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6권, 남송이 금나라와 단교하다 세계사




영종(寧宗) 가정(嘉定) 4년(1211) 6월, 송나라는 금나라에 어렵게 사신을 보내 금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당시, 금나라는 몽고의 침공을 받아 송나라 조정의 사자가 왕래할 겨를조차 없었기에 탁주(涿州, 하북성)에 이르러 돌아오고 말았다. 겨울 11월, 금나라에서 전란이 발생해 [송나라에선] 강회(江淮)와 경호(京湖) ・사천(四川) 제치사(制置使)에 삼가 경계하여 국경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가정 7년(1214) 3월, 금나라 황제 완안순(完顔珣, 金宣宗)이 송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세폐(歲幣)를 독촉했다. 5월에 금나라 황제가 개봉으로 천도하고, 사신을 보내와 통고했다. 가을 7월,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덕수(眞德秀)가 상소하여 금나라에 대한 세폐를 중단할 것을 청했다.

그 내용인즉슨, 대략 다음과 같았다.


'여진(女眞, 금나라)은 타타르(韃靼, 蒙古)의 침공을 받아 개봉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우환이 되고 있습니다. 몽고는 여진을 토멸하려 할 것이나, 다만 사냥꾼의 뜻이 사슴을 얻는데 있다한들, 사슴이 도망친 곳으로 사냥꾼 역시 반드시 쫓아오게 됩니다. [몽고군은] 이미 세군데 관문(關門, 거용관 ・자형관 ・동관)의 장애물을 넘어 연경(燕京, 中都)에 도달한고로, 황하(黃河) 일대의 물[水]과 단절되어 어찌 개봉으로 도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몽고가 이윽고 유총(劉聰) ・석륵(石勒)과 마찬가지로 중원(中原)을 강탈한다면, [몽고와 금나라간의] 싸움터가 서로 마주하고 바라보며 가까운 나라[=南宋]를 편하게 만들진 모르겠으나, 이는 결코 우리나라에 이롭지 못합니다. 혹여나, [몽고가] 야율덕광(耶律德光, 遼太宗)처럼 중원을 안정시키지 못하게 된다면, 간웅(奸雄)들은 분명 장래에 쟁탈전에 가담해 [劉知遠처럼] 그 틈새를 취할 것인즉, 더더욱 우리에겐 복(福)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오랑캐 군사가 패망한 것을 기회로 서둘러 자립(自立)의 계책을 강구하고, 오랑캐가 요행히 완전히 망하진 않았으므로 잠시나마 자위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충성스럽고 현명한 이를 채용하고, 정사를 개편하며, 여러 사람들의 계책을 모아 가장 뛰어난 자를 거두어 자립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병사들을 엄하게 훈련시키고, 장수를 선별하며, 성(城)의 해자를 보수하고, 변방의 수비군을 단단히 타일러 자립을 갖추게 하십시오. 치욕을 참고 오랑캐와 화의를 체결해 복(福)으로 삼았으나, 병사는 휴식을 즐기며 평시에도 전쟁을 망각하고, 평온해진 변방엔 황금과 비단이 산적해 행인들조차 옥백(玉帛)으로 치장했습니다. 여진이 상존하면서 활용한 덕분에 강적(强敵)이 갱생하고, 혜택을 입었으니 이는 일시적인 평온함의 계책일 따름입니다. 폐하께서 자립하시어 모범을 보이신다면, 국세는 날로 확장되고, 민심도 날로 고무되어 쇠약해진 적들이 재기하더라도, 근심이 되진 못할 것입니다.

일시적인 평온함만 지향한다면 국세는 날로 작아지고, 민심 또한 날로 야박해질 것이며, 쇠약해진 오랑캐가 간신히 연명해가면서 외부의 우환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안위(安衛)와 존망(存亡)은 모두가 스스로 하기 나름입니다. 만에하나 갑자기 사변(事變)이 벌어지는 날,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적들한테] 보여주면서 당상(堂上)에서 병사를 소집한다면, 집안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격입니다. 미천한 신(臣)은 남몰래 그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천에 걸쳐 반복해서 아뢰자 황제[皇帝=宋寧宗]가 가납했으며, 마침내 금나라에 세폐를 지급하는걸 중지시켰다. [開禧北伐 실패후 체결된 嘉定和約을 이때 이르러 南宋에서 파기한 것이다] 8월 계묘일, 금나라가 세폐를 독촉했다. 가정 8년(1215) 11월, 사신을 재차 파견해 금나라에 가서 새해를 축하토록 했다. 형부시랑 유약(劉鑰)과 여러 태학생(太學生)들이 불가하다고 주장했으나, 대답해주지 않았다. 진덕수가 다시금 상소하여 간언하기를,


'금나라는 남천한 이래 국세가 날로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몽고와 서하(西夏)가 동관(潼關)의 동쪽에서 출몰하고, 허주(許州)와 정주(鄭州)로 깊숙이 들어와 도읍(都邑, 開封)을 포위한 상태입니다. [몽고의] 기병대가 산동(山東)을 질주하여 가득해지더니 금나라의 하남(河南) 수개 주(州)에선 서북방의 오랜 군사들에 대항해 도적떼가 종횡으로 늘어만가고, 반역자가 사방에서 봉기해 위급함이 이와 같사오니, 어찌 망하지 않길 기다리겠습니까? 신(臣)이 삼가 역사를 관찰컨대, 여진이 요(遼)나라에 반역한 것이 [宋徽宗] 정화(政和)연간 갑오년(甲午年, 1114)이었고, 요나라가 멸망한 것은 선화(宣和)연간 기사년(己巳年, 1125)으로 그해 겨울에 중원이 [금나라한테] 침범당했습니다. 오늘날 천하의 형세가 어찌 정화 ・선화연간과 다르겠습니까? 폐하께서도 마땅히 정화 ・선화연간을 반면교사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대저 찬란하고도 거대했던 송조(宋朝)는 8대(代)에 걸쳐 광위가 빛났으나, 정화 ・선화연간에 이르러 향락과 안락함에 탐닉한 나머지 기강이 헛되이 무너져버렸고, 의지할 버팀목마저 사라졌습니다.

