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자르의 통치... 세계사




살라자르의 통치이념은 민족주의 ・가톨릭주의 ・조합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권위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근거한 '新國家(Estado Novo)'는 일종의 전체주의 정권이라 할 수 있다.

新國家가 파시즘 정권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완전한 파시즘 정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분명 파시스트 체제를 모방했으며, 反민주적 ・전근대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국론이 분열되어 극도로 혼란한 조국을 구제하기 위한 명분하에, 질서와 통합을 앞세우며 귄위주의로 국가를 통제하는 정책을 강행한 新國家는 집권 엘리트의 전근대적 의식구조를 바탕으로 포르투갈의 근대화를 정체시키거나, 혹은 전근대적 국가로 회귀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910년의 혁명으로 王政이 폐지되고 제1공화국이 수립된 포르투갈은 그러나, 정치 ・사회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1926년의 군부 쿠데타로 제1공화국은 몰락하고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무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혼란을 통제하는 데엔 성공하였으나, 경제위기를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던 포르투갈 경제는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군사정권은 민간 경제전문가를 기용하기로 했다. 당시, 코임브라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살라자르는 '정당정치의 무용론'과 경제위기와 관련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 군부의 주목을 받았다.




정부의 모든 예산 편성 및 지출을 직접 관장한다는 조건으로 재무상에 취임한 살라자르는 1년만에 적자재정을 흑자로 전환시켰으며, 경제 안정을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계속되는 위기에 정부를 신뢰하지 못했던 포르투갈 국민들은 살라자르의 업적에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업적에 힘입어 1932년 수상에 임명된 살라자르는 국민연합당을 결성, 스스로 黨총재에 취임하였고 군부의 주요인사들을 따돌리며 서서히 정부의 실권을 장악해 갔다. 국론이 일치되어 안정과 질서를 바탕으로 대항해 시대를 개척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시킬 것을 역설한 만큼,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1933년 3월, 살라자르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정치체제를 제안하며 新헌법 초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과반수의 지지를 얻은 신헌법은 확정되었고, 이로써 新國家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반대 0.6% ・기권 43%의 투표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오히려 파시즘 체제의 탄생에 일조한 셈이다.

살라자르가 건설하고자 한 국가는 개인과 가정 ・국가가 일체화되는 강력한 국민국가였다. 강력한 정부야말로 공화국 수립 이래의 혼란을 극복하고 분열된 사회를 융합하는데 필수 요소라 생각했다.

그래서 살라자르는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부패한 이념'이라 비난하고, 조합주의에 근거해 각자의 계층에 알맞은 위치와 역할을 옹호하며 국가의 단결 ・사회의 단결 ・종교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공화정부가 시행했던 대부분의 개혁조치를 파기하고 중산층 말살 정책을 시도하는 한편, 전통 기득권층과 교회 ・군대와 경제 엘리트를 보호함으로써 전통과 종교, 그리고 권위를 통해 포르투갈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국가를 고전적인 형태 그대로 보존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新國家는 고전적인 권력의 분할을 표면적으로는 존중했으나, 실상은 정부와 의회 모두 살라자르라는 통치자, 즉 개인의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의 단면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이 반동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정권은 포르투갈의 사회 ・정치 발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민연합당 중심의 1당체제 ・국가경비대 창설 및 군대와 경찰력의 현대화를 통한 군부의 지지 확보 ・파시스트적 정치조직의 결성 ・비밀경찰 PIDE와 검열제도 등을 통해 국민을 억압하였다.
 
또한 살라자르 정권은 중세적인 쇄국정책을 펼치며 포르투갈 국민을 외부세계와 격리시켰으며, 위계질서를 내세워 계급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출신과 성별에 따라 행동 ・언행 ・의복 등과 같은 사회관습이 규정되었고, 인생의 진로마저 정해지는 등, 중세 봉건사회로의 회귀나 다름없었다.

소수나마 전문가 직업그룹과 노동자 계층을 육성했지만, 기존의 권력층인 교회 ・군대 ・지주층을 보호하여 전통적인 계급구조를 유지하려 하였다. '파시스트적 성격을 지닌 살라자르 체제는 동시에 전통을 중시하는 政體이기도 했다'는 주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통주의자들은 어떠한 발전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한 종류의 발전도 反가톨릭적으로 생각했다. 이는 당연히 교회와 살라자르 정권의 동맹을 가져왔다. 조합주의 ・反자유주의 ・反共주의에 있어 살라자르 정권과 공동의 이념을 소유하고 있던 교회는 정권과 민중간의 중재역할을 담당하였다.

