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韓日) 안보경협 협상의 내막 국제, 시사


盧 : 현재로선 진행중이니깐...(말문을 잇지 못한 채)

高建 : 잘 되겠지요... 아직 결과를 알 수 있겠습니까...

園田 : 노(盧) 장관께서 이번 각료회의에서 ODA 60억$ 대한(對韓)경협을 열의있고, 강력히 요청해왔습니다. 허나, 본인은 우리나라(일본)의 재정적 형편상 곤란하다는 뜻을 밝혔으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우울한 외무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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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장관 노신영이 안기부장에 임명된 것은 1982년 6월 2일. 경남 의령에서의 총기난사사건과 장영자 파문 등으로 민심이 뒤숭숭할 무렵이었다. 여권 곳곳에서 '민심 수습'이라는 미명하에 물갈이가 진행중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기부장 경질이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학성 부장 후임으로 노신영 장관의 기용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말만 들어도 으스스한 남산에 '문민(文民)부장'이 등장한 것은 신직수 이래 처음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이미지 쇄신 포석일 수도 있었고, 신군부내 12.12 주도파의 퇴조와 전두환 1인체제의 구축이라는 흐름도 있었으나,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배경이 있었다. 다름아닌, '안보 경제협력'을 둘러싼 악화될대로 악화된 대일(對日)관계였다. 5공(共) 초기, 1년반에 걸쳐서 한일 양국의 조야를 떠들석하게 만든 이른바, '대일 1백억불(佛) 경협자금 요구사건'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전두환과 노신영이 주도하고, 심혈을 기울인 역점사업이었다.

집권 초창기, 김대중 문제로 일본으로부터 곤욕을 당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전두환 정권은 분풀이와 재원확보 차원에서 반격전을 모색했다. 물론, 독자적인 전력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어림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 막 출범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를 후방 지원세력으로 확보하기부터 한일전(戰)은 시작되었다. 1981년 2월 2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노신영 외무장관은 전두환에게 '한일 안보경협안'의 논리를 상세히 설명했다.

백악관에서 레이건과 대좌한 전두환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끄집어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미국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선 일본이 동북아시아 안보에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희망하는 바입니다. 한미 양국의 공산진영에 대한 방파제 역할덕에 일본의 번영이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일본으로선 미국이 2개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는데 소요되는 비용 만큼이나, 한국에 대해서도 지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일본측이 이해하도록 미국에서 설득해주길 바랍니다.'


무역전쟁 등 미국이 기회가 있을때마다 일본측을 상대로 거론해 온 '안보 무임승차론'을 배경으로 삼은 논리였다. 레이건은 '이견이 없다'며 동의해주었다. 바로 다음날인 2월 3일에도 노신영은 대통령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관람을 수행하던 도중 미(美)국무부 아시아태평양 차관보 홀드리지에게 측면 지원을 요청, 역시 동의를 얻어냈다. 2월 7일, 전두환은 곧바로 귀국 특별기상에서 신병헌 부총리와 노신영에게 구체적 추진을 지시하였다.

당초, 최창락 경제기획원 차관을 팀장으로 한 실무작업반이 마련해낸 경협 구상안은 총 50억$ 규모였다. 노신영은 이 안(案)을 한마디로 일축한 채, 1백억$ 경협안 작성을 지시했다. 실무팀은 4월 17일, 일본정부 직접개발원조(ODA) 60억$에 수출입은행 차관 40억$를 뼈대로하여 구체적인 요청 내용을 마무리지었다. 4월 22일, 노신영은 이임하는 스노베 주한일본대사를 호출, 1백억$ 경협을 공식 요청하고 최경록 주일대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스노베 대사가 훗날 '기상천외한 숫자에 순간 귀를 의심했다'며 술회했을 만큼, 일본측을 깜짝 놀라게 만든 전두환 정권의 '대일 선전포고'였다. 졸지에 한미 양국으로부터 협공을 받게된 일본측은 미국의 방위비 증강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한국의 안보경협안 요구 사실을 덮어두었다가, 7월 하순 자국 언론에 슬며시 그 내용을 흘렸다. 대리전쟁인 마냥, 한일 양국 언론들은 신경전을 펼쳤다.

