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의 남연정벌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세계사


義熙 5년(서기 409년)

3월에 유유(劉裕)가 표문을 올려 南燕을 정벌하고자 하니, 조정에서의 논의는 모두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오직 좌복야(左僕射) 맹창(孟昶) ・거기장군부의 사마(司馬) 사유(謝裕) ・참군 장희(臧熹)는 반드시 이긴다고 여겨 유유에게 가도록 권고하였다. 유유는 맹창을 감중군유부사(監中軍留府事)로 하도록 하였다. 사유는 사안(謝安)의 형의 손자이다.

애초에 부씨(符氏)가 패배하였을 때 왕맹(王猛)의 손자 왕진악(王鎭惡)이 도망오자 임풍(臨灃, 호남성 상식현) 현령으로 삼았다. 왕진악은 말을 타는 것을 잘하지 못했으며, 활을 잡아당기는 것도 심히 약하였으나, 모의와 지략이 있고 과감히 결단을 잘하며, 군사와 나라의 큰일을 즐겨 논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진악을 유유에게 천거하니, 유유가 더불어 이야기 해보고서 그를 좋아하고, 이어서 유숙하도록 하였으며, 다음날 아침에 참좌(參佐)에게 말하였다.

"나는 장군의 가문에 장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왕진악이 그럴 것으로 믿어지오."

즉시 중군장군부의 참군으로 삼았다.


                                                           
                                                         
4월 기사일(11일)에 유유가 건강(建康, 東晋의 수도. 강소성 남경시)을 출발하여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회하(淮河)에서 사수(泗水)로 들어갔다. 5월에 하비(下邳, 강소성 수령현 북쪽 고비진)에 도착하여 선함(船艦)과 치중(輜重)을 남겨두고, 걸어서 진군하여 낭야(琅邪)에 도착하였는데 지나는 모든 곳에 성을 쌓고 군사를 남겨 이를 지키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유유에게 말하였다.

"연인(燕人)이 만약 대현(大峴, 산동성 임구현 남쪽 기산)의 험한 곳을 막거나, 혹은 성벽을 견고히 하고 들판을 깨끗이 하면(청야작전) 대군이 깊숙이 들어가도 공로를 세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차 스스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유유가 말하였다.

"나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였는데, 선비족(鮮卑族)은 탐욕이 많아 원대한 계획을 알지 못하며, 나아갈 때에는 노획한 것을 이롭게 여기고 물러날 때에는 벼의 싹도 아끼니, 우리의 고립된 군대가 멀리 들어와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나간다 하여도 임구(臨朐)를 점거하고 물러난다 하여도 광고(廣固, 南燕의 수도. 산동성 청주시)를 지키는데 불과할 것이니, 반드시 험난한 곳을 지키고 들판을 깨끗하게 못할 것인데, 감히 여러분에게 이것을 보장하겠소."

남연의 주군 모용초(慕容超)가 진(晋)의 군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모여서 회의를 하였다. 정로(正虜)장군 공손오루(公孫五樓)가 말했다.

"오(吳, 晋)의 군사는 날쌔고 과단성이 있어서 빠르게 전투하는 데에서는 유리하니 창검을 가지고 다투어서는 안 되고, 의당 대현(大峴)을 점거하되 들어올 수 없도록 하고, 날짜를 보내며 기다려 그 날카로운 기운을 저지하여야 하며, 그런 다음에 서서히 정예의 기병 2천명을 선발하여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그 양도(糧道)를 끊고, 별도로 단휘(段暉, 兗州刺史
)에게 칙서를 내려 연주(兗州, 산동성 태안시 동남쪽)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梁父山)을 쫓아서 동쪽으로 내려가면서 앞과 뒤에서 그들을 치면, 이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각 수재(守宰, 군수와 현령)에게 명령하여 험한 곳에 의지하며 스스로 지키고, 저축한 물자를 헤아리는 것 외에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없애고 벼의 싹을 제거하여 적에게 물자를 공급받지 못하도록 하면, 저들 교군(僑軍)은 먹을 것이 없는 데다 싸움을 요구하여도 할 수 없으므로 순월(旬月) 사이에 앉아서 제압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 중급 계책입니다.

도적을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 대현으로 들어오게 하였다가 성에서 나가 맞서서 싸우는 이것이 하급의 계책입니다."

