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청(日淸)전쟁의 포화(砲火)속에서 발언록







여러분! 이번 사건의 개요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조선사변(朝鮮事變)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일청(日淸) 양국간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우리 황상(皇上)폐하께선 이미 폐하의 깃발을 이곳 히로시마로 옮기시고, 친히 통수(統帥)의 천직(天職)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의원 제군을 군국(軍國)의 급무에 참여시키고자 임시의회를 대본영 휘하에 소집시키셨습니다. 본(本) 대신은 폐하를 받들어야할 직무에 따라, 양국간에 결국 이러한 시국(時局)이 발생하게된 전말을 간략하나마 말씀드릴 영광을 얻었습니다. 무릇, 조선은 일찍이 우리 제국(帝國, 日本)이 솔선하여 그 독립을 인정하고,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 열국(列國)에 소개해주었습니다. 이후 수년간, 각국도 일제히 자주 대등한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점차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의 길을 열었습니다.

조선은 우리와 갈대처럼 가늘고 좁은 강을 뜻하는 '일위대수(一葦帶水)'와 같이 인접한 거리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조선의 치세와 난세, 융성과 쇠퇴는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국력은 미약하여 국세(國勢)가 떨쳐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 또한 화목하지 못하고, 자주 내란을 빚어 상하(上下)가 서로 옥신각신합니다. 그리고, 정부의 힘으로는 이를 진압치 못하여 그 화근이 때로는 거류중인 외국인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정황은 이처럼 날로 쇠퇴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조선의 자멸을 마냥 방치할 수 없어 마지못해 솔선하여 독립을 확인, 열국에 선례를 일깨우겠다는 초지(初志)를 완수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우리 제국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단연코 조선의 독립을 견고히 다짐으로써, 동양 평화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신(維新) 이후로 중흥(中興)의 원대한 계획에 의거해 내부로는 문화를 베풀고, 외부로는 서로 의사나 정보를 주고받아 오로지 동양의 평화를 중시하며 더불어 문명국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했습니다. 이에, 우리나라는 조선에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러한 방침으로 임했고, 청국(淸國)에 대해서도 정성을 피력하며 정의를 실행하는 교린(交隣)을 중시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우리는 청국과 공동으로 천진(天津)조약의 정신에 따라 함께 동일한 지위에 서서 조선의 유약함과 어려움을 도우면서, 동양평화를 유지할 책임을 양국간에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청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쓸데없는 구실로 우리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부득이 독자적인 힘으로 조선에 악정(惡政)의 개혁을 권유하였고, 조선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청국은 음으로 양으로 모든 술책들을 동원하여 이를 방해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엔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형세로 빠졌습니다. 본 대신은 이자리에서 금번 시국에 관한 양국간의 왕복 공문(公文)을 여러분께 제출함으로써 그 전말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당초, 동학당(東學黨)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청국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 이홍장(李鴻章)이 동경주재 청국 전권공사(全權公使) 앞으로 보낸 출병(出兵)에 관한 훈령(訓令)을 먼저 여러분께 읽어드리겠습니다. 공문은 한어(漢語)로 되어있었습니다만,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서한으로 말씀드립니다. 이번에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 본 사신(使臣)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가 왔습니다.

광서(光緖)11년(1885), 청일 양국이 협의 ・결정한 조약엔 향후 조선에서 혹여 변란이 일어나 청국에서 파병해야할 경우가 발생하면, 당연히 먼저 공문으로 조회하기로 되어있으며, 사건이 진정되면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고 더이상 남아 방비하지 않기로 되어있다. 본 대신이 방금, 조선 정부로부터 온 문서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전라도 관할하의 백성들은 습성이 흉하고 사나워서 동학교비(敎匪)와 규합해 무리를 지어 현읍(縣邑)을 공략하고, 또한 북쪽에 있는 전주를 함락시켰다 한다. 이미 잘 훈련된 군대를 보내어 토벌케 하였지만 전세가 불리한데다, 만약 이들의 극심한 만연을 그대로 방치해 오래 끌게되면 우리 청국에도 우환을 많이 끼치게되리라 말했다. 그러나, 임오(壬午) ・갑신(甲申) 두차례의 내란 당시에도 중국 군대에 의뢰해 이를 대신 물리치고 진정시킨 전례도 있으므로, 그 전례에 따라 얼마간의 군대를 참작, 파견하여 속히 와서 토벌을 대신해달라고 (조선측에서) 간청해왔다.

