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10국시대 南楚 멸망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세계사


초왕(楚王) 마희악(馬希萼)은 즉위하고 나자 옛날의 원한을 많이 생각하여 살육하는데 절도가 없었고, 밤낮으로 멋대로 술을 마시고서 거칠게 음란하였으며, 군부(軍府)의 일을 모두 마희숭(馬希崇)에게 위임하였다. 마희숭이 다시 사사롭게 굽혀서 많은 일을 처리하니, 정치와 형벌은 문란하였다.

부고(府庫)는 이미 혼란에 빠진 군사들 속에서 다 없어졌고, 백성들의 재산을 적몰(籍沒)하여 사졸들에게 상으로 내려 주었으며, 혹은 그들의 문을 봉(封)하고 그것들을 빼앗았는데 사졸들은 오히려 고르게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원망하였으며, 비록 낭주(朗州, 호남성 상덕시)의 옛날부터 있던 장좌(將佐)들 가운데 마희악을 좇아서 온 사람들이라도 역시 모두 기뻐하지 않고 떠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장서기(掌書記) 유광보(劉光輔)가 당(唐, 南唐)에 들어가서 공물을 바치니 당주(唐主, 南唐 元宗 李璟)는 그를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유광보가 비밀리에 말하였다.

"호남(湖南)의 백성들이 피로하고 주군은 교만하니, 빼앗을 만합니다."

당주가 마침내 영둔(營屯)도우후 변호(邊鎬)를 신주(信州, 강서성 상요시) 자사로 삼고, 군사를 거느리고 원주(袁州, 강서성 의춘시)에 주둔하게 하며 몰래 나아가서 (초나라를) 빼앗을 것을 꾀하였다.

소문사(小門使, 문지기) 사언옹(謝彦顒)은 본래 마희악의 노복이었는데, 얼굴이 으뜸이어서 마희악에게 총애를 받았기에 처첩들과 섞여 앉아 있기에 이르렀고, 은총을 믿고서 전횡하였다. 항상 마희숭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혹은 그의 등을 어루만졌으므로, 마희숭은 이를 악물었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부(府)에서 연회를 할 때에 소문사는 무기를 잡고서 문 밖에 있는 것인데, 마희악은 사언옹을 참여하여 앉게 하고 혹은 제장들의 윗자리에 있게 하니 제장들이 모두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희악은 부사(府舍)가 불에 타서 없어졌으므로, 낭주정강(朗州靜江) 지휘사인 왕규(王逵)와 부사(副使)인 주행봉(周行逢)에게 명령하여 거느리는 부대의 군사 1천 명을 인솔하고 이것을 짓게 하였는데, 잡아다가 부리는 것이 아주 수고롭게 하였고 또 상을 내리는 것도 없어서, 사졸들이 모두 원망하며 가만히 말하였다.

"죄수가 사형에서 면제되면 노역을 한다. 우리들은 대왕을 좇아서 만번 죽음에서 벗어나 호남을 빼앗았는데, 무슨 죄를 졌다고 죄수처럼 부림을 당하는가? 또 대왕은 매일 술에 취해 있으니, 어찌 우리들이 수고하고 고생하는지를 알겠는가?!"

왕규와 주행봉이 이를 듣고 서로 말하였다.

"무리들이 원망하는 것이 깊으니 일찍 계책을 세우지 아니하면, 화(禍)가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오."

3월 임신일(11일) 아침에 그 무리를 인솔하고 각기 장가부(長柯斧, 긴 자루를 가진 도끼)와 백정(白梃, 흰 몽둥이)을 잡고서 낭주로 도망하여 돌아갔다. 그 때 마희악은 술에 취하여 아직 깨지 않아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감히 알리지 못하였다가, 계유일(12일)에 비로소 이를 보고하였다. 마희악은 호남지휘사 당사저(唐師翥)를 파견하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곧바로 낭주에 도착하였는데 왕규 등은 그가 피로하고 궁핍한 틈을 타고서 군사를 숨겼다가 멋대로 치게 하니, 사졸들은 죽거나 다쳐서 거의 다 없어졌지만 당사저는 벗어나서 돌아왔다.

