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사의 권고, 그리고 김대중 국제, 시사


1980년 5월 19일, 오히라 일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사태와 관련 공식 견해를 표명했는데, 이는 최규하 대통령 명의의 특별 담화문을 번복한 것으로 일본측이 전두환 그룹에 의해 지배받는 한국의 신(新)체제에 동조 및 지원할 것임을 확인해주었다. 또한, 일본의 입장을 전달할 정부특사로 전(前) 아프간 대사 마에다 도시카즈가 파견되었다. 마에다는 5월 21일, 서울에 도착해 2주간 머무르면서 한국 정 ・관계, 군부 실력자들과 회동했다.

방한기간 도중, 마에다는 김원기 부총리와 박동진 외무장관 등과도 회담을 가졌다. 5월 25일의 회담에서 김원기는 마에다에게 '한국 국내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할 방침'을 명확히했으며, 박동진도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발령, 포고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면서 일본측의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광주시의 소요사태에 대해 '전남 일대에 확산중인 폭동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로 수습하는 한편, 질서를 회복시키겠다'고 보장하였다.

5.17 쿠데타 파란과 광주사태, 3김씨의 구속-가택연금은 전두환으로 하여금, 정통성 위기를 절감하게끔 만들었다. 국내에서의 정통성 부재를 미국과 일본의 지지로 만회하고자 했지만, 미국의 압력은 지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의 체제 승인은 절실하면서도 시의적절한 기회로, 일본은 전두환의 딜레마를 충분히 간파해 동북아시아 안보 관점에서 전두환 정권의 안정과 조기 공고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6월말, 이토추 상사 고문이자 비공식 특사 세지마가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정치적 조언을 건네주고, 다음과 같이 귀띔하면서 처음으로 '일한(日韓) 안보연계 경제협력'의 구상을 제시하였다.


瀬島 :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세 가지 일을 해야 합니다. 첫째, 일본정부에 한국과의 방위 분담을 위한 경제협력을 요청할 것. 둘째, 서울에서 88년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할 것. 셋째, 만국박람회를 유치할 것.


세지마는 안보 차원 경협차관 요청의 논리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일본은 헌법상의 제약 때문에 방위를 직접적으로 지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간접자본 육성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원해준다면, 한국은 그만큼의 재정 여유를 방위비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의 경제지원이 한국 안보를 지원하며, 한국경제의 회복에도 도움을 준다.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 평화의 근간이다.'


세지마는 국교정상화 전후부터 박정희 정권과 일본 정재계간의 파이프 노릇을 해왔던 '현해탄의 밀사'였다. 일찌기 1979년 11월, 세지마는 방위청 강연에서 '종합 안전보장론'을 역설, 4가지 원칙을 설파했다.


1. 국내사회의 안정

2, 국제무대에서의 일본의 신뢰성 확보

3. 에너지 안전보장

4. 군사적 안전보장


종합 안전보장론은 78년말 오히라 정권의 출범시부터 도입된 개념으로 세지마가 강연에서 강조한 점은 군사력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내사회의 안정 확보'였다. 세지마는 70년대 국제정세를 유동화시킨 원인으로 외부로의 침입과 국내사회가 안정화되지 않음에 따라, 체제 혹은 정권이 붕괴되고, 그 결과 국제 안보환경에 동요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시각이 파행기를 겪은 한국에 대한 우려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1980년 6월, 전두환-세지마 회담에서 나온 발언은 대단히 논쟁적이다. 이제껏 1981~83년 한일 양국간의 안보경협에 대한 그동안의 관측과 정면으로 배치되며, 일본 외교정책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거론된 수동성을 부정하는 하나의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81년초 전두환 개인의 아이디어로 '한일 안보경협론'이 처음 부각된 것이며, 그해 8월의 노신영-소노다 회담에서 1백억$의 구체적인 액수가 제시되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세지마의 '3대 권고'를 사실로 가정할 경우, 결국 한일 양국간 안보경협론은 일본측에서 처음 착상하여 전두환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전두환이 81년 2월의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에 건의했으며, 레이건 행정부가 보다 강력히 일본에 방위 분담을 요구했다는 추론이 성립된다. 정확한 경위야 어찌되었든, 1980년 8월 재차 방한(訪韓)한 세지마는 신(新)정권의 안정과 경제 활성화, 이미지 개선 등에 대해 전두환에게 조언하였다.

다만, 여기서 세지마는 김대중 재판의 결과가 일본 여론에 미치는 영향, 한일관계 악화의 가능성도 시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12월, 미국을 방문중인 한국정부 특사 정호용은 공화당 레이건 당선자팀과의 외교 담판에서 81년 초에 출범할 새로운 행정부가 전두환 대통령을 외국 정상으로서 처음으로 공식 초청해준다는 조건하에 김대중의 사형 판결을 취하하는데 합의했다. 그같은 배경엔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외교적 '압력'도 한 몫 했었다.

