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공화국에 대한 키다리 장군의 디스 발언록





"식민지인들한테 보통선거는 아니되네! 내 생각으론 그건 시기상조 같기 때문이지."        
                      - 식민장관 미테랑에게 아프리카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한 오리올 대통령의 발언 

                       


포성이 멈춘 직후, 나는 나의 행동 방향을 확정했다. 의원들에 대해 추방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압제자에 이어 내가 또다른 압제자라는 인상을 각인시키지 않는 한, 그리고 프랑스와 전체 서방세계의 일반적인 사조(思潮)가 용납하지 않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멸하지 않는 한, 나는 다소 오랫동안 정당정체(政黨政體)의 그 유해성을 한번 더 똑똑히 보여주도록 놓아두어야 했다. 나는 그것을 엄호한다던지, 로봇 역할은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따라서, 나는 흠결없이 정계를 떠났다. 아무튼 나는 국민의회가 선출되기 앞서 국민투표를 조직, 이후의 헌법이 유효하기 위해선 국민들의 '직접 동의'가 필요함을 국민들로 하여금 결정토록 했으며, 또한 이로써 정당에 의해, 그리고 정당을 위해 제정될 유해한 헌법 대신에 언젠가 나 자신이 바람직한 헌법을 제정할 민주적인 방식을 만들었다.

12년간 정당체제는 또다시 그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신문 ・토론회 ・압력단체 등의 독촉하에 그리고 본(本)회의와 분과위원회의 동의에 자극받아 '팔레 부르봉(Palais Bourbon, 국민의회)'과 뤽상부르(Luxembourg)궁(宮, 上院)에서 벌어진 각종 계략과 음모, 배반이 얼키고 설킨 와중에 17명의 총리가 24대(代) 내각을 조직해가며 마티뇽(Matignon, 프랑스 총리관저)에 차례차례 들어앉았다. 펠릭스 구앵, 조르주 비도, 레옹 블룸, 폴 라마디에, 로베르 슈망, 앙드레 마리, 앙리 퀘이유, 르네 플레뱅, 에드가 포르, 앙투안 피네, 르네 마이에르, 조제프 라니엘, 망데스 프랑스, 기 몰레, 모리스 부르제 모누리, 펠릭스 가이야르, 피에르 플리믈랭이 그들로 모두 유능한 사람들이었고, 분명 공직에 적합한 이들이었다. 17명 가운데 6명은 나의 임시정부에서 각료를 역임했으며, 4명은 훗날 나의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체제가 워낙 불합리했으므로, 이들은 사태에 실제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불가능속에서 싸우고있는 그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면서 그러한 고충을 나는 얼마나 여러차례 슬퍼했던지! 이들 각자가 그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정치적 거래와 타협으로 구성된 내각은 반목과 분열로 자체 내부로부터 뒤흔들리고, 대개의 경우 각료직을 초조하게 노린 '후보자들[=국회의원]'의 탐욕을 구현하는데 불과한 표결에 의해 얼마못가 붕괴되버리는 창피스런 광경을 국내외에 보여주었다. 더우기, '내각 부재기간[내각이 붕괴되고, 후임의 新내각이 출범하기까지 소요된 조각기간]'이 때로는 몇주간 계속될 정도였다. 이러한 희극이 연출되는 무대위에선 총리가 지명되기 이전에 '의중이 타진된', 혹은 '예정된', '내정된' 총리들이 막간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엘리제궁(宮)에선 뱅상 오리올(Vincent Auriol)과 르네 코티(René Coty)가 '국가원수(元首)'로 공익과 국위를 아무리 근심했던들, 속수무책으로 체념한 상태에서 이 '발레의 광대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계속 진행되고, 어느 누구도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권위있는 정치'가 제시해야 했던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정(內政)에선 행정관리와 기술자, 군인들이 자기들 앞에 제기되는 급박한 사안들을 독자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외정(外政)에선 외국인이 '곁다리식 외교'나 위태로운 내각들을 도외시한 채, 프랑스에 대해 그들이 바라는 것을 결정하고, 획득했다. 경제 분야에서 오랜 궁핍에 뒤따른 소비 욕구와 재건의 막대한 필요성이 자연스레 강력한 활력을 불어일으킨건 사실인데, 이것은 내가 하야하기 전에 창설한 기획부가 지향해왔던 것이다.

