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史) 태조본기(太祖本紀) (1), 擧兵 前夜 세계사





태조(太祖) 응건여운소덕정공인명장효대성무원황제(應乾與運昭德定功仁明莊孝大聖武元皇帝)의 휘(諱)는 민(旻), 본래는 아골타(阿骨打)라 하였고, 세조(世祖) 핵리발(核里鉢)의 둘째아들이다. 모친은 가로되, 익간황후(翼簡皇后) 나라씨(拏懶氏)였다. 요도종(遼道宗) 시기, 5색(五色) 운기(雲氣)가 자주 동방에 나타나 약 2천곡(斛) 크기의 곳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사천(司天, 천문가) 공치화(孔致和)가 몰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밑에 기이한 인물이 나타나, 비상한 일을 이룩하리라. 하늘에서 이렇게 알리는 것으로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요나라 함옹(咸雍)4년(1068) 무신(戊申) 7월 1일에 금태조(金太祖)가 태어났다.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며 힘이 여럿을 합칠 정도였고,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므로 핵리발은 아골타를 매우 총애하였다.

핵리발이 야작수(野鵲水)에서 납배(臘碚), 마산(麻産)과 싸우다 네 군데 창(槍)에 찔려 병으로 고생했으니, 아골타를 무릎위에 앉혀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가 잘 성장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10세 때, 궁술을 좋아하였고, 성장하면서 활쏘기에 능했다. 하루는 요나라 사신이 부중(府中)에 앉아 아골타의 활과 화살을 보고선 새들을 쏘도록 시켰는데, 세 발 모두 명중시켰다. 요나라 사신은 놀라워하며 '기이한 사내아이로구나!'라고 말했다. 아골타가 일찍이 흘석열부(紇石烈部) 활리한가(活離罕家)의 연회에 갔는데, 문밖으로 나가 남쪽에서 높은 언덕을 보며 사람들에게 활을 쏘도록 했으나, 모두 도달하지 못했다. 아골타는 한 발에 그곳을 제꼈고, 320보(步)가 넘었다. 종실(宗室) 만도가(謾都訶)가 가장 멀리 쏘았지만, 그래도 아골타보다 1백보 뒤떨어진 곳이었다.

천덕(天德)3년(1151), 사비(射碑)를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핵리발이 복회(卜灰)를 토벌할 때, 아골타는 사불실(辭不失)로 하여금 따라가기를 청했다. 핵리발은 허락해주지 않았으나, 내심 기특하게 여겼다. 오춘(烏春)이 죽자, 와모한(窩謀罕)은 화의를 청하였다. 화의가 이루어진 후 다시 공격해오자, 마침내 그 성(城)을 포위했다. 아골타의 나이 23세로 이때 단갑(短甲)만 입고, 투구는 내벗은 채, 말도 타지 않으며 달려가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중(城中)에서 이를 보고, 그가 아골타임을 눈치챘다. 장사(壯士) 태욕(太峪)이 준마(駿馬)를 타고, 성밖으로 나와 아골타를 찌르고자 달려들었다. 아골타가 미처 방비하기에 늦었던 찰나, 외삼촌 활랍호(活臘胡)가 뛰쳐나와 태욕을 공격했고, 창은 명중되어 그의 준마를 찔렀으며, 태욕은 간신히 위기를 면했다.

일찍이 사홀대(沙忽帶)가 진영에서 나와 살략(殺略)했는데, 핵리발은 이 사실을 미처 몰랐었다. 그리고, 아골타가 귀환하려고 하자 적(敵)은 많은 병사로 추격해왔다. 아골타는 홀로 애항중(隘巷中)까지 갔으나 길을 잃고, 추격자가 늘어나 상황이 급박했다. 사람 키 정도의 벼랑과 마주쳤지만, 아골타의 말이 단번에 뛰어넘자 따라오던 추격자들은 이내 되돌아갔다. 핵리발이 중병으로 앓아 누웠다. 그 일로 말미암아, 아골타는 요나라 통군사(統軍司)에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아골타가 떠나려하자, 핵리발은 주의를 주며 '너는 신속히 일을 마무리짓고, 5월 중순까지 돌아와야만 내가 너를 볼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 아골타는 갈로소고(曷魯騷古) 통군을 만나 일을 마치고, 핵리발이 서거하기 전날에 돌아왔다. 핵리발은 아골타가 온 것을 보고, 청한 일이 모두 뜻대로 성사되었음을 알았다.

