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3권, 개희북벌(開禧北伐) 세계사








영종(寧宗) 가태(嘉泰) 4년(1204) 봄 정월, 한탁주(韓侂胄)의 주장으로 금국 정벌을 결정했다. 당시 금나라는 북방의 타타르(鞑靼) 등 부족들이 소란을 일으켰는데, 해를 거듭하면서도 토벌되지 못하는 바람에 전쟁이 잇따라 화(禍)가 맺혔고, 사졸은 도탄에 빠졌다. 부고(府庫)는 탕진되어 텅비었으며, 국세가 나날이 약화되고, 도적떼가 봉기했으니 백성들은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누군가 한탁주에게 천하에 떨칠만한 공훈을 세워 지위를 강화시키라며 권고하자, 한탁주도 수긍하여 마침내 중원 수복의 의사를 굳혔다. 전쟁물자를 비축하고 군사를 모집했으며, 봉장고(封樁庫)의 황금 1만냥을 지출해 포상금으로 예치했다. 오희(吳曦)에게 서촉(西蜀)의 병사를 훈련시키도록 명을 내렸다. 앞서 안풍부(安豐府) 수령 여중방(厲仲方)은 '회북(淮北)의 유민들이 모두 귀부하길 바라고 있다'며 말했고, 절동안무사(浙東安撫使) 신기질(辛棄疾)도 조정에 들어와 이르기를, '금나라는 반드시 망합니다. 대신들 또한 한결같이 전쟁을 바라고 있으니, 여기에 부응하는 것이야말로 계책입니다'라고 간하자 한탁주가 크게 기뻐했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등우룡(鄧友龍)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금나라는 지방관리까지 뇌물을 써서 사람을 구하는 실정으로 위태로움과 쇠약함을 갖추었다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왕사(王師)도 이러할진대, 썩어 문드러지는 형세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한탁주가 이말을 듣고선 북벌의 의지를 더욱 다졌다. 5월 계미일, 악비(岳飛)를 추봉(追封)해 악왕(鄂王)으로 삼았다. 악비는 일찍이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한탁주가 제장들을 독려코자 추봉한 것이다. 개희(開禧) 원년(1205) 여름 4월, 무학생(武學生, 사관생도) 화악(華嶽)이 상서하길 조정에서 군사를 일으켜선 안되며, 변방의 분란을 지적하고, 한탁주와 소사단(蘇師旦), 주균(周筠)을 참수해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고 간했다. 한탁주가 진노하여 그를 대리(大理, 교도소)에 하옥시켰다가 건녕(建寧, 복건성)으로 유배보냈다. 5월, 금주(金主) 완안경(完顔璟)이 장차 조정[南宋]에서 북벌한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대신들을 모아 회의를 가졌다. 모두가 '송나라는 패전의 영향으로 스스로 구할 여유조차 없으니, 감히 맹약을 위반하진 않을겁니다'라고 말했다.

완안광(完顏匡)만이 홀로 이르기를, '[송나라가] 충의(忠義) ・보첩(保捷)의 군사를 두었다는 것은 저들의 선대(先代) 개보(開寶) ・천희(天禧)연간에 기초하므로, 중국을 제패할 속셈임을 어찌 잊으셨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완안경이 수긍했다. 이윽고 명을 내려 평장정사 복산규(僕散揆)로 하여금 변(汴, 하남성 개봉시)에서 군사를 모집해 방비토록 하였다. 6월, [송나라에선] 조서로 내외(內外)의 여러 군대에 행군계획을 기밀로 삼도록 지시했다. 8월에 금나라는 하남선무사(河南宣撫司)를 파면했다. 처음에 복산규가 변에 도착하고 나서, 송나라 조정앞으로 공문서를 띄우면서 [국경분쟁이 발발해] 맹약을 위반한걸 책망했는데, 3성(三省)과 추밀원에선 '변방의 신하가 말썽을 일으킨 것으로 그자는 이미 파면되었으며, 국경지대에 배치된 병사들 또한 철수시켰다'고 응답했으므로 복산규가 그대로 믿었다. 전전부도지휘사(殿前副都指揮使) 곽예(郭倪)와 호주(濠州)의 수비대장 전준매(田俊邁)가 홍현(虹縣, 안휘성 사현) 백성 소귀(蘇貴) 등을 꼬드겨 첩자로 삼았으니, 소귀는 복산규한테 달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송나라에서 변방 수비를 강화하는 이유는 도적떼를 우려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데다, 들은바에 의하면 감찰관이 아뢰길 [금나라를] 더욱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방비조차 못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병사는 모두 천민들이고, 스스로 식량을 챙겨야 하는 실정이며, 곤궁하여 앉은채로 굶주리고, 질병이 만연해 죽은자가 매우 많습니다."


