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史 잡담 잡소리



부족한 한문 실력이나마 남송시대를 탐구(?)하고자 <宋史>를 일독중인데, 역시 만만치가 않다. 더욱이, 알려진대로 기사 내용과 구성의 충실함이란 측면에서 무미건조, 조잡하기 이를데 없어 <통감>에 비교할 따위가 아님.

틈틈이 읽어가면서 몇가지 요점 부분만 추스려 옮겨본다.
배경은 양송대를 통틀어 가장 평화스러웠던 광종황제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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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光宗)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의 휘(諱)는 조돈(趙惇), 효종(孝宗)의 셋째아들이다. 모친은 가로되, 성목황후(成穆皇后) 곽씨(郭氏)였다. 소흥(紹興)17년(1147) 9월 을축일, 번저(藩邸)에서 태어났다. 소흥20년(1150), 현재의 이름을 하사받고, 우감문위솔부부솔(右監門衛率府副率) 직책에 제수되어 영주자사(榮州刺史)를 더했다. (소흥32년에 高宗이 퇴위해) 효종황제가 즉위하자, 진조군(鎭洮軍)절도사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받았으며, 공왕(恭王)에 봉(封)해진다.

장문태자(莊文太子)가 사망하자, 효종은 황제[여기서는 光宗을 뜻함]가 자신과 닮아 영특하고 용감하여 황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미처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지체시켰다. 건도(乾道)6년(1170) 7월, 태사(泰史)가 상주해 (五行의) 목(木)과 화(火)가 결합했으니 황태자를 책립(冊立)해야 한다며 아뢰자, 응당 사면령을 내렸다.

그무렵, 재상 우윤문(虞允文)이 연달아 일찌감치 태자를 세울 것을 아뢰었다. 효종이 이르기를...


"짐도 오래간 생각했으며, 본래부터 결심해 온 터이니라. 다만, 태자를 세웠다간 성품이 교만해져 스스로 제멋대로 굴거나 학문에 힘쓰지 않고, 점차 덕망을 잃지 않을까 우려될 따름이다. 때문에 짐은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아니한 바, 마땅히 실무와 고금(古今)에 통달하게끔 경험을 쌓도록 훈육시켜 후회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건도7년(1171) 정월 병자일 초하루날, 양궁(兩宮)이 효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바쳤으며, 진귀한 예를 갖추었다. 승상 우윤문이 태자의 책립을 재차 간청하자, 효종은 '짐은 이미 태자를 세우기로 했으니, 친왕과 외번(外藩)들에게 출석하도록 영을 내리고, 경(卿)은 마땅히 전대(前代)의 전례(典禮)를 논의토록 하라.'고 말했다. 우윤문이 그 말을 듣고, 과거의 책봉사례를 조사하였다. 2월 계축일, 마침내 공왕이 태자로 세워졌으며, 경왕(慶王) 조개(趙愷)는 웅무(雄武), 보녕군(保寧軍)절도사와 영국부(寧國府) 통판을 제수받고, 위왕(魏王)에 진봉(進封)되었다.
 
3월 정유일, 정식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4월 갑자일, 임안부(臨安府) 통판으로 임명받아 부윤(府尹)의 업무를 관장 ・계승하였다. 광종황제가 공왕이었을 무렵, 강연관과 더불어 과거의 역사를 헤아리는데 때때로 의표를 찔러 강연관 스스로가 이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임안부윤에 이르러, 태자는 민정(民政)을 깊이 헤아리면서 진실과 거짓됨을 두루 숙지하였다. 효종이 자주 칭찬하자, 승상 조웅(趙雄) 역시 '태자전하의 자질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매번 사람을 보내와 문안인사를 드리시니, 학문이 향상되어간다는 분명한 조짐입니다.'라고 말했다.

순희(淳熙) 14년(1187) 10월 을해일, 태상황 고종(高宗)이 붕어하였다. 11월 기해일, 백관(百官)들이 장례를 마치자, 효종은 손수 조서를 내려 '황태자가 여러가지 사무를 결재하는데 참여할 것이며, 내동문사(內東門司)를 의사당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순희15년(1188) 2월 무술일, 황제[光宗]가 의사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순희16년(1189) 2월 임술일, 효종이 [臨安宮] 자신전(紫宸殿)에서 길복(吉服)을 입고 선양(禪讓)의식을 거행하자, 관리들이 뜻을 받들어 차례로 축하하였다. ...8월 갑오일, 공주(恭州)를 중경부(重慶府, 광종의 봉지로 겹경사를 의미함)로 승격시켰다.

병신일, 양절(兩浙)지방의 월춘전(月春錢) 등 세금 25만 5천민(緡)을 1년간 감면해주었다. 기해일, [전직 재상] 왕회(王淮)가 죽었다. 계축일, 금나라가 온대한숙(溫蒂罕肅) 등을 파견해와 즉위를 축하해주었다.


