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7권, 이전(李全)의 반란 (2) 세계사




6월에 팽의빈이 이미 산동을 함락시키고, 이전의 투항병들을 다시 받아들이자 군사들의 기세가 크게 떨치어 이윽고 동평(東平)을 포위했다. 엄실(嚴實)이 몽고의 장수 패리해(孛裏海)와 은밀히 약조해 군사를 합쳐 공격하기로 했다. 몽고의 구원군이 오래도록 도달하지 않아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자, 팽의빈과 화의를 맺고자 했다. 팽의빈도 엄실이 하삭(河朔)을 탈취하고 나서 도모한 것을 빌리고자 마침내 엄실을 형님으로 예우했다. 이무렵, 엄실의 무리가 아직 수천명이나 남아 팽의빈은 이들을 빼앗지 않고, 주둔해 약탈하면서 엄실의 청애(青崖)의 가속들을 보내지 않았다. 가을 7월, 팽의빈이 진정(眞定, 하북성)을 함락시키고 서산(西山)으로 나아가 부리해 등의 군사들과 서로 마주했다. 팽의빈이 엄실의 휘하 병사를 나누었는데, 겉으로 도우는척 하면서 은밀히 엿보았다. 엄실이 형세가 급박해진 것을 알고, 부리해의 군으로 넘어가 이들과 연합했다. 팽의빈이 내황(內黃)의 오마산(五馬山)에 이르러 교전하니, 의빈의 군사가 무너지고 사천택(史天澤)이 정예군사로 배후를 공략하자, 팽의빈을 마침내 사로잡았다.

항복을 설득하자, 팽의빈이 '나는 대송(大宋)의 신하이거늘, 의리를 어찌 다른 신하에게 복종할 수 있겠는가?!'라고 사납게 외치다가 죽었다. 이리하여 경동(京東)의 주현(州縣)은 다시금 엄실이 보유하게 되었다. 보경 2년(1226) 6월, 몽고군이 이전을 청주(靑州)에서 포위했다. 이전이 북쪽으론 산동을 위협하고, 남쪽으론 금전 ・양식을 주문하면서 송나라 조정을 끼고돌자 몽고에서 그를 의심했던 것이다. 몽고가 공격해오자, 이전이 크고작게 1백차례나 싸웠으나 끝내 불리해지자 성(城)에 의지하며 스스로 지켰다. 몽고군이 길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야밤중에 개들을 요새에다 풀어놓았다. 이전은 군량 보급로가 끊기자 친형 이복(李福)과 모의하는데 이복이 이르기를, '둘이서 덩달아 죽는건 무익하다.  네 몸은 남북의 경중(輕重)과 이어졌으나, 나는 응당 고립된 성을 사수해야 한다. 네가 샛길로 남쪽으로 돌아가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온다면, 살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전이 '수천만의 강적이기에 지탱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아침에 나가면 저녁엔 성이 함락될테니, 형님께서 가시는 것만 못합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전이 청주에 잔류하고, 이복이 초주로 돌아왔다. 9월에 서희직을 파면하고, 유탁(劉琸)을 회동제치사로 임명했다. 조정에선 이전이 몽고군에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도모하려 했는데 서희직이 꺼려하고 나약해 장수를 바꾸어 모의한 것이다. 유탁이 병영을 건조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진강부도통(鎭江副都統) 팽탁(彭托)으로 하여금 칭찬을 늘어놓도록 만들었다. 팽탁도 유탁을 대신해 침을 흘리며 더욱 강하게 부추긴고로, 유탁이 서희직을 대신하게 되자 팽탁은 유탁을 대신해 우이(旴眙)의 지사가 되었다. 11월, 유탁이 초주에 당도했다. 마음으로 우이의 4총관(總管)을 제어할 수 없음을 알고선 오로지 진강의 병사 3만명에게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하전(夏全)이 그것을 따르겠다 청했으나, 유탁은 본래 하전의 교활함을 경계하여 허락치 않았다. 팽탁은 스스로 자질과 명망은 유탁보다 오히려 낮다고 생각하면서 이르길, '유탁이 하전의 동행을 저지했는데 이는 우이에 우환을 남기기 위함이다. 유탁은 오히려 하전을 꺼려하는데, 내가 어찌 능히 사용하겠는가?'라면서 하전에게 격렬하게 설득했다.

