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국방과 안보를 들먹이는 거냐? 국제, 시사



70년대말부터 소련의 군비증강이 가속화됨으로써, 미국은 소련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방어전략 수정에 나섰다. 서유럽 나토 회원국으로 하여금 군사력 증강을 유도해낸 점이라던지, 중국의 반소(反蘇)감정을 자극시키고,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도 동아시아에서의 책임있는 역할 분담을 종용하였다. 78~79년도에 급물살을 탄 중일(中日)평화조약 체결과 미중(美中) 국교정상화로 미국-중국-일본간의 3각(角) 대소(對蘇)연합전선이 현출하자, 소련은 대응조치로 베트남과의 우호조약 체결과 아프간 내전 개입을 강행했다. 특히, 베트남과의 우호조약으로 소련은 일본에게 아주 결정적 해상로인 남지나해 캄란만(灣) 항구에 대한 해군시설 이용허가를 얻어내는 등 팽창주의 전략을 구사했으며, 중월(中越)전쟁은 중소(中蘇)분쟁을 더욱 부채질하여 전체적으로 동아시아 평화유지에 있어서 커다란 위협 요소로 등장, 3각 대소연합전선과 한국 안보의 상관관계를 밀접하게끔 만들었다.

닉슨-사토 공동성명과 역대 한일각료회담 성명에서 그래왔듯이, 일본은 자국 안보에 있어 한국의 안전과 중요성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현실적으로 실천에 옮기라는 한미(韓美) 양국의 압력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군의 '현대화'를 명분으로 차관을 제공해주는 것은 일본헌법 제9조가 전쟁을 불법화하도록 규정했다는 이유에서 커다란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으며, 집권 자민당에 대한 공격의 구실을 야당에게 마련해주기 때문이었다. 1975년 이후 인도지나 반도 공산화와 아시아에서의 미국 영향력 퇴조, 카터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계획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유신말기 한일관계는 상당히 두터워졌다. 76~78년 집권한 후쿠다(福田) 내각은 박정희 정권과의 유착설이 거론될 만큼 친한(親韓) ・우경화 성향이 농후한 스탠스를 견지했고, 비록 독도분쟁과 무역 불균형, 어로(漁擄)수역 문제를 포함한 현안들이 산적했음에도 양국은 지도부간 유대를 통해 관계회복을 도모하였다.

오히라(大平) 정권기에도 이같은 무드는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합안전보장론'을 역설하여 동북아 지역 안정, 국제정세에 능동적인 대처를 추구한 일본측의 동향에 힘입어 한일관계는 급진전된다. 1979년 4월, 2차대전 종전후 최초로 일본자위대 현역 장성(將星)의 공식 방한과 쌍방 국회의원들로 구성한 협의회가 개최되어 안보문제를 집중 토의한데 이어, 7월엔 야마시타(山下) 방위청장관의 방한도 성사됐다. 바야흐로 한일우호가 신기원을 연 발걸음을 내딛은 찰나, 박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일본의 대한(對韓)정책을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솜씨있는 전략가이자 지일파(知日派)로서 박정희는 일본 정재계 인사들과 교제해왔음은 물론, 일본 특유의 복잡한 정치과정, 인맥도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사후에 정치지도자로 부상한 신군부 수뇌들은 이제까지의 대일(對日)교섭 스타일을 배제한 채, 접근 방식도 훨씬 민족주의적 색채를 띄게 된 것이다.



