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심 甲 세계사




소련에서는 폴란드처럼 직업군인이 전면에 나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역학관계상 원수(元帥)와 장성의 지지를  받는 정치가가 권력투쟁에서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게끔 마련이다. 과거의 사례, 예컨대 1953년의 베리아 숙청이나 57년 반당(反黨, 反흐루시초프)그룹 타도사건 등 최종적 귀추를 결정한 것은 군 수뇌였다. 수슬로프와 KGB  총수 셀레핀이 64년 연말, 흐루시초프  축출쿠데타를 계획할 당시에도 국방상  말리노프스키 원수의 지지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말리노프스키는  본래 당 간부회[정치국]의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흐루시초프에  대한  군부의 지지가 철회되었음을 증명키  위해  간부회의에 초빙되었다. 흐루시초프 축출후 군부는 수슬로프보단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지지하였는데, 수슬로프 역시 독선적 문민 정치가로 간주되오던 탓이었다. 브레즈네프는 대조국전쟁 시절부터  군 내부에  그레츠코 원수를  비롯한  여러 친구를 사귀었고, 스탈린 사후 잠시나마(53.3~54.2) 육해군 정치총본부 국장으로 재직한 경험을 지녔었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장군들은 브레즈네프가  군사문제의 권위자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군비예산 삭감으로 불화를 빚어낸 흐루시초프와 달리, 유사시  요구를  받아들이며, 군사력 강화에 노력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브레즈네프는 군비증강에 역점을 두고, 통치 중반까지  군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70년대 중반경 군부는 브레즈네프의  국정리더쉽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좀체 지지부진한 경제와 농업하에서 서방제국에 현저히 뒤쳐진 기술사정은 군 자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었다.

소비에트의  군대는 국경변  및  각 주(州) 혹은  각 연방공화국까지 포함하는 군관구의 병영에 주둔한다. 그러므로, 군부는 광대한 소련 전역의 공업, 경제실태를 상세히 파악하고 있다. 수천명이 넘는 병사들이 특히 추수기  콜호스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고, 도로나 철도  같은  건설에 자주 동원된다. 군관계자들에겐 악화일로의 지방정세가 분명히 좋지 않은 징조로 비쳐졌다. 게다가, 당정(黨政) 간부의 부패상이 너무도 뚜렷해져가는 현실과 대조적으로 군인 엘리트는 개인적 성실성의 정도가 높다는 인식이 강하다.

무엇보다, 당 서기장이  전사(戰史)를  개찬(改撰)하고자  시도했던  무리수가  비웃음을  샀다. 브레즈네프 개인숭배가 심해져감에 따라, 그가 '대조국전쟁의 주요 전투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위대한 지도자'란 서술이 게재됐다. 물론,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치장교는 그 나름의 역할을 했다지만서도, 작전을 입안한 것도 아닐 뿐더러 전투를 직접 지휘한 것도 아니다. 브레즈네프는 전시에만 4개의 훈장과 3개의 메달을 받았다. 그의 군사적 공적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지나치게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계단을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잠재된 명예욕이 그를 부추겼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에 취임하자마자, 새로운 훈장을 수여할만한 그의 행적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추어 조사하라는  지시가  군사사가(史家)들에게 떨어졌다. 이렇게 하여, 레닌훈장이 딸린 소련군 최고의 메달 '황금의  별'과 '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를 얻었고, 73년까지 제2의 금메달이 따로 수여됐으며, '사회주의 노동영웅'도 추가됐다. 일련의 화려한 훈장들은 최고회의 간부회의 포고에 의해 수여된 것이다.

정적  포드고르니를 밀쳐내고 최고회의 간부회장직을 겸임하게 되자, 브레즈네프에게 훈장이 수여되는 비율은  한층 늘어났다. 더군다나, 그는 3계급을 뛰어넘어  스스로가 원수위를 수여하는 파렴치한 촌극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전시의 '용감성'을 핑계삼아 소비에트연방 영웅으로서 제3, 4의 금메달을 받은 것도 지나친 처사였거늘, 아주  분별력  없는 추태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원수 등극 2년후 '전승훈장'마저  차지해간 것은  군의  인내심에도  점차  한계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당연히도, 군 수뇌들은 서기장의  역할이  이토록 과장된 사실에  몹시나 분개하고 있었다. 군인은  포상과 처우에  민감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같은  훈장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았고, 브레즈네프가 자신에게 '전승훈장'을 수여하자 감정이 심하게 상해버린 것이다. 이 훈장은 주코프나 로코소프스키 등 대규모  전투를  입안하고, 실행해 성공시킨 일부 원수의 영예를 찬양하고자 수여되었던 특별 훈장이다. 브레즈네프의  상궤를 벗어난 서훈(敍勳)으로  소비에트 훈장 전체의  가치가 저하되는 꼴이었다.