'초주성의 도적떼는 3천명을 채우지 못한데다, 건장한 장수들은 산동에 있습니다. 유제사(劉制使, 劉琸)께서 이를 도모하여 아침저녁에 공적을 거둘터인데, 태위(太尉)께선 어찌 이같은 기회에 달려가지 않는 겁니까?'라고 팽탁이 말하자 하전은 기뻐했고, 장수와 병사들이 곧바로 초주성에 들어갔으며, 시청(時靑)도 회음으로부터 초주성 안으로 들어와 주둔했다. 유탁이 놀라 두려워하면서도, 형세가 역전된 것을 용납치 않아 하전과 시청, 2명을 다시 성밖으로 보내고자 모의했다. 때마침 이전이 이미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이복이 병사들을 나누어 청주로 가려 하는데, 유탁이 하전에게 초주의 병사들을 엄중히 방비하라 명하자, 이전의 무리들이 두려워하며 떨었다. 이전의 처 양씨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하전에게 이르기를, '장군께선 산동으로부터 귀부해오시지 않았습니까? 여우가 죽으면 토끼가 슬퍼하는데, 이씨(李氏, 李全)가 멸망한다면 하씨(夏氏)가 홀로 무사히 잔존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장군께선 살펴주십시오'라고 하자 하전이 수락했다. 양씨가 성대히 장식해 마중나가 군영 보루를 더듬으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 형님이 죽었다고 전하는데, 내가 일개 부인(婦人)으로 어떻게 능히 자립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태위[=夏全]를 지아비로 삼을 것인즉 자녀와 옥백(玉帛), 무기와 곳간은 모두 태위의 것이다. [태위가] 이를 영솔해주길 바라니,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하자, 하전의 마음이 동요했다. 이에 주안상을 마련해 몹시 기뻐하여 흥겹게 마시고, 돌아가듯 취침하며 원한을 바꾸어 호의로 삼아 도리어 유탁을 축출할 것을 이복(李福)과 모의했다. 마침내 양씨가 초주의 군영을 포위해 관민(官民)의 집들을 불태우고, 군수창고를 지키던 관리를 죽여 재물을 취했다. 당시, 유탁의 정예병은 1만명이 있었으나 군색하여 한가지 명령조차 내릴 수 없기에 한숨을 쉬던 터였다. 밤중에 유탁이 밧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와 간신히 몸을 숨겼다. 진강의 군사가 도적들과 싸우다 태반이 전사하고, 장교들도 많이 죽었는데 식기와 갑옷, 금전과 식량도 전부 도적들의 차지가 되버렸다. 유탁이 걸어서 양주(揚州)에 이르자 병사들을 빌리어 스스로 지켰다. 하전은 이미 유탁이 축출되자 이전의 진영으로 가려는데, 양씨가 이를 막았다.

하전은 양씨가 이미 초주를 도모하자 두려워했기에 크게 약탈하며 우이로 도망가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다. 우이의 장수 장혜(張惠)와 범성진(范成進)이 성문을 폐쇄하자, 하전이 성을 도모할 수 없어 낭패하여 금나라에 투항하였다. 조정에선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경악했다. 유탁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탄핵했는데, 얼마안가 죽었다. 보경 3년(1227) 봄 정월, 요충(姚翀)을 회동제치사로 임명했다. 조정에선 요충이 이미 이전과 교제한 바 있어서 그를 임명한 것이다. 요충이 부임하기 앞서 알현하는데, 황상(皇上, 宋理宗)께서 '남북(南北)은 모두 짐(朕)의 적자(赤子)이거늘, 이쪽과 저쪽을 어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경(卿)은 짐을 위하여 이를 안무(安撫)할지어다'라며 타이르셨다. 요충이 초주성 동쪽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선 정무를 다스렸다. 성안에 들어간 사이 이전의 부인 양씨와도 만났는데, 서희직의 고사(故事)를 인용해 예의를 지냈다. 양씨가 요충이 입성하는걸 허락하고, 이내 요충이 들어오자 절간의 승려들이 다스림을 기탁하매 전심(專心)으로 즐거워했다. 3월에 조범(趙范)이 승상 사미원에게 상서해 주장하길...



"회동의 사태는 날마다 달라지고, 새로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하를 보유했다는 것은 장강(長江)을 보유하는 셈이며, 회하가 사라지면 장강 이북의 항구는 갈대가 무성해져 적(敵)들이 모두 군사를 숨긴채로 건너온다면, 강면(江面)이 수천리인들 어디서 방어한단 말입니까? 만약 지금, 두터운 은혜와 겸손한 말로 이르며 반적을 회유한다면, 그것은 저들의 전쟁을 늦추려는 계책에 넘어감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만에하나 군사를 거두어 퇴각시켜 주둔해 반적을 늦추려한다면, 저들의 깊이 들어가려는 음모가 성사됐음에도 알지 못하는 셈입니다. 혹은 청야(清野)작전을 실행해 성(城)에 의지하려 한다거나, 혹은 오합(烏合)들을 모아 떠돌아다니며 싸우려 한다던지, 혹은 반적의 잠시 순응하고, 잠시 반역하는 말에 기뻐하거나 두려워한다던지, 반적이 잠시 군사를 퇴각시키거나 잠시 진격시키는데 느슨해지거나 긴장한다는건 모두 잘못된 계책입니다. 잘못된 계책이란 곧 회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며, 회하를 상실한다는건 장강을 상실하는 것으니, 그걸 상실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대저 도적들을 막는 군사가 있고, 유격하는 군사가 있으며, 반적들을 토벌하는 병사가 있습니다. 지금 보응(寶應)이 산양(山陽)을 핍박하고, 천장(天長)이 우이(旴眙)를 핍박하는데, 모름지기 각자 수비병 1만을 증강해 훌륭한 장수를 보내어 통솔케 해야 합니다. 반적들이 오면 견고한 방벽으로 그 예봉을 꺾어버리고, 오지 않더라도 무예를 빛내어 그 경계를 압박하면서 또한, 약점을 노리고 틈새가 보여질 시기에 편사(偏師)를 보내어 그 방비하지 않음을 엄습해 결사적으로 싸워보인다면, 설령 깊숙이 들어오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주둔지를 찌른다면, 이것이 도적을 막아내는 군사입니다. 우이의 도적들은 본래 물자를 저축해놓은게 없고, 금나라 사람들 역시 부양할 수 없으므로, 군사들을 나누어 돌아다니며 식량을 약탈하는데 불과합니다. 마땅히 정예병을 헤아려 차출하여 용감한 장교에게 주고, 토호(土豪)를 모집해 매복시켰다가 기습 ・섬멸시키면, 이것이 유격하는 군사입니다. 양주와 금릉(金陵), 합비(合肥)에서 각각 2~3만명씩 거두어 인물은 필시 뛰어나고, 장교도 필시 용감하며, 병장기는 필시 날카로와야 합니다. 