복산규는 이말을 듣고 방비를 한층 느슨히했으며, 그말을 황제 완안경[章宗]에게 보고했다. 이때, 금나라 군신들은 선제공격을 제안했으나 완안경이 이르기를 '남북(南北)간의 화호(和好)가 이룩된지 40여년으로 백성들은 군사를 알지 못한다.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복산규의 말을 다시 듣고선 이윽고 선무사를 파면한데 이어, 새로이 병사들을 배치시켰다. 정해일, 송나라에선 호북안무사(湖北安撫司)에게 신경군(神勁軍)을 모집 ・증강토록 명했다. 을사일, 곽예를 진강도통(鎭江都統) 겸 지양주(知揚州)로 삼았다. 9월 정미일, 한탁주는 적(敵)의 허실을 탐색하고자 진경준(陳景俊)을 새해 축하사절로 금나라에 파견했다. 금주 완안경이 진경준을 돌려보내며 타이르기를,


"대정(大定)초년에 세종(世宗)황제께선 송나라를 조카의 나라로 삼도록 윤허하셨고, 짐은 그것을 준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너희 나라가 우리의 변경을 자주 침범하니, 대신을 보내 하남(河南)을 선무해야만 했다. 게다가, 너희 나라의 공문서를 보고나서 짐은 즉시 선무사를 파면했으나, 너희 나라에서 국경을 침범해 소란을 일으키는건 더욱 심해졌다. 짐은 다년간 이어져온 화호를 감안해 송나라가 맹약을 위반했음에도 인내하고 있다만, 이같은 뜻을 조카 송나라 황제가 자세히 알지 못할까 걱정되는구나. 경(卿)은 귀국하는대로 마땅히 이말을 전하거라."


진경준이 돌아와 보고했으나, 북벌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진자강(陳自強)은 경계하여 입막음시켰다. 구숭(丘嵩)을 강회선무사(江淮宣撫使)로 삼았으나, 구숭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처음에 탁주가 북벌 의사를 구숭에게 암시하자 구숭이 이르기를, '중원이 함락된지 1백년이 다 되어가지만, 저 역시 단 하루도 잊은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전쟁을 꺼리며 두려워하고, 어린애들이 선두에 앞장서서 위급한 임무를 담당하며, 병사들이 서로 승부를 아는것만 못하니, 첫 화근은 누구한테 그 임무를 맡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허세를 부리거나 탐욕스런 자를 진급시킨다는건 필시 소매만 걷어올린채 혹여라도 있을지 모를 행운을 바라는 격이니, 의당 한시바삐 그런 자들을 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나라에 해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이르러 구숭에게 강회(江淮)를 선무하도록 했는데, 구숭이 편지로 금나라 사람들은 맹약을 파기할 의사가 없으며, 중국은 의당 통일되어야 하지만, 거듭 군사적 실태를 경계하면서 승리할지라도 금나라가 허점을 내비친 덕분일거라고 지적했다.

이때문에 선무사직을 강력히 사양하며 받지 않으니, 탁주는 기뻐하지 않았다. 12월 무인일, 금나라의 사신 태상경(太常卿) 조지걸(趙之傑)이 새해 축하차 입조했다. 한탁주가 과거 사신으로 금나라 황제 부친의 제사에 임해 피휘한 전적이 있었는데, 조지걸은 이윽고 거만하게 굴었다. 탁주가 황제[宋寧宗]에게 대내(大內)로 돌아오도록 간청했다. 저작랑 주질(朱質)이 오랑캐 사신을 참수할 것을 청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조서로 사신들로 하여금 새해 첫날에 다시 조현케 했다. 개희 2년(1206) 여름 4월 경오일에 진회(秦檜, 高宗代 재상)가 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추론하여 왕작(王爵)을 삭탈하고, 시호를 무추(繆醜)로 바꿨다. [江陵府 副都統制] 황보빈(皇甫斌)이 당주(唐州)와 등주(鄧州)를 도모하려고 하자, 금나라에선 재차 복산규에게 명하여 개봉에서 사령부를 지휘해 하남(河南) 전역이 통제에 따르도록 했으며, 각 도(道)에서 징집한 병사들을 분산시켜 요새를 방비케 하였다. 창덕부(彰德府) 수령에게 한기(韓琦, 仁宗代 재상, 탁주의 증조부)의 묘를 지키고, 송나라 유민의 거주지를 조사해 보고하도록 했다.