근본은 이미 제거한 채 지엽적인 것만을 따랐는데, 이때에 여진족이 그 흉폭함과 잔인함으로 번성하게 되어 우리의 도성(都城, 北宋代 도읍 개봉시)을 공격해 함락시키니 우리의 사직(社稷)은 기울어졌고, 우리의 2성(二聖, 宋徽宗과 宋欽宗)을 겁박하여 데려갔으며, 우리의 백성들은 극심한 해독을 입었습니다. 천지개벽 이래 이적(夷狄)의 재난이 아마도 이만큼 혹독했던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신(臣)이 정화 ・선화연간 재난의 원인을 추론하건대, 열가지 실책이 있었습니다. 채경(蔡京, 徽宗代 재상)이 '풍형예대(豊亨豫大)'의 설(說)을 부르짖었으며, 왕보(王黼)가 응봉(應奉)을 열어 문전으로 진상하면서 오로지 음란함과 사치로 황상(皇上, 宋徽宗)의 마음을 현혹시켰습니다. 사치로 국가의 재물을 좀먹었고, 토목공사를 극도로 일삼았으며, 화석(花石) 공물은 강남(江南)에 두루 해악을 끼쳤습니다. 안뜰에 이르러선 연회가 과도하게 벌어졌고, 신료들은 기생의 음악을 즐긴데다, 대신(大臣, 蔡攸)도 입시(入侍)하여 붉게 화장하고선 웃음거리로 이바지하니 주색과 음탕함에 절도가 없었고, 조정은 크게 망가져버렸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첫번째 실책입니다. 동관(童貫)과 고구(高俅)가 병권(兵權)을 관장하면서부터 감독과 훈련시키는 일을 모조리 폐지하니 상하(上下) 계급의 법도가 통하지 않았고, 패장은 주살당하지 않은 채 금백(金帛)으로 구명됐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자들은 구제하기는 커녕 도주했다고 무고해 상벌(賞罰)에 규칙이 없었고, 군정(軍政)이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그것이 두번째 실책입니다. 정화 ・선화연간의 실책으로 재앙의 조짐이 자주 관측되었는데, 화성(火星)은 달[月]과 같았으며, 천천히 남쪽으로 이동하더니 태양이 어두워져 빛이 사라졌습니다. 동태가 흉흉해졌고, 붉은 기운이 북두(北斗)를 침범했으며, 홍수가 도성을 뒤덮었습니다. 당시의 신료들은 안일하게도 이를 경계하지 않았고, 바야흐로 괴이한 재앙을 상서로운 조짐이라 착각하여 이변을 편안함의 징표로 간주했습니다. 이 위로부터 하늘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 세번째 실책입니다. 정화 ・선화연간 무렵엔 [대신의] 직언을 꺼려했습니다. 장근(張根)이 [화석강을] 거두어 들이는데 번거로움을 아뢰자 관직이 강등되고, 유배당했습니다.

이강(李綱)이 대홍수 사고를 아뢰자 먼곳으로 귀양다니게 하면서 감시하니, 여기서 관리들은 감히 상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등숙(鄧肅)이 시(詩)로써 넌지시 간했으나, 물러나 태학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주몽설(朱夢說)이 환관을 제치고 상언했지만, 지방으로 내쫓기는 바람에 여기서 선비가 감히 상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물쇠를 채우는게 성행했으나, 어느덧 재물로 말미암아 패망한 셈입니다. 이 아래로부터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니, 그것이 네번째 실수입니다. 정화 ・선화연간에 권세를 부린 대신들은 충신을 비방하고, 현자를 질시하기만 하면서 걸핏하면 조정의 원로들을 원망했는데 당대에 홍석(鴻碩, 馮山)의 재능은 사특한 무리가 폐기해 못쓰게 되었으며, 간신에게 쫓겨나 잘못된 학문이 폄하되지 않았고, 다른 논의를 따랐습니다. 남은 이마저 배척당해 그만두고, 강등되어 나가 온나라엔 군자가 사라져버렸으니 비록 오랜 평안을 구한다한들, 가능키나 하겠습니까? 그것이 다섯번째 실책입니다. 나라를 개창하고 가문을 계승하는데 소인(小人)을 쓰면 안됩니다. 아첨배를 물리치면, 먼곳의 사람도 복종합니다.

정화 ・선화연간 치세엔 채경과 왕보가 재상권의 송장을 계승했으며, 채변(蔡卞)과 채유(蔡攸)가 외람되게 추밀원에 합류해 대성(臺省)에 날아올라 객사와 전각에 포진했는데, 서생(書生)은 공덕을 칭송하지 않았던고로 고생이라곤 모르는 자제들이었고, 환관의 우두머리[=童貫]도 종처럼 섬기질 않았으니, 권신(權臣, 蔡京)은 날개를 달았습니다. [이들이 서로] 번갈아 인도하고, 공조하니 조정엔 모두 소인만 남아버려 위태롭지 아니한들, 가능키나 하겠습니까? 그것이 여섯번째 실책입니다. <예기(禮記)>에서 이르기를, '사방에 재앙의 조짐이 나타나면 반드시 먼저 눈치챈다. 이를 백성의 부모(父母)라 한다'고 했습니다. 정화 ・선화연간의 소인들은 단지 은폐할 따름이었고, 거짓으로 황상께 아뢰었습니다. 유법(劉法)이 서쪽의 변방[=西夏 전선]에서 패사(敗死)했음에도, 동관은 승전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방랍(方臘)이 동남(東南, 江浙)의 여섯 고을을 깨뜨렸음에도, 왕보(王黼)는 그 사실을 숨긴 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곽약사(郭藥師)가 반역했음이 이미 드러났지만, 변방을 지키는 신하는 외부로 숨어버렸습니다.

여진족이 들어오는 것을 약조해놓고선 대신은 중간에서 이를 감추었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를 속이니, 점차 커다란 병환이 되었고, 오랑캐의 병사가 황하를 건너 도달했음에도 조정에선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일곱번째 실책입니다. <서경(書經)>에서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 근본이 탄탄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했습니다. 정화 ・선화연간의 소인들은 수탈만 일삼아 근본을 흔들었습니다. 주면(朱勔)이 절강 동쪽에서 소란스레 [화석강을] 바치고, 이언(李彦)은 전토를 겸병해 경동(京東)을 곤궁하게 만들었으며, 채경은 소금전매법을 개정해 집집마다 탄식하고, 왕보는 면부전(免夫錢)을 창설해 각 고을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생계를 꾸릴 수 없었고, 흩어져 도적이 되었으니 오랑캐가 하찮은 무리였던들, 역시 내부의 우환거리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덟번째 실책입니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견줄 바 없는 사람이라면 천하가 교훈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일개 선비가 적들의 음모를 그치게 만들었으며, 한마디로 외부로부터의 모욕을 다그쳤습니다.

