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위조 세계사


南唐 昇元 3년(서기 939년)

당(唐, 南唐)의 여러 신하들과 강왕(江王) 서지증(徐知證) 등이 누차 표문을 올려 당주(唐主, 南唐 烈祖)에게 姓을 이씨(李氏)로 회복하고 당의 종묘(宗廟)를 세우라고 요청하자, 정월 을축일(23일)에 당주가 이를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요청하자, 당주가 말하였다.

"존호는 헛된 미명(美名)이고, 또 옛날 것이 아니오?"

드디어 받지 않았다. 이후로부터 자손들이 모두 그 법을 계승하여 존호를 받지 아니하였고, 또 외척으로 정사(政事)를 보좌하지 못하게 하자 환관들이 정사에 참여할 수 없게 되니, 모든 다른 나라가 미치치 못하는 것이었다. 2월 을해일(3일)에 태조(太祖, 徐溫)의 묘호를 고쳐서 의조(義祖)라 하였다.

기묘일(7일)에 당주는 이씨의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애사(哀事)를 알리고, 황후와 더불어 참최(斬衰)를 입고, 여막(廬幕)에 살면서 처음 맞는 상례처럼 하였고, 아침저녁으로 무릇 54일을 임석하였다. 강왕 서지증과 요왕(饒王) 서지악(徐知諤)이 역시 참최를 입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경인일(18일)에 당주는 이름을 고쳐 이변(李昪)이라 하였다. 백관에게 조서를 내려 이조합향례(二祚合享禮, 徐氏와 李氏의 조상을 합쳐서 의식을 거행하는 의례를 뜻함)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신묘일(19일)에 송제구(宋齊丘) 등이 논의하여 의조(義祖)를 칠실(七室)의 동쪽으로 하게하였다. 당주는 고조(高祖, 李淵)를 서실(西室)에 모시게 하고, 의조는 또 그 다음으로 하였으며, 모두 부조(不祧)의 주군으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였다.

"의조는 제후여서 고조 ・태종(太宗, 李世民)과 함께 배향해서는 안 되니, 청컨대 태묘(太廟)의 정전(正殿) 뒤에 별도로 사당을 세워서 그에게 제사 지내도록 하십시오."

당주가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몸을 의조에게 의탁하였고, 지난번 의조가 오(吳, 南吳)에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중흥(中興)의 대업을 열 수 있었겠소?"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당주가 오왕(吳王) 이각(李恪, 唐太宗의 3男)을 시조(始祖)로 하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각은 주살되어 죽었으니, 정왕(鄭王) 이원의(李元懿, 唐高祖의 13男)를 시조로 하는 것만 못합니다."

당주는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두 왕의 후손을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오왕의 손자인 이의(李禕
)가 공로를 세워서 이의의 아들인 이현(李峴)이 재상을 역임한 사실을 알았다. 마침내 오왕을 시조로 하고, '이현에서 5대를 거쳐 이영(李榮)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그 이름은 대개 모두 유사가 지은 것이다.

당주는 또 19명의 황제와 3백년을 거쳤기 때문에 10세대는 너무 적다고 의심하였다.(南唐의 世系는 李淵-李世民-李恪-李琨-李禕-李峴-李超-李志-李榮-李昪의 순으로 혈통을 규정했다) 유사에서 말하였다.

"30년을 한 세대로 하면 폐하께서는 문덕(文德, 唐僖宗 말년의 연호로 888년에만 사용하였다)에 출생하셨으니, 이미 50년입니다."



덧글

  • 위장효과 2010/12/07 15:54 # 답글

    그러나 결국 송태조에게 멸망당한 남당...
  • 에드워디안 2010/12/07 20:57 #

    그래도 5대10국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문화를 자랑한 대국이었습니다.
  • 위장효과 2010/12/07 21:06 #

    남당의 후주 이 욱 본인이 뛰어난 시인이었지요.
  • 에드워디안 2010/12/07 21:11 #

    이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황인 원종 이경도 詞에 능했다고 하네요.
  • 들꽃향기 2010/12/07 17:47 # 답글

    조선후기에도 위조족보 잡아내는게 저런식이니...ㅎㅎ;; 그나저나 이변은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인물인데. 여기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군요 ㅡㅜ
  • 에드워디안 2010/12/07 20:56 #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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