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독일도 일본을 본받아 통석의 사죄를 표해야 마땅하겠지 국제, 시사












솔직히 말해 학살이니, 나미비아 침탈이니, 떠들어봤자 일반 독일인들이 그간 얼마나 관심 있었겠어?

근대 정치사 조금 파봤다는 애들이나 '뷜로프 블록(Bulow Bloc)'으로 지칭된
제2제국 최초의 다수파 정당 연립내각이 형성되는데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는 선에서 공부했다면 모를까,
제노사이드 자체에 대해선 알았더라도 애써 모르쇠로 일관한 채 덮어둔 게 현실이었잖아? 

아무튼 그렇게 1세기 넘도록 태연자약하게 오리발 내밀다가...
독일 주도의 EU에 여러모로 불만이 산적해 온 터키가 아르메니아 학살 건수에 대한 회피성 변명으로
독일의 저 치부를 건드려 담론화 들어가니깐 급한 불부터 꺼보겠다는 심보하에 선심성 반성 운운하는거고.

아니라고? 쩍바리와 달리 우리의 '양심적인 도이치 게르만 성님'들께서 그럴리 없습nida!!라고? 

그럼 메르켈 본인부터가 당장 사죄 담화문 작성해 발표하고, 과거 제2제국의 나미비아 식민지배와 관련한 일체의 배상 청구권 수용해 당국 차원에서 지원할 것이며, 매년 연방정부 대통령 이하 총리 각료들이 유감 표명 내비치고, 째째하게 담수시설 건설하는데만 투자할 게 아니라 향후 수십년간 수백억$ 단위의 개발 차관은 물론 산업 기술까지 장기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공여해 나미비아 현지의 인프라 구축시켜 경제성장 기반 토대를 닦게끔 조성해라.

일본의 청구권 자금만 하더라도 1960~70년대 한국의 GNP 성장 기여도에 있어서 총 19%를 점했을 정도였다는데, 명색이 EU를 주도한다는 도이치 성님들께서 고작 섬나라 왜구만도 못한 건성으로 임해선 안 되겠지?ㅇㅇ

아, 그리고 공식적인 청구권 배상 외에도 식민지배 기간에 걸쳐서 자행되었을 인권 탄압 및 유린이나 성폭력 사건, 그리고 남아공 위임통치기 광물 채굴권 노렸던 서독 자본의 아파르트헤이트 협력 케이스에 대해서도 역시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 피해자 내지 후손들한테도 보상해야 한다는 건 서비스. 식민지 과거사 해결의 첫 단추이니깐.

저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 최소 독일의 '진심어린 과거사 사죄'의 진정성을 체감할 수 있지 않겠뜸?ㄲㄲㄲ 




           빈트후크 도시 건설 75주년을 맞이해 총독의 동상 제막식에 임석한 독일 식민군 참전 노병들의 위용ㄳ


             빈트후크의 사립학교에서 거행된 칵테일 파티에 출석중인 주(駐) 남아공 서독대사, 1968년 9월 21일
             전직 SS 중위를 대사로 기용해 나미비아 수도에서 술판까지 즐기도록 배려한 서독의 양심적 센스^^




사진으로 보는 청일전쟁의 후기(後記), 을미년 대만(臺灣) 평정의 전역(戰役) 사진집




              대북(臺北)의 옛 포정사(布政司)에 개설된 대만총독부 경내 정원에서 기념 촬영중인 일본군 장교단
              근위사단이 상륙한 이래 게릴라 토벌을 위해 제2 ・4사단 후비대 병력과 혼성여단까지 투입되었다.


              남진군(南進軍) 사령부의 육해군 장교단, 상륙 후 4개월간 도내(島內) 북부만 점유하던 형국이었다.


            대북성(臺北城) 북문(北門) 교외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휴식중인 보병 제5연대 보충대 예하 중대원들
            좌우로 수목(樹木)이 우거진 가운데 성밖을 흐르는 해자 겸 저수지 주변엔 수전(水田)이 밀집했다.  