계엄사의 내란음모사건 수사 발표에 외국 정상으로서 공식적으로 처음 김대중 문제를 거론한 것은 1980년 7월 8일, 이토 일본총리 대리(代理)의 관심 표명이었다. 오히라 총리의 급서와 양원(兩院) 동시선거 등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스즈키 내각은 외무대신으로 자리를 옮긴 이토의 주도하에 한일 정기각료회담의 개최를 연기, 김대중 구명을 위한 대한(對韓) 압박전에 나섰다. 8월 12일, 이토 외상은 한국 당국의 '신중한 대처'를 촉구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둘러싼 스즈키 정권의 대한 고자세는 전임 오히라 정권과 차별화된 인사 개편, 방향 전환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스노베 주한(駐韓)대사에 따르면, 2차 오히라 내각의 오키타 외상과 스즈키 내각의 이토(혹은 소노다) 외상은 대(對)한반도관(觀) 측면에 있어 상당히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오키타가 북한의 군사 위협 가능성을 강조한 반면, 이토와 소노다는 북한에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편이었다는 식이다.

9월 1일, 기시 ・후쿠다 전(前) 총리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차 서울을 방문해 전두환과 환담했다. 이들은 자민당내 대표적인 친대만 ・친한파 우익인사로서 전두환 정권에의 전면 지지를 호소하고, 박정희 사후로 공백이 생긴 '한일 유착'의 재건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같은 일본정부내 미묘한 견해차가 좁혀지고, 김대중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스즈키 내각이 정비됨과 아울러 김대중 사형 판결이 보도된 9월 11일부터였다.

김대중의 사형 판결로 일본 외무성 내부에서조차 사건 전체에 대한 '재검토'와 한일관계의 장래를 우려하는 의견이 높아졌다. 각내(閣內)에서는 이토 외상과 미야자와 관방장관, 다나카 통산상 등이 김대중 구명에 앞장서야 한다며 스즈키 총리를 독촉했고, 총리도 수긍하였다. 9월 22일, 스즈키는 김대중 사형이 집행될 경우 한일 양국 경제협력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이라 발언, 세지마에게서 전달된 승인과 경협이 철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였다.


'일한(日韓)관계는 비상히 중요합니다. 이웃나라의 경제가 한층 발전하고, 국내 정치도 안정화되는 것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이를 위한 기술원조와 경제협력 등이 중요할테고, 한국측으로부터도 요청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협력관계를 지속해나가는데 있어서 김대중씨의 신변에 일본측이 우려한 사태가 현실화된다면, 일본정부가 (한국측과) 협력하는데 대단한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월 3일, 김대중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측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11월 21일, 스즈키는 총리관저에서 신임 주일(駐日) 한국대사로 부임한 최경록을 접견하고, '만약 김대중씨가 처형된다면'이란 전제를 붙여 장래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을 세 가지로 요약해 지적하며, 엄중히 경고하고 나섰다.


1. 일본 국내에서의 국회 정세 및 매스컴 논조가 한국에 냉혹해질 것이므로, 경제협력이 불가능해진다.

2. 사회당 등 야당들을 중심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라는 소리가 나올법하다.

3. 자유진영 각국의 대한(對韓)시각이 엄격해질 것이다.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전두환은 일시에 평정심을 잃어 단교마저 생각할 정도로 흥분했으나, 대일단교와 그 대가는 반년내 한국경제가 치명상을 입고 말 것이란 외무 ・경제부처 대책팀의 경고앞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로 다가온 대일관계 난제와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열망은 신군부내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전두환 본인의 입장에서 냉정을 회복하고, 곰곰히 계산해 본 결과, 김대중 처형은 결과적으로 무익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이었던 우병규의 증언이다.


'정무수석이 되고나서 전(全) 대통령의 태도를 보고, 김대중씨를 죽이지 않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사석에서 가끔, 김씨가 자신의 정적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는 했어요. 대통령이 된 마당에 재수없게시리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공식 석상의 발언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말을 통해 그가 자신의 손으로 김대중을 죽일 생각이 없으며, 이제 김대중 문제에서 해방되고 싶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1981년 1월 22일, 한미정상회담의 개최 사실이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다음날인 23일, 국무회의는 김대중을 무기형으로 감형하는 것에 의결하였다. 이광표 문공부 장관은 성명을 발표했다.


'10.26 사태 이후 야기되었던 국정 혼란기의 방황을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여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은 구시대 정치의 슬픈 유산으로 과거의 악몽을 잊고, 제5공화국의 서장(序章)을 얼룩지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우방 및 국내외 인사들로부터 인도적 견지에 입각하여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는 의견이 있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지만, 전두환은 일본이 어딘가 자신을 골탕먹였다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터무니없을 만큼, 규모가 상상을 초월했던 '1백억불(佛) 경협자금 요구사건'엔 '밀사' 세지마의 권고와 그것을 악용한 전두환의 사적 감정이 배경 요소로 맞물리고 있었다는 추리도 가능함직하겠다. 한편, 김대중 구명의 일본측 '공신' 이토 외상은 1981년 5월, 미일공동성명 조항의 해석 시비에 휘말려 인책 사임했다.

