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慶元)의 당금(黨禁), 주자학 탄압사건 세계사




경원당금은 남송중기 영종(寧宗)의 재위초, 정주이학(程朱理學)에 대한 사상통제령으로 경원(慶元)2년(1196) 8월에 시작, 가태(嘉泰)2년(1202) 2월에야 해금(解禁)된 것으로 알려졌다. 탄압 대상이 된 주희(朱熹, 朱子)를 대표로 하는 이학가(理學家)들은 '거짓 학문[僞學]', '위학의 당[僞學之黨]', '역당(逆黨)' 등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중앙정부로부터 축출당하거나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정주학파 가운데서도 주희 계열의 정치가나 학자의 임관과 그 저서를 유포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킨 사실에서, 대표적인 정주이학 탄압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당시,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숙청당한 59명의 인사들 가운데엔 진부량(陳傅良), 엽적(葉適) 등 주희와는 사상적으로 대립진영에 속한 사공파(事功派)와 양간(楊簡) 등 육학(陸學, 象山學) 계열의 인사들도 망라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거짓 학문'으로 지목돼 탄압을 받았던 대상은 주자학 계열 위주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위정자의 입장에선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사공파나 상산학파 역시 정학(程學, 程顥 ・程頥 二程子의 학설) 계보를 잇는 학파로 도덕과 경세(經世)주의 이념을 앞세우고, 국가 시책(施策)을 비판하는 반(反)체제 위험세력으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사실, 정학에 대한 비판 ・탄압은 남송초부터 존재해왔다. 예컨대, 고종(高宗)의 전권재상 진회(秦檜)는 북송 채경(蔡京)시대 태학생 출신으로 왕학(王學, 王安石의 학문)을 전수받아 신법당 색채가 농후한 인물이었는데, '원우학술(元祐學術)'을 계승한 구법당 계통의 정학에 비판적인 자세였음은 물론, 대금항전(對金抗戰)을 고집중인 정학계(系) 인사를 압살시켜 위협 요소를 제거하려는 목적하에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소흥(紹興)14년(1144)부터 진회가 사망한 1155년까지 송 조정은 정학을 '전문곡설(專門曲說, 바르지 못한 학문)'로 규정, 과거시험에서 정학적 관점을 응용한 수험생은 일률로 낙제시키는 등 정학 규제의 방침으로 나아갔다. 주희가 과거에 합격한 시기는 진회의 전단이 한창이던 소흥18년(1148)으로, 전체 합격정원 330명 중 278번이었다는 사실은 진회시대의 반(反)정학적 조류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었으리란 가설이 성립된다. 주희는 50년 가까이 임관과 사퇴를 번갈아 관직생활을 지속했지만 인물됨은 좋게 말하면 결벽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친 완벽주의자로 지배층의 비위행각을 거리낌없이 비판했는가 하면, 그 학설도 이상론에 치우친 공허한 내용이라는 반대가 많았다. 그럼에도, 조정에서 주희를 계속 초빙한 것은 석학을 기용함으로써, 지식인을 달래주려는 사정 때문이었다.




                                            도학파의 영수 주희(朱熹), '성리학'하면 바로 연상되는 인물이다.




효종(孝宗) 건도(乾道)~순희(淳熙)연간은 남송대 최전성기로 평화와 번영을 배경삼아 학문이 꽃피우던 시기였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융성과도 관련있는데, 과거는 관리채용 시험이므로 아무래도 정치가 개입된다. 정치상으론 붕당(朋黨)이 금기시되면서도, 자연스레 당파가 형성되어 그것이 '학풍(學風)'이란 형태를 취하여 답안심사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이다. 송대엔 '사록(祠祿)'이라 불리는 연금제도가 있어, 주희는 관직에 취임해도 거의 대부분 명목상 관위에만 올랐을 뿐, 금새 사직해 사록에 의지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순희연간을 전후로 주희의 제자가 많아지자, 그의 학파는 보통 '도학(道學)'이라는 명목으로 지칭되었다. 원래, 도학이란 정학 학통을 총칭해오던 이름이었으나, 주희가 도학을 대성(大成)하면서부터 이른바 주자학=도학의 등식처럼 성립된 것이다.