언론을 완전히 장악했던 한국정부는 이 문제를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듯한 자세까지 보였다. 한일협정 당시 '3억$ 굴욕외교'와 뚜렷이 대비된 자세로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숨어있었던 것이다. 8월 8일, 중남미를 순방중이던 소노다 일본 외상은 돌발적인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언급, '군사적 배려하의 경협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격전'이 다가왔음을 암시했다.

1981년 8월 20일,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외상회담은 외교회의가 아닌 '오기 싸움'이었다. 회담 전날에 나온 소노다의 원색적 초전(初戰) 극언으로 가뜩이나 썰렁한 분위기가 전례없이 꽁꽁 얼어붙은 채 들어간 교섭은 처음엔 노신영이 한반도 안보정세를 설명, 일본측이 묵묵히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회담 직후, 소노다가 양측 합의를 깨고 회담 내용을 공개하면서 '안보문제는 논의되지 않았다'고 발언, 노신영의 열변을 깔아뭉갰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노신영은 '지금, 한국에서는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던 세대가 각계의 지도적 위치에 올라갔다. 일본은 겸허히 반성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숙소인 제국호텔로 기우치 일본외무성 아주(亞洲)국장을 호출한 그는 '2차회담은 안 한다. 내일 돌아가겠다'고 경고했다. 살얼음을 걷는 모양새였다. 이튿날 새벽, 전(前)주한대사로 외무성 사무차관인 스노베가 노신영을 다독여 완전한 '파국'은 간신히 모면해, 외상회담이 속개되었다.

노신영은 '1백억$로부터 단 한푼도 깎을 수 없다'며 언명했다. 소노다의 답변은 이랬다.


'일본은 헌법상의 제약 때문에 안보협력은 절대 불가능하다. 또한, (국채의존도 증가로) 정부 재정이 악화된 상태다. 다만, 한국의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협력이라면, 지금까지의 2배 정도선에서 고려해봄직하다.'


국교정상화 당시 '청구권'이라는 명칭을 끝내 거부하고, '독립축하금'이란 용어를 고집했던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소노다 망언에 함축된 의미를 직설적으로 바꿔 표현하면, '당신네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기반은 취약하지, 경제도 어려우니 돈 구걸하는 것이 아니냐. 정 그러하다면, 조금은 도와주마'라는 식의 소리나 다름없었다. 한국측은 '총액 규모만 들어준다면, 명목은 일본측 사정에 맡기겠다'는 입장만을 전하고, 부랴부랴 철수했다.


* 문제의 소노다 망언록

'한국측이 경제는 어려운데, 어렵다고 말하기엔 곤란할테니깐... 국방과 안보를 들먹이는 것은 이쪽(일본)의 양손을 묶어놓고, (돈을) 내놓으라는 꼴과 같은격이다. 경제위기로 협력을 요청할 바엔 사실대로 말할 노릇이지...'

'한국이 일본의 (안보) 방파제라면, 일본은 한국의 뒷방패라고 말하고 싶다. 안보문제를 경제협력과 연결지으려는 사고방식은 수용할 수 없으며, 이를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일한(日韓)관계는 잘못될 것이다.'

'일본의 전체 해외원조액 70%를 바라는 요청엔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 줄 것도 못 준다.'

'독불(獨佛)관계와 마찬가지로 어느쪽이 정복했네, 어느쪽이 당했네 운운한다는 것은 과거사가 나쁘기 때문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 이전엔 조선[신라]에서 일본을 해치기도 했으니, 결국 피장파장 아니겠는가?'

'특수한 과거사적 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의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한국측은 자국의 입장만을 우선시한다. 방위 관련 경제협력은 곤란한 정도가 아니다. 아예 불가하며, 방위란 독립국가 스스로가 담당해야할 사정이다.'

'헤이그(美 국무장관)한테 고자세로 나갔다가, 일한회담에선 상당히 저자세로 나왔는데도...'