모용초가 말하였다.

"올해는 별이 제(齊, 산동성)에 머무르고 있어서 천체가 운행하는 길로 그것을 추측해보니, 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이기게 된다. 손님과 주인(침입한 晋軍과 방어하는 燕軍을 가리킴)은 형세가 다른 것이니 사람의 일을 가지고 그것을 말한다면 저들은 멀리서 와서 피폐하여 그 기세는 오래갈 수 없다.
 
나는 다섯 州의 땅을 점거하여 부유한 백성들과 철갑을 입은 기병 1만 무리를 가지고 있으며, 보리와 벼가 들에 널려있으니, 어찌 싹을 베어 버리고 백성을 옮겨서 무리들이 먼저 스스로 오그라들고 허약하게 하겠는가? 마음대로 대현에 들어오도록 하고서 정예의 기병으로 그들을 유린하는 것만 못하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 염려하는가!"

보국(輔國)장군인 광영왕(廣寧王) 모용하뢰노(慕容賀賴盧)가 어렵고 간절히 간하여도 좆지 않자 물러나 공손오루에게 말하였다.

"반드시 이와 같이 하면 멸망하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릴 것입니다."

태위(太尉)인 계림왕(桂林王) 모용진(慕容鎭)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반드시 기병은 평지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가지고서 의당 대현을 나가서 맞서 싸우시고, 싸우다 승리하지 못하면 오히려 물러나 지킬 수가 없으니, 의당 적을 풀어주어 현산으로 들어오게 하여 스스로 험하고 강한 곳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모용초가 좆지 않았다.

모용진이 나가서 한작(韓淖)에게 말했다.

"주상께서 이미 맞서 싸우셔서 적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며, 또 백성들을 옮기거나 들판을 깨끗이 하려고 하지 못하고, 적을 이끌어 뱃속으로 들어오게 하고, 앉아서 공격하고 포위할 것을 기다리니, 아주 유장(劉璋)과 흡사합니다. 올해 나라가 멸망하면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지만, 경은 중화(中華)의 선비이니 다시 문신을 하도록 하시오."

모용초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모용진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다. 마침내 거(莒, 산동성 거현)와 양보(梁父, 산동성 태안시 동남쪽) 두 군영에서 철수하고서, 성황(城隍)을 수리하고 군사와 군마를 선발하여 그들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유유가 대현을 지나는데도 연의 군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유유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기쁜 기색을 얼굴에 나타냈다. 좌우 사람들이 말하였다.

"공께서 아직 적을 보지도 않고, 먼저 기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유유가 말하였다.

"군사들은 이미 험한 곳을 지났으니 반드시 죽을 각오의 의지를 가질 것이고, 남아있는 양식과 보금자리와 전답은 사람들에게 궁핍해질 걱정을 없게 하고 있소. 오랑캐는 이미 내 손바닥 안에 있소."

6월 기사일(12일)에 유유가 동완(東莞, 산동성 기수현 동북쪽)에 도착하였다. 모용초가 먼저 공손오루와 모용하뢰노와 좌장군 단휘 등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5만명을 거느리고, 임구에 주둔하게 하였다. 晋軍이 대현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가면서, 공손오루에게 기병을 인솔하고 진군하여 거멸수(巨蔑水)를 점거하도록 하였다. 선봉 맹용부(孟龍符)가 더불어 싸워서 그들을 깨뜨리니, 공손오루는 후퇴하여 달아났다.

유유가 수레 4천乘을 왼쪽과 오른쪽의 날개로 삼고, 바야흐로 궤도를 따라서 서서히 진군하여 燕軍과 임구의 남쪽에서 싸웠는데, 해가 기울어서 오후를 향해도 이기고 지는 것은 오히려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참군 호번(胡藩)이 유유에게 말하였다.

"연은 모든 군사들이 나와서 싸우고 있으므로 임구성(臨朐城) 안에 남아서 지키는 군사는 반드시 적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기습병으로 샛길을 따라가서 그 성을 탈취한다면, 이것은 한신(韓信)이 조(趙)를 깨뜨린 방법입니다."

