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소동과 데라우치 내각의 붕괴 세계사




다이쇼(大正) 7년(1918) 여름, 일본열도를 뒤흔든 '쌀[米]소동'은 정치사상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소동을 계기로 메이지(明治) 이래 정국을 독점 ・주도해온 번벌(藩閥)세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최초의 본격 정당내각이 수립되는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쌀소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주지하다시피 쌀값의 폭등이며, 1차대전 전시(戰時)경기에 수반해 인플레가 심화된데다, 공상업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전반적인 쌀 수요가 급증했던 것에 기인한다. 일례로 오사카 도지마(堂島) 시장의 현미(玄米) 1석(石) 가격변화를 보면, 1917년 연초엔 약 15엔이었던 것이 이듬해 7월엔 30엔으로, 1개월 후엔 41엔으로까지 상승했다. 더군다나, 시베리아 출병의 기정사실화로 전시수요 증가를 예상한 투기상인과 지주가 쌀을 매점했기 때문에 쌀값은 더욱 폭등하는 추세를 보였다.

물가앙등과 쌀 수요의 부족이란 악재로 말미암아 생활비의 대부분이 주식(主食)으로 충당하는 중하층 이하 민중은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군항도시인 히로시마현 구레(吳)의 경우 걸식아동이 속출하고, 노인과 유약자의 건강악화 등 인도(人道)상의 문제가 야기되는 사례가 빈번했던가 하면, 도식(徒食) ・창부(娼婦) 수단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절박한 형편에 처해진 하층민들이 많았다. 일본내 여타 지역에서도 이같은 하층민의 생활실태는 거의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나, 이들 민중은 자신의 요구를 합법적으로 표현 가능한 수단이 없었으니, 보통선거가 아직 실시되지 않았고, 노조는 거의 비합법화된 상태였으며, 정당은 민중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해주지 못했다. 생계위기에 처한 하층민들이 점차 극단적인 방향으로 내몰릴 여건은 조성된 셈이었다.

1918년 7월 23일, 도야마현 신천군(新川郡) 어진정(漁津町)의 어촌 부인(婦人)들이 '쌀 반출 반대운동'을 벌임으로써 쌀소동은 시작됐다. 8월 3일, 서수교정(西水橋町)의 부인 수백명이 싸전과 부호들의 집을 찾아가 쌀 반출의 중단과 염가 판매를 요구한데 이어, 4~5일에도 도야마만(灣) 연안 일대에서 쌀값 문제를 둘러싼 소요가 벌어졌다. 도야마의 이같은 쌀소동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태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었는데, 도야마현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소동은 오카야마현 낙합정(落合町)의 시위로 8월 8일, 정민(町民) 3백여명이 사무소 앞에 모여 쌀의 염매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틀후, 나고야에서는 1만5천~3만여명으로 추산되는 대군중이 운집해 쌀값인하를 요구하였고, 교토에서도 동칠조(東七條) ・하경(下京) 일대의 싸전이 부락민에게 급습당했다.

8월 12일, 교토시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소동기간 처음으로 군(軍)병력이 출동함으로써 사태의 심각성을 더했다. 이튿날, 오사카와 고베에선 이른 아침부터 쌀값 인하를 요구하는 시민의 대소요로 치안이 마비, 군대와 시위대간의 충돌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와카야마에서도 자산가의 기부를 요구하는 데모가 발생했으며, 마이즈루 군항에선 해군공창 직공 3천여명이 싸전을 부수는 폭동으로 번졌다. 나고야와 동경 역시 각각 수천여 인파들이 몰려 소요로 확산되는 등 8월 13일에만 내지(內地) 전역에서 총 18시(市) 40정(町) 30촌(村)이 쌀소동에 휘말렸고, 규모나 양상의 과격화면에서 최악의 위기를 경험했다. 한편, 야마구치로부터 기타규슈(北九州) 지방에 걸친 탄광지대 노동자들의 봉급증액 요구쟁의가 9월 중순경까지 지속되어 쌀소동의 또다른 국면을 양산해내기도 하였다.



