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식민지 전쟁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유럽 제국이 식민지 독립을 승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파시즘 체제는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들 식민지는 1951년 이후 공식적으로는 해외주(海外州)로 취급되었으나, 실상은 이전과 거의 변함없는 통치가 지속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진 식민지 원주민의 독립운동은 점차 격화되었고, 60년대에 들어선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주로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중에 포르투갈軍과 무장 게릴라 세력은 서로 수많은 잔학행위를 자행하였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포르투갈은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른 무기禁輸 ・경제제재에도 대처해야 했다. 무장 게릴라 집단 중엔 앙골라의 MPLA ・UNITA ・FNLA, 기니비사우의 PAIGC, 모잠비크의 FRELIMO 등이 있었지만, 독립의 성공은 사실 이들 조직의 전과라기보단, 포르투갈 본국에서 발생한 쿠데타의 영향이 크다.

카네이션 혁명에 의한 終戰은 식민지 주민과 軍관계자의 대규모 탈출을 초래하였다. 최대의 식민지인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불문하고 총 1백만명 이상의 주민이 떠났는데, 이 일련의 대탈주는 역사상 평시에 행해진 집단 이주 가운데서도 최대 규모였다.

독립을 달성한 식민지들은 초반의 희망과는 달리, 경제악화 ・공산독재 ・부패 ・빈곤 ・불평등 ・정책의 실패 등,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하며 몰락하고 말았다. 사회질서와 경제수준을 포르투갈 식민시대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독립 이후의 과제로 부상하게 된다.

2차대전 이후, 美蘇 양대 초강대국은 사상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각자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전세계 각지의 반란세력을 후원하였다. 미국은 올덴 호베르투를 지도자로 하는 앙골라 인민동맹(UPA)를 지원, 이에 UPA는 근거지인 콩고(자이르)에서 앙골라에 침공하여 포르투갈인 주민과 현지 원주민을 다수 학살했다(1961년 3월). 학살의 증거가 된 사진이 UN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포르투갈 군부는 파시즘 독재에 의한 체제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지만, 한편으론 광대한 식민지 유지 비용의 부담이 점차 증가하였다. 포르투갈은 나토 회원국이었으나, 나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을 방어하는 것인 만큼, 아프리카 전쟁에 서방제국을 개입시킨다는 살라자르의 당초 구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토 가입에 의해 식민지 전쟁에서 작전계획의 입안 및 수행을 실시하는 우수한 군인이 육성될 수 있었다. 그들은 소위 '나토 세대'로 불려 출세가도를 달리며 軍의 고위직을 차지했으나, 이들 중엔 서유럽식 자유주의 사상에 공감한 이가 적지 않았으며, 기존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희박했다. 

이같이 서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군부와 독재정권 사이의 단절은 점차 심화되었는데, 61년의 쿠데타 미수사건을 파시즘 체제 붕괴의 시작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식민지에서의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별도의 독립된 사령부가 설치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陸海空 3軍의 협조가 결여되게끔 만든 실책이라 평가된다.

살라자르는 다민족의 융합 ・현지 원주민의 文明化라는 명목으로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포르투갈 식민지 제국의 위상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교육을 받은 현지 원주민이 軍의 전문직이나 행정부 ・교육 ・위생기관 및 민간기업에서 비교적 고위직에 임명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또한 식민시대 초기부터 포르투갈인과 현지인의 통혼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포르투갈인 뿐만 아니라 원주민에게도 초등~중등교육 ・기술교육의 기회가 보장되었다.

사실, 독립운동과 식민지 전쟁 와중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아프리카인들 중에선 포르투갈 유학파 출신이 적지 않았다. 아고스티노 네토 ・요나스 사빔비 ・사모라 마셸 ・요아킴 시사누 ・아밀카르 카브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축구선수 에우제비오를 포함한 다수의 아프리카인이 융화정책에 의해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르투갈계 백인과 혼혈인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였으며, 식민지 개발에 따른 이익은 현지 원주민들에게 거의 배분되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봐도 포르투갈인이 원주민에 비해 경제적으로 보다 여유를 누렸고, 교육기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50년대 중반 이후, 反식민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불법 정치조직은 원주민들의 불만을 자극하면서 세력을 확대시켜갔다.

