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宋史) 서하전 남송시대 부분 세계사




소흥(紹興) 30년(1160)에 서하는 그나라의 재상인 임득경(任得敬)을 초왕(楚王)으로 봉(封)하였다. 소흥 31년(1161),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을 건립해 초경안(焦景顏)과 왕첨(王僉) 등을 학사(學士)로 삼고, 실록을 정리하게 하였다. 금주(金主) 량(亮, 海陵王)이 사천(四川)을 침범하자, 선무사 오린(吳璘)은 서하에 격문을 띄워 병사들끼리 연합해 금군을 토벌할 것을 제의했다. 소흥 32년, 서하는 중서(中書)와 추밀원을 내문(內門) 밖으로 이전시켜 설치하였다. 사치를 크게 금지했다. 번자(蕃字)의 제작을 감독했던 야리인영(野利仁榮)을 비로소 광혜왕(廣惠王)으로 봉하였다. 하인(夏人)들이 금나라 사람의 남침[=해릉왕의 南伐] 소식을 듣고선 기병 2천을 채원천(蔡園川)과 마가재(馬家才), 독두령(禿頭嶺)에 이르도록 하여 장차 길을 나누어 들어와 공격하고자 했는데, 선무사 오린이 진융군(鎭戎軍) 수장 진필(秦弼)에게 서하국을 설득시켜 타이르라 명했다. 금군이 패하자, 하인들은 돌아갔다.

건도(乾道) 3년(1167) 5월, 서하의 재상 임득경이 사천선무사에게 은밀히 사자를 파견해와 공동으로 서번(西蕃)을 공격하자며 약조했는데, 우윤문(虞允文)이 밀봉된 문서로 [臨安 조정에] 보고했다. 7월, 임득경의 사신이 선무사를 재차 찾아오자 하인들은 그 사신의 백서(帛書)를 노획하여 금나라 사람한테 넘겨줬다. 건도 4년, 하는 건우(乾祐)로 개원(改元)했다. 임득경이 찬탈 음모를 꾸몄으나 주살당했다. 순희(淳熙) 12년(1185) 2월, 옛 요(遼)나라의 대석아림(大石牙林)이 금(金)을 정벌하고자 서하에 그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고 [잠입한 송나라의] 첩자가 보고해오자, [宋孝宗은] 몰래 조서를 내려 이서도통제(利西都統制) 오정(吳挺)과 제치사 유정(留正)에게 이를 의논토록 하였다. 순희 13년 4월, 다시금 오정에게 조서를 내려 서하와 연합하도록 했다. 이당시, 논의 가부(可否)와 하인들이 동조한 여부가 사서에선 기록이 모두 망실되었다. 소희(紹熙) 4년(1193) 9월 20일, 인효(仁孝)가 죽으매 70세였다.

[서하의 군주 이인효는] 재위 55년으로 개원한 것은 대경(大慶)의 4년, 인경(人慶)의 5년, 천성(天盛)의 21년, 건우의 24년이었다. 시호는 성덕황제(聖德皇帝), 묘호는 인종(仁宗)이라 했으며, 능묘를 수릉(壽陵)이라 불렀다. 아들 순우(純佑)가 계승했다. 순우는 인종의 장남으로, 모친은 가로되 장헌흠자황후(章獻欽慈皇后) 나씨(羅氏)였다. 인종이 사망하자 즉위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다음해, 천경(天慶)으로 개원했다. 개희(開禧) 2년(1206) 1월 21일에 폐위당해 이윽고 사망하였고, 30세였다. 재위 14년으로 시호는 소간황제(昭簡皇帝), 묘호는 환종(桓宗)이라 했으며, 능묘를 장릉(莊陵)이라 불렀다. 진이군왕(鎮夷郡王) 안전(安全)이 추대되었다. 안전은 숭종(崇宗)의 손자이자, 월왕(越王) 인우(仁友, 이인효의 아우)의 아들이었다. 개희 2년 정월에 그 주군인 순우를 폐(廢)하고 스스로 자립했으며, 다음해 응천(應天)으로 개원했다. 가정(嘉定) 4년(1211) 8월 5일, 안전이 죽으매 42세였다.