                                  1918년 8월 11일, 쌀소동 시위로 전소된 고베의 스즈키 상점(鈴木商店) 본사
                                        



쌀소동이 확산되기 시작한 8월 8일부터 정부 당국은 경찰력을 동원해 검거작전에 나서는 등 사태 진화를 기도했다. 군대가 출동한 곳은 쌀소동의 전체기간 중 26부현(府縣) 31시(市) 49정(町)이었고, 병력은 5만7천여명에 달했는데 일본 역사상 민중봉기에 이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투입된 전례가 없었다. 소요지역을 보면 38시(市) 153정(町) 177촌(村)으로 참가인원은 70여만, 아오모리, 이와테, 도치키, 오키나와 4개현만 파급을 면했을 뿐이다. 군 출동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 제국시대의 일본군은 '천황의 군대'였던 만큼, 폭동 진압을 담당한 군대에 대한 반감이 황실에 대한 충성심 약화로 연결되고, 따라서 민심 이반의 가속화에 부채질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에 병력이 출동중인 전시상황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특히 그러하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판명된 사망자만 30명, 검거 ・투옥된 자는 총 8253명으로 이가운데 7776명이 기소되고, 부락민 2명과 2645명에겐 각각 사형과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외에도 많은 참가자가 재판과 심리없이 군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언론에 대해서도 제재가 가해졌다. 8월 14일, 쌀소동에 관한 신문기사의 게재 금지가 발표됐으며,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 내무대신은 재경(在京) 신문사와 통신사 간부를 초치, 신문의 '선동적이고 민중을 충동질한 행위는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그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이 노골적인 언론탄압은 곧바로 완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재경 신문사 대표 간부단체 춘추회(春秋會)는 데라우치(寺內) 내각의 보도관제 철회를 요구하는 동시에, 나아가 '내각 총사퇴'까지 주장해 당국과 대립각을 세웠다.

8월 17일, '쌀소동 기사는 공보(公報)에 의존하고, 공보 이외의 기사는 선동이 아닌 사항에 국한한다'는 단서를 달아 당국은 사실상 보도금지령을 해제시켰으나, 상황은 오히려 더욱 심각한 국면을 맞이했다. 그날, 관서와 시코쿠 등 긴키지방의 53개사(社) 기자들은 '데라우치 내각 규탄대회'를 개최하여 노골적인 반(反)정부 활동을 펼쳤고, 25일엔 오사카에서 동북지방을 제외한 86개 신문사 지방대표들이 회합해 전국 규모의 '관서기자대회'를 개최, 내각 총사직 요구를 결의한 것이다. 이윽고, 정부도 강경한 자세로 언론측에 대하여 보복조치를 가했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8월 25일자 기사를 발매 금지하는 한편, 사장 이하 편집국 간부들에게 압력을 넣어 사직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인데, 관서기자대회 결의에 포함된 백홍관일(白虹貫日) 기사가 구실로 작용되었다.

상기한 탄압대책과 병행하여 정부는 생활고로 시달린 민중들의 구제대책을 실시함으로써 여론 달래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8월 13일부터 전국에 '곡물목용령(牧用令)'이 내려지고, 국고금 1천만엔으로 저장미를 긴급구매하는 등 보다 저렴한 가격하에 쌀을 공급해주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또한, 미쓰이 ・미쓰비시 재벌로부터 각각 1백만엔씩을 비롯, 지방의 부호계급과 유력 인사한테서 기부금이란 명목으로 자금을 그러모아 염매(廉買)자금으로 충당했으니, 16일까지 내무성에 모금된 '기부금'은 280만엔, 오사카에서만 20일까지 172만엔 가량이 걷혔다고 한다. 지방의 재정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공비(公費)까지 인출해 쌀의 염매에 보태쓰도록 조치하는 등 각종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장미 50만석을 거두기로 한 목표는 훨씬 미달해 9월 6일까지 33만석이 확보되는데 그쳤다.



