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懿宗의 佛心(?) 세계사


咸通 14년(서기 873년)

봄, 3월 계사일(29일)에 황상(皇上, 唐懿宗)이 칙사를 파견하여 법문사(法門寺, 섬서성 부풍현에 위치한 사찰로 唐憲宗이 석가모니의 손가락 뼈를 모셔다 두었다고 한다)에 가서 불골(佛骨, 부처의 사리)을 맞이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 가운데 간언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으며 심지어는 '헌종(憲宗)은 불골을 맞이하고서 얼마 안 있다가 안가(晏駕, 서거)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에 황상이 말하였다.

"짐이 살아서 이것을 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널리 부도(浮圖) ・보장(寶帳) ・향여(香轝) ・번화(幡花) ・당개(幢蓋)를 만들어 가지고 이를 맞이하였는데, 모두 金과 玉 ・수놓은 비단 ・비취색 구슬로 장식하였다. 경성(京城, 長安)에서 절까지 300리 사이의 도로에 다니는 거마(車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였다.

여름, 4월 임인일(8일)에 불골이 장안에 이르자 금군(禁軍)의 군사들로 의장(儀仗)을 하고 공사(公私)의 음악을 연주하며 인도하였는데, 하늘이 비등(沸騰)하고 땅에는 촛불을 밝힌 것이 수십 리를 이어져 있었으며, 의장과 호위가 성대함은 교사(郊祀)를 하는 것보다 지나쳤다. 원화(元和, 唐憲宗의 연호) 연간의 것도 이에 비하면 아주 못 미쳤다. 부호(富豪)들이 길을 끼고서 비단으로 건물을 장식하여 무차회(無遮會)에 이르는데, 다투어 사치하여 낭비하였다.

황상이 안복문(安福門)에 나아가 누각에서 내려와 막배(膜拜)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슴까지 적셨는데, 승려와 장안의 기로(耆老)들 가운데 일찍이 원화시대에 있었던 일을 보았던 사람들에게 금과 비단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불골을 영접하여 금중(禁中)으로 들여오고 사흘 만에 꺼내어 안국숭화사(安國崇化寺)에 안치하였다. 재상 이하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금백(金帛)을 사주하였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어서 덕음(德音, 은덕을 갖춘 말씀)을 내리어 안팎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감형시켰다.



덧글

  • 들꽃향기 2011/01/25 20:36 # 답글

    헌종시기에 한퇴지가 이 문제에 대해서 최고의 디스를 걸었음에도 결국 추세는 막지 못했군요. OYL
  • 에드워디안 2011/01/25 21:54 #

    회창연간의 폐불을 거치고도 저러했으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 jaggernaut 2011/01/26 23:05 # 답글

    불력으로 내우를 달랠 수는 없고, 외환을 물릴 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그 불골이 가짜여서...
    석가모니의 뼈라고 주장하는 유골을 다모으면 수백 사람분이라지요?
  • 에드워디안 2011/01/27 01:02 #

    사람이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하거나 잘못 홀리면 아주 골치아파지는데, 하물며 국가의 지존이 그런 상황에 빠지게 되면 답이 없죠. 당장 양무제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의종은 저로부터 몇 달 안되어 사망했는데 '재위 14년간 무엇 하나 건질게 없었다' 혹평될 정도로, 환관에게 조종된 암군이었습니다. 방훈의 난과 같이 지방에서 소요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쓸데없는 사치로 세월을 보낸 인간이었죠. 그리고 의종이 죽은 지 2년이 채 안되어 황소의 난 발발...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