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의 몰락 세계사




계유년(癸酉年, 1213), 금주(金主) 위소왕(衛紹王) 완안윤제(完顔允濟)는 재위 5년간 해마다 몽고의 침략을 받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장졸들의 신망을 잃어 호사호(胡沙虎)에게 피살당하고, 동해군후(東海軍侯)로 추폐(追廢)되고 말았다. 금나라는 풍왕(豊王) 순(珣)을 세웠으니 장종의 형이며, 이가 선종(宣宗)황제이다. 칭기즈칸은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연남(燕南)과 산동, 하북의 50여군을 탈취했다.

갑술년(甲戌年, 1214)에 칭기즈칸은 중도(中都, 북경)의 북쪽에서 말을 멈추어 주둔하였다. 금나라 선종은 기국공주(岐國公主)와 동남동녀 각각 5백명, 말 3천필과 금은보화를 바쳐 화의를 청하여 허락받았으나, 그해 5월에 변(汴, 하남성 개봉)으로 도읍을 옮겼다(貞祐南遷). 좌승상 도단일(徒單鎰)과 태학생 4백명이 반대하는 상주를 올렸으나, 듣지 않았다. 낙타 3천필과 수레 3만대를 앞세워 변경으로 옮겼다.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경(燕京)은 식량이 부족하니, 변경에 머물다가 2년이 지나 돌아와도 늦지는 않다."

승상 완안복흥(完顔福興)에게 황태자 수충(守忠)을 보좌하여 중도를 방어하도록 했다. 칭기즈칸이 크게 노하여 대군(大軍)을 파견해 중도를 포위하자, 완안수충은 변경으로 달아났다. 그로부터 1년만에 중도는 함락되어 한달여 넘게 겁략당했다. 몽고군은 하동(河東)으로부터 하수(河水)를 건너서 남쪽으로 내려가 개봉성에서 20여리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가, 이내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천도 이후로 금나라는 지세가 더욱 촉박하게 좁아졌다. 송나라가 세폐(歲幣)를 중단해버리자, 금나라는 맹약을 파기하고 사천과 회남(淮南)으로 쳐들어갔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몽고에서는 태사(太師) 무칼리(木華黎)를 국왕(國王)에 봉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금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대명부(大名府)를 치고, 익도(益都, 산동성 익도현), 치주(淄州, 산동성 임치현), 내주(萊州, 산동성) 등을 평정했다.

무인년(戊寅年, 1218)에 무칼리는 금의 서경(西京, 산서성 대동)에서 하동으로 들어와 태원(太原)과 평양(平陽) 및 흔주(忻州), 대주(代州), 노주(路州)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고려왕(高麗王) 철(㬚, 高宗)이 몽고에 항복하여 해마다 방물(方物)을 바치겠다며 청해왔다. 기묘년(己卯年, 1219)에 서역(西域, 호라즘제국)에서 몽고 사신을 죽이자, 칭기즈칸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친정(親征)에 나섰다.

경진년(庚辰年, 1220), 무칼리가 진정(眞定, 하북성)에 이르러 하북의 여러 군을 순회하였다.


* 짤방은 북경시 외곽  금대(金代) 성벽의 유지(遺址)



덧글

  • 셔먼 2012/09/02 23:05 # 답글

    당시 몽골의 군대는 광풍과도 같았군요.
  • 에드워디안 2012/09/03 12:34 #

    저승사자의 채찍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