정화(政和) 초년에 동관을 사신으로 [거란에] 파견해 적국 사정을 정탐케 했으나, 요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서로가 바라보면서 내심 조소했고, 남조(南朝, 송나라)엔 인재가 없다며 비웃었습니다. 북방에선 이미 사변이 발생했는데[여진족의 흥기], 이윽고 군율이 부여됐습니다. 군사를 부리는 것은 마땅히 우두머리가 담당해야 함에도 그 통제가 명확하지 않았고, 제장들은 두려워한 나머지 아뢰지 못했으며, 범용하고 나약해 무예가 없었으니 오랑캐의 군사가 침범해왔던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유가 부사령관이 되면서 담진(譚稹)을 교체했으나, 그 미련함과 겁내는 정도도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여기서 여진족은 중국의 인재가 없음을 간파하고, [송나라를] 배반하려는 속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임무를 맡길 재목이 없었던 것이 아홉번째 실책입니다. 옛날, 자산(子産)은 정(鄭)나라가 작아 기구하게 강국(强國) 사이에서 연명함에도 진(晋)나라를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자산이 이르기를, '대국(大國) 사람이 소국(小國)에 명령해 요구한 것을 모조리 얻어간다면, 장차 어떻게 지급할 수 있겠는가?

한차례는 요구한대로, 다른 한차례는 거절한다면 죄과가 오히려 커지게 된다. 대국의 요구를 예의스럽게 거절하지 않는다면, 어찌 만족함이 있겠는가?'라면서 내주지 않았습니다. [長平大戰 직후] 진(秦)나라가 조(趙)나라에 영토를 요구하자, 조나라에선 그 요구를 수락하려 했으나 우경(虞卿)이 이르기를, '대왕(大王, 趙孝成王)의 영토는 한계가 있지만 진나라의 요구엔 이미 그침이 없습니다. 한계있는 영토를 가지고 끝없는 요구에 넘겨준다면, 분명 조나라는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조나라는 그 계책을 받아들여 진나라에게 [영토를] 더해주지 않았습니다.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이러했으니, 불행하게 강적과 마주할지라도 그 마음을 복종시켜 따르게 하진 못했던 것입니다. 여진이 요나라를 치면서 비록 전투마다 쉽사리 승리했으나 우리 중국의 존엄은 당연시여겼고, 높은 산이나 커다란 바다처럼 그 거대하고도 깊은 뜻을 헤아리질 못했으니, 다른 마음을 감히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불행히도 간신과 범부[=蔡攸와 童貫]가 자그마한 공적을 탐내어 모의했고, 그 뜻이 순조롭게 잘되진 못할까 걱정했습니다.

여진은 우리의 세폐를 요구해왔는데, 거란이 받았던 예전의 금액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연경(燕京) 땅의 부세를 우리한테 요구했으며, 은견(銀絹) 1백만냥을 내주는데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군사를 대접하고 색출함에 이르러 대접함을 허락했고, 양식을 빌리려는데 빌려주는걸 수락했습니다. 한가지 사안에 보답해주면 이미 한가지 사안이 발생했으며, 일전에 요청했던걸 미처 보답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또다시 요청해왔음에도 일체 순조롭게 진행됐기에 감히 탐욕부리질 못했으나, 남쪽으로 내려온 말먹이 군대는 점차 국경의 윗쪽을 잠식하였습니다. 개돼지와 승냥이, 이리떼는 본성이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데 이 무리들은 욕심을 따르는건 알지만, 심적으로 복종한다는건 모르며, 그 화근은 응당 이와 같습니다. 누군가 생각하길 [금나라가] 장곡(張瑴)을 받아들인게 야율여도(耶律餘睹)와 연계해 [요나라의] 약점을 만들어내려는 속셈이었다고 하나, 모욕을 자초하며 가벼운 것만을 취했던 사실은 모르는 것으로 조짐은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소한 약속일지라도, 맹약의 냉랭하지 않음은 보전됐습니다.

여기서 [海上의 맹약을] 적당하게 세우는 것을 잃어버렸으니, 그것이 바로 열번째 실책입니다. 지금은 일개 사람이 근검함을 걱정하고, 어진 조상의 미풍조차 거리낌없으며, 신료들은 향락에 빠져 게으른데다 거만한고로 이는 선화(宣和)연간의 풍토였습니다. 동남의 민력(民力)은 열의 여덟이 군량으로 소모되는데도 사졸들은 곤궁함에 생기를 잃었으니, 벌써 배부르지 않음에 탄식합니다. 재앙의 조짐이 자주 나타남으로서 수양의 실질을 분간할 수 없으며, 언로(言路)는 비좁고, 정직한 선비는 용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자가 기용되지 않는게 아니지만, 정론(正論)을 미처 개진하지 못한데 반해 소인(小人)은 멀리서도 참소하고 아첨해 오히려 그 뜻을 얻고 있으니, 쉬쉬하는 풍조가 날마다 심해지면서 수탈 법규도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실책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신(臣)이 오늘을 보건대 후일이 염려되며, 오히려 오늘은 과거를 바라보는 셈이 되겠습니다. 신은 유사(有司)의 바깥에 있어서 내부 사정을 함부로 모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홀로 청컨대 폐하께선 깊이 살피시어 오랑캐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신이 관찰하건대 오늘날의 몽고는 과거에 여진이 흥기했던 시절과 다르지 않으며, 일단 우리와 가까워졌는데 역시 조상들의 진술대로 여진은 이미 옛 사람들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진은 앞서 우리한테 연경을 돌려준 바 있습니다만, 지금은 유독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우리의 [빼앗긴] 하남(河南) 땅에서 우리의 거주지[=江南]를 엿보고 있지 않습니까? 헛된 명성을 누림받으면 진정으로 재앙을 자초할 것이나, 저들이 능침(陵寢)에 인사를 올리려는걸[항복을 의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대의(大義)에 의지해 공격당할 것입니다. 여진은 이미 우리와 통호(通好)했는데 지금은 유독 사신을 파견해와 겸손하게 이르질 않고, 우리가 보고한 것을 엿보고 있지 않습니까? 요구에 싫증없이 따라준다면, 그 끝없는 욕심을 어찌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여진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다면 저들은 그걸 구실삼아 도발할 것입니다. 오랑캐의 움직임은 반드시 이와같이 나올 것인즉, 그 대응책을 미리 예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진(晋, 西晋)나라 말기의 대란(大亂. 永嘉亂)에도 강좌(江左, 江南)는 대체로 편안했습니다.