'돈 빌리러 온 자가 단 한푼도 못깎는다며, 떼쓰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본 상식으로는 통용되지 않는다.'

'일한 정기각료회의에서 다케시마(竹島, 獨島) 문제를 공식 의제로도 거론할 수 있겠다.'

'대형규모의 공장은 배일 ・항일의 원동력이 되거나 정권 강화만 도울 뿐, 국민생활엔 전혀 이롭지 못할 우려가 있다. 경협이란 민생 안정을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한국 이외의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싫어하는 상대로부터 돈을 빌려가고, 기술까지 습득하는 관습이라도 있나 보오?'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고자 나리타 공항까지 노신영을 전송한 스노베가 'ODA 20억$, 수은차관 40억$안'을 제시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9월 10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정기각료회담 도중에 소노다는 ODA 13억$, 수은차관 27억$, 총 40억$의 경협자금안을 제시하고, 전두환 대통령과 직접 면담을 요구했다. 이때부터 양국관계는 평행선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노신영이 가시돋친 말투로 다짜고짜 소노다에게 따져물었다.


盧 : 어째서 스노베 제안보다도 줄어들었는가?

園田 : 그건 스노베 개인의 희망일 뿐이다.

盧 : ODA 40억$, 수은 40억$로 정상회담에서 결정하자.

園田 : ODA는 13억$ 이상 안 된다.

盧 : 그러면 회담 결렬인가?

園田 : 두 번만 얘기하고선 결렬이라고 할 것까지 있는가? 공동성명이나 발표하자.

盧 : 회담 결렬을 숨길 필요가 없다. 공동성명은 관두고, 신문 발표문으로 하자.


** 1981년 9월 10~11일, 제11차 한일각료회담 참석자 명단


한국측 참석자

* 외무장관 = 노신영(盧信永), 수석대표

* 재무장관 = 이승윤(李承潤)

* 농수장관 = 고건(高建)

* 상공장관 = 서석준(徐錫俊)

* 동자장관 = 박봉환(朴鳳煥)

* 교통장관 = 윤자중(尹子重)

* 주일대사 = 최경록(崔慶祿)


일본측 참석자

* 외무대신 = 소노다 스나오(園田直), 수석대표

* 대장대신 = 와타나베 미치오(渡美智雄)

* 농수대신 = 가메오카 다카오(亀岡高夫)

* 통산대신 = 다나카 로쿠스케(
* 운수대신 = 시오카와 마사주로(
* 경제기획청장관 = 고모토 도시오(河本敏夫)

* 주한대사 = 마에다 도시카즈(前田利一)


일본측은 벽창호 같은 노신영과는 더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유학성 안기부장이나 서정화 내무장관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한국측이 껄끄러워하는 소노다를 교체해 줄테니, 똑같이 보답하라며 압박해왔다. 그해 11월 30일, 스즈키 총리는 연례 개각으로 후임 외상에 사쿠라우치를 기용하였다. 사정이 이렇게되자, 한국으로서도 성의를 보여야 했고, 전두환은 자신의 친구인 권익현을 12월 6일, 극비리에 일본으로 보냈다.

보안 유지차 멀리 대만을 경유해 동경에 잠입한 권익현은 다나카 ・후쿠다 전(前) 총리와 나카소네, 미야자와, 아베, 니카이도 등 일본정계 실력자들과 회동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계기, 돌이켜보면 경협자금 요구사건의 분수령이 되었던 점은 아베 통산상과의 만남이었다. 아베는 권익현에게 '공식 교섭에만 의존하게될 경우, 충분한 의사소통이 어려우니 양국 정상이 지정한 인사들이 (비공식 채널로) 자유롭게 접촉하는 것은 어떤가'라고 제의했다.

즉각 제의는 받아들여졌고, 권익현이 한국측 밀사로 지명되었다. 일본측에선 스노베를 지명했다가 곧 정계의 흑막(黑幕)이자 이토추(伊藤忠) 상사 고문인 세지마로 바꾸었는데, 권익현이 삼성그룹에 몸담고 있을때부터 세지마와 친교가 있었던 점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듬해 1월, 세지마는 서울로 건너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예방했다. 양측은 난제인 총액교섭은 비공식 라인에 맡기고, 나머지만 공식으로 다루자는데 합의했다.

