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대전에 대한 자치통감 기사 세계사


태원(太元) 8년(383) 여름 5월, 거기(車騎)장군 환충(桓沖)이 군사 10만을 거느려 진(秦)을 정벌하고자 양양(襄陽)을 공격하는 한편, 전(前)장군 유파(劉波) 등을 파견해 면수(沔水) 북쪽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였으며, 보국(輔國)장군 양량(楊亮)이 촉(蜀, 사천성)을 공격하여 다섯개 성을 뽑아버리고, 더 나아가 부성(涪城)을 공격했으며, 응양(鷹揚)장군 곽전(郭銓)이 무당(武當)을 공격하였다.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정남(征南)장군 거록공(鋸鹿公) 부예(符叡)와 관군(冠軍)장군 모용수(慕容垂) 등을 파견해 보병과 기병 5만을 거느려 양양을 구원하게 하니... 부예는 신야(新野)에 진을 치고, 모용수는 등성(鄧城, 호북성 양번시 북쪽)에 각각 진을 쳤다. 환충이 물러나 면수의 남쪽에 주둔하였다. 가을 7월, 곽전과 관군장군 환석건(桓石虔)이... 무당(武當)에서 2천여호(戶)를 약탈하여 돌아갔다.

거록공 부예가 모용수를 파견해 선봉으로 삼고, 면수까지 가게 하였다. 환충이 물러나서 상명(上明)으로 돌아갔다. 환충이 상주문을 올려서 조카 환석민(桓石民)에게 양성(襄城)태수의 업무를 관장해 하구(夏口, 호북성 무한시)를 방어하게 하였다. 환충이 스스로 강주(江州, 강서성과 복건성 일대)자사로서의 업무를 관장하겠다며 요청하니, 조서(詔書)를 내려 이를 허락하였다.

진왕 부견이 조서를 내려 대규모로 침입하기 위해 백성 10명의 장정에 1명씩의 병사를 차출하게 하고, 그 양민의 자식에서 20세 이하로 재능과 용맹을 갖춘 자는 모두 우림랑(羽林郞)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말하였다.

"...사마창명(司馬昌明, 晋孝武帝)을 상서좌복야로 삼고, 사안(謝安)을 이부상서로 삼고, 환충을 시중으로 삼으며, 형세로 보아 귀환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니 저택을 새로 만들어줄 것이다!"

8월 무오일(2일), 부견이 양평공(陽平公) 부융(符融)을 파견하여 모용수 등의 보병과 기병 25만을 감독해 선봉으로 삼고, 연주(兗州)자사 요장을 용양(龍驤)장군 겸 독(督)익양주제군사로 삼았다.

부견이 요장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짐은 용양장군으로서 대업(大業)을 세웠지만, 일찍이 경솔히 남에게 하사한 적이 없었으니, 경은 이에 힘쓰시오."

좌(左)장군 두충(竇衝)이 말하였다.

"제왕이 된 사람은 농담하지 않는 법인데,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징조입니다."

부견이 잠자코 있었다.

갑자일(8일)에 부견이 장안(長安)을 출발, 군사 60여만명과 기병 27만명이었고, 깃발들과 북소리가 서로 바라보이는 것이 앞뒤로 1천리(里)에 달했다. 9월, 부견이 항성(項城, 하남성 침구현)에 이르렀는데, 양주(凉州)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도착했으며, 촉한(蜀漢, 사천)의 병사가 장강(長江)을 따라 내려가고, 유주와 기주의 병사가 팽성(彭城, 강소성 서주)에 이르니, 동서로 1만리에 걸쳐 수륙으로 일제히 진군, 운반하는 배도 1만척이었다. 양평공 부융의 군사 30만명이 영구(潁口, 안휘성 영상현)에 도착했다.


                                                      비수지전(淝水之戰) 전개도, AD 383년 10~11월경



...상서복야 사석(謝石)을 정로(征虜)장군 겸 정토(征討)대도독으로 삼고, 서연(徐兗)이주자사 사현(謝玄)을 전봉(前鋒)도독으로 삼고, 보국(輔國)장군 사염(謝琰)과 서(西)중랑장 환이(桓伊)에게 군사  8만명과 더불어 진군(秦軍)을 막게 하고, 용양(龍驤)장군 호빈(胡彬)으로 하여금 수군(水軍) 5천여명을 거느려 수양(壽陽, 안휘성 수현)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사염은 사안의 아들이다.

진병(秦兵)이 이미 강성하여 도하(都下, 建康)에서는 놀라고 두려워했다. 사현이 (수도로) 들어가 사안에게 계략을 묻자, 사안은 담담히 대답할 뿐이었다.

"이미 별도의 생각이 있다."