추한 무리[=5胡]와 나란히 싸웠음에도 [江南에선] 서로가 일치단결해 능히 막아냈으니, 우리도 아침저녁의 안정을 노릴 수 있습니다. 또한, 부견(苻堅)이 이미 모용씨(慕容氏, 前燕)를 멸망시키면서 진(晋, 東晋)나라마저 병탄하고자 모의했습니다. 원위(元魏, 北魏)는 이미 오랑캐들을 겸병하면서 마침내 강물[=長江]까지 마시려는 의도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새로운 오랑캐[=蒙古]가 강성해 하삭(河朔)을 모두 점유하고, 도적떼가 살륙해 날아다니면서 사람들은 모두 복종해버리니, 신은 5호가 각축하고 강남이 편안해질 계책을 강구하진 못할까 두렵습니다. 옛날에 손씨(孫氏)가 구차스러우면서도 오(吳)나라는 강대한 위(魏)나라를 감당할 수 있었는데, 그 군주[=孫權]와 신하들이 더불어 독려했습니다. 지금 국가[=南宋]의 광역은 1만리(里), 갑사(甲士)는 1백만명이며, 장강 ・한수(漢水)를 해자로 삼으니 어찌 오나라보다 낮겠습니까? 폐하께서 9묘(九廟, 종묘사직)의 신탁[=제사]을 맡으시어 안위를 도외시한 채 건내주는 것은 불가한데, 심히 걱정되어 갑니다.'라고 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다섯 불가론(論)을 헌책했다.


첫째로 이르기를, '종묘사직의 치욕을 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상언하기를,


'국가는 금나라 오랑캐한테 만세의 원수를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고종(高宗)과 효종(孝宗)께선 그 강성함과 마주해 부득이 태왕(太王)을 자처하심으로써, 후세 사람들은 구천(勾踐)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하늘이 이 오랑캐를 망하게함이 가까운 조석에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적들을 대우하는 예의로 천하의 호걸들과 마주하고, 오랑캐의 재물을 보내어 천하의 갑병(甲兵)들을 독려한다면 민심이 널리 떨쳐지고, 군사의 사기도 자연스레 배가될 것인즉, 오랑캐의 일처럼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또한, 오랑캐 땅과의 단절을 중시한다면 원망의 초래함을 조심해 허물이 생길 것이나, 망한 오랑캐한테 당연히 원망을 초래하진 않는다해서 새로운 적에게 허물이 생기지 않는건 아닙니다.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가벼운지 그 득실을 따져야 합니다. 신이 바라건대, 폐하께옵선 구천의 훌륭한 계책을 권장하고, 사현(謝玄)의 실책을 경계하시어 왕업(王業)을 흥륭하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두번째로 이르기를, '이웃의 도적을 가벼이 여겨선 안된다'고 하였다. 상언하기를,


'타타르와 산동의 도적은 진실로 뜻을 얻어 우리와 가까워졌으니, 커다란 우환입니다. 바라건대, 조정에선 경솔한 두 도적을 공격하거나 수비할 계책을 밤낮으로 강구하여 그 속내를 엿보아 배반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세번째로 이르기를, '요행히 편안함의 계책에 의지해선 안된다'고 하였다. 상언하기를,


'현재 논의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금나라의 존망을 우리의 기쁨과 슬픔처럼 여깁니다. 위급한 소식을 들으면 사실이 아님을 기대하고, 안정의 소모를 얻으면 그 필연을 다행으로 간주하니, 마치 썩은 흙덩이를 담장으로 삼아 도적을 막아내길 기원함과 같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옵선 자강(自强)의 뜻에 노력하시어 무공의 도리를 넓게 세우시고, 오랑캐의 존속을 기뻐하지 않고, 오랑캐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 대세(大勢)를 일으키십시오.'


네번째로 이르기를, '아첨으로 꾀어낸 말을 청취해선 안된다'고 하였다. 상언하기를,


'지금은 변경에서의 일이 잦아져 군주와 신하가 날마다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고관대작과 사대부들은 재능으로 아첨한다던지, 혹은 다섯가지의 복(福)을 믿을만 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짐을 구하여 허물을 고한다면, 가까운 시일에 더욱 심해져 도리에 어긋난 주장으로서 참위(讖緯)에 의지할 터인즉, 사리에 밝게 경계함을 소홀히한 것이잖습니까? 생각컨대, 폐하께옵선 하늘과 인간의 연관성을 거울삼아 아첨쟁이의 유해함을 살피시고, 기본을 한층 정비하신다면 하늘의 훌륭한 명령에 감화되어 종묘사직의 경사(慶事)가 될 것입니다.'


다섯번째에 이르러 '공론(公論)을 소홀히 간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상언하기를,


'공론은 나라의 근본적 기운입니다. 근본적 기운을 갑갑하게 가로막으면 사람이 될 수 없듯이, 공론을 막아버린다면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깊이 생각컨대, 오늘은 실제로 공론이 움츠러든 시절이지만 만약 조정의 윗선에서 진언하는 사람이 군주를 사랑하고, 나라에 보답하며, 시기함 없이 성의껏 경청한다면 공론은 이로부터 크게 개진될 것입니다. 만약, 진언하는 사람을 막아버린 채 이름만 살펴가며 성의껏 경청하지 않는다면, 시기심이 생겨나 공론은 이로부터 다시금 움츠르고 말 것입니다. 공론의 개진이 움츠러들면 치란(治亂)과 존망을 구분하는 바, 소신은 편종(篇終)으로 반복해서 전력을 다해 의견을 올렸으므로 생각컨대, 폐하께선 신의 성의를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대답하지 않았다.


가정(嘉定) 10년(1217) 2월, [사신으로 갔던] 진백신(陳伯震)이 돌아왔다. 금나라 황제[=宣宗]가 이르기를, '듣자하니 식주(息州, 하남성 식현)의 남쪽 경계엔 도적떼가 있다던데, 이는 그 경계의 굶주린 백성들이 회하(淮河) 연변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이라면서 송인(宋人)은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공격해온단 말인가?'라며 다그치고, 군사를 일으킬 구실로 삼고자 하였다. 여름 4월, 금나라에서 길을 나누어 침공해왔다. 처음에, 금나라의 왕세안(王世安)이란 자가 있었는데 우이(旴眙)와 초주(楚州)를 취할 계책을 바치자, 금나라 황제는 그를 회남초무사(淮南招撫使)로 임명하고, 이윽고 남침을 모의하게 했다. 출호고기(術虎高琪)가 송나라로 침공해 강토(疆土)를 확장시키자며 황제한테 재차 권고하자, 처음엔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 이르러 오고륜경수(烏古論慶壽)와 완안새불(完顏賽不)이 군사를 거느리고 회하를 건너니, 광주(光州, 하남성 황천현) 중도진(中渡鎭)을 침범해 각장관(榷場官) 성윤승(盛允升)을 잡아 죽였다. 오고륜경수가 병사를 나누어 번성(樊城)을 침범하고, 조양(棗陽)과 광화군(光化軍)을 포위했다.
 
