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병합을 바라본 청나라 외교관의 초조감 발언록








"한일합방 설(說)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피살된 후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한국 국내 '일본당(日本黨, 一進會)'의 두목인 송병준(宋秉畯)이 먼저 공개적으로 제안하였고, 그 배후에는 분명 일본인의 사주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제안은 곧바로 동경(東京)으로부터 적극 호응을 얻었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明治) 초년 '폐번치현(廢蕃置縣)'의 방법을 참조하여 한국의 황실 및 귀족들에 대한 대우 조처를 마련하기로 하였으며, 러시아 ・독일 및 미국 등 관련 국가도 각각의 사정상 반대 의사가 없으므로 다른 나라에서도 이의를 제기할 것 같지는 않다...

중일전쟁[=淸日戰爭] 후 일본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내세웠고, 러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는데, 그 조약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이제는 조선을 완전히 차지하려고 한다. 메이지 이래 먼저 유구(琉球, 沖繩)부터 멸(滅)하고, 이어서 대만(臺灣)을 할양받고, 또 이어서 화태(樺太, 남사할린)까지 할양받았는데, 이제는 또 조선마저 병합하려고 하니 앞으로 일본의 웅심(雄心)이 과연 조금이라도 수그러들지는 실로 감히 예측할 수가 없다. 요컨대, 저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오고[得步進步] 있으니, 미래의 대비책을 강구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 1910년 6월 27일, 주일(駐日) 청국 대리공사 오진린(吳振麟)이 한일합방의 전망을 본국으로 타전하면서




봉주르~ 조선? 그거 무슨 애피타이저인가염?ㅇㄱㅇㄱ 세계사








한일병합은 무엇보다도 일본이 '장기간 추구해 온 외교 활동의 결과'였다. 일본이 20세기초 열강들과 외교 관계를 발전시키며 극동에서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02년 체결된 제1차 영일동맹에 이어 1905년에 체결된 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이권을 보장해 주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영불(英佛)협상으로 북아프리카에서의 상호 영역을 인정하면서 독일의 이 지역 진출 시도를 경계하였다. 1907년에 체결된 불일(佛日)협상은 인도차이나와 한국 ・남만주에 대한 프랑스와 일본의 영향력을 상호 인정했으며, 동년의 제1차 러일협약 ・영러(英露)협상 체결로 영불러일 '4국 협조체제(Quadruple entente system)'가 구축되면서 '그레이트 게임'은 종언을 고했다. 이 '4국 협조체제'에서 배제된 미국은 1909년 '만주철도 중립화' 방안을 주창하였다.

이에 러시아와 일본은 1910년 7월에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 미국의 만주 정책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구축했다. '러일전쟁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 원칙을 지지함으로써 일본의 대륙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던 러시아'는 이 협약을 통해 '동아시아 정책의 보루였던 한국을 포기한 댓가로 몽골을 확보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본의 한국 병합 추진 과정에 눈 감았다. 프랑스의 주일(駐日) 대사 오귀스트 제라르(Auguste Gerard)는 1910년 6월 17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서 한국 병합에 대해 일본이 이미 '영국 및 러시아 정부와 합의'를 봤다고 적고 있다. 보불전쟁의 패전으로 알자스-로렌 지방을 신생 독일 제국에 빼앗긴 프랑스는 이후 1차대전까지 국제 무대에서 독일을 고립시키는 것을 자국의 최대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공화국' 프랑스는 1894년 차르의 '제국'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또한 1904년 영불협상을 통해 영국의 이집트에 대한,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영향력을 상호 인정했다. 아시아에선 인도차이나 식민지 지배에 집중했기에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많지 않았던 프랑스는 한반도에 보다 큰 관심을 보였던 영국과 러시아가 사전에 묵인한 것으로 파악한 한일병합에 대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제라르는 두 차례의 영일동맹 ・러일협약 부속 의정서 내용에 의거해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를 '결정적 단계로 진입'시키는 조치에 대해 영러의 '동의를 구해야만' 하는데, 양국 정부에 '이미 이에 대한 언질을 준 듯하다'고 1910년 5월 23일자 보고서에 기록했다. 프랑스가 병합에 반대하지 않고 방관한 다른 이유는 자국이 선발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보호국' 체제에서 '병합'으로 전환시켜 식민 지배를 확대한 경험이 있었다.