                                                쌀소동 당시의 내각총리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구제대책의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국은 황실에서 특별 하사한 3백만엔의 내탕금을 이용, 민중이 '천황의 성은(聖恩)'에 감복하여 스스로 소요를 자제해주도록 유도하는 전술을 채택했다. 시즈오카현 지사 훈령(訓令)에서 '쌀값 폭등에 따른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을 천황께서 깊이 안타깝게 여기시어 구원자금으로 3백만엔을 하사하셨다. ...본 취지의 시행을 철저히함으로써 성은에 보답하는 길을 강구하라'고 되어있던 것처럼 '성은'에 의한 심리효과를 기대한 셈이다. 하마마쓰(浜松)에선 '은사미(恩賜米)'를 가구마다 배포하는가 하면, 직접 현금으로 나누어준 사례도 있었으며, 교토시는 일요일을 '은사의 날'로 지정해 1되 10전(錢)의 염가에 쌀을 판매, 기타 지역에서도 분배 형태는 다르지만 '성은에 봉답(奉答)'이란 원칙으로 대민구제가 적극 추진되었다.

쌀소동이란 미증유의 대봉기와 조우해 야당 헌정회(憲政會), 언론의 공격을 받고 곤경에 처하면서도 강온 양면책을 구사해 소요 진압에 힘쓴 결과, 민중 스스로 행동을 자제한 덕분에 9월 중순에 이르면 표면적으로나마 사회 안정이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력 사용과 일시적인 구제사업으로 간신히 쌀소동을 진압한 데라우치 번벌정권에 의해 국가 통치의 청사진이 제시되길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으며, 무엇보다 수상 본인의 국정 의욕이 감퇴해감에 따라 한차례의 정변은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데라우치 수상이 각료한테도 비밀로 한 채 사임을 언급하기 시작했던 것은 쌀소동이 발발하기 한참 이전인 4월경이었다. 임기 중반부터 병치레로 건강에 자신이 없어진 처지에서 원로(元老)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추밀원고문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그런 의사를 귀띔한 것이다.

수상의 사의 표명에 야마가타는 '동사다단(同事多端)한 시기에 그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미 일신(一身)을 나라를 위해 바친 이상 살아있는 한 국사를 보살펴야 한다'며 설득하였다. 8월초에도 데라우치 수상은 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原敬)와의 대담에서 '적당한 기회가 오면 정권을 양도하고 싶다'면서 사의를 재차 암시하고 있다. 역시 이때도 야마가타의 승인을 얻지 못하였는데, 야마가타가 이토록 데라우치에게 집착한 사연엔 먼저 자신과 동향인 조슈 군벌이란 배경을 감안한 탓이었다. 그러나, 임시 외교조사회 설치로 드러났듯이 정우회 ・입헌국민당과 교제한 데라우치의 대(對)정당 접근 태도에 점차 불신을 품어오던 터였고, 그럼에도 사직을 만류한 것은 데라우치 이외의 마땅한 후계자가 자신의 직계파벌 내에선 아직 물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8월 11일, 야마가타는 개인적으로 신뢰하던 마쓰모토 고키치(松本剛吉) 의원과의 대담에서 데라우치의 실정(失政), 특히 소다 가즈에(勝田主計) 대장대신의 무능함을 개탄하면서 '내각 개조를 여러차례 주의시켰음에도, 데라우치는 듣지 않는다'며 불평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데라우치 본인은 쌀소동이 확대될 기미를 보이자 일시적이나마 사의를 철회하고 있다. 즉, 8월 17일에 야마가타의 직계 부하로서 내각의 실력자로 중시된 덴 겐지로(田健治郞) 체신대신이 사임의사를 밝히자 그를 만류하며 이르기를, '소동을 진정시키고 평정을 되찾는 책임은 현(現) 내각에 있다. 내년도 예산 편성, 시베리아 출병또한 마무리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진퇴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해선 안되며, 성직(聖職)의 진퇴는 원로[=야마가타]가 결정할 사안인데, 나로서는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야마가타계 벌족들로 구성된 데라우치 내각, '비입헌(非立憲) 내각'으로 혹평을 받았다.




