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韓日) 안보차관 협상의 전야와 배경 국제, 시사



제5공화국 초기, 한국의 대일(對日)경제협력 요청과 안전보장 이념, 특히 거액의 엔차관(円借款) 규모가 쟁점으로 부상한 경협교섭은 국교정상화 이래 한일관계의 최대 화제였었다. 전두환 정권은 안보적 관점에서의 역할 분담을 명분삼아 1981년 4월 22일, 노신영 외무장관을 통해 이임하는 스노베(須之部) 주한(駐韓) 일본대사에게 향후 5년간 정부개발원조[ODA] 60억$, 수출입은행 자금 40억$ 총 1백억$의 제공을 요구, 사실상 선전포고를 발동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한국측은 1백억$ 차관이 한반도 안보를 위한 경제원조 성격으로 미국의 '우산'과 한국의 '방파제' 덕분에 보호받으며, '공짜 안보'의 수혜자인 일본측이 마땅히 짊어져야할 당연한 대가라는 논리로 경협론을 정당화시켰다. 반면, 일본측은 자국이 '평화국가'란 전제하에 안보문제를 경제협력과 결부시킨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차관협상은 기존의 선례에 따라야만 한다고 맞섬으로써 양국간엔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이 1백억$ 안보경협 요구사건의 배경에 대해선 여러가지 논의가 있다. 즉, 1970년대말부터 급변화된 국제정세속에 데탕트 퇴조와 신(新)냉전의 도래로 말미암은 지역안보 중요성의 대두라던지, 닉슨독트린 이후 아시아에서 일본의 보다 책임감있는 역할을 강조하며 경제 ・방위적 '역할 분담'을 설파한 미국측의 바램이 반영되었다는 주장 등이다. 그러나, 선후결과를 따져보건대 본질적으론 2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위기에 봉착해있던 경제적 절박함을 해소하고, 일본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개입으로 자존심에 상처입은 전두환 정권이 재원 확보와 분풀이 차원하에 외교전쟁을 도발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쪽이 타당할 듯 싶다. GNP 성장률 -5.7%, 경상수지 적자 53억$ 수치가 증명하듯이 에너지 위기와 내수침체, 흉작까지 겹쳐 1980년도 한국경제는 20년래 최악의 시련기를 겪고 있었다. 따라서, 전(全)정권의 입장에선 정통성 논란을 불식시키고, 경제를 회복해 신뢰를 획득하는 과제가 급선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빠르고도 쉬운 방법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일본으로부터의 원조였다. 또한, 취약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국교정상화 당시 '3억$ 굴욕외교'와 대비된 자세로서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신군부 지도층의 계산 또한 내재되었던 것이다. '한일유착'의 파이프가 활발히 기능했던 박정희 시대와는 달리, 신군부내 주요인사들은 일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험이 없었고, 해방 이후 청장년기를 보내며 교육받아온 자들로 박정희 세대와 구분되는 '한글세대'였다. 10.26 사태와 신군부 집권이란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에 일본은 한국의 정정(政情)불안 파장을 가급적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한국정부에 정면으로 대응해나가야 했다. 1980년 5월 21일, 전(前) 아프간 대사 마에다 도시카즈(前田利一)가 일본정부 방한특사로 서울에 도착, 정 ・관계, 군부 실력자들과 회동했다. 정부특사의 파견은 곧, 일본의 한국 신(新)체제에 대한 승인 보증서나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사후 대한(對韓)관계 개선을 위한 일본측의 노력은 1980년 4~6월 사이 특사와 의원단의 연이은 방한으로도 나타났다. 외무성은 1978년 이후 중단되어온 한일각료회담의 재개를 희망했고, 한국정부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위한 지원도 약속했다. 그런데,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을 전후로 회복된 듯 하던 한일관계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불거지며 심각한 타격을 받고말았다. 계엄사의 내란음모사건 수사 발표가 보도되자 외국 정상으로서 처음 김대중 문제를 거론한 것은 그해 7월 8일, 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일본 총리대리(代理)의 관심 표명이었다. 앞서 6월 중순 양원(兩院) 동시총선과 오히라(大平) 총리의 급서로 일본측 정국도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나, 국내 문제가 수습되자 일본은 다시금 한국 정황을 관망하면서 압박 수위를 조절하고 있었다. 양국은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결착지을때, 그 문제를 거론치 않는 대가로 김대중의 일본내 정치행위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합의해 온 터였다.