가르치고 검열하는데도 필시 능숙해지며, 기율(紀律)은 필시 엄격하고, 상벌(賞罰)도 필시 공평해진다면, 그 마음 씀씀이를 염려하여 사람들마다 그위로 어버이를 생각하면서 그위로 대장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이것을 실행함을 능히 믿게 된다면, 반년만에 국가는 강력해질 것이며, 1년만에 반적을 토벌할 수 있을겁니다. 반적들은 이미 깊숙이 들어오지 못한데다, 다시 노략하는데도 획득한 것이 없으니, 더구나 토벌당하는걸 생각하고 두려워해 오히려 필시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금나라는 원조할 여력이 없어 반적은 필시 화내고 원망할 것인즉, 우리는 이로서 금나라 사람들한테 화근을 넘길 수 있습니다. 혹여 양주에 대군을 주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면, 도적에게 화(禍)를 당하는게 빨라질까 두렵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주는 국가의 북문(北門)으로 회하를 단번에 거느리면서, 장강을 단번에 가려주고, 운하(運河)까지 단번에 방어해주니, 어찌 방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곳을 잘 지켜낸다면, 적은 공격할 장소를 알지 못할겁니다. 지금, 보응 ・천장의 두 주둔지를 잡아 그곳을 쳐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2~3개 군사의 병영으로 거듭 군세를 과시할 것이니 반적의 장수도 공격할 장소를 알지 못하며, 감히 우리의 양주를 침범하려 들 것입니다. 설령 반적들이 병세(兵勢)를 몰라 양주를 침범해온다면,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에 조정에선 조범을 불러 여쭈어 논의하고, 재차 명을 내려 지주(池州) 지사로 삼았다.



5월, 이전이 청주를 가지고 몽고에 투항했다. 이전이 포위당한지 1년이 되자 소[牛]와 말[馬]은 물론 사람까지 잡아먹었음에도 식량이 소진되버리자, 장차 스스로 그 군인들을 먹었다. 이전이 항복하려 했지만, 무리가 이견(異見)을 제기하자 두려워해 향료를 태워 남쪽을 향해 재배(再拜)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했다. 당여인 정연덕(鄭衍德)과 전사(田四)를 구해주면서 이르기를, '옷감으로 비유하자면 몸뚱이는 있으나, 소매가 없어 근심스럽습니다! 지금 북으로 돌아간다는게 반드시 복(福)이 아님도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전이 몽고에 투항했다. 유경복(劉慶福)이 산양에 체재하면서 스스로 이미 조짐이 좋지않다는 사실을 알고선 불안한 생각을 품게되어 이복(李福)을 암살해 조정에서 속죄하고자 했다. 이복이 이를 눈치채고, 역시 유경복을 죽이려 모의하니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시기하면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어느날, 이복이 거짓으로 칭병해 열흘 남짓 두문불출하자 유경복이 가서 염탐하는데, 이복이 뛰쳐 일어나 칼을 빼들어 유경복에게 부상을 입히고, 유경복이 도망가자 좌우(左右)가 그를 죽였다.

이복이 경복의 수급을 요충에게 갖다 바치자, 요충은 크게 기뻐했다. 막료 두뢰(杜耒)가 '유경복은 화근의 으뜸이자, 일세(一世)의 간웅(奸雄)이었음에도, 지금은 머리가 떨어져 큼직한 손에 놓여져있구나!'라고 말했다. 당시, 초주는 하전의 반란으로부터 비축된 물자가 남아있질 않았고, 화물의 운반이 끊겼으며, 반적의 무리가 가득해졌으니 이복 때문에 말미암은 것이라 일컬었다. 이복이 사람들의 말을 꺼려해 유충과 수차례 만나 [물자 수송을] 재촉해 요충이 사죄했으나, 조정에선 물자를 내려보내지 않았다. 6월에 이복이 성난 무리들에 편승해 이전의 처 양씨와 모의하여 요충을 초청해 술자리를 가졌다. 요충이 도착했으나 양씨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초대 장소로 나아가 앉았고, 좌우가 흩어지며 떠났다. 이복은 요충에게 특별히 막료들을 부르게 했으며, 양씨에게도 요충의 첩(妾) 2명을 부르게 했다. 여러 막료들은 변고(變故)가 생겼다는걸 눈치챘음에도 마지못해 나갔다. 두뢰가 팔자교(八字橋)에 이르자 이복의 병사들이 허리를 베어 죽였으며, 요충도 없애버리고자 했지만 정연덕이 그를 구원해 모면할 수 있었다.