다만, 사나운 무리들을 소멸시킨 연후엔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고, 감히 계속 남아서 방비해줄 것을 간청하여 천병(天兵, 淸軍)을 오랫동안 나라밖에서 고생토록 만들지 않겠다고 한다. 본 대신은 이를 보건대, 그들의 간곡한 사정이 절박할 뿐만 아니라, 군대를 파견해 원조한 것은 우리 조정이 속방(屬邦)을 보호하는 예로부터의 관례이므로, 상주(上奏)를 올리고 유지(諭旨)를 받들어 직례제독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정예군을 선발, 대동하여 조선의 전라도 ・충청도 지방 일대로 시급히 달려가 시기를 보아 폭도들의 성채를 공략하고, 이를 박멸시켜 힘을 다해 속방의 안이 안정되게끔 했으며, 조선내에서 무역하는 각국 사람들이 그 생업의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변란이 평정되는대로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고, 계속 머물러 방비토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 (천진)조약에 따라 긴급히 문서를 보내 조회할 생각으로 귀(貴) 대신에게 이 전보를 보내오니, 조속히 일본 외무성에 조회하길 바란다.

이상과 같이 본국으로부터 훈령이 내려왔으므로, 본 사신은 이를 귀 대신께 조회드리옵니다.

광서20년 5월 3일(양력 6월 7일),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汪鳳藻)

일본국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각하(閣下)



이같은 조회에 대해 우리 정부는 왕봉조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했습니다.



서신으로 삼가 말씀드립니다. 금번 귀국 정부가 조선에 파병하는데 대해 메이지(明治)18년 4월 18일, 일청 양국정부 사이에 체결된 조약문 제3항에 의거, 공문 조회 서한을 금일(今日) 보내주셔서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귀 서한중에 '보호 속방'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이 보이는 바, 일본정부로선 지금까지 조선을 귀국의 속국이라고 인정했던 바가 없으므로 여기서 회답을 겸해 언명해두는 바입니다. 본 대신은 이에 거듭 경의를 표합니다.

메이지27년 6월 7일,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汪鳳藻) 각하(閣下)



정부는 여기에 이어서 우리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는 것에 대하여 북경주재 우리 대리공사(代理公使)를 통해 청국의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발송했습니다.



서신으로 삼가 말씀드립니다. 조선에 현재 중대한 변란이 일어나 우리나라가 파병할 필요가 있게되어 일본정부는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고자 하니, 메이지18년 4월 18일, 양국정부에서 체결한 조약의 명문(明文)에 따라 청국정부에 공문으로 조회하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로부터 전훈을 받아 조회하는 바입니다.

메이지27년 6월 7일, 일본국 임시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청국 총리각국사무대신 왕봉조(汪鳳藻) 어중(御中)



다음엔 총리아문으로부터 우리의 출병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는 공문이 왔습니다. 총리아문 왕봉조 대신은 다음과 같은 공문을 (북경주재) 우리 공사관으로 보내왔습니다.



서한으로 말씀드립니다. 이달 3일(양력 6월 7일), 귀(貴) 서한에서 조선에 현재 변란이 있어 약간의 병사를 파견해야 하므로 양국 조약에 따라 파병조치를 서면으로 조회하라는 귀국정부의 훈령을 받았다는 취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청국이 조선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한 것은 그 난민(亂民, 東學黨)을 토벌하려는 것을 원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은 이전부터 속방을 보호하는 관례가 있었고, 또한 전적으로 조선 내지(內地)의 난민을 토벌하기 위한 것으로 평정되는대로 바로 철병할 것입니다. 현재, 인천과 부산 각 항구의 정황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통상지이기 때문에 보호를 위해 잠시 군함을 머무르도록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귀국에서 파병하는 것은 전적으로 공사관과 영사관 및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오니, 말할 것도 없이 다수의 병사를 파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조선에서 요구한 적도 없으므로 조선 내지로 진입해 결코 경악과 의심을 야기치 않도록 해주시고, 우리 병사와 만나게 되면 언어가 통하지 않고, 군례(軍禮)가 달라 혹여 생각지도 않던 돌발 사고라도 생길 우려마저 있으므로, 위와 같은 사정을 귀하께서 귀국정부에 전보로 말씀을 전달해주시길 희망하는 바입니다.

이상, 회답하는 바입니다.

광서20년 5월 5일(양력 6월 9일), 청국 총리각국사무대신 왕봉조(汪鳳藻)

일본국 임시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귀하(貴下)



이에 대해 우리 대리공사는 정부의 훈령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회답했습니다.



