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88권, 사미원이 황태자를 폐립하다 세계사








영종(寧宗) 경원(慶元) 4년(1198) 8월, 경당(京鏜) 등이 황제의 후사가 없으므로 종실의 아들을 간택해 양육할 것을 간청했다. 조서로 태조(太祖, 趙匡胤)의 후사 연의왕(燕懿王) 조덕소(趙德昭)의 9세손인 조여원(趙與願)을 궁중에서 양육케 했는데, 나이 6세로 찾아내어 복주관찰사(福州觀察使)에 임명했으며, '엄(曮)'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위국공(衛國公)에 봉했다. 개희(開禧) 원년(1205) 5월 을해일, 조서로 위국공 조엄(趙曮)을 세워 황자(皇子)로 삼았고, 영왕(榮王)으로 진봉했다. 개희 2년(1206) 6월, 조서로 종실 아들 조균(趙均)을 기정혜왕(沂靖惠王) 조병(趙柄)의 후사로 삼으면서 '귀화(貴和)'란 이름을 내렸다. 조병은 효종(孝宗)의 손자로 위혜헌왕(魏惠獻王) 조개(趙愷)의 아들이다. 조균의 부친은 희구(希瞿)로 태조의 9세손이었다. 개희 3년(1207) 11월 정해일, 조서로 영왕을 세워 황태자로 삼고, 주(懤)로 개명했다가 다시 순(詢)으로 바꿨다. 가정(嘉定) 13년(1220) 8월 계해일, 황태자 조순이 사망하자 시호를 '경헌(景獻)'이라 하였다. 이듬해 6월, 기왕의 후사 조귀화를 황자로 삼아 '횡(竑)'이라 개명했다.

종실 아들 귀성(貴誠)을 찾아내어 병의랑(秉義郎)으로 임명했다. 조귀성의 첫 이름은 여거(與莒)로 연의왕 조덕소의 후예 희로(希瓐)의 아들이며, 모친은 전씨(全氏)로 집은 소흥(紹興)의 산음(山陰)에 있었다. 처음에 경원(慶元) 사람 여천석(余天錫)은 사미원(史彌遠) 재상부의 교사였는데, 성격이 성실하면서도 조심스러워 사미원이 중히 여겼다. 사미원이 재상직에 머무른지 오래되었음에도, 황제는 후사가 없어 기왕을 황상의 근속(近屬)으로 삼았으나, 역시 후사가 없게되자 기왕의 후사를 둔다는걸 명분삼아 남몰래 종실 가운데 옹립할 만한 사람을 가려내 황자의 선발에 대비하였다. 가을에 여천석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아뢰는 참에 은밀히 시험삼아서 사미원은 '지금, 기왕께서 후사가 없으시니 종실의 아들로 현명하고 온후한 분을 더불어 모셔오도록 하게'라고 말했다. 여천석이 전당강(錢塘江)을 건너며 월주성(越州城) 서문(西門)으로 배가 당도하자, 하늘의 폭우와 조우했다. 폭우를 피해 전보장(全保長) 집에 들렀는데, 보장은 여천석이 승상의 문객이란 사실을 알고 대단히 정중하게 닭고기와 술을 갖추어주었다.