진강도통제(鎭江都統制) 진효경(陳孝慶)이 사주(泗州)를, 강주통제(江州統制) 허진(許進)이 신식현(新息縣)을, 광주(光州) 충의군(忠義軍)의 손성(孫成)이 포신현(褒信縣)을 수복했다. 5월 신사일에 진효경이 홍현(虹縣)을 수복했다. 정해일, 한탁주가 사주, 신식(新息), 포신(褒信), 영상(潁上), 홍현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직학사원(直學士院) 이벽(李壁)으로 하여금 벌금(伐金)전쟁 조서의 초안을 잡도록 지시했다. 내용인즉슨 대략 다음과 같다.


"천하의 도리란 본래대로 돌아오기 마련이며, 우리나라는 오로지 그 이치를 펼치려 할 따름이니 백성들의 마음은 공손되고, 필부라 할지라도 원수에게 보답함이 없지 않으랴! 어리석고, 추한 오랑캐[=금나라]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맹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백성의 자산은 감소했으며, 그 탐욕스런 욕망을 받들어 주었으나 획득한 것만큼 내주는건 없음에도, 오랑캐는 자신의 주장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다. 군사들이 침입해와 방자하게 굴면서 변방은 피폐해졌고, 사신은 조정에 와서 거칠게굴어 물건을 계속 보내주는 것이 그치질 않았으며, 문장의 업신여김이 갈수록 심해졌다. 부끄러움을 참고, 치욕을 받아들였지만, 나라 사람들의 마음은 벌써 한계에 달했다. 그 죄를 공표하여 토벌하는 바, 적들의 무리는 장차 무너지는 형세라. 출병엔 명분이 있으며, 군사는 바르고 용감해야 한다.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누구인들 충성과 절의가 없겠는가? 자식된 자로서,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조종(祖宗)의 묘소를 기억하라!"




                                       개희북벌 당시의 천자 송영종(宋寧宗), 첫번째 황후가 한탁주의 질녀였다.
                                       30년간 재위했으나, 암우하여 권신(權臣)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했다.




처음에 병부시랑 엽적(葉適)이 황상을 알현하고 아뢰기를, '약한 것에 만족하면서 편안함을 다행으로 여기는 자는 쇠퇴하지만, 약함을 고쳐 강함을 취하는 자는 융성해진다고 했습니다'라고 하자 한탁주가 이 말을 듣고선 기뻐하며 엽적을 직학사원으로 기용해 그로부터 조서의 초안을 빌려와 천하에 과시하고자 했는데, 엽적이 병으로 사직하자 명을 바꾸어 이벽이 대신하도록 시킨 것이다. 5월 갑오일, 곽예가 곽탁(郭倬)을 파견해 이여익(李汝翼)의 병사들과 연합해 숙주(宿州)를 공격케 했으나, 패배하였다. 기주(蘄州)로 돌아오자 금나라 사람들이 추격해와 포위당했으나, 곽탁과 마군사통제(馬軍司統制) 전준매가 적병들을 물리친 덕분에 벗어날 수 있었다. 이무렵, 건강도통(建康都統) 이상(李爽)이 수주(壽州)를 공격했지만, 역시 패하였다. 황보빈이 당주에서 패전했다. 강주도통(江州都統) 왕대절(王大節)이 채주(蔡州)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6월 갑인일, 등문룡을 파면하고 구숭을 양회선무사로 삼았다. 출병후로도 전공이 없자, 한탁주가 문룡을 구숭으로 교체하여 양주(楊州)에 진주시킨 것이다.

구숭이 진지에 도착하자, 부서의 여러 장수들을 모두 삼아(三衙) ・강상(江上)의 군사로 분산시켜 강회(江淮)지방의 요새를 수비하도록 했다. 한탁주에게 사람을 보내 패잔병을 거두어 초무하는 일을 논의하고, 또한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했다. 구숭은 소사단과 주균이 군사를 붕괴시켜 어지럽혔던 사실을 명백히 밝혀 보고했으며, 이여익과 곽탁이 병사를 상실한 점도 지적했다. 회동(淮東)의 모든 병력으로 양회(兩淮)지방을 지원코자 상주하기를, '사주(泗州)는 고립되었고, 회북(淮北)엔 정예병사 2만명이 주둔중입니다만, 만에하나 금나라의 병사가 남쪽으로 청하구(淸河口, 강소성 회양시)를 넘어온다던지, 혹은 천장(天長) 등의 성을 범한다면 머리와 꼬리가 잘려나가는 형국과 같사오니, 적에게서 무너지는 계책일 따름입니다. 회북을 포기하고, 우이(旴眙)로 회군시키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건의하자, 그대로 따랐다. 이와 동시에 왕대절, 이여익, 황보빈, 이상 등을 모두 좌천시켰고, 곽탁을 진강(鎭江)에서 참수했다. 가을 7월, 한탁주가 이미 군사를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소사단이 실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학사원 이벽을 초청해 술자리를 함께하면서 소사단과 일을 꾸몄던 사실을 귀띔해줬다. 이벽이 그 과오를 상세히 지적하면서 살펴보고 전력을 다해 제안하기를, '소사단은 권세만 믿고선 제멋대로 부렸으며 고관들을 비방했으니, 이자는 귀양을 보내기는 커녕 천하에 사죄하더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라고 간언하자 한탁주가 수긍했다. 그날로 소사단을 파직시키고, 가산(家産)을 적몰했으며, 신분을 박탈해 소주(韶州, 광동성)로 안치시켰다. 10월 병자일에 금나라의 복산규가 병사를 나누어 9방면의 도로로 남하해왔다. 복산규의 병사 3만명이 영주(潁州)와 수주(壽州)로 진격했으며, 완안광(完顏匡)의 병사 2만 5천은 당주와 등주에, 흘석렬자인(紇石烈子仁)의 병사 3만명은 과구(渦口, 안휘성 회원현)로 진격했다. 흘석렬홀사호(紇石烈忽斜虎)의 병사 2만명은 청하구에, 완안윤(完顏充)의 병사 1만은 진창(陳倉)에, 포찰정(蒲察貞)의 병사 1만은 성기(成紀)에, 완안강(完顏綱)의 병사 1만은 임담(臨潭)으로 진격했다. 석말중온(石抹仲溫)과 완안린(完顏璘)의 병사 5천명은 염천(鹽川)과 래원(來遠)으로 진격했다.

