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史) 위소왕본기(衛紹王本紀) (2) 세계사




독길천가노와 호사가 무주(撫州, 내몽고 장북현)로부터 군사를 퇴각시켜 선평(宣平, 하북성 장가구시)에 주둔했다. 하남(河南) 대명로(大名路)의 군사가 도주하여 귀환해오자, 조서를 내려 이들을 초무(招撫)했다. 9월, 독길천가노와 호사가 회하보(會河堡, 하북성 회안현)에서 패전하였고, 거용관(居庸關)을 빼앗겼다. 남자가 중도성(中都城)의 문을 통해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몽고(蒙古)의 전군(前軍)이 도달하자, 중도엔 계엄이 선포되었다. 참지정사 양당이 경성(京城)의 민심을 수습했다. 10월에 매일 초저녁부터 동쪽과 서북쪽 하늘에서 달이 처음 출현하여 새벽녘까지 관측되다 이달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형혹성이 누벽진(壘壁陣)을 침범했다. 상경유수(上京留守) 도단일(徒單鎰)이 보내온 동지(同知) 오고손올둔(烏古孫兀屯)으로 하여금 병사 2만으로 중도를 방어하게 했다. 태주(泰州, 흑룡강성 태래현)자사 출호고기(朮虎高琪)가 [中都의] 통현문(通玄門) 외곽에 주둔하였다.

황상이 여러 군사들을 순시하며 위로하고, 행성(行省)에 덕(德)을 베풀고는 물러갔다. 11월, 하남에서 진언한 사람 혁찬(郝贊)을 죽였다. 상경유수 도단일을 우승상으로 삼았다. 중도에서 도성의 수비군을 징발했다.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가 서경(西京, 산서성 대동시)를 포기하고 경사(京師)로 도망쳐 돌아오자, 즉시 우부원수(右副元帥) 권상서좌승(權尚書左丞)으로 삼았다. 이무렵, 덕흥부(德興府), 홍주(弘州), 창평(昌平), 회래(懷來), 진산(縉山), 풍윤(豐潤), 밀운(密雲), 무녕(撫寧), 집녕(集寧)과 동쪽의 평주(平州)를 거쳐 난주(灤州), 남쪽의 청주(淸州)에 이르러선 창(滄)과 임황(臨潢)으로부터 요하(遼河)를 거쳐 서남의 흔(忻), 대주(代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몽고에 귀속되었다. 처음에, 도단일은 환주(桓州)와 창주(昌州), 무주의 백성을 내지(內地)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황상은 양당과 의논한 끝에 도단일을 책망하며 이르기를, '이는 스스로 토지를 축소시키는 꼴이 아니던가?'라고 하였다.

몽고가 이미 3주(州)에 도달해 평정하자, 황상은 분하게 여겼다. 이때 이르러 도단일은 동경(東京, 요녕성 요양시)에 행성을 설치하여 훗날을 기약해보자고 재차 청했다[천도를 의뢰한 것]. 황상이 언짢게 여기며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는 대신들을 보내면 인심만 동요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경을 지킬수 없게 되자, 황상은 이를 크게 후회하였다. 우부원수 호사호(胡沙虎)가 병사 2만명을 선덕(宣德, 하북성 선화현)에 주둔시키겠다고 청하자, 조서로 나머지 3천은 규천(媯川, 하북성 회래현)에 주둔케 했다. 평장정사 천가노와 참지정사 호사가 전군(全軍)의 모반에 연루되자 천가노를 해직시키고, 호사는 문책을 받아 함평로(咸平路) 병마총관으로 강등되었다. 1만호(戶)를 고북구(古北口)에 주둔시켰다. 12월, 섬서 양로(兩路)의 한군(漢軍)을 징발해 중도로 들어오게 하였다. 태보(太保) 장행간(張行簡)과 좌승상 복산단(僕散端)이 궁중에 숙직하며 군사 문제를 논했다.