잠시 두 사내아이가 시중을 들자, 여천석이 기이하게 여겨 질문했다. 보장은 '이들은 나의 외조카입니다. 점쟁이가 일찍이 두 아이는 훗날 대단히 존귀해질 것이라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성씨(姓氏)를 묻자 장남은 조여거(趙與莒), 차남은 조여예(趙與芮)라고 답했다. 여천석은 사미원의 말을 기억해 임안(臨安, 杭州)으로 돌아오면서 이를 알렸다. 사미원이 두 아이를 불러오도록 명령하자, 전보장은 크게 기뻐해 논밭을 팔아 의관(衣冠)을 갖추고, 친척들을 모아 이들을 보내주면서 접견을 부탁했다. 사미원이 접견하는데, [조여거의] 인상이 온순하면서도 매우 기이해 세간에 누설되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급히 돌려보내도록 했다. 보장은 몹시 부끄러워 했고, 향리(鄕里) 사람들도 내심으로 비웃었다. 이듬해, 사미원이 돌연 여천석에게 '두 아이를 다시 데려올 수 없겠는가?'라고 묻자, 여천석이 아이들을 부르게 했으나 전보장은 사절해버려 보내주지 않았다. 사미원이 여천석을 보내 보장에게 은밀히 다독이게 하면서 '두 아이는 장차 최고로 존귀해질 것이니, 마땅히 본가(本家)로 돌아와 길러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수레에 태워 임안으로 데려왔다. 조귀화가 황자로 세워지자, 조여거를 병의랑으로 기왕의 후사를 대신토록 하고, '귀성(貴誠)'이란 이름을 내렸으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가정 15년(1222) 여름 4월 정사일, 황자 조횡(趙竑)을 제국공(濟國公)으로 진봉하고, 조귀성을 소주방어사(邵州防禦使)로 삼았다. 조횡이 거문고를 좋아했기에 사미원은 거문고를 잘 켜는 미인(美人)을 사들여 모두 조횡에게 바치고, 미인의 집안을 두텁게 보살펴주면서 조횡의 동태를 감시케 하였다. 미인은 글을 안데다, 민첩하고도 영민해 황자 조횡이 총애했다. 당시엔 양황후(楊皇后, 恭聖皇后)가 국정을 전단하였고, 사미원이 권력을 행사한지 오래되어 재집(宰執), 시종(侍從), 대간(臺諫), 번곤(藩閫, 절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사람들만] 천거 ・기용하는데도, 누구도 감히 어찌하질 못해 사미원의 권세가 굉장히 커졌다. 조횡이 속으로 편치않아 일찍이 책상위에다 양황후와 사미원의 일을 적어놓으면서 '사미원은 마땅히 8천리 밖으로 유배보내야 한다'라고 말했으며, 또한 궁실(宮室) 벽장에 걸린 지도의 해남도를 주사위로 가리켜 운운했다.



"내가 뜻을 얻게되는 날[=황제로 즉위하는 날], 사미원을 이곳으로 보낼 것이다."



사미원을 '신은(新恩)'이라 지칭하고, 다른날엔 신주(新州, 광동성 신흥현)와 은주(恩州, 광동성 양춘현)라며 [현지로 귀양보낸다] 비방했다. 사미원이 듣고선 크게 두려워해 조횡을 처리할 것을 생각했으나, 조횡은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진덕수(眞德秀)가 궁중(宮中)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조횡에게 '황자께옵서 만약 모후(母后)를 사랑하고, 대신을 공경한다면 천명(天命)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우려가 있을겁니다'라고 간했으나 조횡은 듣지 않았다. 어느날, 사미원이 정자사(淨慈寺, 西湖의 佛寺)에서 부친 사호(史浩, 孝宗代 재상)의 제사를 지내는데 국자학록(國子學錄) 정청지(鄭清之)와 함께 혜일각(慧日閣)에 올라 사람들을 물리친 다음, 말했다.



"황자는 그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소. 듣자하니, 기왕(沂王) 저택의 후계자께서 매우 현명하시다던데 지금 교관을 물색중인지라, 자네가 그분을 지도해주길 바라네. 일이 성사되면, 내 자리에 자네가 앉게될 것이야. 허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자네한테만 귀띔해주는 것이니 단 하나라도 발설된다면, 나와 자네 모두 족멸(族滅)당할걸세!"



정청지가 '감히 어떻게 누설하겠습니까?'라며 답했고, 정청지에게 위혜헌왕부(魏惠憲王府)의 교수를 겸임케 했다. 정청지는 조귀성에게 매일 문장을 가르치고, 고종(高宗)의 필체를 강의하면서 연습시켰다. 정청지는 사미원을 만나 조귀성의 시문(詩文)과 문필을 보여주며 입에 담지못할 만큼 칭찬했다. 사미원이 정청지에게 묻기를...



"내가 듣자하니 황질(皇侄)의 현명함이 이미 성숙해지셨다는데, 대체로 결말이 어떠한가?"

"그분의 현명함이야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범상치 않으십니다."