덕분에 농공업 생산은 계속 증가했지만, 이것은 우리의 외부 판매만으로 보상하지 못한 해외에서의 구매와 응분한 생산성의 개선없는 급료 인상이란 값비싼 댓가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국가가 사태를 바로잡지 못하는 바람에 적자를 낸 것이다. 끊임없이 워싱턴에서 애걸해온 '마셜원조 계획기금'과 전시(戰時)중에 마르티니크와 프랑스령 수단(Sudan, Mali)으로 이전하고, 내가 고스란히 보존해놓았던 프랑스 은행의 준비금, 특히 적자예산 즉, 인플레에 의해서 이 불균형을 감당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프랑화 가치의 지속적인 하락과 교역의 마비, 국고(國庫)의 고갈, 한마디로 금융 재정의 파탄과 경제적 붕괴가 증대되는 위협을 가져왔다. 물론, 간간히 피네와 포르 같은 장관들의 적절한 행동으로 얼마간의 호전도 볼 수 있었으나, 그들이 떠나고 나면 다시금 혼란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조건하에 사회 분야에선 나의 정부가 해방 직후 실현했던 것에 부가될 만한 업적이 하나도 없었다. 계속되는 파업에 은행권과 국채의 발행으로 몇%씩 임금을 인상해준 것이 고작이었는데, 여기에 따른 물가의 등귀는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했다. 내가 전에 시행한 사회보장, 가족수당, 새로운 소작법 등이 빈곤 ・질병 ・파업 ・노령자 문제에 충분히 대처하여 이같은 문제로 폭동이 발생하진 않았었다. 그러나, 주택 ・학교 ・병원 ・통신 같은 장기적인 문제는 계속 지체되어 장래를 위태롭게 하였다. 국내적으론 우리나라 본래의 유연성이 정부의 '무정견(無定見)'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를 어느정도 희석시켰지만, 대외적인 위치는 그렇지 못했다. [전시의 자유 프랑스 운동으로] 뼈아픈 노력을 통해 내가 프랑스의 독립과 지위, 이익과 관련해 이룩해놓았던 산물이 이내 망가져버린 것이다.

우리가 버티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투지력이었는데, 프랑스 정권[=제4공화국]은 결과적으로 타국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행동했다. 물론, 이같은 소멸(消滅)을 변명하고자 정권은 '이데올로기 문제'를 끌어댔다. 즉, 전승(戰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이권을 처분한 것은 '유럽 통합'을 위한 것이며, 프랑스를 앵글로색슨의 지배하에 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선 '대서양 연대의식'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적절한 보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개국 서방측 점령지구내 서독 중앙정권의 수립을 허용하였다. 또한, '유럽 석탄 ・철강 위원회(CECA)'가 창설되어 파괴된 우리나라의 광산들이 복구할 수 있는 방편을 찾을 겨를도 없이, 독일인들에게 석탄으로 우리한테 갚아야 할 채무를 면제해주었고, 이탈리아인들에겐 거대한 제철공장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원료를 얻게끔 해주었다.

자르(Saar) 경제의 프랑스 귀속과 그곳에 세워진 자치국가를 현지에 존속시키는 문제도 역시 포기해버렸다. 똑같은 상황속에서 '유럽 방위위원회(CED)'가 창설되었고, 만에하나 거국적인 분노로 이것을 분쇄하지 않았더라면 적용될 뻔했는데, 그랬더라면 승전한 프랑스가 군대를 보유할 권리를 빼앗기거나, 보유하더라도 패전한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에 합류, 이 모든 군대의 지휘권을 미국에 맡겼을 것이다. 일단, '대서양 동맹'이라는 원칙의 선언이 워싱턴에서 채택되자 '나토'가 설치되었고, 이에 기반해 우리의 국방과 우리의 정책이 외국에 의해 지도되는 체제속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베르사이유에 자리잡은 미국 총사령관이 신대륙의 군사권을 구대륙에서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나세르를 상대하면서 파병했을 당시, 각종 각급의 프랑스 군대가 영국인들의 명령하에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협박으로 영국인들이 철군을 결정하자, 우리 군대도 덩달아 철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우유부단함이 특별히 가시화되었던 것은 본토와 해외영토간 관계의 진전에서였다. 거대한 독립운동이 같은 시기에 모든 식민지 인민들을 봉기시켰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상대적인 약화, 이탈리아의 패전,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대미(對美) 종속, 그들의 영토에서 벌어진 식민주의자의 협력을 필요로 한 전쟁이 아시아 ・아프리카인에게 끼친 영향, 그것이 자유주의적이건 사회주의적이건 '인종과 인간의 해방'을 요구한 독트린의 팽배와 마지막으로 현대 경제의 장관이 무산대중속에서부터 불러일으킨 욕망의 물결로 말미암아, 세계는 과거 유럽 제국의 발견과 정복으로 시작된 격동과는 반대 방향으로, 다만 비슷한 정도로 진동했다.