좌승상 복산단이 파면되었다. 숭경(崇慶) 원년(1212) 정월 기유일 초하루날에 개원하고, 사면했다. 송나라와 서하가 사신을 보내와 축하해주었다. 우부원수 호사호가 군을 퇴각시켜 남구(南口)에 주둔할 것을 청하자, 조서로 그 죄를 따졌으나 면해주었다. 3월에 크게 가물었다. 사신을 파견해 이준욱(李遵頊)을 하국왕(夏國王)으로 책봉해주었다. 어사대부 복흥(福興)을 참지정사로, 참지정사 맹주(孟鑄)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하인(夏人)들이 하주(葭州, 섬서성 가현)를 침범하자, 연안로(延安路) 병마총관 완안노비(完顏奴婢)가 이를 보고했다. 5월, 섬서의 용감한 군사 2만과 활쏘기에 능한 군사 1만을 징발해 중도로 오게 하였다. 섬서의 [숨겨진] 말들을 색출하도록 하였다. 안무군(安武軍)절도사를 사임한 가현(賈鉉)을 복직시켜 참지정사로 기용하고, 참지정사 복흥을 상서좌승(尚書左丞)으로 삼았다. 조서로 공명(空名)의 칙서와 증명서를 매매하도록 했다[戰時하에 공명첩을 발간 ・판매한 것이다].

하동(河東)과 섬서에 크게 기근이 들어 쌀 1두(斗)당 수천전(錢)으로까지 폭등하고, 들판은 유민과 아사한 시체들로 가득해졌다. 남경유수(南京留守) 복산단(僕散端)을 하남 ・섬서안무사(安撫使)로 삼아 군마(軍馬)를 징발케 하였다. 7월에 동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비단을 쌓아둔 것이 불탔는데 [불길] 높이가 10장(丈)에 달했으며, 날아올라 용의 형상을 갖춘 채 [中都城 북쪽의] 공진문(拱辰門)으로 떨어졌다. 8월 만추절(萬秋節), 병사들에게 연회를 베풀지 못했다. 10월, 서경, 요동(遼東), 북경(北京, 내몽고 영성현)에 사면령을 내렸다. 11월, 하동남로와 남경로, 섬서동로, 산동서로, 위주(衛州, 하남성 위휘시)에 가뭄이 들자 이들을 구제해주었다. 12월, 하국왕 이준욱이 책봉을 받은 것에 사례하였다. 지녕(至寧) 원년(1213) 정월, 하동과 섬서에 기근이 들자 이를 구제했다. 2월, 조서로 요동을 안무했다. 지대명부사(知大名府事) 오고륜(烏古論)이 모반을 획책하자, 그를 주살해버렸다.

3월, 태음(太陰) ・태백성이 나란히 대낮에 나타났는데, 서로 1척(尺)간 떨어져 있었다. 5월에 개원(改元)했다. 조서로 함평로의 거란계 부락민들을 타이르고, 병사를 모집했다. 호사호를 재차 기용하여 우부원수로 삼고 무위군(武衛軍) 3천명을 거느려 통현문 외곽에 주둔케 하였다. 섬서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6월, 하인들이 보안주(保安州)와 경양부(慶陽府)로 쳐들어와 지방관을 죽였다. 호부상서 서정(胥鼎)과 형부상서 왕유한(王維翰)을 참지정사로 삼았다. 8월, 상서좌승 완안원노(完顏元奴)가 병사를 모아 변경을 방어했다. 조서로 군관과 군사에게 차등있게 물품을 하사했다. 밤낮에 안개가 많이 끼었다. 치중(治中) 복해(福海)가 따로 병사를 거느려 중도 북쪽에 주둔했다. 신묘일, 호사호가 조서를 날조하여 반대자를 베고, 복해를 유인해 죽였으며 병사를 탈취하였다. 임신일, 통현문으로 들어와 지대흥부(知大興府) 도단남평(徒單南平)과 형부시랑 도단몰점(徒單沒拈)을 광양문 서쪽에서 처치하였다.