유유는 호번과 자의참군(諮議參軍) 단소(檀韶), 그리고 건위(建威)장군인 하내(河內) 사람 향미(向彌)를 파견하여 군사들을 숨겨서 燕軍의 후방으로 내보내고, 임구를 공격하면서 경무장한 군사들이 스스로 바닷길로 도착했다고 소리쳐 말하였다. 향미는 갑옷을 입고 먼저 올라갔고, 마침내 그들을 이겼다.

모용초가 크게 놀라 홀로 말을 타고 성 남쪽에 있는 단휘에게 갔다. 유유는 이 때 군사들을 풀어 분발하여서 공격하니 연의 무리는 대패하고 단휘 등 대장 10여명의 목을 베자, 모용초가 도망하여 광고로 돌아와 그의 옥새 ・연(輦) ・표미(豹尾)를 챙겼다.
 
유유가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여 광고에 도착하였다. 병자일(19일)에 그들의 큰 성(광고의 外城)에서 이겼다. 모용초가 무리를 데리고 들어와 작은 성(광고의 內城)을 지켰다. 유유가 긴 담을 쌓아서 그곳을 포위하고 지켰는데, 포위망의 높이가 3丈이고, 뚫은 참호는 세 겹이었으며, 항복하거나 귀부한 사람들은 위무하여 받아들이고 현명하고 뛰어난 인재를 가려 뽑으니, 華夷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齊의 양식이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강(長江)과 회하(淮河)의 조운(漕運)을 모두 정지시켰다.

모용초는 상서랑 장강(張綱)을 파견하여 진(秦, 後秦)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계림왕 모용진의 죄를 용서하고서 녹상서사(錄尙書事)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아 불러서 보고 그에게 사과하고, 또한 계책을 물었다. 모용진이 말하였다.

"백성들의 마음은 한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친히 6사(六師)를 감독하다가 패배하여 도망하여 돌아왔으니, 여러 신하들의 마음은 떠났으며 군사들과 백성들의 의기는 상실되었습니다. 진인(秦人)들이 스스로 내부에 우환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군사들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여가가 없을까 걱정입니다.

흩어졌던 군졸 중에서 돌아온 사람도 여전히 수만 명이나 있으니, 의당 황금과 비단을 모두 내어서 그들을 먹이고 다시 한 차례의 전투를 결행하십시오. 만약 천명(天命)이 우리를 돕는다면 반드시 적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 해도 죽는 것 역시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문을 닫고 모두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사도(司徒)인 낙랑왕(樂浪王) 모용혜(慕容惠)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晋軍은 승세를 타고 기세가 백 배나 되는데, 우리는 패배한 군졸들을 가지고 그들을 감당하는 것은 역시 어렵지 않겠소? 진(秦)은 비록 유발발(劉勃勃, 赫連勃勃)과 대치하고 있지만 근심거리가 되기엔 충분하지 않고, 또 우리와 더불어 중원(中原)을 나누어서 점거하고 있으나 형세는 이빨과 입술의 관계와 같아서 어찌 구원하러 오지 않을 수 있겠소? 다만 대신을 보내지 않는다면 많은 군사는 얻지 못할 것입니다. 상서령(尙書令) 한범(韓範)이 연과 진(秦)에서 존중받고 있으니, 의당 파견하여 군사를 빌게 하십시오."

모용초가 좇았다.

가을, 7월에 유유에게 북청기이주자사(北靑 ・冀二州刺史)를 더하여주었다.

남연의 상서인 약양(略陽) 사람 원존(垣尊)과 동생인 경조(京兆) 태수 원묘(垣苗)가 성을 넘어와서 항복하니, 유유가 행참군(行參軍)으로 삼았다. 원존과 원묘는 모두 모용초가 일을 맡기는 사람이 되어서 심복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이 유유에게 말하였다.

"장강(張綱)은 교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만약에 장강을 얻어서 공격의 도구를 만들게 할 수 있다면 광고는 반드시 뽑아버릴 수 있습니다."

마침, 장강이 장안(長安, 후진의 수도)에서부터 돌아오자, 태산(泰山) 태수 신선(申宣)이 그를 붙잡아 유유에게 보냈다. 유유가 누거(樓車)에다 장강을 태우고 그에게 성을 한 바퀴 돌며 소리지르게 하였다.

"유발발이 진(秦)의 군대를 크게 깨뜨려서 서로 구원해줄 수 있는 군사는 없다."

