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 초나라의 도시 현황과 郢都


초나라의 대도시로는 우선 수도인 영도(郢都, 호북성 강릉현)를 꼽을 수 있다. 그밖에 언(鄢, 호북성 선성현) ・완(宛, 하남성 남양시) ・성양(城陽, 하남성 신양지구) ・진(陳, 하남성 회양현) ・상채(上蔡, 하남성 상채현) ・하채(下蔡, 안휘성 수현) ・오(吳, 강소성 소주시) 등이 있었다. 언은 초나라의 副都로 한수(漢水) 중류의 거점이었고, 완은 한수와 방성(方城) 사이의 요충지로 철광 제련업이 발달했던 곳이다. 성양은 회수(淮水) 상류의 거점으로 경제적 기능보다는 군사적 역할이 컸던 곳이다. 진 ・상채 ・하채 ・오는 각각 춘추시대 陳나라와 蔡나라, 吳나라의 옛 도읍으로 모두 번화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도시의 규모와 정책을 통해 보더라도, 영도는 단연 명실상부한 수도였다. 영도는 지리적으로 '서쪽으로는 무군(巫郡)과 파지(巴地)로 통하고, 동쪽으로는 풍요한 운몽(雲夢)을 끼고 있었다. (西通巫巴, 東有雲夢之饒)' 후세에 기남성(紀南城)이라 불린 영도는 그 옛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호북성 박물관이 1960년대에 탐사와 시험 발굴을 한 적이 있으며, 1972~76년에는 몇몇 관련 부처와 공동으로 보다 광범위한 조사와 발굴을 거쳐 '초나라 도읍 기남성의 답사와 발굴<楚都紀南城的勘查與發掘>'을 남김으로써, 고대 명성(名城)의 면모를 대략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영도의 옛성은 지금의 강릉 북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하였다. 지세는 평탄한 편으로 언덕이 일부 있기는 하나 기복이 크지 않고, 성터의 해발 고도는 34m 내외이다. 흙을 틀에 넣고 다져서 쌓은 성벽은 대부분 그대로 현재의 지면 위로 볼록하게 나와 있으며 28군데의 갈라진 틈이 있을 뿐이다. 높이는 보통 4~8m이고, 밑부분의 넓이는 30~40m이며, 윗부분의 넓이는 10~20m 정도이다. 다진 흙의 두께는 한 겹이 약 10cm이다. 성벽은 이를 받치고 있는 축대와는 확실하게 구분된다. 바깥쪽 축대는 밑부분의 넓이가 약 6m이고, 안쪽 축대는 약 10m 정도이다.

전체 성은 대체로 방형(方形)으로, 동서의 길이가 남북의 길이보다 조금 넓다. 동북 ・서북 ・서남쪽의 세 모퉁이는 모두 절각(切角)을 이루는데, 절선(切線)은 5~700m로 그 길이가 각각 다르다. 동남쪽 모퉁이는 직각에 가깝고, 남쪽 성벽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서는 '凸'자 모양의 돌출부가 있다. 성벽의 둘레는 15.506km이고, 성의 면적은 16평방 km이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총 7개의 성문이 있는데 북쪽 ・서쪽 ・남쪽 성벽에 각각 2개씩이 있고, 동쪽 성벽에 하나가 있다. 그 가운데 북쪽 성벽의 동문(東門)과 남쪽 성벽의 서문(西門)은 수문(水門)으로, 배가 드나들던 수로에는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또한 동쪽 성벽의 중간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부분에도 수로가 횡으로 관통하여 흘렀음이 탐사 결과 밝혀져 역시 수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갈라진 틈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을 에워싸고 있는 낮은 늪지는 해자의 유적으로 보인다.