요충은 백발이 되어 밧줄로 성에서 나와 밤중에 도망쳤는데, 명주(明州, 절강성 영파시)로 돌아갔으나 이내 죽었다. 조정에선 회하에서 반란이 서로 잇따르자, 장수를 파견했다간 필시 죽임당할 것이라며 잠시 회하를 가벼이 여기고, 장강을 중시해 초주에 다시는 병영을 건조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 장수 양소운(楊紹雲)에게 제치사를 겸임시키고, 초주를 회안군(淮安軍)으로 개칭해 통판(通判) 장국명(張國明)에게 임시로 지키게 하니, 주(州)에선 기미(羈縻)와 비슷하다 보면서 여겼다. 가을 7월, 장림(張林) 등이 회안(淮安)으로 돌아와 이복을 토벌해 참수했다. 처음에 이전의 무리들은 군대 봉급과 식량이 넉넉하게 이어지지 않자, 누차 원망하는 말을 뱉었다. 이전의 장수 국안용(國安用)과 염통(閻通)이 탄식하여 이르길, '우리들은 쌀을 제외한 동전 2백전(錢)만 매일 받는데, 초주(楚州)는 물건이 변변치 않음에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유경복이 선량하지 않아 서로 원수를 찾으려하니, 우리로 하여금 먹고 입지를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장림과 형덕(邢德)도 초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장림과 형덕은 이미 조정의 은혜를 받았다고 스스로 일컬으면서 중간에 이전과 만나 이간질하니, 이에 있어서 지금 돌아가 어찌 조정과 일을 세우지 않냐고 하였다. 왕의심(王義深)은 일찍이 이전에게 모욕을 당했는데, 또한 자신은 본래 가섭(賈涉) 장군의 막하 사람이라며 팽의빈(彭義斌)과 정의를 세워 이루질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국안용, 염통, 장림, 형덕, 왕의심 다섯 사람이 서로 말하길 '조정에서 금전과 식량을 내리질 않는건 배반자를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라면서 이복을 살해할 것을 공모하고, 이전의 처 양씨도 바치고자 했다.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양씨의 집으로 달려가니, 이복이 나와 도망가자 형덕이 손수 베어버렸으며, 서로 죽인 자가 수백명이었다. 곽통제(郭統制)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이전의 차남 이통(李通)과 이전의 첩 유씨(劉氏)를 죽이고선 양씨라 속여대며 그 수급을 상자에 담아 나란히 양소운에게 바쳤다. 양소운이 수급을 임안(臨安)으로 서둘러 호송했으며, 조정에선 기울어질만치 모두 기뻐했다. 8월, 우이군 지사 팽탁(彭托)과 총관 장혜, 범성진, 시청에게 격문을 날렸다.

이들에게 나란히 병사를 이끌고 초주로 가서 편하게 이전의 잔당들을 도륙하라 지시했다. 팽탁이 경망스레 굴면서 장혜 등에게 의복을 입지 말도록 했었는데, 격문을 얻게되자 감히 스스로 결정하질 못하여 제치사부(府)와 조정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청했다. 조정에선 시청의 명망이 높아지자 격문으로 구획시켰는데, 시청은 재앙이 미치는 것을 두려워해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청주(靑州)에서 이전에게 사실을 알리고, 지체하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장혜와 범성진은 조정 격문이 시청에게만 미치지 않게되자, 우이로 돌아와 팽탁을 맞이해 연회를 베풀고, 팽탁이 만취하자 그를 결박한 틈을 타서 회하를 건너 우이를 가지고 금나라에 항복해버렸다. 이전이 시청의 답변을 받아 통곡하며, 몽고의 대장에게 남쪽으로 돌아가겠다며 힘써 고했다. 허락받지 못하자, 이전은 한결같이 가리켜 끊어버림으로써 남쪽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송나라에 반역하리라 맹세했다. 몽고의 대장이 승제(承製)하여 이전에게 산동(山東) ・회남행성(淮南行省)을 배수하고, 산동을 마음대로 처리해 해마다 금폐(金幣)를 바치게 하였다.

이전이 마침내 몽고의 장선차(張宣差), 통사(通事) 수명과 초주로 돌아왔는데 몽고의 의관(衣冠)을 갖추고, 문서를 발송하면서 갑자(甲子)를 기원삼아 연호를 쓰지 않았다. 양소운은 이전이 초주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양주에 체류하며 돌아가지 않았다. 왕의심은 금나라로 도주했고, 국안용은 장림과 형덕을 죽여 스스로 속죄했으며, 곽통제 역시 이전에게 죽임당했다. 12월, 금나라에선 이전을 회남왕(淮南王)에 봉했으나 이전이 받지 않았다. 당시, 이전이 금나라의 완안와가(完顏訛可)를 구산(龜山)에서 패배시킨 까닭에서였다. 이전이 시청과 그 무리를 유인해 죽였다. 소정(紹定) 3년(1230) 2월, 조범과 조규(趙葵)가 다시 일어나 진강과 저주(滁州)의 군마들을 통제했다. 5월에 이전을 창화보강절도사(彰化保康節度使) ・경동안무사로 삼았으나, 명을 받지 않았다. 처음에 이전이 초주로부터 돌아오며 두텁게 사람을 모집하고, 병사로 삼으니 남북에 국한되지 않았다. 천장(天長)의 보갑민(保甲民)을 모아 16채(砦)로 삼았는데, 근년에 생업을 잃어 관(官)의 구휼이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젊은 사람들도 모두 모집에 나갔다.

