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이 안남국왕(安南國王)을 책봉하다 세계사








고종(高宗) 소흥(紹興) 17년(1147), 조서로 문사원(文思院)에서 말[馬] 안장을 제작해 [交趾의] 이천조(李天祚)에게 하사했다. 소흥 21년(1151), 거듭 이천조에게 '숭의회충보신향덕안원승화공신(崇義懷忠保信鄕德安遠承和功臣)'을 더해주었다. 소흥 25년(1155)엔 조서로 안남(安南)의 사신을 회원역(懷遠驛)에 투숙시켰으며, 연회를 베풀어 주면서 특별한 대우를 나타냈다. 이천조를 남평왕(南平王)으로 진봉하고, 습의(襲衣) ・금대(金帶)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소흥 26년(1156), 우사낭중(右司郎中) 왕응신(汪應辰)에게 옥진원(玉津園, 황실 유원지)에서 안남 사자에게 연회를 베풀어주도록 명했다. 8월, 이천조가 이국(李國) 등을 파견해 금색 구슬 ・침수향(沈水香) ・취우(翠羽) ・명마(名馬) ・훈련된 코끼리를 조공했다. 조서로 천조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를 더하고, 식읍(食邑)을 늘렸다.

효종(孝宗) 융흥(隆興) 2년(1164), 천조가 윤자사(尹子思)와 등석엄(鄧碩儼) 등을 파견해 금은(金銀) ・상아 ・향료를 조공했다. 건도(乾道) 6년(1170), 이천조에게 '귀인협공계미준도리정창선공신(歸仁協恭繼美遵度履正彰善功臣)'을 더해주었다. 효종황제가 즉위하면서부터 안남의 조공 사신을 자주 물리쳤다. 건도 9년(1173) 6월, 이천조가 또다시 윤자사와 이방정(李邦正)을 파견해 토산품을 조공했다. 이때 이르러 간곡히 성의를 갖추자, 황상(皇上)은 그 선량한 마음을 받아들여 접견을 허락해 주었으며, 조서로 회원역에서 머물도록 했다. 예부(禮部)에서는 안남의 사절단이 내방(來訪)하지 않은게 오래되었기에 객성(客省)으로 데려와 토속(土俗)과 인물(人物)을 방문시켜 논의하고, 복장 차림새를 그렸는데, 오로지 옛 관례대로 따랐다. 광남서로(廣南西路) 경략안무사 범성대(范成大)가 말했다.



"본사(本司)는 여러 오랑캐들을 경략하고, 안남도 그 관할내에 있습니다. 그 배신(陪臣)들을 어찌 중국의 관리들과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宋徽宗] 정화(政和)연간엔 조공 사신이 입경(入境)하면 모두 조정에 참례할 뿐으로 조정 관리가 그들을 답방하진 않았습니다. 마땅히 옛 제도를 따르는게 예의에 적합해지는 것입니다."



조정에선 그 요청을 따랐다.

순희(淳熙) 원년(1174) 2월 1일, 조서로 안남에서 입공(入貢)한 것이 가상할 만하므로 유사(有司)에 명령해 전례와 고사를 아뢰어 국명(國名) 하사를 토론케 했다. 이천조를 안남국왕(安南國王)으로 진봉하고, 수겸공신(守謙功臣)의 칭호를 더해주었다. 순희 2년(1175), 안남국인(安南國印)을 하사하고, 순희 3년(1176)엔 달력을 하사했다. 이천조가 사망했다. 이듬해, 아들 용한(龍翰)이 왕위를 계승하자, 정해군절도사관찰처치등사(靜海軍節度使觀察處置等使) ・특진(特進) ・검교태위(檢校太尉)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을 제수(除授)하고, 특별히 안남국왕으로 책봉해 식읍을 더해주었다. 더불어 '추성순화공신(推誠順化功臣)'을 하사했는데, 제서(制書)에서 이르길...



"안락한 나라에서 즉위해 봉작(封爵)을 받았고, 이미 [그대가] 세습하였다. 지극히 진실된 임금으로서 명운(命運)을 받았으니, 어찌 차례로 승진시키는걸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는 특별한 예우를 보여준 것이었다.



순희 5년(1178)에 토산품을 조공했으며, 상표(上表)하여 사의(謝意)를 표명했다. 순희 9년(1182), 조서로 안남에서 조공으로 바친 코끼리를 돌려보냈는데, 그 무용함으로 백성들이 시달린데다 다른 물품들 역시 1할만 받아들였다. 순희 16년(1189)엔 이용한에게 거듭 '수의봉국리상회덕공신(守義奉國履常懷德功臣)'을 더해주었다. 광종(光宗)이 즉위하자, 입공하면서 표문을 바쳐 축하를 표명했다. 영종조(寧宗朝)에는 의대(衣帶) ・기폐(器幣)를 하사하고, 거듭 '근탁사충제미근례보절귀인숭(謹度思忠濟美勤禮保節歸仁崇) 겸 협공공신(協恭功臣)' 칭호와 식읍을 더해주었다. 가정(嘉定) 5년(1212), 이용한이 죽었다. 5월에 조서로 광서운판(廣西運判) 진공석(陳孔碩)을 조문 사절로 임명하고, 특별히 시중(侍中)을 더했다. 이전 안남왕의 제도를 따라 아들 호참(昊旵)에게 작위를 계승시켰다.