성벽을 쌓은 시기는 성벽과 축대 사이, 그리고 성문 아래에 깔려 있는 유물에 근거하면 춘추 말기~전국 초기를 넘어서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남성의 남쪽으로는 장강(長江, 揚子江)이 흐른다.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정호(洞庭湖)를 지나 상수(湘水)를 거슬러 창오(蒼梧)에 이를 수 있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파(巴) ・촉(蜀)으로 통할 수 있고, 강줄기를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오(吳) ・월(越)로 들어갈 수 있다. 성의 서쪽으로는 장수(漳水)가 만복(蠻僕)들이 모여살던 산지(山地)로 흐른다. 북쪽으로는 큰 길이 나 있어서 언(鄢) ・등(鄧) ・완(宛)을 거쳐 초나라 밖으로 빠져 나갈 수 있다. 동쪽으로는 구불구불 이어진 호수가 장강과 한수를 이어 주고 있다. 초소왕(楚昭王)이 도읍을 이곳으로 옮긴 것은 그 지리적 위치를 거시적으로 살펴볼 때, 정확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터는 동쪽과 남쪽의 강과 호수와 서쪽과 북쪽의 언덕 사이에 적당한 높이로 자리잡고 있다. 또 수로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종횡으로 관통하여 홍수의 위험도 없다. 성벽을 쌓을 때 고지대를 만나면 바깥쪽으로 싸고돌며 쌓고, 방향을 트는 부분에서 늪지대를 만나면 비스듬히 이를 피해 쌓았다. 성벽의 전체적인 구조는 지형을 세밀히 뜯어 보면 정연한 가운데 변화가 있고, 엄정한 속에 융통성을 보여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실효를 강구하였다. 설계상에 나타난 이와 같은 훌륭한 사고는 초인(楚人)의 전통적 기풍을 잘 드러낸 것이다. 이 성은 훗날 백기(白起)가 이끄는 진(秦)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단번에 파괴되었다. 그것은 성벽이 높지 않았거나 해자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초나라 지배층의 식견과 책략이 높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쪽 성벽의 북문(北門)과 남쪽 성벽의 수문을 발굴한 결과, 영도의 두 가지 성문의 서로 다른 형태와 구조가 밝혀졌다. 서쪽 성벽의 북문은 3개의 문도(門道)가 있었는데, 흙을 다져 쌓은 2개의 격벽(隔壁)으로 나누어진다. 중간 문도는 기반의 넓이가 7.8m이고, 북쪽 문도와 남쪽 문도는 중간 문도의 절반이며, 2개의 격벽은 넓이가 3.6m이고 길이가 10.1m이다. 문도 안과 격벽 위에는 기둥 따위를 세웠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중간 문도 안쪽에 있는 2개의 굴착 방향의 두번째 층 아래에서 짙은 갈색의 흙이 한 층 발견되었는데 방향을 동서로 향하고, 남북의 넓이는 약 8m이며, 중간 부분이 높고 양쪽 옆은 조금 낮은 편이다. 남쪽 문도 안쪽은 노면의 흙이 거무스름하고, 동서 방향으로 2개의 오목한 고랑이 나 있다. 두 개의 고랑은 서로 평행에 가깝고 1.8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메워넣은 흙은 황색으로 수레바퀴가 지나다닌 자리로 보인다. 북쪽 문도 안쪽은 노면의 흙이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성문 안에는 남쪽과 북쪽 양옆으로 문간방이 있던 터가 하나씩 남아 있다.

남쪽 성벽의 수문은 목조 건축물이다. 현재는 남북 방향으로 늘어선 여섯 줄의 나무 기둥과 2개의 덧문이 있다. 중간에 배열된 네 줄의 기둥은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둘째에서 다섯째 줄의 기둥이 되는데, 두 개의 덧문과 이어져 문도를 이룬다. 기둥은 모난 것과 둥근 것 등 서로 다르고, 길이가 다르며 굵기도 일정하지 않다. 대부분은 둥근 기둥으로 길이는 2.2~2.88m이고 아랫부분의 지름은 20~36cm이며, 끝부분이 뾰족하다. 원래는 매 줄마다 10개 씩의 기둥을 세워 놓았으나 이미 썩어 버린 것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4줄 38개의 기둥 구멍과 주춧돌 37개, 나무 기둥 30개가 발견되었다. 문도는 길이가 11.5m 내외이고, 둘째와 셋째 줄의 기둥 사이에 있는 동쪽 문도와 셋째와 넷째 줄의 기둥 사이에 자리한 중간 문도는 넓이가 각각 3.5m이며, 넷째와 다섯째 줄의 기둥 사이에 있는 서쪽 문도는 3.7m이다.

발굴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입증되었다.

도성(都城)은 1門 3道의 형태로 늦어도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접어들 무렵에 이미 만들어졌다. 1門 3道의 수문은 이제까지 영도에서만 발견된 것으로, 초인이 창조한 것이 틀림없다. 당시 영도의 수륙 고통은 상당히 편리하여 배들이 꼬리를 물고 수문을 드나들었고, 수레와 말이 분주하게 성문을 출입하였다. 성내에는 다리 아래 노젓는 소리와 다리 위의 말방울 소리가 서로 어울려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성황을 이루었다. 이런 분위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성터 안은 모두 밭과 마을이 되어 버렸지만, 동남쪽과 동북쪽에서는 아직도 흙을 다져 쌓은 많은 터를 발견할 수 있다. 동남쪽은 남북으로 뻗은 옛 수로를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서쪽 지역에 더 많은 터가 밀집되어 있다. 서쪽 지역의 동쪽과 북쪽에는 흙을 다져 쌓은 담벽의 흔적이 있는데, 당시 건물을 둘러싼 담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5~76년에 걸쳐 발굴된 송(松) 30호 터는 장방형으로 길이가 80m이고, 너비가 54m이며, 남아 있는 높이가 1.2~1.5m이다. 연대는 전국 초기에서 중기 무렵에 해당된다. 이 건물 유적은 건물 터의 규모와 건축 양식을 통하여 볼 때, 궁전 내지는 관청 건물일 것으로 판단된다.