별도로 완안아린(完顏阿鄰)을 파견해 대산관(大散關, 섬서성 보계시)으로 들어가 서화주(西和州), 계주(階州), 성주(成州)를 공격하게 했다. [송나라] 조정에선 소식을 듣고 경호(京湖) ・강회(江淮) ・사천(四川) 제치사 조방(趙方)과 이각(李珏), 동거의(董居誼)에게 상황에 따라 대처해가며 방어토록 했다. 앞서 금나라 우사간(右司諫) 허고(許古)가 상소하기를, 사신을 파견해 송나라에 화의(和議)를 요청하면 몽고가 소식을 듣고 종적을 감출 것이지만, [송나라를 치고자] 병사를 일으킨다면 적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황제가 즉시 허고에게 [남송과의] 강화조약 서한을 초안토록 명령했고, 완성되자 참지정사 고여려(高汝礪)에게 보여주었다. 고여려가 이르기를, [글귀가] 애걸하면서 기원하는 뜻이 있어서 미약함만 드러냈기에 취할만한 것이 없으므로, 논의를 마침내 중단하게 만들었다. 평장정사 서정(胥鼎)이 역시 간곡하게 남침의 불가함을 여섯가지 이유로 간언했으나, 출호고기는 따르지 않았다. 금나라가 남북으로 병사를 일으키자 서하가 재차 소란을 부렸고, 재물이 탕진된데다 병사들의 약체화도 심해졌다.

금나라 황제는 백관(百官)들을 소집해 방어책을 논의하게 했는데, 출호고기가 내심 시기하여 상언한 것들을 모두 채용하지 않았다. 5월에 금나라 사람들이 양양(襄陽, 호북성)과 조양을 침범해왔다. 조방이 그 아들인 조범(趙范)과 조규(趙葵)에게 말하길 '조정에선 강화를 맺을지, 개전할지 아직 결정하질 못했으나 전란이 심해지면서 사람들의 뜻을 살펴보았다. 나는 방책을 결정했으니, 병사들을 이끌고 변방에 임전하는걸 생각하게 됐으며, 결전으로 국가에 보답할 뿐이니라'고 하였다. 이윽고 상소를 올려 개전을 주장하고, 몸소 양양에 주둔하면서 호재흥(扈再興)과 진양(陳洋), 검할(鈐轄) 맹종정(孟宗政) 등에게 격문을 띄워 수비토록 했다. 이로서 광화군과 신양(信陽軍), 균주(均州)의 수비병력을 보충하니, 그 위세가 연달았다. 금나라 사람들이 단산(團山, 양양성 서쪽)으로부터 오는데 군세(軍勢)가 비바람과 같았다. 호재흥 등이 진영을 세갈래로 나누어 복병을 배치하고선, 대비했다. [金軍이] 도달하자 호재흥이 거짓으로 퇴각하니 금군이 추격해갔는데, 맹종정과 진양이 좌우(左右) 양측의 복병으로 공격했다.

3면에서 송나라 군사를 만나자 금나라 군사가 대패했고, 산(山)의 계곡 사이로 시신들과 피가 가득 쌓였다. 조양의 포위가 급박해지자 구원하러 갔는데, 맹종정은 오전에 현수산(峴首山)을 출발해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조양[의 金軍]을 치니, 달리는게 신(神)과도 같았고, 금군이 크게 놀라 초저녁에 달아났다. 승전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선 크게 기뻐하며 맹종정을 권지조양군(權知棗陽軍)으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京湖)의 장수 왕신(王辛)과 유세흥(劉世興)도 금나라 병사를 광산(光山)과 수주(隨州)에서 패배시키자, 금군이 물러갔다. 6월에 조방(趙方)이 금나라 정벌의 조서를 천하에 내려달라고 간청했으며, [宋寧宗은] 이에 조서로 하교했다. 대체로 이르기를,


"짐(朕)은 정신을 가다듬고, 정사를 개혁해 오로지 백성들을 휴식시키고자 했다. 개와 양처럼 하찮은 것들이 우리의 중원을 점거해 하늘이 싫어한지도 오래되었도다. 여우와 토끼가 구멍을 잃어버린고로, 사람들도 다투어 따라갔다. 이같은 기회에 편승하는걸 어찌 모르겠으며, 치욕을 갚지 않겠는가? 맹세를 거듭 생각컨대, 진실로 전쟁의 명분을 재차 일으키게 되었다. 만약, 비상한 공훈을 세운다면 차례를 따지지 않고 포상이 있을 것이다."


마침내 조서의 격문을 전달해 [금나라 치하의] 중원의 관리와 군민(軍民)을 초유하게 했다. 12월, 금나라의 완안윤(完顏贇)이 보병과 기병 1만명으로 사천을 침범해 천수군(天水軍)을 깨뜨리자, 수령 황염손(黃炎孫)이 도주하였다. 금나라 사람이 자환보(白環堡)를 공격해 깨뜨리자, 통제(統制) 유웅(劉雄)은 대산관을 버리고 달아났다. 가정 11년(1218) 2월 갑진일, 금군이 대산관(大散關)을 불태우고 조교보(皂郊堡)를 다시 깨뜨렸는데, 죽은 자가 5만명이었다. 무신일, 금군이 수주(隨州)와 조양군(棗陽軍)을 포위했다. 맹종정이 권조양(權棗陽)으로 처음 업무를 보면서 새로운 법령을 위반하면 일체의 애정도 뒤집은 채 참수해버리니, 군민이 두려워하며 떨었다. 여기에 이르러 물을 끌어모아 제방을 쌓고, 성벽의 담장을 개수했으며, 군사들을 엄격하게 검열했다. 완안새불(完顏賽不)이 보병과 기병을 끼고 조양성을 포위하자, 맹종정과 호재흥이 병사를 합쳐 적병들과 다투면서 3개월에 걸쳐 크고작게 70여회나 싸웠고, 맹종정 자신은 사졸들의 선두에 섰다. 금나라 사람들은 전투에서 번번히 패하자 울화가 심해졌다.

금군이 성(城) 주위로 도랑을 굴착하고선 도랑 바깥에서 소리치며 병사들을 나열해 창과 화살촉을 흔들어댔는데, 방울을 꼬아 스스로 경계하자 개들이 방울소리에 짖어댔다. 맹종정이 장사(壯士)를 두터이 모집하고, 틈새를 타서 돌격하자 금나라 병사들은 버티지 못했으며, 성앞에 가까워질수록 병사가 많아지자 여러 방면에서 힘껏 방어했다. 수주(隨州)의 수령 허국(許國)의 지원군이 백수(白水)에 도달하자 북소리로 서로가 알아들었고, 맹종정이 제장들을 인솔해 출전하니, 금군이 궤주(潰走)했다. 3월, 이주통제(利州統制) 왕일(王逸)이 장수가 되어 관군(官軍)과 충의군(忠義軍) 10만명으로 대산관과 조교보를 수복했으며, 금나라 통군(統軍) 완안윤을 추격해 참수했다. 진주(秦州)로 나아가 공격하고, 적곡구(赤谷口)에 이르렀는데 면주도통(沔州都統) 유창조(劉昌祖)가 군사를 퇴각시키라 명하자 충의군 또한 풀어져 흩어졌으며, 군대가 이내 크게 무너졌다. 여름 4월, 금군이 장안(長安, 서안시)과 봉상(鳳翔)의 무리를 규합해 또다시 조교보를 공격했고, 서화주로 달려가자 유창조가 성을 불태운 채 도망쳐 돌아왔다.

