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 (2) 세계사


워싱턴 군축조약과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타격 이래로 일본의 대외국책(對外國策)은 태평양에서 만몽(滿蒙)으로의 목표 전환이 불가피해졌다. 본래, 만몽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일본과 밀접한 관계을 맺었고, 일청(日淸) ・일로(日露)의 2대전쟁도 만몽경영을 위한 희생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개국(開國)과 유신(維新)의 다사다난한 격랑을 거치며 국력 충실화를 도모한 일본은 먼저 일청전쟁을 계기로 대만(臺灣)을 획득, 남양(南洋)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였으며, 다시 일러전쟁의 결과 조선반도와 남만주를 장악해 본격적인 대륙경영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육군을 중심으로 만몽을 경영하고, 해군을 중심으로 남양을 경영한다... 즉, 만몽과 태평양은 일본 팽창정책의 양대 쌍익(雙翼)인 셈이다.

일취월장(日就月將), 성장해가던 일본의 최성기(最盛期)는 구주대전(歐洲大戰)의 전란기였다. 유럽 전체가 전쟁에 몰두한 틈을 타, 일본은 북쪽으론 만몽에서의 세력 확장과 시베리아 출병(出兵), 남쪽으로도 독일의 속령(屬領)이었던 남양제도를 점령, 머나먼 적도(赤道)에 이르기까지 각각 북진(北進) ・남진(南進)의 야망을 실현시켰다. 당시, 일본의 득의(得意)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가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대전이 종결되고 영미(英美)의 시선이 재차 동양에 집중, 일본의 세력은 즉각 지적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영미는 일본에 대해 시베리아 철병과 만몽 이권의 축소를 강요하는 한편, 태평양에서의 수비를 강화하였고, 그것이 워싱턴 조약을 중심으로 연출된 것이다. 이로써 대외팽창의 기세가 한 풀 꺾이게 되었으니, 일본은 국제무대에서 당분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장래를 도모해야만 했다.

한편으로, 일본은 대전 와중에 획득한 20여억엔(円) 상당의 막대한 부력(富力)을 보유한데다, 21개 사단과 86함대의 정예를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따라서, 영미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를 충분히 극복할 만한 실력을 잠재하였고, 때문에 영미 양국도 내심 일본에 외경(畏敬)의 태도를 취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까지 끌어들여 영미의 세계적 양단책에 대항하는 방책을 강구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정세를 일변시킬만한 용기가 없었고, 주위의 사정상 영미 양국에 노골적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내적으로도 벼락경기가 막을 내리고, 보선법(普選法) 실시 등의 정치개혁 요구와 사회주의 세력의 신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내외적으로 상황이 곤란한 시기에 돌연, 관동진재의 대고난(大苦難)이 제도(帝都)를 엄습해 형용키 어려운 타격을 안겨주고 만 것이다.

대진재의 결과, 일본은 십수만명의 생명(生命)과 1백 수십억엔(円)의 재화(財貨)를 하루아침에 상실해버리고, 과거 50년간 축적해 온 찬란한 시설이 급격히 와해되었다. 영국의 <맨체스터 가디언>紙에 의하면, 금번(今番) 대진재로 일본이 감수할 총체적 피해 규모는 구주대전 4년간 프랑스가 입은 손실과 맞먹을 것이며, 일러전쟁시의 전비(戰費)를 상회할 가능성마저 높다고 한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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