              대북성 북문 승은문(承恩門)과 시가지 광경, 문루는 1884년에 준공된 것으로 현재까지 잔존해 있다.
              일본군의 위세에 전의를 상실해버린 주민들이 이곳의 문을 열면서 근위사단이 무혈 입성하였다.              


               대북 시가지 서쪽의 석방가(石坊街), 시장이 조성되면서 일제시대엔 최대 번화가로 명성을 누렸다.


              병참 사령부가 개설된 신죽(新竹)의 성제묘(聖帝廟) 경내에서 현지인 잡역부들이 훈시를 받는 광경
              통역의 구술에 따라 주의 사항이 하달되는 중이며, 미국인 기자도 배석해 있다. 1895년 9월 27일


              신죽 기차역 동쪽의 구릉에 마련된 일본군 전몰 장병들의 임시 공동묘지, 초병이 경계를 서고 있다.
              현지의 비위생적 풍토와 열대 기후의 반작용 등이 맞물려 콜레라가 창궐해 4천여명이 병사했다.    


                일장기가 게양된 신죽역에서 대북행 열차에 탑승하려는 승객들이 정거장 주변으로 운집한 광경


             현대의 신죽 기차역, 청일전쟁 발발 직전인 1893년에 개업해 대북 ・기륭(基隆)과 연결된 노선이었다.
             종관철도(縱貫鐵道)의 개통으로 수요가 팽창하자, 역사(驛舍)도 1913년 독일식으로 신축한 것이다.


             10월 11일, 팽호(澎湖)를 출발한 노기(乃木) 중장의 제2사단 본대가 번자륜(番仔崙)에 상륙중인 광경
             엿새 전부터 신죽에서 남하를 개시한 근위사단 및 혼성여단과 더불어 대남(臺南)을 협공하게 된다. 


              번자륜에서 제2사단 예하 제4연대 병력이 집합중인 광경, 현재의 병동현(屛東縣) 서남부 일대였다.  


             동항진(東港鎭)의 남평계(南平溪) 좌안에서 포병 제2연대가 게릴라 진영을 타겟삼아 사격중인 광경             
             하천 반대편 좌측으로 출격에 대비한 기병 제2대대가 포격전을 관망하고 있다. 1895년 10월 12일


              동항 하구(河口)의 상류에서 수심이 얕은 지대를 통해 도보로 이동중인 보병 제4연대 예하 제3대대


             포병의 강습이 완료되면서 하천을 일제히 도하중인 기병 대대원들, 전방으로 수전의 제방이 보인다.


             척후 본대인 제16연대의 일부가 뗏목 보트에 의존해 도하중인 광경, 1척당 10명씩 탑승이 가능했다.
             이 부근에서 운행중이던 선박들의 재질은 과반이 대나무로 충당했으며, 군마(軍馬)도 수송되었다.


             동항진을 출발해 북진 ・우회한 포병 제2연대가 하담수계(下淡水溪)에 가설된 부교를 통과중인 장면


             동항진 병참부 앞 부둣가에 하역된 군량미, 해로가 안전해진 가을부터 보급 수송도 점차 원활해졌다.
             주요 광산과 병기고가 집중된 북부를 선점하고, 게릴라 전력이 약화될 시기를 노려 공세에 나섰다.


             10월 14일, 하담수계를 건너 타구항(打狗港, 高雄) 동쪽의 봉산(鳳山)으로 행군중인 제16연대 선발대


              10월 16일, 봉산 공략에 즈음해 현성(縣城) 남쪽의 고지를 통과한 제16연대가 차례로 하산중인 광경
              청조시대(淸朝時代) 전반에 걸쳐 외항인 타구와 더불어 대만 최남단의 상업지구로 번성해 왔었다.


              군기(軍旗)를 휘날리며 봉산현성 방향으로 행군중인 제16연대 선봉, 좌측엔 대나무 숲이 우거졌다.


