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진말기(東晋末期) 잡담 잡소리








포의(布衣)로부터 일어나 몸소 궤칙을 세워 안정시켰으며, 손은과 노순(盧循)을 토벌해 연해의 근심도 해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진흥해 모용초(慕容超)를 멸하고, 요홍(姚泓)을 정복했으며, 탁발씨와 혁련씨마저 숨어버리게 만들었고, 조적(祖逖)과 유익(庾翼), 환온(桓溫), 사안(謝安)의 백년경영 역시 빛바랠 수밖에 없는 정세를 현출해낸 위진(魏晋)시대 최후 ・최고의 명장. 한나라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진정 중국의 군주라 칭할만 했던 효웅(梟雄). 개인적으로 삼국지의 그 어떤 인물들보다도 존경하며, 절찬중인 강남의 자존심 송무제(宋武帝) 유유(劉裕)입니다.




* 유유와 이성계의 공통점(생각나는대로)


1. 변방의 무장으로 입신하여 동시대 최강의 군벌이자 명장으로서 몸값(?)부터 높임.
새로운 시대 조류에 편승해 신흥계급을 규합시키고, 그들의 후원을 받아 역성혁명까지 성공시킴.


2. 일생 동서남북 종횡무진으로 전장을 누벼가며 거의 무패에 가까운 신화를 일궈냄.
사병화된 군단을 밑천삼아 권세를 과시할 수 있었으며, 그 무력을 앞세워 쿠데타-숙청 작렬.


3. 한쪽은 일련의 세제-호구 개편안인 토단(土斷)을, 다른 한쪽은 전제개혁이란 미명하에 과전법을 실시.
新왕조 개창에 대비한 경제기반 확충이자, 기성 지배층에 대한 견제-민심 회유책 차원에서 동일선상.


4. 혁명과정에서 前왕조 종실들이나 반대파에 대한 혹독한 탄압으로 적지않은 피를 뿌림.
그 업보였는진 몰라도, 슬하에 자식세대란 놈들이 콩가루 집안의 영광(...)을 유감없이 시전함.


5. 천성이 골수 무인(武人)인지라 아무래도 정치력 같은게 딸릴 수밖에 없음.
내정 실무는 유목지 ・정도전처럼 최측근 참모로 하여금 총괄케하거나, 그 조언에 절대적으로 의지함.


6. 보위에 등극하기 앞서 변방 호족가 규수 출신의 본(本) 마누라와 사별.
차이점이라면 이쪽은 본처한테서 맏딸 하나만을, 저쪽은 8남매의 나름 자식부자 덕을 봤다는 것?


7. 군신(君臣)은 단순히 기미(羈靡)관계에 불과해 군사와 재정이 대부분 국가에서 활용되지 못했음.
조정엔 전장(典章)이 없고, 군주의 위엄또한 세우지 못했다는 동진과 여말의 정치적 실태 역시 비슷함.




<송서(宋書)> 무제기(武帝紀)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1백년넘게 한차례도 제대로 된 근본적 개혁없이 관후방만한 국정 운영으로 말미암은 기강해이와 부패 탓에 조정은 물러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잘나디 잘나신 중원에서 내려온 귀족느님 후손들은 무위도식 흥청대며 청담 따위의 헛소리만 늘어놓지, 권문(權門)의 겸병은 나날이 극심해져가기만 하지, 강약(强弱)이 서로 능멸해 백성은 유리걸식 생업에 종사하기조차 빠듯한 현실. 거기다 뱃사공이란 놈들은 웬 사이비종교에 넘어가 집단 해상반란을 일으키질 않나, 화북출신 난민 후손이란 이유만으로 '강남 촌놈들'과는 클래스가 남다르게 우월성을 보장한 제반 시스템으로 위화감 조성에 톡톡히 일조했으며, 명색이 천자라는 사마씨는 강남으로 도망쳐온 초기부터 식물상태나 마찬가지. 외부의 이단자가 등장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자체 혁신은 거의 불가능한 단계였다고나 할까...