사미원이 재삼 고개를 끄덕였고, 황태자를 새로이 책립할 뜻을 굳혔다. 날마다 조횡의 과실을 모함해 황상께 아뢰어 조횡을 폐출시키고, 조귀성을 세울 것을 희망했지만, 황상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진덕수가 그 사실을 듣고선 궁중 교수를 사직하고, 관직을 떠났다. 가정 17년(1224) 8월 병술일, 황상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사미원은 정청지를 기왕부(沂王府)로 파견해 조귀성에게 장차 옹립할 뜻을 알려주었으나, 귀성은 침묵한 채 응하지 않았다. 정청지가 '승상께선 저에게 오랫동안 따르며 교류케 하셨으니, 당신의 복심(腹心)입니다. 지금 회답을 한마디도 아니주시면, 제가 장차 승상께 뭐라 답하겠습니까?'라며 다그쳤다. 조귀성이 비로소 손을 잡고 천천히 이르기를, '소흥(紹興)에 노모(老母)가 계십니다'라고 답했다. 정청지가 사미원에게 보고하자, 그 비범함을 더욱 탄복했다. 임진일에 황상이 위독해졌다. 사미원은 조서를 위조해 귀성을 황태자로 삼고, 그의 이름을 윤(昀)으로 개명시켰으며, 무태군절도사(武泰軍節度使)에 제수하고, 성국공(成國公)으로 봉했다. 윤8월 3일, 황상이 복녕전에서 붕어했다.

사미원이 황후의 조카 양곡(楊谷) ・양석(楊石)을 파견해 폐립 사실을 황후에게 설명케 했다. 황후가 불가하다면서 '황자 조횡은 선제(先帝)께서 세우셨는데, 감히 어떻게 멋대로 바꾼단 말인가?'라고 했다. 양곡 등이 밤중에 일곱번 오갔으나, 황후는 끝내 수락치 않았다. 양곡 등이 엎드려 울면서 '내외군민(內外軍民)의 마음이 모두 돌아섰습니다. 만약 태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살아서 반드시 재앙이 미쳐 양씨(楊氏) 일족은 남아나질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잠시 침묵하다 '그 사람[=趙昀]은 어디에 있나?'라고 물었다. 사미원이 즉시 궁중으로 보내어 조윤을 황제로 선포할 것을 서두르도록 수하들에게 명령해 '지금 선포되어야 할 사람은 여기 기정혜왕부(沂靖惠王府)의 황자이지, 만세항(萬歲巷)의 황자가 아니다. 만약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너희들은 모두 참형에 처해질 것이야!'라며 다그쳤다. 조횡은 황상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발을 구르며 선포되는걸 기다렸으나, 오랫동안 사신이 이르지 않아 담장 사이로 바깥을 바라보는데, 황궁 사신이 왕부(王府)에 들어오지 않고 급히 지나쳐버리자 의심이 들었다.

이미 한 사람을 둘러싸고 다시 지나가는데, 때마침 날이 저물어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에 더욱 의심하였다. 조윤이 입궁(入宮)해 황후를 알현하였고, 황후는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제부턴 네가 내 아들이니라'라고 말했다. 사미원이 조윤을 황상의 영구(靈柩) 앞으로 데려가 애도를 마친 연후에 조횡을 불렀다. 조횡이 명령을 듣자 곧바로 나아가 매일 통과하는 궁문(宮門)에 도착했지만, 금위군(禁衛軍)이 따르는 자들을 저지했다. 사미원이 역시 조횡을 영구 앞으로 데려가 애도를 마치고선 장막 밖으로 내보내 금위군 대장 하진(夏震)에게 지키도록 했다. 마침내 백관(百官)들을 소집해 차례로 줄세워 황상의 유제(遺制)를 듣도록 하고, 조횡도 이전 자리로 데려갔다. 조횡이 경악해 '오늘의 일에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묻자, 하진이 '유제가 선포되기 전엔 마땅히 계셔야 합니다. 유제가 선포된 후에야 즉위하실 수 있습니다'라며 속였다. 조횡이 그러하다 여기는데, 멀리서 전상(殿上)의 촛불 그림자 가운데 사람이 어좌(御座)에 앉아있는게 보였다. 조윤이 황제로 이미 즉위했던 것이다.

