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방의 서역정벌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세계사


顯慶 2년(서기 657년)

정월 경술일(21일)에 좌둔위(左屯衛)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이려도(伊麗道) 행군총관으로 삼고 연연(燕然)도호인 위남(渭南) 사람 임아상(任雅相)과 부도호 소사업(蕭嗣業)을 인솔하여 회흘(回紇, 위구르) 등의 군사를 발동하여 북도(北道)에서부터 서돌궐의 사발라(沙鉢羅) 가한을 토벌하게 하였다.

애초에, 우위(右衛)대장군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와 그 친척 형인 좌둔위 대장군 아사나보진(阿史那步眞)은 모두 서돌궐의 추장이었는데, 태종 연간에 무리를 인솔하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서 조서를 내려서 아사나미사와 아사나보진을 유사도(流沙道) 안무(按撫)대사로 삼고, 남도(南道)에서부터 옛날의 무리들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10월에) 소정방이 서돌궐의 사발라 가한을 치는데, 금산(金山, 알타이산)의 북쪽에 도착하여 먼저 처목곤(處木昆)部를 쳐서 그들을 대파하자, 그들의 사근(俟斤, 군사령관)인 난독록(嬾獨祿) 등이 1만여 장(帳)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여 소정방이 그들을 위무하고 그들에게서 1천여 기병을 뽑아서 함께 하였다.

우령군(右領軍)낭장 설인귀(薛仁貴)가 말씀을 올렸다.

"니숙(泥孰)의 部는 본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사발라 가한)에게 복종하지 않아서 아사나하로에게 격파되었고 그들의 처자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지금 唐의 병사들 가운데 아사나하로의 여러 部를 격파하고 니숙의 처자를 얻은 사람들이 있으면 의당 그들을 돌려보내야 하며 이어서 재물을 상으로 덧붙여 내려서, 저들로 하여금 아사나하로는 도적이고 위대한 唐은 그들에게 부모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한다면, 그들이 죽음에 이른다 하여도 힘을 남겨두지 않을 것입니다."

황상(고종)이 이를 좇았다. 니숙은 기뻐하며 從軍하여 함께 아사나하로를 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소정방이 예질하(曳咥河)에 도착하자 사발라(沙鉢羅)는 열 개의 姓으로 구성된 군사 10만을 인솔하고 와서 막으며 싸웠다. 소정방은 唐軍과 회흘의 1만 여를 거느리고 이들을 쳤다. 사발라는 소정방의 군사가 적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곧바로 나와서 이들을 둘러쌌다. 소정방은 보병으로 하여금 남쪽 들판을 점거하게 하고, 삭(矟, 삼지창)을 한군데에 모아서 밖을 향하게 하고 자신은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들판에 진을 쳤다. 사발라는 먼저 보병을 공격하였는데 세 번 부딪쳐 보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는데 소정방이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니 사발라는 대패하였고, 30리를 추격하여 목을 베고 붙잡은 것이 수만 명이었으며, 다음날 군사를 챙겨서 다시 전진하였다.

이에 호록옥(胡祿屋) 등 다섯 명의 노실필(弩失畢, 사령관)의 모든 무리들이 와서 항복하였고, 사발라 혼자서 처목곤굴률(處木昆屈律) 철(啜, 지휘관)의 수백 기병과 더불어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때에 아사나보진(阿史那步眞)이 남쪽 길로 나왔는데, 다섯 돌륙(咄陸) 부락에서는 사발라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아사나보진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마침내 소사업과 회흘의 약라갈파윤(藥羅葛婆閏)에게 명령하여 胡族 군사를 거느리고 야라사천(邪羅斯川)으로 가서 사발라를 뒤좇으라고 하고 소정방은 임아상(任雅相)과 더불어 새로 귀부한 무리들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주었다. 마침 큰 눈을 만났는데, 평지에 2척(尺)이나 되자 군대 안에서는 모두가 맑기를 기다렸다가 나아가자고 청하였지만, 소정방이 말하였다.