사양호(射陽湖, 강소성 보응현에 소재한 담수호)에서 정처없이 거주한 자가 수만 가구였는데, 가구마다 병장기가 있음에도 침략을 제어하기 어려워 우두머리는 두루 백성들을 안정시켜 곡식을 권장하고, 수령 55명이 수중 진지를 연결해놓아 성패(成敗)를 관망했다. 이전은 동남지방에서 선박의 잇점을 깨닫고, 수전(水戰)을 연습하고자 모색해 미곡상이 당도하면 쌀 수송용 선박을 남김없이 사들이면서 키잡이 사공은 남겨두어 1인당 10명을 훈련시키게 했다. 또한, 사람을 보내 강(江)과 호수에 떠도는 동유(桐油)와 뗏목을 붙여 사들이고, 장인들을 남쪽에서 모집해 선박을 크고 왕성하게 갖추어 회하 입구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바라봤는데, 종종 시험삼아 사양호에서 바다에 이르게 했다. 재차 식량이 적다고 주장하면서 바닷배를 보내 소주(蘇州) 앞바다로부터 평강(平江)과 가흥(嘉興)에 들어가 미곡의 구매를 하소연했으나, 사실은 바닷길을 익혀 기전(畿甸, 臨安 주변의 수도권)을 염탐키 위함이었다. 그러나 산동의 경리(經理)가 정해지지 않았음에도, 매년 몽고에 공물을 바치는 것이 불가결했다.

때문에 겉으로 송나라 조정에 공순(恭順)해하며 금전과 식량을 얻고, 재화로 바꾸어 몽고로 이송했다. 조정에서도 이전이 산동을 왕래하여 북방의 우려를 조금이나마 덜게하고자 군량의 지급을 단절시키지 않았다. 이전이 조정에 멋대로 말하면서 산양(山陽)에 병영을 세우겠다며 다시금 요청하고, 사신을 파견해 금나라에 들어가게 했다. 또한, 조정의 병비(兵備)를 약화시키고자 군사(軍士) 목춘(穆椿)에게 임안으로 잠입해 황성(皇城, 宮城)을 방화하게 하니, 어전(御前)의 무기 보관소를 불태웠으며, 이리하여 역대 왕조의 병기와 갑옷들이 모두 소실되버렸다. 이전은 먼저 양주에 거처하며 도강하는데, 병사를 나누고 거느려 통주(通州)와 태주(泰州)로부터 바다로 달아났다. 부하들에게 말하길, '통주와 태주는 염장(鹽場)이 소재한 곳으로 먼저 탈취해 가계(家計)로 삼을만한 것이 없는데다, 조정으로 하여금 소금의 이익을 상실하게끔 만들수 있다'고 하였다. 이전은 조정에서 방비하려 하지 않고, 반역했음에도 군량 지급을 급히 끊지 못하자 몽고의 이선차(李宣差)와 송선차(宋宣差)에 기대어 의심하고, 허세로 공갈쳤다.

몽고는 실제로 이전의 군사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그 이선차란 사람은 청주(青州)의 약장수였다. 조정에서는 비록 이전의 간교함을 눈치챘음에도, 잠시동안의 평안함만 추구했던 탓에 힐책하지 않았다. 이전의 곡물 수송선이 염성(鹽城)을 통과하는데, 양주(揚州) 지사 적조종(翟朝宗)이 병사들을 부추겨 그것을 탈취했다. 이전이 노하여 도적을 잡겠다는 명분으로 수군과 육군 수만명을 데리고 곧바로 염성을 쳤다. 수비중이던 장수 진익(陳益)과 누강(樓強), 지현(知縣) 진우(陳遇)가 모두 달아나 버렸으며, 이전은 염성안으로 들어가 거처했다. 적조종이 황급히 유능한 관리 왕절(王節)을 보내어 이전에게 간곡하게 군사를 물리치라 했으나, 이전이 허락하지 않고, 정상(鄭祥)에 머무르면서 동우(董友)에게 염성을 지키도록 하고,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초주로 돌아왔는데, 문서로 조정에 아뢰길 '병사를 파견해 염성을 지나가던 도적들을 붙잡았으나, 현령(縣令)은 스스로 성을 버리고 도망쳐 떠났습니다. 군민(軍民)이 놀라고 시끄러운걸 우려해 성안으로 들어가 무리를 안정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선 이전에게 부월(斧鉞)을 제수하고, 병사들을 풀어놓도록 하면서 제치사(制置司)의 유능한 관리가 달려가 타이르라 명했다. 이전이 '조정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대우하니 울음이 결과로구나'라며 제명(制命)을 받지 않았다. 조정에선 적조종을 파면하고, 통판 조경부(趙璥夫)에게 주(州)의 업무를 대신하라 명했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은 현명하지 못하고, 어리석어 모두 이전이 반드시 배반할 것이라 감히 발언하지 못했는데, 국자감승(國子監丞) 도정(度正)만이 홀로 상소해 전력으로 간언하며 이전을 처치할 세가지 계책을 바쳤다. 그 말이 정직하고 분명하면서도, 격렬하고 엄격했지만 당시엔 사용되지 못했다. 이때에 이르러 조범(趙范) ・조규(趙葵) 형제가 깊이 이전의 반역을 우려한 나머지 누차 상소해 힘써 간했으나, 사미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겨울 10월, 조선상(趙善湘)을 강회제치사(江淮制置使)로 임명했다. 당시, 이전은 선박을 제조하는 것이 급하고 더해져 다른사람의 무덤에 이르러 널판지를 차지하고, 철전(鐵錢)을 달구어 쇠못으로 만들었으며, 죄수들의 기름까지 볶아내 유회(油灰)로 다듬었다.