홀사호가 청하구로부터 회하(淮河)를 건너와 마침내 초주(楚州, 강소성 회안시)를 포위했다. 11월 갑신일, 구숭을 첨서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로 삼아 강회지방의 군마(軍馬)를 감독케 하였다. 금나라 군사가 회남(淮南)을 공격해 급박해지자, 조서로 곽호(郭杲)로 하여금 장병들을 진주(眞州, 강소성 의정현)에 주둔시켜 지원토록 했으며, 또한 구숭에게 강회의 군마를 감독케 하였다. 구숭이 노주(廬州, 안휘성 합비현)와 화주(和州, 안휘성 화현)를 포기하여 장강(長江)을 방어할 계책으로 삼으라 권고했다. 구숭이 '회하를 포기하여 적들을 장강의 천험으로 맞아들였으니, 나는 마땅히 회남과 더불어 존망(存亡)을 함께하겠다'라면서 수비병력을 증강시켰다. 금나라의 완안광(完顏匡)이 광화(光化), 조양(棗陽), 강릉을 점령하자, 부도통 위우량(魏友諒)이 포위를 뚫고 양양(襄陽, 호북성)으로 달려갔다. 초무사 조순(趙淳)이 양양의 번성(樊城)을 불태웠고, 금군은 마침내 신양(信陽)과 양양, 수주(隨州)를 깨뜨렸으며, 덕안부(德安府)로 진격해 포위했다. 복산규가 회하에 도달하면서 사람을 보내 수심을 알아보게끔 하였다.

팔질(八迭)의 여울에서 도강하면서, 즉시 오둔양(奧屯驤)을 하채(下蔡, 안휘성 봉대현)로 보내어 군세를 과시하고 회하를 건너갈 것이라며 떠벌렸다. 수비대장 하여려(何汝勵)와 요공좌(姚公佐)가 그러하다 여기고, 모든 무리들을 화엽진(花靨鎭, 안휘성 수현)에 주둔시켜 방어에 들어갔다. 복산규가 새불(賽不) 등을 보내어 팔질에서 군사를 몰래 도강시키고, 남안(南岸)에 주둔했다. 관군(官軍, 宋軍)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가 패배하여 모두 달아났으며, 서로 밟혀죽은 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복산규가 마침내 영구(潁口)와 그 남쪽의 안풍군(安豊軍), 곽구현(霍丘縣)을 겁략하였다. 화주로 나아가 포위하면서 와량하(瓦梁河)에 주둔했고, 드러내어 여러 고을을 치면서 종횡무진했는데, 군사를 정비하여 강가를 따라 기병과 깃발을 늘어놓았으니, 강남에선 몹시 두려워했다. 12월에 흘석렬자인이 저주(滁州)를 함락시키고, 진주(眞州)에 입성했다. 고을의 사민(士民) 가운데 도주하여 강을 건너온 자가 10여만명으로 진강부(鎭江府) 지사 우문소절(宇文紹節)이 선박을 마련해 구제하는 한편, 식량을 나눠주었다.

