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우 남아(男兒)다운 한 젊은 청년이 윌슨(Wilson)의 선거본부로 찾아와서는 비록 자신은 경선에서 투표할 자격은 없지만, 마음으로 윌슨을 지지하고 있다며 무슨 일이라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신문기자 담당인 젠킨스(Jenkins)가 그를 조세푸스 다니엘스(Josephus Daniels)에게 데리고 갔다. 다니엘스는 청년의 이름을 잘못 알아들어 다시 한 번 이름을 되풀이하여 들어야했다. 다니엘스는 그 청년을 코델 헐(Cordell Hull)에게 소개시켰다.
청년은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상당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 해(1912년) 대선에서 윌슨의 당선으로 신임 행정부의 해군장관직에 내정된 다니엘스는 차관보 인선(人選)에 앞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밑에서 일했던 실력파 정치가이자, 전(前) 국무장관 엘리휴 루트(Eilhu Root)와 개인적으로 상의했었다. 다니엘스가 루트에게 그 청년에 대해 이야기하자, 루트는 짐짓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염려스러운 점은 없겠소?"
"어째서죠?"
"루스벨트가(家) 사람들은 앞질러 달리기를 매우 좋아하니깐."
여하튼, 다니엘스는 윌슨에게 가서 만약, 대통령께서 염두에 둔 해군 차관보직에 앉힐 마땅한 인물이 없다면 자신이 한 명 추천하고 싶다고 제의했다. 윌슨은 이렇게 대꾸했다.
"다니엘스, 자네는 언제든 성미가 급하군. 그래,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입니다. 제가 남부 출신[北캐롤라이나. 여담이지만, 윌슨의 내각은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남부인이 전면에 등장한 행정부였다.]이니, 차관은 타지방 출신이 좋을 것 같아서요. 예컨대, 뉴욕이나 뉴잉글랜드 정도가 좋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자네, 루스벨트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는가?"
다니엘스는 젊은 청년에게 그가 해군차관에 임명되었음을 전했다. 청년은 감동적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렇게 기쁠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행정부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대단히 커다란 영광입니다. 저는 배를 좋아하는데다, 해군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차관보가 된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드로 윌슨과 조세푸스 다니엘스는 어째서 30세의 FDR을 해군차관으로 기용했을까?
우선, 다니엘스가 루스벨트와의 첫 만남을 '첫눈에 반하기'로 묘사했던 것처럼 그는 다니엘스의 마음에 흡족한 인물이었다. 또한, 루스벨트란 이름의 인물을 부하로 둔다는 일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며, 그가 기대에 부흥하게끔 일을 잘 수행하리라 확신했다. 윌슨도 뉴저지 주지사 재직시 알게된 루스벨트에게 깊은 인상을 느꼈고, 해군에 관심도가 높은 사람으로 제독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조정, 서로 마음이 통하는 인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윌슨이 펜실베이니아주 정계 실력자이자, 자신의 프린스턴(Princeton) 제자인 조셉 거피(Joseph Guffey)와의 대담에서 청년 FDR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거피는 FDR가 민주당원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저는 루스벨트가의 모든 사람들이 공화당원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닐세. 그는 그 집안의 민주당 계통 출신이지! 키가 훤칠한 호남아(好男兒)라네."
본래, 윌슨은 다니엘스를 체신장관에 임명할 생각이었지만, 각료 임명단계에 이르러 갑작스레 계획을 변경하였다. 다니엘스가 체신장관이 될 경우, 선거전의 문서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우체국장 자리를 요구하는 등 청탁이 쇄도해 올 가능성이 높았고, 마음이 약한 다니엘스가 그것들을 냉정히 절충시키지 못하리란 우려에서였다. 윌슨의 사려가 아니었더라면, 다니엘스는 체신장관에 임명되었을 것이고, FDR도 빛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루스벨트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서만 그러한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로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목하여 관심을 가졌던 당대 정치가는 다니엘스 뿐만이 아니었다. 재무장관 윌리엄 매커두(William McAdoo)도 다니엘스가 루스벨트를 '가로채기' 전에 두 가지 지위로 그를 끌어들이고자 시도했다. 재무성 차관보와 뉴욕항(港)의 세관장 자리였다. 그러나, 청년 루스벨트는 해군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좋아했다.
1913년 3월 17일, FDR은 영광스럽게 해군성 차관보에 취임했다. 미(美)해군 사상 최연소 차관이었다.
이날은 그의 결혼 8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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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어머니.
저는 세례와 견신례를 받고 선서를 하였습니다. 또한, 종두(種痘)를 맞고, 이렇게 바다로 나왔습니다.
저는 성의를 다해 살펴야 하는 문서들에다 한 시간 동안 줄곧 서명했습니다.
운만 좋다면, 감옥 신세는 면할 수 있겠지요. ...이곳의 일들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 기관차처럼 일해야 한답니다.
그러나, 여름을 모두 소비하는 한이 있더라도 (맡은 임무를) 결코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덧글
그 때가 마침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처가 일곱인 어느 분이 First Lord of the Admiralty로 재직중이었지요. 대륙가서 "군단규모로 하는 훈련, 이런 장관을 보신 적 있소?"하는 콧수염 더쿠 카이저한테 "글쎄요. 폐하께서 진짜 장관을 보고 싶으시다면 내년에 스핏헤드를 방문하시죠."라고 대꾸하기도 했던 그 불독양반말입니다^^.
처칠이 종종 전(前) 해군인이라고 서신에다가 서명하고, 2차대전발발해서 다시 해군성에 복귀하자마자 "윈스턴, 해군에 돌아오다."라고 전함대에 전문칠 정도로 해군에 관심많았던 것처럼 FDR도 무진장 해군에 애정을 쏟았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 빌어먹을 제독들 땜에...못 참아!!!" 그런 적도 있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