왕규 등은 유후(留後)인 마광찬(馬光贊)을 쫓아내고, 다시 마희악의 형의 아들인 마광혜(馬光惠)를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마광혜는 마희진(馬希振, 馬殷의 적장자)의 아들이다. 조금 있다가 마광혜를 받들어 절도사로 삼고, 왕규 등은 하경진(何敬眞)과 제군(諸軍) 지휘사 장방(張倣) 등과 더불어 군부(軍府)의 업무에 참여하고 결정하였다. 마희악이 이 상황을 당(唐, 南唐)에 알리니 당주(唐主)는 사자를 파견하여 두터운 상을 내리고 그를 불러서 유시를 하였는데, 왕규는 그 상을 받고 사자를 놓아 주었으며 그 조서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당에서는 힐문하지 않았다.

마광혜는 어리석고 나약하며 술을 즐겨 제장들을 복종시킬 수가 없었는데, 왕규 ・주행봉 ・하경진은 진주(辰州) 자사인 여릉(廬陵, 강서성 길안시) 사람 유언(劉言)이 날래고 용감하여 만이(蠻夷)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맞아들여서 부사(副使)로 삼고자 하였다. 유언은 왕규 등이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하였다.

"가지 않으면 장차 나를 공격할 것이다."

마침내 단기(單騎)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미 도착하고 나자 무리들이 마광혜를 폐출하여 당으로 보내고, 유언을 추대하여 권무평유후(權武平留後)로 삼고 표문을 올려서 당에 정절(旌節)을 요구하였지만, 당인(唐人)이 이를 허락치 않자 대신 후주(後周)에 번속(藩屬)을 청하였다.

초왕(楚王) 마희악은 이미 장사(長沙, 楚의 수도. 호남성 장사시)에서 승리했지만(찬탈에 성공한 것을 의미), 허가경(許可瓊)에게 상을 내리지 않아 이를 두고 허가경이 원망할까 의심하며 내보내어 몽주(蒙州, 광서성 몽산현) 자사로 삼았다. 마보도지휘사 서위(徐威) ・좌우군마보사 진경천(陳敬遷) ・수군도지휘사 노공관(魯公綰) ・아내시위지휘사 육맹준(陸孟俊)을 파견하여 부병(部兵)을 거느리고 담주성(潭州城, 長沙)의 서북쪽 귀퉁이에 영채(營寨)를 세워 낭주의 군사를 대비케 하였는데, 부리는 사람을 위무하는 사람이 없어서 장졸들은 모두 노하여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마희숭은 그들이 모의하는 것을 알았다.

9월 무인일(19일)에 마희악이 장리(將吏)들에게 연회를 베푸는데 서위 등이 참여하지 않자, 마의숭은 질병이 있다고 말하고 도착하지 않았다. 서위 등은 사람을 시켜서 먼저 발로 차고 이로 무는 말 10여 마리를 몰아서 부중(府中)으로 들여보내고, 스스로 그 무리를 인솔하고 도끼와 흰 몽둥이를 잡고서 말을 붙잡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갑자기 좌석으로 들이닥쳐 멋대로 사람들을 치니, 넘어진 사람이 땅에 가득하였다.

마희악은 담장을 넘어서 달아났지만 서위 등은 이를 잡아 가두었으며, 사언옹(謝彦顒)을 잡아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의 살갗을 벗겼다. 마희숭을 세워서 무안유후(武安留後)로 삼고, 군사를 멋대로 풀어서 크게 노략질하게 하였다. 마희악을 형산현(衡山縣, 호남성 형산)에 유폐시켰다.

