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DR의 대소(對蘇)정책은 초기 단계부터 위험한 계산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폴란드 망명정부 총리 미코와이치크(Mikołajczyk)과의 대담에서 '스탈린에겐 차마 속시원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며 난해한 상대임을 토로할 정도였다. 테헤란 회담만 하더라도, 루스벨트 이전엔 현역 대통령이 그토록 멀리까지 여행한 사례가 없었다. 여기서 초면으로 스탈린을 만났지만, 그는 이 소비에트 독재자에게 자신을 인정받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다.
동석한 몇몇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은 루스벨트에게 예의를 갖추었으나 그 태도엔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스탈린과 처칠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듯 했으며, 둘 사이엔 넉살좋은 불한당 사이에서나 볼 수 있는 공통점마저 있었다. 반면, 루스벨트는 좀체 침착하질 못했고, 낙관적인데다 이상하리만치 산만했으며, 순진해보이기조차 했다. 얼음산처럼 차갑다는 러시아인의 신경엔 사뭇 새로운 형태의 인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출마를 준비하면서 또다른 연합국 수뇌회담에 신경써야 했는데, 여러 후보지가 물망에 올랐고, 크림반도의 얄타가 개최지로 선택되었다. 전신 약호는 그리스 신화의 보물 탐험대 '아르고노트(Argonaut)'로 명명되었다. 사실, 회담 장소로선 불안한 점이 많아 처칠은 탐탁치않게 여겼다. 의심많고, 외국을 싫어한 스탈린이 어지간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했던데다, 홉킨스(Hopkins)의 성화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말았다.
전쟁 초기, 루스벨트는 홉킨스의 도움으로 국무성을 거치지 않은채 스탈린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절차를 확보했다. 전쟁으로 형성된 미소(美蘇) 양국간의 친교는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 전후(戰後)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진지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젠가, 스탈린과 소련을 결코 신뢰하지 않은 처칠에게 이렇게 일갈한 적도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난 4백여년간 이어져내려온 (제국주의적) 탐욕스러운 본능의 피가 흐르고 있군요!'
취임식을 마친지 사흘만인 1945년 1월 23일, 루스벨트는 순양함 퀸시(Quincy)호에 승선해 얄타로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몰타섬에서 처칠과 합류한 다음, 비행기편으로 얄타에 도착하기까지 다시 1400마일을 거쳐가야 했다. 이번 회의는 전시의 수뇌들이 집결한 회담으로선 최대 규모였으며, 3거두가 각자의 외상을 대동하기도 처음이었다. 미국측에서만 스테티니어스, 리히, 번즈, 마셜, 홉킨스, 해리먼, 앨저 히스 등이 참석했다.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호의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군사상의 실질적 사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셜 장군의 계획에 따르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의 반격이 없었더라면 미군이 프랑스에 실제로 투입한 병력의 2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은 60개 사단을 해외에 증파하고, 혹은 1백만명의 전투부대를 추가 파병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나치는 아르덴 지방에서 최후의 발악을 모색중이었으며, 어떠한 허튼 수작을 부릴 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워싱턴을 떠나기 직전, 어느 지인(知人)이 '스탈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며 주의를 주자, 대통령은 피식 웃으며 자신도 '똑같이 만만하지 않으니, 동정은 조(Joe) 아저씨가 받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 말인가? 그 정도의 바보라면 다루기가 쉽지..."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주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고 있었다. 강화조약안이 상원에서 승인받지 못할까 조바심이 났던 대통령은 여론이 식어버리기 전에 새로운 국제기구 구성을 마무리지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성급하게 서둘렀고, 혹은 죽음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흥정에서 서두른다는 것은 매우 불리한 것이다. 그리고, 소련측이 취한 정치적 제스처를 액면 그대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분명히 너무 고지식했던 것이다.
유럽 해방선언은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의 자유 총선을 보장한 것이었으나, 누구도 이러한 감언이설에 넘어가선 안되었다. 동유럽에만 국한해서도 붉은 군대가 이미 대부분을 석권한 상태였으므로, 영미(英美)의 입장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협정엔 1착으로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한다는 조항은 없었지만, 전세가 그것을 결정지었다. 소련의 극동전 참전도 테헤란에서 결정된 사안이며, 시기와 조건의 결정만이 문제였다.
영미 양국의 수뇌부에선 적어도 47년도 중반까지 대일전이 계속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일본 본토에 대한 소이탄 공격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몰랐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아직 성공 여부가 미지수였을 뿐이다. 일본 본토로의 상륙, 대결전을 예상한 국방성의 계획은 아무리 세밀하게 어림잡더라도, 미군측 사상자가 1백만명 정도 각오해야한다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소련의 참전과 협력을 희망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얄타 회담은 그 자체만으로 루스벨트가 필요 이상의 양보를 보였다지만, 결코 반역적 매국 행위는 아니었다. 훗날에 치르게 될 비극과 대가는 회담 직후부터 노골화된 모스크바의 정책 변경과 협정 위반으로 말미암아 초래할 것이다. 그러한 스탈린의 속 검은 흥정과 전술을 예상치 못한 채 말려들어가버린 이상, 루스벨트는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련의 배신에 경악하고, 환멸을 느껴 해리먼에게 토로해봤자, 버스는 떠나간 후였지만.
회의가 마무리되자 각국 수뇌들은 흩어졌다. 루스벨트는 이집트로 건너가 수에즈 운하 선상에서 몇몇 중동 국가의 정상들과 회담을 가진 다음, 고국으로 돌아갔다. 대통령과 수행원들은 얼핏 만족스런 표정들이었다. 무언가 뒷맛이 개운치 못한 느낌을 남기기는 했지만서도, 이 고지식한 고관들에겐 전쟁의 종결이 확고히 보장되었다는 희망감에 안도한 느낌이었다. 항해중 과로의 여파가 사정없이 덮쳐 대통령이 눈에띄게 악화된 점만 뺀다면.
최만년의 FDR이 얼마나 과로에 시달렸는지 1945년 3월 12일자 스케줄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오전 일찍, 매켄지 킹(Mackenzie King) 캐나다 총리와 환담하고, 위도명(魏道明) 중국 대사도 접견했다. 예산국장 스미스(Smith)와는 입씨름을 벌여야했으며, 브라질 사절단을 맞이하고,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과 오찬을 같이했다. 오후엔 마셜 장군, 킹 제독과 개략적인 작전회의를 주재한데 이어, 내정(內政) 관련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업무를 돌보는 동안, 약 20여회에 걸친 전화들을 받고, 여기에 일일이 결정을 내렸다. 보고서를 훑어보고 우편물도 확인했으며, 서류에 서명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재차 2시간에 걸쳐 서류들을 검토한 끝에 거의 자정에 가까워져서야 퇴근했다. 이것이 고혈압과 동맥경화, 심근염으로 시달리던 63세 환자의 하루 일과였으니, 그는 예정된 신체적 수명보다 앞서 무덤으로 질주하는 꼴이었다.
포츠담에서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국빈 방미(訪美)를 초청했을때, 그는 묘한 답변을 남겼다.
"나는 흔쾌히 미국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그것을 용서치 않소. 주치의로부터 장거리 여행을 제재받는데다, 식사에도 제한이 가해진다오. 나는 대통령께 서신으로 내가 방문 초청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드리겠소. 인간은 모름지기, 그 체력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법이라오. 루스벨트 대통령은 위대한 책임감을 자각하셨으니, 그 체력을 유지하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분께서 만일 그 점에 유의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생존해 계셨을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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