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르투갈의 군인 ・정치가 ・자작(子爵). 대대로 군인귀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1년, 리스본의 콜레지오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기병대에 입대. 1차대전 당시엔 아프리카 전선으로 배치되어 모잠비크 북부에서 독일군과 교전했다(1916~17). 이후, 육군 항공대로 전속하여 프랑스에서 파일럿 수업을 받았으며, 다시 모잠비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종전을 맞았다.
1929년, 고아 총독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인도에 건너가 총독부 사무국장을 지냈고(34~35년 총독직 대리), 1936년에는 부친의 후임으로 총독에 취임, 2년간 재임했다. 탄코스 공군기지 사령관을 거쳐 1944년, '포르투갈 여단(準파시즘 군사조직)'의 단장을 역임하였고, 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1945).
1949년, 대장으로 진급한데 이어, 라제스 공군기지 사령관과 제3군단장을 역임. 1951년, 카르모나 대통령이 서거하자 국민연합당의 지명을 받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 그 해 7월에 취임하였다.
재임 중엔 의례적인 행사를 제외하면 아무런 실권이 없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에 불과했으며, 그럼에도 살라자르 수상과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시종 불화를 빚었던 탓에, 임기 만료와 동시에 대통령직에서 사실상 '경질'되어 재선을 단념해야 했다(1958). 퇴임 후엔 공군 원수(元帥)로 추대되었다.
1961년 4월의 反살라자르 쿠데타 미수사건에 연루되었는데, 국방장관이 주도한 이 사건의 배후엔 살라자르 정권의 식민지 고수정책을 탐탁치 않게 여긴 미국이 후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준비 부족과 軍內 의견의 불일치,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사전에 진압당하고 말았다.
공사(公私) 구분이 엄격하였으며, 귀족 출신이면서도 검소하고 모범적인 생활상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부인과는 대통령 퇴임 직전 사별하였다. 1964년 9월 2일, 심근경색(추정)으로 사망.
덧글
2. 로페스야 나름 성골일 수도 있겠지만, 살라자르는 진골이라 보기엔 출신 배경이 보다 한미했죠.ㅋ
물론, 실권이 없는건 매한가지였지만...-_-
다만, 지적하신대로 망집이라 볼 수밖에 없는 식민지에 대한 집착, 소위 3F라 불리는 우민정책이 포르투갈의 장래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구요. 특히, 식민전쟁의 경우, 단순히 국가적 위신 외에도 식민지 포기에 수반한 경제기반의 붕괴 위험성 ・수백년에 걸쳐 형성되어온 혼혈 인종의 처리 문제 ・구태의연한 문명화론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