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應欽 (1890~1987) 세계사




중국의 군인 ・정치가. 자(字)는 경지(敬之), 원적(原籍)은 강서성(江西省) 임천(臨川)이며 1890년 4월 2일, 귀주성(貴州省) 흥의현(興義縣) 니감촌(泥凼村)에서 출생. 장개석(蔣介石) 휘하 '황포계(黃浦系) 2호 인물'로서 북벌(北伐) ・중일(中日)전쟁 ・국공(國共)내전 등을 거친 국부군(國府軍) 원로이다.

귀양(貴陽) 육군 소학당 ・무창(武昌) 육군 3중학당을 거쳐 1909년 일본에 유학, 진무학교(振武學校)와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修學)했다. 체일(滯日)기간 동맹회(同盟會)에 가입, 신해(辛亥)혁명 직후 귀국했으나, 반원(反袁)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1916년 5월, 일본 육사를 28기(期)로 졸업, 재차 귀국하여 귀주 ・운남(雲南)군벌의 휘하를 전전하다가 손문(孫文)의 광동(廣東)정부에 참여하였다.

황포군관학교 교무 주임 ・대원수부(大元帥府) 참모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 제1사단 단장 ・조매(潮梅) 경비총사령을 역임, 진형명(陳炯明)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활약했다. 1926년의 북벌전쟁시 동로군(東路軍)을 지휘, 복건(福建) ・절강(浙江) 등지의 평정에 기여하였으며, 남경(南京)정부 수립 이후 절강성 주석(主席) ・훈련부총감에 이어 1930년 3월, 군정(軍政)부장으로 취임, 공비(共匪) 토벌에 앞장섰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화북(華北) 침략이 본격화되자,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란 미명하에 우선 타협을 모색하기 위해 군사위원회 북평(北平)분회 위원장 자격으로 당고(塘沽) 정전협정(1933)과 하매(何梅)협정(1935)을 체결했다. 1935년 4월, 육군 일급상장(一級上將=대장)으로 진급했지만, 이듬해 서안(西安)사건에 대하여 '강경조치'를 주장, 도리어 장개석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일전쟁 기간에 제4전구(戰區) 사령관 ・참모총장 ・육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하였고, 종전(終戰)시 남경을 접수, 일본 지나(支那)파견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1946년 6월, 유엔 주재 군사참모단 중국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미국에 체재. 국공내전의 패색이 짙어져가던 1948~49년에 잠시 행정원장(총리) 겸 국방부장으로 재직하였으나, 남경 ・상해가 함락되자 총사직, 홍콩을 경유 대만(臺灣)으로 탈출했다.    

대만으로 건너온 이후론 허울 뿐인 국민당 중앙평의의원 ・전략 고문위원회 주임의 직함만을 유지한 채, 권력의 핵심에서 멀어져 갔다. 자칭 '세 가지의 취미(마작 ・사냥 ・골프)'와 도덕 관련 저술, 몇몇 협회 활동에 몰두하면서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 정계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이따금 자신의 의견을 제시, 1980년대 중반, 장경국(蔣經國) 총통이 '위로부터의 민주화 개혁'에 착수하자 우려를 토로하기도 했다.   

일본과는 깊은 인연을 맺은 만큼, 다년간 방일(訪日) ・초청을 통해 정 ・재계 ・문화계 보수인사들과 교제, 중일(中日) 문화경제협회를 설립하는 등 국민당내(內) 대표적 지일파로 유명하며, 1965년엔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수장(受章)했다. 1987년 10월 21일, 근 18개월간 투병생활을 보내던 대북(臺北) 영민총의원에서 사망. 향년 97세. 장례식은 12월 1일, 삼군(三軍)대학에서 거행되었다.



덧글

  • 위장효과 2011/12/07 07:54 # 답글

    그러고보니 국공내전및 일본과의 전쟁 기간중 공을 세웠던 장군들은 하나같이 토사구팽당했군요.
  • 에드워디안 2011/12/07 13:18 #

    그나마 서안사건 당시 장개석과 함께 감금당했던 진성 정도가 천대(遷臺) 이후로도 승승장구 했었지요.
  • KittyHawk 2011/12/07 10:24 # 답글

    국공내전의 진행과정 등에서 드러나는 장개석의 처신들을 보면 이 사람에겐 천운이란 게 없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 에드워디안 2011/12/07 13:19 #

    일정 부분 그 자신의 책임이 없지는 않지만서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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