순희5년(1178)과 7년(1180)의 부분적인 정학 규제조치를 거쳐, 순희9년(1182) 7월 '당중우(唐仲友) 사건'을 계기로 도학파[朱子學]의 움직임은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후, 도학파에 비교적 관대한 치세인 소희(紹熙)연간까지 주희는 여조겸(呂祖謙)과 육상산(陸象山), 진량(陳亮) 등 육학파 ・사공파와 논쟁을 벌여가며 학술활동에 전념한다. 여기서, 경원당금의 배경을 논하고자 당중우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건 개요는 대략 이러하다. 순희8년에 취임한 재상 왕회(王淮)는 주희의 능력을 평가하여 그를 절동제거(浙東提擧)로 기용했는데, 임지로 부임한 주희가 태주(台州)지사이자 왕회와 인척지간인 당중우의 비리사실을 탄핵, 여섯가지 죄목을 들어가며 전후 10차례에 걸쳐 효종황제에게 탄핵 상소하여 끝내 당중우를 파직시키고, 자신도 후과로 해임된 스캔들을 일컫는다.

주희가 집요하게 당중우를 탄핵한 사연엔 단순히 개인의 부덕과 비리외에도, 사공파 계열인 당중우가 이학파측이 배척하던 순자(荀子)의 저서를 공간 ・배포한데 대한 반감에서 학풍을 자신의 주관대로 변화시켜보려는 의도였다는 관측이 있다. 사대부 인텔리들의 언쟁은 효종시대 사회의 안정과 학문의 융성함을 수반한 결과였지만, 그와 동시에 과거, 천거를 통해 여러 학파가 각기 세력을 신장하고자 서로 다투는 파벌항쟁의 단초를 제공해주고, 그것이 주희와 당중우의 대결로 표면화된 것이다. 또한, 거기엔 엘리트 의식이 너무 강하여 타인의 의견에 관용스럽지 못한 지식인 계층의 약점마저 엿볼 수 있다. 당중우 사건에서 주희가 둔 무리수는 지배층의 심기를 자극하기 충분했으며, 주희에 대한 반대 ・비판자들의 반감까지 합세해 경원당금의 한가지 배경으로 다가오게 된다.

순희16년(1189) 2월, 효종은 광종(光宗)에게 선위(禪位)하여 태상황이 되고, 임안(臨安) 북쪽의 중화궁(重華宮)으로 은거해 '수황(壽皇)'이라 불리었다. 효종 초년에 금나라와 체결한 건도화약(乾道和約)에서 금과 남송은 숙질관계를 맺었지만, 송효종은 벌써 63세였다. 금나라에서 세종(世宗)의 후계자로 21세의 장종(章宗)이 즉위하여 효종으로선 자신보다 42세나 어린 금나라 황제에게 숙부라 부르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으므로, 퇴위했던 것이다. 광종이 새로이 즉위하면서 주필대(周必大), 유정(留正)이 좌우상을 맡았고, 염세(鹽稅) 인하와 부역경감 조치가 취해졌다. 그런데, 광종은 황태자시절 수도 임안부윤[府尹, 市長]을 역임한 경력은 있으나, 궁중에서 성장해 온 탓에 세상일에 능숙치 못한데다, 선천적으로 어리석었다. 더군다나, 정신질환의 일종인 심질(心疾)까지 앓던 형편이었다.