제국(帝國)이 창설했던 지배체제가 이제는 모두 끝장났음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과거의 종속관계를 정치 ・경제 ・문화적 최혜국 협력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지 않을까? 브라자빌 회담이 개최된 1944년 1월부터 프랑스의 이름으로 나는 이 광범위한 문제에 대하여 필요한 방침을 정했고, 1945년에도 알제리와 검은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의 모든 인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함으로써, 그리고 튀니지 ・모로코 국왕을 파리에서 정식 군주처럼 엄숙히 접대함으로써, 또한 내가 상당한 병력을 주어 인도차이나에 파견했던 다르장리외, 르끌레르 두 장군에게 남부[=코친차이나]에만 주둔하면서 별도의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이미 호치민이 지배하고 있었던 북부엔 들어가지 말라는 훈령(訓令)을 전달해 줄곧 이 방침에 따라 행동했다. 호치민과는 특사 생트니가 물밑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제국을 자유롭게 조약으로 맺어지는 '제휴'로 인도하는 이러한 커다란 과업이 충돌이나 난관도 없이, 조만간 성사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능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기 위해선 프랑스 해방 당시 보여주었듯이, '관대하고 강력한 프랑스'를 실제로 대표함을 현지 인민들이 알 수 있도록 과단성있는 정부가 연속적으로 이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정당체제는 이러한 조건을 마련해 줄 수 없었다. 각종 당파들이 식민지 해방이 필요로 하는 명확한 선택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파업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감정과 습관, 이해의 모든 대립을 어떻게 극복하며, 혹은 필요에 따라 분쇄할 수 있었겠는가? 갈팡질팡하는 가운데서도 몇몇 사람들은 훌륭한 착상을 가진 이니셔티브를 취하기도 했으나, 권력 쟁탈을 목표삼은 반대 때문에 이를 끝까지 추진할 수 없었다.