이용한을 처음에 책봉했던 제도대로 하사했으며, 더불어 추성순화공신을 내렸다. 그후에 감사 표문이 이르지 않자, 드디어 가은(加恩)을 끊어버렸다. 이호참이 사망하고 아들이 없어 여식인 소성(昭聖)이 국사를 주재했는데, 이윽고 그 사위인 진일경(陳日煚)이 가지게 되었다. 이씨(李氏)가 나라를 차지하고, 공온(公蘊)으로부터 호참에 이르기까지 무릇 8대(代)가 전해지다 220여년만에 멸망했다. 이종(理宗) 순우(淳祐) 2년(1242), 조서로 안남국왕 일경에게 본래 하사했던 '효충순화보절공신(效忠順化保節功臣)'에 '守義' 두 글자를 추가했다. 보우(寶祐) 6년(1258), 조서로 안남의 정세가 예측하기 어려우니 변방의 수비를 타일러 엄중하게 했다. 경정(景定) 2년(1261)에 코끼리 2마리를 조공했다. 경정 3년(1262) 6월, 표문으로 세습을 요청하자 조서로 진일경에게 검교태사(檢校太師) ・안남왕을 제수했다.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그 아들 위황(威晃)에겐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 ・관찰처치사(觀察處置使) ・검교태위(檢校太尉) 겸 어사대부(御史大夫) ・상주국(上柱國) ・안남국왕 ・효충순화공신(效忠順化功臣)을 제수하였다. 금대(金帶) ・기폐(器幣) ・안마(鞍馬) 등을 하사했다. 도종(度宗) 함순(咸淳) 5년(1269), 조서로 안남국왕의 부친 진일경과 국왕 진위황에게 식읍을 추가로 더해주었다. 함순 8년(1272), 명당(明堂)의 예식을 마치고 나서 진일경 ・진위황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안마(鞍馬) 등의 물품을 하사했다. ...남도(南渡) 이후[南宋時代]론 삭막(朔漠, 北方)이 통하지 않았으나, 동남(東南)의 구석과 서쪽 변방엔 예전처럼 관개(冠蓋, 사신의 수레)가 이르렀다. 교인(交人, 베트남)들이 [南宋의] 봉작(封爵)과 명령을 멀리서나마 빌렸지만, 마침내 송나라가 멸망하자 단절되버린 것이다.




                             1918년경 촬영된 절강성 소흥현 보산(寶山) 기슭에 소재한 남송 황릉의 사당(祠堂)


                  송효종(宋孝宗)의 영부릉(永阜陵). 봉분과 비석은 문혁때 철거되고, 노송(老松)들은 벌목당했다.
                             

                   사당 입구에서 바라본 이종(理宗)의 영목릉(永穆陵), 묘역은 원초(元初)에 모조리 도굴당했다.


                 항주 서호(西湖)의 북쪽 갈령(葛嶺), 남송말의 권신 가사도(賈似道)가 이곳에 저택을 마련했었다.


                      서호 남안의 뇌봉탑(雷峰塔) 전경. 오월국(吳越國) 말기에 창건했으나, 1924년 도괴되었다. 


                                         남송시대 임안도성도(臨安都城圖, 杭州), 1979년판 중국역사부도집


                    순희(淳熙) 원년(1174), 안남왕(安南王)에 대한 책봉을 최초로 공식 승인해 준 송효종(宋孝宗)
                    남송 제일의 명군으로 그의 치세 27년은 건순지치(乾淳之治) ・소원우(小元祐)라 칭송받았다.    
                    



덧글

  • 바람불어 2014/08/08 20:50 # 답글

    외국 사신을 대접할 때 급과 격식을 따져보고 옛 제도에 근거하고 이런건 참 익숙한 풍경이군요.

    그리고 베트남 국왕에게 주는 시호가 첨 들어보는 명칭이 많은듯. 조선국왕을 책봉할때도 저런 식의 무슨무슨 공신시호를 내려줬는지? 조선국왕에게 공자 돌림 시호를 내려준건 들었습니다만 책봉하면서 베트남식으로 무슨무슨공신 시호를 줬는지 모르겠네요.
  • jaggernaut 2014/08/12 17:49 # 답글

    수호지 송강 사후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했더니 그나마 남쪽에서는 좀 먹혔던데서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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