏見宮)를 수행한 전(前) 주미 일본 대사 다카히라(高平)와 런던에서 가진 사적인 접촉을 통해 만주철도 및 조미(朝美) 통상조약과 한국 병합의 저촉, 미일 통상조약 갱신의 장애물인 이민 문제 등 3가지 현안의 일괄 타결을 제안함과 동시에 본국 정부를 설득했다. 만주와 한국은 일본의 사활적 이익으로 간주하되, 대신 이민 문제를 미국의 사활적 이익으로 보장받으라는 것이다. 루스벨트의 제안은 미국이 만철 중립화를 철회하고, 일본의 한국 병합을 추인해주는 대신 신(新) 미일 통상조약의 적용 대상에서 이민 문제를 제외시키라는 것이었다.

이하는 녹스 국무장관이 태프트 대통령에게 루스벨트의 특사 활동 결과를 보고한 내용이다.



"그[=테디 루스벨트]는 자신이 다카히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이 나라에 일본인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미국은 일본이 한국과 만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Paramount) 영향력과 이익(Interest)을 인정해야만 한다. 동양에서의 상황은 조약들에 근거한 이익이라는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본인은 야심이 있고, 긍지를 지니고 있으며,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숫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팽창의 공간'을 필요로 하며, 또한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들을 우리의 [캘리포니아] 해안으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해야 하지만, 우리는 한국과 만주에서의 그들의 [대륙 팽창] 계획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



녹스의 보고서가 제출된 지 사흘 후인 1910년 12월 22일, 루스벨트는 직접 태프트에게 다카히라가 이미 봄[5월]에 영국 체재 중 자신에게 접근해왔던 사실과 아울러 그 내용을 통보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조언을 하였다.


 
"[합중국] 정부는 만주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해 잘못 해석하고 있다. 이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난 봄 다카히라와 런던에서 회동하여 대담을 나누었다. 그는 나에게 만주 문제에 대한 일본의 감정이 얼마나 예민한지를 말했으며, 녹스에게 그의 말을 전달한 바 있다. 나의 견해는 간단하다. 우리의 사활적 이익은 한편에서는 일본인을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의(友誼)를 유지하는데 있다. 일본의 사활적 이익은 만주와 한국이다. 만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유 ・정도를 불문하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우리가 만주에서 그들의 이익을 적대시하고, 위협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도록 만들 것이다. '중국[淸朝]과의 동맹(Alliance of China)'은 중국의 절대적인 군사적 무능함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기는 커녕 추가적인 의무를 지게 할 것이다.

지금은 '방아쇠를 당길 의사가 없다면, 총을 들지 말라'는 변경의 오래된 교훈을 상기할 시기이다. 중국에서의 문호 개방(Open Door)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외교 협정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경우에나 그렇다. 만주의 전체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이 일본의 수중이든, 러시아의 수중이든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만주는 일본에게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곳에 외부 세계의 개입을 불허할 것이다. 나는 작년에 영국인 키치너(Kitchener)로부터 들었는데, 영국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복선화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의 해안 기지로부터 목단(牧丹)까지 철도를 부설한다는 계획이다. 겉으로 러일관계가 아무리 긴밀해 보여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러시아는 복수전을 감행할 것이다. 반대로 만주에서의 우리의 이익은 실제로도 중요하지 않다."

- by 최정수 著 <대통령 태프트의 대일(對日) 특사외교와 한일 병합조약의 법적 추인>에서 발췌



테디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뚱보 윌리엄아, 왜 중대한 이해도 걸려있지 않은 만주에 수저 얹히려다 로스케랑 쩍바리가 한 편 붙어먹어 우리를 견제하는 X같은 상황을 자초했니? 내가 대통하면서 맞춰놨던 동아 ・태평양의 질서 균형을 니가 말아먹게 생겼다. 현실성 결여된 철도 중립화 따위 단념하고, 쩍바리가 선점해 애지중지하는 만한(滿韓)을 쿨하게 걔네들 세력권이라 인정해주는 반대급부로 이민 유입 근절하는 상호 윈윈에 러일 연합도 균열시킬 수 있는 대안이 있거든?ㅇㅇ"  




             1905년 8월 8일, 포츠머스에서 회동한 러일 전권 대표단. 최선두의 우측 네번째가 다카히라 공사이다. 
             동아시아 분할을 놓고 대결했던 양국은 이후 미국의 문호 개방에 맞선 공동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열도에서도 북미협상이 임박했을 가능성에 대비하는 모양새네? 잡소리