유제의 선포가 마무리되자, 각문(閣門)이 만세를 부르고 백관들이 배례(拜禮)하며 축하했지만, 조횡만은 배례하지 않아 하진이 그의 머리채를 붙잡아 강제로 절을 올리게 하였다. 이윽고 유조(遺詔)를 위조해 조횡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고, 제양군왕(濟陽郡王) ・영국부(寧國府) 통판(通判)에 봉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 칭하고, 동시에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했다. 조서로 효종(孝宗)의 고사(故事)에 의거해 궁중에서 3년상을 치루며, 조횡을 찾아 제왕(濟王)으로 진봉하여 호주(湖州, 절강성 오흥현)로 쫓아내 살게했다. 사신(史臣, 史家)은 말한다.



영종(寧宗)은 공손 ・근검한데다 문장을 지켰으며, 초년엔 옛 학문을 후원해 인도한 공적으로 노련한 유자(儒者)를 불러 기용하고, 훌륭한 무리들을 이끌어 선발하니 그 정치는 볼만 하였다. 한탁주(韓侂胄)가 다시 내부로는 간사한 무리들을 모으고, 올바름을 가리켜 거짓으로 삼았으며, 외부로는 강한 이웃[=金나라]을 건드려 회하(淮河) 유역에 해독을 끼쳤다. 그 머리를 상자에 담아 화의를 이루고자 하니, 국체(國體)가 기울어졌다. 사미원(史彌遠)이 권력을 전단함에 이르러선 요행히도 황제는 늙어 사리에 어두워졌는데, 위엄과 복덕을 훔치고 조롱한 것이 황태자의 국통(國統)에까지 미쳤다. 역시 기회를 엿본 사이에 편승해 폐립의 사사로움을 얻었으니,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사미원의 황태자 폐립에 찬동한 공성인렬황후(恭聖仁烈皇后) 양씨(楊氏)
                                     영종(寧宗)의 계후(繼后)로 이종(理宗) 즉위후엔 황태후라 추존되었다.




9월에 황상이 생부(生父) 조희로(趙希瓐)를 영왕(榮王)으로 추봉하고, 생모(生母) 전씨(全氏)를 국부인(國夫人)으로 삼았으며, 아우 조여예(趙與芮)가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종(理宗) 보경(寶慶) 원년(1225) 봄 정월 경오일, 호주 사람 반임(潘壬)과 종형 반보(潘甫), 종제 반병(潘丙)은 사미원이 폐립한 것을 불평했는데, 반보를 파견해 이전(李全)에게 제왕(濟王) 조횡을 옹립하겠다는 뜻을 은밀히 알렸다. 이전은 가만히 앉아 성패(成敗)를 이루고자 겉으로는 약속한 시일에 병사를 진격시켜 호응하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도와줄 뜻이 없었다. 반임 등은 이전의 말을 믿고, 마침내 그 무리들을 나누어 기다리게 하였다. 약속한 시일이 되었음에도 이전의 병사가 당도하지 않자, 반임 등은 거사가 누설되는걸 염려해 부하들이 소금을 파는 도적떼 1천여명을 모집하고, 이전의 군대와 결속한 것처럼 꾸미면서 산동(山東)으로부터 왔다며 배짱좋게 말하고선 밤중에 호주성(湖州城)으로 들어가 제왕을 찾았다. 제왕은 변란을 듣고 우물속에 숨었지만, 반임 등이 찾아내 관아에 이르러 옹립하여 제왕의 몸에 황포(黃袍)를 씌웠다.