이로부터 회서(淮西)의 모든 현(縣)과 진(鎭)이 금나라에 함락당했다. 이무렵, 복산규는 내심 군사를 물리고 화의를 재개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스스로 한기(韓琦)의 5세손으로 자칭한 한원정(韓元靚)이란 사람을 파견해 회하를 건너게 하였다. 구숭이 그를 사로잡아 내려온 연유를 힐책하니, 한원정이 대답하기를 '양국이 교전중입니다만, 북조(北朝, 금나라)에선 이번 전쟁이 한태사(韓太師, 한탁주)의 의도에서 연원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상주(相州, 하남성 안양시)의 분묘와 종족들을 모두 보호할 수 없어 태사님께 알려드리고, 의지하려는 따름입니다'라고 하자, 구숭이 사신의 말을 듣고나서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했다. 은밀히 사신을 호송하여 북쪽으로 돌려보내면서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해봤다. 이윽고 한원정이 돌아와 구숭이 금나라 사령부의 서한을 얻게되자, 그것을 조정에 고했다. 한탁주는 출정한 군사가 자주 패배하자 일전의 계책을 후회하면서 사재(私財) 20만냥을 털어 군사들을 보조해주고, 구숭에겐 사람을 뽑아 서간과 예물을 지참해 적진(敵鎭)으로 건너가 강화조약을 협의해달라며 부탁했다.

구숭이 진벽(陳壁)을 심부름꾼으로 삼아 서간을 지참해 복산규에게 보내어 군사를 쉬게하고, 강화를 맺자 청했다. 복산규가 이르기를, '칭신(稱臣)과 영토 할양, 이번 참화를 일으킨 대신의 수급이라면 가능하다'라고 답했다. 구숭이 재차 왕문(王文)을 파견해 왕래하며 '군사를 움직였던건 소사단과 등문룡, 황보빈이지, 조정의 뜻은 아니었다'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3명 모두가 좌천됐음을 알렸다. 복산규는 '만약 한탁주에게 전쟁 의사가 없었더라면 소사단 등이 어떻게 감히 전단할 수 있었나?'라고 반문했다. 왕문이 돌아오자 구숭은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어 왕래하며 회북의 피난민을 송환하고, 금년 세폐(歲幣)의 지급을 수용하자, 복산규가 마침내 받아들이고 군사를 화주로부터 퇴각시켜 하채에 주둔했으나, 호주(濠州)엔 통군(統軍) 하나만 남기어 지키도록 하였다. 필재우(畢再遇)를 권(權)산동(山東) ・경동초무사(京東招撫司)로 삼았다. 이무렵, 제장들이 모두 패배했음에도 필재우만이 수차례에 걸쳐 전공을 세웠다. 앞서 금나라 사람들이 뱃길을 점령했는데, 재우가 밤중에 허수아비 수천개를 묶어 갑주를 입혔다.

허수아비에 깃발과 창을 쥐어주고, 엄연히 세우며 줄이 이어졌는데 날이 밝아오자 북을 치게했다. 금나라 병사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뱃길을 엄중하게 지켰다. 나중에 그것이 실제로 병사가 아니라는걸 눈치채자 기세가 꺾여버렸다.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공격하니, 금군은 대패했다. 또한, 일찍이 금나라 군사와 싸우는데 서너차례나 먼저 퇴각하다 하루가 저물었다. 향료로 삶은 콩을 길위에 뿌려놓고, 전방에서 치고받다 거짓으로 도주하자 금군이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했으나, 굶주린 말들이 콩의 향냄새를 맡고선 그걸 모두 먹어치우느라 채찍으로 쳐도 앞으로 가질 않았다. 필재우가 반격하니, 금나라 병사들과 군마의 죽은 숫자가 수없이 많았다. 또 한번은 보루에서 대치하는데, 적병들의 숫자가 우세하여 싸우기 곤란했던 탓에 저녁에 철수하였다. 군영엔 깃발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양(洋)들을 나란히 묶어 북[鼓]위에다 올려놓아 북소리가 울리게끔 만들었다. 금나라 병사들은 송군(宋軍)의 군영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채 며칠을 보내다가 뒤늦게서야 눈치챘다. 송군을 추격하려 했으나, 이미 멀리 달아난 뒤였다.




                                 북벌 실패후 반(反)한탁주 쿠데타의 주역으로 활약한 예부시랑 사미원(史彌遠) 
                                 효종대 명재상 사호(史浩)의 3남이며, 사반세기간 조정의 실세로 군림했다.

