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劉宋) 후기의 정치 (2) 세계사


서기 464년 윤5월, 효무제가 재위 11년으로 붕어하고, 태자 자업(子業)이 즉위하였다. 효무제는 시기심이 강해 대신들을 별명으로 낮추어 부르는 등 잔폭한 성정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가 죽자 많은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효무제 사후(死後), 한인 대법흥(戴法興)은 유조(遺詔)를 받든 태재(太宰) 유의공 ・유원경(柳元景) ・안사백 등을 무시한 채, 조칙(詔勅) 시행을 혼자서 결정하고, 상서성의 대소사(大小事)를 전단(專斷)하였는데, 얼마 안 가 이들 4명은 모두 전폐제(前廢帝)에게 살해당했다.

당초, 고명대신(顧命大臣) ・원로들의 위세에 눌리는 듯 했던 새로운 천자는 유전적 본성을 드러내어 살육을 일삼았다. 전폐제의 음학형살(淫虐形殺)로 종실과 백관은 물론, 은행(恩幸)마저도 신명(身命)의 안전을 두려워하였으며, 귀족 중에선 지방으로 피신한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지방에 진수(鎭守)하던 조부 문제(文帝)의 제자(諸子)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궁중에 구금,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문제의 11남(男) 상동왕(湘東王) 욱(彧)은 복심(腹心)의 한인 완전부(阮佃夫) ・왕도륭(王道隆), 천자의 좌우 행신(幸臣)인 수적지(壽寂之) ・강산지(姜産之) 등과 밀모(密謨), 심유지(沈攸之) ・왕경칙(王敬則) 등 무장(武將)들의 후원을 얻어 화림원(華林園, 宮中 정원)에서 밤놀이에 빠져 있던 폐제를 암살하였다. 쿠데타에 성공한 상동왕이 즉위하니, 이가 태종(太宗) 명제(明帝)이다.

명제가 즉위한 태시(泰始) 원년(元年, 465)부터 이듬해 말에 걸쳐 강주(江州)자사로 재직 중이던 효무제의 3남 진안왕(晋安王) 자훈(子勛)을 옹립하여 명제 즉위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자훈의 격(檄)을 받자, 효무제의 여러 아들과 양주(揚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익주(益州) 등의 주진(州鎭)들이 자훈측에 호응했는데, 건강(建康)의 명제측은 단양(丹陽) 1군(郡)만을 보유하였을 뿐이다. 이처럼, 반란은 전국을 혼란에 빠뜨려 명제측의 심유지 ・건안왕(建安王) 휴인(休仁)의 활약에 힘입어 겨우 평정되었다.

반란이 전국적 규모로까지 확대된 원인은 명제측이나 반란측이나 쌍방에 광범한 지방호족 세력이 참가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이들 호족은 내전의 기회를 활용해 억압된 중앙 관계 진출의 숙원을 이루어 남조 문벌귀족체제의 봉쇄성을 타파하려는 데에 있었다. 송무제(宋武帝) 이래 남조에서는 지방 관장(官長)을 그 본적지에 임용, 호족 세력을 지방 통치기구에 흡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주직(州職)이나 부직(府職)에는 재지(在地)의 토호(土豪)층으로 문벌 서열로는 2류에 속하는 사족(士族) 혹은 한문(寒門) 출신들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어떤 반란이 일어나면 숙원 달성을 기대하여 휘하의 종족 ・사속(私屬) 뿐만 아니라, 향리사회의 기반을 통해서 보유하고 있는 여러 세력으로 현실의 구체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처신하고 있었다. 지방 토호의 광범한 존재, 그리고 이들이 문벌체제 타파의 계기로 삼아 반란을 지지하고, 적극 참여한 데서 진안왕 자훈의 반란이 대란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

효무제는 결코 현명한 군주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문벌귀족 억압 ・중앙집권 ・황권(皇權) 강화의 의도에서 한인을 대거 발탁하였던 반면, 명제에게선 적극적인 시책을 찾아볼 수가 없다. 유송 왕조는 초기부터 종실의 여러 친왕(親王)을 주진 장관에 배치, 황실의 번병(藩兵)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이들이 반(半)독립적 지위를 굳혀 때로는 중앙정부와 대립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효무제는 무단통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후고(後顧)의 염려를 제거하기 위해 종실의 여러 왕자들을 숙청하였다. 명제도 시기심과 의심이 깊어 측근들과 비밀리에 생살(生殺)의 대사를 결정해가면서, 효무제의 아들 14명과 계양왕(桂陽王) 휴범(休範)을 제외한 모든 동생들을 살해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따르면, 이 공포정치 시대에 귀족 자제들 상당수가 지방으로 도주하거나, 전란으로 흩어져 수명을 다한 자는 백분의 일도 안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인적면에서의 문벌귀족 쇠퇴를 엿볼 수 있다.

서기 472년 4월, 명제가 재위 7년으로 붕어하고, 태자 욱(昱)이 즉위하니 이가 후폐제(後廢帝)이다. 명제는 임종 직전 상서령 원찬(袁粲)과 저연(楮淵) ・채흥종(蔡興宗) ・심유지(沈攸之) ・유면(劉勔) 등 5명에게 고명(顧命)하여 어린 황제를 보좌토록 하였다. 저연은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인 무장 소도성(蕭道成)을 추천, 우위(右衛)장군 영위위(領衛尉)로 임명해 수도의 금군(禁軍) 지휘권을 장악케 하였다. 
 