"오랑캐들은 눈이 깊다는 것을 믿고 내가 전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군사와 말들을 쉬게 할 것이니, 빨리 이들을 뒤쫓으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에 이를 늦추면 저들은 숨어 들어가서 점점 멀어져서 다시는 뒤쫓을 수 없을 것이니, 날짜를 줄여서 두 배의 공로를 세우는 것은 이때에 있다."

이에 눈을 밟으며 밤낮으로 배나 빠르게 전진하였다.

지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部에 속한 무리들을 거두면서 쌍하(雙河)에 도착하여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와 아사나보진과 합쳤는데, 사발라가 사는 곳과는 200리 떨어졌으며 진을 치고 멀리까지 달려가서 지름길로 간 사람들은 그들의 아장(牙帳, 대장이 머무는 장막)에 도착하였다. 사발라와 그 무리들은 장차 사냥을 하려고 하였는데, 소정방이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틈을 엄습하여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치니, 목을 베고 붙잡은 것이 수만 명이었고 그들의 고독(鼓纛, 지휘할 때 사용하는 북과 깃발)을 얻었는데, 사발라와 그의 아들인 질운과 사위인 염(閻) 철(啜) 등은 벗어나 달아나서 석국(石國, 타슈켄트)으로 갔다.

소정방은 이에 군사를 쉬게 하고 여러 部는 각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도로를 통하게 하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骸骨들을 파묻고 병들고 고생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문하였다. 疆域을 획정하고 생업을 다시 일으키게 하고, 무릇 사발라에게 붙잡혀 온 사람들은 모두 이를 돌려보내니 열 개의 姓을 가진 사람들은 옛날처럼 안도하게 되었다. 마침내 소사업에게 명령을 내려서 군사를 거느리고 사발라를 뒤쫓게 하고 소정방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사발라는 석국의 서북부에 있는 소돌성(蘇咄城)에 도착하였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주리고 지쳐서 사람을 파견하여 진기한 보배를 싸들고 성에 들어가서 말을 사게 하니, 성주인 이저(伊沮) 달관(達官, 귀족)이 거짓으로 술과 밥을 가지고 나와서 영접하며 그들을 유인하여 들어오게 하고서 문을 닫고 그들을 잡아 석국으로 호송하였다. 소사업이 석국에 이르니 석국 사람들이 사발라를 그에게 내주었다.

10월 을축일(11일)에 서돌궐의 땅을 나누어서 몽지(蒙池)와 곤릉(崑陵) 두 개의 도호부를 설치하고 아사나미사를 좌위대장군 ・곤릉도호 ・흥석망(興昔望) 가한으로 삼아서 다섯 돌륙 부락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아사나보진을 우위대장군 ・몽지도호 ・계왕절(繼往絶) 가한으로 삼아서 다섯 노실필 부락을 감독하게 하였다. 광록경(光祿卿) 노승경(盧承慶)을 파견하여 부절을 가지고 책명을 내리고, 이어서 아사나미사와 아사나보진에게 명령을 내려서 노승경과 더불어 여러 성씨를 가진 항복한 사람들을 점거하여, 그 부락의 크고 작기와 명망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삼아서 자사 이하의 관직을 주게 하였다.



덧글

  • 들꽃향기 2010/10/08 20:35 # 답글

    이런 소정방을 술잔치로 꾀여서 죽이고 다리 아래에 묻어버렸다는, 경북 모 지방의 '괴담'을 떠올려버렸습니다. (....)
  • 에드워디안 2010/10/08 20:53 #

    자치통감의 저 기록을 바탕으로 그런 '괴담'이 생겨났을수도...(퍽!)

    들꽃향기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소정방은 무사히 귀국하여 토번 원정에도 참가한 뒤 76세의 나이로 병사했지요. 그런데 아직도 소정방 암살 떡밥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책을 읽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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