                         1979년 2월 19일, 관저에서 미국대사와 대담중인 오히라 총리와 다나카(田中) 관방장관
                         오히라의 종합안전보장론은 전후(戰後) 최초로 일본외교의 능동성을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국제협조 중시의 오히라 정권을 대신한 스즈키 내각에 국내중시 ・한반도 등거리외교를 지향한 각료가 다수를 점함으로써 상황이 미묘하게 돌아갔다. 더군다나, 한국의 새로운 지도부는 일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박정희시대 대일교섭을 담당한 인사들을 축출해버리는 바람에 일본내의 유력한 인맥 파이프를 상실했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신임총리 스즈키 역시 전임자 오히라의 급서로 말미암은 공백을 메꾸고자 급거 추대된 자민당 당료로 외교에 관해선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2년동안 전개된 안보차관 협상은 한일 안보동맹의 한계와 견해차이, 미국이 일본 외교노선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외압 요인의 한계또한 여실히 드러냈다.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제2의 국교정상화 담판'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했던 안보경협 협상, 즉 자금협력의 졸업작품적 성격을 지닌 장기간의 대결은 자세히 들여다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의 대일차관 요청은 '선(先) 비공식 요청', '후(後) 공식 요청'이란 2단계 방식을 취했다. 한국측으로선 미국과의 협조를 도모해 미국 카드를 일본 경협정책의 압력 요인으로 작용케끔 계산한 것이다. 1980년 12월, 방미(訪美)중인 한국정부 특사 정호용은 공화당 레이건 당선자팀과의 담판에서 신년초에 출범할 행정부가 전두환 대통령을 외국 정상으로서 처음으로 초청해준다는 조건하에 김대중의 사형판결을 취하하는데 합의했다. 현실로 다가온 대일관계 난제와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열망, 해외로부터의 압력이 내란음모사건을 서둘러 매듭짓도록 신군부를 자극시켰고, '10.26 사태 이후 국정 혼란기의 방황을 청산, 구시대 정치의 슬픈 유산으로 과거의 악몽을 잊자'는 구호하에 김대중 문제는 일단락지어졌다. 1981년 1월 28일, 미국 방문길에 등정(登程)한 전두환 대통령은 닷새후 워싱턴 백악관에서 레이건과 대좌,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이 행사는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다시말해, 미국이 전두환 체제의 통치를 승인했다는 제스처였으며, 카터행정부 당시 존재한 동북아시아 안보공약 불확실함이 해소된 것이다. 레이건-전두환 회담에서는 54년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재확인, 주한미군 철수계획도 공식적으로 완전히 철회되었다. 여기서 전두환은 한국이 일본에 거액의 차관을 요구하고자 하니, 이를 지원해주길 바란다는 취지를 귀띔하였고, 그 근거로서 소련의 팽창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인 북한의 위협을 거론했다. 레이건은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아태(亞太)지역의 파트너로서 '신뢰할 수 있는 안전보장체제 재구축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 답변해 전두환의 제의에 동의해주었다. '동북아 안보협력 역할상의 분담'이란 측면에서 미국과 어느정도 합의를 본 한국정부는 이같은 인식을 일본측에 요청하는 수순을 밟았다. 한국측의 논리 배경엔 앞서 1월, 스즈키 일본총리가 동남아 순방시 차관을 배가할 것을 언약한데 고무된 사실도 작용했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미국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선 일본이 동북아시아 안보에 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희망하는 바입니다. 한미 양국의 공산진영에 대한 방파제 역할덕에 일본의 번영이 가능했던 것 아닙니까. 일본으로선 미국이 2개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는데 소요되는 비용 만큼이나, 한국에 대해서도 지원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일본측이 이해하도록 미국에서 설득해주길 바랍니다...'



                              1981년 2월 2일, 백악관 환영식에서 전두환을 영접하며 연설중인 레이건 대통령



1981년 3월 2일, 일본정부는 전두환의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 경축사절로 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외상을 파견, 참석시켰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 종신형 선고로 마무리된 것에 일본측의 우호적 입장을 대변하고, 한일관계를 수렴해 1980년도에 잠시 중단되었던 190억엔의 차관 지급을 제의하면서 이토 외상은 조속한 시일내로 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스즈키의 입지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한국측은 정치 ・경제적 사안보다는 안보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노신영 외무장관은 의도적으로 한반도 안보상황을 이토에게 설명하며, 양국의 안보협력이야말로 지역안정을 위해 중요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더욱이, 주영복 국방장관도 일본이 한국의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 국민총생산의 6%와 국가예산의 37%가 국방비로 할당된 점을 강조하는 등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군사균형을 유지하는데 일본이 대한 경제원조를 늘려야 한다는 논리를 구사하고 나섰다.

