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종(宋高宗)의 붕어와 묘호(廟號)논쟁 세계사

 






효종(孝宗) 순희(淳熙) 14년(1187) 9월 계묘일, 태상황(太上皇, 宋高宗)에게 병이 생겼다. 겨울 10월 신미일에 황제가 조회를 중단하고, 태상황을 간병했다. 사면을 내렸다. 을해일, 태상황이 덕수전(德壽殿)에서 붕어하자 유조(遺詔)로 태상황후(太上皇后)를 황태후라 개칭했다. 황제가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펄쩍뛰면서 재신(宰臣) 왕회(王淮) 등에게 이르기를, '진효무제(晋孝武帝)와 위효문제(魏孝文帝)는 3년상을 치렀음에도 국정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鑒)>에 기재된 것이 상세하다'라고 하였다. 왕회가 '진무제(晋武帝)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으나 나중엔 궁중에서 관리가 심의(深衣)를 두르는걸 중지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르기를, '당시엔 신료들이 그 도리가 아름답지 못했으니 밝은 대상으로부터 논의해야 한다.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는데, 어찌 유해하겠는가?'


신사일에 조서로 이르기를, '태상황제께서 돌연 세상을 져버리셨으니 짐은 마땅히 3년상을 치룰 것이다. 신료들은 다음달부터 령(令)을 따르라. 유사(有司)는 의례와 제도를 검토 ・논의해 아뢰도록 할지어다.'   


우무(尤袤, 太子少卿)가 전례에 의거해 대행(大行)황제 묘호를 '고종(高宗)'으로 정했다. 한림학사 홍매(洪邁)만이 홀로 묘호를 세조(世祖)라 정할 것을 간청했다. 우무가 예관(禮官) 안사로(顔師魯) 등과 더불어 상주하기를,


'종묘 제도에 따르면 조(祖)는 공훈을 세운 분께, 종(宗)은 덕망을 갖춘 분께 올리는 겁니다. 재능과 조상의 규범으로 대업(大業)을 시작하신 분은 태조(太祖, 趙匡胤)이십니다. [5대10국의] 분열되었던 화하(華夏, 中國)를 통일하신건 태종(太宗)이십니다. 진종(眞宗)~흠종(欽宗)에 이르기까지 성스러움이 대대로 전승됐으며, 묘제(廟制)는 일관되고, 만세(萬世)에 걸쳐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예법에서 자식은 부친에게 굽히고, 그를 존숭해줘야 합니다. 태상황께선 휘종(徽宗)의 아드님으로 자식이 조(祖), 부친이 종(宗)이 된다는건 밝고 아름다웠던 질서를 잃어버리는 셈입니다. [묘호를] 논의하는 사람들로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世祖)와의 비교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광무제는 장사왕(長沙王)의 후예로 포의(布衣)로부터 굴기해 애제(哀帝)와 평제(平帝)를 계승하지 않아 조(祖)라고 칭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태상황께선 중흥(中興)하시어 비록 광무제와 견줄만 합니다만, 엄연히 휘종의 정통을 계승한 분이십니다. 광무제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장래, 종묘에 합사하는데 휘종의 후예로서 조(祖)를 칭하게되어 하늘의 영령들이 노하진 않을까 불안하옵니다.' 조서로 신료들에게 회의를 소집하도록 지시했으며, 우무가 처음에 건의한대로 결정되자 홍매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조서로 예관의 의사를 따르도록 하자, 의견이 분분해졌다. 예부(禮部)에서 조회하고, 태상사(太常寺, 종묘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 역시 '고종'으로 정할 것을 주문했다.

본조(本朝, 南宋)를 창업 ・중흥시키고, 고종이 상구(商丘)에서 사람들을 모아 상구를 취했던 것을 간했으며, 마침내 처음의 논의대로 처리토록 하였다. 을유일, 백관(百官) 5명이 상표해 황제가 대내(大內, 臨安城 皇宮)로 돌아올 것을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무자일, 황제가 상복 차림에 소련(素輦)을 타고 대내로 돌아왔다. 11월 기해일, 황제가 흰색 포건(布巾)을 착용하기 시작했으며 도포 차림으로 연화전(延和殿)에서 정사에 임했다. 보름째 이르러 처음에 덕수궁(德壽宮, 太上皇의 別宮)에서 했던대로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사용하게 되자 조서로 태자에게 의사당에서 일반 업무를 결재하라고 지시했다. 경자일, 황태자가 세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신축일에 황제가 덕수궁의 제사에 임했으며, 백관들은 상복을 벗었다. 갑진일, 신료 3명이 상표해 어전(御殿)에서 정사를 듣도록 간청하자, 태상황을 종묘에 합사할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순희 15년(1188) 봄 1월 초하루 정유일, 덕수궁에 이르러 태상황을 위해 정중히 주연(酒筵) 행사를 베풀었다. 3월 경자일, 대행(大行) 태상황께 시호를 올려 '성신무문헌효황제(聖神武文憲孝皇帝)', 묘호를 고종이라 정하였다. 한림학사 홍매가 여이호(呂頤浩)와 조정(趙鼎), 한세충(韓世忠), 장준(張浚)을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자고 건의했다. 비서소감(秘書少監) 양만리(楊萬里) 또한 장준이 사직에 공적을 세운만큼 배향을 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병인일, 고종을 영사릉(永思陵)에 안장했다.




                             절강성 소흥현(紹興縣) 보산(寶山) 기슭에 소재한 송고종(宋高宗)의 영사릉(永思陵)
                             원초(元初) 라마승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으며, 1960년대 차밭으로 개간되었다.




덧글

  • KittyHawk 2014/04/28 22:32 # 답글

    황제란 살아서도 고생이요, 죽어서도 편하지 않은 거로군요...
  • ㅇㄹㅇㄹ 2015/04/10 15:48 # 삭제 답글

    충신과 간신을 이용해 적절히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던 교묘한 인물. 진회보다 더 소름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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