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온의 성한(成漢)정벌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세계사




안서장군(安西將軍) 환온(桓溫)이 장차 한(漢, 成漢)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강하상(江夏相) 원교(袁喬)가 환온에게 권하며 말하였다.

"...의론이 일치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천하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호(胡)와 촉(蜀)의 두 오랑캐(後趙와 成漢)일 뿐인데 촉은 비록 험하고 굳지만 호에 비해선 약하니, 장차 이들을 제거하려면 의당 그 가운데 쉬운 것을 먼저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세(李勢, 漢主)는 무도하여 신민(臣民)이 따르지 않고, 험하고 멀리 위치했다는 것만 의지하여 전쟁 준비를 수행치 않고 있습니다.

의당 정예의 졸병 1만명이 가볍게 무장(武裝)하고  질풍처럼 달려간다면, 그들이 눈치챘을 무렵에 우리는 이미 촉의 험한 요새지역을 빠져나왔을 것인즉, 한 번에 싸워서 사로잡을 수 있을 겁니다. 본래 촉 지방은 부유하고, 호구(戶口)도 번성하였으므로 제갈무후(諸葛武侯, 諸葛亮)가 이를 이용하여 중하(中夏, 中原)에 맞섰으니 이곳을 획득한다면 국가(國家)에 커다란 이로움이 됩니다.

논자(論者)들은 많은 군사가 서쪽으로 가기만 하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틈을 엿볼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럴 듯하지만 옳지 않습니다. 오랑캐는 우리가 만 리(里)나 되는 곳으로 멀리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속으론 겹겹이 대비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침략해 오더라도 장강(長江) 연변의 군사들이면 충분히 지켜낼 것이니,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환온이 이 말을 따랐다.

영화(永和) 2년(346) 11월 신미일(11일), 환온이 익주(益州)자사 주무(周撫)와 남군(南郡)태수인 초왕(譙王) 사마무기(司馬無忌)를 인솔해 한(漢)을 정벌, 표문(表文)을 올려 출발... 원교에게  2천명을 지휘하게 하여 선봉으로 앞세웠다. 조정에서는 촉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  먼데다, 환온의 무리가 적은 상황에서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므로 모두가 근심하였는데, 유담(劉惔)만이 반드시 승리하리라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그 연고를 묻자, 유담이 말하였다.

"박희(博戱, 도박)를 가지고 그것을 압니다. 환온은 박희를 잘하는 사람인데  승산이 없다 판단되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촉을 평정하고 나서 환온이 조정을 통제할 것을 걱정할 뿐입니다."

3년(347) 봄 2월, 환온의 군사가 청의(靑衣, 사천성 명산 북쪽)에 도착했다.

이세(李勢)가 크게 군사를 발동해 숙부인 우위(右衛)장군 이복(李福)과 진남(鎭南)장군 이권(李權), 전(前)장군 이잠견(李昝堅) 등을 파견하여 산양(山陽)에서부터 합수(合水)로 나가게 했다. 제장들은 장강 남쪽에 매복을 하고서 진군(晋軍)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잠견은... 장강 북쪽의 원앙기(鴛鴦碕)에서 강을 건너 건위(犍爲)로 향하였다. 3월에 환온이 팽모(彭模, 사천성 팽산현 동남쪽)에 도착했는데, 참모들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각기 다른길로 동시에 진격하여  한병(漢兵)을 분산시키고자 하였다.

원교가 말하였다.

"지금 현군(懸軍)이 되어 깊이 들어와서 만 리나 되는 곳의 밖에 있는데, 승리한다면 큰 공로를 세울 수 있지만, 승리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이니, 마땅히 군세(軍勢)를 합쳐 한 번 싸워서 승리를 쟁취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군사를 둘로 나누면 무리들의 마음이 결집되지 않을 것이고, 만약에 한 쪽이 패배한다면 대사(大事, 戰勝)는 가버릴 것이다. 군사를 모아서 전진하며, 솥을 다 버리고 사흘치의 양식만 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마음을 보이면, 승리는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

환온이 이 말을 따랐다.