서화주 수령 양극가(楊克家)와 성주(成州) 수령 나중갑(羅仲甲), 계주(階州) 수령 후이(侯頤)도 유창조가 돌아오자, 모두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금군이 여러 고을에 입성해 전후로 식량 9만곡(斛)과 수천만전(錢)을 노획하니, 빼앗긴 군수물자들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대산관을 재차 침범하자, 수비대장 왕립(王立) 역시 도망쳤으며, 또한 황오보(黃牛堡)를 침범했는데 흥원부(興元府) 도통 오정(吳政)이 이를 물리쳐 막아냈다. 오정이 대산관에 이르자 왕립을 잡아 참수하여 [수급을] 돌리니, 조정에선 소식을 듣고 오정의 관위를 3등급 진급시켰으며, 유창조의 관직을 삭탈해 소주(韶州, 광동성)로 내치고, 양극가 등도 나란히 원주(遠州)로 추방했다. 12월, 금나라 황제는 전세가 유리해지자 장래 강화를 맺고자 개봉부(開封府) 치중(治中) 여자우(呂子羽)를 상문사(詳問使)로 삼아 회하(淮河) 중류에 이르게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돌아갔다. 여기서부터 화호(和好)가 단절되었다. 금나라 황제는 복산안정(僕散安貞)을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임명해 황태자 완안수서(完顔守緒)를 보필하며 군사를 모아 남침하게 했다.

가정 12년(1219) 봄 정월 신묘일, 금나라가 다시금 서화주를 침공했다. 수비대장 조언납(趙彥吶)이 복병을 배치시켜 대기했다가 그 무리를 전멸시키고, 돌아왔다. 을미일, 흥원도통 오정이 금나라 사람과 황오보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2월 계묘일, 금군이 승세를 타고 무림관(武林關)을 공격하니, 도통 이귀(李貴)가 도망쳐 돌아왔다. 정미일, 금군이 흥원부(興元府)를 깨뜨리자, 권부(權府) 조희석(趙希昔)은 성을 내버린 채 달아났다. 신해일, 금군이 대안군(大安軍, 섬서성 영강현)에서부터 양주(洋州, 섬서성 양현)까지 연이어 깨뜨려버렸다. 임자일, 사천제치사 동거의(董居誼)가 돌아왔다. 도통 장위(張威)가 [부장인] 석선(石宣)을 파견해 금군을 대안군에서 요격하여 크게 격파시키고 정예병사 3천명을 모조리 죽였으며, 그 장수 파사로안(巴士魯安)을 사로잡으니 금군이 도망쳐 돌아갔다. 금나라의 완안와가(完顏訛可)가 재차 조양(棗陽)을 대거 포위했는데, 성 바깥에 구덩이를 파내면서 토성(土城)을 쌓았다. 조방(趙方)이 그 소굴을 비워버리고자 계획하여 나왔고, 적의 빈틈을 타격해 조양성에 대한 포위를 스스로 풀어버렸다.

수주(隨州) 지사 허국과 호재흥에게 병사 3만여명을 이끌고 두갈래 길로 나누어 당주(唐州, 하남성 당하현)와 등주(鄧州)를 공격하라 명했다. 또한, 아들 조범(趙范)에겐 군사를 감독하고, 조규(趙葵)에겐 후방을 평정하도록 명했다. 윤(閏)3월 계해일, 금군이 안풍군(安豊軍, 안휘성 수현)과 저주(滁州), 호주(濠州), 광주(光州) 세 고을을 포위했다. 강회제치사 이각(李珏)이 지주도통제(池州都統制) 무사도(武師道)에게 충의군(忠義軍) 도통제 진효충(陳孝忠)을 구원케 했으나, 모두 나아가 이기지 못했다. 금군이 이윽고 병사를 나누어 광주로부터 황주(黃州, 호북성 황강시)의 마성(麻城)을 침범하고, 호주로부터 화주(和州, 안휘성 화현)의 석적(石磧)을 침범했으며, 우이(旴眙, 강소성)로부터 저주의 전초(全椒), 래안(來安)과 양주(揚州)의 천장(天長)과 진주(眞州)의 육합(六合)까지 침범했다. 회남(淮南)의 유민들이 전란을 피해 강을 건너왔으나, 각 성들은 모두 문을 걸어잠갔다. 금나라 유격대의 기병 수백여명이 채석(採石, 안휘성 마안산시)의 양림도(楊林渡)에 도달하자, 건강(建康, 남경시)에선 몹시 두려워했다.

당시, 가섭(賈涉)이 회동제형(淮東提刑) 겸 초주(楚州) 지사로 경동(京東)의 충의군을 통제했는데, 충의군의 병력이 금나라에 의해 활용되는걸 우려해 진효충을 저주로 보내고, 석규(石珪)와 하전(夏全), 시청(時靑)을 호주로 보냈다. 계선(季先), 갈평(葛平), 양덕광(楊德廣)이 저주와 호주로 달려갔으며, 이전(李全) ・이복(李福)이 그 귀로를 막았다. 이전이 진격해 과구(渦口, 안휘성 회원현)에 이르러 금나라 좌도감(左都監) 흘석렬아오답(紇石烈牙吾答), [황실의] 부마(駙馬) 아해(阿海)와 화호피(化湖陂)에서 연달아 교전하니, 금나라 장수 수명을 죽였고, 금패(金牌)를 노획하자 금군이 여러 고을의 포위를 풀어 물러갔다. 이전이 이를 추격하여 조가장(曹家莊)에서 금군을 또다시 패배시키고 돌아왔다. 금나라 사람은 이로부터 회동(淮東)을 감히 넘보지 못했다. 처음에 가섭이 금나라의 황태자를 죽인 자는 절도사, 친왕(親王)을 죽인 자는 승선사(承宣使), [황실의] 부마를 죽인 자는 관찰사(觀察使)직을 각각 포상으로서 제수하겠다며 모집했었다. 이전이 획득한 금패를 가섭에게 바치고, 부마 아해를 잡아 죽였다고 보고했다.