1982년 3월 18일, 권익현은 공노명 외무차관과 함께 재차 동경을 방문했다. 이때, 세지마는 경협 협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다소 구체성을 띈 일본측 복안(腹案)을 밝혔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4월 초순에 정치적 결단으로 일본측 안(案)을 마무리짓고, 다케시타 의원을 총리특사 자격으로 서울에 파견하겠다. 총액은 ODA 20억$, 수은차관 30억$의 50억$. 그리고, 기타 자금으로 + α가 뒤따를 것이다. 의견이 접근되면, 6월에 외상회담을 재개하고, 7월엔 스즈키 총리가 공식 방한(訪韓)하는 것이다.'


노신영 등 공식 외교채널상의 대화가 가망없다고 판단한 일본측이 '2중외교'란 우회적 방식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타격하게 된 것이다. 4월 20~24일경, 권익현-세지마간에 무려 스무차례의 전화가 오갔다.


瀬島 : 다케시타를 특사로 파견한다. ...대통령 면담이 가능하겠는가?

權 : 현재 오가는 경협 내용으로는 대통령 면담도 어렵고, 나도 일본에 건너가기 어렵다.

瀬島 : 이번 건은 중요하다. 대통령과의 면담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權 : 거듭 말씀드리지만, 보장할 수 없다.

瀬島 : 어제, 총리와 관방장관, 외상에게 한국측 입장을 전달했다. 총리로서는 다케시타가 거물인 만큼, 대통령과의 면담이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국 방문을 그에게 요청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요청한다.

權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오느냐가 아니라, 가지고 오는 내용 자체가 문제다. 일본측에서 가져오는 안을 나와 외무장관이 검토하고 나서 대통령과의 면담 여부를 결정하고자 한다.


이윽고, 스즈키 총리까지 나섰다. 4월 23일 저녁, 스즈키는 전두환 앞으로 전보를 보내왔다.


'경협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면 곤란하다. 양국관계에 바람직스럽지 못한 영향을 미칠 우려마저 있다. 일본측으로선 최대한의 성의를 다한 안을 가지고 방한하려는 특사의 접견을 희망하는 바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회답은 마찬가지였다.


'경협문제 타결의 불필요한 지연이 양국관계에 바람직하지 못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는 점에 동감한다. 특사는 접견하겠으나, 국무총리, 외무장관 등 교섭 책임을 지닌 각료와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쳐야 한다.'


결국, 일본측은 다케시타 특사의 파견을 단념해버렸다. 4월 29일, 일본은 야나기야 외무성 심의관을 서울로 보내와 다시 한 번 공식 교섭루트에 임했다. 야나기야는 노신영과 세 차례 걸쳐 담판을 벌였다.


柳谷 : 금년(82년)부터 86년까지 ODA 13억$, 수은차관 22억$, 민간자금 5억$ 등 총 40억$를 공여하겠다.

盧 : ODA 13억$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민간자금은 의미가 없다.

柳谷 : 그렇다면 차관 공여기간을 1년 연장하고, ODA 15억$, 수은차관 25억$로 수정하겠다.

盧 : 못 받는다. 그게 최종안인가?

柳谷 : 그렇게 말할수는 없지 않은가? 최대의 성의를 표시한 안이다.

盧 : 우리측 안을 수정한다. ODA 최소 30억$, 금리 4% 이하로 요구한다. 상품차관 10억$가 추가되어야 한다.

柳谷 : 일단, 귀국해서 회답하겠다.


일본측 대답은 언론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일본 언론은 '더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며 일제히 자국 정부의 입장을 보도했다. 교섭은 최악의 국면이었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일본은 미동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한국측으로선 '안보' 개념을 철회하고, 당초의 주장에서 대폭 물러선 이상, 차마 공박할 입장이 못되었다. 때마침, 시기를 같이하여 장영자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 전두환 정권은 국내적으로도 곤혹스런 처지에 빠져들었다.