정상적이라면 사마중달 후손들의 천하는 8왕의 난과 5호(胡) 이민족의 대봉기 크리를 맞으면서 곧바로 무너지는게 마땅했지만, 시원찮고 무능한 엄백호들의 클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명줄이 길었다. 그 배경엔 수도 건강과 삼오(三吳)지방을 근거로 한 망명귀족이 운집한 조정은 물론, 형주의 서부군단과 양주의 북부군단, 손오(孫吳) 이래 강남 재지호족 등 상호집단간 이해를 조정할 구심력이자, 5호에 대항할 한족국가의 통합 심벌로서 존속시켜주는게 당면의 실태에 바람직스럽다는 암묵적 합의가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서진-동진 양진시기를 통틀어 155년간 왕조의 수명이 지속되었는데, 겨우 155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분열과 분산이 특색화된 중세 위진남북조에선 이정도면 장수한 편이다. 해서공 폐위사건이나 손은 반란처럼 멸망 직전까지간 사례만 서너차례 있음.

중흥초기에 제권(帝權) 회복정책의 실패로 촉발된 왕돈-소준의 난과 목제(穆帝)연간 이후 4반세기 내내 끊임없이 획책한 환온의 찬탈 음모, 역대 황제들의 잇따른 단명, 해서공 폐위사건, 선양 준비용 임시황제란 계산하에 환씨에 의해 추대되어 망국지주 신세를 체념했다가 임종 직전에야 왕탄지한테 설복돼 왕조 존속의 결의를 굳힌 간문제의 유조 개작(改作), 사안의 재치가 돋보인 비수대전이란 전대미문의 남침전쟁, 효무제가 횡사하고 보위를 물려받은 정신박약아 안제가 재위한 22년사이 벌어진 혼돈의 카오스속에 언제 어떻게 무너져도 이상할게 없었던 위태하면서 끈질기게 명운을 부지해간 동진이야말로 중국 최강의 근성 오뚜기 왕조가 아니었을까? 사마씨들은 타고난 시운과 어부지리로 망명정권의 수장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만큼 평판이 개선될리가 만무함.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때나마 엄연히 '3국을 제패한 정통왕조'였으며, 가격(家格)과 내력에 있어서 사마씨를 대체할 실력자나 가문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고 본다. 이같은 형세는 4세기말 효무제의 아우 사마도자의 전횡에서 비롯된 중앙정치의 전면적 파탄과 손은난(孫恩亂)으로 국가의 심장부인 삼오지방이 황폐화되면서부터 해체되기 시작, 일찍이 비수대전 전승으로 위망을 확립한 북부군[=劉裕]이 대권을 장악하자 급변하게 된다. 유유가 실행한 각종 사회개혁과 북벌은 선양에 대비하려는 사전 포석임엔 당연했고, 북래 유민-강남 토착민간 차등 해소를 통해 국가체제의 강남화 추세를 촉진시키는 한편 조정에서 말로만 떠들어왔던 국시, 즉 고도(古都) 낙양과 장안의 수복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사마씨왕조의 존속 명분과 권위를 무너뜨린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덧글

  • 알렉스 2014/03/01 09:18 # 답글

    조금만 힘을 썼으면 주원장보다 수백년 앞서 강남에서 중원을 통일하는 역사를 썼을지도 모르는 위인이죠. 이쪽 역사를 판지가 오래라 잘 기억이 안나는데 장안 함락인가? 여튼 화북의 어느 곳을 공략할때 동맹군과 손발이 안맞아서 실패했던걸로 아는데.... 심월님은 이쪽 전문이시니 잘아실듯....
  • 유니콘 2014/03/01 10:06 # 답글

    근디 유태조와 이태조의 결정적 차이점은 이방원 세종대왕 라인의 존재 아닌지요???
  • ㄷㄷ 2014/03/01 10:57 # 삭제 답글

    사마씨들 깽판을 보면 동오의 덕왕전하는 천하영웅인듯요 ㅋㅋ
  • cc 2014/03/01 19:48 # 삭제 답글

    그저 좀 비슷하다 싶은거 이리 끼워 맞추고 저리 갖다 붙이고 역시 역덕은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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