살라자르가 지향했던 목표는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진보적인 근대주의 이념을 배척하며, 외국에 대한 정보도 최대한 규제되는 농업국가로서의 포르투갈이며, 귀족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성직자들은 가정과 종교적 윤리, 즉 가톨릭의 가치가 중시되도록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살라자르 정권의 폐쇄정책은 식민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현실에 전혀 맞지가 않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완전히 역사에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는 혼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살라자르의 정치 담론이다. 

1960년대 당시, 포르투갈 국민들은 독재와 억압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식민지에서의 전쟁을 경험함으로써 큰 불만과 원성을 표출하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최후의 식민지 제국이라는 거센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불만과 비난 속에 살라자르 정권은 국민들에게 '유일하면서도 고귀한 국가적 유산', 즉 아프리카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대항하여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는 확신을 줌으로써, 여론을 단합시키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효과를 노린 정치적 의미의 담론을 내세웠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표명하고,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목적을 담고 있는 이 담론은 또한 '기독교 기본 논리에 적대적인 세력과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최후의 보루'로써 해양진출을 통해 세계를 기독교화 ・文明化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강조하였다.

화려했던 과거와 역사적 영웅들을 이상화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국가의식을 고취시키려 했으며, 글로벌화 ・개방 ・협력 ・동반자 관계의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한편, '혼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라는 슬로건대로 쇄국체제를 유지 ・강화시켰다.

과거의 유산을 강조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살라자르 정권의 태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유럽의 발전에 동반하는데 실패하고, 국가는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살라자르의 準파시즘적 권위주의 체제가 40여년 동안 지속된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권위주의 체제의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된 포르투갈 특유의 정치적 배경, 즉 가톨릭 문화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反개혁운동, 절대왕정 등의 영향을 받아 권위주의 체제가 하나의 전통으로 남게 된 배경에 기인한다.

또한 19세기초의 자유주의와 절대주의 간의 내란 ・공화정 초기에 겪은 심각한 혼란은 안정을 바라는 국민들에게 살라자르 체제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장기화하도록 허락하였다. 포르투갈의 정치문화와 상황을 교묘히 반영한 파시즘 체제와 살라자르의 개인적 카리스마는 장기독재를 가능케 한 비결이었던 것이다.

정치 ・사회적 근대화에 있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살라자르 시대에 모든 면에서 근대화의 노력이 정체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정치 ・사회적 측면에서의 근대화는 퇴보하고 중세로 회귀하였지만, 경제 분야에서의 근대화는 느리게나마 서서히 진행되었다.

집권 초기, 살라자르는 극단적인 디플레 정책을 시행하면서 산업투자를 최대한 억제하고 기존의 낙후된 경제시스템을 유지하려 했다. 포르투갈은 전근대적 농업국가로 도시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국토의 80%가 농촌),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었고(70% 정도), 공업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국가였다.

남부에서는 전통적인 대농장 제도와 중세 이래의 사회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북부에서는 소규모 영농업이 주를 이루었다. 산업화는 뒷전으로 밀린 채, 오히려 농업의 자급자족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살라자르의 경제정책은 1950년대부터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식민지 유지를 위한 군비조달이 일차 목표가 되어 산업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살라자르는 소위 '6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 관세장벽 완화 ・외자 유치 ・상공업 장려 등, 낡고 폐쇄된 경제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1953).

도로와 다리가 건설되고, 항구 ・철도 등 물류기반이 개선되었으며, 사회간접자본 구축을 위해 대규모의 공적 자금이 투여되는 등, 포르투갈은 60년대 초중반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에 힘입어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구호 및 복지시설이 확충되었다.

그러나 각종 사회간접자본과 복지시설이 확충되었다고는 하나, 많은 프로그램들이 효과적으로 운영되지 못했고, 기금과 인력에서 제한적이었다. 일부는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정도였다.

동시에 살라자르는 높은 문맹률을 지적하면서 초 ・중등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구체적으로 학교의 증설을 꾀하였는데, 그 결과 문맹율은 1930년의 68%에서 1950년에는 45%, 68년에는 30%로 경감하는 데 성공하였다. 반면 고등교육은 강력히 통제하였으며, 여성 교육도 엄중히 제한하였다.

살라자르 정권은 집권 후반기에 가서 제한적이나마 경제개혁을 이룩하며 산업경쟁력을 강화시켰고, 사회복지 ・교육 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국가재건 노력으로 산업 ・제조업 ・무역 ・서비스 ・관광업은 경제의 원동력이 되어 성장을 이끌었으며, 문맹도 점차 퇴치되어 갔다.

