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마(出馬) 세계사


                                                                           

1944년 대선에서 FDR은 단지 입후보했다는 자체만으로 그다지 비난받진 않았다. 만약, 그가 전시(戰時)지도자로서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라면, 이론상으로 그가 다시 입후보한 사실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던 셈이다. 불문율의 원칙을 깨뜨린 세 번째 재임으로 네 번째도 당연한 것이었으며, 3기(期) 재임에 따른 인과응보라 보더라도 무방하다. 그래도, '네 번째'라는 횟수는 일부 사람들을 경악시키기엔 충분했다.

전(前) 부통령 가너(Garner)는 루스벨트가 죽을 때까지 입후보할 것이라며 나름의 소신을 밝힌바 있다. 그리고, 그가 죽은뒤 옛 상관인 다니엘스(Daniels)는 만약 그가 살아서 네 번째 임기를 마쳤더라면, 5기(期)에도 도전했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백악관을 자주 출입하던 기자들은 그의 건강이 쇠약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상황에서 설마 44년도에 다시 입후보할 의사는 없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럼, 그는 왜 출마했는가? 그가 총사령관이라는데서 물의가 일었다. 6월에 후보 지명이 있은 다음, 대통령 일행이 미(美)대륙을 횡단하여 다시 하와이로 시찰여행을 떠나자, 물의는 한층 커져갔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관련기사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의 모습을 보았다. 본인은 이전까지의 '당파적인 정치 관념'으로 출마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으나, 사태의 전개는 이 발언이 불성실한 것처럼 생각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 많은 근로자들이나 군사 시설, 그밖의 장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군인들의 표를 얻어낼 수 있다는 관점에서 분명히 유리한 전략이다. 공화당 후보 듀이(Dewey)는 이처럼 군대에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하나는 총사령관, 하나는 대통령 '후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포츠 정신을 모른다'던지, '유럽대륙의 상륙 일정과 태평양 작전을 선거운동에 유리한 방향으로 맞추어 결정'했다는 비난도 있었는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루스벨트의 명성이 너무나 유혹적인 만큼, 정적들은 속내에 음험한 동기를 품지 않았나하고 캐고 들었다. 공화당의 책동 가운데 하나는 위헌(違憲) 문제를 끄집고 나온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육해군의 총사령관이지만, 비(非)전투 국민의 총사령관은 아니라며 응수했다. 듀이 자신도 당황했다. 그는 뉴욕주지사로서, 시민으로서, '총사령관'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했었다. 그러나, 이제 총사령관은 정치적으로 가증스런 적이 되버렸다.

                                                   미국은 아직 FDR 당신을 원하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민주당내에서도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고루하고, 불만이 많은 심남부의 보수파 당원들, 특히 텍사스의 골수분자들은 4년전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에 반항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FDR이란 인물에 의해 민주당은 상징되었고, FDR이 곧 민주당 자체였다고 할 수 있었다. 마셜(Marshall) 장군을 천거하려는 의견이 전당대회 직전에 부상했지만, 그가 거기에 편승할 가능성은 없었다. 애시당초, 하나마나한 대통령 후보 지명전이었다.

44년 대선에서는 오히려, 민주당의 부통령 지명이야말로 최대 관심사였다. 루스벨트는 벌써 10여년에 걸쳐 국정의 여지없는 중압감을 체험하고, 건강악화를 두드러지게 느꼈음에도, '자신의 임무를 계승'할지도 모르는 인물에 대해 거의 관심두지 않았던 듯 하다. 그가 부통령 월레스(Wallace)를 다시금 택하지 않은 것은 훗날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국가적으로 축복이었지만, 그 수법이 잔인스럽고, 우회적이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월레스가 재지명받지 못한 표면적인 이유는 민주당 중진과 남부의 보수당원들이 월레스는 이미 인기가 하락하여, 선거전을 불리하게 이끌어갈지도 모른다는 조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전당대회 의장에게 발송한 서한에서 '대회에 지명할 생각은 없지만, 만약 개인으로서 주(州)대표라면 월레스를 지지할 것'이라 밝히고, 시카고로 떠나는 부통령에게 '헨리(Henry), 4년전과  변함없이 한 팀이 되었으면 하네'라며 격려인사까지 전한 그였다.