                       


개희 3년(1207) 봄 정월 정축일, 구숭을 파면하고 장암(張岩)에게 명하여 강회(江淮)지방의 군마를 감독케 하였다. 금나라에선 이미 강화를 맺으려는 심산이었는데, 구숭이 상소해 금나라측에 공문을 띄워 화의를 체결해야 한다며 간청했다. 금나라에서 북벌을 주모한 자가 한탁주임을 지적한 이상, 공문을 발송하고, 마땅히 한탁주의 모든 직위를 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탁주가 진노하여 구숭을 해임한 것이다. 2월에 건강부(建康府, 남경시) 지사 엽적(葉適)에게 강회제치사를 겸임케 했다. 엽적이 상언(上言)하기를, '삼국시대 손씨(孫氏, 吳나라)는 강북(江北)을 지킴으로써 강남을 보전했지만, 남당(南唐)은 이곳을 상실함으로써 쇠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청하건대, 강북의 여러 고을을 아울러 통제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조서로 그것을 따랐다. 이무렵, 전세가 급박해져 사방으로 격문이 오고갔는데, 엽적은 평상시처럼 업무를 관장하면서 군수(軍需)를 모두 공금으로 조달해 민심이 동요되지 않았고, 법도를 따르며 전력을 다해 그곳의 방어에 임했다. 이달에 금나라의 복산규가 하채에서 죽었다.

복산규에게 병이 생기자, 금나라 황제는 좌승상 완안종호(完顔宗浩)에게 명하여 변(汴)에서 군사를 감독케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복산규가 죽은 것이다. 여름 4월, [송나라에선] 방신유(方信孺)를 국신소참의관(國信所參議官)으로 삼아 금나라 진영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한탁주가 금군 진영에 파견할만한 답방사의 적임자를 물색했는데, 가까운 신하가 방신유를 천거하자 승상이 그를 소산(蕭山)에서 도성(都城, 臨安)으로 불러들이고는 사절의 임무를 맡겼다. 방신유가 '우리가 개전(開戰)할 때부터 금나라는 주모자가 누구였는지 수소문중이라는데, 어떻게 여기에 답해준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한탁주가 매우 공감했으며, 방신유는 장암의 서한을 지참하여 금나라 군영으로 떠났다. 9월에 방신유의 관직을 강등했다. 처음에 방신유가 호주에 도착하자, 흘석렬자인이 그를 체포해 구금하고, 칼을 들이밀어 감시하면서 식사도 주지 않은채 강화의 조건으로 다섯가지를 요구했다. 방신유가 '철군하면 세폐가 돌아가겠지만, 주모자까지 보낸다는건 예로부터 없는 일이다. 칭신과 영토 할양은 신하로서 감히 말할수 없다'고 했다. 

흘석렬자인이 노하여 '아마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라면 관두라'고 하자, 방신유는 '나는 도성(都城)의 문을 나섰을 적부터 생사(生死)에 연연해하지 않았다'며 맞받아쳤다. 흘석렬자인이 개봉에 도착하여 완안종호를 만났고, 여관에 머물게 했다. 완안종호가 방신유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다섯가지 조건을 계속 주장했지만, 방신유도 옳고 그름을 따지며 굽히지 않았다. 완안종호가 힐책하길 그만두고 답서를 보내며 이르기를, '강화가 결정될 때까지 전쟁을 다시 중단하겠다'라고 하였다. 방신유가 돌아오자 조정에선 임공진(林拱辰)을 통사사(通謝使)로 삼고, 방신유와 더불어 국서(國書)의 초안을 보고하도록 했으며, 사례비로 1백만민(緡)을 내주었다. 방신유가 개봉에 이르렀는데, 의견을 정확히 제시하지 않자 종호가 노하여 황급히 서약서를 보내와 주륙하거나 감금할 수 있다고 협박했으나, 방신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이것은 포상금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세폐를 늘리는건 불가하므로 '사례비'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저들이 요구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면, 나의 목부터 쳐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때마침, 촉(蜀, 사천성)에서 군사를 파견해 대산관(大散關)을 수복하자 종호는 더욱 의심해 방신유를 돌려보냈다.

재차 편지로 장암에게 이르기를,


"칭신하고, 즉시 강남과 회남 사이를 국경으로 삼으라. 세세로 송나라는 아들 나라가 될 것이며, 대강(大江, 장강)을 전부 할양해 경계로 삼자. 또한 모의를 주도한 간신배를 참수해 수급을 넣은 상자를 헌납하고, 세폐는 5만냥과 비단 5만필씩 추가하며, 군인 포상금으로 은(銀) 1천만냥을 바친다면, 화호(和好)를 논의할 수 있겠다."
 