소희원년(1190)부터 좌상을 겸임하게 된 유정은 그러나, 천자의 근신(近臣)이자 절동총관인 강특립(姜特立)과 이내 대립하는데, 광종 재위말년엔 140일간이나 재상직을 떠나 공석으로 남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광종의 이황후(李皇后)가 투한(妬悍)으로 후계자 문제를 앞세워 태상황 효종과 광종 부자를 이간질시키는가 하면, 친속과 가신(家臣) 198명을 기용하는 등 교만방자하게 굴며 전횡을 일삼았다. 소희5년(1194) 6월, 태상황이 붕어했음에도 광종이 국상(國喪)에 임석하지 않자, 엄청난 소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추밀원사 조여우(趙汝愚)와 지각문사 한탁주(韓侂胄) 등이 공동으로 모의, 고종의 황후였던 태황태후 오씨(吳氏)의 찬동을 얻어내 광종을 퇴위시켜 태상황으로 옮기고, 황자(皇子) 조확(趙擴, 寧宗)을 세워 효종의 장례를 대신 치르도록 조치했다.

영종 즉위의 공로로 우승상에 기용된 조여우는 일시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다. 조여우가 집권하고 나서 처음 착수한 일은 개인적으로 친밀한 주희를 중앙으로 호출해 시강(侍講, 경연관)에 임명, 천자에게 도학을 강설토록 한 것이다. 한편, 방어사로 제수된 영종 즉위의 또다른 1등공신 한탁주는 태황태후의 조카이자, 황후 한씨(韓氏)의 숙부이고, 북송대 명신(名臣) 한기(韓琦)의 증손자로 황실과 연계된 규벌(閨閥) 명문 출신이었다. 그는 외척이라는 특수신분과 궁중 출입을 담당하는 직무상 잇점을 활용하여 영종의 신임을 획득하였다. 도학 계통의 조여우와 실무가 한탁주는 국정을 운영해가기엔 애시당초 체질이 맞지 않았고, 주희가 천자의 면전앞에 나서는 기회를 빌어 이부시랑 팽귀년(彭龜年)과 연합해 한탁주를 탄핵하면서 조여우와 한탁주 양자 관계는 결정적으로 갈라져버렸다.

천자 영종도 종실재상 조여우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주희를 시강으로 불러들였지만, 개인적으론 도학파의 학설을 '현실에서 응용할 수 없다'며 경멸을 토로해마지 않았다. 소희5년 윤10월 21일, 영종은 49일만에 주희의 시강 직책을 경질한다는 조서를 내려 '주희가 말하는 것은 대부분 쓸만하지 않다!'는 극언마저 내뱉었다. 연이어 다음해인 경원(慶元)원년(1195) 2월에는 우정언 이목(李沐)의 건의로 조여우 역시 재상에서 파면당해 복주(福州)지사로 전출된다. 이렇듯, 조여우와 한탁주의 권력투쟁은 한탁주의 승리로 결말지어졌다. 한탁주의 집권에 편승한 반(反)도학 인사도 적지않았으니, 경당(京鏜)과 하담(何澹), 심계조(沈継祖), 고문호(高文虎) 등이 경원당금의 선두로 활약했고, 특히 고문호는 전날 주희가 탄핵했던 당중우 휘하에서 태주의 통판으로 재직한 인물이다.




                                                  조여우와 한탁주의 공동 모의로 퇴위당한 송광종(宋光宗)




경원2년(1196) 정월, 한탁주파의 경당이 재상에 임명되고, 6월엔 한탁주가 개부의동삼사를 제수받음으로써 권위가 재상을 능가할 정도였다. 주희 일파와 도학을 받드는 사람들이 조여우를 지지했었기에, 한탁주는 도학을 금지시켜 정적을 제거하는 동시에 정권기반을 공고히하고자 시도했다. 경원원년(1195) 7월, 참지정사 하담(何澹)이 '도학은 공맹(孔孟)의 길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며 도학파를 일체 관직에서 추방하도록 상주한 이래, 조정내외 반도학파 관원들의 '거짓 학문[僞學, 道學]'에 대한 공격이 빗발쳤다. 경원2년 8월, 영종은 조서를 내려 위학과 관련된 인사는 조정에서 관원으로 일하지 못하고, 과거에 응시할 수 없으며, 관원을 천거할 때에도 위학지인(僞學之人)이 아님을 명시하도록 엄명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감찰사 심계조가 주희의 대죄와 악행을 탄핵하였다.