프랑스는 1885년 12월 17일, 마다가스카르 여왕과 동맹 조약[타마타브(Tamatave) 조약]을 체결했으나 해당 조약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구실로 1895년에 군사 원정을 감행해 새로운 보호령 조약을 강제했으며, 이에 대한 현지인들의 저항이 발생하자 1896년 8월 프랑스 의회에서 합병 법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부터 이미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이나 지배 방식들을 주의 깊게 파악하고 있었다. 서울의 프랑스 영사는 1909년 11월 23일자로 본국의 피숑(Pichon)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보호령 체제는 성공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본이 한국의 병합을 추진하는 것은 놀랍지 않으며, 일본이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를 보호국에서 정식 식민지로 변화시킨 것에 커다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고, 이토 저격 사건의 파장과 연관시키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국인들이 특히 이집트에서 사용한 식민지[보호령] 경영 방식을 모방한 것으로 간주된 흐름은 이토 공작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일본인들이 칭찬하는 우리의 방식, 무엇보다도 튀니지와 마다가스카르에서 우리들이 거둔 성과에 커다란 호의를 보이는 경향이 통감부에서 점차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변모한 후자의 사례에 대해서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호령 체제는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의 활동은 재정 및 행정 개혁 실현이란 목적하에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보호령 체제는 이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서 좋은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당국이 보다 효과적인 수단인 병합을 생각하는 건 놀랍지 않습니다."

- by 민유기 著 <프랑스의 1910년 한일병합과 그 결과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1909년 10월 25일, 하얼빈 방문의 도상 장춘(長春)에 기착한 이토 추밀원 의장의 환영 연회장 광경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인 이튿날 오전에 저격을 당함으로써 '최후의 만찬'이 되버리고 말았다.




하야 투쟁, 촛불 항쟁 다 좋다 이거야 잡소리








그네꼬와 순시리는 헌정사의 수치로 낙인찍히고, 화수분용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거야 당연지사이긴 함.
레임덕은 커녕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할 형편인데 본인과 나라를 위해서라면 속히 내려오는게 도리상 맞는 거임.
어차피 이런 푸념 백만 번 늘어봤자 유아독존 고집불통으로 점철된 그 머릿속엔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ㅉㅉ 

그런데 지금 광장으로 출두해 민중 총궐기의 가열찬(?) 거국적 항쟁 투지를 불사르는 깨시민 제군들치고,
무당 정치의 실제 표본이자 대선배격이라 할 수 있는 구한말 민자영과 진령군 콤비의 생전 악업에 대해서도  
그네꼬와 마찬가지의 동일한 기준에 따라 비평 ・성토하며 디스할 수 있는 용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당대 천하가 공감했던 희대의 요부(妖婦)이자 단군 이래 최악의 나라 안주인이었던 원조 김치X 민자영조차
세월이 흘러 나름 등 따시고 배부르니깐 왜구들 손에 세상으로부터 강제 로그 아웃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녀급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황후 존칭 안 붙혀주면 친일 매국노 소리 들을만치 재평가받는 실상이잖아?

말이 좋아 일제의 만행 운운하는거지, 엄연히 국태공과 훈련대까지 가담했던 일선(日鮮) 합동 작전이었는데도.

