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몽니를 부려? 국제, 시사



각료회담 결렬로부터 닷새가 지난 1981년 9월 16일, 야스이 겐(安井謙) 전(前) 참의원의장의 인솔하에 소위 '친한파(親韓派)' 일본 국회의원 59명이 일한(日韓)의원연맹 연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이들의 방문은 안보경협 문제로 경직된 한일관계를 진전시키고, 외상회담 ・각료회담 결렬로 시무룩해진 한국측 당국자들을 달래어 전망이 불가능한 정상회담 개최 여부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의원총회 연차회의에서 일본 의원들은 비록 자국정부의 공식적 태도 범위내에서이긴 하지만, 국방비 부담의 어려움과 북한의 군사력 증강 우려에 이해를 표명했으며, 차후로 전개될 차관협상에 의원연맹이 여러가지 돌파구를 모색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제스처는 어디까지나 의원외교 차원의 사적인 표명이었을 뿐, 외교관례나 정책상으로 특별한 구속력을 지닌 것은 아닌만큼, 차관협상의 전도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민당내 친한파의 로비가 부각되기 시작할 무렵, 소노다 외상은 '안보-경협분리론'을 국제무대에 설파하여 방침을 명확히하고자 했다. 의원연맹회의가 서울에서 개최중인 9월 16일, 소노다는 포드 전(前) 대통령 기념관 준공식전과 UN총회 참석차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9월 21일, 워싱턴에서 레이건과 헤이그 등 미국정부 고위 당국자들과 회동한 소노다는 일본측의 대한(對韓)자세, 즉 안보경협 차관을 쉽사리 수락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차관협상에 대해 미국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역할 분담을 강조한데다, 2월의 한미정상회담 당시 대일(對日)압박에 동조해주리라 한국측에 언명한 터였다. 이같은 맥락에서 소노다는 전세계 각국으로의 ODA 원조를 향후 5년간 배증하겠다고 공약해 서방세계를 충족시키는 한편, 한국의 안보차관 요구는 당사국끼리만 직접 해결해야할 사안으로, 미국의 일본에 대한 태도를 보다 부드럽게 해주도록 설득했던 것이다.

10월 1일, 스즈키 총리는 중의원 질의에서 대한(對韓)경제협력이 종합안전보장론과 연계될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시사하였다. 종합안전보장론이란, 전임 오히라 정권에 의해 작성되고 발전되어온 개념이며, 일본 입장에서 자원과 에너지, 산업, 경협, 군사적 설비시설 등 사회전반에 필요한 광범위한 분야를 주제로 모든 필수적인 상황의 안전에 대비하자는데 취지가 있었다. 사실, 종합안전보장 개념내에서 일본정부의 엔차관을 해석하는 것은 굉장히 애매한 상황을 조장시키기 십상인데, 엔차관 명목을 지역안보 협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순수한 경협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즈키의 발언은 대한경협의 정확한 소지까지 밝힌 정도가 아니었고, 거기에 대한 정책적인 설명을 해준 것도 아니었다. 과연, 이틀후 스즈키는 예산위원회 답변을 통해 국방과 안보 관련 원조요청엔 응답치 않을 것임을 명언하고, 사실상 한국측의 선(先)양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한국측이 먼저 고개를 숙이면서 미궁속을 헤맨 차관협상에 돌파구가 비로소 가늠되기 시작했다. 10월 19일, 3주간의 방미(訪美)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노신영 외무장관은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일본측이 헌법상의 제약으로 군사협력이 불가능하단 사실을 전제, 엔차관은 방위비로 전용되는 것이 아니라,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에 충당될 것이라고 답변하여 안보문제를 차관협상에 연계시킬 수 없음을 정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차관협상 일지를 통틀어 한국정부의 고관대작이 공식 석상에서 안보를 언급한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그후, 일본측은 한국측에 안보문제에 대한 명확한 견해 표명을 요구해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의 영자지 <Korea Times>와의 인터뷰에서 노신영은 차관요청이 '전혀 군사적 의미에서의 요청이 아닌 경제개발을 위한 발로'였다고 밝히고, ODA만 60억$을 받아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수은차관까지 망라해 총액 60억$도 고려 가능함을 시사했다.



                 1981년 9월 18일,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의 포드 대통령 기념관 준공식전에 참석한 귀빈 대표들 
                 뒷줄에서 우측으로 밥 호프, 소노다 일본 외상, 포르티요 멕시코 대통령, 부시 부통령 부처(夫妻) 
                 트뤼도 캐나다 총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前) 프랑스 대통령, 존슨 영부인의 순으로...



