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孝宗)과 자치통감 세계사


송조(宋朝)는 중원을 금나라에 내주고 강남으로 남천(南遷), 중흥하여 여러가지 제도들을 새로이 제정해야만 했다. 중흥한 지 40년이 지난 효종대(孝宗代)에 이르러서도 조정내 부서의 업무 분장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듯 한데, 여기서 효종황제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읽고, 거기로부터 당태종(唐太宗)의 고사를 통해 업무 분장의 방침을 배우게 된다. 건도(乾道)3년(1167) 2월 13일, 홍매(洪邁)가 상주한 대목에서 그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기거사인 홍매가 상주하기를, '양성(兩省, 中書省과 上書省)에서 매일 기록을 보내오는데, 황문서(黃文書)가 궤각(几閣)에 가득쌓였지만, 대부분 일상적인 자잘한 일들로 조정을 번거롭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오로지 명령을 내린 것만으로도 중서성의 업무가 깨끗하지 못하니, 이보다 심한 폐해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황상(皇上, 宋孝宗)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통감>을 읽었는데, 당태종이 재상들에게 말했던 것이 실렸으며 사송(辭訟)을 들어서 받들게 하고, 장부에 얽매이면 매일 한가할 수 없으니 상서(上書)에 칙령을 내려 자질구레한 일은 좌우 사람들에게 위촉토록 했었소. 짐은 이해하니, 경이 언급한 것은 지극히 마땅하오.'라고 하였다.


송효종이 언급한 <통감>의 고사는 정관(貞觀)3년(629)의 사례로서, 다음과 같다.


황상(皇上, 唐太宗)이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에게 말했다.

'공(公)들은 복야(僕射)로서, 마땅히 널리 현명한 인재를 물색하여 재주에 따라 임무를 부여해야 할 것인즉, 이것이 바로 재상의 직책이오. 근좌에 듣건대, 송사(訟事) 문제를 처리하느라 하루도 쉴 틈이 없다는데 어떻게 짐을 도와줄 현명한 사람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칙령을 내리니, '상서들의 자질구레한 업무는 좌우승(左右丞)에게 위촉하고, 오로지 중대한 안건으로 상주해야 할 것만 골라내 복야에게 관계토록 하라.'고 하였다.


정관3년 <통감>의 기사 내용과 송효종이 홍매에게 답한 발언은 거의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효종은 <자치통감>을 일독하여 업무처리의 지혜를 얻어낸 것이다. 또한, 순희(淳熙)6년(1179) 2월에 우성관(佑聖觀)으로 행차하였을 때, 여기서도 효종은 태자[宋光宗]에게 재차 <자치통감>을 언급하면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황상이 우성관에 행차하였고, 곧바로 저궁(儲宮, 太子宮)으로 올라갔다. 황태자가 따라가니, 사호증(史浩曽)을 불러 입시(入侍)토록 했으며, 황상은 강궁(講宮)에 건너가서 동우(東宇)를 올려다봤다. 처음에는 개조하지 않았었는데, 엄연히 새로 단장한 것과 같았다. 황상이 기뻐하여 구여(舊與)를 생각하며 명원루(明遠樓) 아래에 이르렀다. 황상이 황태자에게 이르기를, '앞서 <통감>을 익혔다면, 따로 어떠한 책을 읽느냐?'라고 물으니 태자가 대답했다.

"경사(經史)를 함께 읽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먼저 경서(經書)를 주로 해야겠지만, 역사 또한 없앨 순 없다."


송효종은 태상황 고종(高宗)이 서거했을 시에도 장례절차의 의례를 <통감>에서 찾고자 했었던 모양이다. 순희14년(1187) 10월 을해일(8일), 태상황이 덕수전(德壽殿)에서 붕어하자, 이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다.


유조(遺詔)로 태상황후(太上皇后) 오씨(吳氏)를 태황태후로 개칭하였다. 황상이 아프게 통곡하고, 가슴을 치며 펄쩍 뛰면서 재신 왕회(王淮) 등에게 이르기를, '진효무제(晋孝武帝)와 위효문제(魏孝文帝)는 3년상(喪)을 실행했었는데, 무엇이 청정(聽政)을 방해하겠는가? 사마광의 <통감>에 기재된 것이 아주 상세하구나!'라고 하였다.


여기서 태상황이란, 물론 송고종(宋高宗)을 말한다. 고종은 일찌감치 후사가 요절하는 바람에 양자 효종을 태자로 삼았고, 소흥(紹興)32년(1162) 효종에게 양위했다. 고종이 이때 서거하자, 효종은 3년간 상복을 입겠다고 주장하며 근거를 <자치통감>에서 찾았다. 소희(紹熙)4년(1193) 3월, 수황(壽皇)은 새삼 <자치통감>을 호평하였다. 수황이란 순희16년(1189) 2월, 광종에게 선위(禪位)하고 중화궁(重華宮)으로 물러난 효종의 존호(尊號)를 가리킨다. 송효종 스스로가 태상황이 된 지 4년만에, 조여우(趙汝愚)에게 <자치통감>의 중요성을 귀띔한 것이다.


3월 병자일, 황상(皇上, 宋光宗)이 중화궁으로 조현(朝見)드리러 가자, 황후(皇后, 李皇后)가 따라갔다. 신사일, 갈필(葛邲)을 우승상으로, 호진신(胡晉臣)을 지추밀원사로, 진규(陳騤)를 참지정사로, 조여우를 동지추밀원사로 삼았다. 갑신일, 감찰어사 왕의단(汪義端)이 상주하기를, 조여우가 집정(執政)하며 조종(祖宗)의 고사를 쫓지 아니한고로, 파면할 것을 청하였다.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으나, 이에 답변해주지 않았다. 신묘일, 왕의단을 파면시켰다. 계사일, 황상이 수황성제(壽皇聖帝, 孝宗)와 수성황후(壽成皇后)를 모시어 취경원(聚景園)으로 행차하였다.