심계조가 나열한 주희의 죄상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 좋은 쌀[米]로 모친을 봉양하지 않았으며, 불효막심했다.

*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황제에게 불경스러웠다.

* 효종황제의 능묘(陵墓, 永阜陵)를 결정할 당시, 이론을 제기하여 국가(國家, 황제)에 불충했다.

* 마니교도처럼 채식(菜食)을 즐기고, 마귀를 섬기는 요술로 제자들을 유혹했다.

* 쓸데없이 허무맹랑한 주장을 퍼뜨리고, 신하의 직분을 망각한 세력들을 불러모아 파당을 결성했다.

* 사찰 부지로 서원을 이전시켜, 공자상(孔子像)과 불상을 훼손시켰다.

* 비구니 2명을 유혹하여 처첩으로 삼았다.



대부분 황당무계한 루머였지만, 칭병을 구실로 관직 임명을 계속 사퇴했듯이 이전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던 사안도 포함되어 주희가 완전 무결하다고 반론하기조차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때문에 12월 26일, 영종의 명으로 주희에게 낙직파사(落職罷祠, 삭탈관직)의 처분이 가해졌다. 그후로도 재상 경당을 중심으로 탄압이 가속화돼 경원3년(1197) 2월, 도학파를 중앙 관직에서 배제하는 조치가 취해진데 이어서 6월, 조사대부 유삼걸(劉三傑)이 '위학의 당(黨)은 역당(逆黨, 역적무리)으로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연말에는 사천의 면주(綿州)지사 왕연(王沇)이 블랙리스트인 '위학의 당적(黨籍)'을 제정하자고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리하여 조여우와 주희 및 그들에게 동조하는 무리에게 '위학역당(僞學逆黨)'의 판정을 내려 당적에 기재된 사람이 59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적에 기재된 인사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처벌받았고, 그들과 관계한 사람들까지도 임관하거나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위학금령(禁令)은 더욱 엄중히 시행되었다. 경원4년(1198) 5월, 간의대부 요유(姚愈)가 도학파에 철퇴를 가하도록 요청 ・상주하여 천자로부터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그 내용인즉슨 이러하다.



근자에, 요사스런 무리들이 도학(道學)이란 명분으로 어리석은 풍조를 만연시키고, 권신들[조여우 등]마저 거기에 따라 주장하며 결탁하여 사당(死黨)을 형성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 악당의 우두머리[罪魁, 주희]를 잡아들여 벌을 주셔야 합니다. 그들은 도리어, 스스로 원우당적(元祐黨籍)과 비교하고 있으나, 실제로 사마광이나 소식(蘇軾) 같은 원우연간의 대현(大賢)들은 모두 사악한 모의가 없었으며, 권신에게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신(臣)이 바라건대, 특별히 밝으신 조서[明詔]를 내리시어 천하에 널리 알려서 중외(中外)가 간사함[邪]과 올바름[正]의 실체를 확연히 알 수 있도록 하시고, 도학 일당이 간사하고 거짓스런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시오...



5월 12일, 직학사원 고문호가 초안을 작성한 영종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거기엔 '장차 국시(國是)를 기울게 만들고, 민심을 어지럽히며, 심지어 원우연간의 현인(賢人)들에게 절부(竊附)하면서 실제로는 소성(紹聖)의 간당(姦黨)과 같은 부류라는 사실을 생각치 못하고 있다'고 지적, 분간하기 어려운 말로 세속을 어지럽히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이에 한탁주는 매우 만족해하며 고문호를 요직으로 승진시키고, 7월 요유를 병부상서로 삼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주희의 도학파를 철종(哲宗) 소성연간, 신법을 옹호한 장돈(章惇), 채변(蔡卞), 채경과 같은 부류로 중상 ・매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신종(神宗) 사후 왕안석의 개혁안에 반대하고, 구법(舊法)을 부활시켰던 사마광, 소동파를 현인으로 존중하는 것으로 보아, 한탁주파 스스로가 구법당을 계승하려는 자세였음을 시사해준다.