끝내 견디다 못한 전두환은 일본측의 표적인 노신영을 교섭 라인에서 빼내어 안기부로 보내고, 비공식 대화채널인 권익현을 민정당 사무총장으로 중용했다. 기묘한 포석이었다. 노신영의 후임으로 신임 외무장관엔 이범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기용되었다. 이범석은 노신영의 평양고보 5년 선배. 그가 직면한 최대 현안은 물론, 후배가 남기고 떠난 '경협자금'이란 난제로 악화된 국민감정을 거스르지 않고 일본을 상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정부의 외무장관 경질을 일단 '청신호'로 간주한 일본은 바로 다음날인 6월 3일, 밀사 세지마를 서울로 보냈다. 세지마는 공항에서 내리는 즉시 청와대로 달려가 전두환과 대좌했다. 다케시타 특사의 방한을 거절했던 움직임과 비교하면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판세는 거의 기울었다. 의령 총기난사사건, 장영자 파문 등 온나라를 뒤흔든 '대형사고'가 터진 마당에 일본과 싸울 힘이 나오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全 : 일본측이 5월엔 경협문제를 타결키로 약속했는데, 왜 지연되는가? 약속을 지켜야하지 않은가?

瀬島 : 공은 한국측이 던질 차례다. 우리로서는 야나기야 안이 최종안이다.


1982년 6월 21일, 이범석은 새로운 경협안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양국의 국내 사정을 보건대, 일본에서는 우리측이 양보할 것으로 판단하는 모양이다.

2. 따라서, 일본측의 입장을 가능한 한 수용하면서 우리측 이익을 도모하되, 조기 타결을 유도한다.

3. 다만, 내자 조달을 위한 상품차관에 역점을 둔다.


이렇게해서 제정된 안이 1백억$로부터 절반 이상이나 삭감된 40억$(ODA 23억$, 상품차관 17억$)짜리 경협이었다. 노신영-야나기야 회담때 제기한 ODA 30억$ 보다 7억$ 깎여 내려갔다. 이범석은 이 제안을 가지고 7월 5일, 동경을 방문하여 전임 장관과는 사뭇 다른 유화적인 자세로 현지 정계 지도자들을 찾아다녔다. 이미, 한국의 열세를 간파한 일본측은 다소간 수사(修辭)상의 신축성을 보였을 뿐, 야나기야 안이 최종안이라 못박았다.

그러나 여름 내내 경협 교섭은 물론, 양국관계가 완전히 동결되버렸는데, 그것은 전혀 예기치도 못한 사건이었다. 이범석이 귀국한 직후부터 표면화된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말미암아, 중국과 한국이 들끓었다. 세간 여론의 관심이 여기에 쏠려 강력히 항의하는 바람에 경협 논의는 당분간 수면 아래로 내려갔던 것이다. 8월 26일, '정부 책임하에 시정하겠다'는 일본측의 성명으로 사태는 고비를 넘겼으나, 교섭이 재개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처럼, 안개속을 헤매던 경협 교섭의 돌파구를 열어내고, 상황을 반전시킨 사건 역시 예기치 않았던 스즈키 총리의 재선 불출마-사임 선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카소네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한일관계는 스즈키 정권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교섭은 아연 활기를 되찾아 나카소네는 총리 취임 직후인 11월 30일, 청와대로 직접 전화 통화를 걸어왔다. 일본 총리로선 최초의 사례로 전두환 입장에서야 반길만 했다.


全 : 사정이 허락하는 한, 빠른 시일내로 서로가 만나 양국 관심사에 기탄없이 의견 교환을 가졌으면 좋겠다.

中曾根 : 나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양국 정상의 화기애애함은 교섭 채널에 반영되었다. 12월 3일, 세지마가 권익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瀬島 : 14일, 총리 특사를 서울로 보내고 싶다. 그전에 당신을 동경에서 만나고 싶은데...