그로부터 닷새만에 루스벨트는 다른 두 사람을 러닝메이트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당내외의 정세 변화로 부득이한 사정도 감안해야겠지만, 그의 생애를 통틀어 한 개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이고, 커다란 배반이었으리라. 루스벨트가 월레스에게 냉랭해진 것은 4년간 월레스가 민주당내 중진 간부들과 전혀 손발을 맞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매일 접하는 의원들과도 자주 트러블을 빚었고, 보조를 같이하는데 애를 먹었기 때문이었다. 

월레스에 대한 FDR의 행동을 이해한다면, 1944년 대선기간 동안의 FDR을 곧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가 아리송한 발언으로 남을 현혹시키고, 표리부동한 모순된 약속을 남발했다는 관측도 루스벨트의 행동을 이해하는데 충분치 못하다. 진정 납득이 가는 설명이라면, 누가 러닝메이트가 되고, 정가(政街)의 파벌항쟁이 어떻게 진행되던지 간에 루스벨트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시련과 격무를 거치면서 그러한 일들에 초연해 있었다.

대선 초기부터 고의적으로 그러한 권모술수에 전념하려 했던 것도 아니었고(그럴 시간적 여유마저 없었지만), 딱히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심신(心身)이 너무 지쳤을 뿐이었다. 환경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말안장에 앉아 전쟁의 종결을 확인하고, 연합국 거두(巨頭)들과의 웅대한 협상으로 전후(戰後)세계의 평화를 얻고, 정착시킨다는 구상외엔 그  어떠한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에 일어나게될 사건을 문제삼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내려지더라도, 이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조차 개의치않는 반쯤은 체념해버린 듯 그런 심경이 되어있었다. 그는 운명을 거역하면서까지 싸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스스로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발생할지엔 생각하지도 않은 채, 되는대로 운명에 몸을 맡길 심산이었다. 이것이 정녕 무책임한 태도였을까? 아니면, 당당한 태도였을까...? 


                                 1944년 8월 18일, 백악관 정원에서 러닝메이트 트루먼과 오찬을 함께하는 FDR


러닝메이트 후보는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번즈(Byrnes)는 연방대법원 판사직을 버리고, 전시 경제동원을 담당했던 만큼, 보상격으로 후보에 추천되어야 한다며 자부할 정도였다. 그러나, 남부를 대변한 번즈는 너무 보수적인데다, 노동계급과 흑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불리한 여건이었다. 번즈의 후보 선출을 희망하는 정가 보스들에게 대통령은 '노동계로부터 양해를 구할 필요가 있다'는 답변을 남기고는 손을 떼버렸다.

1944년 7월 19일, 루스벨트는 민주당 전국위원장 해니건(Hannegan)에게 서한을 보내어 더글러스(Douglas)나 트루먼(Truman)을 후보로 추천하고 싶다는 뜻을 통고했다. 서신의 초고엔 '빌 더글러스 혹은 해리 트루먼'으로 씌여있었다. 그런데, 트루먼이 보다 인지도가 높아 강력한 후보였고, 전당대회에서 대통령이 앞에다 붙여준 이름을 많이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해니건은 이름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전달했다.

해니건의 의견을 받아들인 루스벨트가 아무런 생각없이 무심코 적어놓은 말이 이렇게까지 위력을 발휘하고, 미국 민주주의의 불가사의한 기구가 전혀 예상외 인물인 '미주리 촌부'를 미합중국 제33대 대통령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본래, 트루먼이 번즈를 지지할 입장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다. 트루먼은 번즈가 제외되고, 자신이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에도, 번즈 지지 연설문의 원고를 품속에 지니고 있었다 한다.