서한으로 삼가 말씀드립니다. 이달 9일에 보내주신 서한을 볼 때, 귀국이 조선에 파병한 것은 종래 속방을 보호하는 관례에 있는 것이고, 일본이 다수의 병력을 파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결단코 조선 내륙으로 진입해선 안된다는 뜻을 전해왔습니다. 본관은 신속하게 그 뜻을 우리 정부에 전보해두었는바, 지금 우리 정부의 회답전보를 받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우리 일본정부는 아직까지 조선이 귀국의 속방이란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번에 조선에 파병한 것은 제물포조약에 의거한 것이고, 출병 절차는 천진조약에 의거 조치한 것이다.

또한, 일본정부가 파견하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은 일본정부 스스로 결정할 일이며, 그 행동의 여하에 있어서도 갈 필요가 없는 곳이라면 물론 가지 않겠지만, 남의 제지를 받아야 할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또한, 양국 군대가 조우해 언어불통과 군대의 규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 혹여 생각지도 않던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데 대해선 일본 병사는 규율을 엄히 지키므로, 귀국 병사와 조우하더라도 까닭없이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며, 이는 우리 정부가 굳게 믿는 바이다. 따라서 귀국 정부도 이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회답하는 바입니다.

메이지27년 6월 12일, 일본국 임시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청국 총리각국사무대신 왕봉조(汪鳳藻) 어중(御中)



그동안 양국간에는 담판도 이루어졌습니다. 동경주재 청국공사와 우리 외무대신[=陸奧宗光]과의 담판도 있었고, 청국공사가 본(本) 대신을 내방(來訪)해왔을때 우리 정부의 의사를 충분히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정부는 다음과 같은 서한을 통해 청국에 새로운 제안을 전달했습니다.



서한으로 말씀드립니다. 말씀드릴 것은 조선에서의 현재의 사변과 선후(先後)의 대책에 관하여 어제 면담했을때, 일본정부의 제안으로써 귀국정부와 협의한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조선사변에 관하여 일청 양국이 서로 합심해 조속히 난민 진압에 종사할 것.

* 난민을 평정한 후엔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하기 위해 일청 양국에서 상설위원 수명을 조선으로 파견, 이하의 사항을 목적으로 그 조사에 종사토록 할 것.

一. 재정을 조사할 것.

一. 중앙정부와 지방관리를 도태시킬 것.

一. 필요한 경비병을 설치시켜 국내의 안녕을 유지토록 할 것.


이상, 만약을 위해 재차 말씀드리며 본 대신은 이에 거듭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메이지27년 6월 17일,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汪鳳藻) 각하(閣下)



이에 대하여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는 본국정부의 훈령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회답해왔습니다.



서한으로 말씀드립니다. 이번에 본 대신이 우리 정부가 전문으로 지시한 것을 접수해보니, 귀(貴) 정부가 협의하자 했던 조선사변과 사후 처리문제에 대해선 이미 충분한 고려를 하고, 이하와 같이 회답드립니다.


一. 조선의 변란은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이제는 청국병(淸國兵)이 이를 대신 토벌할 번거로움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양국이 공동으로 토벌하자는 설(說)은 자연히 쓸데없는 논의가 되었다.

一. ...조선 스스로가 정치개혁을 시행토록 하는데 그치고, 중국으로선 결코 그 내정에 간여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본디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인정했으므로, 당연히 그 내정에 간여할 권리가 없다.

一. 변란 평정후, 철병하는 것은 광서11년 조약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지금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상, 이미 귀 대신을 면회하여 말씀드렸으나 재차 문서로 조회하오니, 번거롭더라도 조회하시길 바랍니다.

광서20년 5월 18일(양력 6월 22일),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汪鳳藻)

일본국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각하(閣下)



이에 대하여 우리 외무대신은 다음과 같이 조회했습니다.



서한으로 말씀드립니다. 각하께서는 귀국정부의 훈령에 따라 조선변란의 진정과 사후 수습방안에 관한 일본정부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음력 메이지27년 5월 18일자 서한으로 전달한 것은 모두 잘 알았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조선의 현재 정세를 고찰하는데 귀 정부와 의견을 같이할 수 없음은 우리 정부가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이것을 기왕의 사건에서 더듬어 볼 때, 조선반도는 붕당(朋黨)으로 인한 내분과 폭동의 온상이 되어버린 참상을 드러냈고, 이같은 사변이 자주 발생한 까닭은 독립국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요소를 결여한데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 확신하기에 충분합니다. 강토(疆土)의 근접과 무역의 중요성을 감안하더라도, 조선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는 심히 긴요하고도 중대하기 때문에 조선내의 참상과 비관적인 상황을 수수방관하기 어렵습니다.