              신호대(信號臺)에서 바라본 타구항 시가지 전경, 해안가 반대편 너머가 봉산현성이 소재한 곳이다.
              1910년대부터 사탕수수 교역의 증가에 수반한 대규모 축항 공사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타구항 일대의 원경, 범선이 오가는 가운데 좌측 상단의 산기슭 아래가 시가지로 포대도 구비되었다.


            10월 21일, 대남성(臺南城) 소남문(小南門) 교외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는 제2사단 예하 선발 부대원들
            유영복(劉永福) 통령이 인솔한 항일 게릴라의 근거지였으나, 일본군이 박두하자 대륙으로 도주했다.


               10월 26일, 대남성 성내에 개설된 근위사단 야전병원 정문 앞에서 전염병 환자들이 호송되는 광경
               사단장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친왕마저도 말라리아 투병으로 쓰러져 여기서 병사했다.


              야전병원 실내에서 군의관의 감독하에 응급 치료를 마친 환자들이 신음을 내뱉으며 휴식중인 장면


             11월 5일, 대남성 북문(北門)의 체조장에서 거행된 전몰자 추도식 제례 참석차 장병들이 운집한 광경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친왕이 훙서(薨逝)했다는 사실은 운구가 내지(內地)에 당도한 후 공표되었다.


               각 사단 부대로부터 공물(供物)이 헌납된 가운데 제단을 향해 전몰 장병들에게 참배중인 제16연대


              대만 전역 전몰자의 위패가 모셔진 제단 앞에서 승려와 신관(神官)들이 제례를 합동 주재하는 광경
              반년간 7만 6천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사상자 5300여명의 희생을 치룬 끝에 평정은 일단락되었다.


             근위사단 야전 우편국에서 업무를 수행중인 군속 직원들, 내지로 발송할 우편물 보따리가 산적했다.


                11월 7일, 팽호 본도(本島)의 마공항(馬公港) 앞바다에서 정박중인 연합함대 순양함 요시노(吉野)
                제1유격대의 기함으로 이듬해 6월엔 이토(伊藤) 수상의 대만 ・하문(廈門) 순방도 수행하게 된다.




사진으로 보는 청일전쟁의 외전, 요동(遼東)의 풍파를 헤치고 (4) 사진집




            복주성(復州城) 동문으로 입성중인 제1연대 예하 제1대대, 만주에서 수송된 물류 운송의 중개지였다.
            청국 의군(毅軍)의 총수 송경(宋慶)이 여순으로부터 퇴각하며 이곳마저 방기해 무혈로 점령되었다.


             복주성 동문 외곽의 원경, 가옥들의 중앙 너머로 영풍사(永豊寺) 경내에 소재한 고탑(古塔)이 보인다.
             당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했을 당시 살육된 주민들의 위령을 달래고자 세워졌던 공양탑이다.


              복주성 동문 경내로 진입중인 제1연대 보병대원들, 잔설이 녹은 직후라 도로가 진흙탕이 되버렸다.
              성내의 민가 도처마다 '대일본의 순민(順民)', '명나라 후예'라 써갈긴 벽서류 따위가 게시되었다.  


            금주성 남쪽 유가둔(劉家屯)에서 사쿠라이(櫻井) 소좌의 지휘로 정렬한 야전 포병 제1연대 및 제3연대


             금주성 남문 교외에서 거행된 제2연대 군기(軍旗) 수여식에 참석차 집결한 장병들, 1894년 12월 19일  
             오야마(大山) 제2군 사령관과 야마지(山地) 제1사단장이 임석해 제(諸) 부대를 순회 ・사열하고 있다.  


             금주성 동남쪽 양가둔(楊家屯)에서 거행된 제3연대 군기 수여식, 제례 분열식 와중에 촬영한 것이다.
             식전이 종료되고, 향응을 베푼 후 기미가요의 합창과 천황폐하 만세 삼창을 외친 것으로 산회했다.  