소희(紹熙)원년(1190) 9월 정사일, 금나라가 왕수(王修) 등을 보내와 중명절(重明節)을 축하해주었다. 기미일, 검주(劍州)를 융경부(隆慶府)로 승격시켰다. 신유일에 천둥이 쳤다. 경오일, 금나라에 소산(蘇山) 등을 신년(新年, 正旦) 축하사절로 파견하였다. ...11월 갑인일, 안남(安南, 베트남)이 입공(入貢)했다. 12월 신사일 초하루, 좌천우위대장군 정(挺, 皇子)에게 보녕군절도사를 더해주었다. 임오일, 왕륜(王倫)에게 시호를 하사하여 '절민(節愍)'이라고 하였다. 병술일, 왕린(王藺)을 추밀사직에서 파면시켰다. 무자일, 갈필(葛邲)을 지추밀원사로, 호진신(胡晉臣)을 참지정사 겸 지추밀원사로 삼았다. 계묘일, 조서를 내려 1년간 광동(廣東)의 관염세(官鹽稅)를 감면해주었다.

소희2년(1191) 11월 신미일, 태묘(太廟)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이황후(李皇后)가 황귀비(黃貴妃)를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났다. 임신일, 원구(圜丘)에서 천지신명께 제사드리고,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배향했는데, 거센 바람이 몰아친데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예를 갖추지 못한 채 중단했다. 황제는 귀비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놀라 두려워해 병을 얻었고, 하례마저 중단했으나, 황후를 통제할 수가 없어 묵인해버렸다. 수황성제(壽皇聖帝, 孝宗)와 수성황후(壽成皇后)가 병문안을 왔음에도, 황제는 조현(朝見)하기를 스스로 거부하였다. 12월 병신일에 형문군성(荊門軍城)을 축조하였다. 정해일, 황제가 내전(內殿)에서 비로소 보신(輔臣)들과 회견했다.

소희3년(1192) 봄 정월 을사일 초하루날, 황제가 병을 앓아 조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경술일, 수주(秀州)의 상공미(上供米) 4만 4천석(石)을 감면해주었다. 사천의 염세(鹽稅)와 주세(酒稅) 90만민(緡)을 1년간 감면하였다.


소희5년(1194) 가을 7월 신유일, 승상 유정(留正)이 병을 핑계로 정무를 관장할 수 없다하여 마침내 [臨安城 밖으로] 도망하였다. 애초에, 유정 등은 거듭해서 가왕(嘉王)을 황태자로 세울 것을 건의했었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유정이 나아가 어찰(御札)을 받자, '세월도 오래흘렀으니, 한가로와지고 싶네'라고 적혀있었다. 유정이 그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하여, 물러나기를 도모했던 것이다. 갑자일, 태황태후(太皇太后, 高宗의 황후)는 광종황제가 병환으로 효종의 국상을 주재할 수 없자, 명을 내려 중화궁(重華宮)에 장막을 씌우고, 황자(皇子) 가왕을 즉위시켰다. 광종을 태상황제로, 황후를 수인태상황후(壽仁太上皇后)로 올렸으며, 태안궁(泰安宮)으로 옮겼다.
 
경원(慶元)원년(1195) 11월 무술일, 존호를 올려 '성안수인태상황제(聖安壽仁太上皇帝)'라고 하였다. 경원6년(1200) 6월 무자일, 태상황후 이씨가 붕어했다. 8월 경인일, 태상황제가 위독해졌다. 신묘일, 수강궁(壽康宮)에서 붕어하니, 향년 54세였다. 병신일, 이태후(李太后)의 시호를 자의황후(慈懿皇后)라 하였다. 계묘일, 자의황후를 임안부 남산 수길사(修吉寺)에서 장사지냈다. 11월 병인일, 태상황제의 시호를 '헌인성철자효황제(憲仁聖哲慈孝皇帝)', 묘호를 광종(光宗)이라 하였다. 가태(嘉泰)3년(1203) 11월 임신일, 시호를 덧붙여 '순도헌인명공무덕온문순무성철자효황제(循道憲仁明功茂德溫文順武聖哲慈孝皇帝)'라 했다. 영숭릉(永崇陵)에 안장되었다.


논평하기를, 광종은 젊은 시절 훌륭한 평판을 얻었고, 학문이 깊어 품위있게 행동하였다. 즉위함에 이르러, 권력을 총괄하여 폐행(嬖倖, 총애를 받는 간신)을 물리쳤으며, 부세(賦稅)를 줄여 형벌을 완화시켰으니, 소희(紹熙)초기의 정치는 아름다웠다 평가할 만 하다. 그러나 지아비로서 궁중(宮中) 내부의 투한(妒悍, 李皇后)을 다스리지 못하는 바람에 놀라고, 근심하여 병[心疾을 뜻함]까지 얻고 말았다. 자연스레 정치는 날로 혼미(昏迷)해졌고, 어버이에게 효도하지 않게 되었으니, 건순(乾淳, 宋孝宗의 치세)시대의 위업은 이로부터 쇠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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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식이다. 개인적 감상평이라면, 한마디로 레알 재미없음.;; 사마문정공의 유려한 문체라던지 평론 수준은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원대에 사서를 편찬하며 몽고인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한 티부터가 너무나 강함. 


                                  투한(妬悍)으로 악명높았던 스캔들 메이커, 자의황후(慈懿皇后) 이씨(李氏)
                                   
                                         

덧글

  • 소하 2013/05/10 18:39 # 답글

    재미 없습니다. 한표!
  • 에드워디안 2013/05/12 12:05 #

    송사 전공자, 애호가들 입장에서야 괴로울 따름입니다.
  • 2013/05/12 08: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3/05/12 12:06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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