데라우치의 일시적인 태도 변화엔 수상으로서 당면한 난제를 힘닿는데까지 처리하겠다는 책임감과 더불어, 명예를 회복한 연후에 물러나겠다는 의도가 깔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각내(閣內)엔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외무대신과 나카쇼지(仲小路) 농상대신처럼 내각의 존립을 주장하는 부류들도 있었다. 예컨대 고토 외상은 국회대책에 있어서 임시회의를 소집, 출병 군비와 관리증봉(增俸)의 재원 확보를 위한 증세안을 결의하여 오명(汚名)을 만회, 그 성패 여하에 따라 내각의 진퇴를 결정하더라도 늦지않다고 주장했다. 8월 27일, 덴(田) 체신상이 각의에 제출한 사회정책 성격의 제(諸)법안이 금융기관에 압박을 가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부결되고, 이틀후 '관리증봉안'만 간신히 가결됨으로써 지도력을 상실한 데라우치 내각은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쌀소동이 격화되면서부터 데라우치 내각의 전도가 가망없음을 간파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차기정권의 물밑작업이 부산해졌다. 고향 모리오카에 체재하며 쌀소동과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던 정우회 총재 하라는 미우라 고로로부터 데라우치의 정권이양설을 입수받고, 요코다(橫田) 간사장과 노다(野田) 총무에게 수상의 진의(眞意)를 파악하도록 지시, 귀경을 연기시켰다. 8월 10일의 간사회에서 정우회는 쌀값 문제와 관련해 '물가 안정을 위해 대장, 체신, 철도, 농상무 각 부처가 합심할 것을 희망한다'는 식의 교과서적 성명으로 그쳤듯이 정관 자세를 유지하였고, 하라 총재도 동북전당대회의 연기를 통고하는 등 언동을 조심히 하였다. 외교조사회 참가 이래, '준(準)여당'적 지위를 유지해온 정우회로선 집권을 위해서라도 기존 내각과 어느 정도 타협적으로 나와야만 했던 셈이다.

반면, 정우회의 경쟁야당인 헌정회는 정무조사회에서 물가 조절에 대한 정부의 실책을 비난하면서 마땅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결의하였다. 8월 14일의 '시국문제에 관한 유지(有志)연합회'를 통해 헌정회는 강력히 대(對)정부 비난성명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사흘후 '쌀소동 사건에 대한 우리당의 선언'에서 '공연히 지엽말절(枝葉末節)에 구애되어 철두철미 그 방책을 잘못, 지금의 참상을 빚게되었다. 성상(聖上)폐하께 염려를 끼쳤으니, 황송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고 발표하면서 내각을 질타한 것이다. 8월 17일~28일에 걸쳐 헌정회 간부들은 원로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기요우라 게이고(淸浦奎吾), 이치키 기토쿠로(一木喜德郞), 히라타 도스케(平田東助) 등을 예방해 의견 교환을 가지고, 정계 상층부의 지지를 얻고자 활발히 로비를 전개하였다.

북해도 지부대회, 긴키 지부연합회와 정무조사 ・농상무부회의 연합회를 포함해 헌정회는 중앙, 지방지부를 앞세워 반정부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내각 경질을 기대한 5개항 요구조건과 쌀소동의 근본 대책을 결의문에서 표현한대로 헌정회는 정우회와 노선 차이의 선을 그었는데,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임 오쿠마(大隈) 내각의 실질적 여당지위를 점했던 입장에서 정권 탈환부터 기대해보자는 심산이었고, 특히 야마가타의 공작으로 현(現) 총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가 오쿠마 후임의 수상 후보에서 밀려난 경험탓에 '반(反)야마가타'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한즉슨 야마가타 계열이자, 가토 대신 정권을 '탈취'한 데라우치에 대해서도 적대적 자세를 고수하면서 쌀소동의 비상시국에 편승, 노골적으로 내각 타도의 기치를 내건 것에 다름아닌 꼴이었다.