복해의 아들인 부보(符寶) 선양(鄯陽)과 도통(都統) 석고내(石古乃)가 무리를 데리고 이에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 호사호가 동화문(東華門)을 치고, 사람을 보내와 다그치며 동아(冬兒)의 1백호(戶)와 포찰육근(蒲察六斤)의 50호로 친군(親軍)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맹안(猛安) 3품(品)의 관직의 세습을 허락하도록 요청한 것도 역시 응하지 않았다. 도점검(都點檢) 도단위하(徒單渭河)가 나와 호위중이던 사열(斜烈)과 더불어 출입문의 사슬을 끊어 열어젖히자, 호사호가 병사를 궁으로 들여보내 수비군을 마침내 다 죽이고, 그 무리들로 대신케 하였는데 감국(監國) 도원수(都元帥)라 자칭했다. 계사일, 황상을 겁박해 궁에서 쫓아냈다. 소거(素車)가 황상의 옛 저택에 이르자, 무위군(武衛軍) 병사 2백명으로 하여금 엄중히 지키도록 했다. 상궁 좌부인 정씨(鄭氏)가 내직(內職)으로서 옥새를 가지고 있었는데, 변란 소식을 듣고 상황이 급박해지자 자신의 거처에 감춰두었다.

호사호가 황문(黃門)을 보내 옥새를 입수하도록 하자 정씨가 이르기를, '옥새는 천자(天子)의 것인데 호사호 같은 신하가 어떻게 가질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황문이 '지금 세상은 크게 변했고, 더욱이 주상(主上)은 그 자리를 보전하지 못했거늘 하물며 옥새라니? 시간을 끌어 막으려는 심산이라면 마땅히 관두거라'고 하자, 정씨가 사납게 소리치면서 '궁중에서 가까이 모시는 어린 무리들을 은혜롭게 두터이 후대했건만, 군주가 어려운 시기에 죽음으로 보답하진 못할 망정 옥새를 강탈한단 말이냐! 나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옥새는 결코 넘기지 못한다!'라고 꾸짖었다. 이윽고, 눈을 감으면서 말하지 않았다. 황문이 나와 호사호가 '선명지보(宣命之寶)'를 소유하게 되자, 패거리들에게 벼슬을 내려 추노(醜奴)를 덕주(德州)방어사, 오고륜탈랄을 순천군(順天軍)절도사, 제공(提控) 숙직장군 도단금수(徒單金壽)를 영정군(永定軍)절도사로 삼았으며, 그 나머지 무리 수십명은 모두 궁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환관 이사중(李思中)을 보내 저택에서 황상을 시해하였다. 봉어(奉御) 화상(和尚)을 꾀어 서한을 작성하고, 그 부친인 좌승(左丞) 원노(元奴)와 상의할 일이 있다며 시급히 호출한 다음, 원노가 군부로 오자 그 아들과 나란히 죽였다. 9월 갑진일, 선종(宣宗)이 즉위했다. 정미일, [위왕의] 저택에 들러 제사드리고, 슬픔을 다해 곡(哭)하였다. 칙령으로 예우를 갖추어 다시 장례식을 치뤘다. 호사호가 폐위된 황제를 서인(庶人)으로 삼도록 요청하자, 조서로 조당(朝堂)에서 백관들에게 논의케 하였는데 토론자만 3백여명이었다. 태자소부(太子少傅) 오둔충효(奧屯忠孝)와 시독학사(侍讀學士) 포찰사충(蒲察思忠)이 덩달아 폐출(廢黜)을 청했고, 호부상서 무도(武都)와 습유(拾遺) 전정방(田庭芳) 등 30여명은 왕후(王侯)로 깎아내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태자태보(太子太保) 장행간은 한(漢)나라 창읍왕(昌邑王)과 진(晋)나라 해서공(海西公)의 고사(故事)를 응용해보도록 건의하였다.

