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BJ...(2) 잡소리




'20세기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란 칭송도 들었지만, '최악의 실책을 저지른 대통령'이란 오명도 그를 따라다녔다. 민권운동의 수호자로 여겨졌으며, 한편으로는 미국을 전쟁의 도가니 속에 빠뜨렸다. 꾸준한 성과를 거둔 내치(內治)와 전혀 상반되는 외교면에서의 실패마냥 평가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1963년 11월 22일, 에어포스 원 기내(機內)에서의 비통한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조촐한 취임식을 가졌던 LBJ는 재임기간 내내 베트남 전쟁의 확전(擴戰), 남북전쟁 이래 가장 심각한 흑백(黑白)간 분규로 골치를 썩였다. 68년 대선을 앞두고 재선의 가망이 없음을 인식한 그는 불출마를 선언하는 동시에 월맹에 대한 협상 개시를 표명, 36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퇴임 후에 그는 자신의 경력을 회고하면서, 정치인으로서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로 재직하던 무렵이었지, 결코 백악관 시대는 아니라며 오히려 대통령직은 '지옥속의 공포'와 다름없다고 강조했을 정도였다. 64년 대선의 압승은 LBJ 인생의 최고 절정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JFK 암살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대다수 미국민들이 약간은 비관적인 마음으로 표를 던져 준 결과였다.

LBJ를 '내향성과 외향성이 이상하게 혼합된 사람'이라고 보는데엔 의견이 일치한다. 이미지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고독한 사람인가 하면, 쾌활하고 명랑하면서 배포가 큰 정치인이기도 했다. 인기도를 측정하는 여론조사서를 잠옷 호주머니 속에 보관했다가,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취침할 정도로 세심하였고, 그러면서 보좌관이나 장관들을 질책할 때는 텍사스 스타일의 고압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1908년 8월 27일, 텍사스주(州) 의원의 아들로 태어난 린든 베인스 존슨은 고교(高校) 졸업 이후 캘리포니아를 전전, 접시닦이 ・구두닦이 ・엘리베이터 운전사 등의 잡일을 하기도 했다. 1927~31년, 텍사스 주립 사범대학을 거쳐 잠시 교편을 잡은 데 이어 1932년 대선 당시 하원의원 비서로 근무한 것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1937년, 보궐선거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중앙 정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뉴딜정책의 열렬한 옹호자인 동시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정치 수업을 받으면서 워싱턴 정가(政街)의 혜성으로 부상한 LBJ는 2차대전기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1948년엔 상원으로 의석을 옮겼다. 1953년, 사상 최연소 상원 원내총무가 되어 천부적인 협상 능력과 지도력으로 민주당을 지휘, 아이젠하워 행정부 말기엔 의회를 장악 ・조종하면서 실질적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1960년, JFK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이듬해 부통령에 취임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JFK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그는 '위대한 사회'란 슬로건 하에 민권법 ・의료보호법[메디캐어] ・초중등교육법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프로젝트 법안들을 통과시켰고, 빈곤 퇴치를 위해 정력을 다했다. '나의 힘과 영예, 신념, 모든 것들을 이와 관련한 의회 투쟁에 기울였다'며 회고록에서 대단한 자부심을 나타냈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론 거의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코시긴과의 글래스버러 회담에서 증명되었듯이 대소(對蘇) 화해를 희망했으나, 깊어져만가는 베트남 개입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채, 나토의 우방국들로부턴 '유럽 경시'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대규모 병력 투입을 개시한 지 4년만에 주월미군(駐越美軍)은 50여만명으로 급증, 전쟁 장기화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내외 여론과 의회의 반전(反戰) 기세가 높아져갔으며, 1966년 중간선거를 맞아 전국 유세를 부득이 포기하는 등 인기도 덩달아 폭락했다. 특히, 67년~68년 내내 전국 각처에서 벌어진 인종 폭동과 학생 데모로 인해 국내 사정은 사실상 파국 직전으로까지 몰렸다. 여기에, 67년 중반 이후로 점차 악화되기 시작한 경제 동향과 인플레이션 역시 그의 재선 불출마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텍사스의 자택 농장에서 은거(隱居), 건강이 악화된 탓도 있어 공식석상 출현을 극도로 자제해왔는데, 암담했던 시각에 의지가 된 것은 가족들의 사랑과 지지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본인의 말마따나, 베트남 전쟁과 관련하여 LBJ가 취했던 결정에 대한 심판은 역사가 내려 줄 것이다.