유언(劉言)은 마희숭이 섰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파견하여서 담주로 가게 하면서 겉으로는 그가 찬탈한 죄를 토벌한다고 말하였는데, 임오일(23일)에 익양(益陽, 호남성 익양시)의 서쪽에 진을 쳤다. 마희숭은 두려워서 계미일(24일)에 군사 2천을 발동하여 그를 막았으며, 또 사자를 파견하여 낭주(朗州)로 가게 하여 화의하기를 요구하게 하며 인번(隣藩)이 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장서기(掌書記)인 계림(桂林) 사람 이관상(李觀象)이 유언에게 유세하였다.

"마희악의 옛날 장좌(將佐)들이 아직도 장사(長沙)에 있는데, 이들은 반드시 공(公)과는 이웃이 되려고 하지 아니할 것이니 먼저 마희숭에게 격문을 보내어 그들의 머리를 베어오게 하고, 그렇게 한 다음에 호남을 도모하면 두 곳을 다 가질 수 있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유언이 이를 좇았다.

마희숭은 유언을 두려워하여서 즉시 도군판관(都軍判官) 양중민(楊仲敏) ・장서기 유광보(劉光輔) ・아내(牙內)지휘사 위사진(魏師進) ・도압아(都押牙) 황경(黃勍) 등 10여 명의 머리를 베어, 전에 진양현(辰陽縣) 현령이었던 이익(李翊)을 파견하여 수급들을 싸가지고 낭주로 보냈다. 도착하니 부패하였으므로 유언과 왕규 등은 모두 양중민 등의 머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화가 나서 이익을 나무라자, 이익은 두려워서 자살하였다.

마희숭은 이미 자리를 이어받고 나서 역시 멋대로 술을 마시고 음란한 짓을 하니 정치하는 일은 공정치 못하였고, 말씨는 대부분 허망하게 고쳐지자 그 나라 사람들이 붙지 아니하였다. 애초에 마희악이 장사에 들어가면서 팽사고(彭師暠, 蠻族 추장)는 비록 죽음에서는 면제되었지만 오히려 등에 곤장을 맞고 쫓겨나서 민(民, 庶民)이 되었는데, 마희숭은 팽사고가 반드시 이를 원망할 것이라 생각하고 마희악을 형산(衡山)으로 보내면서 팽사고가 그를 죽이기를 바랬지만, 팽사고가 말하였다.

"나로 하여금 임금을 시해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받들고 모시기를 더욱 삼갔다. 병술일(27일)에 형산에 도착하니 형산지휘사인 요언(寥偃)은 요광도(寥匡圖)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계부(季父)인 절도순관(節度巡官) 요광응(寥匡凝)이 모의하여 말하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마씨의 은혜를 입었고 지금 마희악이 연장자로 쫓겨났으니 반드시 화를 면치 못할 것인데, 어찌 서로 그를 보필하지 않겠는가?"

이에 장호(莊戶, 莊園에 거주하는 사람)와 향인(鄕人)들을 인솔하여 모두 군사로 삼고, 팽사고와 더불어 마희악을 세워서 형산왕(衡山王)으로 삼았으며, 현부(縣府)를 행부(行府)로 삼고, 강을 차단하는 목책을 세우고 대나무를 엮어서 전함을 만들었고, 팽사고를 무청(武淸)절도사로 삼았으며,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며칠 사이에 1만여 명이 이르렀는데, 주현(州縣)에서 많은 사람이 이에 호응하였다. 판관 유허기(劉虛己)를 당(唐, 南唐)에 파견하여서 원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서위 등은 마희숭이 하는 짓을 보고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고, 또 낭주와 형산이 압박할까 두렵고 하루아침에 죽고 패배하여 모두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서, 마희숭을 살해하여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마희숭이 이것을 조금 깨닫고 크게 두려워하여 비밀리게 객장인 범수목(范守牧)을 파견하여 표문을 받들고 당(唐)에 가서 군사를 요청케 하였는데, 당주(唐主)는 변호(邊鎬)에게 명령하여 원주(袁州, 강서성 의춘시)에서부터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장사(長沙, 潭州)로 가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변호가 군사를 이끌고 예릉(醴陵, 호남성 예릉시)에 들어오자, 마희숭은 사자를 파견하여 호군(犒軍)하였다. 임인일(14일)에 마희숭은 천책부(天策府)학사 탁발항(拓拔恒)을 파견하여 편지를 받들어 가지고 변호에게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탁발항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오래도록 죽지 못하였더니, 마침내 어린 애(마희숭) 때문에 항복 문서를 보내게 되었구나!"