가섭이 조정에 요청하면서 약조대로 포상해줄 것을 빌었고, 마침내 이전은 광주관찰사(廣州觀察使)에 제수됐는데 실제로 아해는 이때 전사하진 않았다. 가을 7월, 맹종정과 호재흥이 금군을 조양에서 협격했다. 이무렵, 금나라 장수 완안와가가 보병과 기병을 끼고 조양성에 육박하자, 맹종정은 쌀겨와 모래를 자루에 채워 누각을 덮고, 물항아리를 진열해 화재에 대비케 하면서 포수(炮手)를 모집해 적군을 공격하니, 한차례 발사할 때마다 수명씩 죽일 수 있었다. 금군은 정예기병 2천명을 선발해 노수(弩手)라 칭하고, 운제(雲梯)를 호위하면서 천교(天橋)에 먼저 올랐다. 또한, 은광(銀礦)의 석공을 불러모아 땅굴을 굴착하면서 밤낮으로 성을 공격했으며, 갈대짚을 운반해 성루 아래에 이르러 에워싼 채 누각을 태워버리고자 했다. 맹종정이 선수를 쳐서 누각을 허물고, 깊은 구덩이를 파내어 [적들의] 땅굴을 막아버리고선 전붕(戰棚)을 설치하여 성이 훼손되는걸 방지토록 했다. [금군이 설치한] 함정을 돌파해 들이닥치며 즉시 북[鼓]과 화살깍지를 태운 것으로 커다란 불을 지펴놓고, 독한 연기를 [땅굴안에] 집어넣었다.

금나라 병사들은 [진입이] 막히자 담요를 적시며 통로를 나누고, 흙을 파헤쳐 성곽을 무너뜨려 누각을 함락시켰다. 맹종정이 누각을 철거하면서 땔감을 더해 불쏘시개로 만들어 통로를 끊어버렸으며, 용감한 병사를 늘어세워 장창(長槍)과 강한 활로 충돌에 대비케 하였다. 함락된 누각으로부터 몇 장(丈) 떨어진 장소에 튼튼한 성을 축조했는데 길이가 1백여척(尺)에 달했고, 본성(本城)을 보조하게 했다. 금나라 병사가 강병(强兵)과 대치하면서 두꺼운 갑옷과 윗도리, 철가면을 벗어던진데다 담요와 가죽을 적시어 불쏘시개조차 마다하지 않은 채 운제(雲梯)를 호위해가며, 누각을 돌아 서북쪽으로 바로 가서 성벽위에 올랐다. 성중(城中)의 송나라 수비병들이 긴 창으로 그들의 목구멍을 찔러 죽였고, 용사들이 아래로부터 협격하니 금나라 병사는 추락사하거나 불에타 죽었다. 금군이 연달아 승리하지 못했는데, [송나라 統制] 호재흥(扈再興)과 허국(許國)이 만나 양갈래 도로로 나란히 진격해 금나라 당주와 등주를 겁략하고, 그 성의 목책에 저장된 군량을 소각했다. 당시, 금군이 조양성 아래서 주둔한지 80여일이 되었다.

조방(趙方)은 금나라 군사의 기세가 이미 소진되었음을 알고선 허국과 호재흥을 소환시켰고, 호재흥에게 동정군을 쫓아가 더불어 합동작전을 기약하게 했다. 호재흥이 금군을 양하(瀼河)에서 패배시켰고, 조양성 남쪽에서 또다시 무찔렀다. 맹종정이 성중으로부터 출격해 내외(內外)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떨쳤고, 적진 내부로 매섭게 돌진했으며, 해질 무렵부터 3경(三更, 자정 무렵)에 이르기까지 3만명을 죽이니 금나라 사람들이 크게 붕괴되었고, 완안와가는 홀로 말을 탄 채 줄행랑쳤다. 노획한 재물과 식량 ・도구 ・갑옷들의 양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금군을 추격해 마등채(馬磴寨)에 이르러 그 성을 불태웠으며, 등주에 입성했다가 돌아왔다. 이로부터 금나라 사람은 양양(襄陽)과 한양(漢陽), 조양(棗陽)을 감히 넘보지 못했다. 중원(中原)의 유민이 수만명이나 귀부하자 맹종정은 그들을 넉넉히 구제하고, 토지를 지급해 가옥과 주거지를 건설했으며, 날래고 씩씩한 자를 징집하여 '충순군(忠順軍)'이라 지칭하고선 당주와 등주 사이에서 출몰하게 했으니, 종정의 위명이 나라밖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금나라 사람은 그를 '맹할아버지(孟爺爺)'라 불렀다. 겨울 10월 기축일, 경호제치사 조방이 금군을 거듭 패배시키자 반드시 동시에 협공하도록 했는데, 마땅히 선발하고 제압해 호재흥, 허국, 맹종정에게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세길로 나누어 금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경계하여 이르기를,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성을 공략하지 못하며, 보갑(保甲)이 차례로 무너지고, 성채가 헐렸다는건 이미 재물과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정 13년(1220) 봄 정월 정유일에 호재흥이 등주를 공격하고, 허국이 당주를 공격했으나 모두 승리하지 못한 채 돌아왔다. 금군이 추격하여 번성(樊城, 호북성 양양시)을 공격해오자, 조방이 여러 고을을 독려해 방어하면서 물리쳤다. 맹종정이 금군을 호양(湖陽, 하남성 당하현)에서 재차 패배시켰다. 8월에 안병(安丙)이 서하의 문서를 발송해왔는데, 금나라를 협공하는 논의를 결정해 서하군이 야전에서 싸우고, 아군(我軍, 宋軍)이 공성(攻城)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주통제(利州統制) 왕사신(王仕信)에게 군사를 거느려 희주(熙州)와 진주(秦州), 공주(鞏州), 봉상(鳳翔)으로 건너가라 명했다.

[利西安撫] 정육(丁焴)에게 그 통제를 위임하고, 격문을 전달해 섬서(陝西) 5로(路)의 관리와 군민을 초유케 하였다. 당초, 서하인들은 금나라와 연달아 화해한지 80여년으로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몽고가 [서하를] 침공해오자 금나라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금나라가 출병하지 않자 서하인들은 이를 원망하고 화호(和好)가 단절되었던 것이다. 9월 신묘일, 서하가 추밀사(樞密使) 영자녕(甯子寧)을 파견해 무리 20만명을 거느리고 공주(鞏州)를 포위케 하면서 [송나라에도] 거병을 독촉해왔다. 왕사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탕창(宕昌)을 출발했다. 이달에 안병이 제장에게 길을 나누어 병사를 진격시키라 명령하여 통제(統制) 질준(質俊)과 이실(李實)이 하성(下城)을 출발하고, 도통제(都統制) 장위(張威)는 천수(天水)로, 정신(程信)은 장도(長道)로, 진립(陳立)은 대산관(大散關) 밖으로, 전모(田冒)는 자오곡(子午谷)으로, 진욱(陳昱)은 상진(上津)으로 각각 출병했다. 경자일, 질준 등이 내원진(來遠鎭)을 함락시키고 금군을 정변성(定邊城)에서 물리쳤다. 신축일, 왕사신이 염천진(鹽川鎭, 감숙성 장현)을 쳐서 함락시켰다.

