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일(宋日)무역 잡담 세계사



약 320년에 걸친 송대(宋代)는 전체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구분된다. 일본에선 헤이안(平安) 중기~가마쿠라(鎌倉) 전기에 해당하는데, 송일(宋日) 양국간 공식적인 국교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민간 차원의 교류가 중단없이 꾸준히 지속되었다. 헤이안시대 말기, 보원(保元)의 내란을 기화로 국정 대권을 장악하게된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는 대재부(大宰府) 차관으로서의 경력과 본거지인 세토내해(瀨戶內海) 항로의 잇점에 착안, 범국가적 차원에서 대송(對宋)교역을 활성화시켜 재정수입 증대와 문화수준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현대의 효고현(兵庫縣)에 해당하는 섭진국(摂津國) 후쿠하라(福原), 즉 고베(神戶)시로 기요모리가 일시적이나마 천도(遷都)를 강행한 시기가 치승(治承)4년(1180). 그 이전부터 기요모리는 이곳에서 신도시를 건설해왔으며, 승안(承安)3년(1173)엔 고베의 외항(外港)격인 오와다노토마리(大輪田泊)를 수축한 바 있다. '외국인을 접견치 말라'는 불문율을 깨뜨리고, 반론을 무릅쓴 채 가응(嘉應)2년(1170) 9월,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을 후쿠하라로 초청해 송인(宋人)과 대면토록 주선한 것은 주목가는데, 2년후 효종(孝宗)황제가 보내온 선물이 도착했다.                

승안2년(1172) 9월 17일, 명주(明州)의 자사를 대리삼아 송효종이 고시라카와 법황과 기요모리에게 '하사'한 물품의 정확한 내역은 알 수 없지만, 이듬해 작성 ・초안된 반첩(返牒, 답서)에서 선물의 '미려(美麗)함과 진귀함'을 칭송한 점으로 짐작컨대, 도자기류의 공예품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남송으로 반첩과 답례품을 보내면서 법황은 황금책장과 채색가죽 30장, 사금(砂金) 1백냥을, 상국(相國, 淸盛)은 일본도와 갑옷 따위를 기증했다. 한편, <송회요(宋會要)>에 따르면, 일본측의 국서 ・답례품은 그해 5월 임안(臨安) 조정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양국간 교역은 공적인 성향을 띄우게 되었으니,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이 송나라 선박을 시찰하고자 몸소 효고까지 행차하는가 하면, 치승3년(1179) 2월 기요모리가 대륙에서 직수입된 <태평어람(太平御覽)> 서적을 천황에게 헌상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교역이라고는 하지만, 일본측이 대폭적 수입초과로 송전(宋錢)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화폐경제 발달을 자극하는 동시에, 물가앙등을 초래해 사회불안을 야기시킨 단점도 있었다. 그래서, 일본 조정내에선 송전의 국내 유통을 중지해야 한다는 제안마저 심도있게 논의되기조차 했던 모양이다.

송대는 보통 '도자기의 시대'라고도 한다. 경덕진을 위시로 소위 '6大 명요(名窯)가 등장해 그 조형과 유색 및 장식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당시, 중국산 도자기의 수출범위는 일본과 동남아시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확장된 상태였다. 남송은 수출입에서 우세한 조건을 이용해 금(金)과 서하(西夏)에 대해서도 중개무역을 전개하였는데, 차(茶)와 향료, 도자기 등이 주종의 수출품목으로 북방에서 산출되는 축산품과 교환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남송시대엔 다양한 종류의 상품들이 판매되었고, 객상(客商)또한 많았다.

남송시대에 들어와 강역이 동남연해로 치우치고, 세수원이 격감된 상황속에서 군비와 관봉, 황실의 지출은 여전히 막대하여 북송에 비해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외무역이 국가재정에서 점유한 비중감을 더더욱 강조하였다. 소흥(紹興)16년(1146) 9월 25일 반포된 고종(高宗)의 상유(上諭)에서도 '시박(市舶, 무역)의 이로움으로 국가재정에 뒷받침하니, 옛 법률에 따라 외국인을 초치, 재화와 상품을 통용'토록 훈시했던 것처럼 남송왕조는 무역 장려를 국시(國是)로 삼았으며, 교역항 천주(泉州)와 광주(廣州)가 번영한 것도 유명한 사실이다.