부통령 인선(人選)으로 더이상 골치를 썩히기 싫었던 루스벨트는 주저하는 트루먼에게 '그래, 전쟁중에 민주당을 공중분해시키고 싶거든,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일갈을 날림으로써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FDR과 트루먼, 양자는 잘 아는 사이도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결코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다만, 대통령은 트루먼이 국방계획을 감독하는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무난히 일을 처리하고, 솔직함과 근면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전당대회가 끝나고, 이듬해 취임식을 가질때까지 대통령은 단 한 번만 트루먼을 접견했다. 그만큼, 대통령은 거의 모든 만사에 무관심해져 있었다. 팔라(Fala, FDR의 애완견)를 둘러싼 자그마한 소극(笑劇)이 벌어지기도 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대세가 정해진 본선에 국한해서 여러 말들이 필요없다. 대통령은 혹여 듀이가 당선되면, 의회의 몇몇 중요한 위원장직을 과격한 고립주의자들이 차지할 것이라며 경고, 성과를 거두었다.

루스벨트는 선거인단에서 듀이가 196표를 얻는다면, 자신은 335표 정도를 장악할 것이라 기대했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듀이는 99표에 그친 반면, 루스벨트는 432표를 차지하였고, 36주에서 승리했다. 물론, 일반 득표수는 많이 감소하여 1916년 윌슨(Wilson)의 재선 이후 가장 적은 표차수(350여만)였지만, 바꾸어 듀이가 승리를 거둔 주들에서 28만여표만 민주당으로 넘어왔더라도 루스벨트는 48개주 전체를 독식, 획득할 뻔했다.

루스벨트가 4선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인가? 전쟁의 승리가 바로 목전에서 보이는 찰나, 9회에 가서 투수를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간단한 해답이다. 숭배자들은 선거전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건강이 별로 좋지않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지지표를 던졌다. 몸이 건강하든, 약하든 오로지 FDR이란 '우상'을 원했을 뿐이다. 그들은 대통령의 탁월한 탄력성에 큰 기대를 걸었고, 대통령 본인도 그점을 확신하고 있는 터였다.



                   



여러분들은 이번 취임식의 형식과 연설 내용이 간략해야 한다는 본인의 바램을 이해하고, 또한 본인과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미국 국민들은 동맹국과 더불어 가장 힘겨운 시련을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용기와 지혜와 단결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련을 극복함에 있어서 얼마나 성공적이고, 얼마나 영예롭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훗날 자손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동포들이 보는 앞에서, 또한 주님께서 지켜보는 앞에서 엄숙히 선서하며, 우리는 결코 패배할 수 없다는 우리의 전쟁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다가올 며칠, 몇 년 동안, 우리는 전면전쟁의 승리 쟁취를 위해 싸워가는 한편, 공정하고 영속성 있는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의 달성을 실현할 것이며, 실현해야 합니다. ...나는 안정과 평화가 유지되었던 옛시절, 학교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항상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는 일정한 기복이 있으며, 모든 사물은 번성할 때가 있으면 쇠퇴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분명히 흐름 자체는 언제나 앞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수세기 동안 산정(山頂)과 계곡의 한가운데를 연결하는 선(線)은 언제나 상향적인 경향을 표현하고 있다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1787년 우리 헌법은 완전한 제도체제를 확립하지 못했고, 오늘날에도 역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인종을 구별없이, 굳건한 민주주의를 구제할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전쟁이 지속중인 1945년의 오늘, 우리는 그 교훈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만 평화롭게 살 수 없으며, 평화와 행복은 멀리 타국들의 그것에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 삶의 진정한 목적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 시민이며, 인류 공동체의 일원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소박한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랠프 에머슨(Ralph Emerson)이 말하기를, 친구를 갖는 방법은 '유일하게 하나만을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의혹과 불신과 공포심을 가지고 대한다면, 영속적인 평화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과 넘쳐흐르는 이해와 용기와 신념을 발판으로 전진하여 나갈 때만이, 비로소 평화는 우리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은 우리나라에 여러가지 형태의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국민에게 자유와 진리를 보전할 수 있는 강인한 의지력과 육체적인 힘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에 고난의 시기, 만인의 희망이 될 신앙을 내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갈 길을 조심스레 관찰하고, 우리의 동포를 위하여 보다 개선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 이곳 지상(地上)의 굳건한 평화가 뿌리내리게끔 주님께 모두 기도드립시다.