정세가 이와같이 되어가는데, 일본정부가 중간에서 이를 돌아보지 않으면 단순히 평소 조선에 대한 교린의 우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자위책에도 위배라는 책망을 모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정부에서 조선의 안녕과 질서를 구제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시행할 필요성은 이미 전술한 이유로서, 다시 이것을 간과할 수 없는 지금으로선 의심하여 망설이다 시행하지 않고, 시일을 헛되이 보내면 조선 변란은 점차 더 오래도록 만연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병은 반드시 장래 조선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 정치적 도의에 마땅함을 보증하기 충분한 사후수습책을 협정하지 않으면 결행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일본정부가 이같이 철병을 쉽사리 결행할 수 없는 것은 천진조약의 정신에 의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후수습을 잘하는 득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 대신이 이처럼 흉금없이 진실을 토로하는 것이 비록, 귀국정부의 의견에 상치되더라도 일본정부는 결단코 조선 주둔군의 철수를 명령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상, 회답과 동시에 본 대신은 거듭 경의를 표합니다.

메이지27년 6월 22일,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汪鳳藻) 각하(閣下)



그동인 수일에 걸쳐 쌍방은 평화의 국면에 합의하고자 노력했습니다만, 결국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총리아문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발송했습니다.



서간으로써 말씀드립니다. 메이지27년 7월 9일, 귀 아문(衙門)께서 조선사건에 대하여 면담할 때, 귀 왕(汪)대신이 진술한 사연을 모두 당일로 우리 외무대신에게 전보해두었는데 지금 우리 정부로부터 전보가 도달했는바, '조선에 자주 변란이 생기는 것은 그 내정이 문란한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로서는 조선에서 일청 양국의 관계가 항상 긴요한 것이므로 지금 그나라로 하여금 내정을 개혁해 변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일청 양국이 전력을 다하여 협동, 이를 행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이같은 의사를 청국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청국정부는 이 제의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철군하는 한가지 일만을 바라니 실로 우리 정부가 매우 의아하게 여기는 바이다. 또한, 그후 북경주재 영국공사는 우의를 중히 여기어 일청 양국으로 하여금 타협의 결말을 맺도록 하고자 애써 조정한 모양이지만, 청국정부는 여전히 철병만 주장하여 티끌만큼도 우리 정부의 의사에 응할 기색이 없다. 판단하건대, 청국정부는 속셈이 있어 일을 벌여놓는 것이다. 이는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금후 예상치 못한 사변이 발생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상의 뜻을 전달해왔으므로, 위의 전보 번역문을 첨부하여 이에 말씀드립니다.

메이지27년 7월 14일, 일본국 임시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청국 총리각국사무대신 왕봉조(汪鳳藻) 어중(御中)



양국간 조회문은 방금 낭독한 바와 같이, 표면상 왕복을 거듭했습니다. 이밖에도 이후 상황에서 쌍방 공사의 철수에 관한 왕복문도 있습니다만, 여러분께 각별히 모두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생략하겠습니다. 청국의 무례와 오만이 점차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청국은 조선에 대해 한편으론 속방을 주장하고, 또 한편으론 자주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타국의 간섭을 거부한 채 그 일을 전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의도는 조선 내란의 계기에 편승해 자국의 권세를 확충하고, 조금이나마 부진함을 만회하려는 겁니다. 조선의 자립을 도울 마음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독립을 빼앗아 병탄하려는 겁니다. 동학의 무리가 평정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진정되었다며 우리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면서 시기를 늦추어 점차 자국의 군대를 증파시켜 위협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천진조약의 정신을 무시하고, 음으로 조선을 사주하여 우리가 제안한 호의적인 권고를 거절하도록 획책하였습니다. 그 명백한 증거는 매우 많습니다만, 이자리에서 누차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몇몇 강대국은 호의를 품고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시도하여 양국간에 의견을 조율하려 했음에도, 청국은 끝내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우리 정부는 대리공사를 통하여 청국이 사건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어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고(變故)가 생기더라도, 그것은 모두 청국의 책임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청국은 스스로 우리의 호의를 거절하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전쟁의 직접적인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전(交戰)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선전(宣戰)의 조칙(詔勅)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후, 우리는 위로는 천황폐하의 위덕(威德)과 아래로는 정예 육해군의 충무(忠武)에 힘입어 연이어 전첩(戰捷)을 거두고 있습니다. 본 대신은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여러분과 더불어 국가를 위해 소리높여 축하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최근의 정국에 맞이해 폐하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상하가 모두 일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분의 분발과 협조의 임무를 다해주시리라 본 대신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육군은 장기간 객지에서 온갖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성환(成歡)과 평양(平壤) 등지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해군은 머나먼 바다에서 풍랑의 위험을 넘어 풍도(豊島)와 황해(黃海)에서 포연(砲煙)과 빗발치는 탄환을 뚫고, 승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본 대신은 여러분과 더불어 이를 기뻐하고, 축하해마지 않습니다...