송일(宋日)무역을 재차 논하자면, 북송대엔 송선(宋船)의 주도로 전개된 '수동적 교역'이었던 반면, 남송으로 오면 항해술 발달에 힘입어 일본상선도 직접 대륙까지 건너가 활약하기 시작한 '능동적 교역'으로 변질된 점이 특징이다. 즉, 소흥15년(1145) 11월, 일본인 남녀(男女) 19명이 온주(溫州)에 도달했다는 중국측의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바, 절강 연안으로 표류해 온 일선(日船)에 대해 식량을 제공해 준 사례만 10여차례 언급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추세가 헤이씨(平氏)정권 수립으로 교역진흥책이 추진되면서 가속화되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대송(對宋)수출품으로서 이종(理宗) 보경(寶慶)연간에 작성된 <보경사명지(寶慶四明志)>에선 사금과 진주, 수은, 유황 등을 언급했으며, 그밖의 진상품이나 봉납품에 자주 이용된 마키에(蒔絵), 나전(螺鈿), 수정, 부채, 병풍, 일본도 등과 서국(西國)지방에서 산출하는 목재도 특산품으로서 각광받았다고 한다. 남송의 대일(對日)수출품으론 동전과 도자기, 비단, 문구(文具), 서적, 향료, 약품, 회화(繪畵) 등이 포함된다. 상술했듯이, 송전의 유입은 화폐경제 진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빈번한 교류 ・왕래가 겸창불교에 미친 영향도 심대하였다.


                         헤이케(平家)의 근거지이자, 대송무역 전초기지였던 고베항(神戶港) 전경, 1974년 촬영
                         기요모리가 이곳으로 천도한 해, 요리토모(賴朝)는 관동(關東)에서 거병했다.
                        

                           고시라카와 상황(上皇)이 1164년 건조한 교토 연화왕원(蓮華王院)의 관음상, 1974년
                           양무제(梁武帝) 뺨칠 정도로 불심(佛心)이 깊다며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일본 3대(大)절경의 하나인 히로시마만(灣) 이츠쿠시마 신사(嚴島神社), 1978년 촬영
                          1174년 봄, 고시라카와 법황(法皇)은 바닷길로 전격 방문해 참배 ・유람하였다.

 

덧글

  • 행인1 2013/05/24 09:01 # 답글

    1. 송과 고려, 일본의 교역이 그 전이나 후에 비해서 활발해 보이는데 배경이 무었인지...

    2. 고려에서도 송의 화폐제도를 본받자는 건의가 나와서 화폐 주조와 유통에 착수했다죠.
  • 역사관심 2013/05/25 02:55 #

    송과 고려는 당시 무신정권이 막 들어선 고려입장에서 반란이 들끓던 국내사정상, 송과의 관계를 탄탄히 대외적으로 다질 필요가 있어서가 아닐까요.
  • 心月 2013/05/26 19:22 #

    고려의 경우 인종시대부터 대금외교에 비중을 둔 이후로 남송과의 관계는 소홀해진 감이 짙습니다. 공식적인 사절 왕래가 중단되고, 이따금 송상이 방문했다는 사례외엔 특기할 만한 기사가 없으니 말이죠.
  • 조훈 2013/05/24 15:24 # 답글

    다자이후는 태재부(太宰府)로 더 잘 알려져 있어, 오류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그런 것은 아니었군요.

    한 드라마에서는 효종의 선물을, 그와 같이 상술하신 표현에 기대어 공작의 깃털로 짠 부채로 표현했더군요. 물론 드라마니까 신빙성은 차치해야겠지만, 흥미본위 차원에서;

    당시 일본 조정에서 송전의 유통을 반대한 것은, 상술하신 까닭과 더불어 전례없이 커진 무사세력인 헤이케에 대한, 섭관을 필두로 한 기성 귀족들의 견제의 성격도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어찌됐든 기요모리 세력은 위협적이었고, 송과의 무역 또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니.


    아주 상세하게 쓰셨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心月 2013/05/26 14:17 #

    송전의 유통정지가 처음 논의된 시점이 치승3년(1179) 여름경인데, 전후로 시시가타니 음모나 교토 대화재 등 내우외환에다 법황과 기요모리의 갈등까지 겹쳐 소란스런 때라서요. '위협적'이라곤 하지만, 막상 기요모리를 제외하면 일족 가운데서 마땅한 인재가 없다는 약점도 내포했고, 反헤이케 불만세력이 점차 규합해가던 시기가 시기인지라, 지적하신 조정내 반론도 그의 연장선상은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졸필이나마 칭찬해주심과 고견에 감사드리며...(꾸벅)
  • 3인칭관찰자 2013/05/25 20:48 # 답글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心月 2013/05/26 14:18 #

    감사합니다.
  • KittyHawk 2013/05/27 10:28 # 답글

    송, 고려, 일본 사이의 해상 교류가 활발하다가 조선에 이르러서는 해운을 소홀히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더군요. 혹자 지적으론 동북아 국가들 중 한중의 퇴보 원인 중 하나로 바다를 멀리한 걸 들기도 한다고 하니 말이지요. 러시아의 경우엔 차르 시절부터 어떻게든 바다로 나가겠다고 주변국들과 전쟁까지 벌인 걸 보면 세상 일이란 건 알 수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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