제왕이 흐느끼며 따르려하지 않자, 반임 등이 강권했다. 제왕은 부득이 그들과 약조하기를, '너희들은 태후(太后)와 관가(官家)를 해치지 않을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무리들이 허락하자 마침내 군수품 창고를 열어 금백(金帛)과 회자(會子, 지폐)로 군사들을 대접해주고, 지주(知州) 사주경(謝周卿)이 관속(官屬)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축하했다. 임자일, 거짓으로 이전의 방(榜)을 성문에 걸어놓고, 사미원이 폐립한 죄를 헤아리면서 또한 이르길 '[이전이] 지금 정예병사 20만명을 거느려 수륙으로 나란히 진격할 것이다'라고 떠벌리자 사람들이 모두 날뛰었다. 이날 아침, 날이 밝아 살펴보니 모두가 태호(太湖)의 어부와 순찰병들 뿐이었다. 제왕은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걸 눈치채고, 왕원춘(王元春)을 파견해 조정에 고발하는 한편, 고을의 병사들을 데리고 반임을 토벌했다. 반임은 성명(姓名)을 바꾸어 초주(楚州)로 달아났고, 반보와 반병은 모두 죽었다. 왕원춘이 임안(臨安)에 당도하자, 사미원은 몹시 두려워하면서 급히 전사장(殿司將) 팽탁(彭杔)을 불러 군사를 거느리고 호주로 달려가 사변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다.

반임이 초주에 이르러 장차 회하를 건너고자 했지만, 장교 명량(明亮)에게 붙잡혀 임안으로 호송되어 참수당했다. 사미원은 조횡을 꺼려해 조횡이 발병했다는 말을 꾸미고선 문객 여천석(余天錫)으로 하여금 의원(醫員)을 데리고 호주로 들어가 감시케 했다. 여천석이 호주에 이르러 성지(聖旨)로 초유하고, 조횡을 핍박해 관아에서 목을 매버린 다음, 병사(病死)했다며 소문을 흘렸다. 조서로 거듭 조횡의 왕작(王爵)을 삭탈해 파릉군공(巴陵郡公)으로 삼았다가 또다시 강등시켜 현공(縣公)으로 추봉했다. 호주(湖州)를 안길주(安吉州)로 개칭(改稱)했다. 기거랑(起居郎) 위료옹(魏了翁)과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 홍자기(洪咨夔)가 서로 잇달아 조횡의 원통함을 간언했다. 예부시랑(禮部侍郎) 겸 직학사원(直學士院) 진덕수(眞德秀)가 조정에 들어와 황상을 배알하는데 상주하여 이르기를...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은 우주의 대들보이자, 백성을 안정시킬 초석(礎石)입니다. 진(晋, 司馬氏)나라는 삼강을 버림으로써 유총(劉聰)과 석륵(石勒)의 변란이 일어났으며, 당(唐)나라 또한 삼강을 버림으로써 안록산(安祿山)의 재난이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송조(宋朝)는 나라를 세우면서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삼고, 명분(名分)을 바른것으로 앞세웠습니다. 폐하께서는 처음으로 대보(大寶, 옥새)를 받으셨으나, 불행히도 인륜의 변고에 처해 다하지 못한 채 남아있으며, 사방으로 소문이 확산되면서 손실이 가볍지 않습니다. 삽천(霅川, 湖州)의 변고는 제왕(濟王)의 본뜻이 아니었고, 그보다 앞서 변란을 피해 숨었던 전적이 있는데다, 토벌을 모의해 사로잡았다는 후문으로 본말(本末)은 정상적이었다고 명백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조서로 유사(有司)가 토론하여 옹희(雍熙)연간의 진왕(秦王, 趙廷美)을 추봉해 허물에도 개의치않고 고아를 구제했던 고사(故事)를 참작, 실행하십시오. 제왕에겐 비록 자식이 없었지만, 멸망당한 것을 일으키고 단절된 계보를 이어주는 것은 폐하께서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황상이 '조정에선 제왕을 대우한 것이 또한 지극했다'라고 말하자, 진덕수가 반론하기를...



"만약에 이 일의 논의를 최선을 다해 처리한다면, 신(臣)은 감히 그렇게하지 못할 것입니다. 순(舜) 임금이 상(象)을 처우한 것을 보건대, 폐하께선 순 임금의 명철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주(人主)는 오로지 2세(二帝)와 3왕(三王)을 스승으로 삼지만, 진한(秦漢) 이하는 인군(人君)의 거동이 모두 이치에 맞지않아 법률로 삼기 어렵습니다."



황상이 '역시 이것도 일시(一時)에 급한 것에 불과한가?'라고 답하자, 진덕수가 이르기를...