만약 그네꼬 배후에서 대통령을 조종하며 전횡을 일삼고, 이권 챙겼던 주체가 듣보잡 순시리 따위가 아닌
다국적 기업이나 프리메이슨, 빌더버그 클럽류의 거물이었더라면 여론이 지금처럼 들고 일어나진 않았겠지.
물론 조선반도엔 저런 고급스런(?) 흑막은 어울리지 않고, 무당 푸닥거리가 딱 제격이라는게 현실이고.ㅋ

광장의 열기나 시위 문화도 역설적으로 반도인들이 내세운 자칭 아시아 체고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일종의 기능 부전 상태로 빠지면서 민의를 충분히 대변해주지 못하는 실정을 반증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만.
아무튼 분노에 이끌려 촛불 한대씩 들고 광화문에서 역사적 순간과 함께했다는 희열감 느끼는거야 이해함.ㅇㅇ

하지만, 동시에 민자영에 대해서도 역시 가열찬 비평과 신화 걷어내기부터 병행시켜야 사리에 합당치 않겠음?

혹여 그럴 깜냥은 못 되겠으나, 현 대통령이 최후의 결단을 감행해 노무현과 같은 순교자(?)의 길을 택한다라.
친노가 그러했듯이 관 속에서 뚜껑 닫힐 일만 대기중인 시한부 생애의 친박도 극적으로 기사회생할 것인즉,
민비와 노무현처럼 그네꼬마저 미화된다면 그야말로 레알 답없는 개 돼지들임을 인증하는 셈밖에 더 되겠어?

이런 점만 놓고 보더라도, 역사에 대한 진솔한 접근 및 교훈이 정말로 필요한 민족은 반도인들이 아닐까? 




우리 조선도 대만을 배워서 개과천선 좀 해봅시다? 세계사








대만(臺灣) 시찰단의 초기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인 관료들을 주축으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가운데 조선인도 있었다. 일행엔 당시 '한성은행 전무 취체역(取締役=理事)이었던 한상룡(韓相龍)도 동석했다.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이라 평가받는 한상룡은 일인(日人) 관료들처럼 대만 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대만을 시찰했고, 그의 체험은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되었다. 시찰 기행문에는 '대만의 사업'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은데, 이는 '조선 경제인에 의한 대만 체험'을 통해 대만의 식민지 산업화를 통한 경제 성장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와 연결된다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대만 시찰은 다른 시찰과 마찬가지로 빡빡한 일정으로 개인적인 기대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굉장한 제한이 있었는데, 스스로도 시찰이 본인의 예상과는 다소 어긋나 있었다고 밝혔다.

시찰기 가운데 그의 생각이 비교적 잘 드러난 <대만 시찰의 감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총독부 관료들에게는 언급이 적었던 부분, 즉 대만에 대비한 조선의 후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조선의 대만화(臺灣化)'를 다소 일방적으로 촉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민족성'을 부정, 비판하면서 조선의 미래적 방향은 '조선의 특수성'을 모두 내버리고 대만을 시급히 배워 일제에 더욱 종속되고, 동화되는 길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먼저 그의 대만 발전상에 대한 언급을 보자.



"산업의 발달은 이러한 부력(富力)이 작았을지라도 그 원인은 천여(天與)의 산물이 무한하고, 또한 수확이 용이함에 있다. 그러한데 행정 당무자가 열의로 산물의 개발을 장려하고, 명물(名物)을 이루어 실속있게 힘쓰는 데에 의지해 이용후생에 노력한 결과에 다르지 않다. 그러나 대만 주민은 우리 조선인처럼 태만하고, 퇴영적임과는 달라 일단이 근검역행의 미풍에 따르고, 인내력과 저축심의 강함도 문득 화식력(貨植力)을 증진한 최대 원인이라 하겠다."