이에 이토 외상은 '민간 차원에서의 경협'이 진전되어야 하고, 한반도 평화는 일본과 아시아에 중요하므로 국제적 시야에서 노력하겠다며, 교과서적 답변만 내놓았을 뿐이다. 4월 22일, 노신영 외무장관은 스노베 주한 일본대사를 외무부로 호출해 향후 5년간 ODA 60억$, 수출입은행 자금 40억$, 총 1백억$의 차관을 공여해줄 것을 비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당초, 최창락 경제기획원 차관을 팀장으로 한 실무작업반이 마련하였던 경협차관 구상안은 총 50억$ 규모였다. 노신영은 이 안(案)을 한마디로 일축한 채 1백억$의 경협안 작성을 지시했고, 실무팀은 4월 17일경 ODA 60억$에 수출입은행 자금 40억$를 뼈대로하여 구체적인 요구 내용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한국의 비공식 대일차관 요청은 당장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5월 8일 레이건-스즈키 미일정상회담에서 논의되어 동북아시아 안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한반도의 평화유지 노력과 적절한 역할 분담이 바람직하다는데 합의를 보았다.

공동성명에서 스즈키 총리는 일본이 동맹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오랜 비판에 대응할 것처럼 행동했다. '적절한 역할 분담'의 바람직함을 인정한 부분은 일본이 한미 당사국과 협력, 동북아 안보를 보장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해석되어질 수 있었다. 본래, 일본의 대한차관은 어디까지나 쌍무적인 문제로 취급되었지만, 레이건과의 회담에서 스즈키는 대소(對蘇)전략에 입각해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며, 차관원조가 전체 전략의 주요한 요소로 간주될 것이라는데 이해가 일치한 듯 하였다. 그런데, 스즈키가 귀국한 직후 공동성명문에서 명시된 총리의 지역안보에 대한 이해가 달리 표현되었다고 보도되자 파문이 일었다. '동맹관계'의 해석을 둘러싸고 군비확산의 단계로 들어섰다는 일본 국내언론과 야당의 비난속에 외무성이 '동맹관계'란 안보차원에서의 관계임을 구체적으로 해명했음에도, 정작 스즈키 본인은 명확한 해석을 거부해버렸다.



                                             1981년 5월 7일, 백악관 만찬에 앞서 포즈를 취한 미일 양국정상



오히려, 스즈키는 5월 12일 전직 총리들이 참석한 자민당 고문회의에서 '동맹'이란 군사적 의미가 내포될 수 없고, 레이건과의 2차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공동성명 초안이 작성되어 자신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며, 성명을 작성한 외무성 관료들을 비난하는 식으로 발뺌하였다. 파문이 국회에까지 확산되자 이토 외상이 책임지는 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해 국내로부터 반발은 그럭저럭 수습되었지만, 레이건-스즈키 공동성명에 나타난 총리의 약속 자체가 공전(空轉)을 면하기 어려워졌다. 사실, 81년도 당시 미국은 일본에 '방위 분담'을 요구할지언정 그것을 무기삼아 강력히 압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미국의 1차적인 관심사는 폴란드와 아프가니스탄에 쏠려있었고, 내정상으로도 난제가 산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4월, 미군 핵잠수함이 일본 화물선을 들이받아 침몰시키고 승무원을 구조하지 않은 채 도주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내 여론이 들끓었다.

동맹관계 해석 시비로 말미암은 일본외상 경질과 때를 같이하여 라이샤워 전(前) 주일 미국대사의 '핵(核)무기 일본 기항' 발언, 미해군의 어망(漁網) 손상 사고까지 겹쳐 미일관계는 매우 불편해졌다. 6월 9일, 스즈키 총리는 소노다(園田) 신임외상과 다나카 통산상을 대동해 서유럽 9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귀로중 필리핀 마닐라에 들른 소노다는 아세안(ASEAN) 외상회의에 참석중인 헤이그 미(美) 국무장관과 회견했는데, 미국의 방위비 증액 요구를 일언지하 거절하면서 내외 논란이 한층 불거진다. 이토의 후임으로 기용된 소노다는 후생대신에서 직위를 옮겨오긴 했으나, 일찍이 후쿠다-제1차 오히라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역임하며 기타 각료와 관료들을 능숙히 다루고, 이전 내각의 난제였던 중국과의 평화조약을 실현시키는 등 '행동하는 대신'으로 명성이 자자한 실력파였다. 중의원 당선동기인 스즈키와는 맹우지간으로 외교에 익숙치 못한 총리의 조언자이자, 핀치히터로 등장한 셈이다.

