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孝武帝 劉駿의 인간성


황상(孝武帝)은 이미 문제(文帝)의 3년상이 끝난 직후부터 사치와 음란함을 스스로 제멋대로 하며 공사를 일으켜 짓는 일이 많았다 ...침실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여서 가깝거나, 멀거나, 높거나, 천하거나를 가리지 않았는데,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흘러 다녀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정의 정치를 친히 살피고 대신들에게 맡기지 않았지만, 심복들의 눈과 귀에 기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법흥(戴法興)은 자못 옛날과 지금의 일을 매우 잘 알고 있어서, 평소에 가깝게 대우받았다. 노군(魯郡) 사람 소상지(巢尙之)는 명망 있는 선비들의 마지막에 있는 사람으로 문장과 역사를 두루 익혔는데, 황상이 알아주는바 되어 또한 중서통사사인(中書通事舍人)으로 삼았다.

모든 선발하고 임명하며, 주살하고 상을 내리는 큰 처리할 일에서는 모두 대법흥 ・소상지와 더불어 품은 생각에 참여케 하였으며, 안팎의 잡다한 일은 대부분 대명보(戴明寶)에게 맡겼다.

광릉(廣陵)이 평정되었다는 소식(竟陵王 劉誕의 반란이 진압되었음을 의미한다)을 듣고 선양문(宣陽門, 建康城의 南門)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들에게 모두 만세를 부르도록 시켰다. 시중 채흥종(蔡興宗)이 황상의 연(輦)을 모시고 있었는데 홀로 만세를 외치지 않자, 황상이 돌아보며 말하였다.

"너는 왜 혼자서 외치지 않느냐?"

"폐하께서 오늘 눈물을 흘리며 주살을 행하셔야만 하는데, 어찌 모두 만세를 부르게 할 수 있습니까?!"

...광릉성 안에 사는 병사와 백성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경지(沈慶之)는 키가 5척 이하면 살려두고, 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군사들에게 포상으로 삼도록 청하였는데, 그래도 죽인 것이 무려 3천여 명이었다. 참수한 머리들을 석두성(石頭城, 建康의 서북 교외)의 남쪽 언덕에 모아서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이부랑(吏部郞) 강지연(江智淵)은 은귀비(殷貴妃)의 시호를 논의하면서 '회(懷)'라고 하였는데, 황상은 아름다움을 다 표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매우 이를 악물었다. 한 번은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말을 타고서 귀비의 묘에 이르렀는데, 친히 채찍을 들어서 묘 앞에 있는 석주(石柱)를 가리키며 강지연에게 말하였다.

"이 위에 '懷'자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

강지연은 더욱 두려워하였고, 결국 걱정하다 죽었다. 

연회를 자주 열어서 자리에 모인 사람을 모두 깊이 취하도록 만들었으며, 조롱하고 농담 짓거리를 하는데 절도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을 허물없이 대하고 업신여기길 좋아하였는데, 태재(太宰) 유의공(劉義恭)으로부터 그 아래로 더럽힘과 모욕을 면치 못하였다. 항상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왕현모(王玄謀)를 촌뜨기라 불렀고, 복야(僕射) 유수지(劉秀之)를 구두쇠라 하였으며, 안사백(顔師伯)을 뻐드렁니라고 하며, 그 외에도 난쟁이 ・꺽다리 ・뚱보 ・말라깽이 같은 것이 모두 조정 대신들을 낮춰 부르는 별명이었다.

사람됨은 기민하고 용감하며 결단력이 있었고, 학문이 넓어서 사물에 통달하고 문장을 쓰는 것도 화려하고 빨랐는데, 책과 상주문을 읽을 때 7행을 함께 내려갈 수 있었다. 또한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였으나, 사치스런 욕심에 절도가 없었다.

기존의 건강궁(建康宮)을 크게 수리하여 토목에 수놓은 비단을 입히고, 측근의 총애하는 첩과 신하에게 포상을 내려서 궁전의 창고를 다 비웠다. 고조(高祖, 劉裕)가 거주하였던 음실(陰室)을 허물고 그곳에 옥촉전(玉燭殿)을 세우기 위해 신하들과 더불어 구경하였는데, 시중 원기(袁覬)가 고조의 검소한 덕망을 칭송하자, 황상은 응답하지 않은채 홀로 중얼거렸다.

"농사나 짓던 노인네가 이것을 얻었으니, 이미 과분하겠지." 

말년엔 재물과 이익을 더욱 탐하여서, 刺史 ・2천석 녹봉의 관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반드시 일정한 정도의 봉헌을 하도록 만들고, 또 저포(樗蒲, 도박의 일종)놀이를 하여 돈을 거둬들이는데, 다 없어져야 마침내 중지하였다. 종일토록 술을 마셨고 깰 때는 잠깐이었다. 항상 안석에 기대어 혼미한 채 잠을 잤지만, 혹여 밖에서 상주하는 일이 있으면 곧 숙연하게 용모를 정돈하여 술 마신 자태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고, 감히 해이하고 나태하지 못했다.


덧글

  • 들꽃향기 2010/11/21 06:09 # 답글

    송대 2대황제 같은 경우는 차라리 아버지 유우가 황제가 늦게 된 만큼 사가의 쾌락을 잊지 못해서;;라는 이해(?)라도 가능하겠는데, 문제 이후로도 이런 쾌락중심주의적 행태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 유송 황실의 가풍이 원체 그런가 하는 망상까지 듭니다. ㄷㄷ
  • 에드워디안 2010/11/21 06:51 #

    송의 유씨와 제의 소씨가 그토록 기행을 일삼았던 것도, 이들이 중원에 거주했을 당시 이민족들의 야만적 풍습에 물들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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