전통적인 농업과 가난한 농촌이라는 '늙은' 세계는 조금씩 사라지고, 대신 근대화를 수반하는 광범위한 사회 변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낙후되었지만, 아무튼 60년대 이후 포르투갈은 서서히 근대화된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의 번영 와중에도, 살라자르 체제는 여전히 견고함을 자랑하며 유지되었다. 1968년 9월, 머리 부상으로 퇴진한 살라자르를 대신하여 카에타노가 수상직을 계승했지만, 일부 자유화 조치를 제외하면 살라자르 노선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식민전쟁의 장기화는 사회 내부의 긴장을 점차 고조시켜 갔다.

혼란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초의 포르투갈 사회에서 新國家는 나름의 해결책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準파시즘 체제는 오히려 국가 근대화에 있어 역행적인 기능을 하게 되었다. 권위주의 ・비밀경찰 ・감시와 억압 ・검열 등을 통해 국민을 감시한 폐쇄정책은 포르투갈을 과거로 회귀하게 만들었다.

비록 살라자르의 집권 이후 국론 분열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살라자르가 시도한 근대화는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집권 후반기의 근대화도 어디까지나 경제분야에만 국한될 뿐이다.

정치 ・문화 ・사회 등, 포르투갈 사회의 대부분은 중세시대로 회귀하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봉건적 ・권위주의적 체제를 유지하며 전근대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덧글

  • 들꽃향기 2011/04/30 01:40 # 답글

    포르투갈의 파시즘 체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던 참에, 그간 올려주시는 살라자르 관련 글은 잘 읽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3F 정책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조합주의-종교 등등 동원할 수 있는 기재는 철저히 동원한 상당히 강고한 체제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 에드워디안 2011/04/30 11:13 #

    전통적 기득권층(특히 가톨릭 교회)의 지지가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또한 살라자르 개인의 천재적인 정치력도 체제유지에 한 몫 했던 것이죠.

    그러나 60년대 이후, 아프리카 전쟁에 따른 군부의 불만, 보다 급속한 산업화를 희망하는 재계의 압력, 종교계 일각의 정권 비판 등이 겹쳐 파시즘 체제의 기반은 서서히 무너져갔고, 관광객과 이민자들을 통해 해외정보가 조금씩이나마 알려지면서, 시대착오적인 독재를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여론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종합되어 4.25로 연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구요.

    부족한 글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 만슈타인 2011/04/30 02:30 # 답글

    진짜 천재네요 -_- 근대 싫어하는게 근대 산물인 경제학에 능통해서 교수를 하고 재정흑자를 만들다니 --_-;;
  • 에드워디안 2011/04/30 11:19 #

    100여년만에 흑자재정을 달성한 업적이 강조된 것도 살라자르의 권력 장악에 큰 도움이 되었죠.
  • Aydin 2011/04/30 02:41 # 답글

    여러모로 신기하네요. 1950년대까지 포르투갈 경제는 1인당 소득에서 스페인을 따라잡고 그럭저럭 살라자르 시대 말까지 적어도 따라가는 수준은 유지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문맹률이 저 수준이면 동시대 태국과 비슷한 레벨이군요..;;
  • 에드워디안 2011/04/30 11:23 #

    고등교육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살라자르의 우민화 정책(의무교육기간이 3년에 불과)으로 포르투갈 경제는 현재까지 그 휴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정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포르투갈의 처참한 교육실정이 만성적인 경기침체의 주요 원인이라 지적하기도 했다네요.
  • winbbs 2011/04/30 07:29 # 답글

    말기까지 부정부패에 찌들어 있고 전시통제경제에 실패해 레코드판을 생산할 정도였던 히틀러 내각과 비교될 정도이군요. (물론 히틀러 내각도 유능한 참모진과 독일 공업력 덕분에 버틸수 있었지만요.)
  • 에드워디안 2011/04/30 11:27 #

    교수출신 장관들의 비율이 20% 이상을 상회한 살라자르 내각의 질적 수준이 차라리 히틀러 내각의 그것보다 나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KittyHawk 2011/04/30 10:16 # 답글

    파시스트식 경례는 만국 공통이군요...;;
  • 에드워디안 2011/04/30 11:28 #

    저게 나름 인기가 있는 것이라서...(?!)-_-
  • 누군가의친구 2011/05/01 00:41 # 답글

    요즘 포르투갈 경제가 안좋은 상황인데 설마 저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을려나요?...ㄱ-
  • 에드워디안 2011/05/01 01:04 #

    살라자르의 집권 마지막 10년(1960년대)이 포르투갈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잘나갔던 시기였다며, 노년층을 중심으로 향수가 일고 있다고 합니다...-_-;;
  • 소드피시 2011/05/02 14:54 # 답글

    파시스트 독재는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단기간의 경제적 성과와 국론합일에는 민주주의보다 낫기도 하나 봅니다. 뒤끝이 안좋아서 문제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에드워디안 2011/05/02 20:48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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