이토의 후임으로 기용된 소노다는 후쿠다-1차 오히라 내각에서도 외상을 역임하며, 관료를 능숙히 다루고, 중국과 평화조약을 실현시키는 등 '행동하는 외무대신'으로 내외 평판이 자자했던 실력파였다. 방위예산 증액에 비판적인 호헌론자로서 '안보 경협'이라면, 달가워할리 없는 인물이었다. 한일외상회담에서 드러낸 고자세와 언동은 그러한 퍼스널리티의 반영이자, 한국측의 신경을 자극해 기선을 제압하려는 계산된 정치적 술수였던 것이다.


덧글

  • DreamersFleet 2013/02/05 16:02 # 답글

    (1) 오히라 일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사태와 관련 공식 견해를 표명했는데, 이는 최규하 대통령 명의의 특별 담화문을 번복한 것으로 일본측이 전두환 그룹에 의해 지배받는 한국의 신(新)체제에 동조 및 지원할 것임을 확인해주었다.

    (2) 11월 3일, 김대중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측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11월 21일, 스즈키는 총리관저에서 신임 주일(駐日) 한국대사로 부임한 최경록을 접견하고, '만약 김대중씨가 처형된다면'이란 전제를 붙여 장래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을 세 가지로 요약해 지적하며, 엄중히 경고하고 나섰다.


    김대중 구속과 사형판결 전후 태도가 이렇게 달랐다니? 허참.
  • 솔까역사 2013/02/05 21:46 # 답글

    김대중은 외세가 한국을 견제할 때 항상 지렛대로 이용했군요.
    미국 일본 그리고 김조.
  • 백범 2013/02/07 14:59 #

    그는 마키아밸리즘의 화신 그 자체였습니다.
  • 백범 2013/02/07 15:00 # 답글

    저것 보니 김대중 납치사건까지 생각나네요. 정말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것 자체가 실재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더군요. 가끔...

    아니면 일본내에 반한주의자, 혐한주의자들하고 짜고 친 자작극은 아닌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덕분에 혐한주의자들이 한국을 공격할 빌미만 주었지요. 저렇게 독립시켜봤자 정치테러나 하는 열등하고 후진 인간들이라는 비난의 빌미.

    박정희가 사주한 것이 아닌게 분명한 것은 손세일의 '김대중과 김영삼'이라는 책에서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소식을 뉴스로 접하자마자 '중정의 과잉충성파가 저지른 짓 같다'고 바로 발표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만약 김대중 납치사건이 종북주의자들 주장처럼 박정희가 사주했더라면, 박정희가 그런 성명서를 발표할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우리가 하지 않았다거나 다른 사람이나 다른단체 짓으로 여론 조작을 했겠지요.
  • 2013/02/07 14: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2/07 15:39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갈천 2013/03/05 17:57 # 답글

    가끔 에드워디안님 블로그에 들려 유익한 정보를 얻고있습니다만 이 글에 2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글 첫머리에서
    1. <1980년 5월 19일, 오히라 일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사태와 관련 공식 견해를 표명했는데, 이는 최규하 대통령 명의의 특별 담화문을 번복한 것으로 일본측이 전두환 그룹에 의해 지배받는 한국의 신(新)체제에 동조 및 지원할 것임을 확인해주었다....>고 하셨는데,
    5.19일 한국의 신체제가 전두환그룹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말인지 의문스럽군요.

    - 일본정부가 정말 그 5.19일 당시에 전두환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까? 5.19일 이면 비상계엄확대와 정치인사 연행만 있었지 국회기능 마비나 국보위는 표면화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또 비상계엄확대는 표면상 이희성, 주영복이 신현확총리에게 강압하여 국무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당시 전두환 중정부장서리가 미대사관등으로 부터 주목을 받고 있었다고 해도 전두환이 한국사회를 지배했다는 인식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기 짝이없군요.

    - 에드위안님도 그것을 사실로 알고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 일본정부의 인식이 오히라 총리의 기자회견에 나온 공식 견해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 공식견해 발표문이나 기자회견 인터뷰내용을 소개해 주실 수 있는지요.

    - 글 중간에 <5.17 쿠데타 파란과 광주사태, 3김씨의 구속-가택연금은 전두환으로 하여금, 정통성 위기를 절감하게끔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도 마치 당시 정권이 5.17 이전부터 전두환에게 귀속되어 있었던 것 같이 말씀하시네요. 이건 좀 아닌것 같은데...

    2. 김기천 부총리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당시 경제부총리는 이한빈씨였고 5월22일경에 신현확내각이 물러나고 새로 박충훈 총리 - 김원기 부총리 내각이 발표되었습니다.
  • 2013/03/02 00:5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3/04 17: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4 14:0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4 18:1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4 14:0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4 18:2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4 21:53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3/03/05 12: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3/05 16:2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명탐정 호성 2015/08/15 18:06 # 답글

    일본이 김대중을 도와주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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