LBJ... 잡소리




5백만$가 넘게 경비가 소요되었으리란 사상 최대의 초호화판 대통령 취임식으로 워싱턴이 떠들석했을 무렵, 텍사스의 목장에서 칩거하던 린든 존슨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파리회담에서 베트남 평화협정이 마무리되어 곧바로 조인되리란 소식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1973년 1월 22일, 미합중국 제36대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64년의 생애(生涯)를 마쳤다.

LBJ를 가리켜 흔히 '비극적 대통령'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의 비극은 이미 에어포스 원에서의 취임식 당시부터 시작된 셈이다. 전임자의 피살이란 비극 속에서 '비극적 대통령'이 탄생했다. 하필이면 어째서 암살 사건이 댈러스에서 발생하였고, 하필이면 JFK의 텍사스 방문에 동행했던가. 민주당 텍사스 지부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케네디는 존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던 상황이었다.

미국은 유언비어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오늘, 이자리에 서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대통령으로서 처음 의회 연설을 가졌을 당시 이렇게 말했다. '부적합한 상황에서 부적합한 시기에 부적합한 지방에서 나온 부적합한 인물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는 비상(非常)했던 비극적 인물'이라 LBJ를 평한 것은 프린스턴 대학의 에릭 골드먼 교수였다.

주인을 잃은 케네디 왕조(王朝)였지만, 후임자를 달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특히나, RFK는 생리적으로 존슨과 맞지 않았다. 60년 대선의 후보 지명전에서 LBJ를 격파하는데 정력을 다했으며, 그가 러닝메이트로 지명되는 것을 철저히 반대했다. 8년 후, RFK가 경선에 출마한 것이 LBJ로 하여금 재선 도전을 단념케 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그 로버트가 암살당했으니, 사람 팔자란 알 수가 없다.

대통령으로서 LBJ의 최고 순간은 역시 64년도 대선에서 압승했을 때였을까? 경우에 따라선 글래스버러에서 코시긴과 만났을 당시를 꼽기도 한다. 베트남 전쟁은 그에게 비극이자 불운이었지만, JFK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닉슨은 그보다 더욱 심한 북폭(北爆)마저 감행하지 않았던가.



2기(期) 취임을 맞이한 닉슨의 정치 노선... 국제




건국(建國) 2백주년을 향한 닉슨의 집념에는 그 자신의 정치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집약되었다. 지난 4년간 베트남 문제를 놓고 끈질긴 씨름을 벌여온 정치 스타일과 국내외적으로 보여준 행태가 닉슨식 정치 이념의 전개 과정이었다면, 제2기 집권기는 그러한 자기 이념의 정리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정치'란 슬로건을 앞세운 닉슨의 이념은 두 번째 임기를 맞아 성숙기를 거칠 것으로 기대되며, 그러한 기대는 집권 1기에 나타난 중소(中蘇)와의 현상 세력을 바탕으로 초강대국 우위 질서의 유지를 본질로 한 3극(極)체제의 모색이라던가, 대내(對內)적으론 보수 ・중산층을 토대로 삼은 경제정책 ・정치적 조작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닉슨 행정부 집권 2기 출범의 안팎을 살펴본다.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 전대미문의 화려한 취임식을 앞두고 미국의 어떤 평론가는 닉슨을 다소 과장하여 드골에 비유하였다. 드골이 전후(戰後) 은퇴로부터 12년만에 알제리 전쟁의 여파를 기회로 정치적 개선을 했듯이, 닉슨은 62년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한 직후 참담한 은퇴 성명을 발표했으나, 6년만에 재기하여 백악관에 입성(入城), 이제는 '재선 대통령'이란 영예의 타이틀마저 얻었다.