            금주성 성제묘(聖帝廟) 경내에서 개최된 제2연대의 군기 수여식 파티에 임해 군악대가 연주중인 광경


            여순구 공략 1개월을 맞아 금주성 동쪽 교외에서 거행된 초혼제(招魂祭) 참석차 회동한 제2군 수뇌부
            전몰자 묘지에 제단이 가설되어 군단 사령관을 위시한 장교들이 참배했으며, 외국 무관도 배석했다. 


              초혼제에 임해 장송곡을 연주하는 군악대, 여순에서도 혼성여단 주재로 별도의 제전이 집행되었다.


             전몰 장병에게 참배중인 아키야마(秋山) 소좌의 독립 기병 제1대대, 여순 공략의 전초전을 주도했다.


               제1사단 행행(行幸) 기념일이자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 기병 대대가 격구를 시범하는 광경
               금주성 북문의 사령부에서 연회가 개최된 가운데 시내 광장에선 일반 장병들이 여흥을 즐겼다.  


             스모를 관람중인 장병들, 영하 2~30도를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의 정신력 강화를 위해 종종 벌어졌다.


              12월 27일, 제2군 사령부가 입주한 부도통(副都統) 아문(衙門)에서 거행된 송년회 파티 당시의 광경
              만주 청요리(淸料理)와 러시아 식단의 진미로 향응을 베풀며 기병이 익살극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금주성 외곽 동남쪽에 가설된 병참부의 임시 창고, 식량을 포함한 각종 보급품이 포장되어 산적했다.


             12월 28일, 금주성 서문의 제2연대 예하 제3대대 본부에서 장교들이 집결해 송년 파티를 벌이는 광경


             12월 31일, 금주 민정청(民政廳) 정문 앞에서 원단(元旦)의 휴무를 알리는 유시(諭示)가 게시된 장면
             입구 양측엔 일장기가 장식된데다, 왜송(倭松)도 식수(植樹)해 일본식 신년(新年) 맞이를 준비했다.   


            일본군 병참부에 고용되어 군량 운반에 종사한 현지 주민의 우마(牛馬)들, 1량당 4~5마리가 이끌었다.


            직례(直隷) 평원의 공략을 염두에 두고 편성 ・파견되어 4월부터 진주한 금주 근위사단 본부의 취사장  
            제4 ・7사단과 더불어 요동에 상륙했으나, 강화가 성립되자 게릴라 토벌을 위해 대만으로 보내졌다.


               근위사단 본부를 예방한 사단장 기타시라카와노미야(北白川宮) 친왕 이하 막료들, 1895년 5월 3일
               정좌석 앞줄 중앙이 친왕이며, 최좌측은 말년에 대만총독으로 재직했던 아카시(明石) 대위이다.


              금주 남대가(南大街)의 배수로 공사 광경, 우천시 악화된 도로 사정과 위생을 개선하고자 굴착했다.


             1895년 5월 13일, 금주성으로 내방해 현지를 순시중인 정청(征淸) 대총독 고마쓰노미야(小松宮) 친왕
             근위사단장과 제2군 사령관 등이 남문에서 영접해 인력거로 호송하며 6시간 가량 시찰을 감행했다.


             유수둔(柳樹屯) 병참부 앞에서 운집한 현지인 잡역부들, 조운선으로부터 물품이 하역중인 광경이다.


              대본영이 소재한 내지(內地)의 히로시마시 동쪽 연병장에서 거행된 군신제(軍神祭) 기념식전 광경
              문무(文武) 고등관과 유력자들을 위시로 육해군 부대가 집결한 가운데 일반 학생들이 참배했다.


             연병장을 순회한 기병과 공병대원들, 식장은 사방 1백간(間)으로 구획되어 중앙에 제단이 놓여졌다.