인도차이나 문제를 보면, 내가 하야한 후 처음에 나타났던 경향은 호치민을 파리로 초청해 교섭하려는 것이었는데, 호치민도 그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힘의 행사'를 예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처참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8년에 걸쳐 전쟁에서 승리해보려는 의욕과 평화를 찾아보려는 의욕이 아무런 결정에 이르지 못한 채 엇갈리기만 했다. 전장에서 병사들의 용기와 손실, 행정관리들의 노력과 공적이 어떠한 것이었든, 최종적인 결과는 불가피하긴 했지만 그러나 굴욕적이었던 군사적 패배이자, 정치적 고별(告別)이었다. 모로코 ・튀니지 문제를 보면, 모하메드 5세를 유배하고, 부르기바를 연금시킬 만큼 강제정책을 구사했으며, 모로코 국왕을 복위시키고, 튀니지에 내부적인 자치권을 수용하면서 종국엔 이 양국의 공식적인 독립을 인정해 말로는 '우호정책'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같은 전환을 깨끗하게 매듭지을 줄 몰랐기 때문에 현지에 유지시킨 프랑스 관리와 군대는 모욕만 받았다. 검은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에선 처음에 '민족 자결권'을 주장하는 운동에 맞서다 특히, [1947년] 마다가스카르의 유혈 폭동을 진압한 후 가스통 드페르(Gaston Defferre)의 창안으로 정부 조직법을 적용시켜 중요한 행정, 입법상의 권한이 부여된 원주민들의 정부와 의회를 조직케 하였으나, 그이상 추진해나가지 못했으므로 개혁은 불완전했고, 따라서 위태로웠다. 이 정권의 우유부단함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알제리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다. 반란이 시작될 때까지 파리의 연이은 '하루살이 내각'은 갈팡질팡할 뿐이었다. 1947년, '알제리 법령'이 채택되어 예산을 심의하고, 총독부의 업무를 토의하는 권한을 가지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의회가 창설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훌륭한 방향으로 나아갈 중요한 첫걸음으로, 알제리 주민들이 자신들의 업무를 장악하고, 프랑스 공화국과 제유한 알제리 국가의 점진적인 탄생이 틀림없이 평화적으로 이룩되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 프랑스계(係) 분자의 행동과 고식적인 행정이 발전을 막아버렸다. 시민의 1할만 차지하던 프랑스인 선거단과 나머지 사람들의 선거단이 의원의 반수를 선출하는 선거인단 체제의 개정이 거부됐으며, 당국의 압력이 입후보와 투표에 강력히 반영되었다. 당초, '알제리 법령'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회교도 대중들과 그 정치 지도자들은 곧바로 개혁이 거짓된 것임을 눈치채고, 프랑스 해방 당시에 가졌던 희망을 포기했으며,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그들의 해방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투가 시작되자 계속 확대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잡다한 태도속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많은 지도자들이 이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문제가 요구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는 것, 현지와 본토에서 반대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은 민심의 동요와 정치적 위기를 이용한 의회내의 정파들과 언론기관의 악의(惡意)와 대결해야 했으므로, 비틀거리는 내각으로선 불가능했다. 협상을 위한 몇차례의 제스처, 카이로로 피신한 반란기관과의 몇차례 간접적인 접촉, 간간히 취했던 진압 완화조치, 그것도 금새 취소해버리긴 했지만 평정의 상징으로 카트루(Catroux) 장군을 총독으로 임명한 것을 제외하곤 알제리 전체 지역과 국경에서 맹렬하게 전개된 전투를 병력과 무기, 자금면에서 지원한게 고작이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대외적으로 엄청난 손실로 총 50만의 병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전세계가 해결되지 않는 이 참극을 비난해왔다.

국위면에서도 전적인 손상이었다. 우리 군대의 위신이 입은 손상은 특히 컸었다. 전투의 시련 뿐만 아니라, 때로는 수치스런 가혹한 진압 업무를 담당함으로써, 또한 경악에 빠진 알제리의 프랑스 주민과 회교도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리고 인도차이나에서 당했던 군사적 패배를 감수해야만 하는가라는 비탄에 빠졌던 프랑스 군대는 '무정견'이라 부를수밖에 없는 정치체제에 대하여 더더욱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1958년 초봄, 프랑스 국민들은 외견적으론 잠잠했으나 불안이 가중되어갔다. 누구나 재정의 불균형이 극단적 조치를 필요로 하였고, 대외문제로는 외국인만 우리가 떨어진 '종속적인 지위'를 통해 이득을 취하며, 어느 식민지보다 알제리가 이제 실속없는 저당물에 불과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정권이 워낙 무능했던고로, 국가 안위의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이 명확해졌다.


- 제4공화국 시대, 프랑스 정당정치의 무정견과 위기관리능력 상실을 비판 ・혹평하며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




                1956년 2월 1일, 엘리제궁에서 거행된 공화전선 연립정권으로 출범한 몰레(Mollet) 내각의 친임식 
                같은해 4월부터 수상은 국민의회의 전권을 위임받아 알제리 반란의 토벌전을 개시했다.




덧글

  • jaggernaut 2014/01/28 09:12 # 답글

    제5공화국도 드골의, 드골에 의한, 드골을 위한 정치 체제이고 이후 많은 문제를 노출한만큼 드골이 프랑스에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부여해 주지는 못한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콘라트 아데나워가 드골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합니다. 수상의 강력한 권한과 안정적 임기를 보장하면서도 그 권한의 전횡을 방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민주주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던 나라에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를 세웠으니 말입니다.
  • tex2100 2014/02/02 22:06 # 답글

    개인적으로는 제국주의라는 체제 자체가 그 시대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하고, 그저 복지와 실업자 해소, 경력 등의 명목 하에서 벌인 놈들의 책임이 큽니다만, 그들은 빨리 죽었다는 게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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