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史) 위소왕본기(衛紹王本紀) (1) 세계사




위소왕의 휘(諱)는 영제(永濟), 어릴적 자(字)는 흥승(興勝)으로 윤제(允濟)에서 개명했는데 장종(章宗)시기 조서로 현종(顯宗)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윤(允)자를 영(永)으로 바꾼 것이다. 세종(世宗)황제의 7남으로 모친은 가로되 원비(元妃) 이씨(李氏)였다. 위왕(衛王, 즉 衛紹王)은 장신의 체구에 구렛나루 수염이 아름다웠고, 천성이 검약하여 화려하게 꾸민 것을 싫어했으니 세종 대정(大定) 11년(1171), 설왕(薛王)에 봉(封)해졌다. 같은해에 수왕(禭王)으로 진봉(進封)되었다. 대정 17년, 맹안(猛安)을 제수받아 세습하게 되었다. 대정 25년, 개부의동삼사(開府義同三司)를 더했으며, 대정 26년 비서감(秘書監)에 기용됐다. 이듬해, 형부상서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그 이듬해엔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禁軍 사령관)으로 이직되었다. 대정 29년(1189)에 세종이 붕어(崩御)하고 장종황제가 즉위하자, 노왕(潞王)으로 진봉되었다. 재차 기용돼 판(判) 안무군절도사(安武軍節度使)가 되었다. 

그해 5월, 기주(冀州)에 도착해 부임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문을 황제에게 올렸고, 은혜로운 답신의 조서를 받았다. 명창(明昌) 2년(1191), 한왕(韓王)에 진봉되었다. 명창 4년엔 판(判) 흥평군(興平軍)으로, 5년엔 심남군(沁南軍)으로 바꿨다. 승안(承安) 2년(1197),위왕(衛王)이라 개칭되어 봉해졌는데, 3년엔 소의군(昭義軍)으로 바꿨다. 태화(泰和) 원년(1201), 판(判) 창덕부사(彰德府事)로 이직되었으며, 태화 5년 판(判) 평양부(平陽府)가 되었다. 처음에 장종이 정왕(鄭王) 완안영도(完顔永蹈)와 조왕(趙王) 영중(永中)을 주살했는데, 얼마안가 몹시 후회했다. 태화 7년, 조서를 내려 옛 봉작(封爵)을 회복시켜 추증하고, 이에 시호를 내려줬다. 영도에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장종은] 위왕의 아들 안진(按辰)을 정왕의 후사로 삼고, 위왕에게 조서로 이르기를 '짐은 정왕이 천상(天常)의 도리를 저버렸으나 국가에 공헌한 재능을 기억함에도 죽어서 허허벌판에 뭍혔으니, 홀연히 제사를 잇지 못하고 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짐도] 마음고생이 심해졌다. 친척간의 정(情)이라고 하였다. 옛날의 죄과는 용서해주는 바이다. 이미 조서로 옛 봉작을 회복시켰고, 다시금 장례의식 또한 치뤄야할 터. 옛 의례에 따라 논의한고로 경(卿)의 아들인 안진을 정왕의 후사로 삼아 삼가 제사를 잇게 할 것이니, 경은 그점을 명심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무정군(武定軍)절도사로 옮겨졌다. 태화 8년 11월, 무정군으로부터 입조(入朝)했다. 이무렵, 장종은 스스로 병이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하고선 위왕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고자 했다[위왕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뜻]. 장종 초년(初年), 황제는 제왕(諸王)들의 왕부(王府)에 관리를 배치시켜 규범을 지도하게 했었다. 또한, 조왕 영중(永中)과 정왕 완안영도가 주살당했을 무렵부터 나머지 종실들과 소통하는 것조차 꺼려했는데, 이윽고 왕부의 관리는 왕가(王家)를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종실 황족들과 교류하는 모든 인사들을 가혹하고도 엄밀히 단속하였다.