                                  일본 최초의 본격 정당내각을 출범시킨 입헌정우회 총재 하라 다카시(原敬)




9월 4일, 동경으로 귀환한 하라 정우회 총재는 외교조사회 회의에 앞서 데라우치 수상과 회담을 가졌다. 이자리에서 수상은 조기 퇴진을 시사, 자신의 퇴진 이유가 더이상 국가에 해(害)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야마가타의 동의를 얻었으며, 사이온지(西園寺) 후작에게도 서한으로 전했음을 말했다. 특유의 냉철한 통찰력과 신중한 자세로 정권 이양이 거론중인 내용을 공표하지 않은 채 하라는 야마가타가 도대체 어떠한 까닭에서 데라우치를 포기하고, 정당의 집권에도 격렬히 반대하지 않는지 마쓰모토 고키치로 하여금 그 의중을 떠보게 하였다. 9월 8일, 야마가타는 자신을 예방한 마쓰모토에게 신임내각의 조직문제를 두고 '거국일치가 바람직한데, 6월경 사이온지에게 수상직을 맡아달라 부탁했음에도 신병으로 거절해버렸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차기수상 후보로 '하라 다카시가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야마가타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마쓰모토에 따르면 순간 '야마가타의 심중에 있는 사람은 하라'라는 인상이 강했다 한다. 그의 직관대로 사이온지가 어렵다면 하라 이외엔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으니, 중의원 제1의 다수당[165석]이자 '준여당'으로서 기반을 다져온 정우회 총재가 물망에 오른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당 혐오증' 환자 야마가타가 하라의 집권을 염두에 두게된 것은 번벌내각으론 쌀소동 이후의 인심을 수습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이 노쇠한 유신의 원훈(元勳)은 전시 벼락경기로 일어난 사치안일의 풍조에 사회가 도취되고, 신해혁명과 러시아혁명 이래 '무식무산(無識無産)의 무리가 국기(國基)를 분별치 못하게된 세태'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여하튼 이로부터 마쓰모토는 확신을 가지고 신임 내각의 성립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다했다. 야마가타와의 대담이 있은지 사흘후, 마쓰모토가 하라를 찾아가 야마가타 방문시의 상황을 자세히 전달, 각료 후보자에 대한 의견서까지 건네주었다. 이어서 야마가타의 심복 오우라 가네다케(大浦兼武) 전(前) 내무대신과 만나 견해를 들었으며, '최근 하라씨는 연마(鍊磨)의 공적을 쌓은 까닭에 그가 나선다면 야마가타공(公)도 원조할 것'이라 단언,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9월 17일, 마쓰모토는 재차 야마가타를 방문해 오우라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사실상 동의를 얻어냈는데, '오우라의 의견을 따르려는 야마가타의 의중이 감지'된 자리였다고 한다. 대권을 장악하려는 하라의 실리적 태도가 전적으로 드러난 것이 9월 20일, 사이온지에게 진언한 세대교체론이다.


"지금, 세간에서는 사이온지가 수상을 맡지 않는다면 이 창생(蒼生)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하는 말이 자주 오가고 있습니다만, 정작 각하께서 수상직에 취임하면 반대자가 많을 것입니다. 헌정회가 주장하는 거국일치론 등은 본래 사이온지 내각을 타도하려는데서 기도했던 것이고, 야마가타가 권유하는 정헌(政憲) 양(兩) 당원 포함의 거국일치 내각을 구성한다면 실패는 틀림없으며, 이때는 다시금 관료를 바탕으로 조각(組閣)을 기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안(案)을 선택하더라도 실패가 예상되기에 권유드립니다만, 각하 지위는 원로이고, 천하(天下)창생을 좌우할 정도로까지 추앙받는 입장이라면 이 명성과 인망을 가지고 원로의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더좋은 방안은 없습니다. ...연로한 사람보단 유능하고도 새로운 인물을 천거함으로써 국가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원로이자 정계 실세로 군림해온 거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9월 21일, 데라우치가 정식으로 사표를 제출하자 사이온지에게 후임 내각을 조직하도록 대명(大命)이 강하되었다. 대명을 받은 사이온지는 이튿날 야마가타를 방문, 고사의 뜻을 전하고 하라 다카시를 수상으로 추천하였다. 대세가 불가피함을 인식하곤 있었지만, 은연중 미련이 남아있던 야마가타는 사이온지에게 2~3개월만이라도 정권을 맡은 연후에 하라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궁지에 몰린 야마가타는 하라에게 사이온지가 '출마'하게끔 촉구할 것을 부탁했고, 24일까지도 사이온지가 불응하자, 마침내 야마가타도 체념하고선 그에게 하라를 수상으로 추천해주도록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야마가타가 막판에 와서 주저한 것은 헌정회에 좋지않은 인상을 남긴 마당에 정우회 총재를 직접 수상으로 추천하기가 꽤나 부담스러운 탓이었다고 여겨진다.