- 1894년 10월 19~20일, 임시국회에서 대청(對淸)전쟁 발발 경위를 설명하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덧글

  • Niveus 2013/08/27 23:32 # 답글

    결국 필드는 우린데 괴랄하게 당사자는 씹고서 치고받고.
    동학은 참 타이밍상 애매한 상황에 가까워보입니다.
    ...베트남이 프랑스에 식민지가 되기 직전의 북부반란같은 참 타이밍이 더러웠다 싶은;;
    청군이 개털리지 않았다면 + 러일전쟁에서 웃기지도 않게 러시아가 지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도 조금은 달랐을텐데말입니다. 어찌 보면 나라의 운명이란것도 운빨이란게 만만치 않게 작용하는것같습니다.
  • 心月 2013/08/28 18:43 #

    해체 모드로 접어든 조선사회의 내부적 모순, 지배층의 탐학이 당대의 조류를 헤쳐나가는데 있어서 악재였고, 설령 운빨이 따라주었다 할지라도 조선이 과연 자정능력을 갖추고 국세를 유지시켜갈 수 있었을까요?

    솔직히 저는 그 가능성에 굉장히 회의적인 입장인지라...;;
  • Niveus 2013/08/28 19:55 #

    사실 조선의 운명은 순조때 이미 기울었고 대원군이 쇄국하기 시작할때 끝이났다고 봅니다.
    역사에 If라는건 없겠지만 정도때 실학을 중심으로 해서 개항을 시작했다던지 대원군이 쇄국을 하지 않고 개항을 했다면 조금은 역사의 흐름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라지만 저도 그렇게까지 희망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뭐 간단하죠. 왕조국가로서 조선이 택한 길은 왕조의 존속이었고 그 시점에서 이미 다 끝났다고봅니다.
    저 위의 가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아마 식민지까진 안가고 태국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군요.

    애시당초 운빨이 안좋았다 라는게 맞긴 한듯합니다. 일본입장에서도 조선침략은 솔까말 남는 장사였나 라면 정말 애매하니말이죠. 어쩌다보니 어라? 하게 된게 아닐까 싶어지기까지합니다.
    너무 쉽게 쉽게 일이 풀리다보니 얼떨결에 다 집어삼키게 되어버린게 아닌가 -_-;;;
  • 재팔 2013/08/29 14:49 #

    저 시대쯤 되면 기존의 조공체계 대신에 진짜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체제를 청에서도 생각했다고 하니, 이래도 그렇고 저래도 그렇고.
  • fatman 2013/09/01 10:59 # 삭제

    - 19세기 말 조선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은 20세기 후반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유사한 것 같네요. 객관적으로 보면 전자, 후자 모두 부정적인데, 실제 결과는 조선는 망했고, 대한민국은 21세기까지 살아남았으니...
  • gmmk11 2013/08/28 00:45 # 삭제 답글

    이홍장도 일베충이었네요.
  • 킹오파 2013/08/28 02:10 # 답글

    타이완만 먹었어도 일본에게는 이득이었을텐데...