             4월 15일, 청국 사절단의 전권 이홍장이 탑승한 공의호(公義號)가 시모노세키 항만에 정박중인 광경    
             3월 19일부터 전개된 강화회담은 이홍장의 부상과 휴전 유예기간을 거친 뒤 1개월만에 타결되었다.


             5월 29일, 동경의 아오야마(靑山) 연병장에 마련된 임시 군용열차 승강장으로 개선한 제1사단 장병들


             천황의 환행(還幸) 당일인 5월 30일, 전승(戰勝) 축하회를 기리며 만국기로 치장된 긴자(銀座)의 풍경
             일행이 도착한 신바시 기차역과 사쿠라다몬 ・히비야 등지에선 개선문과 녹문(綠門)들이 세워졌다.  


              궁성(宮城, 皇居)의 니주바시(二重橋) 입구에서 환행을 기념해 봉영(奉迎)중인 동경 시민들의 인파
              전시(戰時)에 대본영에서 군정(軍情)을 친히 감독한 천황은 제국군 대원수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히비야의 아치형 개선문. 중앙탑엔 전류가 송전되어 무늬를 밝혔으며, 화초류와 욱일기로 장식했다.        
             이 전대미문 명물의 위용을 감상하고자 수십만 인파가 몰려드는 가운데 만세 함성이 울려퍼졌다.   


             히비야에서 가스미가세키(霞が関) 관청가를 등지고 궁성 방면을 바라본 현대의 동경도 중심부 전경 


             황거 앞 광장의 외원(外苑)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승마 시범을 선보이는 경시청 기동대원, 1978년 5월   
             청일전쟁 당시엔 인근의 히비야에 연병장이 입주해 종종 군부대가 오가며 관병식이 거행되곤 했다.




사진으로 보는 청일전쟁의 외전, 요동(遼東)의 풍파를 헤치고 (3) 사진집




             석취자 부근에서의 교전 실상황, 구릉 위로 보이는 병사들은 제2연대 예하 제5중대의 일개 소대이다.
             포격이 전개중인 가운데 우측 저지대로 일본군 진영까지 최근접한 청군 부대의 깃발들이 보인다.


               의자산 제1포대에서 야마지(山地) 사단장 이하 부속 장교들이 집합, 여순항 일대를 조망중인 광경
               돗자리 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단장 주변으로 함락 당시 떨어진 유탄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여순구 좌안의 황금산(黃金山) 포대, 노호미(老虎尾) 반도와 마주해 항만 방비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시가지가 함락되자 포대 총지휘관 황사림(黃仕林)마저 해상으로 탈출하면서 공략전은 종료되었다.


              여순구 북쪽 교외로 탈출해 나온 피난민, 부형(父兄)과 거처를 모두 잃은 아녀자의 처량한 모습이다.  


               여순항 북단의 도크에서 나포당한 소형 수송선 초해호(超海號), 속사포 2문으로 무장된 상태였다.


            여순구 중신가(中新街) 집선다원(集仙茶園) 무대의 경극 배우들, 천진(天津)에서 건너 온 극단이었다.
            일본 보병대가 시내로 진입해 매복한 청병 및 민간인을 처형해가던 틈에 이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만두산(饅頭山)으로부터 만구(灣口)를 사이에 둔 황금산 및 노호미 반도의 포대들을 바라본 원경


              여순구 조선소의 광경, 바다에 면한 서쪽을 제외하고 3면이 견고한 돌담과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크 주변으로 병기 공장과 기관실이 밀집했으며, 바깥의 구릉엔 해군공소(海軍公所)가 세워졌다. 


            어뢰 제작소 내부 광경, 3백명의 직공들이 근무하면서 항구의 함선으로 운송할 시설까지 구비했었다. 


             조선소 부근에 소재한 해군공소 앞의 보병대원들, 현판은 북양대신 이홍장의 친필로 작성된 것이다.