權 : 당직(黨職)을 맡고 있어서 과거처럼 움직이기가 쉽지않다.

瀬島 : 내가 8일에 부산으로 건너가겠다. 이번 특사 건만 잘 해결되면, 총리가 연내에 방한하고자 한다.

權 : 일단, 부산에서 만나 이야기하자.


세지마와 통화중인 권익현의 옆에는 항상 외무부의 실무 당국자가 동석해있었다. 그리고, 그 당국자는 안기부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공노명 차관보처럼 교섭 담당 간부들은 매일 출근전 안기부장 공관에 들러 일일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았다. 대통령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일본으로부터 낙인찍힌 노신영을 교섭 라인에서 빼내야했지만, 배후 지휘탑은 그에게 맡겼다. 선배 이범석의 심기가 편할리 없었는데도 말이다.

12월 8일, 김해국제공항 귀빈실에서는 극비리에 날아온 세지마와 권익현 간에 막바지 입씨름이 벌어졌다.


瀬島 : 나의 사견이다. 야나기야 안에다 ODA 3억$ 추가하는 정도까진 가능하다. 합의 가능하다면, 14일에 내가 다시 특사로 오겠다. 특사의 방한 다음주부터 정상회담 준비를 실행, 금년내로 실현시키자.

權 : ODA는 20억 5천만$, 수은차관 19$ 수준이면 대통령과 국민들을 설득해보겠다.


12월 16일, 세지마는 권익현에게 전화로 '일본정부내 의견이 조정되지 않아 방한은 어렵다'면서 오사카로 와줄 것을 부탁했다. 권익현이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12월 22일. 다음날 오전, 시내 호텔에서 세지마와 담판했다.


瀬島 : ODA를 2억가량 늘려 17억$, 수은차관 23억$로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카소네 총리뿐이다. 한국이 대국적 견지에서 노력할 생각이라면, 일본은 총리 친서를 휴대한 특사를 1월 4일에 서울로 보낼 생각이다. 그리고, 그 결과 여부에 따라 총리가 1월 10일경 당일자 귀국 일정으로 공식 방한한다는 계획이다.

權 : 대통령은 우리의 주장만 내세워 나카소네 총리가 어려움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ODA를 2억 늘린 정도만으론 곤란하다. 또한, 총리의 방한 일정이 최소한 1박2일은 되어야 한다.

瀬島 : ODA는 18억 5천만까지 가능할 것이다. 이걸 받는다면, 내가 특사로 간다. 결단을 내려라.

權 : ODA는 최소 19억까지 되어야만 한다.


한국측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전두환과 노신영은 최종 결론을 내릴 시점에 온 것이다. 12월 26일, 서울의 하얏트 호텔엔 이범석, 권익현, 김재익, 김흥기, 정인용 등 당국자들이 모여 대국민 홍보와 나카소네 총리 영접 준비대책을 논의했다. 12월 29일, 세지마가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이범석, 권익현을 잇따라 만나고선 다음날엔 대통령을 예방, 나카소네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전두환은 방한을 초청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때마침, 연말 분위기는 보안을 장담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양국의 외교채널이 분주히 움직였지만, 철통같은 보안 덕분에 언론의 '촉수'가 닿기 어려웠다. 착착 진행되던 마무리 작업이 한차례 위기에 봉착한 것은 '문서화' 문제였다. 1983년 1월 3일, 세지마는 권익현과의 통화에서 나카소네가 정상회담에서 경협 액수가 직접 논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했다. 한국측은 확실한 타결문서에 양국 수뇌가 서로 서명을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1월 5일, 정상회담 의제를 협의차 내한한 기우치 일본외무성 아주국장과 공노명 차관보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이 교섭이 무위로 그치자, 전두환은 장문의 전보를 세지마에게 보냈다.


'일본의 정치적 배려가 전혀없다. 우리 국민의 의문이 남는다면, 총리가 방한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합의 내용의 문서화는 상식이다. 일본측 실무자의 생각은 총리와 본인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다. 문서화를 못하겠다는 것은 한국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내가 불만족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타결에 응한 것은 총리에 대해 정치적 지원을 하고자함이다. ...명료하게 기술한 문서를 외상끼리 서로 교환하고, 공동성명에 반영해야 한다.'