명제의 동생으로 유일하게 생존한 계양왕, 즉 후폐제의 숙부인 강주자사 유휴범은 자신의 지위에 불만을 느껴 원휘(元徽) 2년(474)에 반란을 일으켰다. 소도성은 명제 이래 금군을 공동 지휘하던 대명보(戴明寶) ・완전부 ・왕도륭 등과 소도성의 장래를 촉망한 진현달(陳顯達) ・왕경칙 등의 장수들과 결합해서 이 난을 평정하였다. 소도성은 전공으로 중령군(中領軍)이 되어 군정(軍政) 대권을 통솔하게 되었다.

휴범의 난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엔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가 제위를 탐내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진압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여러 친왕의 지방 군진(軍鎭) 휘하엔 현지 호족이나 한인, 그밖에 야심을 품은 인재들이 집결 ・연결되어 기회가 있으면 연소한 군진 장관인 황족을 추대하여 익대지공(翼戴之功)으로 출세하려는 야심가들이 많았다. 휴범 ・경소의 거병도 바로 이러한 사례의 하나이다.

후폐제에 대해서 <송서(宋書)> 본기(本記)는 그의 잔학성과 상궤(常軌)를 벗어난 악행을 기록하고 있으나, 과연 얼마만큼의 진실성이 있는지 액면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겨우 10대 초반의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송서의 기사 내용은 제(齊)왕조의 찬탈을 정당화하려는 조작된 이야기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하튼, 위명(偉名)과 권세가 날로 커져감에 따라, 골육상잔으로 근간이 붕괴되버린 송조(宋朝)를 대신하여 소도성은 정석대로 선양(禪讓) 절차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덧글

  • 누군가의친구 2011/12/24 08:28 # 답글

    유욱의 행위에 대한 걸 접했을때는 참 식겁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러저나 남조의 왕들이 워낙 막장이 많아서 의심도 들지 않았더란 말입니다.ㄱ-
  • 위장효과 2011/12/24 09:06 #

    그런데 그정도로 세밀하게 조작하기도 참 뭣합지요. 유송왕조도 근친상간으로 치자면 기간만 짧았지 합스부르크 가문하고 맞먹을 정도니 그 내력에서 정신질환자 한 둘 정도는 나올만하고 뭣보다도 삼국시대-진조의 일시적 통일-8왕의 난-5호의 침입등으로 정신없는 내전기에 제정신박힌 사람이 군주노릇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 누군가의친구 2011/12/24 09:10 #

    저도 그래서 막장이라서 막장이라는 생각밖에요.ㄱ-
  • 에드워디안 2011/12/24 14:31 #

    위장효과님 말씀대로 당시의 사회적-가정 풍토는 물론, 남조 특유의 기형적 정치 시스템 자체가 폭군 등장에 한 몫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지요. 상술한 한문 계층의 실권 장악과 지방호족 ・군벌의 대두, 잦은 내란과 주살, 가렴주구 등 남조 사회의 병폐도 따지고 보면 귀족제를 극복, 우회적으로나마 황권 강화를 추구하려는 차원에서 시도되었던 비밀측근정치에 상당 부분 책임이 있는 만큼, 군벌천자와 문벌귀족 양자의 존재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던 셈입니다. 천자-측근 관료의 결합, 비밀주의적 국정 운영은 필시 권력 남용을 초래하였으며, 마땅한 규제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송제시대 폭군들의 기행이 판을 쳤던 것이구요.

    때문에 귀족-한문-군벌간 대립 ・모순을 해소, 이들의 역량을 응집시켜 송제시대 이래의 정정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성세(盛世)를 구가한 양무제는 명군이라 칭송을 받고도 남을 만 합니다. 다만, 말년의 최후는...-_-;;
  • 행인1 2011/12/24 10:13 # 답글

    친족들이 들고일어나 왕조를 위협하는건 왠지 전대의 진왕조를 연상시키는군요.
  • 에드워디안 2011/12/24 14:25 #

    황실의 울타리란 놈들이 대놓고 자중지란을 일으켰다는 점은 쏙 닮았지 말입니다.
  • BigTrain 2011/12/26 18:20 # 답글

    합스부르크조나 유송을 보면 근친교배는 리얼 악의 축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럭저럭 멀쩡하게 굴러가다 진골에게 넘어간 신라를 보면 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유구한 역사와 수많은 왕조만큼이나 기이한 왕들도 많아서 참 끊을 수 없는 게 중국 역사라니까요. ㅎㅎ
  • 에드워디안 2011/12/27 22:42 #

    지위고하를 막론, 신변의 안전부터 오늘 내일을 장담하기 힘들었던 중세(中世)란 시대적 상황이 그만큼 파란만장한 역사를 남기지 않았나...라는 식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 okna kielce warszaws 2022/09/18 17:06 # 삭제 답글

    좋은 아이디어, 이런 글 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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