30여년간 의정생활을 거쳐온 모사꾼 소노다는 변신과 술책에 능한데다, 퉁명스럽고도 직설적인 어조로 상대방의 의표를 종종 찔러대 외교가에서 정평이 나있었다. 이념적으로 자민당 중도좌파에 속했던 그는 한반도관(觀)에 있어 특별히 호감을 품지도 않았고, 반공전선이나 자유진영 안보동맹엔 전혀 공감한 바가 없었으며, 방위예산 증액에도 비판적인 호헌론자로 '안보경협'이라면 달가워할리 없는 입장이었다. 나중의 차관협상 과정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극언록 레이스와 모욕은 한국측의 신경을 자극해 기선을 제압하려는 정치적 술수로부터 연원한 것이었다. 여하튼, 외상으로 부임한 소노다는 1981년 5월 29일 최경록 주일대사에게 6월 4~6일에 개최하기로 예정된 한일외상회담을 당분간 연기시킬 것이라고 통보했다. 한국의 경협 요구에 대응하기 전에 동맹관계 해석 시비를 워싱턴에 해명하고, 한미 양국의 대일압박 공조를 완화시키는 것부터가 일본측의 선결과제였다.



                                              안보차관 협상을 주도한 외상 소노다 스나오(園田直, 1913~84)



1981년 7월 21일, 오타와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스즈키 총리가 '미일관계 재정립'의 명분으로 레이건과 별도의 조찬 모임을 가졌다. 이자리에서 스즈키는 지난 5월의 미일회담 이래 빚어진 불미스런 사태에 대해 사과했으며, 일본의 정치 ・경제적 책임을 이해하고, 역할 분담에 노력할 것을 다시금 약속하였다. 회담 의제는 광범위하고도 일반적인 사항이었는데, 스즈키는 한국과 관련해 각별히 언급하면서 미국에 나타낸 태도와는 다른 냉정한 면모를 드러냈다. 즉, 한국측이 비공식적으로 요청해 온 차관의 액수가 터무니없이 많고, 그 성격이 일본 국내에서 중대한 논쟁으로 비화될 수 있으니, 차관협상은 어디까지나 한일 양국이 직접 해결해야지 미국이 개입해선 안된다는 취지를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후문이다. 캐나다에서 귀국하자 스즈키는 차관협상의 '전권'을 소노다 외상에게 위임하고, 미국과의 협조사항이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실행에 옮겨질 수 없음을 명백히했다.

오타와 조찬회담을 계기로 1백억$ 안보경협은 마침내 한일관계의 정식 현안으로 부상하였다. 일본정부는 3개월간 덮어둔 한국측의 차관요청 사실을 자국 언론에 흘려보내 국내 여론의 타당성 여부를 물었으며, <아사히(朝日)> 등 유력지들은 7월 28일, 외무성의 공식 견해를 보도했다. 요약하면, '한국의 차관 요구는 근본적인 원칙에 어긋나므로 수용할 수 없고, 생활수준 향상과 복리증진을 위한 수단으로만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8월 2일, 청와대에서 가진 일본 기자단과의 대담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은 '집단적 안보공동체'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북한의 위협'이란 사안에 대해 이범석 통일원장관은 서울 강남의 지가(地價) 상승을 논거로 들었다. 즉, 강남 일대의 지가가 강북보다 3~4배 상승하고, 서울시 인구의 40% 이상이 한강 이남에 거주하는 것은 서울이 비무장지대로부터 불과 4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현실을 고려한 '안전 욕구'가 반영된 '범국민적 여론일치'의 발로라는 식이었다.

일본측은 계속해서 한국정부의 안보경협 요구와 논리에 호응할 수 없음을 강경하게 표시했다. 외무성 공식 견해가 보도된 7월 28일, 소노다 외상은 '한국측의 자유세계 방파제 역할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로인해 안보차관 요구의 권리가 있다던지, 이런 차관을 지급해야할 의무가 일본에 있다는 주장엔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으며, 한국 당국의 설명공세에 대응하고자 8월 8일, 중남미를 순방하던 도중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안보-경협분리론'을 뚜렷이 천명하였다.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회담을 마친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뜬금없이 한일관계에 대해 언급, '상호의존 입장과 위기에 처해진 한국경제를 위한 논리라면 기꺼이 응할 용의가 있지만, 군사적 배려의 경협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굉장히 오만스럽고 불쾌한 어조로 일관했던 일본 외상은 한국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고집부릴 경우, 차관협상을 아예 파토내버리겠다는 위협도 서슴없이 내비쳤다.

