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을 수리해선 안 되는 이유 세계사


태원(太元) 2년(377) 10월 임인일(12일), 호군장군(護軍將軍) 겸 산기상시 왕표지(王彪之)가 죽었다. 애초에, 사안(謝安)이 궁실(宮室, 顯陽宮)을 늘려서  고치려고 하자, 왕표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흥(中興, 南遷) 초기에 동부(東府, 建康城 외곽)에서 즉위하여 검소하고 비루함이 있었으나, 원제(元帝)와 명제(明帝) 두 황제께서 역시 고치지 않으셨고, 소준(蘇峻)의 난(亂)으로 성제(成帝)께서 난대(蘭臺)에 머무르셨는데, 자못 추위와 더위를 가릴수도 없어 수축(修築)하여 다시 지으셨습니다. 한위(漢魏)에 비교하면 검약하고 협소하나, 장강(長江)을 건넜을 때보단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풍요함과 간략함의 중간으로 스스로 마땅함을 따라 증보하였을 뿐입니다. 오랑캐가 다 없어지지 않아 바로 군대를 쉬게하며, 병사를 길러야 하거늘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수고롭고 어지럽게 하시렵니까?!"

사안은 '궁실이 허물어지고, 장엄하지 않으면  후세가 무능했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왕표지가 '무릇, 천하의 대사(大事)를 맡아 마땅히 나라를 보호하고, 집안을 평안케 하는 것이야말로 조정의 유일한 진실함인데, 어찌 궁실과 가옥을 고쳤다고 해서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사안이 그 뜻을 꺾을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끝내 왕표지의 생전엔 궁실을 수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3년(378) 정월, 상서복야 사안은 궁실이 무너졌기 때문에 신궁(新宮) 건설을 건의하였다. 2월 을사일(17일), 황상(皇上, 晋孝武帝)이 잠시 회계왕(會稽王)의 저택으로 옮겨갔다. 2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날마다 사역하는 자가 6천명이었다. 사안과 장작대장(將作大匠) 모안지(毛安之)가 수리를 결의하여 모두 오묘한 형상을 모방... 7월에 신궁이 완성, 내외전우(殿宇)가 대소 3천 5백칸이었다.


PS. 간문제 즉위 당시의 일화만 보더라도, 동진시대엔 '기골있는 귀족'이 더러 존재했었지...



덧글

  • jaggernaut 2012/05/28 15:02 # 답글

    밀려서 쫓겨나고도 궁전고칠 맘이 들었다니 참 무슨 사고방식인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다 3500칸이라니; 이건 아예 눌러살 마인드라고 밖에는...
  • 에드워디안 2012/05/28 16:21 #

    청담과 보가(保家)에만 집착한 채, 환온의 북벌마저 사사건건 태클을 건 귀족 나으리들 입장에선 중원수복이란 대의명분은 흔한 '정치구호'에 불과했던데다, 백적제도로 상징되는 북방유민집단 특유의 기득권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던 사회 ・경제적 사정 또한 커다란 요인이었을 겁니다. 황제는 황제 나름대로 무능하지, 귀족들도 저 모양이었으니, 진무제 이래의 뻘짓과 더불어 역사상 사마씨왕조가 인기가 없을 수밖에요.;;
  • 2012/05/28 22: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위장효과 2012/05/31 19:02 # 답글

    사마염이 후한 환제, 영제와 비슷하다는 평을 생전에 이미 들었다죠. 건강으로 피난간 후에도 사실상 기존 동오호족과의 연립정부밖엔 안됐고.
  • 에드워디안 2012/05/31 19:39 #

    강남호족은 진황실 ・북래귀족과 그 휘하 군벌의 위세에 눌려 '2류'로서의 지위를 감내하던 실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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