핵리발은 매우 기뻐하여 아골타의 손을 잡으면서 영가(盈歌)에게 '오아속(烏雅束)은 부드럽고 착하니 이 아이만이 거란과의 관계를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영가도 아골타를 중시해 외출시에는 반드시 동행토록 하고, 아골타가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면 직접 맞이하였다. 핵리발이 이미 납배를 사로잡은 후에도 마산(麻産)은 여전히 직옥개수(直屋鎧水)를 점거하고 있었다. 파자숙(頗剌淑)은 아골타로 하여금 먼저 마산의 가족을 잡아오도록 하였고, 영가는 직옥개수를 포위했다. 아골타가 군사들과 합류하여 직접 마산을 사로잡아 그의 수급을 요나라에 바쳤다. 요나라는 아골타를 상온(詳穩)에 임명하고, 영가와 사불실, 환도(歡都) 역시 임명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아골타는 니방고부(泥厖古部)의 발흑(跋黑), 파립개(播立開) 등을 토벌하고자 부대를 편성했다.

달도아(達塗阿)를 향도(鄉導)로 삼아 밤중에 수수(帥水) 연변을 따라 그들을 습격하여 처자를 사로잡았다. 애초에, 온도부(溫都部)의 발특(跋忒)이 당괄부(唐括部)의 발갈(跋葛)을 죽이자, 영가는 아골타에게 이를 토벌토록 하였다. 아골타가 인사차 찾아가 영가에게 '어젯밤 상서로운 조짐을 보았으니, 반드시 적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출발했다. 그 해엔 큰 눈이 내렸고, 추위가 심하였다. 아골타는 오고론부(烏古論部) 군사와 함께 토온수(土溫水)를 따라가며 말린향(末鄰鄉)을 통과했고, 발특을 아사온산(阿斯溫山)과 북락(北濼) 사이까지 추격하여 발특을 죽였다. 군사가 귀환하자, 영가는 친히 애건촌(靄建村)으로 나가 아골타를 영접하였다. 살개(撒改)는 도통(都統)으로서 유가(留可)를 토벌하고, 만도가(謾都訶)는 석토문(石土門)과 더불어 적고덕(敵庫德)을 토벌하였다.

살개가 장수들과 상의한 결과, 어떤 자는 먼저 변방 부락의 성보(城堡)를 평정하자고 했으며, 어떤 자는 즉시 유가의 성을 공격하자고 주장하며 결론이 나질 않았으므로 아골타의 의견을 듣기로 하고, 군중(軍中)에 들어갔다. 영가는 아골타에게 가도록 하면서 '무슨 사태가 일어날 듯 한데, 의심스럽다. 출발하지 않은 군사들 가운데 갑사(甲士) 70이 남아있으니, 모두 너에게 주도록 하마'고 하였다. 만도가는 미리미석한성(米里迷石罕城) 아래에 있었지만 석토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이 만도가를 잡아 적에게 넘기려 하니, 사절이 돌아와 사퇴전(斜堆甸)에 주둔한 아골타를 만나 급히 전하였다. 아골타가 말하기를, '국병(國兵)은 모두 이곳에 있다. 적들이 먼저 만도가를 죽이고 만다면, 나중에 여러명의 적들을 죽여봤자 무슨 이득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갑사 40명을 나누었다. 아골타는 30명을 인솔하여 살개의 진영으로 갔다. 도중에 사람을 만났는데 그자는 '적들이 이미 분닉령(盆搦嶺) 남로(南路)에 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사편령(沙偏嶺)을 경유하여 가기를 원했다. 아골타가 '너희들은 적을 두려워하는게냐?'라며 힐난했다. 분닉령을 지났음에도 적은 보이지 않았고, 이미 그들은 사편령을 지키며 아군과 맞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도착하자마자, 살개의 군은 밤중에 기습에 나서 새벽녘에 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가와 오탑(塢塔)은 요나라로 달아났다. 유가를 격파하고 돌아와서 오탑의 성을 공격하자, 성중(城中)의 사람들이 성을 바치며 투항했다. 처음 아골타가 분닉령을 지나 오탑의 성 아래를 통과할 때, 뒤따르던 기병으로 후방에 배치되던 자들이 있었는데, 오탑성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하여 솥을 빼앗았다.