계묘일(15일)에 마희숭은 동생과 조카를 인솔하고 변호를 영접하였는데 먼지가 이는 것을 바라보고 절하였으며, 변호는 말에서 내려서 조서라고 말하면서 그를 위로하였다. 갑진일(16일)에 마희숭 등은 변호를 따라 담주성(潭州城)에 들어갔는데 변호는 유양문루(瀏陽門樓)에서 숙소를 정하고, 호남(湖南, 楚國)의 장리(將吏)들이 축하를 마치자 변호는 모두에게 후하게 하사하였다. 이 때 호남에서는 기근이 들었는데 변호는 마씨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어서 이들을 진휼하니, 초인(楚人)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계축일(25일)에 당의 무창(武昌)절도사인 유인섬(劉仁贍)이 전함 200척을 인솔하여 악주(岳州, 호남성 악양시)를 빼앗고 항복하거나 귀부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위무하였는데, 楚人들은 그들이 망해 버린 것을 잊었다. 유인섬은 유금(劉金)의 아들이다. 당(唐)의 백관들이 함께 호남의 평정을 축하하니, 기거랑(起居郞) 고원(高遠)이 말하였다.

"우리는 초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그곳을 빼앗았으니, 아주 쉬웠소. 제장들의 재간을 보니 다만 이를 지키는 것이 어려울까 두렵소."

고원은 유주(幽州) 사람이다. 사도(司徒)로서 치사(致仕)한 이건훈(李建勳)이 말하였다.

"화란(禍亂)은 그 시작이 여기에서부터일 것이다!"

당주(唐主, 南唐 元宗 李璟)는 즉위한 이래로 아직 일찍이 교묘(郊墓)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예관(禮官)이 이를 청하였더니, 당주가 말하였다.

"천하가 한 집안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런 다음에 감사의 말씀을 올리자."

한 번에 초를 빼앗게 되자 여러 나라는 깃발로 가리키기만 하면 평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위잠(魏岑)이 연회에서 시중을 들면서 말하였다.

"신은 어려서 원성(元城, 하북성 대명현)을 유람하였고 그 풍토를 즐거워하였는데, 폐하께서 중원을 평정하기를 기다려서 빌건대 위박(魏博)절도사를 시켜 주십시오."

당주가 이를 허락하였더니, 위잠이 종종걸음으로 내려가서 절을 하고 감사해 하였다. 그 주군이 교만하였고, 신하가 아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마희악(馬希萼)은 당인(唐人)들이 자기를 세워서 담주(潭州)의 통수(統帥)로 만들어줄 것을 희망하였는데, 담주 사람들은 마희악을 미워하여 함께 변호(邊鎬)를 초청하여 통수로 삼고, 당주는 마침내 변호를 무안(武安, 담주)절도사로 삼았다. 변호는 마희숭(馬希崇)을 재촉하여서 그 가족을 인솔하고 당으로 들어가서 조현케 하였는데, 마씨는 가족을 모아놓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변호에게 많은 뇌물을 주려고 하면서 장사에 남아 살게 해 달라고 상주하게 하니, 변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였다.

"국가(國家, 南唐主)와 공(公, 馬氏)의 집안은 대대로 구적(仇敵)이었던 것이 거의 60년인데, 그러나 아직 일찍이 감히 속으로 공의 나라를 넘보지 않았소. 지금 공의 형제가 서로 싸워서 곤궁한 일이 스스로 돌아온 것이며 만약에 다시 두 번, 세 번 반복한다면, 아마도 헤아릴 수 없는 걱정거리가 있을 것이오."