그리고 위왕은 곧 영도의 모제(母弟)인데다, 유약하나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장종이 총애하였다. 후사가 없고, 여러 숙부와 형제들이 많이 있었지만 장종은 이들 모두에게 제위를 넘기려는 뜻이 없었으며, 위왕을 세우고자 했으나 당분간 이같은 뜻을 유보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종의 병세가 점차 악화되자, 원비(元妃) 이씨(李氏)와 황문(黃門) 이신희(李新喜), 평장정사 완안광(完顏匡)이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것을 모의했다. 장종이 붕어하고, 완안광 등이 유조(遺詔)를 보내 위왕을 추대하였다. 위왕은 한사코 사양했으나, 비통해하며 간신히 조서를 받들고 장종의 영구 앞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다음날, 대안전(大安殿)에서 군신들과 조견했다. 조서를 내려 로(路)와 부(府), 주(州), 현(縣)에서 대행(大行, 서거한 장종)황제의 장례를 치루도록 조치했다. 대안(大安) 원년(1209) 정월 신축일, 혜성이 떨어져 불붙었다. 천시원(天市垣)이 관측됐는데, 꼬리의 자취가 흡사 적룡(赤龍)과 같았다.

임술일에 개원(改元)하고, 크게 사면했다. 원비 도단씨(徒單氏)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2월 을축일 초하루날, 대낮에 태백성이 나타나 하늘위를 지나갔다. 임신일, 장종의 내인(內人) 범씨(范氏)가 그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자 조서를 내려 밖으로 내치게 하였다. 처음에 장종이 조서를 보내면서 '내인으로 아이를 밴 자가 두명인데, 태어나 사내라면 즉시 황태자로 삼겠다'고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평장정사 복산단(僕散端) 등이 상주해 '승어가씨(承禦賈氏)는 지난 11월 분만하여 출산한 지 3개월입니다. 범씨가 정월에 산기(産期)를 맞이하자 의원을 꼬드껴 범씨의 태기를 해치고, 약을 써서 맥박을 곤란케 만들었으니 태아가 죽은 것입니다. 범씨의 소원대로 삭발해 비구니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황자(皇子) 6명을 왕으로 봉했다. 3월 갑신일, 도릉(道陵)이 완성되자 크게 사면했다. 조서로 이르기를, '이제부턴 짐의 명의로 밝음이 미치지 않을 것이며 양육과 구별치 않는다'고 하였다.

평장정사 복산단을 우승상으로 삼았다. 4월 경신일에 장종의 원비 이씨와 승어가씨를 죽였다. 평장정사 완안윤을 상서령으로 삼았다. 5월, 고려(高麗)가 즉위를 축하해주었다. 굉사과(宏詞科)를 거행했다. 7월, 해왕장(海王莊, 中都 남쪽 교외)으로 행차하여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제사에 임했다. 8월 만추절(萬秋節), 송(宋)나라가 사신을 파견해와 축하해주었다. 9월, 대방산(大房山)으로 가서 예릉(睿陵)과 유릉(裕陵), 도릉을 참배하고 제사지냈다. 백관이 표문을 올려 태자를 세울 것을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세성(歲星, 木星)이 좌집법(左執法)을 침범했다. 기묘일, 조서로 풍속을 단속하도록 권했다. 11월, 평양(平陽)에 지진이 일어났고, 서북쪽으로부터 천둥 소리가 들렸다. 12월, 조서로 평양의 지진으로 3명이 사망한 가구와 2명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가구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었으며, 빈민으로 사망한 자들에겐 장례금 5천전(錢)을 지급해주고, 부상자에겐 3천전을 주도록 하였다.