1980년 7월 17일, 양원 동시총선 압승에 기반해 스즈키 젠코(鈴木善幸)를 수반으로 한 자민당 단독내각이 출범했다. 총리 대리에서 외상직으로 자리를 옮긴 이토의 주도하에 일본정부는 한일각료회담을 연기시키고, 김대중 구명을 공공연히 언급해가며 한국 당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둘러싼 스즈키 정권의 대한 고자세는 전임 오히라 정권과 차별화된 인사 개편, 방향 전환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스노베 주한대사에 따르면, 제2차 오히라 내각의 오키타(大來) 외상과 스즈키 내각의 이토(혹은 소노다) 외상은 한반도관(觀)에 있어서 견해를 매우 달리하고 있었다. 예컨대, 오키타가 한반도 안보와 북한의 군사위협 가능성을 강조한 반면, 이토와 소노다는 북한에 부드러운 편이었다는 식이다. 각내(閣內)에서는 이토 외상과 미야자와(宮澤) 관방장관, 다나카(田中) 통산상 등이 김대중 구명에 앞장서야 한다며 스즈키 총리를 독촉했고, 이에 총리도 수긍하였다.

이토 외상은 8월 12일, 한국 당국의 '신중한 대처'를 촉구한데 이어 19일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각료회담 연기를 선언하여 태도를 분명히 했다. 김대중 사형판결이 보도된지 닷새후인 9월 22일, 스즈키 총리 역시 NHK 인터뷰에서 한일관계에 관해 언급, 사형이 집행될 경우 경제협력이 철회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였다.


'일한(日韓)관계는 비상히 중요합니다. 이웃나라의 경제가 한층 발전하고, 국내 정치도 안정화되는 것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간절히 원하는 바입니다. 이를 위한 기술원조와 경제협력 등이 중요할테고, 한국측으로부터도 요청이 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협력관계를 지속해나가는데 있어서 김대중씨의 신변에 일본측이 우려한 사태가 현실화된다면, 일본정부가 (한국측과) 협력하는데 대단한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


11월 3일, 김대중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사형이 선고되자 일본측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11월 21일, 스즈키는 총리관저에서 신임 주일(駐日) 한국대사로 부임한 최경록을 접견하고, '만약 김대중씨가 처형된다면'이란 전제를 붙여 장래 한일관계에 미칠 파장을 세 가지로 요약해 지적하며, 엄중히 경고하고 나섰다.


1. 일본 국내에서의 국회 정세 및 매스컴 논조가 한국에 냉혹해질 것이므로, 경협이 불가능해진다.

2. 사회당 등 야당들을 중심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강화하라는 소리가 나올법하다.

3. 자유진영 각국의 대한(對韓)시각이 엄격해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11월 28일, 엔차관의 철회를 고려할지도 모른다는 이토 외상의 발언으로 한국정부 당국자들의 신경이 날카로와졌다. 자존심이 팍 상해버린 전두환 대통령은 일시에 평정심을 잃어 단교마저 생각할 정도로 흥분했으나, 대일단교와 그 대가는 반년내로 한국경제가 치명상을 입고 말 것이란 외무 ・경제부처 대책팀의 경고앞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정부는 스즈키가 최경록 대사에게 전달한 경고 발언을 공개하여 일본의 한국의 국내법 절차에 대한 '무례한 간섭'이라 비난하는 동시에, 김대중 문제와 별개인 만성적인 대일무역 역조, 재일동포 차별 등과 같은 감정적 문제를 거론하며 반일(反日)감정을 고취시켰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추궁하는 일본의 비난과 고자세가 한국 지도층의 노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대일관계가 김대중 문제로 난항을 거듭한 가운데 안보경협 시나리오 작성에 준비, 돌입했던 사실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말 이후 제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대한정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과 대만의 안전은 일본의 안전에 긴요하다'고 명시한 닉슨-사토(佐藤) 공동성명 조항은 차치하더라도, 일본의 대(對)한반도 정책은 '현상유지'가 가장 핵심적인 기조이며, 남북통일이 야기할지도 모르는 지역안보와 밸런스의 파괴를 원치않았다. 현상유지란 '한반도의 안정', 정확히는 '한국의 안전'인데 한반도 안정이 주변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 중공이 빚어낸 역학관계의 여부에 달려있다면, 한국의 안전은 한국 국내의 정치 ・경제적 종합안보의 유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카터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곧, 미국의 동북아 안보공약 철회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우려를 금치 않았지만, 미군 철수는 어디까지나 한미 양국의 현안일 뿐, 기본적으론 한국의 경제성장과 비즈니스 관계를 강조하며 이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주로 노력을 경주했다.