마희숭은 응답하지 않고, 11월 신유일(3일)에 종족과 장좌(將佐) 1천여 명을 거느리고 통곡하며 배에 올랐는데 보내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니, 내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당주(唐主)는 진남(鎭南)절도사 ・겸중서령(兼中書令)인 송제구(宋齊丘)를 태부(太傅)로 삼고, 마희악을 강남서도(江南西道) 관찰사로 삼아 홍주(洪州, 강서성 남창시)에서 진수하게 하고 이어서 초왕(楚王)으로 작위를 하사하였으며, 마희숭을 영태(永泰)절도사로 삼아 서주(舒州, 안휘성 잠산현)에서 진수하게 하였다. 호남(湖南, 楚)의 장리(將吏)들 가운데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사(刺史) ・장군 ・경감(卿監)으로 벼슬을 주고, 낮은 사람은 차례로 관직을 주었다.

당주는 요언(寥偃)과 팽사고(彭師暠)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서 요언을 좌전직군사(左殿直軍使) ・내주(萊州, 산동성 내주시)자사로 삼고 팽사고를 전직(殿直)도우후로 삼고 사여(賜與)한 것이 아주 두터웠다. 호남의 자사들이 모두 당에 들어와서 조현하였는데, 영주(永州, 호남성 영주시) 자사인 왕윤(王贇)만이 홀로 늦게 도착하자, 당주가 그를 독살하였다.

당은 호남에 있던 금백(金帛), 진기한 노리개, 창고에 있는 곡식에서 주함(舟艦) ・정관(亭館) ・꽃과 과일 가운데 아름다운 것까지 모두 거두어 들여 금릉(金陵, 南唐의 수도. 강소성 남경시)으로 옮기고, 도관랑중(都官郎中) 양계훈(楊繼勳)을 파견하여 호남의 조부(租賦)를 거두어다가 수병(戍兵)들에게 공급하였다. 양계훈 등은 가혹하고 각박하게 처리하는데 힘써서, 호남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덧글

  • 들꽃향기 2010/11/29 16:12 # 답글

    초기 창업주인 마은의 현명했던 지역발전책에 비해서 남초의 후계자들은 정말로 호부견자 소리밖에 더할게(....)

    사실 황인우 선생의 경우 중국의 지나친 중앙집권성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5대10국의 초창기 군주들을 들어 10국이 지역개발과 경제부흥에 힘썼다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2대, 3대 군주들을 보면 왜 그들이 나라를 빼앗길 만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더군요. ㄷㄷ

    개인적으로 남초를 멸망시킨 남당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실패'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남초 자체를 멸망시킨 것은 실패가 아니었지만, 본문에 언급해주신대로 호남의 부를 남당 조정의 사치를 위해 취렴하고 주변국의 경계를 삼으로서, 나중에 화북세력과의 대결에서 호남의 부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주변국의 공조를 얻어내지 못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ㄷㄷ
  • 에드워디안 2010/11/29 18:55 #

    그래서 호남 인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저로부터 불과 1년 후에 왕규와 주행봉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남당의 주둔군을 모두 축출하는 사태가 일어났죠. 이후 호남은 주행봉의 지배 하에 후주에 번속되어 반독립국으로 존속하다가 963년 송나라에 병합되었는데, 짧은 기간이나마 남당의 착취가 극심했던 탓인지, 이전 남초 시절과 같은 번영을 회복하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남당은 황제 이경의 총애를 받은 송제구, 풍연사 등이 국정을 전횡하였던데다 상벌의 기준이 엄격치 못해 군기가 해이해지는 등, 내부 모순이 점차 심각해지던 상황이었다고 하네요.
  • 위장효과 2010/11/29 17:14 # 답글

    결국 남당또한 송 태조에게 빼앗긴 바 되었으니...
  • 에드워디안 2010/11/29 18:55 #

    역사는 돌고 도는 법이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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