사현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한 채, 장현(張玄)에게 거듭 질문하게 하였다. 사안은 수레를 꺼내올 것을 명하고, 성밖으로 나가 산중의 별장에서 노닐며 친척들과 친구들을 다 모으고, 사현과 바둑이나 두면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환충이 상황을 우려한 나머지 정예병사 3천명을 파견, 경사(京師)를 수비하게 했으나, 사안이 이를 굳게 물리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조정의 필요한 조처가 이미 결정되었고, 병사와 무기는 빠진 것도 없으니깐, 서쪽 지역의 울타리에 의당 남아있으면서 방어해야 할 것이오."

겨울 10월, 진(秦)의 양평공 부융 등이 수양을 공격하고, 계유일(18일)에 그곳에서 승리해 평로(平虜)장군 서원희(徐元喜) 등을 사로잡았으며, 부융은 자신의 참군(參軍)인 하남(河南)사람 곽포(郭褒)를 회남(淮南)태수로 삼았다. 모용수가 운성(隕城, 호북성 안륙시)을 함락시켰다. 호빈은 수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나 협석(硤石)을 지키는데, 부융이 나아가서 이곳을 공격했다.


                                                              진군(秦軍)을 공격하는 사현의 동진군       
   


진(秦)의 위(衛)장군 양성(梁成) 등이 무리 5만을 인솔, 낙간(洛澗)에 주둔하여 회하(淮河)에 목책(木柵)을 만들고, 동쪽에서 온 진군(晋軍)을 막았다. 사석과 사현 등이 낙간에서 25리(里) 떨어져 진을 쳤으나,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호빈은 양식이 다 떨어지자 은밀히 사절을 보내 사석에게 고했다.

"양식이 다하였으니, 아마 다시는 대군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진인(秦人)이 사절을 붙잡아 부융에게 보내자, 부융이 진왕 부견에게 보고했다.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만, 단지 도주할까 우려되니 마땅히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부견이 마침내 대군을 항성에 남겨두고, 경무장한 기병 8천을 이끌고 밤낮으로 길을 달려서 수양에 있는 부융에게 갔다. 상서 주서(朱序, 본래 晋의 연주자사였다)를 사석에게 파견해 설득시키려 했는데, 주서가 사사로이 말하였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주서를 보냈는지...ㄳ).

"진(秦)의 백만 무리가 다 도착한다면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군사들이 집결하지 않았을 때 신속히 공격해야 합니다. 만약, 그 선봉을 패배시킨다면... 마침내 격파할 수 있을 겁니다."

사석은 부견이 수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운 나머지, 싸우지 않고 진병(秦兵)을 지치게 하려고 도모했다. 사염이 사석에게 주서의 충고를 따를 것을 권하였다.

11월, 사현이 광릉상(廣陵相) 유뢰지(劉牢之)를 파견해 정예병 5천명을 거느려 낙간으로 진격... 유뢰지는 곧장 나아가 강을 건너서 공격해 그들을 대파하고, 양성(梁成)과 왕영(王詠)의 목을 베고, 군사를 나누어 돌아가는 나루를 차단하자, 진(秦)나라 보병과 기병이 붕괴되어 다투어 회수(淮水)로 달려가니, 죽은자가 1만5천이었으며, 양주자사 왕현(王顯)을 사로잡고, 무기와 장비 등을 거두었다.

부견과 부융이 수양성(壽陽城)에 올라가 보았는데, 진(晋)나라 병부(兵部)의 진지가 엄중하게 정돈되었고, 팔공산(八公山)의 초목을 바라보며 모두 진병(晋兵)이라 여겨 말하였다.

"이것 또한 강적(强敵)이거늘, 어찌 약하다고 했는가?!"

낙심하여 비로소 두려운 안색이 되었다.

진(秦)나라 군사가 비수(淝水)에 가까이 접근해 진을 치자, 진(晋)나라 병사들이 건널 수가 없었다.

사현이 사절을 보내 부융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현군(懸軍)이 깊숙이 들어오면서 물가 가까이에 진지를 쳤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지구전의 계책이고, 속전속결의 의도가 아니군요. 만약, 진지를 옮겨서 그대들의 병사를 조금만 물러나게 하고, 우리 진(晋)의 병사가 건너도록 해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진(秦)나라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우리들은 수적으로 많고 저들은 적으니 올라올 수 없도록 하여 만전을 기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다만, 군사를 이끌고 조금 후퇴시켰다가 그들이 절반쯤 강을 건넜을 무렵에 철기(鐵騎)로 쫓아가 죽여버린다면, 승리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부융도 그렇다고 여겨 마침내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진군(秦軍)이 물러나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주서(朱序)가 후방에서 소리치며 말했다.

"진(秦)의 군사가 패(敗)하였다!"     

사현과 사염, 환이(桓伊) 등이 군사를 인솔하여 강을 건너서 그들을 공격했다. 부융이 진지를 순행하면서 군사를 통솔하고자 했으나,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진병(晋兵)들에게 죽었다. 사현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청강(靑岡)에 이르렀고... 서로 짓밟혀 죽은 사람이 들판을 덮고, 개울을 메웠다. ...바람소리나 새 울음소리만 듣고도 모두 진(晋)나라 군사가 추격해온 것으로 여겨 밤낮을 쉬지 않아 풀숲을 헤치며 걷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고, 굶주리고 얼어서 죽은 자가 열에 7~8명이었다.