1978년말 출범한 오히라 정권은 전임 내각들과는 달리, 수동적 외교자세로부터 벗어나 신냉전 도래의 국제정세에 주된 관심을 보이면서, 소위 '종합안전보장'과 '환태평양연대' 구상안을 제시하였다. 이가운데, 종합안전보장 개념은 일본의 입장에서 자원과 에너지, 산업, 경협, 군사적 설비시설 등 사회전반에 필요한 모든 필수적인 상황의 안전에 대비하자는데 취지가 있었다. 베트남전 이후 미국의 헤게모니 퇴조와 더불어 카터행정부 들어 표면화된 유럽 중시-아시아 경시노선, 무역마찰로 말미암은 대일압박에 임하여 일본의 대미(對美) 불신감이 점차 고조중이었고, 미국이 테헤란 인질사태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집중한 틈을 타, 경제외교에서 경제대국에 걸맞는 정치외교로의 전환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9년 9월 3일, 오히라 총리는 국회 연설을 통해 '국제사회[=자유진영] 일원으로서 일본의 국제지위에 상응하는 책임과 역할을 수행하겠다'며 소신을 피력하였다.

또한, 1980년 1월 25일엔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비난, '서방 우호제국과 협조를 기반삼아 자국 위상에 걸맞는 노력을 다할 것'임을 천명한데 이어, 테헤란 인질구출작전이 실패한지 이틀후인 4월 26일 히로시마의 자민당 연수회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뱉었다. 즉, 다극화시대를 맞아 '미국은 초강대국에서 기타 열강과 마찬가지로 여러 대국중의 하나로 전락했고, 따라서 일본이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오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한편, 대한정책에 국한하여 논한다면, 10.26 사태를 맞아 일본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사건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오히라 총리는 소노다(園田) 외상과 긴급회의를 가져 대응책을 협의한 끝에 '쿠데타가 아닌 사고이며, 한국의 국내문제'란 점에서 인식을 같이했다. 당초, 두 사람은 '일한관계'의 중요성을 참작하여 직접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국장 전날인 11월 2일 개각(改閣) 스케줄을 핑계로 방한을 돌연 취소시켜버렸다.

일본 당국은 박대통령의 국장에 총리대신과 외상 뿐만이 아니라 현직 각료를 단 한 사람도 보내오지 않았고, 박정희 정권과 개인적으로 유착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편의상의 특사로 파견했을 뿐이다. 그때문에, 국장 참석차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밴스 미(美) 국무장관과 오히라 총리간의 회담도 취소되었다. 결과적으로 미일(美日) 양국이 박정희 사후 한국의 정치체제 문제와 관련해 견해차를 조정할 기회가 늦춰진 셈인데, 달리 바라보면 일본은 미국측과 별개의 한반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된 것이다. 그리고, 12.12와 광주사태로 급부상한 신군부 그룹의 집권이 확실시되자 80년 중반을 기점으로 방문외교를 전개하며, '한글세대'들의 투박한 대일(對日) 접근에도 불구하고 '사회정화 개혁'에 동조, 체제를 승인해주었음은 상술한대로다. 일본 국내의 정권교체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이같은 한일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 요소로 다가왔다.

                

덧글

  • Kael 2013/06/08 14:46 # 답글

    전두환 초기의 경제위기 때 김재익이 일본 가서 배를 쨀 때의 일인거군요...
  • 3인칭관찰자 2013/06/08 17:30 # 답글

    73년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정말로 일본이 김대중을 여러 번 살렸다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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