1961년 2월, 콩고에 거점을 둔 UPA 게릴라가 국경을 넘어 앙골라 북부에 침공, 형무소를 습격하여 경찰관 7명을 살해한데 이어 3월 15일엔 백인 1천명 ・흑인 6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포르투갈 당국은 즉시 보복을 결의했으며, 이로써 13년에 걸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시작되었다.




UPA를 후원하고 있던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포르투갈 정부에 조속한 식민지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61년 4월의 군부 쿠데타 미수사건은 CIA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는데, 이 쿠데타는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불발로 끝났지만, 살라자르 체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어쨌든, 미국의 압력과 군부의 반발을 물리친 살라자르는 해외영토를 사수한다는 결의하에 육군장관직을 겸임했으며, 대규모 증원부대를 아프리카에 파견하였다. 모든 성인남성은 3년간의 병역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싸울 수 있도록 소집령이 내려지는 등, 군국화 현상이 농후해져갔다.

포르투갈은 다른 열강에 비해 보다 오랫동안 아프리카에 군림해왔기 때문에, 현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게릴라와의 전투는 시종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포르투갈의 승리가 확정적이자 미국은 게릴라에 대한 지원을 서서히 중단해버렸다. 소련도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개전 당시, 앙골라에서는 중앙고원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의 무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포르투갈군은 '군인 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함께 싸운다'는 프란시스코 고메스 장군의 共鬪전략에 따라 지방 농민을 회유하는데 성공했으며, 동맹국인 남아공의 지원도 가능했던 덕에, 순조로운 토벌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70년대초가 되면 포르투갈의 군사적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지만, 정작 앙골라에서의 전황은 사실상 승리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후기로 갈수록 군사적 위협이 줄어들어 앙골라에의 이민이 증가하고 있었다. 기니에서는 총력전에 가까운 양상으로, 전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1972년을 기점으로 미국 등, 서방제국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영구지배를 사실상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74년초, 게릴라는 대부분 산간벽지로 밀려났고, 앙골라의 모든 도시와 대부분의 농촌을 장악한 포르투갈군이 인종을 불문하고 주민들을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평온한 상황을 유지한 앙골라와는 달리, 기니비사우에서는 동구권의 지원을 받은 게릴라가 전세를 역전시켰다.




모잠비크에서는 1964년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초기엔 공산주의 계열의 게릴라 프렐리모의 세력이 위협적이었다.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중부의 잠베지江 유역까지 전쟁이 확산되었으나,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병력이 소수였던 탓도 있어 프렐리모가 당분간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전열을 재정비한 포르투갈군은 잠비아 ・말라위와의 국경을 봉쇄하여 양면에서 프렐리모를 압박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카울자 드 아리아가 준장의 지휘하에 1970년 6월, 북부지방에 산재한 프렐리모 기지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고르디우스의 매듭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 작전의 결과, 프렐리모는 와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반면, 모잠비크 전선에서도 포르투갈의 주도권 장악이 확정되었다.

테테州의 카호라 바사댐 건설엔 모잠비크 주둔 포르투갈군 병력의 절반이 투입되었으며, 이곳은 프렐리모의 주요 공격 목표였으나, 정작 공격은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전쟁기간을 통틀어, 프렐리모가 도시를 공격하여 성공한 것은 단 한 차례 뿐이었다. 73년까지 포르투갈군은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했다.

그런데 모잠비크 전선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둔 아리아가 준장은 74년초, 갑자기 경질되고 만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아리아가의 경질은 카에타노 수상이 '쿠데타 방지'를 위해 내린 조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결국 그해 4월,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니(비사우)에서는 1963년 1월, 공산계열의 기니 ・카보베르데 독립 아프리카당(PAIGC)이 전투를 개시했으며, PAIGC는 쿠바와 동구권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격에 나선 포르투갈은 안토니오 스피놀라 장군의 전략에 따라 특수 해병대를 동원, 늪지에서의 기동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황을 점차 개선시켜갔다. 그럼에도 주도권을 탈환하는데엔 실패했다.

1970년 11월, 포르투갈군은 '녹해(綠海) 작전'을 실행하였다. 작전 목표는 기니 공화국의 세쿠 투레 정권을 전복시키고, PAIGC의 수장 아밀카르 카브랄을 체포하는 한편, PAIGC의 공병기를 파괴하고, 포르투갈군 포로를 구출한다는 것이었다. 포르투갈군 특수부대가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공격, 카브랄 체포엔 실패하였으나, 포로 구출과 선박 파괴엔 성공했다. 

