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한일(韓日) 각료회의 국제, 시사



30년경과 외교문서 공개원칙에 따라 지난 1967년도 제1차 한일(韓日) 각료회의 성사과정과 회의 내용을 담은 문서가 공개되었다. 이번에 빛을 보게된 한일 각료회의 관련문서는 당시 대외비로 분류됐던 한국 외무부와 주일대사관 사이에 오갔던 전문과  1차 각료회의 결과 등이 상세히 기록,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일 양국간 정기 각료회의는 90년도 이후로 중단된 상태이다.

양국은 국교정상화 1년 8개월만에 개최된 각료회담을 앞두고 67년 5월초부터 의제 설정과  공동합의문 채택에까지 협의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미묘한  입장차이를  드러냈다. 회의장소는 온천휴양지로 유명한 하코네가 검토됐으나, 호텔사정상 동경으로 변경되었고, 일정도 8월 8~9일 양일간의 방안에서 9~10일로 조정되었다. 영문명칭은 Meeting과 Conference를 놓고 고심하다 Confefence로 의견을 모았다.

회담의제와 관련, 한국측은  당초  대일(對日)청구권과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 대우에 관한 협정사항의 이행문제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측이  회담의제를  어디까지나 경제문제에만 국한시킬 것을  고집해 청구권과  재일교포 문제는 공식의제로부터  슬며시 빠져버렸고, 결국 최종적으론 일반 국제정세, 경제협력, 해운, 어업, 무역, 조세문제를 협의하는 선에서  낙착되었다.

특히, 재일한국인 법적지위 문제는 각료의 참석범위와 연결된 사안으로서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한국측은  법무상의 참석을  외교채널을  통하여  강력히 요구했지만, 일본이 국내사정  이유를  핑계삼아 반대해 무산되었으며, 별도로  요청한  문부대신의 참석또한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김동조 주일대사는 서울의  외무부로  타전한  전문에서  일본측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암시하기도 했었다. 

'재일한인 법적지위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도움되리라는 생각에서 법무상의 참석을 희망하나, 무리하게 참석시키기란  곤란한 노릇이고, 외상이 문제를 다룰 수 있으므로 필수적임은 아니다.'

이에따라, 각료참석범위는 양측 6명씩으로 결론을  보기에 이르렀다. 자리배치는 라운드테이블에 한국이 좌측, 일본이 우측으로 마주보고 않는 방안이 검토되었으나, 협의 결과 단장을 중심으로 양측 각료들이 서열순으로 좌우에  나란히 앉기로 결정됐다. 대치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선  안된다는  양측간의  판단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하, 1967년 8월 9~10일 개최된  제1차 한일 각료회의  참석자  명단이다.

 
한국측 참석자

*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張基榮)

* 외무장관 최규하(崔圭夏)

* 재무장관 서봉균(徐奉均)

* 농림장관 김영준(金榮俊)

* 상공장관 박충훈(朴忠勳)

* 교통장관 안경모(安京模)


일본측 참석자

* 외무대신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 대장대신 미즈다 미키오(水田三喜男)

* 농림대신 구라이시 다다오(倉石忠雄)

* 통산대신 간노 와타로(管野和太郞)

* 운수대신 오하시 다케오(大橋武夫)

* 경제기획청장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통역으로는  당시  2등서기관이던 공로명(孔魯明)씨가 활약했다.

전체회의에서 최규하 외무장관은 '재일한인의 법적지위와 대우, 영주권 신청이 부진한 상태이므로 절차간소화  등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문제를 제기했는데, 미키 일본외상은 '일본정부내엔 본래 관계성(省)간의 분파주의가 심한 연고로 외무성 단독으로만 취급할 수는 없고, 법무성 소관인 만큼 양국 법무담당 각료들간에 추후 논의하도록 하자'는 선에서  넘어갔다.

경협(經協)문제와 관련, 미즈다 대장상은 '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목표시한을  3년반으로 단축한 것에 대하여 '세계은행(IBRD)과 IMF로부터 단기외자를 도입, 장기적 개발계획의 소요자금으로 전환사용하고 있는데 의문이 있다'며 박정희 정권의  경제운용 구상에 의구심을  표하는가 하면, '고금리에 물가추세도 상승일로인데  언제까지 저임금에 의존한 수출만을 고집할 것인가'라며 추궁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측의 질문공세에  장기영 부총리는  한국경제  현황 브리핑에서 66년도 외화보유고 목표치는 2억$였으나 실적은  상회치 2억3천만$에 달했고, 67년 7월말의 현재보유고는 3억3천만$라고 소개하면서 5개년계획의 조기달성을 위한 일본의 협력을 구했다. 한편, 한국측은 공식회의와는 별도로  8월 9일자로 예정되었던  장 부총리 주최리셉션의  사전준비에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었다.

연회장소를 힐튼호텔, 제국(帝國)호텔, 영빈관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1인당 2천엔이  소요된 힐튼호텔에 예약을 한다. 그러나  경비에  문제라도  생겼는지, 다음날 1인당  1천8백엔이  소요된  제국호텔로 장소를 변경했다. 한국정부는 리셉션에 250~300명이 참석하리라 예상하고, 엔화 10만원 상당의 위스키 1백병과 국산담배를 주문하도록  주일대사관에  특별지시하는 전문도  타전하여  눈길을 끌었다.

주일대사관은  실내악단 5명을 고용해 아리랑, 도라지, 천안삼거리를 연주하겠다며  악보를 보내줄 것을 긴급 타전하는가 하면, 일장기를 위로, 태극기를 아래로  양국의 국기를  교차게양하는 법까지  전했으나, 외무부는 '리셉션에서 구태여 국기를 벽에다  붙일  필요가 없다'며 통보했다.




덧글

  • 2012/09/29 12:4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9/29 12: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갈천 2012/10/15 14:50 # 삭제 답글

    최규하씨가 김동조씨 보다 먼저 외무부 장관을 했군요.

    외무차관은 김동조가 먼저했고 뒤를 이어 최규하씨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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