하지만, 같은해(1198) 12월부터 도학파에 대한 탄압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려는 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반(反)도학운동의 선봉장으로 앞장서왔던 경당과 하담이 상주해 '위학지인 가운데 개과천선한 자에겐 사록(祠祿, 연금)을 조금이라도 지급해주어 적게 징벌하여 크게 징계하는 복(福)을 깨닫게 하자'며 건의했고, 한탁주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당금이 점차 느슨해진다. 경원6년(1200) 3월, 도학파의 지도자로 당금사건 내내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온 주희가 향년 71세로 사거(死去)했다. 주희의 학문은 그가 파직당한 후 '거짓된 학문'으로 매도당했기 때문에 대다수 사대부는 도학에 대해 담론하기를 꺼려했고, 문생(文生)이나 지인도 감히 주희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도학파의 구심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당금의 완화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었다.




                                     촛불을 들고 손님을 기다리는 선비, 남송 영종대(寧宗代) 궁정화가의 작품




경원6년 9월 11일, 진사 여조태(呂祖泰)가 한탁주를 처형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여조태는 여조겸의 종제(從弟)로 성격이 급하고, 활달하여 세상일을 논하는데 거리낌없었다. 자신의 친형인 태부사승 여조검(呂祖儉)이 위학역당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실의속에 사망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여조태는 등문고(登聞鼓)를 울려 한탁주의 '무군지심(無君之心)'을 규탄, 그를 주살시켜 화란(禍亂)을 예방토록 청했던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학(道學)은 자고로 나라를 위한 사람들이 의지해야만 할 바입니다. 승상 조여우는 오늘날에서 보면 아주 커다란 공로가 있는 분입니다. 위학을 금지시키고, 조여우의 당(黨)을 몰아낸 것은 장차 폐하의 나라를 망치려는 것이거늘, 어찌 폐하께서는 깨닫지 못하십니까? ...소사단(蘇師旦)은 평강(平江)의 서리 출신이고, 주균(周筠)은 한씨(韓氏)의 시역(厮役, 하인)이었는데 높은 지위를 얻었으니, 한탁주와 그 무리들이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고, 조정을 업신여김이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청하건대 한탁주, 소사단, 주균을 주살하시고, 진자강(陳自强)의 무리들도 모두 내치십시오. 대신 중엔 주필대(周必大)만이 자격이 있으니, 그가 마땅히 재상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조태의 상주가 올라가자, 조정이 들끓었다. 당장 주필대는 배후 조종의 혐의로 관직이 1등급 강등되고, 여조태는 '어리석은 망언'을 상소한 죄명하에 장형 1백대의 형벌을 받아, 광서 흠주(欽州)로 유배당했다. 그 다음달, 한탁주는 태부(太傅)의 직위를 겸했는데, 공교롭게도 후견인인 한황후(韓皇后)가 병사하면서 권력기반은 도리어 약화됐다. 그리고, 경원6년 8월에 좌상 경당(京鏜)이 사망한 데 이어서, 경당과 더불어 도학 탄압을 주도해 세간으로부터 '괴험(魁憸)'이라 칭해진 하담과 유덕수(劉德秀), 호굉(胡紘)도 좌천 ・파면당해 중앙정계를 떠난 상황이었다. 친위그룹의 상실로 말미암아 당금노선을 견지하기엔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한탁주 자신이 음보(蔭補)로 임관해 궁중문제를 담당해 온 무관인지라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이 문제에 싫증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다, 한탁주로선 대금북벌(對金北伐)을 계획중인 마당에 내외의 비난 여론을 종식시키고, 분위기를 쇄신하여 반체제 인사들까지 포용해 국론통일을 도모하려는 보다 현실적인 계산도 깔려있던 것이다. '위학당금을 해제하지 않으면, 정적을 양산하여 나중에 보복의 화(禍)를 면치 못한다'고 충고한 예부상서 장효백(張孝伯)의 제안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가태2년(1202) 2월 9일, 거의 전면적인 도학의 해금(解禁)조치가 공포되었다. 사망한 주희와 조여우는 관작(官爵)을 추증받았고, 진부량(陳傅良), 유광조(劉光祖), 설숙사(薛淑似) 등의 복관(復官)을 허용했다. 그렇지만, 육학파(陸學派, 象山學) 인사에 대한 규제는 가태연간의 해금후로도 줄곧 지속되다가 개희(開禧)말년, 북벌 실패로 한탁주가 실각당한 연후에야 완전 해금이 성사된다. 이상이, 경원당금의 개략적인 진행 과정이다.

