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내각 시절의 일본 정국 세계사


1939년 8월 30일, 前 대만군(臺灣軍) 사령관이자 육군대장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총리대신에 임명, 아베 내각이 출범했다. 소수 ・강력주의 내각을 천명한 아베였지만, 군인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결코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틀 후인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고 3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아베 수상은 9월 4일, '이번 유럽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 帝國은 이에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지나사변(支那事變)의 해결에 매진코자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천진(天津)사건[1939년 6월, 일본군이 天津의 영국 組界를 봉쇄한 사건]에서는 영국과, 美日통상조약에서는 미국과, 그리고 장고봉(張鼓峰)사건과 노몬한사건에서 소련과 대립한 일본은 이제 獨蘇불가침조약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여,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교방침을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념적으로 서로 용납하지 않을 터인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防共'이라든가 '東亞신질서'라는 구호로 자기만족에 빠져있던 종래의 외교방침을 반성하는 분위기를 일게 하였다.

1939년 하반기 동안 親英美派가 다시 정계의 표면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일어난 유럽에서의 전쟁에 의해 종래의 외교노선을 재검토할 계기와 여유가 주어졌다. 2차대전 발발에 대해 '천우신조'라면서 낙관하는 분위기였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外相은 11월 4일부터 그루(Grew) 駐日미국대사와 회담을 개시하였다. 美日회담을 기대한 것은 전시통제가 진행됨에 따라 對美의존도가 커졌기 때문이었다.

1939년 초, 일본 정부는 '日滿華 생산력 확충 3개년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이를 실현키 위해서는 자재와 원료를 해외, 특히 미국과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서유럽 諸國이 지배하는 동남아로부터의 수입이 곤란해졌다. 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수입도 이미 美日통상조약 폐기가 예정되었고, 게다가 미국의 英佛에의 군수품 수출이 증대하여 점점 곤란해질 것이라는 전망이어서, 미국과의 국교 조정에 우선 열의를 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美日간 교섭은 좀체 진척되지 않았으며, 12월 22일에는 미국이 통상항해조약의 잠정 연장 체결을 거부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마침내 1940년 1월, 美日통상조약의 효력이 상실됨으로써 외교재건의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 중일전쟁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자주외교는커녕,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에 빠져 있었다. 남은 길은 미국의 주장을 거의 전적으로 수용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軍部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아베 내각은 수상의 총동원 지도권을 확립할 목적으로 1939년 9월 30일 국가총동원법 등 시행의 통활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으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한편, 외무 ・대장 ・상공 ・농림 ・척무성 각 부처의 무역 관련 사무를 통합하여 무역성(貿易省)을 신설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외무성이 맹렬히 반대하였고, 고등관 대부분이 사표를 제출하려 한 탓에 무역성 신설도 빛조차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閣議 결정 사항이 관료들의 저항에 의해 좌절된, 전대미문의 추태였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민 생활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39년 8월부터 10월에 걸쳐 소위 '動力기근현상'이 나타났다. 군수공업의 발전에 따른 수요의 증대는 석탄의 수급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 해 여름의 전국적인 갈수현상과 아울러 電力부족의 현상을 낳았다. 게다가 석탄과 전력의 공급 제한은 곧 전산업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식량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의 전시경제에서 최대 강점은 식량의 자급에 있었다. 그런데 1939년 한 해 동안 일본 內地의 서부 ・조선 ・대만을 강타한 가뭄으로 쌀의 수확이 크게 감소되었고, 그로 인해 '농업생산력 확충계획'은 첫 해부터 좌절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1천 수백만 석의 쌀 부족이 예상되어 배급기구를 통제했고, 11월 6일엔 쌀의 강제매입제도(供出)가 실시되었다.

2차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해외물가고의 영향을 받아 물가 ・주가등귀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군수인플레의 급등을 억제하고 있던 물가통제가 전면적으로 붕괴할 위험이 생겼다. 1939년 9월 19일에는 일반물가 ・토지세 ・집세 등을 9월 18일 수준으로 묶어 두려는 가격 동결령을 공포했고, 이어 10월 18일에는 임금 ・봉급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12월 26일에는 상공성 및 농림성이 폭리 단속령 대개정 등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국민 생활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무능 ・무력한 아베 내각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39년 12월 26일, 중의원은 내각 불신임안을 의결했다. 해를 넘겨 1940년 1월 7일, 중의원 정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276명의 의원이 아베 내각의 퇴진에 찬성했다. '쌀 ・목탄 ・성냥 등이 넉넉합니까'가 이 무렵의 인사말이었을 정도였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2년 6개월. 국민의 불안과 전쟁혐오의 분위기, 관료통제에 대한 불만은 점차 확대되었는데, 연말에 선거구를 시찰한 의원들은 지방의 실정을 보고 정당세력 부활의 기회라 생각했다. 정당내각 출현의 소문마저 정계에 돌았다. 閣內에서는 해산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군부는 의회 해산 ・선거가 反軍적 기운을 낳을 것을 우려하여 이에 반대했다.

군부가 더 이상 내각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아베 수상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중신(重臣)과 관계가 깊으며 親英美派로 주목된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제독에게 組閣 명령이 내려졌다. 1940년 1월 14일, 아베 내각은 총사직했다. 수명이 4개월여에 불과한, 단명 내각이었다.





덧글

  • 위장효과 2011/02/17 09:45 # 답글

    한동안 넷을 달궜던 아베 노부유키 발언의 주인공이군요^^-그저 마지막 총독정도로 기억되던 아베가 갑자기 모든 민족말살정책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걸 보고 이뭥미 하고 한동안 얼이 빠졌었는데.-
  • 에드워디안 2011/02/17 12:41 #

    그 괴담(?)은 누군가가 조작해서 넷상에 퍼뜨린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민족말살정책'하면, 단연 미나미 지로가 본좌지요.
  • 위장효과 2011/02/17 12:52 #

    그러니까요. 미나미 지로가 그런 말 했다면 그나마 수긍이 가겠는데, 당장 항복문서 서명하고 집에 돌아가기 바쁜 아베 총독이 그런 말 할 정신이나 있었겠습니까.

    (무슨 터미네이터가 "I'll be back!"그러는 것도 아니고^^)
  • Hyth 2011/02/17 12:41 # 답글

    어디서 봤던 이름이다 했더니만 마지막 총독이었군요.
    총리를 먼저 하고 식민지 총독으로 온 것도 희귀한 케이스일듯;;
  • 에드워디안 2011/02/17 12:43 #

    수상직 사임 직후엔 '주중특파대사'로 난징에 체재한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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