    대손해인 조선을 병합하고(딱히 자원도 없고 농업 생산량도 많지 않는 지역을 합병하여 중국과 국경을 맞대다니..대관절 무엇 때문에...) 만주를 병합(이건 이득이긴 한데 나중에 중국에 동화될텐데?) 그것도 모자라 중국을 먹을려고 하고(진정으로 일본인들은 스스로 중국에 제대로 동화되고 싶어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않나 시포요.) 제 정신이 아니라고 봄.
  • 心月 2013/08/28 18:35 #

    아닌게 아니라, 일본 내지 설탕수요의 90%를 담당한 공급처로서 대만은 '벌이가 되는 섬'이라기도 했지, 조선은 군대 주둔비용부터 넘사벽에 자원적 가치마저 거의 종범이고... 러시아혁명 이후 적화물결을 차단할 방파제로 중시한건 이해한다쳐도, 적화차단-방파제론의 만몽진출 확대해석(이시하라 간지)이 만주사변으로 연결된 것을 돌이켜볼때, 조선병합의 나비효과가 거기까지 이르렀을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치 못했을 듯.

    요동반도, 만철도 필요없고 그냥 러일전쟁 직전에 39도선 분할론 받아들여 조선은 적당히 완충지대로 놔둔채 국내 내정개혁과 대만경영에 올인할 노릇이지, 어찌보면 메이지시대 일본의 역량상 한반도-만주통치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무리수에 가까웠으니 말이죠. 그렇게됐다면 러일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테고, 외교정책이 대륙정세에 종속되버리는 일도 모면했을련지 모르겠지만, 헌데 이미 지나가버린걸 탓해봤자...;;
  • 골든 리트리버 2013/08/28 21:19 #

    39도선 이북을 완충지대로 하자는 로젠의 1903년 제안은 당시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및 해군기지 건설, 그리고 일본의 공동 개항장으로 전환 요구를 금지하고 일본인의 진입도 금지함으로써 물건너갔다고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 골든 리트리버 2013/08/29 15:01 # 답글

    그런데 청 측의 공문 내용 중에서

    "군대를 파견해 원조한 것은 우리 조정이 속방(屬邦)을 보호하는 예로부터의 관례이므로",

    "직례제독 섭지초(葉志超)로 하여금 정예군을 선발, 대동하여 조선의 전라도 ・충청도 지방 일대로 시급히 달려가 시기를 보아 폭도들의 성채를 공략하고, 이를 박멸시켜 힘을 다해 속방의 안이 안정되게끔 했으며"

    의 <속방> 드립에 대해서 어떤 반감을 느끼거나, 1882년 이후 조선이 서양 각국과 수교한 후에도, 청나라가 조선이 독립국임을 계속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품는 사람이 없는 건 신기한 일입니다.

    조선이 중화 조공질서를 탈피하지 못한다면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 선에 속한다고 봅니다만..
  • 킹오파 2013/08/29 15:26 # 답글

    골든 리트리버// 우선 책봉과 조공은 별개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책봉을 받지 않아도 조공은 가능하단 말이죠. 중화 조공 질서가 아니라 중화 책봉 질서입니다.

    조공은 그냥 무역인데 책봉을 받으면 속국이죠.

    실제로 일본이 역대 중국왕조와 그런 식으로 해서 무역을 했고(뭐 책봉 받은 적도 있지만 이미 수백년도 더 전에 책봉 질서에서 탈피..) 로마, 아라비아, 근대 이후 유럽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 경우 쌍방의 무역이죠.

    그러나 책봉이라는 것은 중국의 신하가 되어 중국의 관작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것을 수여받는 순간 아무리 그 나라가 자치권을 가지고 있고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하더라도 중화문명권에 포섭되어 그 밑의 부속국으로 들어간 것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한국은 역사적으로 아주 오랜기간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결론이 나오죠.

    내가 일본인이라는 가정 하에 조선병합을 회의적으로 보는게 병합해도 이득이 없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던 나라를 병합하여 하나의 국가인 일본으로 통합을 이룰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있느냐?" 라고 의심할 겁니다.

    오랜기간 계속 쭉 저 관계를 유지했다면 사실상 중국의 변방지역이죠. 자치권만 있는....
    내가 일본인이라면 저 중국의 변방을 과연 잘 병합할지 의심할수 밖에 없을듯...
  • 골든 리트리버 2013/08/29 15:36 #

    저의 논지는 전혀 다른 방향입니다만?

    제 얘기는 일본의 조선 병합에 관련된 수월성 문제가 아니라, 청일전쟁 당시까지 조선은 스스로 외교상의 자주 독립국이라고 내세울 수 없었다는 얘기죠.