상서령 신왕(申王) 완안광이 죽었다. 우승상 복산단을 좌승상으로 삼고, [황상의] 형님인 영왕(郢王) 영공(永功)을 진봉해 초왕(譙王)으로 삼았으며, 어사대부 장행간(張行簡)을 태보(太保)로 삼았다. 대안 2년 정월 경술일 초하루날, 정오에 유성(流星)이 나타나 땅에 떨어졌는데 형태가 점차 수레바퀴처럼 되었고, 꼬리의 길이가 수장(丈)에 달했다. 어지러운 가운데 떨어졌으나, 다시 솟구쳐올라 빛이 사방으로 번져 불타는 듯 하였다. 2월에 객성(客星)이 자정원(紫征垣)으로 들어가 그 빛은 적룡이 되었다. 땅이 크게 흔들렸고, 천둥 소리가 들렸다. 예부시랑 경단의(耿端義)를 참지정사로 삼았다. 4월에 <대금의례(大金儀禮)>를 정리했다. 북방에 검은 기운이 나타났으며, 흡사 커다란 길처럼 동서로 하늘까지 뻗었다. 서주(徐州)와 비주(邳州)의 황하 강물이 5백여리에 걸쳐서 맑아지자, 종묘사직에 고했다. 5월, 조서로 유신(儒臣)들에게 <속자치통감(續資治通鑒)>을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6월에 크게 가물었다. 조서를 내려 죄가 있더라도, 조정에서 빈민들한테 식량을 구휼케 하였다. 서경(西京, 산서성 대동시)과 태원(太原) 양로(兩路)에 사면령을 발동해 경범죄와 사형죄는 형량을 1등급 감형했으며, 나머지 무리는 방면해주었다. 병인일에 지진이 일어났다. 7월, 지진이 일어났다. 8월, 지진이 일어났다. 을축일에 아들 조왕(胙王) 종각(從恪)을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만추절(萬秋節), 송나라가 사신을 파견해와 축하해주었다. [中都城] 근교에서 사냥했다. 하인(夏人, 西夏)들이 하주(葭州)를 침공하였다. 9월, 땅이 크게 흔들렸다. 을미일에 조서로 직언(直言)을 구하며 용감한 자를 모집하고, 유망민을 위로했다. 경자일, 사절을 보내 행성(行省)의 군사들을 위무하고, 덕(德)을 베풀었다. 병오일, 경사(京師)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황상이 대낮에 순시하자 백관이 정사를 돌볼 것을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계축일에 조서로 중도, 서경, 청주(淸州), 창주(滄州)의 병사와 백성을 위로했다.

11월, 중도 근교에서 사냥했다. 중도의 대비각(大悲閣) 동쪽 도랑 안쪽에서부터 화재가 발생하여 열흘간 타오르다 꺼졌다. 대비각의 남쪽 장대를 태워없애고, 아래의 돌 틈 사이로 불길이 치솟더니 근처에 거주하던 사람을 순식간에 몰살시켰으며, 거듭 이같은 현상이 번복된 것만 열흘이었다. 중도의 화재로 백성들의 거주지는 전소되버렸다. 12월 을묘일 초하루날, 일식이 있었다. 이해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변경[국경지대]의 소식을 얻거나 전달받는 것을 금했다. 대안 3년 정월 을유일 초하루날, 송나라와 고려, 서하가 사신을 파견해와 축하해주었다. 형혹성이 저중(氐中)으로 들어갔다. 2월에 형혹성이 방수(房宿)를 침범했다. 커다란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자 지붕이 날아가고 나무가 꺾였으며, [中都의] 통현문(通玄門)과 동화문(東華門) 중관(重關)이 무너졌다. 윤월(閏月), 형혹성이 건폐성(鍵閉星)을 침범했다. 3월, 대비각의 재난 때문에 밖으로 나간 백성들을 불러들였다.

검은 기운이 북방에서 일어났으며, 넓이와 길이가 커다란 제방과 같았다. 나라 안에서 세가지 흰색 빛깔이 나타나 관통했는데, 용(龍)과 호랑이의 형상이었다. 민간에서 말을 수집하자, 영을 내려 관리들은 차등있게 말을 내놓도록 하였다. 4월에 우리 대원(大元)의 태조(太祖)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聖武皇帝, 鐵木眞 成吉思汗)께서 금나라를 정벌하러 오셨다. 금나라에선 서북로초토사(西北路招討使) 점합합타(粘合合打)를 사신으로 보내 화의를 구걸했다. 평장정사 독길천가노(獨吉千家奴)와 참지정사 호사(胡沙)로 하여금 변경지대를 방비하고 살피도록 했다. 서경유수(西京留守)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로 하여금 추밀원 사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참지사 오둔충효(奧屯忠孝)를 상서우승(尚書右丞)으로, 호부상서 양당(梁镗)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6월 임인일, 이전까지의 군사들에 대한 상벌(賞罰) 규정을 개정했다. 8월에 조서로 각 관아의 관리들을 격려했다[전시체제에 임한 선무공작].



                      북경시 서남쪽에 소재한 중도성(中都城) 유적, 1215년 몽고군에게 함락당해 초토화되었다.


       

덧글

  • 행인1 2013/11/10 12:02 # 답글

    금에서 자치통감 속편을 편찬하려 했다니 흥미롭군요. 물론 이후의 전란통에 잊혀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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