노신영의 인터뷰 발언은 심오하고도,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표면상으론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그러나 명백히 기존의 입장과 명분으로부터 후퇴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국측의 이같은 변화나 양보 배경을 확실하게 알 수 없음에도, 틀림없는 것은 노신영의 방미기간 동안 미국측이 드러낸 태도에서 그 계기가 비롯되었으리란 사실이다. 9월 21일의 헤이그-소노다 미일(美日)외상회담 직후, 미국측은 한일 차관협상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며 통보했고, 소노다도 일본의 차관원조에 대한 긍정적 대응을 언명해 한일 당사국이 직접 해결한다는 의지와 워싱턴의 불개입 약속을 얻어내어 한국측이 '비장의 카드'로 중시했던 미국의 대일(對日)압박 후원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버렸다. 결국, 차관협상을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이해일치가 반영되어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측의 기본 전제, '안보-경협분리론' 명목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셈이다.

가장 어려운 난제가 1차적으로 해결됨으로써, 양국은 차관액수에 대한 협상을 재개하였다. 이 협상엔 한국정부와 일본 대장성, 외무성의 3자가 참여했는데, 한국정부와 대장성은 서로 극단적인 대립 자세를 취했고, 그때마다 일본 외무성이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차관협상은 일본정부의 내각 개편에 의해서 한층 고무적으로 진전되었다. 1981년 11월 30일, 스즈키 총리는 연례 개각(改閣)으로 소노다 외무대신의 후임에 나카소네파(中曾根派) 자민당 간사장인 사쿠라우치 요시오(櫻內義雄)를 기용했다. 일한의원연맹 부회장이자, 자민당내 친한(親韓)강경우파 모임인 청람회(靑嵐會)의 핵심 구성원이었던 사쿠라우치는 취임 연설에서 '일한 양국간 우의'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즉, 양국간의 뿌리깊은 역사적인 관계로 형제애에 기초를 둔 보다 우호적 관계의 촉진을 희망한다고 피력하면서, 일본측으로선 정부 차원에서나, 개인 차원에서나 소노다 외상기에 비해 부드럽게 타결 의사를 내비쳤다.

스즈키 총리도 본격적으로 협상에 임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12월 1일, 개각 이후의 첫 각의에서 총리와 사쿠라우치 외상은 81년도 회계년도 이내에 지급될 대한(對韓) ODA 차관의 총규모를 결정짓자고 제안하며, ODA 지급이 상당 수준으로 증액될 것이고, 차관제공의 방식이 굳이 단년도 예산노선에 입각해야만 하는 이유또한 없다고 덧붙였다. 12월 4일, 사쿠라우치는 최경록 주일대사와 회동한 자리에서 ODA 지급에 따른 실무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사쿠라우치는 81년도 예정의 190억엔(円) ODA 차관보다 거의 배(倍)가 증가한 3백억엔의 ODA 차관을 82년도내에 지급해줄 용의가 있다고 암시하는 동시에, 수은차관을 1천억엔 가량 공급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한국측의 총액 60억$ 요구에 대해 ODA는 매년 4백억엔(2억$)을 5년간 제공, 2천억엔(10억$)선에서 결말내자고 제안했으나, '개별사업에 따른 차관 지급'이란 근본적인 태도엔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전체 차관금액을 결정하기 위한 정치적 결단과 고위층 회담을 고집, 사쿠라우치안(案)을 거절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60억$ 차관은 반드시 관철되어야하며, 일본측이 차관 총액수를 일괄적으로 정해주지 않는 한, 어떠한 실무회담에도 임하지 않겠다고 역설했다. 한국의 요구를 수렴 ・검토하는 입장에서 일본측은 또다시 난관에 부딪친 협상의 타개책으로 양국 외무성 국장급 인사가 서로 대면한 '고위급 실무회담'을 제안하는 한편, 국교정상화 이래 한일 수뇌부간 네트워크로 자주 활용되어온 '비공식 밀사'를 통한 협상을 제안, 2중외교의 전략을 구사하고 나섰다. 무리한 요구만 동어반복중인 노신영 등 공식 실무진과의 대화가 가망없다고 판단, 청와대 최고위 당국자들을 직접 타격하는 편이 낫다는 계산으로 유학성 안기부장이나 서정화 내무장관과 접촉을 시도하며, 일본에서 각료 교체와 적극적인 협상안 제시로 나온 이상, 한국측도 성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압박한 것이다.