드골이 엘리제 궁전의 숲속에 파묻혀 군주적 ・카리스마적인 정치를 시도했다면, 닉슨은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틀어박혀 주요 정책을 구상하는 경우가 많다. 기자회견을 기피한 드골과 마찬가지로, 닉슨도 기자들을 싫어하여 '장막(帳幕)속의 비밀정치'로 이름이 높다. 드골이 잦은 순방과 독자외교를 통해 여론의 지지를 이끌었듯이, 닉슨도 파격적인 외교 행보를 통해 국내의 정치기반을 구축해가고 있다.

또다른 칼럼니스트는 'B-52 중폭기가 하노이 상공을 뒤덮어 히로시마 원폭의 10배 규모로 융단 세례를 퍼붓는 순간에도 미국인들의 화제는 풋볼 경기였으며, 그 와중에 닉슨과 키신저는 매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미국의 철학과 도덕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 것인가'라며 풍자, '당선 소감을 통해 새로운 다수의 정치를 약속했지만, 새로운 다수를 이끄는 수법은 본래의 Old Nixon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트남 협상으로 상징된 외교 운영과 최근 불거진 '워터게이트'로 대표되는 정당정치, 그리고 '백악관 동창생'으로 집중화된 신(新) 내각 개편이 Old Nixon으로의 복귀를 이미 실감있게 제시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닉슨의 우경화는 현재 미국이 요구하는 시대 정신의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노이와의 의견 차이를 '언어상 표현의 난점'이라고 지적한 키신저의 파리회담 고충은 동맹국의 공개적인 도전을 피하면서 지난날의 교전(交戰)세력과 어떻게 악수를 나누고, 이익을 확보하는가 하는 닉슨의 고민을 반증한다. 냉전시대의 리더로서 확보된 기준의 원칙과 데탕트 시대에 당면한 미국의 현실이 맞부딪치는 분수령에서 닉슨이 향후 4년을 구상하는 그래프는 대체로 두 가지의 특징을 띌 것이다.

우선, 국제적으로 전후(戰後) 분쟁의 개입을 통해 이룩된 미국의 영향력과 이익 확보를 '분쟁으로부터의 탈피'를 통해 유지할 듯 하다. 미국은 6대륙에 걸친 중소(中小)지역 분산의 전면 개입으로부터 대국(大國)을 상대로 한 중점주의로 전향하는 시기에 이미 들어섰다. 아시아 문제에 있어서 중공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일본과의 새로운 협력 패턴을 정립함으로써 태평양 세력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또한, 서유럽을 하나의 단위로 상대함으로써 마셜 플랜 이후의 대서양 이익선을 사수할 의향이다.

이러한 전략은 전후 협상의 고착이라기 보단, 현상 유지에 미국의 새로운 국제보호주의가 더해진 닉슨 특유의 방정식을 성립시키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닉슨의 중소국(中小國) 분쟁 처리 방향은 신경질적인 면을, 강대국 관계의 처리는 합리주의적 ・공리적 측면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짙어져가고 있다. 국제 외교의 개선을 통해 국내적으로 60년대 이후 고질적인 사회 불안과 모순을 해결, 중산층 위주의 정치기반 강화를 노린다는 것이 닉슨의 계산이다. 또한, 의회와의 마찰을 고려, 행정부의 체제를 강화시켰다.

'행정부 운영의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이번 개편은 거대한 연방 관리체제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정책 지시를 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닉슨은 1기 집권 동안 백악관에서 자신을 보좌해왔던 측근 인사들을 대폭 기용했다. 2기 닉슨체제는 내각과 보좌관 시스템으로 나누어지는데, 내각에선 국무장관 로저스, 재무장관 슐츠, 농무장관 부츠, 법무장관 클라인딘스크, 내무장관 모턴 등 4명이 유임되었다.

이어서 후생복지 ・교육장관이었던 리처드슨이 국방장관으로, 예산국장이었던 와인버거가 후생복지 ・교육장관에, 상무차관이었던 제임스 린이 주택도시개발 장관에 임명되는 등 3명이 전임되었고, 상무장관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방직공장주인 프레드릭 덴트가, 노동장관엔 전(前) AFL-CIO의 리더 피터 브레넌이, 교통장관엔 캘리포니아 석유회사 사장 클라우드 브라잉거가 임명되어, 3명이 새로이 입각했다.