영도 동남쪽의 서쪽 절반은 본래 궁전 구역으로 추정된다. 영도의 동남쪽 모퉁이와 동북쪽의 중심 지역에도 흙을 다져 쌓은 터가 상당수 남아 있는데, 당시 주거 지역으로 짐작된다. 영도 거주민의 생활 용수는 주로 우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터 내에서 많은 우물이 발견되었다. 우물이 밀집된 지역은 성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곳이다. 1975~76년까지 이 지역의 길이 약 1천m, 너비 약 60m의 범위 내에서 우물 256개와 가마터 6곳이 발견되었다. 이들 우물은 다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토정(土井)으로 71개가 발견되었다. 둘째, 도권정(陶圈井)으로 176개가 발견되었다. 셋째, 목권정(木圈井)으로 최초로 발견되었으나 단 3개 뿐이다. 넷째, 죽권정(竹圈井)으로 5개이다. 이밖에 다른 종류의 우물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우물에서는 물을 긷는 작은 두레박 대신 물건을 담아 놓는 커다란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이는 냉장용으로 판 것으로 추정된다.

영도 중앙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우물 밀집 지대는 도기를 굽던 가마터로 보인다. 영도의 서남쪽에는 남아 있는 터가 많지 않다. 그러나 화덕이 있던 자리가 발견되어 주조 공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북쪽은 남아 있는 터가 더욱 적은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성터 안에서 발견된 벽돌과 기와로는 공심전(空心塼) ・판와(板瓦) ・통와(筒瓦) ・반와당(半瓦當) ・원와당(圓瓦當) 등이 있다. 공심전은 눌러찍은 무늬가 있고, 판와 ・통와 ・와당에는 새끼줄 무늬가 있다.

환담(桓譚)의 <新論>에 '초나라 영도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스치며, 저자 거리에서는 서로 밀치고 부딪치고 하여 아침 나절에 입은 새 옷이 저녁 무렵이면 누더기가 되어 버린다고 한다. (楚之郢都, 車轂擊, 民肩馬, 市路相排突, 號為朝衣新而暮義蔽)'고 하였다. 아마도 환담은 전국시대 종횡가들의 말을 근거로 한 듯하다. 종횡가는 자신의 언론을 돋보이게 하려고 다소 과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사실이 있기 때문에 과장하는 것이다. 그들이 묘사한 바로는 영도는 인가가 조밀하고 거리가 번화한 큰 도회지였다. 영도의 옛 터에서 이것이 증명됨으로써,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영도(郢都) 기남성(紀南城)의 遺址


덧글

  • DreamersFleet 2010/12/25 11:32 # 답글

    많은 선진 문헌에 언급되는 郢도 발굴되었군요. 근데 시기상으로 楚文王 때 천도했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오자서가 들어와서 楚平王의 시체를 파헤친 때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 에드워디안 2010/12/25 19:07 #

    문왕 때 천도한 郢은 기남성과는 다른 곳에 위치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소왕 시기 오나라의 침공을 피해 鄀으로 천도하였고, 10년쯤 지나(기원전 490년대) 재차 鄀의 남쪽으로 천도해 郢이라 불렀는데 그곳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기남성이죠. 이후 백기에 의해 함락당할 때까지 약 220여년간 기남성이 郢都였습니다.
  • jaggernaut 2010/12/27 21:51 # 답글

    정통의 주나라 양식의 수도 배치와는 많이 다른 구조였네요. 궁성터가 북에 위치하지 않고 수공업 지대가 버젓하게 도시 중앙을 차지한 점이 이채롭습니다.
  • 에드워디안 2010/12/27 21:56 #

    춘추시대의 제후국 중 유일하게 칭왕을 한 초나라였지요. 중원제국에서 '蠻夷'라 부르며 멸시한 것이나 초장왕이 九鼎을 노린 점을 보더라도, 주나라 중심의 華夏문명과는 확실히 다른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 rkdmsaus 2010/12/28 05:57 # 답글

    에드워디안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초장왕이 제패한 영땅은 글로는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실제로 그 지방의 고증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본인도 <춘추시대이야기> 및 <전국시대 이야기>를 지은 저자로서
    중국 지명에 대한 관심은 많이 가지나 원체 넓은 땅이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상기 저서는 블로그 http://blog.naver.com/rkdmsaus에 '(186)울지도 날지도 않는 새' 에 초장왕의 제패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간 있으시면 한 번 찾아봐 주세요.
    갑사합니다

  • 에드워디안 2010/12/28 09:53 #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DreamersFleet 2010/12/31 21:04 # 답글

    영(郢)이 이리 쫓겨 다닌 걸 듣고 제일 먼저 순자(荀子)가 생각나더군요. 그의 제자인 한비자나 이사는 어쨌거나 말로가 안 좋았던데 비해 비교적 그는 초나라로 망명해서 편안하게 여생을 마쳤거니 생각했는데, 수도조차 정하지 못해 이리 저리 쫓겨다니는 모습을 보니 왠지 그렇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