성 안에서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장강(長江) 남쪽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사자를 보내 광고에 도착할 때마다 유유는 번번이 몰래 군사를 보내 밤중에 그들을 영접하였는데, 다음날에는 기(旗)를 펼치고 북을 울리며 도착하니, 북방의 백성들 가운데 무기를 들고 양식을 짊어지고 유유에게 돌아온 사람들이 매일 1천명을 헤아렸고, 성을 포위하는 것이 더욱 급박해졌다.

장화(張華)와 봉개(封愷)는 모두 유유에게 붙잡혔다. 모용초가 대현(大峴) 남쪽 지역을 잘라내어 주고 번신(藩臣)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유유가 허락하지 않았다.

진왕(秦王) 요흥(姚興)이 사신을 파견하여 유유에게 말하였다.

"모용씨(慕容氏)가 서로 더불어 이웃으로 하면 좋겠다고 했는데, 지금 진(晋)이 공격하는 것이 급하여 우리 진(秦)은 이미 철기군(鐵騎軍) 10만명을 파견하여 낙양(洛陽)에 주둔하였으므로, 晋軍이 돌아가지 않으면 마땅히 멀리까지 달려가서 진격해야 하겠소."

유유가 진(秦)의 사자를 불러 말하였다.

"너희 요흥에게 말하여라. 나는 연(燕)을 이긴 다음에 군사를 3년 동안 쉬게 한 다음, 마땅히 관중(關中)과 낙양을 빼앗을 것이니, 지금은 스스로 보낼 수 있지만 곧 속히 올 수 있을 것이다."

유목지(劉穆之, 記室錄事參軍)는 진(秦)의 사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타고 달려와 들어와서 유유를 만나니, 진의 사자가 이미 떠났다. 유유는 자기가 말한 것을 유목지에게 알였다. 유목지가 이것을 탓하며 말하였다.

"평상시에는 일의 크고 작음이 없이 반드시 사전에 꾀를 내도록 하셨으니, 이 문제는 의당 좋게 그리고 자세히 말했어야 되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까?

이 말은 적을 위협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바로 그를 화내게 하기에는 적당합니다. 만약 광고가 아직 함락되지 않았는데 강족(姜族) 오랑캐가 습격해 온다면, 무엇으로써 그들을 맞이해야 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유유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것은 군사기밀이며, 경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서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오. 무릇 군사 작전은 귀신같이 빠른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데, 저들이 만약 구원하러 오겠다고 살펴보았다면 반드시 우리가 아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인데, 어찌 먼저 사자를 파견하여 사전에 이 말을 늘어놓을 수 있겠소? 이는 스스로 과장해서 한 말이오.

진(晋)의 군사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날짜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오. 강족은 제(齊)를 치는 것을 보고, 거의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어서 스스로 보존할 겨를도 없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이오?"

9월에 유유에게 태위(太尉)를 덧붙여주었지만, 유유가 굳게 사양하였다.

애초에, 요흥이 위(衛)장군 요강(姚强)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명을 인솔하고 한범(韓範)을 따라서 낙양에 있는 요소(姚紹)에게 가서 군사들을 합병하여 남연을 구원하게 하였으나, 유발발에게 패배하여 요강의 군사를 뒤쫓아 장안으로 돌아왔다. 한범이 한탄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연을 멸망시키는구나!"

남연의 상서 장준(張俊)이 장안에서부터 돌아와 유유에게 항복하고, 이어서 유유에게 유세하였다.

"연인(燕人)들이 믿고 있는 것은 '한범이 반드시 진(秦)의 군사를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인데, 지금 한범을 붙잡아 그들에게 보이시면 연은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유유는 마침내 표문을 올려 한범을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삼고, 또한 편지로 그를 초빙하였다. 장수(長水)교위 왕포(王蒲)가 한범에게 진(秦)으로 도망갈 것을 권고하니, 한범이 말하였다.

"유유는 포의(布衣)에서 일어나서 환현(桓玄)을 멸망시키고 진(晋) 왕실을 회복시켰으며, 지금은 군사를 일으켜서 연을 정벌하는데 가는 곳마다 붕괴시키고 있으니, 이것은 거의 하늘이 내리신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오. 연이 망하면 진(秦)은 그 다음 차례일 것이오. 나는 두 번 모욕을 당하진 않겠소."