또한 횃불을 진열해 그림자가 이어지더니, 연해(沿海)로 망명한 자들을 불러 뱃사람으로 삼았다. 조경부를 기만해 몽고에 청하여 5천명의 금전과 양식을 맞아 증가시키고, 서약서와 철권(鐵券)을 요구했다. 조정에서 오히려 군량의 지급을 단절하지 않았고, 이전은 미곡을 얻어 스스로 회해(淮海)로 운반하여 염성에 들어가자, 무리가 넉넉해졌다. 다른 군사들은 '조정에선 도적이 배부르지 못할까 염려하니, 우리가 어찌 도적을 죽이는데 힘쓰겠는가?'라고 했다. 사양호의 주민들 역시 모두 노하여 '북방의 도적은 길러주면서 회하의 백성은 죽이려한다'며 말하고, 듣던 사람들이 한숨쉬었다. 이전이 재차 사람을 보내어 금패(金牌)로 유혹하고 겁박해 백성들을 두루 진정시켰으며, 유구(喻口)에 부교(浮橋)를 건조해 편하게 염성을 왕래하였다. 이무렵, 승상 사미원은 대부분 자택에서 시간을 보냈고, 여러 집정(執政)들도 뜻이 없었기에 정청지(鄭清之)만이 홀로 깊이 우려해 황상(皇上)께 이전을 토벌할 것을 힘써 권고했다. 황상이 이에 조선상에게 강회지방을 제치(制置)하면서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걸 허락했다.

그러나 아직은 내부로는 진격해 토벌할 것을 도모하면서도, 외부로는 [이전과의] 조정(調停)을 말해 오로지 조범 ・조규 형제가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할 것을 힘써 간청했다. 12월 경신일, 이전이 갑자기 양주의 만두(灣頭)에 이르자 양주 부도통 정승(丁勝)이 막았고, 이전은 양주성 남문(南門)을 공격했다. 조경부가 사미원의 서찰을 얻어 식량 1만 5천석을 늘리도록 허락하면서 이전에게 초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고, 유역(劉易)을 보내어 이전의 보루로 나아가 알려주었다. 이전이 웃으며 이르길 '사승상(史丞相, 史彌遠)은 나더러 귀순하라 권하지만, 정도통(丁都統, 丁勝)은 나와 싸우려 하니 서로가 속이려는게 아닌가?'라면서 서찰을 내던지고, 받지 않았다. 조경부가 두려워하여 시급히 조범을 진강(鎭江)에서 영접하였고, 조범도 조규와 시일을 결정해 조규가 웅승(雄勝), 영회(寧淮), 무정(武定), 강용(強勇) 4군의 1만 4천명을 거느려 나아가게 했다. 당시, 이전이 병사를 이끌고 태주를 공격하자, 지사 송제(宋濟)가 맞이해 항복하였다. 이전이 들어가 고을의 치소(治所)에 앉아 그 자녀들의 화폐를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장차 양주로 달려가고자 했는데, 조범 ・조규가 이미 양주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정연덕(鄭衍德)을 매질하며 이르기를, '나의 계책은 먼저 양주를 탈취해 장강을 건너가려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나한테 통주와 태주를 취하라며 권했고, 이미 두명의 조씨(趙氏)가 양주에 들어갔다니 장강을 건널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미 말하길, '지금 생각컨대 곧바로 양주를 치는 것뿐이다'라면서 병사들을 나누어 태주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무리들이 모두 양주를 공격했다. 만두에 이르러 요새를 세우고, 운하(運河)의 상류를 점거해 호의(胡義)로 하여금 장차 선봉부대를 평산당(平山堂)에 주둔시키고, 3성(城)의 [허실이 드러날] 기회를 엿보며 대기했다. 이전이 양주성 동문(東門)을 공격하자, 조규가 부딪치며 싸우는데 이전이 장우(張友)에게 성문(城門)앞에서 소리쳐 조규가 나와줄 것을 요청했다. 조규가 나오자, 이전과 해자를 사이에 두고 말[馬]을 세우며 서로간 노고(勞苦)가 어떠하냐고 이전이 와서 물었다. 이전이 이르기를, '조정에선 동향을 주시하며 시기하고 의심하더니, 지금 또다시 군량을 끊어버렸다.