9월 27일, 하라에게 대명이 내려졌고, 내각이 출범한 것은 29일이었다. 이틀만에 조각 작업이 완료된 것은 사전부터 각료 인선이 마무리되었음을 뜻하며, 군부대신과 외무대신을 제외한 전원이 정우회 당원 ・중의원 의원으로 채워져 야마가타계 벌족(閥族)들로 충만했던 데라우치 정권과 완연히 대조를 이루었다. 내각의 구성을 통해서 그 성격을 관찰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 하다. 우선 사법대신직인데, 하라 수상이 직접 겸임했다. 처음엔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郞)를 염두에 두었으나, 그가 고사하면서 다른 적임자를 물색하지 않고, 하라가 담당키로 한 것이다. 이는 정우회의 당세(黨勢)확장을 위해서라도 사법성을 장악해 둘 필요가 있다는 판단으로 사법상은 검사총장 지휘권을 소유한 만큼, 선거시(時) 정우회의 세력 신장을 도모하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외무대신엔 전(前) 주미대사이자 정통 외무관료인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를 기용했는데, 우치다는 군부대신과 더불어 유일하게 당외(黨外)로부터 발탁된 인물이지만, 하라 총재와 '문경지교(刎頸之交)'라 불리울 정도의 막역한 사이였다. 훗날 '초토외교'로 이름을 남기게 될 대중(對中)강경파 우치다의 기용에 고토 신페이는 자칫 영불(英佛) 양국의 감정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으나, 하라로선 충분히 우치다를 컨트롤할 자신감이 있었고, 주미대사 경험이 장점으로 보였다. 외무성 인사에 자신의 의향을 반영시키기 위해서라도 가장 적임자였던 것이다. 번벌을 배제하여 '관료의 정당화'를 추진시킬 요직인 내무대신엔 도코나미 다케지로(床次德二郞)가, 대장대신엔 러일전쟁 당시 외채 모집으로 수완을 입증해보인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가 각각 기용되었다.

야마모토 다쓰오(山本達雄) 농상대신도 하라와 가까운 친구였다. 선임된 이유는 '식량문제의 해결이야말로 현안의 최대 과제'이고, '이같은 소란의 시기에 안심하고 앉을 수 있는 인물은 야마모토 이외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부대신과 체신대신도 '적재적소주의' 원칙에 따라 나카하시 도쿠고로(中橋德五郞),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가 선임되었다. 다만, 군부대신은 야마가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그의 의견에 따랐다. 하라의 예상대로 야마가타는 일반적인 조각에 대해서 일체 참견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었지만, 군부대신에 한해서만큼 자신의 의견을 반영시키려 했다. 이에 따라, 야마가타는 육군대신에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해군대신에 가토 도모사부로의 유임을 희망하였고, 하라가 흔쾌히 수용함으로써 군부대신 선임문제 역시 원만히 해결되었다.