                 비수전투의 무대인 안휘성 수현(壽縣)의 고성(古城), 성벽은 남송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주서는 장천석(張天錫), 서원희(徐元喜)와 함께 돌아왔다. 진왕(秦王) 부견이 탑승하던 운모거(雲母車)를 노획하였으며, 다시 수양(壽陽)을 탈환하고, 회남태수 곽포(郭褒)를 사로잡았다. 부견은 화살을 맞고 홀로 말을 타고 달아나 회수(淮水) 북쪽에 이르러... 모든 군사들이 무너졌으나, 오로지 모용수가 거느린 3만명만은 온전하여 부견은 천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에게 갔다.

사안(謝安)은 파발마가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진군(秦軍)이 대패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마침 손님과 더불어 바둑을 두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책상위에 놓아둔 채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다.

손님이 묻자, 천천히 대답하였다.

"어린 자식들이 마침내 적군을 물리쳤답니다."

그렇게 말하고선 문지방을 넘다가 나막신의 굽이 부러지는 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11월 정해일(2일)에 사석 등이 건강(建康)으로 개선하였다. 진(秦)나라 악공(樂工)을 데려왔기에 능히 옛 소리를 익힐 수 있었으며, 이에 종묘에서는 비로소 금석(金石)의 음악을 구비하게 되었다. 을미일(10일), 장천석을 산기상시로 삼았고, 주서를 낭야(琅邪)의 내사(內史)로 삼았다.

12월 경오일(15일), 대사면령을 내렸다. 


PS : 비수대전 당시의 정황과 관련하여  나름 상세한 설명입니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462&menuId=325657&listType=2&from=&to=&curPage=1&logId=4145946

PS2 : 진서(晋書)에선 전투시일을 10월 을해일(양력 11월 30일)이라 기재하였다.



덧글

  • 담배피는남자 2012/06/02 02:40 # 답글

    유인할 생각으로 거짓퇴각을 했는데,

    그걸 정말 패배해서 퇴각하는 줄알고 멘붕해버린 병사들...
  • 에드워디안 2012/06/03 15:33 #

    후방부대와의 공조도 엉망이었고... 아니, 유언비어 하나에 농락당했단 사실만으로 오합지졸 인증이죠.
  • jaggernaut 2012/06/02 14:22 # 답글

    양자강이 정말 천혜의 방어벽인 것 같습니다. 저기에 의존해서 버틴 사례가 많으니 정말 대단합니다.
  • 海凡申九™ 2012/06/02 22:16 #

    문제는 저기만 가면 황제들이 병신이 되고
    신하들이 부패하고 패륜이 쏟아져 나오니...
  • 에드워디안 2012/06/03 15:35 #

    jaggernaut//

    그 양자강을 목도하지도 않았으면서 채찍만 휘두르면 정복할 수 있으리란 부견의 망상은, 허허...;;

    왕맹이 너무 일찌감치 가버렸습니다. oTL

    해범//

    남조 문벌귀족제 사회의 야누스적 면모라고나 할까요.
  • 위장효과 2012/06/05 12:44 #

    동진-송-제-양-진 만 그랬으면 뭐라 안하겠는데...
    나중 남송, 명-남명, 국민당 정부, 일본점령후 세워진 남경괴뢰정부등등...양자강 하류에 수도를 둔 정권들은 하나같이 개판 오분전이었으니 그게 문제죠.
  • 에드워디안 2012/06/06 11:37 #

    위장효과//

    재상들의 전횡과 외교적 수난을 감안하더라도, 남송 정도라면 그럭저럭 무난했던 편이지요.-_-;

    ps. 5대10국시대 남당과 오월국도 나름 드라마틱하지 말입니다.;;
  • 파파라치 2012/06/03 12:00 # 답글

    비수지전은 초당시대 사관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허구라는 주장이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Charles. C. Rodgers, "The Myth of the Battle of the Fei River"
  • 에드워디안 2012/06/03 15:37 #

    '과장성' 논란은 중일 사학자들도 주목한 떡밥입니다만, 비수대전을 전후로 당사자측의 동향이라던지 정세를 살펴보자면, 단순히 '유뢰지군만의 소규모 접전'으로 치부하기엔 억측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장, 전진제국이 입은 치명타와 화북 대혼란, 동진조정내 사씨일족에 대한 견제부터가 설명되질 않거든요.;;

    ps. 마이클이란 이름이 맞을 겁니다. 그 로저스 교수는...
  • 파파라치 2012/06/05 12:59 #

    네, Michael이 맞습니다;;

    하긴 중국 사학자들은 대부분 로저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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