기업가 출신 한상룡은 자연스럽게 대만 산업의 발달에 주목하고 있다. 대만의 풍부한 산물이 부력으로 연결된 것은 일본의 노력과 더불어 대만인들의 협력의 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을 '태만' ・'퇴영'으로 대만인을 '근검' ・'인내'로 대비해 후진적인 조선의 민족성을 부각시켰는데, 이는 조선이 노력해야 할 것은 당국의 식민정책에 대한 순응과 함께 일본의 국민성[민족성]을 체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동화'의 맥락과 연결된다 하겠다. 그는 특히 대만인의 저축과 화식력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는데, 이는 금융권을 활성화시켜 조선의 경제를 일본 자본에 더욱 예속시키려는 총독부 의중과 당시 한성은행 소속이었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려가 결합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생번(生蕃) ・번인(蕃人) 등 원주민을 식민지 대만의 국민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만은 좁고도 작은 하나의 고도(孤島)이다. 그러나 인구 305만을 포용하여-물론 번계(蕃界)는 제외한-'라며 이러한 인종 차별주의적 언급은 대만에서의 일제 식민 정책상의 동화는 사실상 한족 중심의 '본도인(本島人)'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고,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 의식과 정치적 제한이 비교적 엄중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의 대만 통치는 한족과 원주민을 따로 구분하는 차별 구조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고, 일제의 이념을 깊이 흡수한 한상룡에게도 번족은 한족과 엄격히 구분되는 야만, 그 자체로 제국의 국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인에 대한 그의 부정적 인식은 자신으로부터 조선을 철저히 '타자화'하는 동시에 자신을 철저히 객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상룡이 인식하고 있었던 자기 정체성의 일면과 자신의 지향하는 민족성의 방향을 보여준다 하겠다.



"대만에서는 도상(道上)에서 난취(爛醉)하거나 혹은 입으로 시끄럽게 떠들어댄 행위 등을 보는 것이 적고, 질서의 정연함은 한편으로 놀라움을 만끽하였으니, 조선처럼 노변에서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거나 혹은 욕하고 꾸짖으며 울부짖는 모습을 이따금 혼자서 보는 것과 같은 건 품성의 수양상 급작스럽고, 소홀함에 따라 불가한 동시에 풍기 단속상에도 한 번쯤 생각할 바를 요구할 일이다. 대개 이렇게 되는 것은 동상(同上) 발전의 국민성 함양에 영향가는 바가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을 대단히 우려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대만의] 사민(士民) 복장은 남녀가 함께 대부분 흑색이고, 남자는 많이 단발했으니 선인(鮮人)처럼 한 가지 옷[=白衣]만 착용하거나 세탁에 궁색함과 다르면 자못 경제적이며, 단발은 결발(結髮)과 다르면 동작이 경쾌해져 작채상(作菜上)의 편리도 크게 많아질 것이다."



한상룡은 조선 거리의 불결성을 조선인의 태만성과 연결하면서 당국이 서둘러 '국민성 함양'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고려할 것을 주장했고, 나아가 조선인의 백의 풍습이 비경제적이며, 상투나 쪽진머리 역시 거추장스러운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이러한 부정의 논리는 조선적인 것과 근대적인[일본적인] 것이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근대적 계몽의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어서 원주민 학생들이 창가(唱歌)를 부르는 광경을 통해 동화 정책의 효과를 찬양하면서 동화 정책의 핵심 기구였던 학교 이용이 저조한 조선을 질타했다. 조선의 보통학교(普通學校) 취학률이 대만의 공학교(公學校)에 비해 낮은 것은 아직도 일제가 내세운 정책에 둔감하고, 나아가 소위 문명개화(文明開化)에 대한 발달에 무감각한 조선인의 탓으로 당국이 이를 더욱 철저히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경찰 행정을 돕고, 젋은 사람을 조직해 항일 무장 투쟁을 진압하는 한편 대만인의 친일 포섭 및 유화정책으로 사용한 식민지하 집단 감시체제의 상징인 대만에서의 '보갑제도(保甲制度)'를 서둘러 도입해 총독부 경비와 경찰의 업무 부담을 덜고 '지방 경찰 보조와 풍속의 개량 등에 선용(善用)'할 것을 주장했다. 덧붙여 '엄격한 규율 감시하에 취업을 강제'하는 등의 조치로 '무뢰한 단속상에 적절'히 이용할 것도 주장했다. 한상룡의 대만 시찰이 권업 공진회 참가라는 공적인 측면에 강했던 것에 비해 전북 참여관이었던 박영철(朴永喆)의 시찰은 비교적 일반 시찰의 색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찰기는 한상룡의 경우와 달리 일종의 기행문에 가까워 묘사나 설명이 구체적이고 상세해 여정의 궤적을 정확히 알 수 있고, 노골적으로 일제를 찬양한 면모도 상당히 감소된 측면이 보인다.