특히, 리처드슨 신임 국방장관은 백악관에서 닉슨을 보좌했다가 국무차관에 임명, 후생복지 ・교육장관으로 승진한 데 이어 다시 국방장관의 요직을 맡게 되었는데, 전임 레어드가 처리하지 못했던 펜타곤 내부의 군부와 민간 관료간의 마찰을 어떻게 해소시켜 나갈지가 주목된다. 또한, 슐츠 재무장관에겐 경제문제 담당보좌관의 직위까지 주어져 심각한 양상에 이른 무역 불균형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닉슨의 1기 집권 당시에 코널리 재무장관이 유일한 민주당원 각료였듯이, 노동장관 피터 브레넌은 현(現) 내각에서 유일한 민주당적(籍)을 가진 멤버이기도 하다. 한편, 보좌관 시스템을 살펴보면 수석보좌관 할더먼, 대내(對內)문제 담당보좌관 에릭먼, 대외(對外)문제 담당보좌관 키신저가 모두 유임되었고, 슐츠 재무장관이 경제문제 담당보좌관을 겸임한 것 외에 텍사스 출신의 여성 앤 암스트롱이 대통령상담역이란 타이틀로 보좌관팀에 추가되었다. 예산국장엔 기업인 출신의 로이 애쉬를 기용했다.

닉슨이 보좌관 체제를 존속시킨 것은 막후(幕後)정치가 대부분의 문제를 결정하는 국제정치 구조에 적응키 위한 것으로 판단되며, 보다 자유로운 입장에서 제반정책을 계속 입안, 수행해 나가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듯하다. 닉슨이 정책을 수행해가는 팀워크 중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각료도 아니고, 보좌관도 아니면서 정책 수행 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2명의 인사를 들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은 법무장관과 공화당 선거 사무장직을 역임하다, 부인의 압력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존 미첼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민주당원이면서 1기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 닉슨의 재선을 위해 민주당내에 닉슨 지지파를 심어 놓았던 존 코널리다. 어찌되었든, 닉슨은 행정부 체제의 강화를 도모하면서 2차대전 이래 가장 미묘한 정세에 직면하게 될 미국의 대내외 입장을 감안한 정치적 처방을 내린 셈이다.



인도네시아의 외자(外資) 붐 국제


에너지 파동 이래 동남아시아 천연자원의 보고(寶庫) 인도네시아로 외국계 자본들이 앞다투어 진출하고자 애쓰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경제협력센터(ECOCEN)는 인도네시아의 투자 환경이 아세안 5개국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불리하며, 실제로 투자 유인(誘因)보단 투자 제한의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5개국 가운데서 가장 많은 외국인 투자가 몰려들고 있음을 지적했다.

인도네시아의 외국계 자본 투자 제한 요소 가운데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번거롭고 까다로운 절차이다. 투자 환경과 타당성의 조사, 토지 매입, 공장 설립의 허가, 각종 세무 절차와 회사 운영의 절차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매우 복잡하기 그지없다. 외국인의 투자를 저해하는 다른 요인으로서 경제 하부구조와 통신의 미비, 훈련되지 않은 노동력, 사회적 및 상업적 서비스의 부족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막대한 천연자원은 그같은 조건들을 상대하고도 남을 만큼 외국 투자가들의 구미를 돋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도네시아가 투자가들에게 주고 있는 중요한 매력들은 '공업적 처녀성'이란 말로 표현되듯이, 사실상 무(無)에 가까운 공업의 저개발 상태와 무진장으로 풍부한 각종 자원, 그리고 광활한 상품시장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미처 개발되지 않은 광대한 석유자원과 주석 ・보크사이트 ・동(銅) ・니켈 및 기타 여러가지 지하자원들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며, 산림자원도 막대한 투자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大國) 중의 하나이다. 미국 워싱턴의 인구국(人口局)은 73년도 중반의 인도네시아 인구를 1억 3200만명으로 추산했는데, 이것이 외국 투자가들의 눈에 지극히 유망한 시장으로 보이는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비록 외국계 자본의 투자를 제한하고는 있지만, 그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되는 바다. 공업기반과 국내 자본이 모두 빈약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해선 외자(外資)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외국인 투자의 우선 순위를 경제적 하부구조의 개발을 포함한 전반의 발전에 두고 있으며, 다만 합작 투자의 비율에 대해 국내 투자가들에게 유리하게끔 제한을 가하는 형국이다.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미국과 일본을 선두로 전세계 각국의 다양한 자본들이 투자되어 있다. 1966~72년, 인도네시아 정부는 석유개발 부문에만 7100만$의 자본 도입을 승인하였고, 석유개발 이외의 부문에서는 총 546건(件)에 22억 6천만$의 자본 도입이 승인되었다. 그 중 미국이 87건의 사업 계획을 위해 8억$를 투자, 수위(首位)를 차지하였으며, 2위 투자국은 101건의 사업에 3억 5천만$를 투자한 일본이다.