포르투갈군의 기니 공격에 충격을 받은 나이지리아와 알제리는 기니에 대한 원조를 늘렸으며, 소련도 서아프리카 연안 경호를 명목으로 전함을 파견했다. 포르투갈의 또다른 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1968년부터 72년까지 포르투갈군은 공세를 강화, PAIGC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동시에 반군에 대한 공작에 착수하여 PAIGC의 분열을 도모했다. 이 전략은 73년 1월에 카브랄이 암살당함으로써, 결실을 보게된다. 그런데도 PAIGC는 동구권의 든든한 지원을 배경으로 전력 소모를 보충할 수 있었다.

기니비사우 전선은 아프리카 식민전쟁을 통틀어 포르투갈군이 가장 고전한 곳이었으며, 그만큼 피해도 컸다. 정세가 안정된 앙골라 ・모잠비크와는 달리,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침체를 면치 못했다.

1973년까지 포르투갈은 기니비사우를 제외한 나머지 식민지를 대부분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기간 지속된 식민지 전쟁으로 국가경제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고, 국민들 사이에선 염전(厭戰)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기니에서 활약한 스피놀라 장군을 중심으로 소장파 장교들이 거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년이 채 못되어, 지구상 최후의 식민지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덧글

  • 행인1 2011/04/28 16:17 # 답글

    시대착오적 제국의 종말이로군요. 그러고보니 프랑스도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분으로 선언했지만 실제는...(이하생략)
  • winbbs 2011/04/28 17:12 #

    좌우 분열로 인해 우파 반식민주의자(!)였던 드골이 독립을 승인헀죠.
  • 에드워디안 2011/04/28 22:18 #

    하마터면 내전이 일어날 뻔했죠...-_-;
  • 위장효과 2011/04/28 16:25 # 답글

    앙골라에서는 결국 UNITA하고 MPLA사이의 내전이 벌어졌고, 사빔비는 한참 이용당하다 결국 폐기처분-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실드쳐주는 인터뷰 기사를 실어주기도 햇었지요. 아라파트에 대한 인터뷰 기사는 아주 교묘하게 디스하는데 반해-
  • 에드워디안 2011/04/28 22:19 #

    사빔비가 전사한 이후에야 비로소 앙골라의 내전이 종식되었으니...
  • KittyHawk 2011/04/28 16:30 # 답글

    만약 저때 식민 종주국들이 교활하리만치 유능하게 대처했다면 3세계 국가의 사람들에게 더욱 암담한 상황이 도래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 winbbs 2011/04/28 17:11 #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좌파 진영은 식민지 주민들의 인권 운운 했을것인데, 우파들은 뭐라고 반박 할 것입니까? "현지 주민들은 행복해 졌다?" 라고 할까요.
  • 에드워디안 2011/04/28 22:23 #

    2차대전의 전화를 당한 서유럽 제국의 입장에서 좋든 싫든, 식민지는 조만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포르투갈의 경우는 그게 아니었죠.
  • 슈타인호프 2011/04/28 17:08 # 답글

    포르투갈이 그렇게 선전했던줄은 몰랐네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에드워디안 2011/04/28 22:27 #

    유능한 지휘관들의 역할이 미흡한 군사력을 커버한 셈이지요. 포르투갈 같은 2류국가가 13년동안,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전선을 유지한 사실은 어찌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라라 2011/04/28 18:07 # 답글

    동티모르도 있지요. 포루투갈이 철수하고 인도네시아가 쳐들어간..참 잔인한 놈들이던데
  • KittyHawk 2011/04/28 18:53 #

    네 동티모르의 경우엔 그야말로 황당하죠.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쳐들어갔으니...
  • 에드워디안 2011/04/28 22:28 #

    포드와 수하르토를 깝시다...
  • 누군가의친구 2011/04/28 19:52 # 답글

    이 전쟁이 결국 자신의 몰락을 가져왔을지 살라자르는 생각했을까요?ㅋ
  • 에드워디안 2011/04/28 22:31 #

    살라자르 본인은 쿠데타가 일어나기 이미 4년전에 사망해버렸죠. 머리 부상을 당한 뒤로 '굿바이 레닌 실사판'을 촬영(?)하면서 나름 행복하게 생을 마감했으니, 적절한 시기에 죽은 셈입니다.
  • 2011/04/29 10:3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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