종전시에 군인으로선 전혀 인지도가 없었음에도, 이 허영심 강한 사내는 주코프 원수보다 많은 메달을 차지하고 말았다. 브레즈네프의 방식은 전임자의 지각있는 처신과도 비교되었다. 흐루시초프는 전시에 군의  정치기구에서 근무했고, 군사위원회 멤버였다. 그는  장성 지위를 얻었으며, 몇차례 중요한 전투의 입안에도  꽤나  커다란 역할을 해냈다. 스탈린그라드의 장렬한 싸움과 키예프 해방이 유명하다. 생전에 그가 지녔던 훈장과 메달들은 총 27개. 브레즈네프가  얻은  비율의 10%에 불과하다.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태도로 말미암아, 군부는 브레즈네프에 환멸을 느껴갔다. 군부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군 수뇌부의 입장에서 병기 테스트와 훈련에 좋은 기회였고, 많은 장교에겐 귀중한 체험을 주며, 승진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1982년 여름 레바논에서 밝혀진 소련제 병기의 약점은 군부와 당, 정부간의 관계를 두드러지게 악화시켰다. 10월, 군부-당정(黨政) 요인간 회합에서 서기장은 개선을 약속했으나 연설은 박력이 없고, 늙은 용모도 나쁜 인상만 주었다.

그가 '약속'을 실현하기는 커녕, 오래가지  못할 듯 하다는 우려가 명백해졌다.



* 짤방은 소비에트 원수 제복에 전승훈장을 꿰어찬 브레즈네프. 제3자가 보기에도 이뭐병...;;






         10월혁명 57주년 기념 퍼레이드. 왼쪽부터 포드고르니, 그레츠코, 브레즈네프, 코시긴, 수슬로프




덧글

  • 위장효과 2012/11/26 09:27 # 답글

    흐루쇼프의 27개가 10%라면...대략 270개...이뭐병...강철의 대원수(이글루스의 그분 말고요!)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흐루쇼프야 뭐...심지어 문학작품-그것도 소련제가 아닌 서방국가에서 나온 작품들-등에서도 각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지만 브레즈네프가 저러는 정말 허영심쩐다는 표현밖엔 할 말이 없네요(타밍 라이프 사의 제 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관련 책에 보면 브레즈네프가 동료 정치위원들과 같이 기념사진 찍은 게 실려있긴 했습니다만 그 대중적인 책자에서도 언급된 분량은 흐루쇼프가 압도적. 그런데 훈장은 브레즈네프가 압도적...).
  • 에드워디안 2012/11/27 12:28 #

    체르넨코 같은 측근 똘마니들이 옆에서 바람넣고 호들갑떤 사정도 감안해야겠지만, 전승훈장건은 진짜...

    뭐, 시야를 넓혀 보자면 훈장수여붐도 공산당내 관료-엘리트들의 뒷짐 잘 보살펴주기로 정평난 브레즈네프에 대한 경의 차원에서 진행된 점도 없지않아 있었습니다만 말이죠.ㄳ
  • 엽기당주 2012/11/26 09:28 # 답글

    정치장교동무는 멀쩡한 전사동무들을 루비앙카에 쳐넣거나 시베리아로 보내거나 징벌대대로 보내서 우라돌격 시키는데 큰 공적을 끼치신 분이죠.

    어디서 '주요 전투에서 핵심'역할을 해 어디서!
  • 위장효과 2012/11/26 10:06 #

    우라돌격 시키는데 큰 공적을 세웠으니 "주요 전투에서 핵심" 역할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전쟁 중반부에 가서는 일선 정치위원들을 교육시켜 장교로 다시 투입하기도 하고 권한도 많이 줄였지요.

    뭐...전후 의심병 도진 스탈린이 주요 군 장성들에게 뭔 짓했던가는 다 아는 사실이고 하니 그노무 의심병좀 버렸으면 전쟁초반에 그렇게 밀리지는 않았을텐데 합니다만-그나마 선배들처럼 루비앙카끌려가서 총살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면 다행이었죠. 한번 끌려가본 로코소프스키도 폴란드 국방장관이 된다든가 위의 말리노프스키처럼 나중에 권력움직임에 일조한다든가-
  • 고르곤 2012/11/26 09:37 # 답글

    가슴에 몇개나 찼는지 궁금.....