이밖에 필리핀이 2억 6400만$, 싱가포르가 1억$, 홍콩[英領]이 1억 5백만$, 말레이시아 4천만$, 호주가 2천만$를 각각 투자했으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등도 1972년까지 총 1억 8천만$를 투자했다. 인도네시아는 이같은 외국 자본을 경제성장과 지역 균형개발이란 두 가지 측면에서 활용하고 있다. 최근까지, 자바섬 일대에 인구가 밀집하는 바람에 불균형적인 개발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제2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전국적 도로망의 확장, 메단과 수라바야 및 남부 술라웨시의 공업시설 확충, 각 지방의 학교 ・전력 ・통신시설 확장, 동부 수마트라에 수력발전소 및 알루미늄 제련(製鍊)공장 설치, 발리의 관광시설 확장 등 전국적인 균형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추세다.



최악의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 中 부동산 업계... 국제


중국의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시련기를 보내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19일자로 보도했다. 지난해 전체 중국의 주택 판매량은 전년도 대비 10% 증가에 그쳐 2008년 이후 성장세가 가장 느렸다. 특히, 연말로 갈수록 부동산 업계의 한파가 강해졌었다.

시가총액 기준 중국의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인 완커(萬科)의 지난달 주택계약 건수는 11월에 비해 30%나 줄었다. 매출액 기준 2위 업체인 헝다 부동산은 11~12월 주택 판매량이 연중 최저 수준으로 올해 주택 판매량 목표를 당초 설정했던 804억 위안에서 8백억 위안(약 127억$)로 하향 조정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달 전국 70개 주요도시 중 주택 가격이 상승한 도시는 단 두 곳에 불과했다.

UBS의 천 리 중국 주식 전략부문 대표는 '부동산 업계가 가장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며, 업계의 현금 흐름이 연말께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UBS의 왕타오 이코노미스트도 '올해 부동산 업계 투자 증가율은 지난해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정부가 시장 규제를 당분간 유지함에 따라, 주택 거래량과 가격이 더욱 하락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최근 설문조사에서 향후 2년내로 중국에서 주택을 구매할 의사가 있다고 답한 중국인은 전체 응답자의 16%에 불과했다. 1년 전 조사 때 구매 의사가 있다고 밝힌 응답자가 22%였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낮아진 것이다. CLSA 아시아 퍼시픽 마켓의 앤디 로드만 중국 거시경제 담당 전략가는 '정부가 시장 규제를 풀지 않는다면, 연말께 주택시장이 붕괴되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다이와증권 캐피탈마켓은 중국의 올해 주택 거래량이 10% 가량 하락할 것이라 전망했다. 로이터 통신이 지난 10일, 이코노미스트들을 대상으로 올해 중국 주택가격에 대한 설문조사를 행한 결과에서도 가격이 10~20% 하락할 것이라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씨티그룹은 중국 부동산 시장이 향후 3~5년간 조정기를 겪을 것으로 예상했으며, 아울러 부동산 개발업체들이 지속적인 성장 능력과 건전한 재정상황 유지, 계속되는 정책 역풍과 경기 조정기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냉각되고 있는 부동산 시장이 올해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2% 넘게 갉아 먹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커진 실정이다. IHS 글로벌 인사이트의 알리스테어 손튼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중국의 성장률은 7.5~8% 수준을 유지하겠지만,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견인하는 대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성장률이 7% 이하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7% 이하로 떨어지면 사회적 불안 요소가 위험 수준에 도달 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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