스즈키 총리가 오타와로 출발하기 직전인 7월 16일, 한일 양국은 연기된 외상회담을 8월 20일 동경에서 개최하기로 합의본 상태였다. 외상회담 시일을 앞두고 쌍방의 신경전이 가열되는 가운데, 8월 11일 일본 의원단과 기와라(瓦力) 관방부(副)장관이 인솔한 정무차관(次官) 대표단이 방한했다. 한국정부는 이들을 상대로 '집단적 안보공동체론'을 새삼 강조하며, ODA 60억$은 미(美)지상군 1개사단의 5년 주둔비용에 불과한고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최소한도 금액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5명의 일본 차관급 각료들은 안보경협의 정치적 결정은 국내 여론에 기반둬야 하며, 이런 상황에선 한국측의 의도가 수용되기 어렵다는 종전의 입장만 되풀이하였다. 정무차관단의 귀국보고를 받은 스즈키는 8월 14일 소노다, 미야자와 관방장관과 회동해 외상회담 준비의 막바지 점검을 확인하고, 원조 증액이란 전제엔 변함없으나, 한국의 안보 명분과 요구 액수를 철회시킨다는데 기본 목표를 설정한다.


8월 18일, 기우치 아키다네(木內昭胤)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중의원 내각위원회에서 일본정부의 원칙을 공표했다. 한일경협의 여부에 대한 사회당의 질의에 기우치는 '80년도 한국경제의 마이너스 성장과 냉해(冷害)로 인한 흉작의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경제협력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안보 방파제론은 전두환 대통령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이라고 단정지었다. 원칙의 요점은 세가지였다.


1.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방파제로서 기여하고 있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견해에 일본은 동의하지 않는다.

2. 현시점에서 한국에 대한 북한의 대규모 공격 가능성은 도무지 생각될 수 없다.

3. 안보 차원의 원조는 불가능하다. 다만, 한국민의 민생과 복리를 위한 차관이라면 고려해보겠다.


그리고, 외상회담 개최를 불과 20시간 앞둔 1981년 8월 19일 오후 5시 가스미가세키 외무성 본부의 기자간담회에서 퉁명스러운 몇마디가 튀어나온다. 외교사상 가장 모욕적인 대한극언(對韓極言)의 하나라 할 만했다.



덧글

  • 나고야거주남 2013/06/11 08:48 # 삭제 답글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 의식속에는 일본에는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도 된다는 잠재의식이 있죠. 저도 한국사람인바 그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주장인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게 문제죠.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 지는 몰라도 백년가깝게 식민지였던 인도나 그 이상이었던 인도네시아 등은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대해 우리와 일본 만큼의 계속되는 금전적 원조요구는 없습니다. 물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것도 다른 점이지만요.
  • 心月 2013/06/15 22:12 #

    역사문제나 상호 이해관계를 둘러싼 일본측의 처신이 다소 아쉬웠던 점에 불만의식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지적하신바와 같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느냐의 여부는 별개이고, 저런 도발에 임하기 앞서 상대국 정세와 내부 시스템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1차적으로 요구되건만, 당시 한국정부의 동향을 보노라면 '미국 카드'에만 의존한 느낌이 역력하덥니다. 무언가, 외교의 정석부터 잘못 인식한거죠.
  • 골든 리트리버 2013/06/11 14:41 # 답글

    안보공동체론->경협의 필요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려면 요즘 괴짜 경제학의 스티븐 레빗 교수식 방법론을 이용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그런데 80년대에는 아직 그런 방법론이 개발되지 않았고, 군사안보를 경제로 환산하는 논리에 대한 연구도 미진해서 결국 외교상 결례로까지 확대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합니다.
  • 心月 2013/06/15 22:07 #

    안보경협을 최초로 발상한 장본인이 누군가에 대해선 논의가 분분합니다. 전두환인가, 노신영인가, 차관협상에 비공식 밀사로 개입하게될 세지마 류조인가의 여부인데, 조갑제씨의 경우 '세지마설'을 제시했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 가설이지 확증된 사실은 아니라서요. 누가 구상했던 간에 그 규모와 절차상의 문제를 놓고, 우리측에서 기존 패턴과 밸런스마저 너무 무시한 채 무리수를 두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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