    외교권만 일본에 내준 1905년의 제2차 한일 협약~내정에도 간섭하기시작한 1907년의 제3차 한일 협약 사이에 일본의 보호국이었던 조선의 지위는, 1884~1894년 사이 조선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보이며, 1905년의 을사조약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왜 1894년 이전의 상태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이제껏 마지막에 승리한 일본만 조선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세력으로 겨냥할 뿐, 청나라도 한국의 자주독립을 저해하고 군대를 투입하여 가로막는 저항세력이었다는 사실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겁니다.
  • 킹오파 2013/08/29 16:03 #

    저두 그건 궁금합니다만... 제 생각에 뭐 오랜 기간 중국의 변방국이라는걸 사람들이 말은 안 할뿐이지 암묵적으로 인정했는데 그보다 한 수 아래인 국가의 속국이 되니까 사람들이 반발하는 거겠지요.

    세계 최강국의 속국으로 사는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왠 신흥 강호국의 속국이 되었으니 반발이 커졌을뿐... 일본이 세계 최강국이었다면 이리 반발이 크지 않을것이라고 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봐도 중국의 속국임을 자랑스러워 했는데 뭐... 누구나 다 중국의 변방이라고 생각할꺼에요. 단지 그 대상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으니 일본에 반감을 품은 거겠죠.

    개인적으로 일본의 조선 병합을 중국의 변방 지역에서 일본의 변방 지역으로 주인만 바뀌었다고 봅니다만...
  • 골든 리트리버 2013/08/29 19:45 #

    여기서 조선의 대청 조공책봉관계는 1884-1894년과 1882년 이전의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연구결과가 많습니다. 종래의 조공국들인 류큐, 베트남 등이 모두 이탈하고 조선만이 남게 되는 과정에서, 청나라가 1882년부터 조선의 외정과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해 나가죠.

    여기에는 1884년의 갑신정변이 결정적인 계기로서 이로써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군사력을 동원해 개입할 권리를-무력으로-인정받게 됩니다. 이 시기 청의 조선 정책은 2차적 제국주의 secondary imperialism/비공식적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 등으로 규정되고 있죠.

    1882년 이전의 조선은 만국공법상의 속국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의 대청'속국'은 본래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청 측이 미국에게 속국임을 인정받으려다 실패한 시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서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시작된 거죠.
  • 골든 리트리버 2013/08/29 19:51 #

    그리고 상대적인 약소국으로서, 필요하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강대국과 연합할 수도 있고, 안보동맹 관계를 수립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간 관계를 제멋대로 서열화해놓고, 서열이 높은 A강대국에게 종속을 인정하고 서열이 낮은(?) B국을 멸시하는 호가호위란 얼마나 가증스러운 행태입니까?

    청일전쟁으로 힘의 차이를 국가간 서열 차이로 인식하고 서열 놀이하는 의존 정서를 벗어버리게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을사조약과 이전의 청국에 대한 반응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 킹오파 2013/08/30 00:21 #

    임진 왜란중에 일본은 결정적인 사안을 다룰 때는 항상 명과 직접 대화하고자 했죠. 누르하치는 전쟁 중 참전 의사를 두차례 밝혔지만 한양이 아닌 요동 도사를 통해 그 의사를 전달했으며 조선 역시 요동 도사를 통해 그 사실을 들었습니다.

    국제사회는 조선을 중국의 일부로 생각했습니다. 외국에서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 그런 논문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자치권을 가진 지역이라는 거죠. 외교를 하지 못하는데요. 비유를 들자면 현재 중국내 조선족 자치구와 같습니다. 조선족 자치구는 자치권이 있어 중앙 정부인 중국 정부가 원칙으로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게 안되는 거지만 조선족 자치구에서는 외교권 같은 것을 행사하지 못하죠.

    즉 사실상 중국의 변방 지역을 그것도 농업 생산량도 자원도 심월님 말씀대로 종범인 지역을 병합한다.... 후에 중국이 부강해지면... 그 땅을 회복하려 할지 모르는데....

    일본 스스로도 내정 문제로 골 아플텐데 중국과 충돌할려 하는건 무슨 심보인지?