일본으로서도 다소간의 성의를 보여야만 했다. 나카소네의 지시에 따라, '외상회담에서 일본측이 경협 액수, 내용과 조건을 백지에 써서 낭독한 뒤에 한국측에 전달해준다'는 타협책이 마련되었다. 한국측의 요구 공세는 계속되었다. 안기부에서 노신영은 '반드시, 외상간에 직접 서명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라'는 지침을 주일대사관으로 타전했다. 최경록 대사가 나카소네를 관저로 방문한 것은 그의 방한 전날인 1월 10일 오전경이었다.

그러나, 나카소네의 대답도 실무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치인이 서명할 경우, 언론이나 야당에서 떠들어대 정권 초창기부터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식이었다. 결국, 문서화 관련 명확한 합의없이 1월 11일 오후, 나카소네는 서울에 도착했다. 철야 교섭의 끄트머리인 12일 새벽, 일본측은 과장급 서명을 주장하던 입장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국장급 서명안을 내놓았고, 이를 관철시켰다. 한국도 그 상황에서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일본정부가 직접 제공한 ODA 18억 5천만$, 나머지 수출입은행 차관 21억 5천만$, 40억$의 자금을 7년기한에 걸쳐 단계적으로 받으며, 양측의 아주국장 서명이라는 최종안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무수한 비탈길과 벼랑을 오르내리던 '한일경제협력' 교섭의 대장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노신영 외무장관이 스노베 대사에게 자금 1백억$, 그중에서 ODA 60억$의 일괄 공여를 공식 요청한 지 정확히 629일만의 일이었다.


                               1981년 9월 2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사회당의 질의에 답변중인 소노다 외상
                               '돈 빌리러 온 자가 단 한푼도 못깎는다며 떼쓰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덧글

  • 솔까역사 2013/02/05 17:30 # 답글

    재미있군요.
    통쾌한 기분 한편으론 생떼같기도 합니다.
  • 위장효과 2013/02/05 17:44 # 답글

    0. 지워졌다 다시 올라와서 제가 올리려던 댓글도 쓱싹

    1. 저걸 보면 나카소네 총리가 처음 정권을 잡으면서 내뱉었던 일성-그에게 "풍향계"라는 별명을 공고화시켰던-도 전임자들과 기타 정치인들이 너무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깊게 고려를 안했던 것에 대한 반동이었단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2. 당시 내각의 면면들이 참...저렇게 일본과의 문제 해결하고 그 해 10월 버마 순방갔다가 돌아가셨지요. 그러고보니 올해가 30주기.

    3. 당시 최경록 주일 대사가 장면정부당시 육참총장-장도영의 전임자- 최경록 장군이 맞습니까?
  • 에드워디안 2013/02/05 19:40 #

    1. 이글루 네임을 변경해볼까 말까 망설인 탓이라서요. 그냥 이대로 나갈 참입니다. 양해해주시길.^^;

    2. 넵, 그 최경록 장군이 맞습니다. 일본 부임에 앞서 임명장을 수여받을 때,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기로 대세가 정해진지라 모든 스케줄이 취소되고, 박충훈 총리가 의식을 주재했다는 후문이 있습죠.
  • 갈천 2013/02/19 18:04 # 답글

    음. 허화평이 전두환 각하를 칭송하는 자료를 봤는데, 결국은 노신영이 만들어 준 것인가 보네요. 평가절하를 해야겠습니다.