"이는 과거의 허물을 드러낸 것입니다. 생각컨대, 폐하께선 이 과실이 있다는걸 숙지하시어 강학(講學)을 늘리고, 덕(德)을 쌓아 예전의 허물을 속죄(贖罪)하면서 인심(人心)을 수습하셔야 합니다."



5월에 등약수(鄧若水)가 봉사(封事, 上疏)를 올려 말했다.



"대의(大義)를 실행한 연후에 커다란 비방을 그치게 할 수 있고, 대권(大權)을 거둔 연후에 대위(大位)가 안정될 수 있으며, 간사한 자를 내쳐버린 연후에 커다란 재난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영종황제께서 붕어하시어 제왕(濟王)이 의당 대위를 계승해야할 사람이었음에도, 선제(先帝)께 폐출(廢黜)을 듣지 못했고, 천하에 과실을 듣지 못했습니다. 사미원은 제왕의 옹립을 불리하게 여겨 밤중에 선제의 명령을 거역해 제왕을 물리쳐 쫓아냈으며, 황손(皇孫)마저 살해하고 폐하를 맞아들였습니다. 반년이 못되어 제왕은 마침내 불행하게도 호주에서 죽었습니다. <춘추(春秋)>의 법을 가늠하건대, '시해하지 말라, 찬탈하지 말라, 강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패역함의 첫째로 천하 모두가 사미원에게 죄를 돌리고 있지만, 폐하께 감히 잘못을 돌리진 못하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천하가 모두 창졸지간에 폐하께서 뜻을 얻지 못하셨다는걸 알지만, 역시 폐하께선 필시 이 마음이 없었음을 양해하며, 역시 폐하께선 반드시 요사스런 기운을 청소함으로써 선제와 제왕 부자의 철천지원을 씻어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해를 넘기어 임금의 강직함을 결정하지 않는다면, 위엄은 단절되어 실행되지 못할 것이며, 천하의 인망을 크게 위로함도 없어질 것입니다. 과거엔 폐하를 [그 존재가] 필시 없었던 것으로 믿었는데, 지금 그 의혹이 남아있습니다. 과거엔 폐하를 모르는 사람으로 믿었는데, 지금 그 의혹이 알려졌습니다. 폐하께선 어찌하여 해[日]와 하늘[天]을 청명하게 하는걸 인내하시어 성체에 이 오욕을 받으십니까? 또한, 어찌하여 천하에 마음의 밝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천고(千古)에 내세울 말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계책을 세우신다면 태백(太伯)의 지극한 덕(德)을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백이(伯夷)의 맑은 명성과 계자(季子)의 높은 절개로 나중에 폐하의 본심을 천하에 밝히십시오. 이 신하가 소위 대의(大義)를 실행해야 커다란 비방을 그치게 만든다 했으니, 계책의 으뜸입니다. 폐립한 사이에 맞아 위엄은 천하를 진동시켰고, 이미 [황제를] 옹립했으나 한쪽 눈으로 인주(人主)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 강신(强臣, 史彌遠)은 은혜를 끼고 황상을 능멸했으며, 소인(小人)은 강대함에 기대어 더할 나위없이 높아졌습니다.

오랫동안 내외(內外)가 서로 일체화되어 윗사람을 묵묵히 침묵시켜 그 소행을 용서받도록 만드니, 날마다 위축되고 달마다 삭감되는데도 신하들은 대부분 차마 말하질 못합니다. 위엄과 권세는 단번에 떠나갔고, 임금은 비록 보위를 굳히려 함에도, 보신(保身)하면서 가히 얻지를 못합니다. 선증(宣繒)은 사미원의 폐부(肺腑)이자, 왕유(王愈)는 그의 이목(耳目)입니다. 성장(盛章)과 이지효(李知孝)는 주구(走狗)이며, 풍시(馮榯)는 호위병입니다. 사미원이 모의해 실행하려는건 누군가를 해치려는 것이며, 이 몇몇 사람들은 서로가 모의하니 어찌 일찍이 폐하의 뜻을 실행하는게 그 사이에 있겠습니까? 신(臣)이 생각하길 이 몇몇 흉악한 자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폐하께선 비방을 그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보위를 반드시 안정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선 어째서 오랫동안 꺼려하며 하지 않으십니까? 이 신하가 대권을 거두어야 대위가 안정될 수 있다고 일렀으니, 계책의 둘째입니다. 차례로 하지 않고 또 한가지가 있는데, 간사한 자를 내쳐버린 연후에 커다란 재난을 방지할 수 있다 했습니다.