                          1982년 1월, 외무성 고위급 실무회담에서 한국측이 제출한 ODA차관 사용내역서안(案)

                          

1981년 12월 6일, 전두환 대통령은 자신의 친구인 권익현 민정당 의원을 극비리에 일본으로 파견했다. 보안 유지차 멀리 대만을 경유해 동경에 잠입한 권익현은 다나카 ・후쿠다 전(前) 총리와 나카소네 행정장관, 미야자와 관방장관, 아베(安倍) 통산상, 니카이도(二階堂) 등 일본정계 실력자들과 회동했다. 아베의 건의로 비공식 채널상 교섭방식에 합의를 본 가운데 권익현이 즉석에서 한국측 밀사로 지명되고, 일본측에선 전(前) 주한대사 스노베를 거론했다가 정계의 흑막(黑幕)이자, 이토추(伊藤忠) 상사 고문인 세지마 류조(瀬島龍三)로 결정지었다. 공식 채널상으론 해를 넘기어 1982년 1월 14일, 기우치 아키다네(木內昭胤)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이 서울에 도착해 고위급 실무회담에 참석, 한국정부의 5개년계획 ・60억$ 차관의 사용 내역과 관련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한국측은 향후 5년간 35억$의 ODA 자금과 상품차관 25억$이 종합된 경협차관의 제공안을 제시하였다.

이날 회담에서 한국측은 종전의 무조건적 'ODA 60억$ 제공안'에서 벗어나, 60억$은 일본정부의 ODA와 수은차관 모두를 의미했던 것이라고 논평하며 슬며시 태도를 바꿨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연관된 11개 프로젝트의 사업별 명세서를 제출하면서 구체적으로 해당 사안을 진술하긴 했으나, 프로젝트 논의보단 5년간 총액의 일괄결정을 희망한다는 식으로 풀어가고자 했다. 상품차관이란, 차관을 제공받는 수여국이 모든 일제(日製) 상품을 수입해 국내시장에 판매하고,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게끔 배려한 자금으로서 이 상품차관을 제공받을 경우, 한국정부는 자금동원에 유리한 조건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측은 일본측의 프로젝트별 차관방식과 재량권이 부여된 상품차관 방식을 혼합시키려 하면서, 총괄적인 지원금액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측은 상품차관 요구는 수용할 수 없고, 총합 35억$까지만 가능하다면서 선을 그었다.

일본이 제시한 35억$ 차관의 내용인즉슨, ODA가 종래 실적의 배증선인 연평균 2억$과 미해결된 81년도 제공량을 합산하면 12억$이 된다, 여기다가 수출입은행의 신용공여 20억$과 시중은행 융자 4억$을 포함시킨다는 것이었다. 한국측이 그 제안마저 거부함으로써 이틀간의 실무회담은 성과없이 폐막되고, 양측은 가까운 시일내로 외상회담을 재개한다는데 동의했지만, 기우치 국장은 귀국길에 향후의 회담들도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다고 귀띔하여 비관적 견해를 드러냈다. 원래, 고위급 실무회담에서 제출된 11개 프로젝트 명세서엔 안보 성격의 사업계획이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측이 그토록 강조해마지 않았던 안보경협 이념은 거액의 차관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방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1월 26일, 2차 실무회담을 앞두고 스즈키 총리는 국회보고 발언에서 다시 한 번 경협방침을 천명, 한국민의 복리 목적에서만 차관이 제공된다고 말했다.

1월 27일, 노신영 외무장관은 마에다(前田) 주한 일본대사와의 요담에서 2차 실무회담에 앞서 비공식 회담을 통해 총액이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일본측은 기우치 국장으로 하여금 11개 사업계획서의 보충과 현재 일본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당 성(省) ・관청간 이견(異見)을 조정하기 위해서라도, 자세한 내용 설명을 한국측에 요구하였다. 2월 16일, 사쿠라우치 외상은 중국 ・인도네시아와의 경협 케이스에 비추어 단년도 예산에 의한 연차별 계약에서 벗어나, 다차년에 걸친 복수(複數)년도 차관편성으로 한국측에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언명했다. 미야자와 관방장관과 대장성은 사쿠라우치의 복수년도 경협차관 제공 의사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했으나, 외무성 관료들을 중심으로 이를 지지하는 소리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차관공여 원칙엔 어긋나지만 선례가 아주없다는 것도 아니고, 신속한 타결과 '바람직한 차관정책'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