"대저 일반 대만인은 260년전에 광동(廣東) ・복건(福建)으로 이래(移來)한 민족이고, 번인은 재래한 만종(蠻種)이라 성질이 참독(慘毒)해 동족외의 사람은 마주하는 즉시 학살하고, 수급을 헌벽(軒壁)에 줄지어 놓아 수급으로 다획한 자가 스스로 호걸이라 가장하는 악성있는 족류(族類)인고로 당국에서 백반무순(百般撫循)해 귀화자는 행정 구역에 편입시키고, 출입을 경계해 흉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니, 귀화자가 많아져 번계(蕃界)가 점차 축소되었다."



박영철은 대만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노출하며 번인은 동화된 대만인과 구별되는 폭악무도한 반(反) 문명적 존재로 여기며 이들을 대립관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주민은 문명의 세례를 입은 대만인과 경계가 분명한 자로 일제의 국민이 될 자격이 없고, 그럴 수도 없는 비(非) 문명인이었던 것이다. 이는 국민의 자격 여부는 그저 단순히 그 지역에 거주하는 이가 아니라 '동화' 여부에 달렸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하겠다. 그럼에도, 일제의 거듭된 노력에 힘입어 이러한 대만 원주민조차 점차 귀화하는 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서술하면서 동화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사실, 일제 식민 당국 자체도 대만 원주민에 대한 편견이 가득해 이들은 어디까지나 동물적 폭력성을 가진 야만족에 불과하며, 식민통치와 교화(敎化)의 성과마저 부정하게끔 만드는 존재인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던 터였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총독부가 이들을 잘 교화해 경찰견의 대리품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여겼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원주민의 포악성과 비 문명성은 역으로 총독부의 동화정책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영철 역시 고산(高山)에 거주한 대만 원주민을 야만과 비 문명의 상징으로 보면서도, 총독부의 노력으로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번족마저 문명화로 진입하고 있다며 일제의 동화정책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한편, 박영철도 대만의 근대화는 '당국의 헌신에 기초한 문명의 시혜'라는 관점을 보여주며, 이는 제국 일본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인민'을 위한 일이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의 통치는 일본을 위한 것이 아닌 대만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 하면서 이들의 통치는 가히 특수한 성격이 아닌 보편적 가치와 연결되는 사안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비록 당국의 시설이 아주 마땅할지라도, 개개인이 근면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전한 생활을 얻기 어려우니 더욱이 조선은 천혜(天惠)가 부족한 지방이라 별반이 교육과 산업에 장려하며 근검과 저축에 주의해 실력을 양성할지니, 구설(口舌)로만 고담준론(高談峻論)하고, 학식이 없어서 뱃속이 텅 비었으며, 실력이 없어서 맨손과 맨주먹만으로 안전한 생활을 희망한다면 바라건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지라 어찌 개탄하지 아니하겠는가?"



한상룡과 마찬가지로 강제 취업제도가 강조되고 있다. 이 제도를 조선에 도입하여 모든 조선 청년이 '근면 성실'히 일하게 해야 한다는 한상룡의 결론처럼 '근면한 국민 만들기'에 관심을 경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대만의 발전이 당국의 헌신과 함께 대만인의 협력에 기반을 둔 것임을 드러내며, 조선인의 일제 협력이 장래 조선의 발전과 미래를 결정하는 밀접한 원인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대만과의 비교를 통해 만약 조선에 이런 노력이 없다면 조선의 미래는 원주민을 안고 있는 대만보다 더 후진적일 것이라는 경고를 우회적으로 던지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농경 사회의 특성으로 대만처럼 당장 자본화될 자원들이 비교적 적었던 조선은 대만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일제의 통치에 협력하면서 '교육과 산업의 장려, 근검과 저축' 등에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준비와 노력이 없는 논의들은 '연목구어'와도 같은 우매한 행동이라 강조하며 시찰기를 마쳤다. 결론적으로 '대만을 본받아 공리공담이 아닌 실질적 근대화 및 일본화'를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두 조선인의 시찰기는 공통적으로 현재 대만의 발전은 당국의 헌신과 대만인들의 협력 ・순응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대만이란 검증된 식민지를 본받아 더욱 분발해 조선적인 것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더욱 철저히 일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연결시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결핍과 부재'는 식민통치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의 부재와 동시에 조선의 민족성의 상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만과 같은 모범적 식민지가 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결국 '조선적인 외형과 내면'이라는 것이 이들 주장의 기저라 할 수 있다.