이전(李全)은 일개 유민(流民)에 불과하여 우리한테 빌붙어 밥을 얻어먹고, 병사는 더욱 늘어나지 않으며, 토지는 확장되지 않아 기세가 특별히 강성하지 않습니다. 가섭(賈涉)을 장수로 삼았는데 용인(庸人)에 불과함에도, 이전이 감히 망동하지 못하는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름이 바르고, 말이 공순하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면서부터 아집이 강해진게 무엇이겠습니까? 저들이 그 무리가 말하는 것을 채용하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필시 이르길 '제왕(濟王)은 선제의 아들인데, 사미원이 방자하게 시해했다. 황손(皇孫)은 선황제의 손자인데, 사미원이 참살했다'라고 할겁니다. 그말이 정직하고, 그 기백이 장하여 회하(淮河) 연변의 수십만 군사가 감히 그 예봉을 흘겨보지 못합니다. 비록 지금은 잠시나마 무사하다 말하면서도, 반드시 그들이 하루도 우격(羽檄)으로 급히 날고 달려가지 않는다는걸 알지 못한다면, 제왕을 핑계로 삼음으로써 군주의 측근을 토벌한답시고 악함을 명분으로 삼을 것입니다. 사미원이 개죽음 당하더라도 죄과가 남아 다시 아끼는건 불가한데, 종사(宗社)와 생령에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오늘 사미원의 일당을 주살하신다면, 이전은 그 무리들이 주장하는 바를 채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로 얻지 못하면, 그 다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에 얻지 못하면, 그 아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슬프도다!"



상주문이 올라가자, 사미원이 붓으로 지워버렸다.

가을 7월에 공부상서(工部尚書) 진덕강(陳德剛)과 금부원외랑(金部員外郎) 홍자기(洪咨夔)를 파면시켰다. 제왕의 억울함을 논하면서 사미원의 심기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대리평사(大理評事) 호몽욱(胡夢昱)도 상주(象州, 광서성 상주현)로 도망쳐 숨었다. 호몽옥은 상언하길 제왕의 폐출이 부당하다며, [春秋時代] 진(晋)나라 태자 신생(申生)과 한(漢)나라 여태자(戾太子) 및 진왕(秦王) 조정미(趙廷美)의 고사를 인용해 증거로 삼으면서 몹시 정직하게 말했다. 사미원이 어사(御史) 이지효(李知孝)에게 넌지시 일러서 그를 탄핵했으므로, 호몽욱은 숨어버렸다.

보경 2년(1226) 8월, 파릉군공(巴陵郡公) 조횡을 소급 ・강등해 현공(縣公)으로 삼으니 이지효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단평(端平) 원년(1234), 조서로 제왕 조횡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태상소경(太常少卿) 서교(徐僑)가 일찍이 경연에서 강의하는데 우애(友愛)의 대의(大義)를 개진하자, 황상이 깨달아 관작의 회복을 명하고, 유사(有司)가 묘역(墓域)을 조사해 제사를 지내주었다. 당시, 조횡의 미망인이던 오씨(吳氏)가 자청해 비구니가 되었기에 특별히 혜정법공대사(慧靜法空大師)란 칭호를 내렸으며, 소흥부(紹興府)에서 매달 옷감과 민전(緡錢)을 지급해주도록 하였다.




                                사미원이 소흥(紹興)의 민간에서 맞아들여 옹립시킨 송이종(宋理宗) 조윤(趙昀)
                                석연치않은 출신 배경과 즉위 내막탓에 당대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덧글

  • jaggernaut 2014/08/12 17:45 # 답글

    산험에 의지하더니 사람이 썩습니다. 장강이 아무리 넓다한들 건너려면 건널 수 있는데 말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