시어사 완안와출(完顏訛出) 등 10여명은 깎아내려 다시 왕으로 봉할 것을 건의했다. 호사호가 앞서 논의했던 것을 고집하는 바람에 선종은 마지못해 동해군후(東海郡侯)로 깎아 봉하였다. 도릉(道陵, 金章宗을 뜻함)의 원비(元妃) 이씨(李氏)와 승어가씨(承禦賈氏)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10월 신해일, 원수 우감군(右監軍) 출호고기(朮虎高琪)가 호사호와 그 동생을 죽였다. 호사호는 바로 흘석렬집중(紇石烈執中)이다. 선종은 이에 조서를 내려 그 관작(官爵)을 삭탈하였다. 석고내를 순주(順州)자사, 선양을 순천군절도사로 추증했으며, 두 사람을 따라 [호사호를] 방어하는데 싸웠던 자로서 1천호(戶)에 상금 5백관(貫)을, 모극(謀克)에겐 3백관, 포련산군(蒲輦散軍)에겐 2백관씩을 하사하고, 양쪽 모두 관직을 이전시켰으며 전몰자는 가정에 포상을 증여해주었다. 동아(冬兒)에게 용호위(龍虎衛) 상장군을 더해주고, 다시 숙진(宿進)장군으로 옮겼다. 포찰육근에게 정원대장군, 무위군검할을 더해줬다.

석고내(石古乃)의 아들 상유(尚幼)에겐 봉급 8관석(貫石)을 지급해주었고, 유사(有司)에 칙령을 내려 그가 15세가 될 때가지 기다리게 하였다. 정우(貞祐) 4년(1216), 조서로 위왕(衛王)이라 다시 추증하고, 시호를 소(紹)라 하였다. 논평하기를, 위소왕은 내부에선 정사가 어지러웠고, 외부에선 병사들이 패전하였으니 그 멸망은 벌써 [칭기스칸의] 정벌 당시부터 시작된 것이다. 몸은 죽임당하고, 국가는 긴박해져 기록이 망실되었는데 남천(南遷) 이후로도 다시 기재되지 못했다. 황조(皇朝, 大元) 중통(中統) 3년(1262)에 한림학사 승지(承旨)인 왕악(王鶚)이 사서를 저술하면서 [위소왕] 대안(大安)~숭경(崇慶)연간의 사건 기록을 얻을 수 없자, 당시 조서로 영을 내려 기록을 찾고 수집했었다. [그때까지 생존한] 옛 금나라의 부령(部令)이었던 사두상(史竇祥)은 나이 89세였지만, 눈과 귀가 총명한데다 옛날의 일을 잘 기억했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20여개의 기사[條]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천제점(司天提點) 장정지(張正之)가 천재지변을 다룬 16개조(條)를 필사했는데, 장승지(張承旨) 집안의 과거사를 기재한 수필 5조와 금나라 예부상서 양운익(楊雲翼)의 일기 40조, 진로(陳老)의 일기 30조를 사관(史館)에 소장했다. 그러나 많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록의 2/3가 중복되었다. 기록들을 유추해보건대, 이비(李妃)와 완안윤(完顏匡)이 황제 옹립을 모의하고, 독길천가노의 병사가 패배하였으며, 흘석렬집중이 난리를 일으켰다. 또한 일식과 별의 변화, 지진과 혼탁한 조짐으로 서로가 등지고 배반했다. 그것이 번복되었으므로 이제 교정하여 번잡함을 정리한 것이다. <장종실록(章宗實錄)>은 그전의 사건을 상세히 다뤘고, <선종실록(宣宗實錄)>도 그후의 사건을 상세히 다루었다. 금나라에서 상소를 주관했던 여관(女官) 대명거사(大明居士) 왕씨(王氏)의 기록이나 자명부인(資明夫人)이 옥새를 얻었다는 일화는 추가로 서술하기엔 역시 구름처럼 번잡해지므로, 그것을 대강 간추려 정리했다.


* 원문에서는 몽고를 '대원(大元)'이라 기재함.




                             북경시 서북쪽 창평구에 소재한 금나라 방어전선의 핵심 보루였던 거용관(居庸關) 
                             이곳을 탈취함으로써 몽고의 중원 진출은 결정적인 대세로 굳혀졌다.  




덧글

  • 海凡申九™ 2013/11/12 17:06 # 답글

    선종 편도 부탁드림메다
  • 心月 2013/11/13 19:25 #

    격려에 감사드리며, 노력해보겠슴다.ㅎㅎ;;
  • 2013/11/13 16:3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ㅇㅇ 2020/11/21 18:16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이 번역을 자료로 사용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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