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로 보는 프랑스 패망의 순간, 콩피에뉴 휴전 사진집








폴란드를 삽시간에 무너뜨린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프랑스 수뇌부는 전혀 아무것도 깨달은 바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준비 부족으로 말미암아 전격전에 대한 반격은 성공할 수 없었다. 공군력의 결정적인 열세가 한 몫하기도 했으나, 아르덴느로부터 세당에 이르는 군 저지선의 붕괴와 총체적 패전을 낳은 것은 수적 열세나 자원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보단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 만큼 총지휘본부의 처절한 무능과 우유부단함, 일관성없는 명령체계, 부적절한 전략, 부족한 훈련과 저하된 사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주만에 독일군은 185만명의 프랑스 포로들을 투옥시켰다. 대략 9만 2천명의 공무원들도 사망했으며, 이런 수치는 전쟁의 격렬함을 증명해준 듯 하지만 '대(大)전쟁[=1차대전]' 당시 벌어졌던 살인적인 전투에 비해 오히려 낮은 편이었다.

6백여만이 넘는 인구가 집을 버리고 교전지역에서 벗어나려 했고, 덕분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들은 피난민 대열로 가득찼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포기하고, 보다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처음엔 투르로, 다시 보르도로 이전하였다. 절박한 심정의 레노(Reynaud) 수상은 장군들을 해임시켰으며, 내각을 개편했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무명의 기갑전투 전문가 드골 준장이 국방차관으로 입각한 사실은 당장 별다른 중요성이 없었던 사건이었다. 중요한 것은 페탱 원수가 부수상격으로 내각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6월 21일까지 페탱은 베강(Weygand)의 후원하에 휴전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베강은 실추된 군대의 명예에 집착했고, 1871년과 마찬가지로 이를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사회 혼란을 최소화시키면서 프랑스를 '볼셰비키화'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할 수단이라고 믿은 듯 하다.

지친데다가 협박까지 받은 레노 수상은 결국 페탱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해버렸다. 바로 다음날인 17일, 페탱은 독일과 휴전을 체결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했다. 분명, 그의 결정은 사정이 이렇게된 이상, 대안이 없다는 광범위한 신념을 반영한 셈이었다. 조국을 황폐화시킬지도 모를 마지막 전투, 결사항전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까? 사람들은 이제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다. 이토록 비참한 순간, 베르됭의 늙은 영웅은 동포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처럼 비쳐졌다. 휴전협상 경과가 언론에 보도되는 동안, '조국에 고통을 덜어줄 선물'을 하자는 그의 제안은 깊은 감사와 신뢰속에 받아들여졌다.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페탱이 휴전 의사를 공표한 바로 그날, 드골이 보르도에서 런던으로 건너가 '국민위원회'를 수립했다는 소식은 이미 희망을 포기한 프랑스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의 입성(入城) 직후 하켄크로이츠기가 게양된 파리시청사

                               베르사이유궁 정문 방향으로 바라본 전경, 70년만에 다시 독일인들이 들어왔다.

                                 병장기와 군수품을 운반중인 독일군 병사들, 베르사이유궁 정문앞 광장에서




덧글

  • KittyHawk 2013/12/31 15:09 # 답글

    프랑스의 패배도 어느 면에선 자업자득인게 1차 대전 종료 후 국가방어 전략의 근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을 때 포슈 원수는 기동방어전을 주장한 반면 국방장관 마지노는 고정된 방어선에 의지하는 방어전략을 주장했고 희생을 부담스러워 한 프랑스 국민들의 여론이 후자에 쏠리면서부터 프랑스군의 형태가 기형적으로 변해갔다는 걸로 압니다. 물론 드골 같은 이들은 진즉에 마지노 등의 지론의 허점을 꼬집지만 그들에겐 힘이 없었고요.
  • 대공 2013/12/31 15:40 # 답글

    키티호크님 말도 그렇고 희생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에... 교훈이 되는군요.
  • 존다리안 2013/12/31 18:48 # 답글

    전격전에 데인 탓인지 전후 프랑스군은 기동성에 중점을 둔 육군전력 구축에 신경을 쓰지요.
    뭐 기술적 문제였다지만 전후 프랑스의 첫 전차가 공수까지 가능한 경전차인 AMX 13/75였고 이후의 MBT인 AMX 30도 당대 대세였다지만 장갑보다는 기동성과 화력에 중점을 두었으니까요.
  • BARCO 2013/12/31 18:49 # 삭제 답글

    키티호크님의 댓글에서 몰라던 사실을 알게됩니다.
    역사는 그 시대 사람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라는 사실을 한번더 느끼겠됩니다.
  • 2013/12/31 19:08 # 삭제 답글

    기관총으로 보강된 참호에 공격만 거듭하면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한편 국토의 일부는 초토화 된 프랑스 입장에서는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악몽수준이었겠죠. 독일처럼 본토가 유린당하기 전에 알아서 붕괴된 건 오히려 호사일 정도..(덕분에 등뒤의 단검이 어쩌고 따위 떡밥이 흥한건...) 지금에야 역사책에 나온 숫자보면서 "결국 이렇게 될거 한판 붙었어야지!"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굳이 찾자면 프랑스의 잘못은 39년에 무언가 실질적인 액션을 취했어야 했을 때에 엉거주춤하게 불구경만 하고 있던 거죠.
  • jaggernaut 2014/01/01 00:13 # 답글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은 입장이니 무척 어려운 선택이었겠지요...
  • 행인1 2014/01/01 12:44 # 답글

    그리고 페텡은 '원수'가 되어 모든 책임을 제3공화국에 덮어씌우는데....(원수님은요?)
  • BigTrain 2014/01/02 09:59 # 답글

    1차 세계대전 개전 초 프랑스군 지도부들은 뚝심 그 자체였는데, 25년만에 무능의 덩어리가 돼 버렸죠. 그만큼 1차 세계대전의 흔적이 깊게 파인 것 같기도 하고요.
  • 독일 나치 2018/08/12 00:46 # 삭제 답글

    나치에 의해 패망하는 프랑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