수황성제가 조여우를 호출해 만나보고 이르기를...

"경은 종실(宗室) 가운데 현명한 사람으로 집정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국가의 성대한 일이로다. 경이 촉(蜀, 四川)에 주재할 무렵 올렸던 주의(奏議, 의견서)는 아주 훌륭했던 바, 짐이 일찍이 그 책을 보았는데, <자치통감>과 더불어 나란히 통용할 수 있을 정도였소. 그가 성권(聖眷, 황제의 총애)을 입은 것이 이러하다."


4월 기유일, 사천 연변군현(沿邊郡縣)의 관전(官田)을 매각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5월 병인일 초하루, 영주(永州)의 의보(義保)를 회복시켰다. 기사일, 예부진사(禮部進士) 진량(陳亮) 이하 급제자 출신 396명에 대해 포상을 내렸다. 황상이 절동(浙東)총관 강특립(姜特立)을 임안(臨安)으로 불렀다. 좌승상 유정(留正)은 강특립과 보조를 같이하지 못한데다, 자주 다투었기 때문에 재상직에서 사임하게끔 간청했으나, 황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치통감을 거울삼아 치국(治國)의 방도를 터득한 송효종(宋孝宗)
                                           효종의 치세는 송대 최전성기로 '乾淳之治'라 찬사받고 있다.



덧글

  • 위장효과 2013/05/16 19:45 # 답글

    그러나 그 다음부터 남송의 역사는...하아~~~~
  • 에드워디안 2013/05/17 03:49 #

    칭기스칸 침입 전야부터 통치제체와 내부사회의 모순이 점증한 끝에 처참히 무너져버린 금나라보단 양호했죠. 밀리터리 전과면에서 후달렸던 사실만으로 송왕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 위장효과 2013/05/17 06:36 #

    군사적인 문제야 송 왕조에게 바랄 것도 없죠. 하지만 북송대에 비하면 남송의 경우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해답이 없어 보이니 말입니다. 금보단 양호하다 해도...
  • 에드워디안 2013/05/17 10:55 #

    과거제를 기반으로 수립된 송대 문관관료체제의 배경상 학파 이념에 따라 당파색이 구분짓고, 정쟁을 유발시킨 과정은 불가피한 성질 ・체질마저 내재했던지라, 북송대도 마찬가지였죠.;; 복의와 신구법당간 대립에서 보듯이 북송후기부터 권력지상주의가 만연하여 대국적 판단을 그르친 인상이 강하지 않습니까. 전권재상의 등장 역시, 당초 재상임명권자인 황제의 독재권 강화 기도하에 연장선상이었건만, 효종 이후론 약체천자가 잇따른 바람에 재상이 대권을 관장해가는 식으로 기형화되버린 감이 없지 않은데... 사미원처럼 계파에 통달하고, 리더십까지 갖춘 실무관료가 집권 ・전단했을 경우, 정국안정의 부수효과는 기대할 수 있었으니 망정입니다만.
  • 소하 2013/05/17 14:43 # 답글

    남송대의 역사는 저의 머리에 잘 입력되지 않는데 잘 봤습니다. 북송은 태조와 왕안석, 사학가들과 거대한 서적의 편찬사들이 있어서 입력이 되는데, 남송은 그닥... 개설서나 통사에서 본 남송의 역사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나?
  • 에드워디안 2013/05/18 12:35 #

    국내에 소개된 송대 관련 서적과 논문을 들추어봐도, 남송시대(특히 정치사 방면으로)는 진회와 악비, 가사도만 조명한 채 대충 넘어가버린 경우가 허다해서 말이죠. 공인 정사인 <송사>부터 워낙 엉망이고, <송회요집고>나 <건염이래계년요록> 이외의 1차사료 역시 미비한 실정인지라 송사 전문가들조차 남송 연구는 지지부진하다며 푸념했을 정도였다니, 인지도의 저하란 어쩔 수 없는 듯.;; 개인적으론 그나마 궁기시정의 중국사 개설서하고, 삼극기의 <日宋무역 연구선집>에서 남송시대를 나름 비중있게 다루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 담배피는남자 2013/05/19 12:40 # 답글

    진(秦)부터 시작해서 청(淸)까지의 중국을 지배했던 모든 통일왕조들과 비교했을때
    그 멸망의 시점에 내부적으로 환관이나 외척, 권신들에 의한 문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좀 특별하긴 하죠...
  • 心月 2013/05/19 14:17 #

    그러한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죠. 예컨대, 왕안석 변법과 신종의 관제개혁을 계기로 재상의 인사권이 강화되면서 남송대부터 권신이 발호할 여지를 제공해 준 편이었고, 한탁주처럼 북벌전에 올인했다가 말아먹은 외척도 만만치 않은 전횡을 일삼았으니깐요. 남송정치사상 특징 가운데 자주 거론되는 점이 다름아닌 독재재상의 장기정권 등장인데, 이것은 관제 시스템상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단 역대 황제의 개인적인 무능함에 편승해 그를 보좌해주는 형식으로 실권이 재상에게 넘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환관 역시, 휘종대의 동관이나 이종대의 동송신처럼 지극히 예외적이나마 배후에서 암약했던 사례도 발견되구요.

    뭐, 전체적인 면에서 '사대부와 함께 다스린다'는 문치주의 국시에 충실했으며, 군벌을 성공리에 억제시킨 점은 높이 평가하므로 송대 중국사회가 그때까지 유례없는 안정을 유지했다는데 이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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