    누가 봐도 답이 안 나오죠. 그냥 레알 무뇌였습니다.
    뇌가 있다면 그런 저능아 스러운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죠.
  • 골든 리트리버 2013/08/30 00:28 #

    고작 임란 중 일본의 협상 행태를 갖고 중국의 속국설을 주장한다면, 한국전쟁 휴전 협상에서 조인을 거부했던 한국은 주권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논리와 동일하군요. 임진왜란 중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치열하게 싸우고 아직 만주조차 통합하지 못하고 후금을 건국하기도 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도사를 통한 간접 서신 전달이외에 어떤 지위가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게다가 외교권도 없다는 조선이 어떻게 일본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애시당초 청국에서 조선과의 관계를 묘사할 때 쓰는 "기미"는 단순히 지속적인 평화유지/강화 관계를 뜻하며, 속국이 아닌 외국으로 인식했었습니다. 청국에서 조선을 국제법상 속국으로 처분하려고 한 것은 앞서 말한 흔들리는 조공관계를 지키려는 의도, 그리고 이전과 달리 만주족 관료가 아닌 한족 관료가 외교를 담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 때도 이홍장이 조선은 중국의 속국임을 명기하려고 시도했지만, 미국이 거절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vassal state인가? 라는 의문이 퍼져있기는 했지만, 서양식 속국은 원래 아니었다는 사실은 인정된 거죠.

    그리고 외국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Kirk W, Larsen(2008) 등의 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이 계속 조선은 자주독립국이며 중국의 속방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 골든 리트리버 2013/08/30 00:34 #

    청국이 조선의 내정과 외교권을 간섭하려면 그만한 실력이 있어야 하고, 1882년 임오군란/1884년 갑신정변 때 동원한 군사력이 그 실력의 실체입니다. 1882년 이후에나 청국도 조선을 속국화하려고 했을 뿐, 이전은 조공국tributary state일 뿐 속국vassal state는 아니라는 것은, Larsen이나 오카다 히데히로 등 해외에서도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 킹오파 2013/08/30 01:05 #

    일본이야 조선을 자신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의 속방임을 부정한 것이고요.

    대영박물관에 중국의 속국이라고 나온거 봐도 답이 나오죠.
    그런 설을 지지하는건 소수이니까 정설을 따른 것이지요.

    외국의 교과서들은 중국의 속국이라고 자주 나오는데 님은 그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1831년 조선을 방문했던 칼 귀츨라프 선교사는 이런 내용을 남겼죠.

    그는 여행기에서 “조선왕조는 중국의 속국이어서 황제의 윤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까지 외국인들과 교류한 적이 없으니 이제 와서 새삼 교류를 시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래서 우리는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외교 관계를 하고 싶어도 황제의 윤허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게 조선입니다.
    조선은 동양적 기준이나 서양적 기준(님이 말한게 잘은 모르겠으나..) 완전히 속국입니다.

    중국 명사에서는 조선을 속국 혹은 번국으로 적은 구절이 있는걸로 압니다. 번국이라는 것은 자치권만 있는 지역을 얘기하는 거죠.
  • 골든 리트리버 2013/08/30 01:52 #

    그냥.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를 읽어보시면 이해가 빠르시겠네요. 칼 귀츨라프 선교사가 오해하게 된 상황의 원인에 대해서도 설명이 나와있는 걸로 압니다만.
  • 킹오파 2013/08/30 01:31 # 답글

    1832년 당시 린세이라는 사람이 조선에 왔었죠. 이 사람은 칼 귀츨라프 선교사와 같이 조선에 오게 되었음. 하여간 그래서 통교를 하기 위해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인과 만나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 대인: “무슨 까닭으로 멀리서 찾아왔습니까?”

    린세이: “이미 (여러 관리들을 통해) 알려드렸듯이, 우리나라는 (귀국과) 우호적인 통상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그래서 귀국의 국왕에게 편지와 문서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 대인: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대청제국을 섬겨왔습니다. 대청제국은 우리의 상국(上國, superior)입니다. 감히 속국이 어떻게 (외국과) 통상할 수 있겠습니까?”

    린세이: “시암과 코친차이나(베트남)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과 이 나라들은 우리 선박과 통상하는 것을 승인하고 있습니다. 귀국은 대영제국과 통상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왜 다른 나라들처럼 하지 않습니까?”

    오 대인: “우리나라는 중국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국의 명령과 승인 없이는 크고 작은 일을 떠나서 감히 (외국과) 새로운 관례를 세울 수 없습니다.

    악령이 출몰하는 조선의 바다에서 일부 내용 참조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국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감...
    근데 베트남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0.0????

    그렇습니다. 중국의 속국 중에서 가장 밀착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은 단순한 조공국이 아닙니다. 중국의 속국 중에서 가장 철저한 속국입니다.
  • 나고야거주남 2013/08/31 19:57 # 삭제 답글

    청일전쟁의 간접적 원인이 된 조병갑의 손녀분이 지금 모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계시죠. 친일파 청산해야한다고 목청 높이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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