아골타가 말을 멈추고 이들을 불러 '우리의 식기(食器)를 가져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공(公)께서는 이곳에 잘 오셨습니다. 식사할 수 없을까 무슨 걱정이라도 하시는지요?'라며 기만하여 말했다. 아골타는 채찍으로 그 자를 가리키며 '유가를 쳐부수고 나면, 네놈부터 잡아들일 것이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자는 솥들을 아골타의 앞으로 가지고 오면서 '누가 감히 상온님의 그릇을 가져가 망가뜨리겠습니까?'라고 했다. 포가노(蒲家奴)로 하여금 사도(詐都)를 초유시켰고, 사도가 항복하니 아골타는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토벌하고자 병사를 모집해 1천여명을 얻었다. 여진 병사가 1천에 이른적이 없었는데, 천여명에 달하자 아골타는 용기 충만하여 '이런 갑병(甲兵)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도모하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소해리가 공격해오자 아골타는 요군(遼軍)과 합류하였는데, 요나라 군사들을 물리도록 하고선 여진족 병사만으로 전투에 나섰다. 발해유수(勃海留守)가 아골타에게 갑옷을 내렸지만, 아골타는 이것도 받지 않았다. 영가가 어째서 갑옷을 받지 않았냐며 아골타에게 물었다. 아골타는 '그 갑옷을 입고 승리하더라도, 요나라 덕분에 성공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종(穆宗, 盈歌)말년, 여러 부족들에 명령을 내려 멋대로 신패(信牌)를 만들어 역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때부터 호령(號令)이 일체화되었는데, 모두 아골타의 건의로 행해진 것이다. 강종(康宗, 烏雅束)7년(1109), 그해엔 작황이 좋지않아 백성들 다수가 굶주려 유랑했고, 강한 자는 도적이 되었다. 환도(歡都) 등은 법으로 엄중히 대처하여 도적에 대해서라면, 모두 사형에 처하기를 바랬다.

아골타가 이르기를, '재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재물이란 어차피, 사람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며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배상법을 완화시켜 훔친 재물에 대해선 3배가량 배상토록 하였다. 백성 가운데 빚이 연체되어 처자식을 팔아도 상환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아속은 관속(屬會)들과 의논하였는데, 아골타가 바깥 마당에서 비단을 막대기에 묶고, 그 무리를 지휘하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가난한 자는 자활(自活)이 불가능한고로, 처자식을 팔아 빚을 갚는 실정이다. 골육지간의 애정은 인지상정 아닌가?! 지금부터 3년간 가난한 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말라. 3년후에 다시금 천천히 생각해보마'라고 하였다. 모두가 그 명령을 듣고 감동했으며, 이로부터 아골타에 대하여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심적으로 귀부하게 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113) 10월, 오아속은 꿈속에서 이리를 쫓으며 여러차례 쏘았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는데, 아골타가 앞으로 나아가 이를 명중시켰다. 다음날 아침, 꿈의 내용을 신료들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길조(吉兆)입니다. 형님이 얻지 못한 것을 아우가 얻는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달 29일에 오아속이 서거하자, 아골타는 도발극렬(都勃極烈) 지위를 세습받았다. 요나라 사신 아식보(阿息保)가 와서 '어째서 오아속이 죽었다는 사실을 고(告)하지 않았는가?'라고 추궁했다. 아골타는 '상(喪)을 당했건만 조문은 하지 않고, 죄부터 묻습니까?'라며 대꾸했다. 어느날, 아식보가 재차 부락으로 와서 말위에 탄 채 오아속의 빈소에 이르러 부조(扶助)로 들어온 말을 살펴보더니, 그것을 가지려 하였다. 아골타가 노하여 아식보를 죽이려 하자, 종웅(宗雄)이 충고하여 그만두었다.

나중에 요나라의 명령은 더이상 여진 부락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요나라 주군(主君, 天祚帝)은 사냥을 좋아하였고, 음탕하고 술에 빠져 정사(政事)를 등한시했으며, 사방에서 상소가 올라와도 자주 열람하지 않았다. 목종 영가시대, 완안부(完顔部)에 반항했던 흘석렬아소(紇石烈阿疏)는 이미 요나라로 달아났다. 영가가 아소의 성(城)과 주민들을 차지하니,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아소의 족제(族弟)인 은출가(銀朮可)와 사리한(辭里罕)은 남강(南江)에 거주하는 혼도복속(渾都僕速)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여 고려(高麗)로 달아나고자 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아골타는 협고살갈(夾古撒喝)에게 그들을 사로잡아 오도록 지시했는데, 나중에 은출가와 사리한은 요나라 병사에 붙잡혔고, 혼도복속은 벌써 도망해버려 협고살갈은 그의 처자들만 잡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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