                          정우회 내각의 주요 각료들, 왼쪽부터 가토 해군상, 하라, 도코나미 내상, 우치다 외상




야마가타가 진정 신경쓰였던 것은 조각 과정이나 각원들의 구성보단 오쿠마-가토 일파의 '반(反)야마가타 책동'과 헌정회의 동향이었다. 그래서 하라는 오쿠마가 주장한 거국일치설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동시에, 헌정회의 가토 다카아키 총재에겐 세심한 배려를 함으로써 야마가타와의 불화를 해소시키고자 했다. 상술한 바대로 하라 수상은 군부대신을 제외한 각료 인선을 사적인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결정하면서도, 실력을 최대한 고려하고 있었다. 이는 정당정치를 정착시킴과 동시에 정우회의 당세 확장을 도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우회내(內) 각 파벌들간에 잠정적인 불화가 이 내각의 취약점이었지만, 그같은 내적 불안을 잘 통합하여 통일을 기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라의 존재와 권한, 뛰어난 리더십 덕택이었다.

하라 다카시 정우회 내각 출범의 도화선은 단연 쌀소동이었으며, 번벌체제의 수명이 다했음이 분명해졌다. 전국의 거의 모든지역에서 빈발한 소요사태에 집권세력인 데라우치 내각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설령 여기에 따르지 않는다해도 쌀소동은 새로운 양상의 민중봉기로서 통치형태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번벌내각은 급변하는 시세변화와 조류에 맞추어 능동적으로 대응할 능력이 부족했고, 통치의 청사진을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원로의 직계중엔 데라우치를 대신해 수상을 맡을만한 적임자도 없었다. '킹메이커' 야마가타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인정하며, 새로운 정치권력 주체로 등장한 정당의 당수에게 내각을 일임해 정국의 수습을 의뢰하게 되었다. 정당-지배세력간의 정치적 타협과 협상이 성공했기에 하라 내각의 출범이 가능해진 것이다.




                             정당정치로의 이행이 진전되어가던 다이쇼(大正) 초기 제국의회(帝國議會) 중의원 

                    


* 1885~1937년 일본의 역대내각 일람, **는 집권여당


메이지(明治)

제1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 : 1885.12.22~1888.4.30 ** 번벌내각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내각 : 1888.4.30~1889.12.24 ** 번벌내각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 잠정내각 : 1889.10.25~12.24 ** 번벌내각]
제1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내각 : 1889.12.24~1891.5.6 ** 번벌내각
제1차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내각 : 1891.5.6~1892.8.8 ** 번벌내각
제2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 : 1892.8.8~1896.9.18 ** 번벌내각, 자유당[準여당]
제2차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내각 : 1896.9.18~1898.1.12 ** 번벌내각, 진보당[準여당]
제3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 : 1898.1.12~6.30 ** 번벌내각
제1차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내각 : 1898.6.30~11.8 ** 헌정당
제2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내각 : 1898.11.8~1900.10.19 ** 번벌내각
제4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 : 1900.10.19~1901.6.2 ** 입헌정우회
제1차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 : 1901.6.2~1906.1.7 ** 번벌내각
제1차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내각 : 1906.1.7~1908.7.14 ** 입헌정우회
제2차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 : 1908.7.14~1911.8.30 ** 번벌내각
제2차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내각 : 1911.8.30~1912.12.21 ** 입헌정우회


다이쇼(大正)

제2차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내각 : 1911.8.30~1912.12.21 ** 입헌정우회
제3차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 : 1912.12.21~1913.2.20 ** 번벌내각
제1차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 : 1913.2.20~1914.4.16 ** 입헌정우회[準여당]
제2차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내각 : 1914.4.16~1916.10.9 ** 입헌동지회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내각 : 1916.10.9~1918.9.29 ** 번벌내각, 입헌정우회 ・입헌국민당[準여당]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 : 1918.9.29~1921.11.13 ** 입헌정우회[수상이 중의원 의석을 보유한 본격 정당내각]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내각 : 1921.11.13~1922.6.12 ** 입헌정우회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 내각 : 1922.6.12~1923.9.1 ** 입헌정우회[準여당]
제2차 야마토토 곤노효에 내각 : 1923.9.1~1924.1.7 ** 번벌내각
기요우라 게이고(淸浦奎吾) 내각 : 1924.1.7~6.11 ** 번벌내각
제1차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 : 1924.6.11~1925.8.2 ** 호헌3파[헌정회 ・입헌정우회 ・혁신구락부]
제2차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 : 1925.8.2~1926.1.30 ** 헌정회 단독정권[大命再降下]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 : 1926.1.30~1927.4.20 ** 헌정회


