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남북간 루트 단절의 내막


철도, 통신의 단절

1945년 8월 24일, 소련군은 전곡~동두천 사이의 38도선상에서 경원선(京元線) 철도를 차단하고 南下열차를 전곡역까지만 운행케 하였다. 이어 25일에는 금교(金郊)에 70명, 신막(新幕)에 300명의 소련군이 진주하여 경의선(京義線)을 차단하였으며 26일에는 토해선(土海線)과 사리원선(沙里院線)을 차단했다. 소련군의 철도 절단에 앞서 해방이 가져온 무질서와 혼돈으로 8.15 당일부터 부산~안동간, 서울~청진간 열차의 운행이 중지된 바 있다. 남북의 전화 및 통신은 45년 9월 6일 소련군에 의해 해주에서 완전 차단됐다.

우편물 교환의 정지

38선까지 진주한 소련군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금지하면서 우편물 교환도 금지했다. 그러니까 그 시기는 8월 하순부터 9월 초순경 사이로서, 38선 전역에 걸쳐 우편물 교환이 완전히 정지됐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구체화하기 위한 '美蘇공동위원회'의 개최로 우편물 교환에 대한 美蘇 軍政당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해방 다음해인 1946년 3월 15일 경의선 개성역에서 남북 우편물 교환이 재개되었다. 그 후 교환 장소는 여현역으로 바뀌었다.

이 남북 우편물 교환은 1주일에 2,3차례씩 6.25 발발 3일전까지 계속되다가 전쟁 발발을 계기로 완전히 두절되고 말았다. 4년 3개월 동안의 남북 우편물 교환기간 중 남한에서 북한으로 보낸 것이 192만여통, 북한에서 남한으로 보내온 것이 96만여통이었는데 북한은 이 남북 우편물을 정치적 선전도구로 이용하고, 또 남한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은 사람을 '반동'으로 몰기도 해 무용론이 주장되기도 했었다.

물자교역의 중지

소련군은 38선에 진주하자 물자 이동의 금지, 즉 교역을 금지시켰는데 38선이 워낙 부자유스런 인위적 장벽이었던 관계로 38선을 사이에 둔 일반의 물자교역 욕구는 대단히 강렬했으며, 또한 '38密交易'이 38선 도처에서 성행하자 소련 군정 당국은 1947년 5월 22일 美軍政과 합의하여 남북간의 물자교류를 정식으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南北交易은 당국의 허가를 받은 정식 교역으로 바뀌었고, 급기야 선박을 이용한 교역 형태로까지 진전됐다. 결국 48년에는 對外 무역선을 이용한 일종의 무역으로까지 확대되려다, '앵도환 사건'으로 무역선에 의한 교역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앵도환 사건이란 남한의 무역업자가 북한 당국의 무역대행기관인 '조선商社'와 상담을 벌여 당시 '조선郵船'으로부터 2천톤급 선박인 앵도환을 빌려 30여만달러 상당의 광목 등을 실어 북한에 보냈다가, 물자와 함께 배마저도 모두 북한 당국에 압류당하고 만 사건이다. 이 앵도환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남북교역은 말살되고 말았다.

앵도환 사건이 터진 후에도 남북교역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지 않아 38선상에서 소규모로 계속되었지만, 얼마 후 남북밀교역을 통해 전략물자가 북한으로 밀송된 사건이 軍 당국에 의해 적발되자, 1949년 3월 30일 남한 정부는 정식으로 남북교역을 금지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단수(斷水)

연간 80여만 섬의 양질의 벼를 거두어왔던 연백평야는 그 관수(灌水)를 구암 저수지로부터 해왔는데,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생기자 공교롭게도 그 저수지만이 북한 지역에 들어가게 됐다. 그러나 동 저수지를 관장한 북한 당국은 해방 다음해까지는 원만하게 통수를 해줬으나, 47년 3월에 이르러 돌연 단수해 버렸다. 이유는 水稅 문제였지만 북측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 있어 미군정 당국에서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던 중, 결국 단수된 것이다. 그 후 농민 대표들이 평양을 찾아가 사정을 하는 한편, 미군정 측에 진정한 결과 47년 5월 9일 북측에서 구암 저수지의 수문을 열어 연백평야 일대에 관수가 재개됐다. 북한은 그 다음해에도 단기간씩 연백평야에 대한 관수를 중단하곤 했지만, 농사에 큰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단전(斷電)

신생 대한민국의 수립을 위한 남한의 총선거가 성공리에 끝난 지 나흘 후인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에 대한 보복조치의 하나로 해방 후 3년 가까이 보내주던 送電을 중단해버렸다.

해방 당시 공업 동력으로서의 발전 시설은 87.6%가 북한에 편재해 있었고 남한은 겨우 12.4%에 불과했기 때문에, 부득이 북한으로부터 총수요량의 60~66%를 受電했고 이것을 합쳐 약 60만kw의 전력을 가지고 지탱해왔다. 그 후 47년 초에는 북한의 전력 공급이 크게 늘어나 평균 전력 9700kw까지 최고 기록을 보이기도 하다가 점차 줄어들던 중, 斷電이 된 것이다. 북한의 단전으로 남한의 전력 사정은 극도로 악화돼 일반 가정은 거의 실명 상태에 빠졌고, 생산 공장도 다수가 문을 닫았다. 이리하여 남한에서는 제한송전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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