참군(參軍) 손성(孫盛)과 주초(周楚)를 남겨두어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치중(輜重, 보급 수레)을 지키게 하는 한편, 환온이 스스로 보병을 거느려 곧바로 성도(成都, 成漢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복(李福)이 나아가서 팽모를 공격했는데, 손성 등이 분투하여 쳐서 이들을 쫓아내었다. 환온이 진격하면서 이권(李權)과 조우(遭遇)해 세 번 싸워서 세 번 모두 승리했으니, 한(漢)의 군사들이 흩어져서 성도로 달아났고, 진군(鎭軍)장군 이위도(李位都)는 환영하며 환온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이잠견이 건위에 이르러서 마침내 환온과는 다른길로 가고 있음을 알고선, 돌아와서 사두진(沙頭津)에서 강을 건넜는데, 도착하였을 무렵에 환온의 군대가 이미 성도의 십리맥(十里陌)에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이잠견의 무리가 스스로 무너졌다. 이세가 무리를 모아서 작교(笮橋)로 나아가 싸우게 하였는데, 환온의 선봉부대가 불리해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화살이 환온이 탄 말의 머리에 떨어졌다. 

병사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려는 찰나, 북치는 관리가  실수로 진격하는 북을 치자, 원교가 칼을 뽑아들어 사졸들에게 싸우기를 독려하니, 드디어 그들을 대파(大破)하였다. 환온이... 성도에 도착, 그 성문을 불태워버리자, 한나라 사람들은 떨리고 두려워서 다시금 싸울 생각을 갖지 못하였다. 이세가 밤중에 동문(東門)을 열고 달아나 가맹(葭萌)에 도착하였으나, 이윽고 산기상시 왕유(王幼)로 하여금 항복문서를 환온에게 보내어 '3월 17일, ...머리를 조아리건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곧바로, 친(櫬, 棺)을 수레에 싣고 면박(面縛)하고 군문(軍門) 앞으로 갔다. 환온이 면박을 풀어주어 친을 불태우고, 이세와 그 종실들 10여명을 건강(建康, 南京)으로 호송했으며, 사공(司空) 초헌지(譙獻之) 등을 참좌(參佐)로 삼고, 현명한 사람을 천거하여 표창하니 촉(蜀)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였다.

한(漢)의 옛 상서복야 왕서(王誓)와 진동(鎭東)장군 등정(鄧定), 평남(平南)장군 왕윤(王潤), 외문(隗文) 등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배반하였는데, 무리가 각기 1만여명이었다. 환온이 몸소 등정을 공격하고, 원교(袁喬)에겐 범문(范文, 林邑王)을 치게 하였으니, 모두 이들을 깨뜨렸다. 환온이 익주자사 주무(周撫)에게 명하여 팽모(彭模)를 진수(鎭守)하게 했으며, 왕서와 왕윤의 목을 베었다.

이세(李勢)가 건강에 도착하자, 그를 귀의후(歸義侯)로 책봉하였다.


PS : '단장(斷腸)'이란 용어가 유래된 설화는 바로 환온의 촉 정벌을 배경으로 한 것임.



덧글

  • 엽기당주 2012/05/31 14:57 # 답글

    학부생때 자치통감을 한자로 된 것을 읽었습니다만.. 이 부분은 다시 보니 가물가물하군요.

    북치는 관리가 실수로 진격북을 쳐서 엉겁결에 이겨버리는건 참 실감나 보입니다. 동양의 사서들을 보면 의외로 정황을 실감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문이 많이 눈에 띕니다.

    실제로 전쟁에서도 좀 황당한 에피소드로 인해 전장의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부분을 그냥 '누가 누구랑 싸워서 이겼다'라고 기술한 역사서술도 많으니까요..
  • 에드워디안 2012/05/31 15:27 #

    춘추좌씨전과 사기를 읽으면서 느낀 소감이 동시대 서양사료들에 비해 '간결하다'는 것이었죠...ㅋ
  • 엽기당주 2012/05/31 15:37 #

    네. 서양역사는 수사학의 발달때문인지 로마사도 후기부터는 좀 난잡한 미사여구가 많은 사서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중세는 아예 이게 신학책인지 역사서인지 알수없는...(사실 분리가 불가능한 경우가 대다수) 기록들로 가득차있으니까요.

    그에 비해 동양의 기록문화는 매우 발달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 에드워디안 2012/05/31 17:13 #

    송원대로 갈수록 자료도 비교적 풍부해지고, 당장 우리네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나름 압권이죠...ㅇㅇ
  • jaggernaut 2012/06/01 08:29 # 답글

    새끼 잔나비를 붙잡았더니 어미가 수백리를 따라오다가 결국 배에 떨어져 죽었는데 배를갈라보니 장이 다 끊어졌다는 고사지요?
  • 에드워디안 2012/06/01 08:34 #

    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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