나는 배반하지 않았고, 금전과 식량을 찾으려 할 따름이다'라고 했다. 조규가 이르기를, '조정은 너를 충신(忠臣)과 효자(孝子)처럼 대우했음에도, 창(槍)을 되돌려 성읍(城邑)을 공격해 함락시켰으니 조정에서 네놈의 금전과 양식을 어떻게 끊지 않겠느냐?! 네놈은 반역하지 않았다고 운운하는데, 사람들을 속이려드는 것이냐? 하늘을 속이려드는 것이냐?!'라고 했다. 이전이 대꾸하지 않은 채, 조규를 향해 화살을 당겨 쏘고선 달아났다. 이때부터 누차 싸웠는데, 이전의 병사들이 많이 패배했다. 이전이 매사 운운하길, '나에겐 회하 상류의 주현(州縣) 따위는 필요없다. 장강을 건너 바다로 떠다니며 가로질러 소주(蘇州)와 임안에 당도한다면, 누가 감히 나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전은 양주의 3성(城)부터 삼킬 의도로 성밑으로 병사들을 성밑으로 접근시키면서도, 매번 얻지 못했다. 종웅무(宗雄武)가 계책을 바치며 이르길, '성중(城中)엔 본래 땔감이 없는데다, 총령소(總領所)에서 저축해놓은걸 지급하는 것마저 거의 바닥났으니, 만약 포위망을 쌓는다면 3성은 스스로 지쳐버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전이 이에 무리들 전체와 시골의 농민 수십만명을 몰아세워 3성을 포위하며 보루를 세우니, 제치사와 총령소의 식량 원조가 모두 두절되었다. 조범과 조규가 3성에 명하여 여러 성문에서 제각기 병사를 출격시켜 적들의 보루를 겁략하고, 횃불을 올린 기회에 밤중에 군사를 풀어놓아 충격을 가했는데, 매우 많은 반적을 죽여 몰살시켜 버렸다. 이때로부터 이전은 포위망에만 뜻을 기울였고, 관군(官軍)이 기다린지 오래되어 지쳤음에도 다시는 성앞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무인일, 이전이 평산당에서 일산(日傘)을 펼치어 음악을 연주하면서 널리 보루를 축초해두었다. 조범과 조규가 여러 성문에 가벼운 병사로 견제하도록 명하고, 직접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나와 보루의 서쪽을 공격했다. 이전이 병사를 나누어 성문 앞에서 크게 싸웠는데, 진시(辰時)로부터 미시(未時)까지 계속되면서 죽이고 부상당한 자가 상당히 많았고, 병관(兵官) 왕청(王靑)마저 힘껏 싸우다 전사했다. 다음날, 조범이 군사를 출격시켜 크게 싸워 이전의 곡물 수송선 수십척을 노획했으며, 조규도 힘껏 싸우면서 그들을 패배시켰다.

행도(行都, 임시수도로 臨安을 가리킴)에서는 이전의 반역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 가운데 다투어 피난가는 자가 생겨났음에도 사미원은 아무런 계책을 내놓지 않았으며, 병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갑자일, 황상이 조령으로 '짐(朕)은 원훈(元勳, 史丞相)을 존중하고 예우해 조정에 요청하느라 애쓰지 않게끔 하고자 한다. 열흘에 한번씩 대내(大內, 皇宮)로 부임해 도당(都堂)에 들어와 국사를 다스리는걸 허락하노라'며 하교했다. 소정(紹定) 4년(1231) 봄 정월 초하루 무자일, 황상이 자명전(慈明殿)에 나아가 황태후(皇太后, 恭聖皇后)의 장수(長壽) 축하의식을 거행하고, 천하를 크게 사면했다. 장수 축하의 사은(謝恩)으로서 사미원과 설극(薛極)의 관직을 2등급, 갈홍(葛洪)과 원소(袁韶), 교행간(喬行簡)에겐 1등급씩 진급시켜 주었다. 진강부 도통(都統) 정정(丁整)을 좌무대부(左武大夫) ・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로, 통령(統領) 심흥(沈興)과 유명(劉明)의 관직을 1등급씩 진급시키고, 이전을 추격 ・기습해 그의 양식을 탈취하여 불사르게 했다. 조범 ・조규 형제가 양주에서 이전을 크게 패배시켰다.

당시, 이전이 양주성의 해자를 깊숙이 포위하자 조범과 조규는 제장들을 파견해 동문(東門)에서 나와 엄습케 했다. 이전이 토성(土城)으로 도주하자 관군이 뒤쫓았는데, 많은 이들이 [해자에] 빠져 짓밟혔다. 조범이 서문(西門)에서 병사를 늘어세우자, 반적들은 보루를 폐쇄한 채 나오지 않았다. 조규가 이르길, '반적들은 우리가 군사를 거두기를 기다릴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기병을 매복시켜 담장 사이를 깨뜨려 보병을 유인해 거두어갔다. 적병(賊兵) 수천명이 해자 옆에까지 쫓아왔는데, 이호(李虎)가 힘껏 싸웠고, 성위에선 비가 내리는 것처럼 투석하자 반적들이 퇴각했다. 잠시후, 적의 별동대가 동북쪽으로부터 달려와 이르자 조범과 조규는 보병 ・기병을 지휘해 부교(浮橋)와 적교(吊橋)를 끼고 나란히 나와 세차례 진영을 번갈아 치고, 대기했다. 사시(巳時)로부터 미시(未時)에 이르기까지 반적들과 크게 싸웠는데, 별도로 이호 등을 파견해 마보병(馬步兵) 5백명이 적군의 배후에 나타나도록 하고, 조규가 가벼운 병사들을 인솔해 종횡으로 치면서 정예군 ・기습부대 ・복병이 협격하니, 적이 패주했다.

이전은 비로소 이미 모반을 이루었음에도, 자주 후일을 염려하고 꺼리게 되었는데, 무리가 불순해지자 두려워했다. 변방의 일을 벌이길 좋아하는 자들이 이전에게 원한을 품고, 중시해 마침내 거세게 일어났다. 이전의 죄를 성토하고 토벌하기에 이른데다, 금전과 식량의 지급을 그만두고, 성을 공격함에도 얻지 못했으며, 자주 싸워서 불리해졌다. 이전이 비로소 크게 후회한 나머지 실망하고, 마음이 유쾌하지 않았다. 간혹 좌우(左右)에다 그들의 팔뚝을 품도록 시키면서 이르길, '이건 내 손이 아니냐?'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 조범과 조규가 밤중에 논의해 가려는데 조규가 '동문으로 나갑시다'라고 하자, 조범은 '서쪽으로 나가는 것은 이미 불리하지만, 적들은 분명 반대[=東門]로 볼 것이므로 장소를 바꾸어 도모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서문의 보루로 나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상원절(上元節) 저녁, 이전은 등불을 켜놓고 주안상을 마련해 평산당에서 성대히 연회를 베풀었다. 이전이 창(槍)을 쌍으로 늘어뜨려 가리킨 것을 알게된 척후병이 조범에게 보고했고, 조범은 조규에게 알려 말했다.