            시가지 북쪽 교외에서 도심으로부터 운반된 청병의 시신들을 이장(理葬)중인 장면, 1894년 11월 24일
            청군 수뇌부가 퇴각 전야 15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무조건적 항전을 지시하면서 학살 규모도 커졌다.


            조선소 드라이독 구내에서 축하 파티를 거행중인 제2군 사령부, 재료는 현지의 중화요리로 조달했다.
            사령관 및 사단장 이하 제(諸) 부대 장교들과 참관단 의원 일행까지 집결해 승리를 자축 ・만끽했다.      


             청군 병영의 주변을 순시중인 기병 정찰대, 보루 우측의 깃대엔 본래 정기(旌旗)가 게양되어 있었다.


             여순항 만구의 전경, 좌측 황금산 아래로 북양해군의 어뢰정 기지로 통하는 길목에 잔교가 놓여졌다.
             황금산 방면의 동항(東港)에선 1천톤 이상의 대함(大艦)과 거선(巨船)도 만조시 정박이 가능했었다.


            영성자(營城子) 부근에서 행군중인 포병대, 자갈 투성이의 가도상으로 포차의 이동에 곤란을 겪었다.


              12월 1일, 금주성을 출발해 복주(復州)로 북진한 제1연대가 석하역(石河驛) 부근에서 휴식중인 광경
              최근에 금주로 내습한 청군을 추격해 가면서 산포 ・기병 중대도 동반시켜 정찰 목적으로 파견됐다.


              금주성에서 생포된 청군 포로, 거듭되는 엄중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했던 첩자들이었다.
              청병들은 대개 민간인 복장 기반에 상의 군복만 걸쳤던 탓에 농민으로 가장해 잠입하기 일쑤였다.


              금주성 남대가(南大街), 성내 중심에 소재한 성제묘(聖帝廟)를 기점으로 동서남북 대로가 교차했다.
              11월 12일부터 점령 당국의 민정청(民政廳)이 개설되어 주민 통제와 치안 유지의 사무를 통할했다.


            북대가(北大街) 노천시장, 북문과 동문 주변의 가구들을 구획한 장소에서 주민의 상거래를 허용했다.


                금주성 동쪽의 공각산(龔角山) 고지에서 취사 겸 파티를 벌이는 제15연대 예하 제2대대 수비병들  
                여순 함락 후 도주해 온 패잔병들이 복주의 청군과 합세해 금주성으로 박두했으나, 격퇴당했다. 


               1200명의 소수 병력으로 11영(營)이라 일컬어진 청군의 공세에 맞서 금주성을 사수한 연대 장병들  
               제국(帝國)의 위무(威武)를 선양(宣揚)했다는 득의로 충만한 환희 속에서 기념의 축배를 들었다.              


             금주만(金州灣) 근해의 암벽에서 투신한 청군 사병의 시신들을 현지 주민이 동원되어 수습중인 광경
             금주 탈환이 실패해 퇴로가 막혀버린 패잔병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려 해안가로 도주해 왔었다.


            암벽 앞에서 덤덤히 포즈를 취한 일본군 장교, 투신했던 청병의 시신은 교전 10여일 후에 발견되었다.


            금주성 북문 외곽에 소재한 신묘(神廟), 입구 양측으로 석조 사자가 배치되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금주 내성(內城)의 황묘(隍廟), 본전(本殿)을 비롯해 다수의 숙사가 있어 제1사단 사령부가 입주했다.


              금주성에서 북쪽으로 40여km 지점에 위치한 보란점(普蘭店) 전경, 민가 80호가 거주하던 촌락이다.
              복주 ・개평(蓋平) 방면으로 이어진 가도의 요충지이며, 발해만과 인접하면서 수자원도 넉넉했다.


             보란점 촌락 북쪽의 고성(古城) 성터, 만주의 여타 고려성(高麗城)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황폐해졌다.  


           고성내의 민가에 숙영소를 차린 일본군 포병 중대, 성곽 바깥으로 넓찍한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제1연대 예하 제7중대 숙영소, 일본군이 당도하기 직전 여순에서 도주해 온 청군이 민가를 약탈했다.