    한국논단 2005.12월호

    ▲이도형 : 특히 감명 받으신 것은 없나요. 역시 다르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허화평 : 그분이 미국 갈 때, 그것은 단순한 순발력이라고도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분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임무완수 형이에요. 주어진 임무에 대해선 아주 철저한 분이에요. 임무 완수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이것을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다른 복잡한 것은 생각하지 않는데 주어진 임무완수를 위해가지고는 아주 골똘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그 밑에 근무하면 굉장히 힘듭니다. 계속 긴장해 있어야 되요. 그런 것이 어떤 때 나타났느냐 하면 레이건 미국대통령을 만나러 가시는데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내가 다시 놀랐는데) 레이건 대통령 만나면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참모들이 페이퍼를 잔뜩 가져다주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짧은 대좌시간에 레이건 대통령을 완전히 설득해야할 터인데 자기가 무슨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일본의 富士山(후지산) 상공을 지나가면서 문득 생각해냈다는 거지요.

    가서 내가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다. 아주 솔직하게. 그런데 그 도움을 일본으로부터 얻어내도록 레이건에게 부탁을 하고 그 결과는 한국도 좋고 미국도 좋으면 이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서 캘리포니아 GDP(국민총생산)하고 LA의 GDP를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대요. 보고를 받아 보니까 캘리포니아의 GDP는 3천 2백억 달러이고 LA의 GDP는 8백 억 달러였답니다. 그 때 우리한국은 GDP가 약 6백억 달러였습니다. 레이건을 만나서 초청해줘서 고맙다며 이야기를 하다가 물어봤대요. 대통령각하 캘리포니아 주지사 하셨는데 캘리포니아 GDP가 얼만지 아시냐고. 그가 알 리가 없지요. 레이건이 두리번거리는데 그 때 곁에 와인버거(국방장관)도 있었고 헤이그(국무장관)도 있었고 배석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전 대통령이 「내가참모들을 통해서 조사해본 바로는 3천 2백억 달러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LA의 GDP도 각하께서 한번 알아보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약 8백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우리한국은 6백억 달러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지켜주어서 오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고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당신들 도움 없이는 일어서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일본이야기를 했대요. 「당신들은 사람도 보내줘서 죽고 돈도 보내주고 했는데 옆에 있는 일본은 탱크 한 대도 안 보내줬어요. 우리 덕택에 자기들 잘 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레이건 대통령 보고 「각하께서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일본 총리한테 부탁해서 우리 한국 좀 도와주라고 설득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돈을 가지고 우리가 국력증강에 필요한 미국물품을 많이 사겠습니다. 당신들도 돈 안내고 물품 팔고 나쁠 것 없잖아요. 그리고 일본에도 우리가 공짜로 달라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갚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좋은 것인데 각하께서 좀 부탁을 드려주시면 잘 안되겠습니까」 하고 말했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워싱턴 눈치보고 늘 대한정책을 결정한 것이 일본 아닙니까. 너무나 잘 아시다 시피. 그런데 그것을 이분이 아신 거예요. 그러니까 레이건대통령이 싱글벙글 하더니 「그러면 당신 얼마나 원 하는가」고 물었답니다. 그러니까 전대통령께서 「그 액수는 우리 참모들이 판단해서 나중에 계통을 통해서 연락을 올리겠습니다」 하고는 돌아와서 나중에 1백억 달러~40억 달러 이렇게 됐죠. 자기의 임무에 대한 집착심 때문에 그런 순간적인 발상이 나온 거에요. 그래서 그 분은 임무완수 형이에요. 그러니까 박대통령 돌아가시고 박대통령의 그 나머지 과업을 완수 하는 데는 바로 그런 점에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판단력은 직감적입니다. 식견도 체험적 식견이지만 판단도 이 체험에 의한 직감에 의해서 판단도 해요. 다른 동기들 특히 노태우 등과 특히 많이 다른 것이 잡기나 사치하지 않아요. 고스톱, 포커, 음주 이런 것 일체 안 합니다. 아주 심플하다고요. 그런데 자기 일에 대해서는 대단한 집념을 갖는 분이란 말이죠. 그래서 결국은 그런 판단력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 점은 박대통령 통치형태하고 비슷합니다. 그 분을 보좌하면서 본 것이 그것이니까 통치에 있어서 본인이 인정하시건 안 하시건 교사역할을 한 것은 박 대통령이었지 않겠나. 그런 느낌이 들어요.
  • 2013/02/19 23:5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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