을사일, 서하군과 공주성 밑에서 만나 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마침내 진주(秦州)로 달아났다. 병신일, 서하군이 안원채(安遠砦)로부터 군사를 퇴각시켰다. 겨울 10월 정사일, 정신이 서하에 다시금 진주를 협공할 것을 요구했으나, 서하는 따르지 않았다. 이내, 복강성(伏羌城)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자 장수들도 모두 병사를 해산시켰다. 안병(安丙)이 정신에게 명하여 왕사신을 서화주에서 참수했으며, 장위(張威)를 파직시켰다. 가정 14년(1221) 2월 무신일, 금나라 사람이 광주(光州)를 포위했다. 기사일에 금군이 5관(五關, 鄂州)으로 침범했다. 임신일, 금군이 황주(黃州)를 포위했으며, 장수를 파견해 한양군(漢陽軍)도 포위했다. 3월 병술일, 악주부도통(鄂州副都統) 호재흥이 군사를 데리고 당주를 공격했다. 금군이 황주를 포위해 위급해지자, 조서로 풍시(馮榯)에게 기주(蘄州)와 황주를 구원케했는데, 풍시가 망설이며 진격하지 않았다. 황주 수령 하대절(何大節)은 관청의 인패(印佩, 도장)들을 가지고 사수할 것을 맹세했다. 어느날 저녁, 수레에 탑승한 병사가 돌연 달려와 '성이 함락됐다'고 외쳐댔다.

그자가 전차를 끼고 올라타자, 성문을 열어 나가봤는데 이미 오랑캐의 병사가 집결해있었고, 하대절은 결국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었다. 금군이 기주를 재차 함락시키자 지주사(知州事) 이성(李誠)은 자결했으며, 가속(家屬)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계축일, 금군이 퇴각하자 호재흥은 천장(天長)에서 이들을 요격해 패배시켰다. 여름 4월 무신일, 금군이 회하를 건너 북쪽으로 떠났다. 이전(李全)이 병사를 파견해 요격하니, 크게 대패시켰다. 겨울 10월에 서하가 재차 군사를 연합해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간청해왔다. 가정 15년(1222) 여름 4월, 금나라 황제는 조정[=南宋]에서 세폐(歲幣) 지급을 중단시켜 나라 살림이 곤궁해지자, 원수(元帥) 좌감군(左監軍) 완안와가(完顔訛可)에게 명하여 원수부의 업무를 순시하고, 3로(路)의 군마(軍馬)를 통제하며, 동첨서추밀원사(同簽書樞密院事) 시전(時全)이 이를 보좌해 영주(潁州)와 수주(壽州)로부터 회하를 건너게 하였다. 관군(官軍, 宋軍)을 고당포(高塘市)에서 패배시키고, 고시현(固始縣)을 공격했으며, 여주(廬州)의 장령(將領) 초사충(焦思忠)의 병사들까지 격파했다.

이미 붙잡힌 포로들이 '시전의 조카 시청(時靑)은 송나라의 조령(詔令)을 받들고 있다'며 말했지만, 시전과 병사들이 서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시전은 사실을 숨겼다. 5월에 완안와가가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회하에서 20리(里) 떨어진 장소에서 여러 군사들이 도강하려는데, 시전이 밀조(密詔)를 조작해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선, 회남(淮南)의 보리를 거두어들이게 했다. 이윽고 명령을 하달하길, 사람을 잡아오면 보리 3석(石)을 지급해주겠다고 하자 무리가 현혹되어 사흘간 계속 머물렀다. 완안와가가 시전에게 이르길, '지금 회수(淮水)는 얕고 비좁아 속히 건널 수 있다. 만에하나 범람을 맞이해 송나라 군사가 후방에서 올라온다면, 결코 귀환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했으나, 시전은 거절했다. 이날 저녁, 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다음날 회하의 강물이 범람하자 부교(浮橋)를 설치하며 건너고자 했다. 송나라 군사가 습격하니 시전의 병사들이 대패했고, 부교는 무너졌다. 시전이 먼저 가벼운 배로 회하를 건넜으나, 사졸들은 탑승한 배가 모조리 뒤집혀 익사했다. 금나라의 군사와 물자는 이로부터 크게 소진되고 말았다.

금나라 황제가 조서로 시전의 죄를 헤아려 그를 주살했다. 가정 17년(1224) 3월, 금나라 황제는 상서령사(尚書令史) 이당영(李唐英)을 파견해 저주(滁州)에 이르러 송나라와의 통호(通好)를 시도했다. 6월에 재차 추밀판관(樞密判官) 이랄포아(移刺蒲阿)를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광주(光州)에 도착하자, 방(榜)을 붙여 군민들을 초유하면서 다시는 남침하지 말도록 명했다. 가을 7월 기해일, 금나라에선 조서로 백관들이 각자의 직무에 힘쓰도록 타일렀다. 계묘일, 대악(大樂)을 보수했다. 9월에 추밀판관 이랄포아가 [몽고로부터] 택주(澤州, 산서성 진성시)와 노주(潞州, 산서성 장치시)를 수복하고, 말 1천필을 노획했다. 겨울 10월 무오일에 서하가 사신을 파견해와 수호(修好)를 맺었다. 12월 을사일, 항주자사(恒州刺史) 포찰합주(蒲察合住)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주살당했다. 갑인일에 금선종(金宣宗)의 1주기를 맞아 덕릉(德陵)에서 제사를 지냈다. [宋理宗] 보경(寶慶) 원년(1225) 9월, 서하가 금나라와 강화를 체결해 형님으로 섬기고, 제각기 본국의 연호를 사용하며, 사신이 내빙(來聘)해 국서를 바쳐 아우라 칭했다.


* 맹종정(孟宗政)은 맹공(孟珙)의 부친이고, 가섭(賈涉)은 가사도(賈似道)의 부친이었다.




                                 영종황제에게 대금(對金)단교와 사후대책을 간언한 기거사인 진덕수(眞德秀)
                                 주자의 직계로 이학(理學)을 대성시켰으며, <大學衍義>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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