러시아 순방길에 올라 푸짜르와 회동한 아베 쇼군께서 브리핑에서 암시한대로 대북 압박의 기조는 유지하되, '모든 당사국이 차분하고 건설적인 대화로 이 문제[북핵]를 해결해 나아가기를 촉구'함을 언급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한반도 유사 사태를 상정해가며 미중(美中)이 군사적인 옵션의 행동으로 나설 공산은 지양한데다, 나아가 6자회담 재개를 희망한다고 부연한 점에서 사실상 대화 재개 찬성의 의사를 러일 양국이 공동으로 타진한 셈이지. 트럼프-아베 라인의 미일간 소통은 물론, 중국에서도 우다웨이가 동경으로 건너가 현지 당국자들과 접촉한 것만 보더라도 이미 한반도 주변의 4강(强)들끼리 협상 대비 포석을 깔며 상호 교감이 오갔으리라 예상하고 남음이 있겠다. 

북미 대화 재개의 조짐은 앞서 오바마 2기 행정부부터 전략적 인내란 장막 아래 몽골 등의 제3국을 장소로 활용한 양국간 비밀 접촉이 가시화되어온 터. 신빙성은 얼마나 높은지 모르겠으나, 작년 상반기 쯤 미국으로부터 평화협정 체제로의 전환을 떠보는 시그널이 이따금 전달되어 왔다는 건 주지하는 바인데. 그게 팩트라면, 이는 동북아 구녕자 시즌2를 시전중이던 그네꼬 정권에 대한 경고와 압박의 의미 또한 포함된 것일테고, 탄핵 정국을 맞이해 누가 차기 대권에 등극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대북 접근 속도 역시 조절될텐데 현재로선 달님 or 간찰스의 당선이 유력시되는 만큼, 펜스의 면회 거절로 드러났듯이 현재 워싱턴의 서울에 대한 불신도는 상당한 수준이라 가늠할 수 있겠지.

결론적으로 당분간 외교적 발언력을 낼 수 없는 권력 공백기 혹은 정립기의 남한을 페이드 아웃시킨 상태로 북한 및 주변 열강들 간에 대화 태세가 점차 조성되어가고 있는 단계라 생각된다. 물론 여기엔 혹부리 3세가 또다른 엉뚱한 생각을 품거나 추가 도발만 벌이지 않는다는 전제가 따라야 할 것이고, 조건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북핵을 둘러싼 긴장 모드는 급격히 해빙으로 넘어갈거라고 사료해본다. 덧붙여 북미 협상의 타결은 일본 입장에서도 소위 납치자 문제로 교착 상태인 북일 교섭에 진전을 기대할 수 있거니와, 일정한 자금 각출을 각오해 수교까지 성사시킨다면, 과거사로 짖어대는 남한을 견제할 만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계산상 결코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가 되겠고.

냉전기 이래 남북한을 둘러싼 주변 4강은 외연상으로야 대치와 반목을 거듭해오는 듯 하면서도 속내는 항시 '현상 유지'의 골격을 선호해왔다는데 있어서 공통 분모를 지녔음을 반추할 때 일견 북미협상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동적 소극 외교로 일관했다는 일본조차 남북한 등거리 노선을 견지한 채 평양과의 채널을 접속시켜 'Two Korea' 정책의 평형추를 유지했다는 건 외교사만 조금 파보더라도 상식 아니던가?  문세광 사건 직후 기무라(木村) 외상이 국회 석상에서 무심코 내뱉은 '한국[남한]이 조선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전후(戰後) 일본 정부와 외교 담당자들의 대(對) 한반도 인식을 여과없이 방증한 선례였음을 상기하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PS. 마침 오늘 트럼프 황상께서 타이밍 절묘하게 사드 배치 청구서로 무려 미한(美韓) FTA의 전면 폐기라는 카드를 내미셨던데,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도 모자라 천조님의 조센 버르장머리 길들이기가 본격화된 시점에서 검증없는 선거에 정신팔린 반도의 나 잘난 깨시민과 위정자들은 천하 태평스럽기만 하는군? 철쭉도 서서히 시들고, 장미가 피고 있으나 이르디 이른 혹한 풍파가 밀려오고 있건만, 그 속에서 받게 될 빠따를 감내할 곤조는 있는지.ㅉㅉ 




            어줍잖은 중립화 운운하다 싸대기 맞고, 안방까지 황군의 전장으로 내준 동북아 구녕자 반도의 위엄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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