- by 한길로 著 <일제강점기 조선에 비친 식민지 대만의 허실, 그리고 조선>에서 발췌 




               시정(施政) 초기의 대만총독부 청사 정문, 청조(淸朝)의 포정사 아문을 그대로 접수해 입주하였다.
               청일전쟁 이래 1919년까지 7명의 역대 총독이 여기서 집무를 관장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총독부 회의실, 관청 조직이 비대화되고 업무가 증가하면서 1909년부터 신(新)청사 건립에 착수했다. 


                 옛 대북성(臺北城) 동문(東門) 근방에 소재한 총독관저 전경, 22만엔의 경비로 1901년 준공했다.            
                 이후 수 차례의 증축을 거쳤으며, 국민당 치하에선 영빈관으로 사용되었다. 1908년 7월 촬영 
         

            대만은행(臺灣銀行) 본점, 1899년 설립된 관영 은행으로 식민지 경제 시스템의 중추이자 심장부였다.
            제당업 성장의 조류에 편승해 사업을 전개했으나, 쇼와(昭和) 금융 공황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북시 남쪽 교외에 소재한 전매국(專賣局)과 제약소(製藥所), 아편 ・장뇌 의 독점 판매를 주관했다.  
            전매 수익은 총독부 재정 자립과 흑자의 기반으로 당국마저 현혹시켰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대북 공원에 세워진 4대 총독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郞) 장군의 대리석상, 2차대전 후 철거당했다.  


             총독부 직속 관립 병원으로 1898년 개원한 대북의원(臺北醫院) 입구 전경, 9동의 병실로 구성되었다.
             식민시대 초기 풍토병의 창궐에 맞서 추진된 위생 및 보건 사업은 문명화의 상징으로 선전되었다.   


               대북 기차역, 연와(煉瓦) 석조의 2층짜리 건축물로 1901년 기존 정거장을 이전시켜 개설한 것이다.
               종관철도(縱貫鐵道)의 기착지이며, 역사(驛舍) 자체는 일제 말기에 콘크리트로 재차 신축되었다.


              대북시 북쪽 대직산(大直山)과 원산(圓山) 사이를 흐르는 기륭천(基隆川)에 가설된 명치교(明治橋)
              1901년 대직산 중턱에 대만신사(臺灣神社)가 준공됨과 동시에 교통망 정비의 일환으로 개통했다. 


            기륭항(基隆港) 잔교(棧橋) 광경, 일본 내지(內地)와 연결된 항로의 관문으로 연락선들이 정박중이다.
            1906년 이후 7개년 프로젝트로 축항 공사가 전개되면서 시설을 정비하고, 종관철도와 접속시켰다. 




사진으로 보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장례식 사진집




             메이지(明治) 14년(1881) 정변 후 번벌 체제의 중핵 실세로 부상하던 40대 중후반경의 이토 히로부미
             헌법 제정 작업과 제국의회 개설을 사실상 주도해가며 입헌정체 도입에 분주한 전성기의 모습이다.  


              1896년 1월, 오이소(大磯)의 창랑각(滄浪閣) 별장에서 회동한 이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막말 유신지사의 동지 관계로 출발해 원훈(元勳)에 이르기까지 애증으로 점철된 '라이벌'이었다.