- 1945년 1월 20일, 4기(期) 취임식 연설문에서 발췌



덧글

  • 위장효과 2013/01/26 09:45 # 답글

    얄타의 3 거두 사진 보면 옆의 대원수나 처 일곱 양반에 비해 노쇠한 모습이 역력하게 보이죠. 그 모습을 본 처칠은 전후 발간한 회고록에다가 써놨는데 본인도 수상재임기간동안 숱한 친구들과 부하들을 노환으로 잃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노쇠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을 겁니다.

    여하간 취임연설 3개월만에 대통령은 급사하고, 그거 보고 찐따 콧수염 총통과 그의 ㅂㅅ같은 부하들은 "제 2의 프리드리히의 기적이다!!!"하고 설레발쳐댔지만 결국 러시아 스팀롤러는 베를린을 밀어버렸을 뿐...

    트루먼이 참전할때만 해도 진짜 별 볼 일 없는 민주당 의원중 하나정도였는데 전쟁 발발하자마자 국방계획조사 특별 위원회의 수장-이것도 사실 본인이 원한 거라면 원한 거죠. 이 망할 사업가들이 군 납품문제가지고 비리질하는 꼬락서니에 화가 제대로 뻗쳤으니-맡으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었지요. 그렇긴 한데 비록 3개월간의 부통령이었지만 FDR이 자기 부통령한테 전쟁 상황과 기타 동맹국과의 이해관계등에 대해서 너무 안 가르쳐줘서 나중에 대통령된 그를 보고 처칠이 "이 양반이 자기 후임자한테 뭘 좀 인계해 주고 세상 뜰 일이지..."라고 투덜대기도 했었죠.
  • 에드워디안 2013/01/28 12:04 #

    사실, 베데스다에서 정밀진단을 받았던 44년 봄부터 최측근들은 대통령의 유고를 각오한 분위기였으니깐요.
  • 행인1 2013/01/26 11:59 # 답글

    듀이는 1948년에도 재도전했다가 제대로 희망고문(...)을 당했죠.
  • 에드워디안 2013/01/28 12:06 #

    다 이긴 싸움이라 생각하고선, 본인이 선거전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대가.ㄳ
  • 위장효과 2013/01/28 12:07 #

    역사에 길이 남을 오보 베스트 5에 들어갈 겁니다^^.
  • 에드워디안 2013/01/28 12:10 #

    위효//

    듀이 진영의 덜레스는 아예 '차기행정부'의 인수인계를 논의하다가 벙쪄버린 그런 대역전극이었죠.ㅋ
  • KittyHawk 2013/01/26 12:36 # 답글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성향에도 차이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루스벨트는 공산권에 다소 유화적인데 비해 트루먼은 독소가 싸운다니까 '둘이 싸우다 망하는 게 인류에 도움'이라고 하고 이후에도 공산권 세력 확장을 막으려 기를 썼으니 말이지요...
  • 에드워디안 2013/01/28 12:08 #

    중국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루스벨트가 말년의 외교 측면에서 다소 순진한 점이 많았죠.
  • 셔먼 2013/01/26 15:40 # 답글

    듀이 지못미(...)
  • 에드워디안 2013/01/28 12:08 #

    ㅠㅠ
  • 누군가의친구 2013/01/29 01:13 # 답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취임하여 이제는 전쟁을 마무리 해야하는 임무를 사람들이 바랬던 모양입니다. 그러저나 대통령을 하면 노화속도가 빨라진다는 어느 연구결과도 있었고(아마 부시 대통령 임기중 미국 언론 기사인걸로 기억합니다.) 실제 현 오바마 대통령만 보더라도 4년전 사진과 비교해서 얼굴에 흰머리와 주름이 훤히 보일지경인걸 보면 당시 전무후무한 4선까지 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압감은 어느 대통령보다 높을수 밖에 없던 모양입니다.
  • 에드워디안 2013/01/30 02:22 #

    그것도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60대 환자가 사명감만으로 현실을 헤쳐나간 불굴의 리더쉽에 감탄할 노릇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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