드디어 유유에게 항복하였다.

유유가 한범을 데리고 광고성(廣固城)을 돌자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흐트러지고 꺾였다. 어떤 사람이 연의 주군 모용초에게 한범의 가족들을 죽일 것을 권하였다. 모용초는 한범의 동생 한작(韓淖)이 충성을 다하고 두 마음을 갖지 아니하여서, 한범의 가족과 함께 그의 죄를 사면해주었다.

장강이 유유를 위하여 공격용 도구를 만들었는데, 모든 기이한 재주를 다하였더니, 모용초가 화가 나서 장강의 어머니를 성 위에다 매달고 사지를 절단하였다.

義熙 6년(서기 410년)

봄, 정월 초하루 갑인일에 남연의 주군 모용초가 천문(天門, 광고 內城의 南門)에 올라 여러 신하들과 성 위에서 조회를 하였다. 을묘일(2일)에 모용초가 총희 위(魏)부인과 성 위에 올라 진(晋)의 군사들이 강성한 것을 보고서, 손을 잡고 마주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작이 간하였다.

"폐하께서는 막힌 액운을 만난 것이니 바로 응당 스스로 강해져서 씩씩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의지를 견고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더욱이 아녀자처럼 눈물을 보이시다니요?"

모용초가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 사과하였다. 상서령 동선(董詵)이 모용초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자, 모용초가 화를 내며 그를 가뒀다.

모용하뢰노(慕容賀賴盧)와 공손오루(公孫五褸)가 땅굴을 만들고 나가서 晋軍을 공격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하였다. 성문은 오랫동안 닫혀있고, 성 안의 남녀들은 다리에 병들어서 약한 사람들이 태반이었으며, 나가서 항복하는 사람이 서로 계속되었다. 모용초가 연(輦)을 타고 성에 오르니, 상서 열수(悅壽)가 모용초에게 유세하였다.

"지금 하늘이 오랑캐(東晋)를 도와 포학하게 되었으며 전쟁하는 군사들은 초췌하여 오직 궁색한 성만 지킬 뿐, 외부에서 구원하는 것도 절망적이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역시 알 만합니다. 진실로 역수(歷數)에는 끝이 있어서 요순(堯舜)도 자리를 피해주었는데, 폐하께서는 어찌 변통의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용초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쇠퇴함과 흥왕함은 운명이다. 내 차라리 검을 휘두르다 죽을지언정, 옥을 입에 물고 살지는 않을 것이다."

정해일(5일)에 유유가 모든 무리들을 데리고 성을 공격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오늘은 왕망일(往亡日)이라서 군사를 움직이는 데는 이롭지 못합니다."

유유가 말하였다.

"내가 가서 저들을 망하게 하는데, 어찌 이롭지 못하겠는가?"

사방에서 그들을 급히 공격하였다. 열수가 문을 열고 진(晋)의 군사를 받아들이고, 모용초가 주위에 있는 수십 기병과 함께 성을 넘어 포위를 뚫고 나가서 도주하였으나, 그들을 추격하여 붙잡았다. 유유가 항복하지 않은 죄를 헤아리자 모용초는 정신과 안색이 태연해하며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만 유경선(劉敬宣)에게 부탁할 뿐이었다.

유유는 광고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은 것에 화를 내며, 그들을 모두 파묻고 처와 딸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고자 하였다. 한범이 간하였다.

"진(晋) 황실이 남쪽으로 옮기면서 중원은 솥의 물이 끓듯이 소란하여 병사들과 백성들이 도움 받을 곳이 없게 되자 강한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귀부하였고, 이미 군신이 되었으면 반드시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해야 합니다. 저들은 모두가 의관을 제대로 갖춘 옛날의 족속이며 먼저 돌아가신 황제(西晋의 역대황제)께서 남겨둔 백성들인데, 지금 왕의 군대가 조문을 하며 정벌하고서 그들을 다 파묻으면 어디로 돌아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건대, 서북의 사람들(後秦)이 다시 와서 소생할 희망을 갖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유유가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사죄하였지만 그러나 오히려 왕공(王公) 이하 3천명의 목을 베었고, 몰입(沒入)한 가구가 1만여 명이었으며, 그들의 성황(城隍)을 없애고, 모용초를 호송하여 건강(建康)에 도착하자, 그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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