"반적의 용맹이 가벼워졌으니,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다!"



다음날 아침, 모든 정예병들이 서쪽으로 가고 관군은 본래 반적들의 깃발이었던 것을 바꿔치기해 늘어놓자, 이전이 멀리서 바라보며 이선차(李宣差)와 송선차(宋宣差)에게 '내가 남군(南軍)을 쓸어버리는걸 지켜보거라!'라고 말했다. 관군이 적들을 발견하자 그 앞에서 갑자기 전투가 벌어졌는데, 조범 휘하의 장병들이 나란히 진격하고, 조규가 직접 부딪쳐 싸우자 여러 군사들도 분연히 싸웠다. 반적들이 달아나 토성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호(李虎)의 군사가 벌써 문을 막아버렸다. 이전이 궁색해져 따르던 기병 수십명이 북쪽으로 도망쳤다. 조규가 여러 군사들을 인솔하여 들이닥치자, 이전은 신당(新塘)으로 달아났다. 신당의 결수(決水) 뒷쪽부터는 진흙탕이 깊어 수척(尺)에 달했는데 날씨가 맑은지 오래된데다, 전장에서 일어난 먼지가 뒤덮여 겉으로 마른 흙덩이와 비슷해보였다. 이전의 기병들이 이곳을 통과하자 진흙탕속에 모두 빠져버렸고, 스스로 나오질 못했다. 제용군(制勇軍) 조필승(趙必勝) 등이 추격해 장창을 휘둘러 그들을 찔러 처치하자, 이전이 '나를 죽이지 마라! 내가 두목이다!'라고 소리쳤다.

군졸들이 이전의 시신을 분쇄하고, 안장 도구와 갑마(甲馬)를 나눴으며, 30여명도 죽였는데 모두가 장교들이었다. 이전이 죽자 그 잔당들이 흩어졌음에도, 국안용(國安用)은 따르지 않으면서 논의하여 한 사람을 추대해 우두머리로 삼았지만, 서로 아래로 수긍하는 이가 없어 회안(淮安)으로 돌아가 이전의 처(妻) 양묘진(楊妙眞)을 받들고자 했다. 조범과 조규가 추격해 공격하니, 또다시 패하여 도망갔다. 여름 5월, 조범 ・조규가 보병과 기병 10만명을 거느리고 염성(鹽城)을 공격해 반적의 무리를 거듭 패배시켰다. 이윽고 회안에 박두하여 죽인 적들의 숫자가 1만명이었으니, 성안에서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회안의 다섯개 성도 더불어 격파하고, 그 요새의 목책을 불태웠으며, 수천명을 참수했다. 회북(淮北)의 반적이 구원하러 왔지만, 관군 수군(水軍)이 맞이해 요격하면서 재차 격파시키고, 수책(水柵)을 불태워버리자 적들이 비로소 두려워했다. 왕민(王旻), 조필승, 전자재(全子才) 등이 요새의 서문으로 이동해 반적들과 크게 싸웠고, 적들이 연달아 패했다. 양묘진이 정연덕(鄭衍德) 등에게 일컬으며 말했다.

'이화창(梨花槍, 楊妙眞)은 20년간 천하에 적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사세(事勢)가 이미 떠나버렸기에 버틸수 없다. 너희들은 투항자가 아니며, 내가 있을 뿐이다. 지금 나는 연수(漣水)로 돌아가려 하는데, 너희들이 투항을 청하는게 가능하겠나?'라고 하자, 시종들이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양씨가 마침내 회하를 끊고 떠나버리자, 그 잔당들은 마기(馬垍) 등을 보내와 군문(軍門)을 바치며 복종하니, 회안이 평정되었다. 국안용이 양씨를 따라 산동으로 도망가 몽고에 투항했는데, 몽고는 그를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해 산동의 관아를 순시케 했다. 6월 기미일, 조서로 위료옹(魏了翁)과 진덕수(眞德秀), 유육(劉焴), 유약(劉爚)의 관직과 사록(祠祿, 生活年金)을 나란히 회복시켜 주었다. 7월 기축일, 일식이 나타나 기운이 이어졌다. 정축일에 가섭(賈涉)의 여식에게 후궁(後宮)에서 시중들라 명하고, 조서로 문안군부인(文安郡夫人)에 봉했다. 경술일, 갈홍(葛洪)을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 ・소흥부(紹興府) 지사로 삼았다. 8월에 몽고군이 무림(武林)을 깨뜨리고 흥원(興元)에 진입했으며, 선인관(仙人關)을 공격해왔다.




덧글

  • 2014/07/25 01: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07/25 02:1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jaggernaut 2014/08/12 17:39 # 답글

    나무가 쓰러지는건 뿌리가 얕거나 벌레가 속을 파먹은 다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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