경원당금은 본질적으로 종실재상 조여우와 외척 한탁주의 권력쟁탈전 성격이 짙다는 것이 중론이다. 북송후기의 신구법당 정쟁과 달리 이슈화된 사안이나 정책 대결을 찾아볼 수 없고, 한탁주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인 조여우 및 그가 후원하던 도학파를 구심점으로 결집한 인사들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의 일시적인 숙청에 다름아니며, 학문 자체를 근절시키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단정하기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한편, 경원연간의 당금에서 '위학당적(僞學黨籍)',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인사가 모두 도학자라는 구도가 성립되는지 의문이다. 예컨대, 엽적(葉適) 등의 경우 사공(事功)을 제창했던 영가학파(永嘉學派)의 대표주자로 주희와는 이질적인 사상의 소유자였으니, 위학역당 내부엔 도학가가 분명 포함되었으나, 그외의 비(非)도학자도 상당수 연루된 것이다.

그렇다면, 위학역당 59명의 공통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은 모두 일찍이 한탁주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하여 한탁주를 공격했거나, 한탁주의 제거 대상이던 인물, 혹은 그자를 옹호한 사람들이다. 일례로, 경원원년 조여우가 재상직에서 파직당했을 무렵 조야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6명의 태학생[六君子]이 비분강개하여 상소문을 올리자, 한탁주가 그들에게 '국시(國是)를 어지럽힌' 죄명을 씌우고, 임안에서 5백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시킨 사례가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조여우와 주희에게서도 나타났으며, 한탁주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협받을 때마다 반격을 가하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경원당금을 일으킨 한탁주는 북벌의 실패로 피살되고, 후대 이종(理宗)의 순우(淳佑)초년(1241)에 와서 이학(理學)은 유교의 정파로 인정받아 정치상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하는 경원(慶元) 위학역당 59명의 블랙리스트


* 전직 재상 4명

조여우(趙汝愚), 우승상(右丞相)
유정(留正), 소보(少保)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왕란(王蘭),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지담주(知潭州)
주필대(周必大), 소부(少傅)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


* 특제(特制)이상 관원 13명

주희(朱熹), 환장각대제(煥章閣待制) 겸 시강(侍講)
서의(徐誼), 권공부시랑(權工部侍郎)
팽귀년(彭龜年), 이부시랑(吏部侍郞)
진부량(陳傅良), 중서사인(中書舍人) 겸 시독(侍讀) 겸 직학사원(直學士院)
설숙사(薛淑似), 권호부시랑(權戶部侍郞) 겸 추밀도승지(樞密都承旨)
장영(章潁), 권병부시랑(權兵部侍郞) 겸 시강(侍講)
정식(鄭湜), 권형부시랑(權形部侍郞)
누약(樓鑰), 권이부상서(權吏部尙書)
임대중(林大中), 이부시랑(吏部侍郞)
황유(黃由), 권예부상서(權禮部尙書)
황보(黄黼), 권병부시랑(權兵部侍郞)
하이(何異), 권예부시랑(權禮部侍郞)
손봉길(孫逢吉), 권이부시랑(權吏部侍郞)