             복주 가도상의 3관묘(三官廟) 주변 광경, 12월 4일에 청병을 추격한 연대 선발대가 도착해 점령했다.
             석하역과 보란점 일대를 약탈한 청국 패잔병들이 미처 챙기지 못했던 물품의 일부가 노획되었다.




브렉시트의 파국, 미지의 세계로 돌입하다 국제, 시사








난민의 탈을 가장한 무슬림들이 유럽의 안정과 풍요를 따라 부스러기를 떼어먹고자 몰려들었고,
각국의 인권 단체들은 앞다투어 그들을 환영하면서 높으신 분들로 하여금 국경을 열도록 압력을 넣었다.
물론 저가 노동력을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으리란 얄팍한 망상에 기대며 부추긴 측면도 한 몫 했을 터이고...

'난민도 사람이다, 사람!'

이 한 마디가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맞서 항거한 이래 유지되어 왔던 유럽이란 운명 공동체를 X판으로 만들었지.

굴러들어온 돌들이 복지금 타먹고, 그럴싸한 봉급받는데 비례해 일자리 빼앗긴다는 피해 의식이 만연한 판국에
멍청한 인권 팔이들의 어거지 주장에 굴복하고, 수용하면서 유럽인들은 선조들이 지켜온 국경을 스스로 허문 채
제 손으로 악취나는 개슬람 떨거지들을 말 그대로 개나 소나 무턱대고 다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의 반 타의반 '정치적 올바름'이란 허울좋은 미명과 이미지 메이킹에 편승하기 위해서라도...

그 결과 수많은 독일 여성들이 기차역에서 겁탈을 당했고, 파리와 브뤼셀의 유혈 테러극 참사가 벌어졌으며,
발칸으로부터 동유럽에 이르는 매 국경마다 난민들이 좀비 떼마냥 몰려들어 거대한 수용소를 형성했고,
유로 터널 앞에선 영국으로 넘어가려는 떨거지들이 깽판을 치고, 주거지와 식량을 요구한 폭동은 거의 일상화...

지중해 연안의 치안은 북아프리카로부터 유입된 인구 랠리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다,
프랑스는 무슬림이 토박이 시민들보다 자주 보이는 실정. 여기에 금융위기 이래 만성화된 불황까지 겹쳤으니
민심 이반과 국론 분열에 편승한 과격주의 심리가 활개를 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겠음?

급기야 난민 유입과 구제금융 부담에 지친 영국도 해묵은 고립 감정이 부활해 브렉시트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시대 자체가 격변하고 있으며, 방향성을 상실한 채 혼돈을 거듭하면서 불확실의 영역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콧수염 총통의 자서전 원본이 재출간되어 베스트 셀러로 등극했던 게 올해 초의 독일이었는데,
서유럽 전역에 걸쳐 70여년간 억눌려왔던 자국 국수주의에 기반한 내셔널리즘이 빠르게 공감 ・확산되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유주의 및 인본주의 도덕관을 최우선으로 전제한 세계관이 허물어지고 있는 격이다.

이것은 결국 2차대전 이래 구축된 국제 질서의 한계이자, 효용이 임계점에 도달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제 앞으로 정확히 어떠한 시대가 도래할 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시대란 조류에 따라 변모하기 마련인 만큼, 시대 정신과 가치관 또한 그때마다 변모한다.
당장 우리가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생각한 천부 인권론, 만민 평등, 세계 시민주의, 대중민주주의 또한 마찬가지.

그것들이 참으로 이상적이라 여겨질지라도, 역시 '반작용의 결과'에 의해 생성된 산물이며,
앙시앵 레짐과 세계대전 직후의 현실적 요구에 따라 시행착오 끝에 확립된 한계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옳고 그름을 성역화시킬 수 없는 노릇이라면, 또다른 '신질서'의 가능성에 대비해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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