쇼와(昭和)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 : 1926.1.30~1927.4.20 ** 헌정회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 : 1927.4.20~1929.7.2 ** 입헌정우회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내각 : 1929.7.2~1931.4.14 ** 입헌민정당
제2차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 : 1931.4.14~12.13 ** 입헌민정당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내각 : 1931.12.13~1932.5.26 ** 입헌정우회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내각 : 1932.5.26~1934.7.8 ** 거국일치내각, 입헌정우회[準여당]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 : 1934.7.8~1936.3.9 ** 거국일치내각, 입헌민정당[準여당]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내각 : 1936.3.9~1937.2.2 ** 거국일치내각, 입헌민정당[準여당]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 내각 : 1937.2.2~6.4 ** 거국일치내각



덧글

  • 행인1 2013/08/23 18:01 # 답글

    어찌보면 일본판 '피의 일요일'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 검투사 2013/08/23 18:35 #

    그렇네요. 시기적으로 러시아에서는 백군과 적군이 싸우던 때고...
  • 心月 2013/08/28 23:47 #

    생계형 대중시위라 보는게 합당하겠죠.ㅇㅇ
  • 담배피는남자 2013/08/24 18:02 # 답글

    역시 배고픈건 어쩔 수 없죠.
  • 心月 2013/08/28 23:47 #

    반대로 자기 밥그릇이 풍족해지면 정치와 시사에 무관심해지는게 함정...
  • 재팔 2013/08/25 02:08 # 답글

    야마가타는 이 사건 이후로 본격 하라 다카시+다나카 기이치 체제에 집중하죠 ㅋㅋ
    두 사람도 거기에 충실히 응했던지, "공이 살아있는 한 일미전쟁은 피할 수 있다" "그 노인 영감을 다시 정계로 복귀시키자(궁중모중대사건 이후)" 라는 말들을 했다죠 ㅋ
  • 心月 2013/08/28 23:38 #

    복귀했더라도 궁중사건의 타격이 큰데다, 80대 노인이 예전만큼 지략과 판단력을 발휘했을지 의문인데요...ㅋ 다나카 기이치는 정체불명의 상주문으로 오해받기 일쑤지만, 시베리아 철병건을 둘러싼 우에하라 유사쿠와의 대립이나 제남사건 당시 신중론을 보면 재고할 여지가 있는 인물인 듯 합니다. 군 장성이면서도 말년에 정우회 총재로 추대되어 문민정치가와 유사한 행보를 걸어갔던 면모또한 그렇구요.
  • 재팔 2013/08/29 02:56 #

    그 모습이 군부 내에서 배신으로 비춰진 모양입니다. 말년을 보면 야마가타의 진정한(?) 군부 후계자 치고는 너무 훅 갔어요 ㅋ
    하라... 하라만 칼에 안 찔리면 노인은.. 노인은 ㅋㅋ
  • 心月 2013/09/11 04:40 #

    원로는 궁중내부의 일만 전담하고, 나머지 정책 결정권과 천황의 보익기관은 정당내각이 일체 통솔해야 한다->이것이야말로 하라의 기본 구상이자, 목표였으니깐요. 야마가타-하라 상호의존체제라고들 말하는데, 실제론 '너님 낙동강 오리알 신세'란 말과 다름없고, 폐렴까지 겹쳐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된 야마가타가 무력해진 이상 메이지 헌법하에서 역할이 애매모호하게 규정되었던 내각이 명실상부 권부의 핵심으로 부상한 것도 하라내각 말기의 정국 상황이었죠. 실권을 상실했다는 점에 있어선 야마가타 뿐만 아니라, 사이온지 등 기타 원로나 궁중 측근들이 자기 위상의 저하 때문에 식은땀깨나 흘렸을겁니다. 하라가 진짜 수완가이긴 수완가였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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