* 기타 관원 31명

유광조(劉光祖), 기거랑(起居郞) 겸 시독(侍讀)
여조검(呂祖儉), 태부사승(太府寺丞)
엽적(葉適), 태부소경(太府少卿) 총령회동재부(總領淮東財賦)
양방(楊芳), 비서랑(秘書郞)
항안세(項安世), 교서랑(校書郞)
심유개(沈有開), 기거랑(起居郞)
증삼빙(曾三聘), 지영주(知郢州)
유중홍(游仲鴻), 군기감부(軍器監簿)
오렵(呉獵),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상(李祥), 국자좨주(國子祭酒)
양간(楊簡), 국자박사(國子博士)
조여당(趙汝讜), 첨차감좌장서고(添差監左蔵西庫)
조여담(趙汝談), 전회서안무사간관(前淮西安撫司幹官)
진현(陳峴), 교서랑(校書郞)
범중보(范仲黼), 저작랑(著作郞) 겸 권예부낭관(權禮部郎官)
왕규(汪逵), 국자사업(國子司業)
손원경(孫元卿), 국자박사(國子博士)
원섭(袁燮), 태학박사(太學博士)
진무(陳武), 국자정(國子正)
전담(田澹), 종정승(宗正丞) 겸 권공부낭관(權工部郎官)
황탁(黃度), 우정언(右正言)
첨체인(詹體仁), 태부경(太府卿)
채유학(蔡幼學), 복건제거(福建提擧)
황호(黄灝), 절동제거(浙東提擧) 상평다염공사(常平茶鹽公事)
주남(周南), 지주교수(池州敎授)
오상승(吳桑勝), 신가흥부교수(新嘉興府敎授)
이식(李埴), 교서랑(校書郞)
왕후지(王厚之), 직현모각(直顯謨閣) 강동제형(江東提形)
맹호(孟浩), 지호주(知湖州)
조공(趙鞏), 비각수찬(秘閣修撰) 지양주(知揚州)
백염진(白炎震), 신통판성도부(新通判成都部)


* 무신(武臣) 3명

황보빈(皇甫斌), 지주도통제(池州都統制)
범중임(范仲壬), 지금주(知金州)
장치원(張致遠), 강서병마검할(江西兵馬鈐轄)


* 태학생 6명[六君子]

양굉중(楊宏中)
주단조(周端朝)
장도(張衟)
임중린(林仲鱗)
장전(蔣傳)
서범(徐範)


* 사인(士人) 2명

채원정(蔡元定)
여조태(呂祖泰)




덧글

  • 블루라이트 2013/05/07 04:02 # 답글

    주자학이 한반도로 넘어가면서 "썩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이번 포스팅은 미묘한 내용인듯 싶습니다.
    (하기사 저거는 초창기긴 하지만)
  • 에드워디안 2013/05/07 10:39 #

    주자학이 중국에서 관학 지위를 인정받은 배경도 학설 교조화에 대한 자체반성으로 사공파의 경세이념을 수용 ・절충한 유연성 덕분이었는데, 특정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정치와 결부됨으로써 타락한다는 교훈은 차치하고, 한반도에선 정반대로 외래사상일수록 극단성을 띄기 십상이란 점은 여러모로 기묘한 사실이죠.;;

    ps.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 零丁洋 2013/05/07 20:11 # 답글

    고상한 도학자들이 모여 정치를 해도 혼탁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무지랭이들이 이기심을 솔직하게 들어낸 정치가 훨씬 훌륭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정치의 문제도 현실의 진흙탕을 솔직하게 들어내지 못하고 도학자 처럼 너무 고상하게 경제니 국가니 민족이니 사회니 운운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 무르 2014/11/09 23:46 # 삭제 답글

    에드워디안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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