재위 6년으로 개원한 것은 응천의 4년, 황건(皇建)의 2년이었다. 시호는 경목황제(敬穆皇帝), 묘호는 양종(襄宗)이라 했으며, 능묘를 강릉(康陵)이라 불렀다. [양종에겐] 승정(承禎)이라 불리운 아들이 있었다. 제국충무왕(齊國忠武王) 언종(彥宗)의 아들이자, 대도독부주(大都督府主) 준욱(遵頊)이 추대되었다. 준욱은 처음엔 종실(宗室) 황족임에도 과거에 응시해 진사(進士)로 급제하여 대도독부주가 되었다. 가정 4년 7월 3일 즉위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49세였고, 다음해 광정(光定)으로 개원했다. 금나라 위소왕(衛紹王)이 숭경(崇慶) 원년(1212) 3월에 사신을 파견해와 [준욱을] 하국왕(夏國王)으로 책봉해주었다. 가정 7년 여름, 좌(左)추밀사 만경의용(萬慶義勇)이 밀봉된 문서를 간직한 승려 2명을 서쪽 변경에 파견해와 장차 [宋과] 더불어 금인(金人)들을 도모해 침탈당한 땅을 회복하자고 했으나, 제치사 황의(黃誼)는 보고하지 않았다. 그후, 금인들은 남천(南遷)해 도읍을 장안(長安)으로 이전할 것을 논의했다.

금나라는 원수(元帥) 적잔(赤盞)을 파견해 중병(重兵)을 공주(鞏州, 감숙성 농서현)에 주둔하게 했다. 서하의 주군은 그들이 침범해와 핍박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이에 추밀사 도초토(都招討) 영자녕(甯子寧)과 충익(忠翼)을 파견해 촉(蜀) 지방[=四川]과의 경계로 가서 알리도록 하고, 진주(秦州)와 공주를 협공할 것을 논의케 했다. 섭자술(聶子述)은 이서안무(利西安撫) 정육(丁焴)에게 답서 제작을 맡기고선 장수와 관리로 하여금 단단히 타일러 엄중한 병사들로 대비토록 지시했다. 이때가 가정 12년(1220) 3월이었다. 섭자술이 갑자기 사직해 [四川에서] 떠나게 되자, 정육은 경거망동해선 안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장수들도 출전할 수 없었다. 12월, 영자녕은 사자를 파견해 이전에 설명했던 것을 번복하고 시기를 놓친 것을 책망했는데, 당시 안병(安丙)이 체재하면서 선무(宣撫)공작을 재개하자 수락하고, 이주부도통제(利州副都統制) 정신(程信)에게 명하여 그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가정 13년 8월, 영자녕이 출병 시기가 도래했다며 통고해오자 안병은 마침내 뜻을 결정하고, 조정에 상주(上奏)해 이 사실을 보고하고선 허락한다는 답신도 받지않은 채 장수들에게 크게 군사를 발동할 것을 명령했지만, 공(功)을 세우지 못했다. 하인(夏人) 영자녕과 외명공보(嵬名公輔) 역시 그들의 무리를 데리고 귀국해버렸다. 가정 14년 1월, 안병은 이주(利州, 사천성 광원시)로 귀환했다. 가정 16년, [서하 황제] 준욱(遵頊)이 상황(上皇)을 자처하고, 그 아들 덕왕(德旺)에게 제위를 넘겼다. 보경(寶慶) 2년(1226) 봄, 준욱이 죽으매 64세였다. 개원으로 광정(光定) 13년이었다. 시호는 영문황제(英文皇帝), 묘호는 신종(神宗)이라 했다. 병술(丙戌, 1226) 7월, 덕왕이 죽으매 46세였다. 개원으로 건정(乾定) 4년이었다. 묘호는 헌종(獻宗)이다. 청평군왕(清平郡王)의 아들 남평왕(南平王) 현(睍)이 즉위하였으나, 2년째 되는해[=1227] 정해(丁亥) 가을에 대원(大元, 蒙古帝國)에게 탈취당하니 나라가 마침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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