              1898년, 제3차 이토 내각의 출범에 즈음해 대례복 정장 차림으로서 기념 촬영된 총리대신 초상 사진
              청일전쟁 승전과 근대 국민국가 건설의 과업을 달성했으나, 이후 그의 권세는 점차 저하되어 갔다.  


            1901년 12월, 유럽 순방 당시 베를린에서 재독(在獨) 일본인 교민 및 유학생과 회동한 이토 후작 일행   
            독일 체류 기간 카이저는 이토를 접견, '일본의 비스마르크'로 추켜세우며 공적을 치하했다고 한다.


            1909년 11월 1일, 이토의 유해를 실은 군함 아키쓰시마(秋津洲)가 요코스카(橫賀)에 입항중인 광경
            대련(大連)으로부터 당도한 운구를 전달받기 위해 소형 증기선 보트가 함선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해군 사병들의 호위 속에 운구가 부둣가로 상륙해 닻을 내리는 가운데 조포(弔砲)가 발사중인 장면  


             부두로 연결된 잔교(棧橋)를 통과하는 해병 호위대, 이토가(伊藤家)의 유족과 수상 등이 마중나왔다.


             11월 2일 오후 1시 10분경, 요코스카를 출발해 동경의 신바시(新橋) 기차역에 도착한 운구 수송 열차
             황실 칙사(勅使) 호조 우지유키(北條氏恭) 시종을 위시로 황족 및 원로 대신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포차(砲車)에 탑재된 유해를 엄호하며 신바시역을 출발하기 시작한 근위사단 보병 연대와 기마대원


            신바시역 광장을 빠져나가는 호송 행렬과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 비보를 듣고 수만의 인파가 몰렸다.


              도바시(土橋) 부근을 통과중인 광경, 타지에서 횡사한 원훈의 귀환길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포차를 호송한 병사들, 국장(國葬)엔 근위사단 및 제1사단 보병 연대와 해군 소총부대가 동원되었다.


            레이난자카(靈南坂)의 관저로 들어서는 운구 행렬, 장례식 당일까지 이곳에 이틀간 임시 안치되었다.
            운구가 안치된 직후 천황은 칙사로 하여금 조의(弔意)를 표하고, 비단 등 물품을 유족에게 하사했다.


            11월 4일 오전 9시경, 히비야로 이동하면서 가스미가세키(霞が關) 부근을 통과중인 장례 제관(祭官)들
            천황 ・황후로부터 기증받은 다마구시()가 운반되고 있으며, 민간에서도 많은 조화들을 바쳤다.  
           

            생전 고인에게 서훈되었던 각종 훈장 및 기념장들을 받들어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육해군 파견 장교단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勳位 菊花大綬章)을 위주로 내외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만 20점 이상에 달했다.  


                상여를 호위하면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러일전쟁의 무공 수훈자들과 현역 군(軍) 수뇌부 
                상여의 최좌측 선두가 데라우치(寺內) 육군대신이고, 최우측 선두가 도고(東鄕) 해군 제독이다.


             야마가타(山縣) ・오야마(大山) ・이토(伊東) 육해군 3원수를 선두삼아 뒤따르는 각료 및 고관대작들
             동경 위수총독의 지휘하에 의장병 1개 여단이 투입되어 전반적인 장례 행차 등을 감독하게 했다.   


               상여의 이동 장면을 바라보는 시민들, 새벽부터 몰려든 인파로 시가지 연도의 도처가 혼잡해졌다.
               러일전쟁 개선 관병식에 버금간 소동이라는 후문이 나왔을 정도로 추모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히비야 공원의 장례식장에서 운구의 도착을 기다리는 가쓰라(桂) 수상과 이노우에 가오루(井上磬)
              50년지기 맹우의 죽음에 직면한 이노우에만큼 충격과 비탄에 젖었던 원로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육군 대연습 참관차 방일했다가 영국 대표 사절로 참례하게 된 인도군 사령관 키치너(Kitchener) 원수
            막부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구키(九鬼) 남작 ・마쓰카타(松方) 원로가 동석했다.