    그런데 레바논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소련제 병기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나요?
  • 위장효과 2012/11/26 10:15 #

    1982년 베카계곡의 공중전을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군의 F-15하고 시리아 공군의 Mig 23,25등과 교전을 벌였는데 이스라엘측 격추손실없음 vs 시리아측 48대 우수수수수 격추 의 엄청난 결과가 나왔거든요. 양측의 훈련정도라든가 이스라엘측은 조기경보기가 뒤에서 정보 백업해줬다라는 몇 가지 상황을 감안해도 이건 정말 할 말이 없는 전과인지라...
    미제 전투기와 소련제 전투기가 붙어서 이렇게 당한 적이 없습니다. 베트남에서야 미국의 삽질이라든가 여타 요인들이 겹쳐서 격추비율이 1:5였던가...1:3이었던가...하여간 아슬아슬하게 미국의 우위였었거든요.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이 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져 전투기 고정무장에서 아예 기관포를 빼버렸습니다. 몇 년전까지 우리 공군도 운용한 F-4D는 그래서 고정무장이 아니라 기관포 포드를 기체 하부에 장착했지요. 그러다 베트남에서 사이드와인더, 스패로우등이 기대 이하의 실적을 보이고 북베트남군과의 전적도 영 아닌 것을 보고 분석한 다음 아무리 제트기 시대, 미사일 시대라고 기관포와 근접공중전이 쓸모없어진 건 아니란 결론을 내린 다음에 기관포를 다시 고정탑재하게 됐죠(그래서 F-4E에서는 기관포-M61발칸이죠-가 기본 무장) 또 미해군 항공대는 탑건학교를 만들어서 근접공중전 기술연마를 다시 시작했고.
  • Montcalm 2012/11/26 10:17 #

    1982년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시리아군이 미제와 자국산 무기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에게 문자 그대로 개박살난 전쟁이랄까요.. 특히 공중쪽에서 베카계곡에서는 사흘간의 공중전에서 85:1이라는 처참한 교환비를 자랑하기도 하였고요...) (85대 격추당하는 동안 1대 격추한꼴...) 물론 소련도 미국만큼이나 수출품의 다운그레이드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저정도 결과는 기가 막힐만한 결과물이었겠죠..

    이런 위장효과 아재가 먼저 소개를;)
  • 누군가의친구 2012/12/02 09:01 #

    거기에다가 이스라엘군이 무인기로 시리아의 대공망을 완전 기만해버려서 시리아가 무인기에다가 대공미사일을 쏘며 낭비할 동안 이스라엘의 전투기들이 대공망을 개발살내버렸죠.
  • Montcalm 2012/11/26 10:03 # 답글

    그러고보니 크레믈린 지진에 대한 농담이 있다죠? 진앙지는 서기장 사무실 옷걸이...
  • 에드워디안 2012/11/27 12:19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s. 언제 어떻게 임상사 상태에 빠질지 모르는 서기장의 심장도 일종의 '진앙지'였죠...(먼산)
  • 이준님 2012/11/26 10:14 # 답글

    영화 스파이 하드에 나오는 미친 장군(팔 두짝 날라간) 이미지가 완전히 브레즈네프더군요 ㅋㅋ
  • ChristopherK 2012/11/26 11:51 # 답글

    그래서 카터성님이 나서서 브레즈네프를... 이하 생략
  • 無碍子 2012/11/26 13:42 # 답글

    훈장을 보니 철갑같은 북쪽 군복 생각이 납니다.
  • 에드워디안 2012/11/27 12:31 #

    약장으로 대체(...)했기에 망정이지, 저건 오히려 약과입니다. 주코프 원수의 제복을 보면 ㅎㄷㄷ하죠.
  • PKKA 2012/11/26 13:48 # 답글

    그래도 작전술 및 순수 군사 과학 발전의 측면에서는 저 개인 숭배 빼고는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놈의 핵만능주의가 작전술 발전을 몇년간 틀어막고 있었고, 스탈린 숭배가 다시 시작되긴 해도 투하쳅스키 등 복권된 인물들을 다시 추락시키기 보다는 다시 군사술에서 작전술적 기동전을 중시함에 따라 그 가치는 더 높아졌은까요.
  • 대공 2012/11/26 16:58 # 답글

    뽀대용이 아니라 진짜훈장 ㄱㅡ
  • 에드워디안 2012/11/27 12:33 #

    그것도 크고 아름다운 백금과 황금으로 장식된 전승훈장!

    허나, 사후 7년만에 박ㅋ탈ㅋ
  • 셔먼 2012/11/26 20:22 # 답글

    허세력 하나는 훌륭했군요(...).
  • 瑞菜 2012/12/01 10:41 # 답글

    위대한 속물 브레즈네프 아니겠습네까.
  • 누군가의친구 2012/12/02 09:02 # 답글

    저 무게만 해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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