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皇陵의 파괴


금나라의 황릉은 현재 北京의 서남쪽 운봉산(雲峰山)에 있었다. 이름이 있는 능침이 모두 17개이다. 이 산은 아홉줄기의 산줄기가 용처럼 뻗어있다고 하여, 구룡산(九龍山)이라 불렸다. 금나라의 황릉은 본래 흑룡강(黑龍江) 일대에 있었으나, 해릉왕(海陵王)이 천리길을 멀다않고 이장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규모가 가장 컸던 황릉의 이장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해릉왕이 구룡산 일대에서 사냥을 하다가 산아래의 대홍곡에서 사슴을 한 마리 발견했다. 사슴을 쫓아갔으나 보이지는 않고, 대신 눈앞에 황금빛이 찬란한 사묘(寺廟)가 나타났다. 해릉왕은 이상하다 생각하고 사원에 들어갔는데,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황홀한 가운데 금태조(金太祖)와 금태종(金太宗)등 몇몇 선조들이 향안(香案)에 앉은 것을 본 것이다. 나중에 이 절이 용성사(龍城寺)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 구룡산의 중봉(中峰)인 용두(龍頭)에 위치하고 있었다.

놀란 해릉왕은 조상들의 영혼이 나타난 것이고, 도성을 연경(燕京, 北京)으로 이전하라는 계시이며, 중원을 차지할 수 있는 좋은 징조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흑룡강 일대에 있던 황릉들을 천도와 동시에 연경으로 이장시켰다. 그리고 황릉의 위치를 바로 조상의 영혼이 나타났던 구룡산 용성사에 두었다.

그러나 사서에 따르면 금나라 황릉의 선택은 이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금나라가 상경(上京, 흑룡강성 아성현 남쪽)에 수도를 두고 있었을 당시엔 산릉(山陵)이 없었다. 祖宗 이래로 호국림의 동쪽에 장사지냈으며, 그 의제도 아주 간단했다. 해릉왕이 연경으로 천도한 뒤에야 비로소 능을 둘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풍수사들로 하여금 연산(燕山)의 사방을 수색하게 하였다. 1년여를 수색한 끝에, 용성사가 소재한 이 풍수승지를 발견한 것이다. 해릉왕이 금태조가 향안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은 후세인들이 꾸며낸 전설이다.

소위 풍수설에서 보면, 아주 좋은 풍수승지는 앞에 적어도 두개의 산이 있어야 한다. 즉,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다. 좌우에는 반드시 '호사(護砂)'가 나타나야 한다. 소위 '조산'이라는 것은 바로 조정 신하들이 서있는 곳이다. '안산'이라는 것은 황제가 일하는 책상이 소재하는 곳이다. 위치상으로 보면 '案'이 가깝고 '朝'는 멀다. 구룡산의 9마리 용은 높낮이가 다르고, 순서대로 내려와 있다. 중봉의 바로 앞에는 높은 산벽이 있고, 가까운 곳에는 중간에 약간 낮고 양쪽이 솟은 언덕이 있다. 동쪽으로는 꾾이지 않는 산봉우리가 있고, 서쪽으로도 몇개의 작은 산이 있다.

당시 구룡산의 주봉(主峰) 아래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일년내내 끊이지 않았고, 숲도 울창하였다. 구룡산의 지형은 바로 풍수사들이 말하는 것과 들어맞았다. 멀리 높이 솟은 산벽은 '朝山'이고, 가까운 곳에 낮은 언덕은 바로 '案山'이다. 좌우에 이어진 산과 언덕은 바로 '護砂', 즉 '左靑龍'과 右白虎'이다. 그래서 과거의 풍수사들은 금나라 황릉이 있는 구룡산은 풍수승지 중에서도 이상적인 곳이라 생각했다.