방신유가 돌아와 그 서한을 건네주었다. 한탁주가 질문하자, 방신유는 금나라에서 언급한 다섯가지의 요구 사항을 설명한즉슨 첫째가 양회지방을 할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폐의 배증(倍增), 셋째는 포로와 유민들의 송환, 넷째는 은으로 배상금을 지급해주는 것이라고 귀띔했으나 다섯째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탁주가 거듭 다그치자, 방신유는 머뭇거리며 '태사(太師, 한탁주)의 머리를 얻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한탁주가 대노하여 방신유의 관직을 3등급 강등하고, 임강군(臨江軍, 강서성)으로 유배보냈다. 방신유가 사신으로 세차례 군영을 드나들며 세치혀로 오랑캐를 강하게 꾸짖자, 적들은 뜻을 굽히고 비록 화의가 체결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협상이 성사되었다듯이 여기고 있었다. 방신유가 좌천당하자, 재차 사신을 파견코자 하는데 조정을 돌아봐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의 근신들이 왕남(王楠)을 추천했고, 왕남을 가(假)우사낭중(右司郎中)으로 임명해 서한을 지참하여 북쪽으로 가도록 명했다. 왕남은 왕륜(王倫)의 손자이다. 신묘일에 조순(趙淳)을 강회제치사로 삼았다. 을미일에 장암을 파면했다.

한탁주는 금나라에서 자신이 전쟁을 주도한 죄를 묻는다는 사실에 노하여 끝내 강화협상을 파기하고, 군사를 다시 일으키고자 조순을 강회에 주둔시켰으며, 장암을 파면한 것이다. 9월에 장암이 도독부를 열었는데, 아무런 전공도 세우지 못했음에도 고을의 관전(官錢) 370만민(緡)을 죄다 탕진해버렸다. 11월 을해일, 예부시랑(禮部侍郞) 사미원(史彌遠)이 상주하기를 '거병한 이래 촉구(蜀口)와 한수(漢水), 회남의 백성 가운데 적병의 창에 죽어간 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조정과 민간의 여력이 크게 감소했음에도, 오히려 한탁주만이 모르고 있사오니, 천하가 근심하고 두려워합니다'라고 하였다. 전황이 대단히 위급해지자, 탁주를 주살하라고 간했다. 양황후(楊皇后)는 본시 탁주를 미워해 황자인 영왕(榮王) 조엄(趙儼)에게 상소하도록 시키면서 '한탁주가 전쟁을 재개한다는데, 장차 사직(社稷)에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했지만, 황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황후가 곁에서 거듭 찬동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양차산(楊次山)이 신료들 가운데 적임자를 물색해 함께 강구하겠다고 청하자, 겨우 허락했다.

양차산이 사미원과 모의하고, 미원은 밀명을 받았다. [副宰相] 전상조(錢象祖, 5대10국 吳越國王 錢弘俶의 7세손)는 일찍이 거병을 비판한 바 있어 한탁주가 당황했던 까닭에, 그에게 먼저 모의를 귀띔했다. 전상조가 이를 수락하고, 이벽(李壁)에게도 알렸다. 이벽은 모든것이 발각될까 우려해 전전사(殿前司, 禁軍)의 지휘관 하진(夏震)에게 명하여 병사 3백명을 인솔해 한탁주가 입조하길 기다렸다 태묘(太廟) 앞에서 저지하고, 옥진원(玉津園, 臨安宮城 남서쪽의 황실 유원지)으로 데려가 처치했다. 사미원과 전상조가 아뢰었음에도 황제는 믿지 못했는데, 그것을 확인하게 되자 마침내 조서를 내려 한탁주의 죄악을 천하에 널리 알렸다. 거사의 계획은 전부 사미원에게서 비롯되었고, 양황후와 양차산이 성사시켰으나 황제는 처음부터 인식하지 못했다. 탁주가 죽자, 전상조는 중당(中堂, 재상부)으로 진자강(陳自强)을 찾아가 문서를 건네주며 '황제의 명으로 승상께선 해임되셨소'라고 통보하고는 즉시 진자강을 말에다 태워 쫓아냈다. 정축일에 진자강을 파직해 영주(永州)로 유배보냈다. 기묘일에 소사단을 참수했다.

가정(嘉定) 원년(1208) 봄 정월 무인일,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엽시(葉時)가 상주해 한탁주의 수급을 양회지방에 효수할 것을 청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3월 계유일, 진회(秦檜)의 왕작과 시호를 덧붙여 회복시켜 주었다. 기축일, 왕남이 금나라 군영으로부터 귀환해왔다. 왕남이 금나라에 도착하고 나서, 정강(靖康)연간의 고사에 의거해 백질(伯侄)관계를 맺고, 세폐는 30만으로 증액하며, 배상금 3백만관(貫)을 지급하고, 소사단 등은 강화가 결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수급을 넣은 상자를 헌납키로 합의했다. 완안광이 왕남의 제안을 장종에게 상주하자, 장종은 완안광에게 한탁주의 수급을 찾아내고, 회남을 바치도록 할 것이며, 배상금을 은 3백만냥으로 바꾸라 지시했다. 그때, 전상조가 금군 진영으로 서한을 보내 한탁주가 주살된 사실을 알렸으나 왕남은 미처 알지 못했다. 어느날, 완안광이 왕남에게 '귀국에서 한탁주가 존귀해진 것이 몇해나 되었는가?'라고 묻자 왕남은 '10여년인데, 국사를 공평하게 돌본건 2년에 불과합니다'라고 답했다. 완안광이 '남조(南朝, 송나라)에서 그자를 쫓아내는게 가능하겠나?'라고 물었다.