             의족을 이끌며 식장 경내를 천천히 산보중인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4년 후 수상직에 복귀한다.
             만주 벌판에서 자객의 손에 쓰러져 간 것이 차라리 영광스런 최후가 되었다는 묘한 소감을 남겼다.


            장례식장으로 입장중인 훈장 수행대, 양측으로 조문객과 주일(駐日) 외교단 및 사절들이 도열해 있다.


            상여가 식장으로 입장하면서 주변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사이토(齋藤) 해군대신 등이 수행중인 광경
            유해 안치소는 공원 광장의 남측 방면에 마련한 제례소 정중앙에 가설되어 이승과 작별을 고했다.


            훈장 수행대 후미를 따라 유해 안치소로 걸음을 재촉하는 상여, 오전 11시 10분부터 식이 거행되었다.


            가쓰라 수상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중인 고인의 미망인 우메코(梅子) 여사와 상주(喪主) ・근친 유족들
            외유중이던 장남 히로구니(博邦)가 귀국하지 못한 사정상 차남 분키치(文吉)가 대리 상주로 나섰다. 


              상여를 따라온 대신과 문무(文武) 관원이 공원 광장을 가로질러 차례로 안치소를 향해 나가는 모습    


            안치소로 직행한 상여를 바라보며 기립중인 VIP 조문객들, 천황의 대리 칙사와 시종장까지 참례했다.
            하루 전날은 천장절(天長節)로 맑은 날씨였던 반면, 국장일인 이날엔 구름과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외국 무관단의 입장을 맞아 경례를 교환중인 장성들, 선두가 영국 사절 키치너 원수와 수행원들이다.


               안치소로 이송된 유해가 모셔진 상여, 각 방면에서 기증한 다마구시와 화환들이 주위를 장식했다.
               사후 종1품이 추서되었으며, 비(非) 황족 ・공경(公卿) 출신으로선 최초의 국장 예우를 받았다. 


             장례식장 전경, 운구가 안치되고 식전이 본격 거행되기 앞서 조문객들끼리 서로 배회하는 광경이다.


            고인의 유족과 근친이 안치소에서 참배할 당시의 광경, 기타 대신과 문무관 및 사절들이 대기중이다.


             경내가 번잡해진 가운데 칙임관(勅任官) 및 주임관(奏任官)과 기타 관료 일동이 합동 참배중인 광경


            외국 장교단 일행이 속속 참배를 마치고 나올 무렵의 광경, 9개국 특파 사절과 각국 대사가 참례했다.  


             독일 대사관 무관과 러시아 정교회 주교를 포함한 외국인 조문객들이 참배차 안치소로 향하는 장면    


              화족(華族) ・문무 관료 ・군 장성 ・승려 ・외국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야단법석인 대기장 일대의 광경
              식장에 공식 초청된 VIP 조문객들만 5천여명에 육박했으며, 일반 시민의 인파까지 가세되어 왔다.


            공원 입구로 몰려든 일반 참관자들, 이전까지의 어느 국장에서도 이만한 애도가 표출된 적이 없었다. 


            정오를 넘겨 식전이 종료되자, 부축을 받으며 오이무라(大井村) 묘소로 떠나는 우메코 여사와 유족들
            오전부터 잔뜩 흐렸던 기상 상태 속에서 장례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빗방울이 점차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 2시 30분경, 오이무라의 다니다리(谷垂) 묘지에 마련된 식장으로 입장한 고인의 전용 운구 마차
            좌측엔 미리 도착했던 우메코와 대리 상주 이토 분키치(伊藤文吉) 남작 등 유가족이 착석하고 있다.


             다니다리 묘지의 비명(碑銘), '추밀원 의장 종1위 대훈위 공작 이토공묘(伊藤公墓)'라고 새겨져 있다.
             오후 4시까지 장지에서 최후의 이별을 고하고 영전제(靈前祭)가 치뤄진 다음, 마침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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