용성사가 소재한 위치가 바로 '용머리'였으므로 해릉왕은 사원을 철거하고, 개국황제인 금태조 아골타의 예릉(睿陵)을 이 곳에 세웠다. 흙을 판 후에 해릉왕 자신이 친히 공사를 감독하였고, 일꾼들에게 밤낮으로 산을 파게 하였다. 적지 않은 일꾼들이 해릉왕의 채찍을 맞아가며 일했다. 3개월이 지나 예릉과 화릉(和陵, 金太宗의 능)의 두개의 능이 먼저 완공되었다. 그 후 사릉(思陵, 金熙宗의 능)과 흥릉(興陵, 金世宗의 능)을 비롯한 20여개의 이름이 있거나 없는 제왕릉이 계속 건립되었으며, 황제능원이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능원을 건설한 장본인인 해릉왕은 정작 이 곳에 안장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금나라 말기에 대대적으로 중원을 침공한 몽고군은 연경에 입성한 후, 보복차원에서 금나라 황릉을 도굴하고 훼손시켰다. 그러나 원조(元朝)가 들어선 이후론 금나라를 한 집안으로 생각하여, 황릉을 다시 수리하고 매년 제사도 지내주었다. 그래서 금나라 황릉은 원대에 유명한 경서팔경(京西八景) 중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명대(明代) 말기에 이르러 금나라 황릉은 대재난을 맞이한다. 역사에서 말하는 '천계굴릉(天啓掘陵)'이다.

천계연간 당시, 누르하치는 만주 일대에 산재하던 여진(女眞)의 각 부족을 평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나라를 세워 후금(後金)이라 자처하며, 호시탐탐 중원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천계제(天啓帝)는 누르하치가 흥기할 수 있었던 것은, 금나라 황릉의 왕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여진족의 용운(龍運)이 아직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 풍수를 파괴하고 용맥을 자르며, 왕기를 없앤다는 '묘책'을 받아들였다.

천계제는 두 차례에 걸쳐 사람을 보내어 구룡산의 능원을 파괴하였다. 지상에서부터 지하에까지, 바깥에서부터 내부에까지, 금나라 황릉은 모두 파헤쳐지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지상의 모든 건축물을 철거한 후에, 다시 각 황릉의 지궁(地宮)을 파헤쳤고, 땅바닥에 흩어진 석주나 난간 같은 건축부자재와 돌멩이로 묘실을 메워버렸다. 이런 방식으로 여진의 왕기를 단절시키려 했으며, 풍수사의 조언대로 금태조의 예릉이 있던 용두(龍頭)에 있는 흙을 파헤쳐서 용머리를 자르고, 용머리 아래에 있는 목부위에도 큰 구멍을 파놓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여, 더욱 철저하게 하기 위해 각 황릉이 있던 자리에 관제묘(關帝廟)를 세워 여진의 왕기를 제압하려 했다. 또 예릉이 있던 자리에는 고탑(皐塔)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관우(關羽)와 남송(南宋)의 명장 우고(牛皐)의 영혼을 불러내서, 명나라가 누르하치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염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때 건립한 관제묘와 탑은 지금도 남아있다. '천계굴릉' 사건은 후세의 고고학자들에겐 큰 골칫덩이를 안겨준 셈이 되었다.


            


덧글

  • 들꽃향기 2010/12/08 10:48 # 답글

    그런 지기가 있다한들, 천명이 있고 인심이 있기에 지기따위가 우리를 어쩌겠느냐!라고 자신있게 외치지 못하고 능을 파헤친 명도 참 국세가 다했군요. ㄷㄷ

    그나저나 사진이 뜨질 않는군요 ㅋ
  • 에드워디안 2010/12/08 11:59 #

    말기적 증상에 어울리는 막장 행태였죠. 그런데 정작 천계제의 저런 만행에 대해 후세 사가들은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일찍이 금나라가 개봉의 북송황릉을 파괴한 전력을 들어 '인과응보'식의 결과라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PS. 사진은 수정했습니다.
  • Rothschild 2011/01/25 12:45 # 삭제

    근데 고려시대의 목자득국설을보면 꼭말기는 아니니 전근대시대엔 그러한 미신이 크게작용한게아닐까합니다.
  • 위장효과 2010/12/08 19:11 # 답글

    명 십삼릉중 유일하게 발굴된(것으로 알고 있는) 만력제의 유물들이 문혁당시 파괴된 걸 생각해보면...
  • 에드워디안 2010/12/08 19:31 #

    말씀하신대로 만력제의 능묘인 정릉만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만력제 부부의 시신이 화형당한 사건은 고고학 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기억되고 있죠...ㄷㄷㄷ
  • jaggernaut 2010/12/08 21:30 # 답글

    위 문후에게 산험도 인화만 못하다고 간했던 오기가 저승에서 크게 웃었겠습니다.
  • 에드워디안 2010/12/09 08:56 #

    21세기에도 저런 떡밥에 낚이는 사람이 적지 않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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