왕남이 답하기를 '주상(主上)의 영단(英斷)으로 어찌 어렵겠습니까?'라고 하자, 완안광이 도리어 웃었으며 비로소 강화가 성립되었고, 왕남이 돌아오면서 한탁주의 수급을 금나라로 보냈다. 조서로 백관(百官)들을 소집시켰는데, [兵部尙書] 예사(倪思)가 전란으로 국가가 입은 피해를 설명하였다. 이부상서 누약(樓鑰)이 이르기를, '화의(和議)는 중대지사로 이것을 타결하는데까진 대비해두어야 합니다. 안팎으로 소동을 일으킨 자[=한탁주]는 이미 죽었거늘, 어찌하여 그를 아낀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임안부(臨安府)에 명하여 탁주를 부관참시해 수급을 취하고, 양회지방에 효수해 제로(諸路)에 깨우친 연후에 금나라로 보내주었다. 왕남이 한탁주와 소사단의 수급을 금나라에 건내는 조건으로 회남 ・섬서의 점령지들을 돌려받았다. 6월에 왕남이 한탁주와 소사단의 수급을 가지고 금나라에 도착했다. 장종이 응천문(應天門)으로 행차하여 노란 깃발을 세우고, 무기를 갖추면서 수급을 받았는데, 백관들이 상표해 축하해주었다. 둘의 수급을 나란히 매달아 저자에 전시하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나중에 그 머리를 옻칠해 무기고에 보관해두었다. 장종이 완안광에게 명하여 군사를 해산시키고, 원수부(元帥府)를 추밀원으로 바꿨으며, 사신을 파견해 대산관과 호주(濠州)를 왕래하게끔 했다. 8월에 송나라는 안변소(安邊所)를 설치했다. 한탁주와 그외 하수인이 소유했던 전토(田土)를 몰수하고, 위전(圍田)과 호전(湖田)의 관리들 역시 모두 국가에 예속시켰으며, 소작료는 사신에게 지급할 황금과 비단의 경비로 충당케 했다. 북방(北方)과 수호가 단절된 이후론 변방에서 사용할 군수물자를 조달할 때마다 여기서 가져갔다. 9월 정축일, 금나라가 완안간(完顔侃)과 교우(喬宇)를 파견해왔다. 임자일, 강회제치대사사(江淮制置大使司)에 명하여 안변소에서 1백만민(緡)을 지출한 것으로 쌀을 구매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기미일에 조서로 금나라와의 화의가 성사됐음을 천하에 공표했다. 갑자일, 증종룡(曾從龍)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 새해를 축하했다. 을축일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국경 일대의 각 주(州)에 사면령을 내렸다. 겨울 10월 병자일, 전상조를 좌승상으로, 사미원을 우승상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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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금나라를 향해 새북(塞北)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으니...







덧글

  • bergi10 2014/05/08 14:32 # 답글

    "남북(南北)간의 화호(和好)가 이룩된지 40여년으로 백성들은 군사를 알지 못한다. 불가하다"

    뭐가 자랑이라고 이런걸 반대 의견으로 제시한건지 저는 이해가 안되네요....... ㅡㅡ;;

  • 위장효과 2014/05/08 16:41 #

    요즘 어법으로 하자면 "40년동안 전쟁 안해서 동원령 내려 본 적도 없는지라 지금 백성들은 제대로 훈련이 안되어 있다. 그러니 동원해봐야 병사로서 쓸모가 없다. 전쟁하면 안된다." 뭐 이런 거죠.

    전근대 중국에서는 거의 대부분 농병일치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전장이 일상이던 동란기라든가 국가에서 아예 각잡고 모병제 유지하던 때 아니면 제대로 군사훈련도 이루어지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렇긴 한데 원래 유목민족으로 항상 전쟁할 준비는 되어 있었던 금의 재상이란 자가 저런 소리 할 정도로 여진족 역시 정착생활의 편안함에 물들었단 소리니 참...

    그리고 역대로 중원에서는 동란이 정리되면 "병장기는 창고로, 병마는 목장으로, 세금은 감면, 종자도 내려주고 구휼미도 풀고" 하는 게 지배층으로서의 당연한 책무로 여겨왔으니까요. (그렇지 않은 막장 왕조들도 많긴 했지만 어쨌든.)
  • bergi10 2014/05/08 23:03 # 답글

    그나저나 재밌는 포스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 2014/05/13 19:0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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